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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살라피, 선교에 적신호

 

지난 몇 년전부터 이집트에서는 무슬림들 중 살라피들이 무슬림 여성들에게 니깝(눈만 남기고 얼굴을 다 가리는 머리수건)을 쓰라고 해서 2010년에는 이집트 이슬람 종교계가 <니깝은 이슬람 종교의 의무 사항이 아니다>고 공식 입장을 내 놓았다. 그러나 이집트 무슬림들은 이런 이슬람 종교계의 결정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니깝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 무슬림 여교사는 수업 중에도 니깝을 쓰겠다고 하였다.

2001년 9월 1일 이후 이슬람 세계는 신 살라피neo- salafi와 신 와하비neo- wahhabi들이 과격 이슬람주의와 결합하면서

지하드(이슬람을 방어하고 이슬람을 위해하는 세력에 대한 공격)와

타크피르(이슬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살해)를 운동의 핵심으로 삼았다.

본래 살라피들은 반민주주의이고 정치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2001년 이후 이들 살라피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대표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정치에 깊이 관여하므로 이집트에서 자유와 정의 당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을 창당했다.

2011년 5월 7일 이집트의 카이로 외곽 임바바 성 민나 교회에서 발생한 살라피 무슬림과 콥트 기독교인 간 충돌로

 230여명이 다쳤다. 살라피(salafi)란 중세부터 시작된 무슬림들의 그룹으로 ‘살라프(salaf)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살라프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동료와 그들의 2대 제자들을 포함하므로,

이슬람 첫 3대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살라피들은 초기 이슬람의 산 증인이었던 살라프가 꾸란과 하디스를 이해한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과거 살라피 그룹 안에는 이슬람의 개혁을 천명하는 성향과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인 와하비즘을 추구하는 두 개의 성향이 공존했다.

그러나 2001년 과격 이슬람주의자와 연합한 신 살라피neo-salafi들은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살라피 지하드’를 천명해 다수의 살라피들에게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살라피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정치에 가담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어서 이슬람 안에서 이 두 세력이 서로 동질집단은 아니다.

살라피들의 특징은 “무함마드에게는 충성하고 이단과 카피르(기독교 등 타 종교, 이슬람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알왈라와 알바라)이라는 점이다.

2001년 미국의 9.11테러를 일으킨 19명 중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들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와하비 파들이었다. 살라피 들 중의 일부가 와하비 파인데 와하비 파는 알라가 한분이라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기독교를 배척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때문에 “신이 한분”이라는 이슬람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살라피 무슬림들은 생각한다.

와하비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타크피르 문화를 확산시켜왔다.

타크피르 문화는 아랍 무슬림과 비무슬림들에게 테러와 살인들이 이어져서 불안감과 두려움을 남기고 있다.

신 와하비파와 신 살라피들이 포함된 그룹이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끈 알카에다 조직이다.

다시 설명하면 살라피들 중의 일부가 와하비이고

2001년 9.11 테러 이후 신와하비파와 신 살라피들이 알카에다에 합류하면서 알카에다는 혁명적인 무장 운동을 일으켜서 유대인과 십자군을 대항하여 지하드를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지금 이집트에서 기독교 교회와 맞서는 세력들은 (신) 살라피들이다.

살라피들은 이집트의 정정 불안을 틈 타 종교 갈등을 격화시키면서 세력을 빠르게 확산 중이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오는 9월 치러지는 총선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만든 자유와 정의 당의 압승을 우려하고 있지만, 정작 이집트 내부에서는 이른바 ‘살라피의 지하드’에 대한 두려움이 고조되고 있다.

아랍 위성 방송 알자지라, 영국 BBC 등은 8일 이집트에서 지난 몇달동안 악화일로로 치달아온

토착기독교 콥트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 갈등을 이슬람 순니파의 살라피들이 사주하고 있다고 지목했다.

카이로 외곽 임바바에서 발생한 출동사건도 살라피 500여명이 화염병과 돌을 던지면서 촉발됐다.

 

이집트에서는 지난 1월1일 알렉산드리아 콥트교회를 겨냥한 자살폭탄테러로 24명이 목숨을 잃은 데 이어 3월에도 콥트신자 13명이 사망했다.

지난 4월 이집트 남부 끼나에서 콥트신자가 주지사에 당선된 것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로 끼나-카이로 간 열차편이 1주일이나 중단되기도 했다.

이집트 경찰당국은 이 모든 사건을 사주한 세력으로 살라피 무슬림들을 지목하고 있다.

7일 성 민나 교회 충돌사건은 살라피들이 콥트교회 내부에 콥트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여성이 억류돼 있다고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이 문제는 작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동안 이집트 무슬림들이 콥트 교회를 박해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온 사건이다.

콥트 교회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이슬람 경전 꾸란의 구절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살라피즘(살라피들이 갖는 이데올로기)을 따르는 일부 살라피들이 1990년대부터 지하드와 결합하면서 무장세력화됐다.

살라피들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을 세속화된 정치집단으로 비난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와하비 파의 이념)’을 이단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팔레스타인의 무장 세력 ‘하마스’를 유약하기 짝이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는 등

살라피들이 초강경 복고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이슬람주의자와 와하비와 살라피들은 각각 다르고 이들 셋은 이슬람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서로 다르다.

살라피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반민주 세력이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아랍 이슬람 국가에서 야당으로 활동하고 있고

와하비들은 반 기독교, 반 시아 파, 반 수피를 부르짖어왔다.
출처: 공주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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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 이슬람 채권 스쿠크(Sukuk)법 문제점

[이슬람국가] 수쿠크 법의 문제점

수쿠크 법 왜 도입하면 안되는가???

 

수쿠크 법의 문제점 (5가지)

1.부동산 매매, 건물등 자산거래시 세금을 한푼도 안내는 말도 안되는 특별법이기 때문...

이슬람 채권은 율법때문에 이자 수수료가 금지 되어 있어 별도의 법인을 만들어 임대료를 받거나 배당금을 받는 형태로 수익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취득세, 등록세, 양도 소득세, 부가가치세의 세금을 이슬람 채권법을 만들어 모두 면제해준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국내에서 부동산 거래를 하고 세금을 한 푼도 물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슬람 채권은 단지 율법문제로 복잡한 과정을 거칠 뿐이지, 사실 매매등의 사업수익을 통해 그에 대한 배당금으로 이자를 받는 셈이다.

즉, 이자외에 별도로 완전 면세 혜택까지 이중으로 준다는 말임.


2. 전세계에서 이슬람 채권면세는 단 3개나라 뿐임..(일본도 거부)

영국, 아일랜드, 싱가포르만 이슬람 채권 면세이고, 이나라들 마저도 이중과세는 하지 않는 소폭면세일 뿐이다.

일본은 수년째 검토만 하고 있는 법, ---(우리보다 선진국인 독일, 스위스는 바보라서 도입을 안하고 있는건가?)

이런 법을 왜? 한국이 도입해 전세계에 유래가 없는 면세혜택을 줄려고 하는가?


3. 투명성이 결여되있다.

이슬람 채권은 수입의 2.5%를 의무적으로 '자카트(Zakat)'라는 이름으로 기부해야 하는데,

내용관련 서류를 송금 즉시 파기하도록 되어 있어 추적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말도 안되는 상식 밖의 법,

과격테러단체나 다른 자금으로 흘러들어가도 추적이 불가능한 시스템, 말도 안되는 이기주의 법......

(이슬람 채권법을 소폭 허용한 영국에선 최근 모스크(이슬람교회)가 확장되고, 이때문에 젊은이들간의 충돌과 폭력등, 이슬람 테러가 끊이질 않는다. 얼마전 런던 지하철 테러로 52명 사망, 히드로 공항 테러등.....)


4. 이슬람 채권은 일종의 펀드다.

사실상, 스쿠크는 채권이 아니고 펀드 입니다.

이자는 실물자산 활용을 통해 미리 지급받고, 원금은 실물자산을 채무자에게 재매입하게 만들어나 일반에 매각하는 방식임..


