최근 3개월 간 150여 명의 이란 기독교인 체포


핍박에도 이란 성도들 성장

 


▲일곱 살 딸이 보는 앞에서 체포된 기독교인 아미르 탈레이푸어와 마흐나즈 하라티 부부(좌),
2006년 순교한 고르반도르디 투라니 목사(우) ⓒ한국 순교자의 소리


이란 전역에서 작년 11월부터 150여 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체포되어 기도가 요청된다고 한국 순교자의 소리(VOM)가 최근 밝혔다.

한국 VOM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슬람국가들 중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이란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정부의 핍박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며 "그렇지만 이란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에서는 작년 11월 알보르즈 주 카라즈에서 기독교인 70여 명이, 테헤란 일부 지역과 다마반드에서는 30명이 체포됐다. 12월에는 이란 북부, 북동부, 남서부에서 기독교인들이 더 많이 구금됐다는 보고도 입수됐다.

지난 12월 2일에는 쉬마 잔가네(Shima Zanganeh)와 쇼쿠페 잔가네(Shokoofeh Zanganeh) 두 자매가 아흐바즈 시에 있는 집에서 체포됐다. 순교자의 소리의 현지 동역자는 경찰이 두 자매를 구타하고 심문한 후 세피다르 감옥으로 이송했다고 알려왔다. 가족들은 보석금을 내고 두 자매를 석방시키려고 수차례 시도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12월 6일 이란 북동부에서는 기독교인 부부 아미르 탈레이푸어(Amir Taleipour)와 마흐나즈 하라티(Mahnaz Harati)가 일곱 살 된 딸이 보는 앞에서 체포됐다. 폴리 대표는 "부부는 아직 감금되어 있고 가족들과 연락도 할 수 없다는 보고를 얼마 전 받았다. 부부는 법적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어린 딸은 친척들이 거둬서 돌보고 있다"고 알렸다.

폴리 대표는 "이란 기독교인과 직접 대화해 보면 순교와 박해가 매우 현실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며 "순교한 가족이나 친구, 교인을 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그런 체험을 하면서 영적으로 각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2006년 11월 22일 순교한 고르반도르디 투라니(Ghorbandordi Tourani) 목사와 사모가 그 예다. 2006년 11월 15일 투르크메니스탄 종교 지도자들이 주최한 집회에 초대받은 투라니 목사는 '부모가 무슬림인데 왜 기독교인이 되었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나는 예수님을 부인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슬람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일주일 뒤인 22일, 투라니 목사는 집회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졌다는 한 사람의 전화를 받고, 그날 바로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투라니 목사는 공원에서 전화를 한 사람을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네 살 된 딸에게 줄 장난감을 사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순교했다.

폴리 대표는 "겁에 질린 이웃이 투라니 목사의 사모에게 사고 소식을 전했고, 사모는 쓰러진 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남편 모습을 보았다"며 "그렇지만 사모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여러분! 제 남편이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 기독교 순교자라는 걸 기억하세요!'라고 외쳤다"고 말했다. 그는 "사모님은 고통과 충격이 심했지만 남편의 죽음을 용기 있게 받아들였다"며 "사모님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했는데, 이란에는 이와 비슷한 간증 거리를 가진 기독교인이 많다"고 강조했다.

한국 VOM은 "투라니 목사 같은 순교자를 불쌍히 여기거나, 세계 곳곳에서 박해가 증가하는 현상에 불안해하면 안 된다"며 "대신 순교자 가족들을 적극 지원해서 순교자들이 증언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곳곳의 순교자 가족을 후원하기 원하면 순교자의 소리 웹사이트를 방문(바로가기)하거나 바로 후원(국민 463501-01-243303 예금주 ㈔순교자의 소리)할 수 있다.

한국 VOM(Voice of the Martyrs Korea)은 전 세계 핍박받는 기독교인을 지원하고 있는 비영리 선교단체로 한국기독교재정투명성협회에서 재정 책임성을 인증받았다.


이지희 기자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원본링크]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9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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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지도자 약 500명 “종교 이유로 한 살인·폭력 반대”

 “비무슬림 시민들도 똑같은 권리 누려야”

 


ⓒ아시아뉴스 보도화면 캡쳐


파키스탄 이슬람 종교지도자 약 500명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살인과 폭력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고 영국 크리스천투데이가 15일(현지시간) 아시아뉴스를 인용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주 파키스탄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콘퍼런스 참석자들은 ‘이슬라마바드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에 서명했다.

이번 선언문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행되는 살인은 이슬람의 가르침에 반대된다”, “모든 종교인들은 각자의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파키스탄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비무슬림들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일은 정부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은 또 “비무슬림 시민들도 모든 이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2019년을 ‘파키스탄 내 모든 테러, 극단주의, 종파간 폭력을 근절하는 해’로 선언했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이 선언문은 기독교인 여성인 아시아 비비의 석방을 둘러싸고 종교적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파키스탄 내 소수 종교인들을 지지하는 예상 밖의 목소리”라고 보도했다.

선언문은 “현재 법원에서 다시 검토 중인 아시아 비비의 사건은 반드시 가장 먼저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혜진 기자 eileen@chtoday.co.kr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원본링크]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9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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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해 인도네시아편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특징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로 정치와 문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전 인구의 약 88%(176백만명)이 믿고 있는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는 단일신 종교로 '이슬람'은 뜻은 복종, 순종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슬람을 믿는 남자는 '무스림', 여자의 경우 '무슬리마'라고 부르며 경전은 코란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은 인도네시아의 국교가 아닙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불교, 카톨릭, 힌두교, 이슬람교 모두가 공휴일이고 중동의 엄격한 이슬람과는 규율도 느슨한 것이 사실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슬람이 13세기 기존에 정착해 있던 힌두교와 불교와 함께 무력이 아닌 무역으로 인도네시아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다원적 종교관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 가면 차로 30분 이내의 거리에 이슬람 왕궁, 불교사원, 힌두사원이 인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 개로 나누어진 이슬람 종파 때문입니다. 국민의 약 14.3%를 신도로 하는 [나흐다툴 울라마] 와 국민의 약 13.3%[무함마디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두 단체의 지향점이 다른 것도 문제인데 나흐다툴 울라마의 경우 코란, 하디스 외에도 4개의 법학파의 법률에 비중을 두고 있는 반면 현대주의자인 [무함마디야]는 코란과 하디스 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무슬림 인구의 지역적 분포인데 인도네시아 발리의 경우 비이슬람교인이 94%, 동부 누사떵아라 91%, 북부 술라웨시 54%, 말루꾸 46% 등 지역에 따라 천자만별로 다르다는 것도 이슬람이 국교가 되기 힘든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아쩨 주에서도 이슬람법을 적용하려 했으나 기독교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무산된 경우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생활 속 이슬람 문화가 미치는 영향

생활 속에서 찾아보는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화

 

 

 

<사람들의 성향 >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운명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생활이 종교적입니다. 하루에 5번 신에게 예배하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고, 종교적 행사나 의식에는 제한받기를 싫어합니다. 회교도의 경우 금식월인 라마단과 금요일 정오의 모스크 참배에 꼭 참여하며 이슬람교의 전통으로 술을 마시거나 권하는 일이 드물고 그렇기에 술 마시는 사람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신자이면서도 생활 속에는 여전히 미신과 점 같은 토속적인 샤머니즘도 남아있어 여행, 이사를 하기 전 이슬람력과 자와력을 비교해 좋은 날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음식(Halal food) > 이슬람 음식의 중요한 특징은 돼지고기를 금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코란 53절에서 말하는 먹을 수 없는 육식에 대한 말씀을 따른 것으로, '돼지 같은 놈'은 가장 나쁜 욕에 속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할랄푸드(Halal food)로 따로 분류하고 있으며, 할랄로 분류된 육류로는 소, 염소, , , 오리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무슬림의 손으로 이슬람식 도살 방법에 의해 잡은 것이라야 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마트를 가면 식료품에 Halal이라는 마크가 있어 쉽게 확인이 가능하고 음식점 앞에도 Halal 마크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 친구와 외식을 갈 때도 메뉴마다 Halal 표시가 있어 함께 식사를 하는데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라마단 >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로 1400년 전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 서쪽 동굴에서 알라로부터 코란의 계시를 받은 달입니다. 이 달의 시작을 알리는 초승달이 떠오는 다음 날부터 단식을 시행하는 이슬람의 전통행사이며 이 기간 중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물을 포함해 어떤 음식도 먹어서는 안되고 담배를 피워서도 안됩니다.

