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그리스도의 인의 죽음 (입관-3)

 

(14 ; 7-9) 293.531,534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권면의 말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하여 살아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선포하였다.

 

1. 이웃을 섬기는 삶.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웃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라면 거기에 따르는 회생이 어떠한 것이라도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감내해야만 한다. 성령에서는 사도들에게 역사하셔서 굻주린 백성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게 하기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행을 하게 하셨다.

 

2, 그리스도를 섬기는 앎.

 

그리스도인외 목적은 그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적인 생활에서 분만 아니라 공적인 생활에서도 밝히 표명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하나닙의 영광을 가리기도 한다.

 

 

3. 죽을을 예비한 삶.

 

신자의 삶은 죽음을 잘 예비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고인된 OOO 성도는 죽음을 잘 예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살았을 때 이웃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초지일관하였다. 이제 그는 펀안히 예비된 천국의 복락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이웃과 주님을 섬기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왜 예수를 믿어야 하나 
제 목 :보는 것과 믿는 것 
(고린도 후서 5:1~7)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란 격언대로 세상 사람들은 보는 것이 제일 안전한 줄로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그와 반대로 말씀하고 있읍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고후 5장 7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요, 아이들이 말하는 도깨비 불과 같이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보이는 것에 큰 관심을 두거나 큰 비중을 두지 않읍니다. 보이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이며 참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후 4장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밝히 말씀하였읍니다.

1.보이는대로 행하는 사람은 

①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름 속에 달이 흐러간다고 "야! 그달이 참 빨리 흘러 간다"고 말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달이 가는 것같지만 움직이는 것은 달이 아니라 구름입니다.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떳다 가 저녁에 서쪽에 진다고 해서 눈으로 보는대로 해가 떳다가 해가 지는 것으로 믿는다면 역시 그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또 물그릇에 젓가락을 넣어보면 눈에는 그것이 구부러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구부러진 것이 아니라 곧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눈으 로 보는것 만이 확실한 줄 알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②무식한 사람입니다.

전기나, 전파나, 공기와 같은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읍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중요한 것, 영원한 것은 볼 수 없읍니다. 하나님도 영이지 육신이 아니므로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③속기 쉬운 사람입니다.

보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속기 쉬운 사람입니다. 낚시꾼의 낚시 밥을 먹음직스럽게 보인다고 어리석은 물고기가 얼른 삼킨다면 벌써 낚시가 턱에 걸려서 죽게 될 것입니다. 사탄(Satan)은 우리 앞에 보이는 것, 일시적인 것, 쾌락적인 것을 놓고 우리를 속이고 실패하게 하고 멸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보는대로 판단하고 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요 속아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결코 속지 않읍니다. 고귀한 차원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④보이는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아름다운 꽃이나, 마이크, 강대상 같은 것은 머지 않아 다 변해서 쓰레기 통에 들어갈 날이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하는 김목사가 아직 젊어 보이지만 이가 다 빠지고 백발이 되고 쪼글쪼글 하게 변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속 마음은 결코 늙거나 변하거나 죽지 않읍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말씀했읍니다. 낮에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마, 빛이 없는 밤이 되면 눈으로 볼 수 없읍니다. 보이 는 현재에만 보고 살던 사람은 죽음이 임박해오면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후에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죽음이 당신을 끌어 내릴때 "나좀 멈워주십시요, 사랑하는 아내를 떠날 수가 없읍니다. 귀여운 자녀를 두고 갈 수가 없읍니다"하고 애 원해도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눈물도 사정도 없는 죽음이 당신을 끌어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읍니다. 햇빛이 비치는 대낮에도, 햇빛이 없는 캄캄한 밤에도 대낮같이 담대히 걸어갈 수가 있읍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광산에서 등불을 들고 갱 속에 들어갔다가 등불이 꺼졌읍니다. 출구가 어디인지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읍니다. 꼭 죽을 것만 같았읍니다. 그때 지혜가 생각났읍니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길이 생각나서 신발을 벗어 들고 발을 철길에 대고 걸어 나갔더니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밖으로 무사히 나갈 수 있었읍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이와 같읍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 주시고 말씀이 그를 인도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캄캄한 죽음의 밤이 와도 문제없읍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믿어 왔기 때문입ㄹ 니다. 그의 영혼은 보이는 것이 다 사라져 없어질때 더욱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고후 5장 1절 이하에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하늘의 영원한 장막이 있기 때문에 탄식하지 않는다고 했읍니다.