5. 기업과 증권사의 탈세를 조장하고, 국가의 정당한 세금수입을 줄인다.

부동산이나 , 실물자산 구입시 마땅히 내야 할 세금을 이슬람 채권이 세운 법인을 통해 구입하면, 모두 면세가 되는 법,

즉, 증권사들의 수수료 소득과 기업들의 탈세,,,

,그리고 배당으로 이자를 다 챙기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는 이슬람 채권자들 때문에 결국 그 피해는 국민에게로 돌아

말도 안되는 이슬람 종교 편향 법-- 한국이 시행하려고 하는 수쿠크

기독교인이나 불교인이 성경과 불경에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씌여 있다고 해서 그것을 따라야 한다며, 국가의 각종 세금을 면제해 달라고 하면, 그것은 엄밀히 말도 안되는 특혜 입니다.

이슬람 채권에게만, (취득세, 등록세, 소득세)를 면제 해준다는 특혜법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 채권법은 완전히 폐기 되야할 악법인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무엇때매 그들에게 엄청난 면세를 해주어 거대한 이슬람 자본의 투기장소가 되어야 합니까??

물론 경제자금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도 안되는 면세를 통해 특혜를 준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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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상시 히잡을 쓰고 다니는 인도네시아 여성들)

 

무슬림 여성, 공공장소에서 어떤 옷차림을 해야

    

무슬림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 지가 최근 몇 달 동안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10일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미국 미시간 대학의 사회연구소는

무슬림 국가의 여성들이 공공장소에 어떤 옷차림으로 다녀야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지에 대한

조사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번 설문조사는 튀니지,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무슬림 7개 국가에서 실시됐다.

 

이들 국가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적절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는 옷에 대해서는 천차만별이었다.

 

이슬람 국가의 국민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것보다

머리만을 커버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알 아미르를 가장 적합한 옷으로 선택했는데

튀니지(57%), 이집트(52%), 터키(46%), 이라크(44%) 등에서 수치가 높았다.

 

이에 반해 파키스탄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부르카나 니캅을 선호했는데,

특히 사우디의 경우에는 63%가 공공장소에서는 니캅을 입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파키스탄도 부르카(3%), 니캅(32%), 챠도르(31%)로 보수적인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레바논과 터키는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머리를 커버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해

무슬림 국가 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줬다.

레바논 국민의 반, 터키는 1/3 정도가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머리를 커버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결과는 성별로 따로 나누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 한국일보|한국아이닷컴 장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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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내전위기 뿌리는 1400년된 수니-시아 갈등

 

이슬람 양대 종파인 시아파와 수니파간의 뿌리깊은 종파 간 갈등이 이라크를 내전 직전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두 종파의 갈등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632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한 이후 누가 그의 자리를 승계할 것인가를 두고 시작됐다.

 

수니파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회의를 통해 선출된 4명의 칼리프를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한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만을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이후 제4대 칼리프인 알리가 661년 암살되고서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섰지만, 680년 알리의 차남 후세인마저 반란을 일으키다 참혹하게 살해당하면서 수니파에 대한 시아파의 원한은 더욱 커졌다.

 

두 종파는 코란을 경전으로 삼는 점은 같지만, 구체적인 교리와 종교의식은 구별된다고 AP통신과 종교전문통신사 RNS 등은 13(현지시간) 보도했다.

 

우선 수니파는 이슬람교 지도자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선출될 수 있다고 믿지만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자손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이슬람 교단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이맘'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이맘은 수니파에서 일반적으로 종교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의 승계자이자 절대적 권위를 갖는 최고 성직자라는 의미까지 갖는다.

 

기도를 드리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시아파는 손을 옆구리 옆에 두고 기도하지만, 수니파는 가슴이나 배에 손을 엇갈려 얹은 채 기도한다.

 

전세계 이슬람교도 가운데 수니파가 전체의 85%를 차지하는 다수파이고, 나머지 시아파는 수적 열세를 보이고 있다.

 

나라별로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 이집트, 예멘, 레바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대부분 국가에서 다수 종파지만, 시아파는 이란과 이라크 등에서만 다수 종파다.

 

시아파가 정국주도권을 잡아온 이란과는 달리,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 종파임에도 수니파가 줄곧 정권을 잡으면서 시아파가 박해를 받았다.

 

소수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 정권이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마침내 무너지면서 시아파가 득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수니파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20062월 시아파 주요 사원인 이라크 북부 사마라의 알-아스카리야 사원의 황금 돔이 폭파되자 시아파는 이 공격을 수니파의 소행으로 확신해 보복공격을 감행했으며 양 종파간 유혈사태는 이듬해까지 수천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최근 이라크에서는 급진 수니파 반군세력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가 시아파인 누리 알말리키 총리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며 주요 도시들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

 

시아파 맹주국 이란이 이라크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을 파병한 것으로 알려지고 수니파 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도 개입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에서 촉발된 이라크 사태가 중동 전역으로 확산할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출처 / (서울=연합뉴스) 이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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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외국 점령기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기 

 

포르투갈은 동인도와의 향료무역을 위한 접근로를 확보하고, 당시까지 아랍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향료무역을 탈취하기 위해 말라카를 점령하였다. 1511년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으로 말라카 왕국은 급작스런 퇴조를 맞게된다. 말라카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는 남쪽으로 도망하다가 결국 싱가포르 남부의 빈딴이란 작은 섬에 왕국을 세웠다. 마흐무드는 말라카를 제외한 반도 전역에 대한 명목상 통치자로서 지위를 고수하였지만 반도는 대부분 농촌지역으로 빈곤하였다. 무역과 부의 중심인 말라카를 회복하기 위해 마흐무드는 여러차례 공격을 가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이 철저히 말라카를 요새화한 탓에 이는 실패로 돌아가며, 오히려 역공을 취한 포르투갈 군에 의해 1526년 빈딴이 함락된다. 빈딴을 빼앗긴 마흐무드의 아들들은 다시 말레이 반도 서북부의 뻬락과 남부의 조호르에 조그만 봉국을 세우며 조호르 왕조(Johor Sultanate)는 말레이인에 의해 말라카를 계승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 조호르 왕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명목상 말레이 반도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포르투갈이 말라야의 말라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자 이슬람 상인들은 북부 수마트라로 이동했으나 계속되는 포르투갈의 공격으로 수마트라 서쪽의 아체국으로 옮겨가며 그 결과 아체가 이슬람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체 왕국은 1641년 네덜란드가 말라카를 점령하면서 패망하였다. 

 

. 네덜란드의 진출 

 

네덜란드의 동남아 진출은 1596년부터 시작되었다. 1602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어 무역을 독점하였으며, 네덜란드는 1602-1607년 사이에 조호르 왕국 및 아체 왕국 등과 협력하여 말라카에 주둔하던 포르투갈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네덜란드는 1619년에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근거지를 세우고 포르투갈의 향료무역과 동남아시아 무역에 도전하였다. 네덜란드는 1640-1641년 조호르 왕국의 협력을 받아 말라카를 6개월간 포위하며 다시 말라카 점령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 포르투갈을 축출하고 말라카를 차지하였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달리 영토나 종교의 포교보다는 무역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와 상업을 분리하여 통치하였다. 네덜란드는 중계무역을 독점하였으며 말레이 반도에 있는 주변국들과의 조약을 통해 뻬락지역의 주석채굴 및 판매에 관한 이권을 획득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17세기 동남아시아 무역을 장악했으나 18세기 들어서 점차 그 세력이 약해져 1799년에 해체되었다. 

 

네덜란드의 말레이 반도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을 배경으로 조호르 왕국은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일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말 조호르 술탄이 보르네오섬 동부의 부기스족을 군인으로 기용하면서 조호르 왕국은 오히려 부기스족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8세기 들어 왕국내부의 무기력과 함께 내분이 일어나 조호르 왕국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많은 권력은 외부세력에게 넘어갔다. 조호르 왕국의 쇠퇴로 일부 지역에는 빠항, 뻬락, 끌란딴, 뜨렝가누, 끄다 등 새로운 소국들이 독립국으로 등장하였다. 한편 슬랑오르는 부기스족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말라카 후면의 내지에 있던 소국가들은 후에 느그리 슴빌란이라고 불릴 국가로 통합되어 가고 있었고 말라카는 여전히 네덜란드령으로 남아 있었다. 

