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문화적 수용성과 이슬람의 확산
이슬람의 확장과 부흥
신원용 / 영산대학교 교수 아프리카문제연구소 소장
1.서론: Africa의 문화적 수용성
식민통치를 주도했던 유럽국가들의 언어는 같은 식민지 국가들이라할 지라도 아프리카에서의 정착 속도는 인도나 베트남, 인도네시아 보다 훨씬 빨라, 대다수의 아프리카국가의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영어사용 아시아국가 또는 불어사용 아시아 국가는 극히 미미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불어권, 또는 영어권 아프리카로 분류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와 나일강 유역 대부분 국가의 경우, 수백만 주민들이 언어영역으로 아랍어권으로 변모하였다. 토착민족어사용을 선호하고, 옹호하는 언어민족주의는 탈식민 이후 근대국가형성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아시아의 국가들에게는 공통적인 현상이었으나 아프리카에서 신기하리만큼 매우 그 세력이 미약하며, 몇 국가에서만이 근대 사회에 적절한 토착어를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을 뿐, 대부분의 사하라이남 국가들은 학교에서 유럽어 사용에 우선순위를 두었었다.
아시아 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확산은 몇 세기가 필요했으나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단 한 세기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중국에서는 마테오리치 이후부터 십수 세기 간 걸쳐 이루어진 기독교의 전파 결과 공식적인 신도의 수는 3500만명인 남아프리카공화국 한 국가에 못미치고 있다. 남부 인도의 기독교 전파는 구전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인 도마에 의한 1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 9억 인구 중 겨우 2000만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단 1-2 세기에 걸친 확산은 인구의 1/3이 기독교화되었다.
이 글의 주제인 아프리카 전체에 걸쳐 무슬람신앙은 1884-1885년 베를린 회의 이후 유럽-기독교 식민통치구조라는 강력한 역사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 신도의 수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어떤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토착종교의 신들을 기리기 위한 개천절과 같은 공휴일이 제정되지 않았고, 기독교적 축제 (특히 크리스마스)나 이슬람 축제 (Idd el Fitr. 등) 등의 수입 축제를 공휴일로 삼고있다. Sem족어 계통의 종교(기독교와 이슬람교)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에서 국가적으로 존중되고 있는 반면, 토착 종교들은 기껏해야 전국적 규모가 아닌 인종집단적인 행사로 이루어 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아프리카인의 독특한 특질 중 하나인 "고도의 문화적 수용성(cultural receptivity)" 에 기인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아프리카의 문화적 수용성, 즉 새로운 문화를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강점과 약점이 각각 존재한다. 즉 타 문화를 배우려는 준비성이 강점이라면, 타문화에 의존하거나 지적으로 모방하려는 위험이 그 약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서면 제 3의 관점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문화적으로 아프리카를 정복한 타 문화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문화적으로 아프리카화 되거나, 아프리카적 수용성을 통하여 그 종교성이 풍부해지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2.이슬람화 과정
7세기 부터 아프리카 일부가 아랍과의 접촉을 통해 이슬람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북부와 나일강 저지대지역의 아프리카의 이슬람화 과정을 설명하는데는 대체로 세 요인을 그 배경으로 들 수 있다:
1) 아프리카의 문화적 수용성
2) 아랍의 가계 제도와 혼합결혼의 후손을 정의하는 방식
3) 아랍어의 광범위한 사용과 아랍인을 규정하는 언어의 역할
위의 두 요인들을 부연하자면, 7, 8세기의 북부아프리카의 아랍의 정복은 언어를 통한 Arab화와 신앙을 통한 이슬람화 라는 두 과정이 주도했다. 공용어로서의 아랍어의 확산은 북부아프리카의 경우 새로운 셈족어 집단을 창조했고, 이슬람신앙의 확산은 새로운 유일신집단을 만들어 내었다.
이와 같은 북아프리카 대다수 국가들의 아랍화된 과정은 생물학적, 문화적인 두 측면이 있다. 생물학적 과정이란 면은 종족간의 결혼(intermarrige)를 포함하는 것으로 아랍인의 상향성의 가계제도 (upward linage system)에 의해 괄목하게 증대, 선호되었던 측면이 있다. 기본적으로 아이의 아버지가 아랍인인 경우_ 아이는 어머니의 ethnic집단이나 race의 origin에 관계없이 아랍인이 된다. 이 가계 (linage) 제도를 ascending miscegenation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후손은 상위에 존재하는 더 나은 부모의 가계에 편입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가계제도는 미국과는 정반대의 대조를 이룬다. 미국은 백인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의 아이는 descend하여 저급한 인종사회의 일원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런 하향화 miscegenation에서는 아버지가 또는 어머니가 흑인 인지의 별도의 구분이 불필요하며, 혼혈 후손은 자동적으로 사회적인 열성집단으로 천시되기 때문에, 미국의 가계제도는 인종 간 의 벽을 넘을 수 없으며, 또 결혼 자체에 의해 더 나은 신분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한 제도이다.
