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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일애국과 국민 교육에 함께 한

          

   강우규 전도사
 
 
   강우규(姜宇奎) 전도사는 1859년 6월 5일 평남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 전도사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하였지만 남달리 지혜와 의기가 대범하여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소년기에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의술을 배워 생활방편으로 삼았으나 전통적 우리학문으로서는 개항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으므로 개화사상에 관심을 갖던 중 1884년 함남 흥원군으로 이주하여 장로교에 입교하여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만주로 이주하던 1911년까지는 흥원에서 인술을 베풀면서 읍내 중심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도 모으게 되었다. 그는 곧 홍원 읍내에서 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연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계몽운동은 을사조약으로 인한 나라의 위기감이 큰 이유였고 당시 관서, 관북 지방에서 존경을 받던 이동휘의 영향이 컸다.


   그는 이동휘의 애국운동에 크게 감동되어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간의 친교는 훗날 연해주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1911년 북간도 화룡현 투도로 망명하였다. 이때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를 더욱 자주 만나게 되었고 독립운동 방법을 찾던 중 계봉우가 쓴 「만고의사 안중근전」에 매료되어 자신도 안중근 의시와 같은 인물로 산화되기를 결심하였다.


   일차대전이 발발하자 일제의 눈치를 보아야했던 제정 러시아 정부가 연해주 일대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할 때 1915년 우수리 강대안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였는데 이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또한 이곳은 평소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구상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만주 지방을 떠돌던 한인동포들을 불러모아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을 건설하고 1917년에 동광학교를 개교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매진하였으며 교회를 세워 기독교의 박애주의를 표방하며 노령과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을 집결하는 일을 진행하였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주의가 도도히 부상하자 이같은 국제정세변화에 편승하여 민족 역량을 집결하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동광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를 상대로 독립 선포식을 거행하고 요하현 일대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으로 부친 이승교와 김치보, 박은식 등이 결성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하였는데 독립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자 다른 독립 운동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때 국내 정세는 일제가 총독을 교체하며 무단 정치를 중단하고 문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하세가와 대신 싸이토를 임명한다는 정보를 듣고 새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구입해 두었던 영국제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사이에 차고 6월 14일 선편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원산항에 도착하여 시내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원산에서 강 전도사는 최자남, 허형 등 동지를 만나 거사 계획을 세우고 8월 5일 서울에 잠입하여 안국동 김종호 집에 머물면서 신임총독의 부임정보를 탐문하였다.


   신문보도를 통해 8월 12일 싸이토가 신임총독에 임명되어 9월 2일 부임차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하여 마차에 오를 때 폭탄을 던져 격살할 계획을 8월 28일부터 주도면밀하게 세우고 지형지물을 익힌 다음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서 허리에 단단히 맨뒤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쉽게 폭탄을 꺼낼수 있게 준비하였으며 허형과 함께 남대문 밖 중국요리 집에서 점심을 같이한 뒤 환영행사를 마치고 관저로 돌아가려던 싸이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 수행원, 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는데 그쳤다.


   그는 현장에서 빠져나갔으나 9월 17일 서울가회동 하숙집에서 김태식이라는 일제 앞잡이에게 체포되어 1920년 4월 26일 사형선고를 받고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의연히 사형에 처하게되었다. 사형이 확정된 후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성경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쉬지 않았다. (2005. 4. 16.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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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 조선에 온 목적은 성경 보급”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서 ‘제국주의’ 폄하 시각에 반박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5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에서 열린 ‘토마스 선교사(1839∼1866·사진)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토마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선에 입국했고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다 숨졌다. 그렇다면 그를 순교자로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역사적 평가: 토마스, 그는 순교자가 아닌가’라는 발제문에 “평양 선교의 개척자인 사무엘 마펫에 따르면 그로부터 성경을 전해 받은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그 복음이 씨앗이 되어 교회까지 세워졌다”며 “그의 죽음 이후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고 적극적인 선교가 가능해졌다면 우리는 그를 순교자로 평가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은선 안양대 교수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한국선교의 연관성’이란 발표문에서 “토마스의 입국 목적은 성경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다”며 “선교사적, 신앙적 관점과 한국교회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죽음의 참된 의미를 계승하자”고 제안했다. 그동안 교계 일부에서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침략주의에 근간을 둔 ‘힘의 선교’를 시도했다고 비판했다.