 

영국의 진출과 식민화과정

 

말레이 반도는 말라카 왕국의 멸망 (1511) 이후 반도 전체를 장악한 중앙집권적 단일국가가 형성되지 못한채 지방을 중심으로한 술탄들의 통치시대가 계속되었다. 16세기 초엽부터 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경략정책에 따라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차례로 이 지역을 자국의 영향권하에 편입한데 이어, 19세기 들면서 말레이 반도는 다시 영국의 영향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은 1784년 자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Kedah와 남부 Riau 지역에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곧 화란에 의해 축출당하였다. 한편, 1782년 시암과 전쟁상태에 있던 Kedah의 술탄이 페낭과 페낭의 반도쪽 연안지역을 영국 동인도회사에 할양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군수품과 기타 필요한 지원을 받기로 합의함에 따라 영국의 말레이 반도 진출이 시작되었다. 1819년, 조호르 왕국 왕위계승자인 Tunku Hussein 과의 조약으로 영국은 전략적 중심지이자 새로운 무역항구인 싱가포르를 할양받게 된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지배권 때문에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과 화란은 1824년 말라카 해협에서의 양국 세력범위를 확정짓는 영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말라야를 인도네시아와 교환하는 이 조약에 따라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은 네덜란드가, 북쪽과 동쪽은 영국이 지배권을 행사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후부터 말라카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화란은 말라카로부터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로써 말라카, 페낭, 싱가포르에 대한 지배는 화란으로부터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대신 영국은 수마트라 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화란에게 양도하였다. 

 

(가) 해협식민지 (1826-1873) 시기 

 

영국은 1826년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 그리고 중서부 해안의 빵꼬르 (Pangkor) 섬을 묶어 해협식민지 (Straits Settlements)라 불리우는 단일 행정체제를 구성하였다. 해협식민지는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잇는 무역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영국은 이전의 포르투갈이나 화란과 마찬가지로 주로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 세 개의 항구도시에서만 주로 활동하였고 내륙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동인도 회사아래 편입된 이들 해협식민지가 영국령 인도정부의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해협식민지의 주민들은 영국인을 중심으로한 유럽인과 (회사원 및 그 가족, 개인상인, 목사 등), 중국인, 수마트라에서 이주해온 자바인, 부기스인, 인도인들로 구성되었다. 인도정부는 당초 말라야 (말레이 반도)로의 노동력 이동을 금지하였으나 해협식민지의 저임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죄수나 병사들을 보내게 되었다. 한편 해협식민지 인구의 과반수를 점하는 화교들은 상인, 노동자, 무역업자 등으로 해협식민지 경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해협식민지의 주요 항구들은 자본주의 기업의 성장, 상업 및 농업의 확대, 국제무역에서 주석 수요의 증가, 중국 기업가 및 노동자의 유입 등으로 새로운 발전기회를 잡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불간섭 정책은 해협식민지의 독립적 발전을 보장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 말레이 연합주의 형성과 영국의 중앙집권적 통제체제 강화 

 

19세기 중반까지 말레이 반도는 농업중심의 봉건사회였으나 주석이 국제무역의 주요 교역상품이 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바 영국은 주석의 채굴 및 무역을 통한 이익을 확보하고 반도내 자국 사업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말레이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특히, 광산개발을 위한 저임노동력 수요에 따라 중국 남부지역으로부터 많은 수의 중국인들이 유입되게 되었는데 이들은 후일 말레이시아가 복합민족 국가로 특징지워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1873년 세계적으로 주석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영국은 이를 계기로 이전까지의 불간섭 정책을 간섭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Penang과 Malacca, Singapore를 점령한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주요 산품인 주석거래의 독점을 시도, 1874년 주석 생산의 중심지인 Perak 내전에 개입하여 반도내륙의 지배를 추진하였다. 이무렵 해협식민지와 주석광산 개발지로의 중국인 노동자 이주가 늘어나면서 1860년대 들어반도 서해안의 주석생산은 대부분 말레이인으로부터 중국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1862년 주석광산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Perak의 Sultan 왕위계승 문제와 복합되면서 Larut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고 한때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던 Larut 폭동이 1872년 재발하자 영국이 개입하게 된다. 해협식민지를 지배한후 말레이 반도 내륙으로의 진출구실을 찾던 영국은 Larut 내란이 해협식민지의 무역활동을 저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내란을 군사력으로 진압하고 1874년 Pangkor 조약을 맺었다. 빵꼬르 조약에서 영국은 술탄의 권한을 종교 (이슬람)의 해석과 말레이인의 관습에 관한 사항들만으로 제한하는 한편 모든 일반행정의 권한은 영국의 주재관 (Resident)이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이에 술탄이 크게 반발하고 초대 주재관으로 부임한 J.W. Birch가 말레이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은 군사력을 동원 술탄의 저항을 진압하고 Perak에 무력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영국은 Perak과 같은 방식으로 1874년 Selangor, 1886년 Negeri Sembilan, 1887년 Pahang의 주왕들과 조약을 맺고 1896년 이들 4개 지역을 통합하여 영국 지배하의 말레이 연합주로 통합하였다. 

 

영국은 1896년 서부 해안지역의 Perak, Selangor, Negeri Sembilan과 중부의 Pahang등 4개 주를 통합하여 "말레이 연합" (Federated Malay States)를 구성하였다. 말레이 연합은 총독제도를 도입하여 정부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행정 및 경제활동을 강화시킴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연합주 성립에서 2차 대전에 이르는 시기는 (1896-1941) 말라야의 정치, 경제, 사회변동에 가장 중요한 시기로서, 정치적으로는 식민정부가 구체제를 버리고 근대국가의 기초를 다진 시기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주석과 고무의 호황으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영국은 말레이 연합 성립에 이어 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1909년 프랑스와의 교섭을 거쳐 당시 태국의 보호령으로 되어 있던 Kedah, Perlis, Kelantan, Terengganu의 북부 4개주를 할양받아 각 주별로 조약을 맺고 고문관 (Advisor)을 파견하여 비연합주 (Unfederated Malay States) 형태로 통치하였다. 1914년에는 반도 남부의 Johor가 비연합주 형태로 흡수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12개 주는 연합주 (Perak, Selangor, Negeri Sembilan, Pahang), 비연합주 (Perlis, Kedah, Kelantan, Terengganu, Johor), 해협식민지 (Penang, Malacca, Singapore, Pangkor) 등 3가지 형태로 영국 영향력 하의 행정적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영국은 1896년 말레이 연합을 말레이 반도에 발족시킨 이래 일본군이 상륙한 1942년 사이에 말레이 연합을 중심으로 각 주 중심의 분권화된 통치형태를 쿠알라룸푸르를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적 통치구조로 전환시켰다. 1차대전의 전후 복구와, 같은 시기 구미 각국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자동차 산업은 말레이산 고무와 주석에 대한 폭발적 수요를 가져와 말레이 반도는 2차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구가하였다. 

 

영국의 지배아래 말라야는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도시의 성장, 서구식 교육의 보급 및 행정관료층의 등장, 계급구조와 경제구조의 변화 및 다종족 사회의 형성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식민세력에 대한 민족주의적 의식은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영국은 말레이인 엘리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식민정부의 행정관리로 채용하는 등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펴는 일방으로 중국인과 인도인들은 이민사회로 엄격히 규정하여 통치하는 인종별 분리통치 즉 divide & rule 로 일관하였다. 