라마단이 끝나면 세계 무슬림들의 최대 명절인 이뚤 피뜨리(Idul Fitri, 혹은 르바란)가 시작되며 우리나라 추석처럼 수많은 도시인들이 고향을 찾습니다. 르바란을 전후해서 일주일 동안은 관공서를 포함하여 모든 공공기관이 휴무를 하게 되며 르바란 40일 후에는 이뚤 아드하 꼬르반(Idul Adha Korban)이라는 희생제가 이어지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소와 염소 등을 잡아 음식을 나누는 행사를 말합니다.

 

 

<인도네시아여성>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와 목을 감싸는 스카프를 '질밥(히잡)-Jilbab' 이라고 하는데요 최근 이슬람 최고 의결기구인 '울라마 협의회'는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섹시한 복장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슬림 여성들은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긴 소매와 긴 바지, 치마를 입고 머리에 질밥을 쓰고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10, 20대들이 즐겨 입는다는 질봅(Jilboob) 패션입니다. 인도네시아어 Jilbab과 가슴을 뜻하는 영어 boob의 합성어로 특히 가슴을 강조하는 패션으로 마르푸 아민 부의장은 "질밥을 착용하는 여성은 존중하지만 질밥 착용이 저속해 보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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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와 국제기구

 

아랍경제사회개발기금 經濟社會開發基金

 

Arab Fund for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

 

아랍 여러 나라의 경제사회 개발 증진을 위해 조성된 기금. 1968년 설립하여 72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하였다. 본부는 쿠웨이트에 있고 가맹국은 아랍 21개국이다. 개발계획에 자금을 공급하고 투자를 장려하며 기술 제공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랍 경제의 공공 및 민간자본 투자를 촉진시킨다.

 

아랍공동시장 共同市場

 

Arab Common Market

 

아랍지역의 역내(域內) 관세 철폐를 위한 경제공동체. 아랍경제통합회의 감독 아래에 있다. 1965년에 발족하였으며, 가맹국은 이집트이라크요르단시리아 등 6개국이다.

 

아랍경제통합회의 經濟統合會議

 

Council of Arab Economic Unity

 

아랍지역 경제의 통합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구. 1957년 아랍연맹 산하 아랍 경제회의의 결정으로 설립되었다. 64년 제1차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가맹국은 m0402PLO)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이라크요르단리비아모리타니아시리아 등이 중심이 되어, 자본상품인구의 원활한 국제적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아랍공동시장을 형성하였다.

 

아랍석유수출국기구 石油輸出國機構

 

Organization of Arab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APEC)

 

아랍지역 석유산업의 협력을 위해 1968년 설립된 기구. 임기 1년의 의장직은 각 회원국들이 돌아가며 맡고, 매년 4차례 회의를 개최한다. 알제리바레인이라크쿠웨이트리비아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아랍에미리트 등이 회원국으로 가입하고 있다. 본부는 쿠웨이트에 있다. 국가간의 긴밀한 연대 실현과 회원국들의 이윤 확보를 위해 석유시장의 동행을 유리하게 이끌도록 공동노력을 기울이고, 산업투자에 적합한 환경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무국은 7개 부서로 나뉘어 각각 관리, 재정, 법률, 경제, 정보 및 홍보, 석유 사업, 문서 관리, 개발 및 생산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아랍아프리카경제개발은행 經濟開發銀行

 

Arab Bank for Economic Development in Africa

 

1973년 각국의 개발계획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은행. 알제의 아랍연맹 정상회담에서 결정하였으며 본부는 수단 카르툼에 있다. 아랍 연맹에 속하지 않은 아프리카 동맹(OAU)의 회원국들도 모두 이 은행으로부터 혜택받을 자격이 있다.

 

아랍연합공화국 聯合共和國

 

United Arab Republic(U.A.R.)

 

195821일 선포된 이집트와 시리아의 정치연합. 전국민적인 투표를 거쳐 친서구적인 아랍연맹에 대항하여 성립되었으나, 시리아가 군사쿠데타에 이어 이집트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61928일 해체되었다.

 

아랍제국 諸國

 

Arab Empire

 

셈어족 계통에 속하는 아랍인이 창설한 나라들. 일반적으로 서쪽 모로코에서 동쪽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중동-북아프리카제국󰡑이라고 총칭하는데, 이 나라들은 아라비아반도 남서부를 발생지로 한다. 이 제국의 정치경제 체제는 아주 다양하여 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쿠웨이트 등은 전통적인 왕정을 고수하는 군주제임에 비해, 이집트시리아 등은 토지개혁과 기업국유화 등 사회주의적 제도를 대폭적으로 받아들여 독자적인 혁신노선을 걷고 있다. 이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오직 언어의 공통성과 아랍민족주의 이념이다.

 

아랍통화기금 通貨基金

 

Arab Monetary Fund

 

아랍연맹 21개 회원국의 자본시장 발전, 국제수지불균형 조정 등을 위해 창설된 기금. 1976년 설립되었다. 구체적으로 이 기금은 차용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보증서를 발행하고, 통화기관들에 대해 기술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단기 자금을 대부해주기도 한다. 본부는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 있다.

 

이슬람회의기구 會議機構

 

Organization of Islamic Conference

 

19715월에 창설된 이슬람 기구. 이슬람교를 믿는 44개국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가맹하고 있다. 이슬람교도의 투쟁을 지원하고 이슬람국가의 연대강화,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 등의 분야에서의 협력을 목표로 한다. 국제이슬람통신사이슬람개발은행이슬람결속기금세계이슬람교육센터 등의 사업을 벌였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解放機構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PLO)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1964년에 결성된 팔레스타인의 정치기구. 74년 국제연합(UN)의 상주 업저버 자격을 얻고, 100개국 이상이 대표부나 사무소 설치를 인정하는 등 준국가의 취급을 받고 있다. 82년의 레바논 분쟁으로 본부와 무장조직을 베이루트에서 철수한 후 PLO 의장 아라파트의 주도 아래 온건한 노선을 취하다가 93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예리고에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설립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445만 명으로 추산되는 팔레스타인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통 조직이며, 팔레스타인 해방군(PLA), 입법기관인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 내각에 해당하는 과도 정부 팔레스타인 민족행정기구(PNA), 파타(Fatah) 10여 개의 조직이 소속되어 있다.

 

이슬람원리주의 原理主義

 

Islamic fundamentalism

 

서구적 근대주의를 부정하고 이슬람의 원점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이슬람화 운동. 팔라비왕조를 타도한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철저한 율법 준수, ()외세, 특히 반()서양문명, 반미(反美)를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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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근본주의와 이슬람 국가의 다양성

 

하마스 헤즈볼라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

    

아랍권 무장조직들

 

 

미국 테러 대참사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국제적 테러리스트 조직 알 카에다이외에도, 아랍권에는 많은 급진 이슬람 조직들이 반 미국, 반 이스라엘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테러에서 이들 무장조직이 연합해 공동전선을 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하마스 =80년대 반이스라엘 투쟁을 주도했던 연합단체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Sheik Ahmad Yasin)1987년 말 창설한 원리주의 조직. 이스라엘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병원과 학교 등을 지어주는 등의 활동을 벌여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간의 평화협상을 반대하며, 이스라엘을 중동에서 몰아내고 완전한 이슬람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이 목표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자살 테러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슬람 지하드 =1980년 이란의 지원을 받아 창설된 팔레스타인의 대표적인 무장조직. 본부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있으며, 시리아와 이란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 지하드 역시 이스라엘 멸망과 이슬람 팔레스타인 국가의 창설을 꿈꾸고 있다.