그러나 북아프리카가 급속히 아랍세계에 편입된 배경에는 미국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가계제도가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아랍의 가계제도는 상당한 인종집단 간의 결합을 허용하고 있으며, 다른 인종집단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도 아버지가 아랍인이라는 전제 하에, 아랍 세계의 합법적인 구성원이라는 상당한 자격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랍세계의 피부색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백인, 예멘의 brown, 금발의 레바논인에서 수단의 흑인 들까지 혼혈에 의한 인종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3.아랍화(Arabization)와 이슬람화(Islamization) : 이집트와 수단의 경우
아랍화와 이슬람화의 사관관계의 연구의 대표적인 경우로 이집트와 수단의 경우를 비교할 수 있다. 7세기 무슬림이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이집트인들은 아랍인들은 아니었다. 아랍인들에 의한 이집트 통치가 확고히 되면서 일차적으로 신앙의 개종으로서의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아랍화는 이슬람화 보다 상당히 느리게 뒤따랐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집트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속도 보다 고대 이집트어와 고대 그리스어 사용을 아랍어로 바꾸는 과정이 훨씬 더 긴 시간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아랍어가 이집트인 대다수의 mother tongue이 된 이후에도 이집트인이 자신을 아랍인이라 부르는데까지 수 세기가 더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는 문화의 정복, 문화적 동화는 정치적 정복 보다 더 많은 기간을 필요로 하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6세기에 기독교화 되었다가 1250년 이집트의 침공으로 북부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이슬람교도와의 혼합결혼이라는 동일한 형태로 점진적으로 이슬람화와 아랍화 과정이 진행된 아랍계 북부 수단 (인구의 75%)과 비이슬람 위주의 남부 수단의 대치적인 상태는 많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남부 수단도 공통된 과정을 통해 아랍화될 수 있을 것인가' 에 주목하고 있다.
이 전망에 대해서도 역시 생물학적 혼합 (남부 수단과 북부 수단의 혼합결혼)과 남부의 기독교 흑인계인 Dinkas족과 Noer 족의 문화적 동화(cultural assimilation)라는 두 힘의 작용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성공적인 경우 남부 수단은 black 아랍인으로 변모할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이 성공의 시나리오는 국가가 내란 상태를 극복한 통일체로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서, 혼합결혼이 증가하여, 북부수단은 그 피부색이 흑인화할 것이고, 남부에서는 문화적 변용과 정복이 강화되어 남부 수단인의 아랍화가 진행될 것이다. 북부의 생물학적 아랍화와 남부의 문화적 아랍화는 서로를 강화시켜 통일된 수단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현재 남부 수단은 이슬람화보다도 아랍화가 더 속도가 빠른 사하라 이남의 유일한 지역으로, 이런 현상은 아랍어의 사용보다는 이슬람신앙의 확산 속도가 훨씬 더 큰 중부 아프리카 지역의 Wolof, Yoruba, Hausa, Somali종족의 경우와는 큰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 언어적 측면에서 남부수단의 급속한 아랍화는 두 가능한 결과를 보일 것으로 전망 할 수 있다.
첫째, 남부 수단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소수인 기독교인인 이집트의 Copts와 유사하게 발전하거나, 둘째, 이슬람 신앙으로의 개종을 통한 아랍화가 진행되어, 북, 남 수단이 진정으로 혼합되어 종국적으로는 그 구분이 없어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아랍어가 지중해로부터 남진하고 있는 동안 스와힐리어도 동아프리카에서 Juba족을 향해 북향하고 있다. Tanzania, Kenya, Uganda와 동 Zaire (현 Rep. of Congo)의 스와힐리언어권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나일에서부터 아랍어가 Juba, Kiswahili 족으로 내려오면서, 남부 수단인들은 아랍화와 스와힐리화 사이에 끼인 격이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종으로 아프리카성(Africanity)와 관련이 이루어질것으로 판단된다. 현실적으로 남부 수단은 모든 수단인이 아랍화된다고 할지라도 가장 흑인성이 강하고, 흑인민족주의 정서가 저변에 남아있기 때문에 인종혼합에 대한 저항 또한 꽤 강한 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랍화와 이슬람화 사이의 시간 거리는 꽤 길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4.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아랍과의 관계에 의한 이슬람화
이 분야에 있어서 양 지역의 접촉은 과거 주로 이슬람의 전파와 연관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아프리카에서의 이슬람의 전파는 군사적 정복과 이슬람 상인, 선교사 등에 의한 평화적 개종에 의해서였다. 최초 서부나 중앙 수단의 주요 상업도시에 북아프리카의 상인에 의해 코란 학교와 사원을 세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이슬람을 포교했다. 이 지역에서 엘리트층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면, 이들을 이용해 남쪽으로 포교를 확대하였다. 이러한 이슬람의 아프리카화 과정은 8-18 세기 사이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8c 들어 지하드를 통해 이웃 국가를 개혁시키려는 전투적인 국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Sokota와 Macina의 Fulani국가들, El-haj Omar에 의한 Tukolor제국, Samori Toure에 의한 기니지역의 Manding 국 등이 모두 서부 및 중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이 뿌리내리는데 기여했다.