 

 일본 점령기 (1942-1945) 

 

1941년 12월 "아시안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구호를 앞세운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말라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942년 2월에는 싱가포르도 일본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은 해협식민지, 말레이 연합주, 말레이 비연합주의 구별을 폐지하고 말라야를 단일 보호령으로 통치하는 한편, 말레이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술탄을 종교적, 정신적 지도자로 인정하는 등 말레인들을 우대하였다. 반면 중국 본토에서 국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일본은 중국인들의 반일감정과 대일저항을 의식, 중국인들을 가혹하게 박해하였다. 말레이인에 대한 우대는 말레이인들의 민족의식을 환기시켜 반영, 반식민 감정을 고취함으로써 일본의 전세에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목적에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인도인에 대해서는 인도인들의 반영태도를 고려할 때 일본과의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인도 본토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등 대일 저항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인도계 주민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일본 군정의 차별정책은 중국인 사회에 심한 반일 감정을 남겼으며,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에 심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항일 지하운동은 주로 영국의 지원과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중국인들이 중심이 된 말라야 항일 인민군 (MPAJA: Malayan Peoples' Anti- Japanese Army)은 영국 원조하의 지하운동을 통해 일본의 신 식민정책에 반대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후 말라야 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Malaya)의 건설에 있었으며, 이를 위하여 점령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 일본의 패배 뒤에 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공백상태를 이용하여 나라를 혁명적으로 인수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1945년 9월 영국이 다시 말라야에 돌아왔을 때에는 복합적인 인종문제와 아울러 이데올로기적인 공산주의 문제가 국내 갈등의 주요 요인으로 떠올랐다. 3년간에 걸친 일본 점령의 가장 큰 폐해는 말라야 경제의 피폐화에 있었다. 점령통화 (군표)의 남발과 고무 및 주석의 생산, 수출 시스템이 붕괴됨에 따라 말라야 경제는 몰락하게 되었다. 또한 식량자급계획의 실패와 식량 운송체계의 붕괴로 말미암아 주민은 극도의 곤궁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전후 영국의 복귀와 독립과정 (1945-1957)

 

일본의 패망과 함께 복귀한 영국은 1945년 10월, 싱가포르를 제외한 말레이 반도의 모든 주 (4개의 Federated Malay States, 5개의 Unfederated Malay States, 페낭과 말라카 등 2개의 해협식민지) 를 말레이 총독하의 강력한 중앙정부와 함께 하나의 식민 행정단위로 통합하는 것과 말라야의 비 말레이인들에게 말레이인들과 동등한 자격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말라야 연맹" (Malayan Union)안을 발표하였다. 연맹안의 주요 내용은 첫째, 말라야를 모국으로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 둘째, 페낭과 말라카는 계속 영국의 해협식민지로 잔류한다; 셋째, 싱가포르는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잔류하여 보르네오 북부의 영국령 사바와 사라와크에 대한 행정을 통제한다; 넷째, 각 주의 술탄은 그들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되 이들의 영향력은 종교문제만으로 국한한다 등이었다. 연맹안은 1946년 4월 시행에 들어갔으나 곧 말레이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반발의 주된 이유는 중국인 및 인도인 등 이민족에 대한 시민권 부여로 말미암아 원주민으로서 그간 말레이인에게만 주어져 왔던 기득권이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41개에 달하는 말레이인 단체는 1946년 3월 현재 말레이시아 연립여당의 중심세력이 된 "통일 말레이 국민조직" (UMNO: 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을 결성하고 말라야 연맹에 관한 협정에 일체 응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영국은 결국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연맹안을 포기하고 자치정부를 위한 조기선거 공약과 함께 1948년 2월 말레이인들의 의견을 전촉적으로 수용한 "말라야 연방" (Federation of Malaya)을 탄생시켰다. 새로운 연방안은 말레이인들의 특별한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시민권 획득을 위한 자격요건을 강화하였으며 각 주의 자치적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라야 연방안이 당시의 세계적 조류와는 정반대로 영국 식민통치의 사실상 부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본 점령기간중 민족주의 세력의 명맥을 유지해온 말레이 공산당 (MCP)는 영국의 식민통치 반대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인들이 주축이 된 말레이 공산당 세력의 식민통치 반대운동과 이에 맞선 영국과 말레이인의 반공운동은 종종간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다. 

 

MCP의 무장봉기가 발생된 직후 공포된 비상사태하에서 영국 식민정부는 말라야에 있는 모든 반영 정치단체를 불법화함과 동시에 이에 연루된 정치인사들을 체포, 구금함으로써 혁명적인 반 식민지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한편, 말라야 공산세력과의 게릴라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관건이 민심의 동향 (식민정부를 지지하는) 달려 있다고 판단한 영국 식민정부는 온건, 보수적인 중국인 정치 지도자들을 설득해 중국인 사회와 식민정부간의 유대를 강화시키려는 전략을 수립하게 되었다. 정부당국은 민심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역 의회 선거를 서둘렀으며 이를 계기로 1946년 "말라야 인도인 회의" (Malayan Indian Congress)와 말레이시아 중국인협회 (MCA: Malaysian Chinese Association) 등이 결성되었다. UMNO와 MCA는 1952년 실시된 쿠알라룸푸르 지방자치 선거에서 공동전선을 구축, 12개 의석 가운데 9석을 차지하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같은 UMNO와 MCA의 성공적인 선거연합에 MIC도 참여키로 결정함으로써 1953년 초 "동맹당"(Alliance Party) 체제가 결성되었다. 동맹당은 1955년 실시된 초대 연방의회 선거에서 전체 52석의 의석 가운데 5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 UMNO의 의장인 Tunku Abdul Rahman이 초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55년 선거에서 동맹당이 압승을 거둔 것을 계기로 말라야의 정치 지도자들은 독립 획득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마련에 착수하였다. 1955년 12월 개최된 UMNO의 총회에서 라만을 중심으로 하는 말레이 정치 지도자들은 늦어도 1957년 8월 31일까지는 말라야의 독립을 획득할 것을 서약하였다. 라만 내각은 영국과 독립을 위한 협상에 착수하여, 1956년 1월 런던에서 열린 말라야 연방 헌법회의를 거쳐 동년 6월 독립 말라야의 헌법을 마련할 Reid 제헌위원회 (Reid Constitutional Commission)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가 Merdeka 헌법의 최종안을 준비하는 동안 독립후 말라야에서 말레이인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계속적으로 보장하는 문제, 언어 및 시민권 등의 민감한 쟁점들이 표면으로 부각되었으나 동년 2월 6일 합의에 도달하였다. 1957년 2월 공포된 새 헌법에 따라 마침내 독립을 획득한 말라야 연방은 영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독립 말라야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한편 독립헌법 (Merdeka Constitution)의 주요 내용은: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며; 시민권을 포괄적으로 적용하고 (탄생, 거주, 사용언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 주왕회의에서 선출되는 Yang di-Pertuan Agung이 5년 임기의 국왕으로 국가원수가 되며; 선출제의 하원 (Dewan Rakyat)과 임명제의 상원 (Dewan Negara)으로 구성되는 양원제 도입; 독립후 10년 이내에 말레이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확정한다는 등으로 되어 있다. 1957년 8월 15일 입법위원회의 헌법인준에 따라 동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이 독립국으로 출범함으로써 영국이 말레이 반도에 발을 들여놓은지 170여년만에 말레이 주민들은 주권을 되찾게 되었다. 말라야의 독립은 20세기 중반 세계 도처에서 생겨난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대부분 식민종주국과의 폭력적 갈등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국과의 협의와 평화적 상호협력을 통하여 단계적, 시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적 양상을 지니고 있다. 
 

 말라야 공산당의 준동과 비상사태 (Emergency) 선포

 

일본의 패전 이후 다시 말레이 반도로 돌아온 영국은 1948년 2월 말레이인들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반영한 말라야 연방 (Federation of Malaya)를 탄생시켰다. 새로운 연방안이 말라야의 독립보다는 오히려 영국식민 통치의 부활에 목적이 있다고 판단한 말레이 공산당 (MCP)은 영국의 식민통치 반대와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말라야 공산당은 당의 폭력 전위조직인 말라야 민족 해방군 (Malayan Races Liberation Army) 을 중심으로 말레이인들의 부를 착취하는 대농장 (Plantation)과 광산제도를 폐지하고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폭력투쟁을 전개하였다. 