 

헤즈볼라 =‘신의 당이라는 뜻으로, 이란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노선에 영향을 받아 1983년 레바논에 시아파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됐다. 20005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가장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조직원이 3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중동 최대의 테러리스트 조직이지만, 레바논 이외의 지역에서 벌어진 테러사건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란군이 군사훈련과 종교교육, 물자지원 등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 베이루트 미 해병대 사령부 차량폭탄 공격, 1992년 아르헨티나 이스라엘 대사관 폭탄 공격 등 많은 반미 테러를 수행했다.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 =이번 미국 테러를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는 일부 보도가 있었으나, 이를 곧 부인했다. 1969년 조직된 마르크스주의 테러조직으로 1988년 팔레스타인 최초로 조직화된 군사행동을 펼쳐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 거점 공격에 성공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은 물론, 왕정제 폐지 등 중동지역 공산혁명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활동이 미미해 98년 미 국무부의 관찰대상 테러리스트 조직에서 제외됐다.

 

이 밖에 알제리의 이슬람무장그룹(GIA)은 불특정 다수의 외국인을 납치해 목을 자르는 테러행위로 악명을 떨쳤으며, 빈 라덴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집트의 이슬람그룹(IG)1997년 이집트의 대표적 관광지 룩소르에서 58명의 외국인 여행객을 살해했다.

 

이들의 공통된 목표는 친미 정권을 축출하고 이슬람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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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문화적 수용성과 이슬람의 확산

이슬람의 확장과 부흥

 


신원용 / 영산대학교 교수 아프리카문제연구소 소장


1.서론: Africa의 문화적 수용성


식민통치를 주도했던 유럽국가들의 언어는 같은 식민지 국가들이라할 지라도 아프리카에서의 정착 속도는 인도나 베트남, 인도네시아 보다 훨씬 빨라, 대다수의 아프리카국가의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영어사용 아시아국가 또는 불어사용 아시아 국가는 극히 미미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불어권, 또는 영어권 아프리카로 분류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와 나일강 유역 대부분 국가의 경우, 수백만 주민들이 언어영역으로 아랍어권으로 변모하였다. 토착민족어사용을 선호하고, 옹호하는 언어민족주의는 탈식민 이후 근대국가형성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아시아의 국가들에게는 공통적인 현상이었으나 아프리카에서 신기하리만큼 매우 그 세력이 미약하며, 몇 국가에서만이 근대 사회에 적절한 토착어를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을 뿐, 대부분의 사하라이남 국가들은 학교에서 유럽어 사용에 우선순위를 두었었다.


아시아 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확산은 몇 세기가 필요했으나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단 한 세기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중국에서는 마테오리치 이후부터 십수 세기 간 걸쳐 이루어진 기독교의 전파 결과 공식적인 신도의 수는 3500만명인 남아프리카공화국 한 국가에 못미치고 있다. 남부 인도의 기독교 전파는 구전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인 도마에 의한 1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 9억 인구 중 겨우 2000만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단 1-2 세기에 걸친 확산은 인구의 1/3이 기독교화되었다.


이 글의 주제인 아프리카 전체에 걸쳐 무슬람신앙은 1884-1885년 베를린 회의 이후 유럽-기독교 식민통치구조라는 강력한 역사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 신도의 수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어떤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토착종교의 신들을 기리기 위한 개천절과 같은 공휴일이 제정되지 않았고, 기독교적 축제 (특히 크리스마스)나 이슬람 축제 (Idd el Fitr. 등) 등의 수입 축제를 공휴일로 삼고있다. Sem족어 계통의 종교(기독교와 이슬람교)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에서 국가적으로 존중되고 있는 반면, 토착 종교들은 기껏해야 전국적 규모가 아닌 인종집단적인 행사로 이루어 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아프리카인의 독특한 특질 중 하나인 "고도의 문화적 수용성(cultural receptivity)" 에 기인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아프리카의 문화적 수용성, 즉 새로운 문화를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강점과 약점이 각각 존재한다. 즉 타 문화를 배우려는 준비성이 강점이라면, 타문화에 의존하거나 지적으로 모방하려는 위험이 그 약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서면 제 3의 관점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문화적으로 아프리카를 정복한 타 문화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문화적으로 아프리카화 되거나, 아프리카적 수용성을 통하여 그 종교성이 풍부해지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2.이슬람화 과정


7세기 부터 아프리카 일부가 아랍과의 접촉을 통해 이슬람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북부와 나일강 저지대지역의 아프리카의 이슬람화 과정을 설명하는데는 대체로 세 요인을 그 배경으로 들 수 있다:

 

 


1) 아프리카의 문화적 수용성


2) 아랍의 가계 제도와 혼합결혼의 후손을 정의하는 방식


3) 아랍어의 광범위한 사용과 아랍인을 규정하는 언어의 역할


위의 두 요인들을 부연하자면, 7, 8세기의 북부아프리카의 아랍의 정복은 언어를 통한 Arab화와 신앙을 통한 이슬람화 라는 두 과정이 주도했다. 공용어로서의 아랍어의 확산은 북부아프리카의 경우 새로운 셈족어 집단을 창조했고, 이슬람신앙의 확산은 새로운 유일신집단을 만들어 내었다.


이와 같은 북아프리카 대다수 국가들의 아랍화된 과정은 생물학적, 문화적인 두 측면이 있다. 생물학적 과정이란 면은 종족간의 결혼(intermarrige)를 포함하는 것으로 아랍인의 상향성의 가계제도 (upward linage system)에 의해 괄목하게 증대, 선호되었던 측면이 있다. 기본적으로 아이의 아버지가 아랍인인 경우_ 아이는 어머니의 ethnic집단이나 race의 origin에 관계없이 아랍인이 된다. 이 가계 (linage) 제도를 ascending miscegenation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후손은 상위에 존재하는 더 나은 부모의 가계에 편입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가계제도는 미국과는 정반대의 대조를 이룬다. 미국은 백인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의 아이는 descend하여 저급한 인종사회의 일원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런 하향화 miscegenation에서는 아버지가 또는 어머니가 흑인 인지의 별도의 구분이 불필요하며, 혼혈 후손은 자동적으로 사회적인 열성집단으로 천시되기 때문에, 미국의 가계제도는 인종 간 의 벽을 넘을 수 없으며, 또 결혼 자체에 의해 더 나은 신분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한 제도이다.


그러나 북아프리카가 급속히 아랍세계에 편입된 배경에는 미국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가계제도가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아랍의 가계제도는 상당한 인종집단 간의 결합을 허용하고 있으며, 다른 인종집단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도 아버지가 아랍인이라는 전제 하에, 아랍 세계의 합법적인 구성원이라는 상당한 자격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랍세계의 피부색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백인, 예멘의 brown, 금발의 레바논인에서 수단의 흑인 들까지 혼혈에 의한 인종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3.아랍화(Arabization)와 이슬람화(Islamization) : 이집트와 수단의 경우


아랍화와 이슬람화의 사관관계의 연구의 대표적인 경우로 이집트와 수단의 경우를 비교할 수 있다. 7세기 무슬림이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이집트인들은 아랍인들은 아니었다. 아랍인들에 의한 이집트 통치가 확고히 되면서 일차적으로 신앙의 개종으로서의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아랍화는 이슬람화 보다 상당히 느리게 뒤따랐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집트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속도 보다 고대 이집트어와 고대 그리스어 사용을 아랍어로 바꾸는 과정이 훨씬 더 긴 시간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아랍어가 이집트인 대다수의 mother tongue이 된 이후에도 이집트인이 자신을 아랍인이라 부르는데까지 수 세기가 더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는 문화의 정복, 문화적 동화는 정치적 정복 보다 더 많은 기간을 필요로 하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6세기에 기독교화 되었다가 1250년 이집트의 침공으로 북부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이슬람교도와의 혼합결혼이라는 동일한 형태로 점진적으로 이슬람화와 아랍화 과정이 진행된 아랍계 북부 수단 (인구의 75%)과 비이슬람 위주의 남부 수단의 대치적인 상태는 많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남부 수단도 공통된 과정을 통해 아랍화될 수 있을 것인가' 에 주목하고 있다.