1863년 영국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파송된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조선 선교를 위해 두 달여 조선 연안을 탐사했다. 이듬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자로 승선해 중국 지푸항에서 조선으로 입국했다.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9월 대동강에서 조선 관군의 공격을 받아 불탔고 토마스 선교사 역시 관군에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2016.9.5. 국민일보/ 강주화 기자) /국민일보 httt://www.kmib.co.kr

 

​토마스 목사 ‘순교자’ 여부 논란 재점화‘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 “순교자 맞다” 반박

 

150년 전인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입국했다 그해 9월 관군(官軍)에 의해 살해당한 토마스 목사(1840-1866)의 죽음이 순교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재가열되는 양상이다.

 

토마스 목사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선교사로 불리며 한국교회로부터 순교자로 이해돼 왔다. 비록 배에서 내려 복음을 전한 적은 없지만 그가 선교를 목적으로 왔고, 죽으면서 넘겨 준 성경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여기에 대한 도전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1985년 ‘한국교회사특강’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는 것에 강한 이의를 제기한 이후 올 6월 옥성득 박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토마스 목사의 제너럴 셔먼호 승선을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정 및 입국 후 행동과 동일시해, 중무장을 하고 불법으로 들어온 제국주의 침략선인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온 사람이 어떻게 선교사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연한 논리로 순교자일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목사가 죽으면서 성경을 전해고, 이로 인해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나타났으므로 순교자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기록된 역사적 사료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참고로 이들은 이만열을 비롯해서 김승태, 한규무, 김명호, 옥성득 등 한국기독교역사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굳이 분류한다면 상대적으로 진보적 계열의 민족주의적인 국사학자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기독교사연구소(소장 박용규)가 5일 서울 사당동 총신대 종합관에서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고 다수의 발제자를 통해 ‘토마스 목사는 순교자로 봐야 한다’며 반박에 나섰다.

 

이날 발제에 나선 박용규 교수(총신대),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이은선 교수(안양대) 최상도 교수(호남신대) 등은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교 열정을 가지고 왔던 점이 다른 요소들로 인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박용규 교수는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면서 “그러나 그런 제국주의적 영향 때문에 토마스의 입국이 선교적 동기가 아니라거나 그의 활동이 선교활동이 아니었다거나 그의 죽음이 순교가 아니라는 주장은 상당히 주관적 평가며 또 다른 비약”이라고 반론했다.

 

이영식 박사는 “저들은 ‘토마스가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것은 맞지만, 조선인들은 그것 때문에 토마스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면서 순교를 부정한다”면서 “그러나 이 논리라면 죽이는 측의 동기나 이유가 순교냐 아니냐를 좌우하게 된다. 즉 어떤 선교사가 식인종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다 죽임을 당한다면, 이 경우도 원주민들의 입장에 의해서만 순교냐 아니냐를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박사는 “또한 저들은 토마스 선교사의 최후의 장면에서 오문환의 증인들을 통한 증언이나 기존의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인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데, 별다른 자료 제시 없는 문제제기는 혼란만을 제기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박용규 교수는 “저들은 토마스의 죽음의 극적 장면의 역사성을 문제 삼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표면적인 이유”라면서 “토마스를 침략적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힘의 선교의 전형으로 이해하는 이만열-한규무-옥성득의 시각은 공교롭게도 제너럴 셔먼호를 바라보는 진보주의 국사학계의 시각, 심지어 북한의 시각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에 이은선 교수도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순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민족주의 사관, 반제국주의사관, 후기 식민주의 사관의 입장”이라며 “선교사적인 관점과 신앙적인 관점과 한국교회의 기원으로서의 관점에서 가지는, 그의 순교로서 참된 의미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2016.9.6. 당당뉴스/ 이병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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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통해 기독교 수용에 힘쓴 이수정(李樹廷) 
 