 

말레이 공산당의 무력투쟁 양상이 격렬해지자 말라야 정부는 1948년 7월 18일 전국에 비상사태 (Emergency)를 선포하였다. 이전까지 주로 영국인 관리와 부르조아 농장주들의 암살, 태업과 스트라이크 조장 활동을 벌이던 말라야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비상사태 선포를 계기로 정글지역으로 후퇴하여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에 들어간다. 이들의 게릴라 활동은 당시 회복세에 놓여 있던 말레이 경제의 발전과 독립 획득을 지연시키게 되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비상사태 선포를 계기로 말라야에 대한 독립허용을 미루는 한편, 우선 공산 반란군을 일반 시민들로부터 고립시켜 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이같은 고립화 정책이 직접 군사력 사용을 통한 토벌작전과 함께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말라야 공산당의 무장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비상사태는 1960년 해제되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 잠잠하던 공산당 활동은 1975년의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화를 계기로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말레이 반도 북부지역 즉, Kedah, Perak, Kelantan, Pahang 등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한 말라야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체제동요를 위한 테러 행위를 강화하였다. 말라야 공산당은 이후 1989년 말, 무력투쟁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기까지 인종갈등과 더불어 말레이시아 국내정치의 가장 위험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말레이시아 정부는 말라야 공산당 격퇴를 위해 취했던 1948-1960년 사이의 "비상사태"를 "국내보안법" (Internal Security Act)으로 대체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공산주의 이념의 전파를 막았으나 후일 국내보안법은 야당 탄압의 도구로 변질되게 되었다. 

 

한편, 공산주의와의 갈등을 계기로 신생 독립 말라야 연방은 외교와 내치에 있어 반공을 주요한 국시로 삼게 되었다. 라만 수상은 독립 직후 반공주의의 월남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던 태국, 공산 반도들과의 게릴라전에 시달리던 필리핀을 방문, 국제 공산주의에 대한 공동 대처방안을 모색함으로써 독립 말라야 연방의 외교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말레이시아 연방 (Federation of Malaysia)의 탄생 

 

1955년 선거에서 동맹당의 압승을 이끈 라만은 말라야 연방의 초대 수상이 되어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이때부터 싱가포르, 북보르네오 (사바), 사라와크, 브루나이 등을 포함하는 '말레이시아' 구상을 발표하였으며, 1961년 5월 싱가포르를 방문한 라만은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안을 정식으로 선언하는 한편, 이의 논의를 위한 영국과의 협의회를 구성하였다. 1962년 7월 31일 마침내 영국이 자국령인 북 보르네오 (사바)의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허용키로 동의함으로써 연방 성립을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라만의 구상을 강력하게 뒷받침한 것은 영국이 상기 4개의 지역에서 공히 원만한 협력관계를 구축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구상은 내외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1962년 브루나이에서는 연방결성 저지와 브루나이-사바-사라와크를 연결하여 별도의 독립국을 결성하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필리핀과는 사바의 영유권 문제로, 그리고 새로운 거대 연방의 탄생을 영국을 등에 업은 신식민주의 국가 건설로 판단한 수카르노 정권의 인도네시아와는 상호 무력을 사용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Konfrontasi] 그러나 말레이시아 연방 참여에 대한 보르네오 주민들의 찬성도를 조사한 유엔은 대다수의 주민들이 연방 참여를 찬성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1963년 9월 13일 마침내 싱가포르와 사바, 사라와크가 포함된 말레이시아 연방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한편, 다른 지역들과 더불어 연방에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논의하던 브루나이는 석유이권에 대한 이견으로 연방에 참여치 않게 되었으며, 이어 1963년에는 싱가포르가 연방에서 탈퇴, 영연방내의 독립국으로 복귀함으로써 현재의 말레이시아가 형성되게 되었다. 


 

복합민족 사회의 형성과 1969년 인종폭동 사태 

 

말레이시아의 복합민족 사회의 형성은 16세기 초엽 식민지 시대 개막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외부로부터의 대규모 이주가 있기 전에는 말레이인과 토착 원주민들이 반도 전체에 고루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으며 일부 해안 지역에 소수의 인도인과 중국인, 인도네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대규모 이주는 세 갈래로 이루어졌다. 


 

(가) 인도네시아인들의 유입 

 

초기단계의 이주민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식민통치의 발전과 더불어 차와 향료, 커피, 담배 등 열대작물의 수요가 급증하고 대규모 미작을 위한 농경지가 조성되자 인도네시아인들의 유입이 활발해졌다.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들은 농업에 적합한 Negeri Sembilan, Selangor, Perak 등 반도 서해안의 저지대에 정착하였다. 문화와 종교, 인종적 유사성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인들은 말레이인 등 원주민들과 큰 갈등없이 결혼 등을 통하여 그들의 사회에 동화될 수 있었다. 


 

(나) 중국인 사회의 형성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영국 식민당국은 주석 광산에서 일할 중국인 노무자들을 대거 수입하였다. 근대사회로 발전해 가면서 주석의 다양한 쓰임새를 알게된 영국인들은 말레이 원주민들을 주석광산에 동원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이들을 대체할 노동력을 외부로부터 조달하기로 하고 당시 청조 말기 아편전쟁의 여파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중국인들을 대규모로 끌어들였다. 중국인들은 특유의 근면성을 발휘하여 주석광산의 본격적인 개발에 참여한 것은 물론 상업과 농업분야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으며 이들에 의해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과 고무농장 등 플란테이션 산업이 본격화되었다. 중국인들은 슬랑오르와 뻬락의 주석 광산지대로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말레이 반도뿐만 아니라 사바와 사라와크의 상업지역에도 손을 뻗쳐 경제활동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다) 인도인의 유입 

 

1차 세계대전의 전후 복구와 같은 시기에 구미 각국에서 불붙기 시작한 자동차 산업은 말레이산 고무와 주석에 대한 폭발적 수요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른 국가 세입의 증대로 말레이 반도에서는 철도와 항만건설 등 공공사업이 급속도로 전개되었다. 이에 따른 노동력 수급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식민당국은 인도인 노무자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인도인들은 유입 초기 경제활동의 중심지인 뻬락북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다가 고무농원의 발전에 따라 조호르, 슬랑오르, 뻬락 남부 등지로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라) 이질적인 민족문화의 형성 

 

세 갈래로 말레이 반도에 이주한 외래인들은 (인도네시아,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의 문화를 이질적인 복합문화로 특징지우게 되었다. 즉, 인도네시아인들은 현지인들과 쉽게 동화하여 말레이 사회로 편입된 반면 중국과 인도인 이주민들은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생활양식을 포기하고 이슬람 종교와 말레이식 전통을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말레이 사회에 동화되는 대신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수한채 말레이시아 사회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말레이시아는 원주민과 중국인, 인도인들이 각각의 문화적 전통과 관습, 종교, 언어 등을 유지한채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이질적 복합민족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 민족간의 경제적 기능분화 

 

-주거지역의 분화: 원주민과 말레이인, 그리고 중국인, 인도인 이주자들은 그들의 종교, 문화적 행동반경에 따라 점차로 이질적인 군거지를 형성해 나갔다. 대부분의 말레이인들은 농촌지역이나 도시 근교의 비상업지역에 거주하며 전근대적인 경제활동에 종사한 반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도시의 상업지역이나 해안의 무역지대에 자리잡았다. 또한 인도인의 대다수는 고무농원 등 열대작물을 대규모로 상업재배하는 플란테이션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경제활동의 분화 (경제적 이질성): 각기 별개의 군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들은 또한 각기 다른 형태의 경제활동을 영위하여 왔다. 도시근교 농장지역이나 기타 농어촌에 거주한 말레이인들은 생산성이 낮은 전통적 부문의 농민경제와 어업에 종사한 반면 유럽인과 중국인, 그리고 인도인들은 생산성이 높은 근대적 부문의 공장, 농장, 그리고 무역회사의 기업가로 관리인으로, 고용인으로 종사하였다. 중국인과 인도인들은 근대적 부문에서 유럽인들 바로 다음의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보다 많은 혜택을 누렸고 또한 독립이후 영국인들이 철수한 다음에는 그들의 지위를 곧바로 물려받을수 있었다. 