이 전망에 대해서도 역시 생물학적 혼합 (남부 수단과 북부 수단의 혼합결혼)과 남부의 기독교 흑인계인 Dinkas족과 Noer 족의 문화적 동화(cultural assimilation)라는 두 힘의 작용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성공적인 경우 남부 수단은 black 아랍인으로 변모할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이 성공의 시나리오는 국가가 내란 상태를 극복한 통일체로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서, 혼합결혼이 증가하여, 북부수단은 그 피부색이 흑인화할 것이고, 남부에서는 문화적 변용과 정복이 강화되어 남부 수단인의 아랍화가 진행될 것이다. 북부의 생물학적 아랍화와 남부의 문화적 아랍화는 서로를 강화시켜 통일된 수단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현재 남부 수단은 이슬람화보다도 아랍화가 더 속도가 빠른 사하라 이남의 유일한 지역으로, 이런 현상은 아랍어의 사용보다는 이슬람신앙의 확산 속도가 훨씬 더 큰 중부 아프리카 지역의 Wolof, Yoruba, Hausa, Somali종족의 경우와는 큰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 언어적 측면에서 남부수단의 급속한 아랍화는 두 가능한 결과를 보일 것으로 전망 할 수 있다.


첫째, 남부 수단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소수인 기독교인인 이집트의 Copts와 유사하게 발전하거나, 둘째, 이슬람 신앙으로의 개종을 통한 아랍화가 진행되어, 북, 남 수단이 진정으로 혼합되어 종국적으로는 그 구분이 없어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아랍어가 지중해로부터 남진하고 있는 동안 스와힐리어도 동아프리카에서 Juba족을 향해 북향하고 있다. Tanzania, Kenya, Uganda와 동 Zaire (현 Rep. of Congo)의 스와힐리언어권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나일에서부터 아랍어가 Juba, Kiswahili 족으로 내려오면서, 남부 수단인들은 아랍화와 스와힐리화 사이에 끼인 격이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종으로 아프리카성(Africanity)와 관련이 이루어질것으로 판단된다. 현실적으로 남부 수단은 모든 수단인이 아랍화된다고 할지라도 가장 흑인성이 강하고, 흑인민족주의 정서가 저변에 남아있기 때문에 인종혼합에 대한 저항 또한 꽤 강한 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랍화와 이슬람화 사이의 시간 거리는 꽤 길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4.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아랍과의 관계에 의한 이슬람화


이 분야에 있어서 양 지역의 접촉은 과거 주로 이슬람의 전파와 연관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아프리카에서의 이슬람의 전파는 군사적 정복과 이슬람 상인, 선교사 등에 의한 평화적 개종에 의해서였다. 최초 서부나 중앙 수단의 주요 상업도시에 북아프리카의 상인에 의해 코란 학교와 사원을 세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이슬람을 포교했다. 이 지역에서 엘리트층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면, 이들을 이용해 남쪽으로 포교를 확대하였다. 이러한 이슬람의 아프리카화 과정은 8-18 세기 사이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8c 들어 지하드를 통해 이웃 국가를 개혁시키려는 전투적인 국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Sokota와 Macina의 Fulani국가들, El-haj Omar에 의한 Tukolor제국, Samori Toure에 의한 기니지역의 Manding 국 등이 모두 서부 및 중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이 뿌리내리는데 기여했다.


서구에 의한 식민통치기간 동안 이슬람의 영향력은 대륙에서 확대되기 시작하는데, 초기 이슬람 상인들은 노예무역에 개입하기도 하였고, 식민정부에 협조하는 중요한 파트너로 그 정치적, 상업적 거점을 아프리카 사회에서 확보하기 시작했다. 주요 이슬람지도자들이 유럽식민종주국의 식민지 통치에 매우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기 때문이었으며 이슬람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그 결과 1960년 경에는 대륙의 1/3이 무슬렘신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무슬렘은 유럽의 제국주의 팽창에 저항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북부 수단의 경우 영국의 전위 역할을 맡은 이집트로부터 이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슬람의 반유럽제국주의 저항정신은 아프리카무슬렘에게 생생히 각인되어 있기도 한다.


아프리카국가들의 독립은 또 다른 확장과 이슬람세력의 확대를 가져 왔으나, 1950, 1960년대에 들어서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등장으로 정체기에 접어든다. 그후 Nasser를 지도자로 하는 이집트의 노력으로 사하라이남에서의 이슬람센터와 종교지도자, 유학생의 Cairo 수학 등을 통해 관계가 재 강화되었다. 그 결과 1970년 들어와 1969년 가다피의 Lybia 정권획득 이후의 활동,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원 등을 통해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다. 1970년과 1980년 들어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을 내세운 아프리카 1세대 정치인들의 퇴장과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점증한 반 서구주의는 양 지역 지도자의 교류를 증진시켰고, 또 경제난을 원조로 해결해보려는 아프리카지도자의 상황과 맞물려 이슬람의 확대노력이 증진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 전파를 위한 다음의 유형의 수단이 동원되었다:


1) 아랍국가에 의한 사원, 학교, 센터 건립비용무상지원


2) 아랍교육자들의 파견, 학자들의 아랍권 유학 및 연구지원, Niger와 Uganda의 무슬림대학 건립 및 아프리카 대학에 아랍 및 이슬람 연구 비용지원


3) 1974년 Islamic development Bank 창립을 통해 아프리카의 무슬렘 사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


4) 아프리카종교지도자의 아랍방문 주선을 통한 유대 강화


5) 아프리카인을 위한 대중매체와 출판


6) 아프리카지도자의 이슬람 개종을 위한 노력 (Gabon의 Omar Bongo, 1973,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Bokassa, 1976, 1980의 Benin의 Kerekou)을 통한 이슬림포교 기회확대


이러한 노력으로 1970년 말 아프리카의 muslem 인구는 2억을 상회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잇다. 교통수단의 발달 및 이슬람의식의 성장, 아프리카정부의 지원 등에 의해 1990년 대 초 아프리카인의 Mecca순례는 매년 250,000명에 이르고 있다.


명백하게 아랍어와 이슬람문화를 포함한 아랍-아프리카 관계의 중요성은 그 정도를 더하고 있으며, 이슬람문제는 현대 아프리카 사회의 중심 이슈 중 하나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프리카 국내정치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이슬람교의 강력한 진출은 예를 들어 나이지리아에서의 북부이슬람세력에 대항하는 남부기독교도의 충돌이 보여주듯, 아프리카 전체에서(특히 어느 한편이 대다수인 국가에서) 불안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랍세계와 아프리카의 두 지역에서의 밀접한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경험은 서로 애증이 교차하고 있다. 사하라이남에 대한 아랍의 수세기 간의 침투는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형성된 부분도 있고, 동시에 문화적, 종교적 합치는 이슬람 전통을 아프리카의 불가피한 부분이 되어 잇다. 향후 양 지역은 종교적 관계, 경제적 요인에 의해 이합과 집산이 이루어 질 것이고, 점증하는 이슬람의 동부아프리카 진출경향과 대륙에서의 기독교세력과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어 이질성과 동질성의 정도는 더 증대될 것이다. 중첩과 분리의 관계가 지속될 전망이다.

