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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통해 기독교 수용에 힘쓴 이수정(李樹廷) 
 

 

    1842년 전라도 곡성군 옥라면에서 이병규의 이들로 출생했다. 전주를 본관으로 이해되지만 일설에는 평창이씨로 천주교인 이었던 이승훈의 후손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고종의 친정 후 실력자 민영익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킨 공으로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농학자 안종수(安宗洙)와의 우의가 돈독했다. 그가 귀국하여 일본의 농학자요 기독교인 이었던 쓰다센(津田仙)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이수정에게 전하였고, 이수정은 일본에 가기를 열망하였다. 1882년 9월 일본에 갈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고종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는 도쿄(東京) 외국어 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일본에 체류함으로 정부의 공식적 임무 없이 서구문물을 연구할 수 있었다.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도일한 이수정은 쓰다센을 만나 농사법, 법률, 우편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기독교 교리와 가치를 설명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쓰다센의 안내로 한문성서를 탐독하던 중 성탄절 예배를 참석하기에 이르렀고, 1883년 4월 29일 주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G.W.Knox)의 입회아래 노월정 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가와 (安川亭)의 집례로 세례를 받아 일본에서 최초의 한국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었으며 그해 5월 도쿄에서 모인 제 3회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에 참석, 한국어로 특별기도 순서를 맡았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를 발표함으로써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한국 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 양태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이 있은 후 한글성서 번역사업을 시작했다. 제일 미국 성서 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와 협력하여 한문 성서에 토를 달아 현토한한 신약전서 복음(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였으며 곧이어 순한문 성서인 ‘신약 마가젼’을 번역하게 되었고 이 쪽복음은 1885년 4월에 기독교 교역자로서 처음 입국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감리교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휴대한 성서가 되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에는 미국에서 발간되고 있던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 선교를 요청하는 감동의 글을 기고함으로써 미국을 위시한 여러 선교국가들이 한국에 선교사 파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7월에는 멕클레이(R. S. Maclay)를 김옥균과 접촉시켜 한국에 교육과 의료선교 사업을 하도록 고종께 권유하도록 하여 입국하게 하였고 1885년 1월에는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만나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에 입국 하도록 교량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그해 7명으로 구성된 유학생 교회를 창설, 지도 하였으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에게도 복음을 전해 개화파 지식층에게 시대적 각성을 시켰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구 한국 정부의 노여움을 사 거리가 멀어졌고, 교분이 두터웠던 김옥균과도 소원해져 그의 애국 충정이 오해되어 1886년 귀국후 곧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성서 번역 사업은 소명감에 의해 추진 되었으며 현토한한 신약전서와 본격적 성서번역 시작인 신약 마가전 복음셔언해를 요쿄하마에서 출판한 것은 그의 업적중 가장 빛나는 사업이었다.(2004. 2. 21.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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