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宣敎史)적 측면에서 본 한국교회 1백주년(4)
▲김의환 총장(칼빈대학교)
II. 한국 교회의 외국 선교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전도에 힘쓴 교회로 출발하였다. 그 전도 열심은 해외선교 열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1. 일본 선교
장로회 독노회가 1907년에 조직되면서, 최초로 안수받은 목사 7인 중 1인인 한석진 목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주로 유학생들을 상대로 선교사업을 시작케 하였다. 그 후 1911년에 장·감 연합 선교회에서 주공삼 목사를 파견하고, 1925년에 임종순, 오기선 목사를 각각 일본으로 파송했으며, 1924년엔 장·감 연합 선교회가 오사카에 박연서 목사를 파송하였다.
1927년엔 자유주의 신학 논쟁으로 캐나다 선교회를 탈퇴한 주한 선교사 영재형(L.L. young) 목사가 일본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교포 선교에 힘썼다. 1930년 이후부터 도쿄, 오사카, 고베, 나고야, 교토 등 대도시와 구주 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한인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2. 시베리아 선교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운이 기울어지자 북만 국경을 넘어 만주,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찾아 이주하여 간 동포의 수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3회 장로회 노회는 시베리아 선교를 결의하고 1909년에 최관홀 목사를 파송하여 2년 내에 2개의 조직 교회와 13처의 기도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1912년 대한감리교회도 손정도 목사를 시베리아에 파송하여 장로교 선교사업과 함께 연합 선교에 힘쓰는 등 교세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한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되자, 러시아 정교회는 이를 시기하여 국교인 러시아 정교회 산하에서 선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두 선교사는 체포되어 결국 투옥되는 박해를 겪게 되었다.
선교의 지속이라는 대명제 아래 최관홀 목사는 본국 교회의 양해도 얻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에 가입을 단행하고 말았다. 장로교 총회는 최 목사의 개종을 계기로 그를 제적하여 버렸다.
손정도 목사는 끝내 정교회 개종에 불응하여 시베리아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에 시베리아 선교 사업은 일시적으로 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그 후에 러시아 정교회의 간섭이 약화되면서 시베리아에 있는 신설 교회들이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연회에 선교사 재파송을 청원함으로써 장로교 총회는 수차에 걸셔 현지를 시찰한 후 1918년에 김현찬 목사를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계속하게 하였다. 마침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정치적 변동에 휩쓸려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1922년 교회당 34처, 목사 5인, 장로 8인, 소학교 6처, 야학교 35처, 주일학교 15처, 등록 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얻게 되어 드디어 시베리아 노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감리교회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를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1921년 배형식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 사업이 다시 크게 재건되었다.
3. 만주 선교
감리교회는 1920년에 양주삼 목사의 시찰 후 만주 선교를 결정하고 1921년에 정재덕, 최수영, 배형식 목사를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24년엔 최성모, 손정노, 동석기, 김응태 목사를 추가로 파송하여 만주 전역에 걸쳐 선교를 확장하였다. 장로교회는 1910년에 김진근 목사를 처음으로 파송한 후 1911년에 신천읍 교회 여전도회에서 김덕선 목사를 봉천에 파송했고, 1912년에는 평북 노회에서 최성주 목사를 서간도에 파송했다.
1912년엔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면서 총회 창립 기념으로 김내범 목사를 북간도에 파송하였다. 1918년 서간도 선교를 위해 이지은, 한경희, 최봉석, 김강선 네 목사를 파송했다. 이어서 백봉수, 양준식, 김병용, 조덕환, 이병하 목사를 만주 여러 지방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만주 선교의 발전도 눈부실 만큼 급속도로 발전해서 1920년에 남만 노회가 설립되고 1921년엔 북만노회가 세워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4. 몽고 선교
몽고 지방에도 흩어진 교포들의 요청에 의하여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각각 선교에 착수하였다. 먼저 감리교회의 최성모 목사가 1925년에 화흥교회를 설립하여 선교를 확장하여 갔다. 10년 후 1935년에 장로교 총회의 지시에 따라 의산노회의 지원 아래 조보근 목사가 몽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5. 중국 선교
장로교 총회는 1912년 총회 조직을 기념하여 중국 선교를 결의하고 그 다음해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세 목사를 선교사로 중국 산동지방에 파송하였다.
산동성은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심리 때문에 선교의 불모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선교 30년이 지난 1942년 통계에 의하면 교회 36처, 세례교인 1,716명으로 증가하여 중국 선교 사상 큰 기적을 낳았다. 1917년엔 방효원, 홍승한 두 목사를 증파(增派)하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다시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 목사를, 1931년에는 김순효 여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그 밖에 교포가 집결된 상해와 또 남경과 북경에도 한인교회가 설립되면서 독립 운동의 요람적인 역할도 감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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