 

5.결어: 아프리카대륙의 이슬람화 가능성?


이슬람과 관련하여, 유럽이 기독교화된 것처럼, 아프리카도 이슬람 신자가 다수인 최초의 대륙이 될 것으로 전망이 늘어나고 잇다.


이는 이슬람의 확장(expansion)과 부흥(revival)이라는 두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확장은 종교의 전파와 개종자의 증가를 통해 지리적 확장과 신도수의 증가를 통해 새로운 세계의 정복을 뜻하고, 부흥은 이미 개종한 신도의 신앙의 거듭남(rebirth)을 통한 근본주의로의 회귀를 뜻한다.


기존 중동지역에서는 더 이상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부흥의 경향, 즉 일부 근본주의로의 회기 현상이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아랍아프리카외의 지역에서는 확장의 속도가 증가하고 잇다. 어떤 아랍 국가에서 보다 많은 무슬렘인구가 나이지리아에 존재하고 있고, 이티오피아의 무슬렘의 수는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을 넘어섰다. 희망봉 지역에서 까지 이슬람 신앙은 확대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인구 대국인 나이지리아 60%, Somalia 100%, Senegal 93%, Niger 90%. Mali 90%, Gambia 85%, Guini 75%, Mauritania 99%, Chad 50%, Burkina Faso 50% 등이 무슬렘이 인구의 50% 비율을 상회하는 사하라 이남의 국가들이다. 통계에 따른 차이는 있으나 사하라 이남에서도 이미 최소 1/3 정도가 무슬렘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종교성은 기본적으로 풍부한 다양성(diversity)를 특색하고 잇다. 이는 문자적 전통과 구전 전통의 대립으로도 설명할 수 있기도 하다. 경전 또는 성서 형태의 문자적 전통은 세속화 과정에 제약 요소이기에, 절대적인 코란의 힘은 모슬렘 세계의 근대화의 저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구전전통은 다른 종교적 영향에 대해 개방적인 경향을 보이며, 이 점에서 아프리카의 전통종교는 ecumenical적이다. 아프리카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전통종교와의 결합현상을 혼합주의(syncretism)라 부른다. 그러나 이 의미는 아프리카인이 동시에 기독교나 이슬람교 신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이슬람교나 기독교가 전통적인 구전 message와 결합하는 형태를 갖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주요 3대 종교(토착, 기독교, 이슬람) 중 토착 종교가 관용성이 가장 크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전래되기 이전 아프리카에서의 종교전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토착종교는 기독교나 이슬람 신앙처럼, 전 인류의 개종을 추구하는 universalist(보편주의)도 아니고 다른 신앙에 극렬히 투쟁하는 경쟁적 (competitive)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communal)이다. 예를 들어 Yoruba와 Ibo족을 서로를 자신의 신앙으로 개종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런 관용성이 아프리카에서의 타종교의 수용이 대규모로 가능했고, 또 이런 문화적 경향이 아프리카 내에서의 종교적 경쟁의식을 완화하게하거나 갈등을 약화시켰다.


Uganda를 예로 들자면 최초의 행정수반이었던 Milton Obore는 개신교도이기는 했지만, 무슬렘, 천주교, 개신교로 구성된 전통적인 확대가족이 있었고, 그 후계자인 이디 아민은 모슬렘이 지만 역시 다양한 종교를 가진 가족이 있엇고, 자신의 한 아들을 개신교목사로 키우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는 이제 Afro-Asian 종교로 대부분의 무슬렘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존재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전 세계의 1/4가 모슬렘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급속히 확장되는 모슬렘인구는 아프리카에서 그 속도가 가장 빠르다.


물론 여기에는 모슬렘여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평균 6명을 출산하고, 더욱 자연출생율이 가장 높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도 모슬렘은 더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냐의 무슬렘 가정의 평균 자녀수는 8.4명으로 개신교의 7.0명, 카톨릭의 7.1명으로 가장 높다.


또한 무슬림사회의 국내, 국제적 solidarity 현상, 반 자본주의-서구주의 sentiment, 구식민종주국과 연계된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생활 양식으로서의 이슬람의 건전함, 아랍세계의 지원 등이 부수적으로 이슬람인구를 아프리카에서 증가시키고 있다. 21세기에는 아프리카는 타 종교 보다도 무슬렘 신앙이 다수인 대륙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아프리카의 관용성과 문화적 수용성이 갈등의 요소에 순기능적으로 계속 작용할 것인지 아니면, 이슬람화에 따른 근본주의적 부흥에 의해 전투적으로 변모하여 해당 국가와 지역의 긴장을 높이게 될지 지켜볼 문제이다.

 


참고문헌Brawnann, Rene. African Islam. Washington: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83

Brenner, Louis, ed. Muslim Identity and Social change in Sub-Saharan Africa.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3.

Connah, Graham African Civilization.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Davidson, Basil. Africa in History. New York: Collier Books, 1979

Martin, Phyllis & O'Meara Patrick. ed. Africa. London: Indiana University Press

Oliver, Roland & Atmore, Anthony. Africa Since 1800.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hilip Curtin, ed. Africa Remembered: Narratives by West Africans from the Era of Slave Trade. Madison: University of Winsconsin Press, 1967.

 

 


각 주1) 이 논문은 2000년 12월 5일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연구소 제7회 초청강연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그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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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중동지역 베두윈(유목민)의 생활과 문화

 


우리가 중동하면 떠올리는 친근한 풍경은 양이나 염소를 몰며 사막을 오가는 유목민 무리의 모습이다. 현대에 들어와 그 비율이 감소하고는 있지만 유목은 전통적으로 중동 지역의 대표적인 삶의 방식이며 이 지역 문화의 모태였다. 건조한 사막 기후라는 자연 환경의 여건상 중동인들은 옛부터 유목을 생업의 하나로 삼아 왔으며 이에 따라 오늘날 그들, 특히 아랍인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은 유목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동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관찰은 국제정치·경제 등 각 방면에서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 지역 주민들의 의식구조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세기 동안 중동 사회는 세가지 유형의 공동체 즉 베두윈, 정착 농경민, 도시 주민으로 구분되어 왔다. 현재 이곳 주민의 50%가 농업에 종사하고, 45% 이상이 도시거주자이며 5% 미만이 유목민이다. 이들 세 부류의 생활방식에서 특히 베두윈이 도시 문명의 영향에 동화되지 않은 채 자체의 전통적인 생활형태를 지속해 왔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유목민들 중에는 매년 농업 종사자로 정착하거나 도시 직업을 구하는 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목민들이 정착민으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성장과 서구 기술의 영향이 크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필연적인 삶의 방식에 따라 베두윈의 물질 문화는 빈약하다. 이들의 주요 재산은 자신이 기르는 동물과 거처인 천막에 불과하다. 천막 기둥의 수가 보여주는 천막의 크기는 그 소유자의 부와 사회적 지위의 표시가 된다. 그들은 빈번한 이동으로 인해 적은 양의 생활 필수품만을 갖고 다닌다. 의복 또한 거친 재료로 된 긴 겉옷이 주 복장이며 겨울에는 낙타털로 짠 천으로 만들어진 외투가 고작이다. 양이나 염소, 낙타, 말을 기르고 그 부산물인 우유, 버터, 치즈 및 양모를 팔아 생계를 해결한다. 특히 낙타는 젖과 고기, 의복과 천막 재료를 제공하고 운송 수단으로 매우 중요하다.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수자원이 개발되기 이전에 사막은 유목민에게 근근히 생계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부족만이 있었으며 보다 큰 규모의 정치 구조는 존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대규모 사회는 행정·군사 및 비생산적인 부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잉여 식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부족이 감당하는 주요 임무는 구성원 개개인을 타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부족은 혈족 간의 단결을 강조하고 집단 유대와 상호 책임을 최상의 가치로 내세움으로써 유지되었다. 이러한 소규모 사회에서는 집단 의식이 우선시되며 개인은 집단의 도덕률을 준수하며 살아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개인은 집단의 규율을 따르며 자신의 이익을 집단의 이익과 일치시킴으로써 집단이 개별 성원에게 제공하는 지원에 보답해야 했다. 따라서 유목 집단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보다는 소속 부족에 대한 충성이 더욱 중요시 된다. 부족민은 자신들만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금 납부나 의회법률의 인정, 군복무, 국경 준수를 거부하기도 한다.