 

반면 근대적 부문에서 말레이인들이 활발히 진출한 분야는 영방정부와 주정부의 공무원 직업부문이다. 영국 식민정부는 이 분야에 말레이인을 고용하기위해 일정한 비율을 할당하였고, 군대와 경찰부문은 민간부문에 비해 임금이 낮아 비말레이인들이 진출하기를 꺼려하였다. 반면 비말레이인이 장악하고 있는 상업과 산업분야에서 말레이인들은 사회경제적 차별을 받았다. 이는 영국과 중국계통 은행의 거래거부 (말레이인 사업가는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도소매업 및 무역업 등의 경우 조합에 가입시켜주지 않거나 민간부문에서 직장을 찾는 경우에도 친족이나 언어, 혹은 문화적 장벽과 선호에 의해 이들의 취업을 가로막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며 중국인과 인도인이 경영하는 점포들도 말레이인을 고용하려 하지 않는다. 최근까지 인도인들이 경영하는 점포에 사람이 필요하면 인도에서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1969년 5월 13일 인종폭동사태 발생 

 

(1) 발단 

(2) 사건의 배경: 복잡한 인종구조 

(3) 사후처리 

-정권교체 

-국민통합을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Rukunegara (인도네시아와 비교) 

-부의 공평분배를 통한 분배정의, 인종간 격차해소 위한 경제정책 시행 (NEP), 마하티르의 말레 이 딜레마 

-인종문제의 민감성 고려, 안정해치는 발언과 언행은 엄격히 법으로 금지, 의회에서도 터부 

1. 1969년 5. 13 인종폭동사태

 

(1) 사건의 성격 

 

May 13 인종폭동사태란 1969년 5월 9일의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동맹당의 지지율이 현저히 떨어진 반면 비말레이계 야당들의 지지율이 크게 상승한 것을 계기로 비말레이계 주민들이 (대부분 중국인) 승리의 행진을 벌이자 이에 반발한 말레이인들이 비말레이인들을 공격함으로써 촉발된 인종폭동사태를 말한다. 이 사고로 196명의 사망자 (정부 공식통계)가 발생하였는데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비말레이계의 중국인들이었다. 

 

(2) 발단과 원인 

 

가. 1969년 총선결과 

 

인종폭동사태의 근원적 이유는 영국식민통치로부터 말미암은 복잡한 인종구성과 인종간의 갈등이었으며, 사건을 촉발한 직접적 원인은 1969년 선거에서의 동맹당의 지지율 하락에 있었다. 동맹당은 비록 정부를 구성하기에는 충분한 다수의석을 확보하였으나 득표율이 10%나 하락하였으며 이에따라 2/3의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 특히 동맹당내의 중국계 정당인 MCA는 1964년 총선때 얻은 27석에 비해 절반이 줄어든 13석의 연방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UMNO역시 지지율이 크게 하락한 반면 말레이계 야당인 PAS (Parti Islam Se-Malaysia: 범 말레이시아 이슬람당)와 중국계 제 1야당인 DAP (Democratic Action Party: 민주행동당)와 Gerakan (Gerakan Rakyat Malaysia)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나. 동맹당 패배의 원인과 선거운동과정 

 

동맹당의 선거패인은 선거전략의 실패와 민심의 이반에 있었다. 동맹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말레이인의 지지가 매우 중요하였으나 과거 선거에서 보여졌던 말레이인들의 전폭적 지지와 야당의 분열에 안주하여 적극적인 선거전략을 펼치지 않았다. 반면 동맹당 정부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에 미흡하다고 판단한 말레이인들, 특히 전통적 속성이 강한 Kelantan, Trengganu, Kedah, Perlis 등 북동부 해안지역의 말레이인은 더 강한 이익대변정당을 찾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파의 말레이정당인 PAS와 UMNO로 표가 분산되었다. 

 

반면 비말레이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언어와 문화를 지켜야겠다는 결의를 굳게 하여서 동맹당이 아닌 다른 인종적 정당을 적극 지지하였다. 특히 DAP와 PPP (Peoples' Progressive Party: 인민진보당)는 공히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주창하여 중국어와 타밀어의 공용어 채택, 이를 매개로 한 자유로운 교육의 실시를 주장하면서 이같은 국민통합정책의 성공적 사례로 스위스와 소련을 들었다. 특히 PPP는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를 비난할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동맹당의 소극적 선거전략 

-동맹당 특히 UMNO에 대한 말레이인들의 실망감 

-야당의 적극적 선거전략 

-선거구 협상을 통한 야당간의 유기적 협조 

 

다. 동맹당 체제의 약화 

 

1969년 총선의 결과는 몇가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선거를 계기로) UMNO, MCA, MIC가 각각 그들이 대표하는 인종집단의 지지를 실제적으로 유지하여야 하며, 각 인종집단 지도자들간의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유지되어져야 한다는 동맹당 체제의 전제가 무너지게 되었다. 즉, UMNO, MCA, MIC의 3개 인종연합정당인 동맹당은 UMNO의 경우 PAS의 강력한 도전, MCA의 경우 총선대패로 말미암아 그 존립 자체가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말레이인중 상당수가 비말레이인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말레이계의 정치적 우위확보에 필수적 요건이었던 인종내 통합성과 단결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총선 패배후 UMNO내의 극단주의자들은 말레이인의 정치적 우위, 동맹당 설립과정의 제협정, 그리고 동맹당내의 UMNO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대첵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연방의회 선거에서 UMNO가 67명의 후보자중 51명을 당선시킨 반면 MCA의 대패로 말미암아 동맹당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이제까지 MCA에 할당되던 내각의 통산산업부 장관과 재무장관직을 UMNO가 담당할 것과 Syed Nasir, Ghafar Baba 등 말레이 민족주의자들의 입각을 주장하였다. 


 

(3) 사건의 발생과 의회기능 정지 

 

-주의회 선거의 우려할만한 결과 

-특히 Selangor주 

한편 주의회 선거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연방수도인 K.L.이 위치해있으며 전통적으로 말레이인들의 아성으로 여겨지던 Selangor주의 선거결과였다. 총 14/28석을 차지하는데 그친 UMNO의 Harun bin Idris 주수상은 재집권을 위해 Gerakan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추진하였으나 Gerakan은 오히려 DAP와의 연립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총선 결과를 자신들의 승리로 받아들인 Gerakan과 DAP의 지지자들은 K.L.에서 승리의 행진을 벌이면서 Selangor주의 주수상인 Datuk Harun Idris의 관저로 몰려가 그의 사임을 촉구함으로써 말레이인들과 충돌을 빚었다. 닷새간 전국적으로 계속된 인종간의 유혈충돌로 인해 수 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희생자의 대부분은 비말레이계 주민들이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것을 우려한 국왕은 국가긴급사태를 발령하고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4) 사후처리과정 

 

5. 13 사건 다음날 국왕이 비상사태를 선포함에 따라 헌법과 의회의 기능이 정지되고 동 말레이시아에서의 선거가 연기되었다. 이에 따라 비상사태 기간동안 행정권을 담당할 NOC (National Operations Council: 국가운영회의)가 구성되었으며 의장으로 Tun Abdul Razak 부수상이 임명되었다. 위원장과 말레이계 위주의 8인 위원으로 구성된 NOC는 사실상 내각의 기능과 권한을 수행하였다. NOC의 구성원이 대부분 말레이였다는 사실은 말레이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우위를 굳게 지키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NOC는 1969년 10월 9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5. 13 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에 관계되는 헌법의 "침해될 수 없는 조항"이 위협받은 탓이라고 지적하였다. 

 

NOC는 말레이인의 정치적 우위를 지속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국민들, 특히 비말레이인들에게 "침해될 수 없는 조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한편 집단간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분열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법제정을 추진하였다. 