2.왜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전기나, 전파나 말소리 같은 것은 볼 수 없으나 존재하는 것같이,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은 변하는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자에게 하나님은 만주시고, 믿는 자에게 함께 하시고, 믿는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전봇대 옆에 구리철사, 전기용 도구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아무리 사방을 살펴봐도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까 가져다가 엿사먹으려고 움켜 쥐었읍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전봇대 위에서 "이 놈" 하고 소리치 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이 아이는 위를 볼줄 모르고 아무도 없는줄 알았읍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살아 계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펴 보고 계십니다.

②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초등하교 1학년 보고 고등학교 3학년이 푸는 미분 적분 수학 문제를 풀라고 하면 풀지를 못할 것입니다. 바둑을 둘때 18급짜리가 조치훈 10단이 두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겠읍니까? 하나님은 바둑으로 말하며 1,000단 10,000단도 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지 따지려고 들면 못믿읍니다. 그러 므로 이사야 55장 8절과 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구원의 채널로 택했읍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구원 받는 것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③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제일 원하는 것음 무엇보다 믿음입니다. 윤리나 도덕보다, 착한 행실보다, 봉사보다 제일 먼저 당신을 믿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 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먼저 "믿읍니다. 아멘"하는 자세로 나와야 합니다. 찬송도 믿음으로 기도도 믿음으로 하고 말씀 듣는 것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재주가 아무리 많아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할 수가 없읍니다.

④구원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장 22절과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고 범죄해서 자기 행위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자가 한 명도 없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취뤄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늘 나라를 가르쳐 주시고, 마지막에는 나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러 주셨읍니다 이제는 저를 믿기만 하면 강도이든, 창녀이든, 도둑놈이든 다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호주에 인구 수보다 양의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끔 독수리가 내려와서는 양의 새끼를 잡아 먹는데 먼저 눈을 쪼아서 파먹고 보지 못하게 한 뒤에 살을 뜯어 먹는다고 합니다. 한번은 농부가 언덕에서 바라 보니까 독수리 한마리가 하늘에서 빙빙 돌더니 쏜살같이 내려와서 어미양의 눈을 파먹고 살을 뜯어 먹으려고 했읍 니다. 이때 그 농부가 달가서 독수리를 쫓아버리고 보니까 그 죽은 어미양의 네다리 안에 새끼양이 숨어서 살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어미양은 독수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도망가면 살 수 있지만 새기를 사랑하여 새끼 양을 품속에 넣어 대신 피를 흘려 죽었읍니다. "하 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영접하는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했읍니다. 여러분 보이는 대로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 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믿어서 오늘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행복한 가정의 비결

마 19:1∼12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6절)

카네기의 인생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환경을 바꿔라. 그래도 안 되면 관계를 바꿔라. 그래도 안되면 나를 바꿔라.” 인생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요인은 바로 내게 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가정,그 행복의 비결 역시 내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된 가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확실한 믿음에서 출발하십시오(6절). 부부는 우연히 눈이 맞아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지금의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나의 천생연분임을 믿고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이혼에 관하여 질문을 받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전통이나 시대의 문화로 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문제를 풀어주십니다(5절). 가정에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서적 가정생활을 위해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정기적으로 가정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복된 가정은 부부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가정 안에 성소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마치 쉼표와 같아서 우리의 인생과 가정에 쉼과 안식을 줍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부부와 자녀들의 심령에 부어주시는 쉼과 평안,이해와 용서,사랑과 순종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난센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17장이나 빽빽이 쓴 편지를 누군가에게 보냈습니다. 봉투에는 이런 경고문이 쓰여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편지를 읽는 자는 죽을 것임.” 하지만 편지를 받은 사람은 호기심에 편지를 읽고 맙니다. 그런데 정말 편지를 다 읽자마자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왜일까요? 17장이나 되는 글에 쉼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만 깨닫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사업에,그리고 가정에 쉼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쉼표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헉헉거리다가는 곧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예배야말로 우리 가정의 쉼터요,안식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에게 안식,평안,강건,자유,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된 인생,복된 가정을 위해 환경을 바꾸십시오. 안 되면 관계를 바꾸십시오. 그래도 안 되면 자신을 바꾸십시오. 무엇보다 인생의 쉼표,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십시오. 가정의 행복은 사랑의 테크닉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시 127:1,2).