 

오늘날 아랍세계에서 시골과 도시의 많은 주민들은 자신들의 근본이 베두윈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점은 많은 정착민들이 베두윈 기풍을 행동양식의 이상적인 귀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서구화에 탐닉한 일부 아랍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베두윈을 과거의 영광된 아랍 영웅시대의 계승자이며 살아있는 증인으로 우러러 보고 있다. 다마스커스를 비롯한 도시의 명문가에서는 자식을 한두해 동안 사막 유목민에게 보내 예절과 가치관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아랍 베두윈이 전통적으로 중시하는 대표적인 도덕적 가치는 환대에서 나타나는 관대함이다. 손님에 대한 환대는 가난한 베두윈들도 행하는 숭고한 덕목으로 오늘날에도 아랍 도시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인상적인 관습이다. 극진한 환대를 베푼 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위신을 높인다는 것 외에 잠재적인 고객과, 부족 분쟁시의 정치적 협력자를 확보하게 된다. 결국 환대는 궁극적으로 베두윈 최상의 목표인 집단 강화를 위해 활용된다. 환대의 관습은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 생겨났다. 사막에서 집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 생명을 보전할 수가 없다. 사막이 그를 죽이든지 그와 마주치는 사람들 무리가 그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길잃은 개인을 맞아주고 보호하는 것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일이 되었다. 환대의 규율에 따라 도망자도 손님이 되며 주인은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그를 지켜주어야 한다. 이러한 환대의 관습은 오늘날 촌락과 도시 생활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즉 결혼, 장례, 할례, 건물 완공, 라마단(이슬람교 금식의 달) 기간 등의 행사를 맞이해 주인은 주민들,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물질을 베푸는 관대함의 관습은 전통적인 아랍사회에서 빈부 격차가 존재하며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아랍인들에게 남아있는 베두윈 문화의 잔재 중 대표적인 것은 그들의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에 가까운 기피의 태도이다. 오늘날까지 아랍 유목민들과 일반인들 중에는 농사나 기능직에 종사하는 것을 불명예스런 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편안한 생활을 선호하며 근육을 사용하지 않는 일을 좋아하는 아랍인들의 성향은 아랍문화의 서구화 과정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집트 사회에서 육체노동의 낮은 위치는 계급 의식을 조장하고 협동과 대화, 발전의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제기된 바도 있다. ‘인간은 이마의 땀을 흘리고서야 빵을 먹을 것’이라는, 성경 창세기에 반영된 중동 지역의 신화는 아랍 베두윈들의 노동관을 보여준다. 곧 그들에게 있어 노동은 신이 인간에 내린 징벌과 저주의 결과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기간 중 중동지역의 행위 규범에서 이상적인 것은 가능한 한 육체노동을 피하고, 요행이나 상업 활동에 의해 부를 얻는 것이었다. 중세 아랍의 생활과 가치관, 신앙 등을 반영한 아랍의 고전 『천일야화』에는 힘든 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닥치는 최악의 운명임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산재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베두윈의 자유로운 삶과 용맹, 남성다움, 명예를 중시하는 그들의 가치관을 강조하며 그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아랍 베두윈의 사회적 관습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지켰던 관습과 매우 유사하고 베두윈의 언어는 가장 순수한 아랍어라는 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베두윈 사회가 위축되고 그 낭만적인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겠지만 베두윈 문화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순수와 이상의 상징으로서 이 지역 주민들의 삶 속에서 계속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김능우·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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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젊은 여성 정치가 Hannah Yeoh

 

 

 

근래에 말레이시안 친구들의 페이스북 여기저기에서 바주쿠롱을 입은 젊은 말레이시안 중국계 여자와 찍은 사진을 많이 봤다.

중국계가 바주쿠롱을 일상복으로 입는 일이 거의 드물고, 더군다나 공적인 자리에서 입는다면?

강연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은 것 같은데, 도대체 이 젊은 차이니즈는 누구지?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바로 Hannah Yeoh 라는 진보성향의 젊은 정치가다. 

먼저 그녀에게 인상적인 것은, 인도계 남성과 결혼해서 두 딸이 있고 원래 그들이 결혼을 하기 전에 남편은 목사를 하려고 했고
한나여는 목사의 아내로 살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정치계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외조하기에 이른다. 일반적인 아시아적 가치관으로서는 다소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 수 있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어떠하든 각 역할 속에서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부부의 생각이다.

아무래도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이유는, 그녀가 Selangor State Assembly의 첫번째 여성 speaker이자 가장 젊은 speaker이기 때문이다.

 Becoming HANNAH를 읽고 인상적인 것은

결혼 이후, 그녀도 정치 배경이 없이 정치계에 입문하는 것이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깨달은 것.

"It's important to be yourself."

사람들이 내 자신이 비로소 나 스스로의 모습이 되었을 때, 그들도 당신을 신뢰한다고...

진정한 내 모습 그대로 있는 것, 나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것들의 자신의 커리어 속에서 다뤄가는 것.

그리고 항상 배우려는 정신을 갖고, 사람들에게 귀기울이는 겸손을 지니는 것..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나 자신이 될 때, 타인도 나를 신뢰해준다는 말이 꽤 인상적이다.

부정부패와 인종 차별로 말 많은 말레이시아 정치계.

사실 말레이시안들로부터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얘기를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말레이시안 차이니즈들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그녀의 강의를 듣고, RIGHT NATION으로 발전하는데 함께하고싶다고 하는 젊은이들-

말레이시아, 이 나라를 사랑하도록 도전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젊은이들-

이렇게 후원해 주는 젊은이들이 있었기에 여한나는 도전했을지도...


한나여(Hannah Yeoh)의원의 책, “기독교 신앙 전파 의도”로 고소당해

좀더 소개하자면

"Hannah Yeoh"는 쿠알라룸푸르의 최연소 여성 국회의원입니다.
 29살 때 첫 의원으로 셀랑오 주(Selangor)에서 야당인 “민주행동당”(DAP) 하원의원으로 당선 되었고(2008),
재선 의원 입니다.(2013)

한나여는 3년 전 "Becoming Hannah"(2014)란 자신의 정치적 삶, 여정을 저술했습니다.

그런데 올해(2017) 들어 말레이 무슬림 교수, “우타라 대학”(Universiti Utara)의 강사 카마룰 유소프 박사가(Dr Kamarul Yusoff)
이 책을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불순한 책"이라고 고소하여,
정치가, 지도자들이 성토하고 있어 말레이시아 정치 사회는 큰 관심과 논란이 되고 있으며,
국제 사회로 여론이 확산되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즉, "성경"을 인용하여 "말레이시아를 기독교화"시키려는 의도란 불경 모독죄로 고소한고 있습니다.
 
 정치지도자가 성토하는 유튜브 동영상보기 [보기]
 한나여가 이야기 하는 유튜브 동영상 보기 [ 보기]  [보기2]

 

한나여는 청소년과 유학시절 교회의 성경공부 셀그릅에서
그녀의 인생관을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써 헌신한 분입니다.
이슬람, 무슬림 예기는 하나도 없고, 꾸란을 인용치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고백과 실천의 정치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헌법은 자신의 신앙을 선택하고 실천할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한나여" 하원의원을 위해 기도하시며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라마단 기간에 신경이 날카러워지는 때

한나여와 말레이시아 정치사회에 기독교인들이 진리 정의에 굳게 서도록 기도합시다.