-정치적 집회 및 국내외 출판물의 사전검열을 통해 말레이인들의 특별한 지위, 공용어, 시민권, 통치자들의 주권과 같은 인종간 감정을 해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의 논의를 금지. 

-시민권 재론: 헌법 제 30조에 의하여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들에게 정부의 재심을 위해 증명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포고령 발표. 시민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비말레이인들에게 심리적 압박. 이는 일부 과격분자들에 대한 시민권을 재고할 수도 있다는 말레이 정부의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말레이인들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는 한편 말레이계내 극단주의를 진정시키는 의미. 

-말레이인을 위한 법 개정: 정당이나 개인이 인종적 감정을 자극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치안법 (Sedition Act) 제정. 이를 무기로 헌법 제 152조 국어, 153조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 제 181조 말레이 군주의 주권 및 지위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치안방해죄로 규정. 

또한 사회단체법 (Societies Act) 개정을 통하여 그 단체의 구성원이 치안법을 상습적으로 위반한 경우 해당단체의 등록을 취소할 수 있도록 명문화. 

-국가이념에 관한 선언 (Rukunegara) 채택: 

질서가 안정되고 인종적 감정이 다소 가라앉자 1970년 9월 라만은 라작에게 정권을 이양하였으며 라작 정부 출범과 함께 의회가 재개되었다. 의회는 곧 민주적 절차를 제약하고 그러한 제약을 통해 사실상 말레이인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하는 헌법개정안을 채택하였다. 

 

◆ 국가통합을 위한 신경제정책의 시행 

 

신경제정책은 1969년 인종폭동과 경제분야에서의 종족간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극약처방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인식이 나은 대응조치였다. 정부공식통계에 의하면 1971년 당시 자본 소유비율은 외국인 63%, 비말레이인 34%, 말레이인 3% 미만으로 나타났다. 

-목표: NEP는 1970-1990년의 20년 사이에 말레이인들의 자본소유비율을 30%, 중국인 40%로 끌어올리는 한편 외국인 소유비율은 30%로 낮추는 것으로 되어있다. 

-시행방법: 이를 위해 (목표달성 수단) 기업소유권, 세금감면, 투자보상, 고용비율, 교육기회 등에 있어 말레이인들에게 특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시행과정 및 결과: NEP는 1990년 끝났다. 그러나 말레이인들의 자본소유는 약 20% 수준으로 밖에 향상되지 못하여 애초에 목표한 수준에는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문제 (인종내의 계급갈등)도 발생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새로운 20개년 정책을 기획할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성과와 부작용

-사회변동

-1990년 NEP 잇는 NDP와 Vision 2020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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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역사

(1) 선사시대: 민족의 유래   (2) 힌두-불교시대 (BC 1-14세기)  (3) 이슬람의 전래와 말라카왕국

(4)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  (5) 네덜란드의 진출  (6) 영국의 진출과 식민화 과정

 (7) 일본 점령기 (1942-1945)  (8) 전후 영국의 복귀와 독립과정 (1945-1957)

 (9) 말라야 공산당의 준동과 비상사태 선포  (10) 말레이시아 연방 (Federation of Malaysia)의 탄생 

(11) 복합민족 사회의 형성과 1969년 인종폭동 사태
 

1. 선사시대: 민족의 유래

 

동남아는 현대의 중요한 4대 문명, 즉 중국, 인도, 이슬람 그리고 서구문명 등 모든 문화가 공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역이다. 이러한 문화적 패턴은 동남아의 고유전통에 다양성을 더해 주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이러한 유입문화는 토착생활에 접목되어지거나 또는 흡수되어서 동남아시아 특유의 문화적 다양성을 연출하였다.

 

동남아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역에서는 BC 약 100만년전의 사람 두개골 (피테칸트로푸스)이 중부 자바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동남아 지역에 가장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약 2만년전 빙하기 말에 이 지역에서 살았던 구석기 시대인들로 오늘날 필리핀의 네그리토스(Negritos)인과, 사라와크의 뻬난 (Penan), 사바의 룽우스(Rungus)족, 말레이 반도의 산간부족인 오스트라로이드 베도이드 (Australoid Veddoid) 또는 오랑 아슬리인들의 조상들이다. 이들은 키가 작고 곱슬머리로 짐승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최초의 말레이인들이 북으로부터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기원전 약 2500-1000년 사이의 신석기시대로 추정되는데 Proto-Malays라 불리우는 이들은 오늘날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그리고 버마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 당시의 민족이동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약 2-3세기에 걸쳐 또다른 일단의 말레이인들이 중국과 티벳으로부터 말레이 반도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를 관통, 인도네시아 제도 등지로 퍼져나갔는데 이들 후기 말레이인(Deutro-Malays)은 이전의 이주민들보다 앞선 영농기술과 새로운 금속기술을 가져왔다. 이 청동기와 철기문화는 맨처음 청동기가 제조된 흔적이 발견된 베트남의 마을 이름을 따서 동선(Dongson) 문화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 예술형태는 중국의 것과 연관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동선문화기가 시작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인도문화의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중국과 인도문화가 전래하기까지 토착적인 동남아의 문화적 특징은 이미 구체화되어 있었다. 기술면에서 이들 주민은 논에 물을 댈 줄 알았고, 짐승을 길들였으며, 야금술을 터득했고, 계절풍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항해술을 익혔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모계중심의 전통에 따라 자손의 혈통과 상속을 책임지는 여성이 사회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촌락들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원주민은 이들 프로토 말레이와 듀트로 말레이인의 후손, 오랑 아슬리 등을 통칭하여 부미뿌뜨라(Bumi Putera)라 칭하고 있다.

 

2. 힌두-불교시대 (BC 1 - 14세기)

 

말레이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새로운 역사발전은 BC 1세기경 이 지역과 중국 및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와의 정규적 교역활동이 개시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하여 해상무역의 교차로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관심을 기울여서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이 서로 경쟁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였다. 동서교역이 활발하던 이 시기에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지역에서 일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지만 서기 7세기 이전까지는 이 지역에서 말레이족을 중심으로한 본격적인 정치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 불교왕국 스리비자야의 등장

 

말레이족에 의한 본격적인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7세기부터로 중국의 역사기록과 이 지역에서 나오는 비문 등의 자료에 의하면, 수마트라 남부지역에서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무역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스리비자야 (Srivijaya)가 7세기에 가장 영향력있는 고대국가로 등장하였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7세기 말부터 약 600년 동안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그리고 서부 쟈바와 서부 칼리만탄 일부에 걸쳐서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전략요충인 순다와 말라카 해협을 지배한 스리비자야는 상업상의 우월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구들을 건설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무역선들로부터 통행세를 거두었다. 한편 스리비자야는 중국에 대해서는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서기 670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사절을 보냈으며 이같은 사절의 파견은 그후 76년간 계속되었다.

스리비자야는 대승불교 왕국이었다. 중국의 불교도 이칭 (Iching)이 672년 한 페르시아의 배를 타고 Palembang에 도착하였다. 그는 인도로 가기 전에 범어를 공부하기 위하여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스리비자야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의하면 스리비자야에는 천명의 대승불교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 말레이 반도 북부의 Ligor에 775년 범어로 세워진 비문에는 대승불교 사원을 세운 스리비자야 왕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어 스리비자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한편, 서기 750년경 대승불교는 자바에 나타난 사일렌드라 (Silendra) 왕조의 보호아래 한동안 중부 자바에 전파되었으나 곧 힌두교로 대체되고 말았다. 당시 열렬한 불교사찰 건설자인 사일렌드라 왕에 의해 772년 세워진 것이 Borobudur 사원이다. 보로부드르란 발음하기 힘든 부미삼바라부다하라 (Bhumisambarabhudhara)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보살의 10계단 위에 선을 쌓은 산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산위에 만든 9단의 거대한 사리탑으로 둘레가 3마일이나 되는 원형 회랑과 4백개의 불상을 가지고 있다. 엷게 양각된 조각들은 신성한 대승불교의 경전내용과 세속 자바인들의 생활, 관습 등을 설명해주고 있다. 공격적 성향의 사일렌드라인들은 앙코르, 안남 등과 싸웠으며 850년경 결혼동맹을 통하여 스리비자야와 통합하였다.