서구에 의한 식민통치기간 동안 이슬람의 영향력은 대륙에서 확대되기 시작하는데, 초기 이슬람 상인들은 노예무역에 개입하기도 하였고, 식민정부에 협조하는 중요한 파트너로 그 정치적, 상업적 거점을 아프리카 사회에서 확보하기 시작했다. 주요 이슬람지도자들이 유럽식민종주국의 식민지 통치에 매우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기 때문이었으며 이슬람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그 결과 1960년 경에는 대륙의 1/3이 무슬렘신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무슬렘은 유럽의 제국주의 팽창에 저항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북부 수단의 경우 영국의 전위 역할을 맡은 이집트로부터 이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슬람의 반유럽제국주의 저항정신은 아프리카무슬렘에게 생생히 각인되어 있기도 한다.
아프리카국가들의 독립은 또 다른 확장과 이슬람세력의 확대를 가져 왔으나, 1950, 1960년대에 들어서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등장으로 정체기에 접어든다. 그후 Nasser를 지도자로 하는 이집트의 노력으로 사하라이남에서의 이슬람센터와 종교지도자, 유학생의 Cairo 수학 등을 통해 관계가 재 강화되었다. 그 결과 1970년 들어와 1969년 가다피의 Lybia 정권획득 이후의 활동,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원 등을 통해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다. 1970년과 1980년 들어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을 내세운 아프리카 1세대 정치인들의 퇴장과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점증한 반 서구주의는 양 지역 지도자의 교류를 증진시켰고, 또 경제난을 원조로 해결해보려는 아프리카지도자의 상황과 맞물려 이슬람의 확대노력이 증진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 전파를 위한 다음의 유형의 수단이 동원되었다:
1) 아랍국가에 의한 사원, 학교, 센터 건립비용무상지원
2) 아랍교육자들의 파견, 학자들의 아랍권 유학 및 연구지원, Niger와 Uganda의 무슬림대학 건립 및 아프리카 대학에 아랍 및 이슬람 연구 비용지원
3) 1974년 Islamic development Bank 창립을 통해 아프리카의 무슬렘 사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
4) 아프리카종교지도자의 아랍방문 주선을 통한 유대 강화
5) 아프리카인을 위한 대중매체와 출판
6) 아프리카지도자의 이슬람 개종을 위한 노력 (Gabon의 Omar Bongo, 1973,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Bokassa, 1976, 1980의 Benin의 Kerekou)을 통한 이슬림포교 기회확대
이러한 노력으로 1970년 말 아프리카의 muslem 인구는 2억을 상회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잇다. 교통수단의 발달 및 이슬람의식의 성장, 아프리카정부의 지원 등에 의해 1990년 대 초 아프리카인의 Mecca순례는 매년 250,000명에 이르고 있다.
명백하게 아랍어와 이슬람문화를 포함한 아랍-아프리카 관계의 중요성은 그 정도를 더하고 있으며, 이슬람문제는 현대 아프리카 사회의 중심 이슈 중 하나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프리카 국내정치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이슬람교의 강력한 진출은 예를 들어 나이지리아에서의 북부이슬람세력에 대항하는 남부기독교도의 충돌이 보여주듯, 아프리카 전체에서(특히 어느 한편이 대다수인 국가에서) 불안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랍세계와 아프리카의 두 지역에서의 밀접한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경험은 서로 애증이 교차하고 있다. 사하라이남에 대한 아랍의 수세기 간의 침투는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형성된 부분도 있고, 동시에 문화적, 종교적 합치는 이슬람 전통을 아프리카의 불가피한 부분이 되어 잇다. 향후 양 지역은 종교적 관계, 경제적 요인에 의해 이합과 집산이 이루어 질 것이고, 점증하는 이슬람의 동부아프리카 진출경향과 대륙에서의 기독교세력과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어 이질성과 동질성의 정도는 더 증대될 것이다. 중첩과 분리의 관계가 지속될 전망이다.
5.결어: 아프리카대륙의 이슬람화 가능성?
이슬람과 관련하여, 유럽이 기독교화된 것처럼, 아프리카도 이슬람 신자가 다수인 최초의 대륙이 될 것으로 전망이 늘어나고 잇다.