최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기독교인 시장이 비 무슬림으로써 꾸란을 인용했다고
무슬림 정치인들이 불경죄로 고소하고 무슬림들을 선동하여 2년 투옥 선고 받았으며
시장선거에서 낙선 되고 영어의 몸이 되었습니다.
한나여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우려도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2018년 총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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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지도자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시작된 쟈스민(튀니지국화) 시민 혁명에 의해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이 1월 14일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고, 1981년부터 장기집권을 했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분노하는 군중들에 의해 하야를 했다(2.11). 쿠데타(1969)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은 권좌를 수호하기 위해 다국적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국민의 인권을 짓밟고, 고귀한 생명을 학살하고 있다. 그는 권력에 중독이 된 사람이다. 중독은 나쁜 습관을 자신의 마음대로 멈출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중독자는 잘못인줄 알면서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쁨보다 외부에서 오는 거짓된 괘락을 추구하게 된다. 카다피는 에고라는 거짓된 자아를 마음의 권좌에서 몰아내고 진정한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때에 평화를 추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

쟈스민의 영향을 받은 예멘과 시리아의 시위대는 독재자에게 폭행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형제와 이웃의 주검을 보면서도 겁 없이 중동의 시민 혁명에 불을 붙이고 있다. 오랜 독재 정치로 인해 파생된 부정부패, 고물가 그리고 고실업과 같은 민생 문제들이 시민의 분노로 표출된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정부와 대화를 원했다. 지도자와 국민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는 대화가 있는 사회다. 대화가 있는 사회는 개방된 사회이며,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사회다. 대화가 있는 사회는 작은 불빛을 모아 큰 불빛을 만들어 낸다. 대화는 분산되어 있는 힘과 지혜를 모으고 그 사회를 윤택하게 만드는 활력소가 된다. 그런 사회에서 지배자가 지도자로 변하게 된다. 지배자와 지도자는 엄연히 다르다. 지배자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인권과 생명을 모질게 짓밟지만, 지도자는 추종하는 자를 인정하고, 세워주며, 함께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을 도모하는 자다.

 

고대 이집트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란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지배자였다.

그는 이집트의 모든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한(행7:22) 사람이 되었고,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나이 40이 되었을 때에 자기 민족을 돌아볼 마음이 있어서 히브리 민족이 노역을 하는 현장에 나갔다가

자기 동족을 때리는 이집트인을 처 죽이고 모래에 숨겼다(출2:12).

모세가 사람을 처 죽인 것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자만과 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중에 지배자(왕자)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적들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고, 그는 왕궁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되었다.

 

누가 작은 사건(왕자의살인)을 확대 해석하였으며, 모세로 하여금 왕궁에 머물 수 없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훈련시키고 다듬기 위해 광야로 몰아가신 것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장인의 양떼를 치면서 이집트에서 학습된 지배자의 자아를 철저하게 내려놓았다.

그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고, 지도자의 소명을 받았다.

모세의 실패가 하나님의 성공(언약성취)이며, 광야의 고통이 지도자의 기회가 된 것이다.

 

미국의 2차 영적 대 각성을 주도했던 디엘 무디(D.L.Moody) 목사님은

그의 설교에서 모세의 전반40년 생활(왕궁)을 I am somebody, 중반40년 생활(광야)을 I am nobody,

그리고 후반40년 생활(지도자)을 I am God's body 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거짓된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는 자다.

표증학적인 측면에서, 모세의 실체(신18:15)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동질성을 가진 대화적 존재로 오셨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지도자의 삶을 사셨다.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며(신9:25),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 백성의 용서를 구했듯이(출32:32),

예수님은 사역을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고(마4:2),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치유의 사역을 하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를 통해 온 인류의 대속을 이루셨다.

그리고 3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평화의 왕, 만왕의 왕이 되셨다.

믿는 자에게 용서와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중동 아프리카의 지배자들이 독재자의 옷을 벗고, 국민과 대화하는 지도자로 거듭나서 시위대의 분노를 다독이고,

민주사회의 초석을 놓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중동 아프리카인의 염원이며,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믿는다.
출처 : 조완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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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즘]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객관적인 이해

 

 

수피즘: 무슬림의 새로운 포교 방식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아랍 무슬림들은 이슬람에서 더 깊고 실질적인 의미보다는 형식적인 의례를 더 강조하고 있다.

수피즘은 인간의 마음과 지성에 관심을 갖는다. 이슬람에 대한 이해는 아랍 무슬림들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무슬림은 우리처럼 온건하고 어떤 무슬림은 알라의 이름으로 과격한 테러를 행하고

어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와 알라를 부르며 알라에게 가까이 가려고 한다.

 

꾸란과 이슬람에서는 알라가 영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랍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에 대한 개념으로 “알루후(또는루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아랍 무슬림들에게 “알루후(혹은 루흐)”가 뭔지를 물었더니 “나프스(혼)”라고 답하였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알루후가 뭔지를 물으면 금방 답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슬림들이 알라allah의 말이라고 믿는 꾸란(코란이라고도 함)에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에게 알루후에 대하여 묻는다. 알루후는 우리 주님의 문제라고 말하라. 너희에게 주어진 지식은 조금일 뿐이다(꾸란 17:85)”.

 

무함마드 시절에 사람들이 무함마드에게 알루후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니까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알루후의 문제는 알라의 문제라고 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지식은 조금이어서 알루후에 대해서 인간이 잘 모른다고 했다.

아랍 국가에 있는 모스크(무슬림들이 기도하는 장소)의 이맘(기도 인도자)에게 알루후가 뭐냐고 물으니 그는 알라만 안다고 답했다.

꾸란은 루후 알꾸두스는 지브릴 천사라고 한다.

그러나 아랍어 성경에서 알루후 알꾸두스는 성령(하나님의 영)이라고 한다.

결국 아랍 기독교 커뮤니티와 아랍 무슬림 커뮤니티 안에서 동일 어휘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무슬림들이 왜 무함마드의 이름을 부르며 알라를 찾을까?

그 대답은 분명하다. 꾸란에 답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알라 이외에 신이 없다. 알라술(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마다 이미 알라에게 순종한 것이다”(꾸란 4:80)라고 말한다.

 

아랍어로 된 꾸란(한국말로 번역된 꾸란은 번역의 오류들이 많다)을 보면 이슬람이 잘 보인다.

꾸란은 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마다 알라에게 순종한 것이라고 하므로 <무함마드⇨알라>의 관계가 이슬람 신앙의 기본이 된다.

그래서 전 세계 무슬림들이 “알라 이외에 신이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라술이다”라고 신앙 고백한다.

그렇다면 꾸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할 곳이 없다.

꾸란 112장에서 “그(알라)는 (누구를) 낳지 않았고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꾸란 112:3)”고 하여

꾸란의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을 꾸란이 분명히 해 주고 있다.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무슬림들에게 알라는 너무나 먼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수피 무슬림들은 알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종단마다 독특한 수행을 계속했다.

 

수피 무슬림들이 무함마드를 통하여 알라에게 향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데 반하여,

이슬람의 샤리아(이슬람 율법)는 겉으로 드러난 무슬림의 행동을 규제하는 알라의 명령과 금지 사항이 주요 내용이다. 수피 무슬림들은 샤리아와 수피즘을 구분한다.

샤리아는 인간의 몸에 해당한다고 하고 수피즘은 인간의 혼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슬람의 혼이 수피즘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 율법(샤리아)이 무슬림의 겉에 드러난 행동에 관심을 갖는 반면,

수피즘은 무슬림의 내면세계를 다룬다.