 

(나) 스리비자야의 쇠퇴: 스리비자야는 11세기 초, 동남아시아 및 중국과의 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남인도의 촐라(Chola)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었다. 촐라국은 1011년 스리비자야 지배하에 있던 주요 무역항을 공격하였고 스리비자야의 가신국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에 13세기 들어 스리비자야가 크게 쇠퇴하면서 당시까지 스리비자야의 영향권하에 있던 말레이 반도는 태국의 소승불교 왕국 영향권하로 편입되었으며 보르네오는 자바의 힌두왕국인 Majapahit에 의해 지배되었다. 스리비자야는 1377년 마자빠힛 왕국에 의해 멸망된다. 스리비자야는 끝까지 수마트라에 거점을 두었으며, 이때까지 말레이 반도에 거점을 둔 왕국은 없었다. 즉, 힌두-불교시대 (스리비자야 왕국부터 15세기 초 이슬람 왕국 설립전까지)의 대부분 기간동안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거주민들은 자바나 수마트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다) 힌두-불교문화의 마자빠힛(Majapahit) 왕조

 

자바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고대왕국인 Majapahit 왕국은 1294년부터 포르투갈이 향료섬에 들어온 1520년까지 2세기 이상 존속되었다. 마자빠힛 왕국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전 지역, 칼리만탄의 거의 대부분과 동부 쟈바에 걸쳐 거대한 속국을 거느린 대왕국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1330-1364년 사이 재임했던 가자마다(Gaja Mada) 재상으로 인도네시아 최초의 제국건설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당시 하얌 울룩(Hayam Wuluk) 왕과 함께 해양 동남아의 대부분에 대해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당시 마자빠힛의 영토는 말레이 반도와 1377년 멸망한 스리비자야를 포함한 수마트라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이 죽은후 왕국이 분열하기 시작,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영토가 줄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때 새로운 정치와 종교세력들이 나타났다. 아유타야 (Ayuthia)는 남쪽으로 세력을 뻗어오고 중국인들은 교역권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슬람의 출현이었다. 이후 오랜 기간동안에 걸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이슬람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마자빠힛 왕국은 힌두의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교역권도 상실하게 되었다. 정치의 중심은 다시 말라카 해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마트라쪽이 아니라 말레이 반도의 서쪽 해안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3. 이슬람의 전래와 말라카 왕국

 

이슬람인들은 인도에서 북부 수마트라를 경유해서 말라야에 왔다. 1292년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돌아가던 마르코폴로는 북부 수마트라에서 2개의 이슬람 공동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말라야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트렝가누(Trengganu) 강의 동북쪽 해안에서 발견된 돌조각에서이다. 아랍어로 새겨져 있는 이 돌은 1326년-138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바섬 전체가 훗날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자바 지역에 광범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말라카 왕국을 통해서였는데 말라카 왕국은 말레이 반도에 거주하는 말레이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15세기 중엽까지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 소국가들과 수마트라 동부 연안의 전역을 그 세력권 하에 두었다.


 

(가) 말라카 왕국의 건설

 

스리비자야가 마자빠힛 왕국에 속국으로 전락한 후 스리비자야 왕국의 한 왕자였던 빠라메스와라 (Parameswara)가 빨렘방으로부터 말라카로 건너와서 1403년 이 지역을 근거지로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를 계기로 말레이 반도에의 역사시대가 개시되는데 빠라메스와라의 이복동생인 무자파르 샤(Muzaffar Shah)는 이슬람을 국교화하여 서아시아 및 인도 방면의 부유한 이슬람 상인을 끌어들여 말라카 항의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한편 빠라메스와라는 말라카 해협을 경유하는 모든 선박이 말라카를 거쳐갈 수 있도록 동 지역을 국제 항구도시로 육성해 나갔다. 말라카국은 동서 해상교통로의 요충인 말라카 해협 중심지를 독점지배하고 말라카 항을 적극 활용하여 인도와 페르시아, 시리아를 거쳐 동 아프리카 연안과 지중해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통상범위를 확보하였으며 이 무역망을 통하여 각종 생산품들을 세계 전역으로 교역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말라카는 세계통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스리비자야의 유산을 계승하게 되었다. 말라카 왕국은 15, 16세기에 번영기를 맞았으며 당시 인근 지역을 직할지, 속령, 조공국으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초기부터 말라카 왕국의 주요 위협세력은 씨얌(Siam)족이었다. 그러나 말라카는 1405년 이래로 명나라의 보호를 받았고, 자주 명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건국이래 말라카 왕국은 계속해서 각종 사절단을 북경에 보냈다.

 

말라카 왕국의 번영은 현명한 통치자들이 천연의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하여 국제무역의 공동체를 창출해냄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의 번영은 멀리 동방의 나라로부터 간접무역에 의해 수입되는 고급향료와 양질의 열대작물에 매료되어 있던 유럽열강들로 하여금 말라카와 직접 접촉에 나서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포르투갈의 식민통치자들은 이로써 말라카 왕국의 정복이 새로운 국제무역망을 창출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서구열강은 앞을 다투어 커피, 차, 담배, 사탕수수 등 양질의 열대작물의 보고인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제도를 정복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이곳의 각종 향료와 열대작물은 말라카 왕국이 장악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망을 통해 서구의 여러나라로 흘러들어갔다.

 

향료는 유럽인들에게 대단히 필요한 상품이었다. 유럽에서는 겨울 동안 많은 수의 가축을 생존시킬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가축이 도살되었고 그 고기의 선도를 유지할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소금과 향료가 이용되었고, 수입한 향료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동북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후추였다. 오랫동안 맛없는 음식에 길들여져 온 유럽인들에게 말루꾸(Maluku) 군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육두구는 실로 훌륭한 향취와 음식의 맛을 일깨워 주었다. 더구나 정향과 육두구가 향료의 역할뿐만 아니라 탁월한 약재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육두구는 특히 두뇌를 강화시키고 기억을 명료하게 하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동시에 몸을 따뜻하게 보해주는 다용도의 신비한 향료였다.

 

각종 향료와 양질의 열대작물은 초기에 아랍의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서 서구로 운반되었다. 일찍이 카이로에서 말루꾸까지 해로를 개척했던 이들은 말루꾸에서 정향과 육두구를 구입하고, 쟈바 서북부의 반땀(Bantam)에서 후추를 샀으며, 기타의 열대작물은 주로 이방인인 중개상들로부터 구입하는 절차를 거쳤다. 아랍상인들은 향료제도에서 사들인 향료와 열대작물을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까지 운반하였다.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망을 손에 넣음으로써 막대한 동양의 부를 한꺼번에 장악할 목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포르투갈이 서구 열강중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 군도로 내도하게 된다.

 

(나) 이슬람 시대의 개막과 말라카의 쇠망

 

말라카 왕국은 이 지역에서 힌두-불교 시대의 막을 내리고 이슬람 시대의 시작을 가져왔다. 이슬람은 아랍 및 인도상인과의 교역과정에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말라카 왕국은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무역을 통해 말레이어를 상업용어로 각지에 전해 오늘날의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모태가 되도록 하였다. 이슬람교는 말라카로부터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말레이 소국가들로 전파되었고, 교역로를 따라 인도네시아 군도로까지 전해졌다. 이슬람교는 말레이인의 주요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그들의 생활양식과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 왕국은 말레이 술탄 상속체계의 미확립, 식량 등 생필품의 대 자바의존, 지배계급과 민중사이를 연결하는 완충계급 부재 등의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1511년 포르투갈의 공격을 당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침공하여 말라카시를 점령하면서 말라야는 포르투갈과, 그때까지 말라카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체왕국, 부기스, 미낭까바우족의 활동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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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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