기도: 주님,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확신하고 무슨 일이든 성경에서 해답을 찾는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김석년 목사 설교 중에서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2021년 사순절예배설교  빌라도의 선택

제목 : 빌라도의 선택

말씀 : 마27:15-26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좀 억울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면서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격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으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빌라도는 정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24절에서 빌라도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는 어느 정도 종교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공정성을 기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빌라도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빌라도는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므로 중대 사안에 대한 법적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 정부 즉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게 판단하여 최종결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데 만약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사형언도를 해야 하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23절에 보면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하고 있고 또 요18:38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중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조금 애를 썼다고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옳지 않은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 진리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빌라도의 이 옳지 않은 결정을 보면서, 그래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라도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빌라도는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의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빌라도를 향하여 아우성을 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역자를 살려두면 당신은 로마의 충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빌라도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슨 큰 폭동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그러면 치안상태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이었습니다. 출세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라도는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사람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 육신의 소리, 유혹의 소리를 뿌리치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 다 뿌리쳐 버리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때로는 어떤 때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때에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빌라도는 진리의 소리를 작은 소리라고 무시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빌라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그의 아내를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고 소수이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옳지 않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항상 요란하고 커다란 소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는 좁은 길에, 작은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소수의 소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먼저는 산을 흔들만한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작고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만한 가냘픈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힘들어 하실 때 아주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리하여 네 배고픔을 해결하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보여주라. 그러면 너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라는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란하고 요란스런 거짓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커다란 거짓소리를 물리치시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기의 소리에, 명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큰 소리에 파묻혀 그만 진리의 소리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떠들어대든 주님앞에 조용히 엎드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빌라도는 사람들의 큰 소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져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는 롯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떠나라고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창13:9)

여러분,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롯은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하란을 잃고 큰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늙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좋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좋은 땅으로 갔던 롯은 풍요로운 땅에서 잘먹고 잘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땅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다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그 땅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관계를 맺어 모압과 암몬 족속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당장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 갔던 롯은 재물로, 가문의 체통도, 윤리도, 믿음도, 하나님의 유업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듣는 절기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무슨 화려한 소리, 대박이 터지는 소리, 출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커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내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세상의 권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폭동과 관련되어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지위도 빼앗기고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대대로 남은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정말 세상의 크고 시끄러운 소리,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군중의 소리, 부귀영화의 소리, 물질의 소리, 무사안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작은 소리일지라도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진정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으며 생명의 은총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https://www.youtube.com/watch?v=-QTyvlUcZKY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2019년 5월 주일예배설교 찬양의 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제목 : 찬양의 힘

말씀 : 고후1:3-10

1.찬송은 영혼의 노래다.

서양의 속담에 ‘나에게 하나의 작은 노래를 만들게 하라. 그러면 나는 온 국민을 움직이리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노래가 인간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군대생활 할 때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하면서 고향의 봄을 부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멀리 외국에 나가 있을 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하며 아리랑을 부르면 또 눈물이 난다. 그래서 우리 옛 어른 들은 한이 많아 늘 노래 불렀다. ‘한많은 이세상 야속한 님아, 나를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그러면서 한을 달래고 애수에 젖기도 하였다.

그렇다. 어쨌든 노래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쁠 때도 노래를 하고 슬플 때도 노래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빠질 때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고 이별을 할 때는 이별의 노래를 부르면서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도 한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할 때는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바다를 건넌 후에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은총을 사무엘을 낳고 너무나 기뻐서 그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마리아는 천사의 예고대로 성령으로 예수님이 잉태된 것을 알고 역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반대로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며 노래를 불렀다. 다윗은 원수에게 쫓길 때도 시를 지어 노래했고, 범죄하였을 때도 시를 지어 읊조리며 회개를 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송을 했다. 여호사밧은 국가적인 위기 때에도 찬송을 불렀다. 그러자 감옥문이 열리고 적군이 물러갔다. 그리고 죽을 것 같았던 그들은 살아나 승리했다.