이는 이슬람의 확장(expansion)과 부흥(revival)이라는 두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확장은 종교의 전파와 개종자의 증가를 통해 지리적 확장과 신도수의 증가를 통해 새로운 세계의 정복을 뜻하고, 부흥은 이미 개종한 신도의 신앙의 거듭남(rebirth)을 통한 근본주의로의 회귀를 뜻한다.
기존 중동지역에서는 더 이상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부흥의 경향, 즉 일부 근본주의로의 회기 현상이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아랍아프리카외의 지역에서는 확장의 속도가 증가하고 잇다. 어떤 아랍 국가에서 보다 많은 무슬렘인구가 나이지리아에 존재하고 있고, 이티오피아의 무슬렘의 수는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을 넘어섰다. 희망봉 지역에서 까지 이슬람 신앙은 확대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인구 대국인 나이지리아 60%, Somalia 100%, Senegal 93%, Niger 90%. Mali 90%, Gambia 85%, Guini 75%, Mauritania 99%, Chad 50%, Burkina Faso 50% 등이 무슬렘이 인구의 50% 비율을 상회하는 사하라 이남의 국가들이다. 통계에 따른 차이는 있으나 사하라 이남에서도 이미 최소 1/3 정도가 무슬렘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종교성은 기본적으로 풍부한 다양성(diversity)를 특색하고 잇다. 이는 문자적 전통과 구전 전통의 대립으로도 설명할 수 있기도 하다. 경전 또는 성서 형태의 문자적 전통은 세속화 과정에 제약 요소이기에, 절대적인 코란의 힘은 모슬렘 세계의 근대화의 저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구전전통은 다른 종교적 영향에 대해 개방적인 경향을 보이며, 이 점에서 아프리카의 전통종교는 ecumenical적이다. 아프리카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전통종교와의 결합현상을 혼합주의(syncretism)라 부른다. 그러나 이 의미는 아프리카인이 동시에 기독교나 이슬람교 신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이슬람교나 기독교가 전통적인 구전 message와 결합하는 형태를 갖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주요 3대 종교(토착, 기독교, 이슬람) 중 토착 종교가 관용성이 가장 크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전래되기 이전 아프리카에서의 종교전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토착종교는 기독교나 이슬람 신앙처럼, 전 인류의 개종을 추구하는 universalist(보편주의)도 아니고 다른 신앙에 극렬히 투쟁하는 경쟁적 (competitive)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communal)이다. 예를 들어 Yoruba와 Ibo족을 서로를 자신의 신앙으로 개종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런 관용성이 아프리카에서의 타종교의 수용이 대규모로 가능했고, 또 이런 문화적 경향이 아프리카 내에서의 종교적 경쟁의식을 완화하게하거나 갈등을 약화시켰다.
Uganda를 예로 들자면 최초의 행정수반이었던 Milton Obore는 개신교도이기는 했지만, 무슬렘, 천주교, 개신교로 구성된 전통적인 확대가족이 있었고, 그 후계자인 이디 아민은 모슬렘이 지만 역시 다양한 종교를 가진 가족이 있엇고, 자신의 한 아들을 개신교목사로 키우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는 이제 Afro-Asian 종교로 대부분의 무슬렘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존재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전 세계의 1/4가 모슬렘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급속히 확장되는 모슬렘인구는 아프리카에서 그 속도가 가장 빠르다.
물론 여기에는 모슬렘여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평균 6명을 출산하고, 더욱 자연출생율이 가장 높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도 모슬렘은 더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냐의 무슬렘 가정의 평균 자녀수는 8.4명으로 개신교의 7.0명, 카톨릭의 7.1명으로 가장 높다.
또한 무슬림사회의 국내, 국제적 solidarity 현상, 반 자본주의-서구주의 sentiment, 구식민종주국과 연계된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생활 양식으로서의 이슬람의 건전함, 아랍세계의 지원 등이 부수적으로 이슬람인구를 아프리카에서 증가시키고 있다. 21세기에는 아프리카는 타 종교 보다도 무슬렘 신앙이 다수인 대륙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아프리카의 관용성과 문화적 수용성이 갈등의 요소에 순기능적으로 계속 작용할 것인지 아니면, 이슬람화에 따른 근본주의적 부흥에 의해 전투적으로 변모하여 해당 국가와 지역의 긴장을 높이게 될지 지켜볼 문제이다.
참고문헌Brawnann, Rene. African Islam. Washington: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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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Curtin, ed. Africa Remembered: Narratives by West Africans from the Era of Slave Trade. Madison: University of Winsconsin Press, 1967.
각 주1) 이 논문은 2000년 12월 5일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연구소 제7회 초청강연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그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