 

    1842년 전라도 곡성군 옥라면에서 이병규의 이들로 출생했다. 전주를 본관으로 이해되지만 일설에는 평창이씨로 천주교인 이었던 이승훈의 후손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고종의 친정 후 실력자 민영익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킨 공으로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농학자 안종수(安宗洙)와의 우의가 돈독했다. 그가 귀국하여 일본의 농학자요 기독교인 이었던 쓰다센(津田仙)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이수정에게 전하였고, 이수정은 일본에 가기를 열망하였다. 1882년 9월 일본에 갈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고종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는 도쿄(東京) 외국어 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일본에 체류함으로 정부의 공식적 임무 없이 서구문물을 연구할 수 있었다.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도일한 이수정은 쓰다센을 만나 농사법, 법률, 우편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기독교 교리와 가치를 설명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쓰다센의 안내로 한문성서를 탐독하던 중 성탄절 예배를 참석하기에 이르렀고, 1883년 4월 29일 주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G.W.Knox)의 입회아래 노월정 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가와 (安川亭)의 집례로 세례를 받아 일본에서 최초의 한국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었으며 그해 5월 도쿄에서 모인 제 3회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에 참석, 한국어로 특별기도 순서를 맡았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를 발표함으로써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한국 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 양태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이 있은 후 한글성서 번역사업을 시작했다. 제일 미국 성서 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와 협력하여 한문 성서에 토를 달아 현토한한 신약전서 복음(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였으며 곧이어 순한문 성서인 ‘신약 마가젼’을 번역하게 되었고 이 쪽복음은 1885년 4월에 기독교 교역자로서 처음 입국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감리교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휴대한 성서가 되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에는 미국에서 발간되고 있던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 선교를 요청하는 감동의 글을 기고함으로써 미국을 위시한 여러 선교국가들이 한국에 선교사 파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7월에는 멕클레이(R. S. Maclay)를 김옥균과 접촉시켜 한국에 교육과 의료선교 사업을 하도록 고종께 권유하도록 하여 입국하게 하였고 1885년 1월에는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만나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에 입국 하도록 교량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그해 7명으로 구성된 유학생 교회를 창설, 지도 하였으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에게도 복음을 전해 개화파 지식층에게 시대적 각성을 시켰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구 한국 정부의 노여움을 사 거리가 멀어졌고, 교분이 두터웠던 김옥균과도 소원해져 그의 애국 충정이 오해되어 1886년 귀국후 곧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성서 번역 사업은 소명감에 의해 추진 되었으며 현토한한 신약전서와 본격적 성서번역 시작인 신약 마가전 복음셔언해를 요쿄하마에서 출판한 것은 그의 업적중 가장 빛나는 사업이었다.(2004. 2. 21.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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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宣敎史)적 측면에서 본 한국교회 1백주년(4) 
   
▲김의환 총장(칼빈대학교)
 
II. 한국 교회의 외국 선교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전도에 힘쓴 교회로 출발하였다. 그 전도 열심은 해외선교 열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1. 일본 선교
장로회 독노회가 1907년에 조직되면서, 최초로 안수받은 목사 7인 중 1인인 한석진 목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주로 유학생들을 상대로 선교사업을 시작케 하였다. 그 후 1911년에 장·감 연합 선교회에서 주공삼 목사를 파견하고, 1925년에 임종순, 오기선 목사를 각각 일본으로 파송했으며, 1924년엔 장·감 연합 선교회가 오사카에 박연서 목사를 파송하였다.