그렇다. 찬송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적 행위이다. 찬송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받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방법이다.

그래서 시33:1절에서는 말씀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믿음의 사람들은 마땅히 찬송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이 잘 될 때나 안될때나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을 믿고 영광의 찬송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형통하면 감사하여 찬송드리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호소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믿음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위로를 맛보는 통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선 앞에서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감사찬송하며 사시기 바란다. 어렵고 힘들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하심을 바라며 호소하며 찬양하시기 바란다. 그리하여 찬양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찬양을 통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위로를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찬송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신다.(3-7절)

그렇다. 우리는 찬양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를 덧입게 된다. 오늘 3절 말씀 보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왜 찬송하느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찬송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그의 전능하심과 자비하심과 은혜와 거룩함과 인자하심과 구원하심과 인도하심과 사랑하심과 뭐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7절까지에서는 위로라는 말씀이 매절마다 반복해서 무려 열 번이나 나오고 있다. 왜 이렇게 위로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을까? 그것은 지금 고린도 교회 교우들이 너무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린도는 항구도시이며 상업도시였다. 물질적으로 부요했으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 살았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이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과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는 가정과 직장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힘든 상황에 있는 교인들에게 위로의 하나님을 전하면서 바울이 제일 먼저 한 말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 3절을 보라. ‘찬송하리로다.’ 놀랍지 않는가? 지금 고린도 교회 교우들은 너무 힘들다. 먹고 살기도 힘들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업신여김 당하고 있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세상적으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그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말씀이 뭐라고? 찬송하라는 거다.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하잖은가? 여러분, 힘들지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힘들어 죽겠는데 찬송하라는 거다. 왜?

이유는 바로 그 말씀 3절 안에 포함되어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그 모든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넉넉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너희의 그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안 그런가? 정말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정말로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과연 무엇이 위로가 될까? 사람? 돈? 권력? 지식? 문명? 과학? 물론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결코 그것들을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다.

생각해보라.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과학이나 뭐 이런 것들이 늙고 병들고 세상 떠날 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그런 것들도 분명 위로도 되고 힘도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 가장 결정적인 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어떤 위로도 안된다.

금번에 일본에서 일어난 엄청난 참상을 보라. 과연 인류의 그 엄청난 문명이 우리에게 무슨 힘이 되겠는가?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겠나? 우리가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하고 훈련하고 엄청난 문명을 쌓아 올린다해도 그런 것들이 결코 우리를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서도 위로와 소망이 되며 나아가 영원히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그 주님을 믿고 잘 될 때나 안될때나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낙심하고 절망하고 한탄하고 좌절하고 원망하고 탄식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란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의 위로와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하신다. 승리케 하신다. 꼭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3.찬송하는 자에게 승리가 있다.

여러분, 그렇다. 세상에서도 그렇고 성경속에서도 그렇고 진정으로 승리한 자들은 다 고난의 순간을 이겨낸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치고 인생의 밤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대개가 밤을 통과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기꺼이 고난 속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8,9절에서는 말씀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바울의 전도 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3절에서는 ‘찬송하리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찬송하겠다. 찬송하라. 찬송해야 한다. 왜? 그래도 하나님이시니까. 그래도 주님이시니까. 결국은 승리케 하실 것이니까. 그래서 그는 실제로 죽음과 같은 고통속에서도 찬송했고 승리하지 않았는가? 맞아 죽게 되어도, 배고파도, 헐벗어도, 파선을 당해도 감옥에 갇혀도 기도하고 찬송했고 결국 그는 승리했던 것이다.