수피즘은 정통 이슬람의 율법적인 생활에 또 다른 다이내믹한 힘을 넣어 주려고 한다.

수피는 그의 마음(깔브)을 깨끗하게 하려는 사람이었기에 수피 무슬림의 혼을 정화하고 신을 찾아가는 학문이 수피즘이다.

샤리아(몸)와 수피즘(혼)은 결국 육체의 법과 마음의 갈망을 찾아가므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work와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하는 은혜의 삶이다.

 

꾸란은 알라가 영Spirit이라고 하지 않아 전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따라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수피즘은 8세기부터 시작하여 14세기까지 그 이론이 발전하고 있었다.

하루 아침에 수피즘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7세기 초 일부 무슬림들은 참회를 상징하는 털옷(wool)을 입고 다녔다.

털옷은 세상의 쾌락을 버리고 오직 수행에만 힘쓴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 뒤 1세기 뒤에는 이라크에서 "수피야"라고 불리는 금욕 수행자ascetics들이 나타났다.

그당시 상당수 무슬림들이 세상의 즐거움을 쫓아가고 알라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900년 경에는 바그다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수피들이 번성했다. 수피즘은 초기에는 금욕적인 수행이 지배적이었고 후기에는 범신론적인 신비 수행으로 바뀌었다. 초기 수피들은 그들의 마음이 장차 다가올 것에 소망에 두었고 후기 시대의 수피들은 알라와 결합하여 무아지경에 다다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수피들은 이슬람의 윤리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이슬람 신학자들이 그들의 정통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알라의 개념도 더욱 추상화되고 비인격화되었다.

이슬람력 2-3세기를 지나면서 칼리파(순니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종교를 수호하는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와 사회 지도층들이 이슬람 확장의 결과로 사치와 탐닉에 빠지고 알라를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초기 수피즘의 주창자로는 알바스리(728년 사망)가 있었는데

그는 세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세태를 비난하고 끊임없는 참회를 하라고 했고 알라를 두려워하라고 했다.

그는 진정으로 알라를 두려워하는 것이 금식(이슬람에서 금식은 라마단 달에 한 달간 낮에만 금식하는 것)과 기도보다 더 낫다고 했다.

그러나 곧 수피들은 알라를 두려워하는 것에서 알라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갔다.

예루살렘에 무덤이 있는 바스라의 라비아(801년 사망)는 여성 수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했다.

그녀는 꿈에서 무함마드(이슬람의 예언자)를 만났는데 무함마드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니

라비아는 "내가 알라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압도하고 있어서 그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나 증오가 내 마음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이처럼 수피 무슬림이 알라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다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4-5).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이 아닌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한다.

 

오늘날 수피 무슬림이 아닌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의 길이 잘 못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여섯가지 믿음(알라, 천사들, 메신저들, 경전들, 종말, 운명론)과

다섯가지 기둥(신앙고백, 기도, 메카 순례, 금식, 종교 구빈세)을 실천하고,

매주 목요일(또는 다른 날) 모스크에서 수피들이 수행을 따로 하는 것을

비수피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일상적인 삶의 복잡성을 회피한 수피들을 현실도피자라고 부르고,

가족과 사회에 무심한 수피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더구나 주관적인 체험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수피들은 간혹 미신이나 허풍떠는 사람 혹은 범신론자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집트에는 76개 수피 종단이 있고 8,000만 인구 중에서 1,100- 1,500만 명의 수피 무슬림들이

매주 따로 모이고 있다. 오늘날 서구에서는 수피 무슬림이었던 알루미Rumi에 대한 저서들이 시중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구 사람들에게 수피즘이 소개되고 있다.

수피즘은 율법적이지도 않고 테러를 부추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구인들은 수피 댄스와 수피 음악, 수피의 시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수피즘이 이슬람의 정통 교리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긴 무슬림들은

수피들의 길이 참 이슬람의 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이슬람의 여러 종파 중에서 가장 온건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는 수피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알아즈하르 대학교에서는 몇년 전에 수피학에 대한 정규과정이 생겨났다.

수피들의 꾸란 주석은 꾸란의 글자 뒤에 숨겨진 내밀한esoteric 뜻에 관심을 갖는다.

수피가 꾸란을 주석할 때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슬림들 안에서도 꾸란 어휘 의미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서 그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수피즘 연구에서도 어휘 의미에 대한 해석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은 수피즘의 특징이다.

(1) 수피는 외형중심의 무슬림 신앙을 거부한다.

(2) 수피는 감정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3) 수피즘에서 인간이 알라 속에 소멸한다.

(4) 수피즘은 메타피직스의 관계가 아니라 종교 윤리적인 변화이다.

(5) 이슬람 율법(샤리아)와 수피즘은 서로를 비난한다.

(6) 수피즘은 이슬람 율법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7) 살라피 운동은 이슬람 율법을 적용하여 종교를 정치화하기를 바란다.

(8) 수피 수행에는 마음의 정화 혹은 자아 소멸 혹은 무아 지경(무상의 상태) 등이 있다.

 

영국의 무슬림 인구가 지난 10년(2001-2010) 동안 거의 배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인터넷 판이 2011년 1월 4일 보도했다.

2001년에는 영국 무슬림이 6만 699명이었는데 2010년에는 10만 명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이 수피즘을 통해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물론 수피즘과 반대로 이슬람 율법 하에 놓인 경직된 삶을 좋아하는 무슬림들도 있고 또 많은 무슬림들이 아랍어로 된 꾸란을 읽을 수 없어서 꾸란을 잘못 해석한 내용들을 맹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슬람의 다양성과 복합성 때문에 이슬람의 경계론과 포용론이 등장해 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슬람이 율법 종교이고 포교 중심의 종교라는 것이다.

지금은 무슬림들이 상당히 정치화되어있다.

 

역사를 보면 수피 무슬림들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이슬람을 전하는 주된 수단이 되었고

오늘날 이슬람 산유국의 오일머니는 세계인의 관심사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수쿠크와 수피즘은 무슬림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알라를 믿느냐와 어떻게 무슬림이 살아가느냐를 연결해 주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객관적인 이해가 쉽지 않다.

아랍인 무슬림들과 동남아시아 무슬림들이 다르고

아랍 국가 안에서도 요르단 무슬림과 사우디 무슬림이 다르다.

더구나 국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도 무슬림마다 다르다.

예를들면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던 날 밤 필자가 만난 아랍 무슬림 이웃들은

무역센타를 공격한 무슬림들을 가장 훌륭한 무슬림이라고 했다.

그리고 2005년 요르단의 세 호텔에서 테러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이라크의 알카에다 조직을 테러리스트라고 하지 않다가 그 일이 일어난 뒤에는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대항하여 싸우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히즈불라를

아랍 무슬림들은 저항세력이라고 하지 테러리스트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네 아랍인들의 대의를 위하여 싸우는 그들은 저항세력이고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상당수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태생이 무슬림이고 부모가 무슬림인데 테러를 자행한 그들이 어찌 무슬림이 아니란 말인가?

이슬람 중심의 세계관이 우리의 시각과 동일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특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슬람에 대한 연구는 이슬람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무슬림들도 이슬람의 율법에 머무르는 경직된 외형 중심의 삶이 싫어서 수피즘을 찾는 무슬림들이 있다.

수쿠크가 우리에게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위와같은 논의에 참고할 만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슬람 문명의 이해>(예영)는

오늘날의 이슬람과 고전 이슬람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해 주는 책이고

 <코란의 의미를 찾아>(예영)는 샤리아와 파트와(이슬람학자들의 법률적 견해)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책이다.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대한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는 <이슬람율법>(살림)이란 책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수피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수피들의 꾸란 주석은 <꾸란의 이해>(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란 책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출간될<수피즘과 수쿠크>는

최근 아랍 세계와 한국에서 논점이 되고 있는 주제이다.
출처: 공일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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