1927년엔 자유주의 신학 논쟁으로 캐나다 선교회를 탈퇴한 주한 선교사 영재형(L.L. young) 목사가 일본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교포 선교에 힘썼다. 1930년 이후부터 도쿄, 오사카, 고베, 나고야, 교토 등 대도시와 구주 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한인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2. 시베리아 선교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운이 기울어지자 북만 국경을 넘어 만주,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찾아 이주하여 간 동포의 수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3회 장로회 노회는 시베리아 선교를 결의하고 1909년에 최관홀 목사를 파송하여 2년 내에 2개의 조직 교회와 13처의 기도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1912년 대한감리교회도 손정도 목사를 시베리아에 파송하여 장로교 선교사업과 함께 연합 선교에 힘쓰는 등 교세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한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되자, 러시아 정교회는 이를 시기하여 국교인 러시아 정교회 산하에서 선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두 선교사는 체포되어 결국 투옥되는 박해를 겪게 되었다.

선교의 지속이라는 대명제 아래 최관홀 목사는 본국 교회의 양해도 얻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에 가입을 단행하고 말았다. 장로교 총회는 최 목사의 개종을 계기로 그를 제적하여 버렸다.

손정도 목사는 끝내 정교회 개종에 불응하여 시베리아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에 시베리아 선교 사업은 일시적으로 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그 후에 러시아 정교회의 간섭이 약화되면서 시베리아에 있는 신설 교회들이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연회에 선교사 재파송을 청원함으로써 장로교 총회는 수차에 걸셔 현지를 시찰한 후 1918년에 김현찬 목사를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계속하게 하였다. 마침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정치적 변동에 휩쓸려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1922년 교회당 34처, 목사 5인, 장로 8인, 소학교 6처, 야학교 35처, 주일학교 15처, 등록 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얻게 되어 드디어 시베리아 노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감리교회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를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1921년 배형식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 사업이 다시 크게 재건되었다.

3. 만주 선교
감리교회는 1920년에 양주삼 목사의 시찰 후 만주 선교를 결정하고 1921년에 정재덕, 최수영, 배형식 목사를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24년엔 최성모, 손정노, 동석기, 김응태 목사를 추가로 파송하여 만주 전역에 걸쳐 선교를 확장하였다. 장로교회는 1910년에 김진근 목사를 처음으로 파송한 후 1911년에 신천읍 교회 여전도회에서 김덕선 목사를 봉천에 파송했고, 1912년에는 평북 노회에서 최성주 목사를 서간도에 파송했다.

1912년엔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면서 총회 창립 기념으로 김내범 목사를 북간도에 파송하였다. 1918년 서간도 선교를 위해 이지은, 한경희, 최봉석, 김강선 네 목사를 파송했다. 이어서 백봉수, 양준식, 김병용, 조덕환, 이병하 목사를 만주 여러 지방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만주 선교의 발전도 눈부실 만큼 급속도로 발전해서 1920년에 남만 노회가 설립되고 1921년엔 북만노회가 세워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4. 몽고 선교
몽고 지방에도 흩어진 교포들의 요청에 의하여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각각 선교에 착수하였다. 먼저 감리교회의 최성모 목사가 1925년에 화흥교회를 설립하여 선교를 확장하여 갔다. 10년 후 1935년에 장로교 총회의 지시에 따라 의산노회의 지원 아래 조보근 목사가 몽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5. 중국 선교
장로교 총회는 1912년 총회 조직을 기념하여 중국 선교를 결의하고 그 다음해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세 목사를 선교사로 중국 산동지방에 파송하였다.

산동성은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심리 때문에 선교의 불모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선교 30년이 지난 1942년 통계에 의하면 교회 36처, 세례교인 1,716명으로 증가하여 중국 선교 사상 큰 기적을 낳았다. 1917년엔 방효원, 홍승한 두 목사를 증파(增派)하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다시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 목사를, 1931년에는 김순효 여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그 밖에 교포가 집결된 상해와 또 남경과 북경에도 한인교회가 설립되면서 독립 운동의 요람적인 역할도 감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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