여러분, 그렇다. 분명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도 고난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도 우리를 삼킬 수는 없다. 우리는 결코 버려지지 않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 구세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함께 하셔서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 그래서 승리하게 하시고 더 성숙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원망과 불평은 더더구나 하지말고 기쁘면 기뻐서 감사찬양하고, 어렵고 힘들 때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위로하심을 바라며 호소의 찬송을 드리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능력과 용기와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mission school

우리 모두는 오대양 육대주 선교사입니다.여러분의 구독은 선교사 교육과 후원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Subscriptions are helpful for missionary education and support.

www.youtube.com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2019년 고난주간 설교 by 폴리목사은혜의 설교 ( 선교사 언어 교육원 )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하신 모든분들을 사랑합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함께하실 성경말씀은 마태복음 27 45-54절입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첫째로 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일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14:65에 보면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과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두번째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마다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향하여 태양을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오늘의 말씀  < 지혜로운 말씀 > 2018년 6월 26일 화요일

 

 

 

(화)26             지혜로운 말씀
                    찬송227장 (통363장)   말씀 : 잠 22;17-22
오늘의 말씀
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8.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19. 내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0.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기록하여  21.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나의 발견(제목) :
본문 요약 -  본문은  '지혜자의 잠언'의 서론부로서 잠언의 목적 및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분문 살펴보기 - 솔로몬은 자기가 말하는 교훈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지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7 절에서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라고 권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곧 그의 교훈은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특별히 우리는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이 인간에게 어떠한 유익함이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지혜로운 말씀의 가치
  1) 말씀의 가치를 아는 자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씀의 가치를 가르쳐 주어 깨닫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현대인은 그 사고방식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2) 말씀이 마음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비록 들었으나 그 말씀이 자기의 마음을 주장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마음속에 새겨져야 합니다

  2. 지혜로운 말씀과 바른 인격
  인간이 지녀야 할 바른 인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솔로몬은 말하기를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의 아름다운 인격 형성의 바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둘 때 바르고 아름다운 인격이 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입술로 전해질 때 인격은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3. 지혜로운 말씀과 바른 신앙
  1) 여호와를 의뢰하도록 합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철학이나 과학이나 도덕들은 인간 중심적이므로 하나님을 외면하도록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늘 여호와를 의뢰하도록 만듭니다.  2)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라는 말은 인간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으로 믿음을 갖게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의뢰해야 합니다.
나의 이해 (본문요약):

 

은혜의 나눔 - 새마을 시청각 선교회 회장인 김철한 씨는 본래 유명한 토지 브로우커로서 한국에 있는 모든 땅을 사고팔 정도였다. 그런데 이 일이 들통나서 20년의 구형을 받았다. 그런 중에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하루는 그가 금식하며 밤새워 기도하는데 '검사가 아는 것 이외에도 네 죄가 많은데 그것을 전부 고백하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그 뒤 그는 생각나는 모든 죄를 적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죄수들은 '여보게, 이미 알려진 죄만으로도 몇 년 형을 받을지 모르는데 알려지지 않은 죄까지 알리려 하다니 미치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죄를 적어 재판장에게 알렸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단 3년 형만을 언도받은 것이다.
적용 - 주님께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실 때마다 강조하신 것은 '이를 행하라'는 점이었다. 오늘날도 진리를 듣고 깨달았을 때 바로 그것을 실천하는 데까지 진보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나에게 주시는 말씀(적용) ;


오늘의 기도: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오늘의 설교] 범사에 감사하라

 

 

 

제목 :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 : 민수기 11장 4∼15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군대에 쫓기다 홍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당신이 우리를 끌어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 이같이 하느냐” “애굽에서 당신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 했고,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했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게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길을 터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온 회중이 굶주려 죽게 됐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도 남을 충분한 만나를 새벽마다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만나가 끊길 수 있다며 또 불안해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 우리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샘솟아 나오는 기적을 통해 그들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1년 후 바란 광야에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땐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다. 이제는 우리 기력이 다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미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격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음에도 그들은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저녁마다 메추라기 떼를 공급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처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 많은 식량을 공급하심에 경외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같은 음식에 싫증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린 만나, 저녁마다 진에 덮인 메추라기, 그 기적의 산물을 보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간사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감사하는 일에도 조건부 감사와 범사에 감사하는 게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가 하나님의 응답과 풍성하게 채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렸겠지요. 일종의 조건부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기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잊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알고서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허현 목사(양주진리교회)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