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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예배는 우상숭배입니다.

  

 

추모예배에 대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함과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글을 올립니 다. 기독인들은 아무생각없이 추도식을 드리고 있습 니다. 부모가 훌륭한 삶을 사셨기에 그분의 발자 취를 본받기위해서, 친목의 시간을 가지고, 고향을 찾 아 사셨던 산천도 둘러보는것에는 충분히 공감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뜻을 잘못인식하고 있는것 같아 자료를 준비하여 글을 올렸습니다.

 

추도예배, 추모예배, 차례 등 일종의 제례(祭禮) 행위들이 한국교회가 전통문화와 어울려 무비판적으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성경말씀그대로 지켜며 살아야 하는데 어떤 뚜 렷한 예배규정없이 기독교 예배정신을 흐려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렇다 할 성경적인 가르침을 내놓지 않고 관행대로 , 기성교회가 해왔던 대로 비성경적인 우상숭배 행위를 하고 있음에 고민하며 주님보 시기에 죄악을 행하는 것은 아닌가 염려하고 있 습니다.

 

첫째: 추도나 추모는 어원적(語原的) 의미에서 비성경적입니다.

 

제사(祭祀): ()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차려놓고 의식을 베푸는 것. 추도(追悼):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슬퍼하는 것. 추모(追慕): 죽은 사람을 사모하는것. 차례(茶禮): 음력 매달 초하루 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지내는 제사.

 

한결같이 죽은 사람과 그의 혼령을 대상으로 애 도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예()를 갖추라는 말이 없으며, 또한 죽은 것에 대한 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학적 의미에서 볼 때 비성경적입니다. 십계명에는 예배의 대상이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명시합니다.(1계명) 또한 예배의 방법(2계명), 예배의 정신(3계 명)에서 어떤 우상적인 것도 금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십 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사는 물론이고 추도, 추모, 차례 예배 등은 모두가 죽은 자를 대상으로 한 예배이 므로 십계명을 위반하는 죄인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 엎드림, 경배, 따름, 섬김)라는 술어는 확실히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이나 사람에 게 적용될 수 없는 말입니다.

 

셋째: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해 이교도처럼 슬퍼함 을 금합니다. (19:28)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야훼니라. "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네째: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한 예물헌납도 금합니 다. (26: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 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 님 야훼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 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다섯째: 성경은 죽은 자에게 제사함을 바알브올 을 숭배하는 죄라고 단언합니다. (시편106:28)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여섯째: 성경은 우상과 관계되는 모든 종교행위 를 저주하고 심판하실 것을 단언합니다. (22:18)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야 훼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 니라’ (18:11,12)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 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야훼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야훼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 아내시느니라.

 

(20:2, 27)"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 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 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 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하는 예배라는 거룩한 술어를 추도예배, 추모예배, 혹은 차례예배라는 기이한 명목 아래 미화시켜 이미 죽은 자를 사모 하고 명복을 빌고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의 절대 주권영역이라는 진리 앞 에 명백히 죄악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발인예배, 장례예배는 한번에 한하여 드려야 하 며 지속적으로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추모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매년 한번씩 자식 의 도리라며 기념일을 만들어 수십년간 추모예 배를 드린다는것은 부모가 우상이 될수 있다는 것과 신앙생활의 모본을 보여주시다가 천국에 가셔서 하나님께 영원한 경배를 드리고 있는 부모님 또 한 절기처럼 자신을 기념하며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 외에 죽은자와 바꿀 수 없으며, 또한 순교자나 성자에 대한 추도 추모예배 역시 비성경적, 반기독교 윤리행위임 을 기억하고 이에 대한 깊이있는 신학자들과 주 의종들의 기도와 고민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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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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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의 의무

 

 


말씀:고린도전서 7:1-7

 


오늘부터 우리는 고린도전서 7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6:12-20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몸이 누구의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6:19-20). 우리는 이 시간에 그 삶의 원리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론에서 살펴봤습니다만 고린도전서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1-6장 말씀으로 글로에의 집 사람들의 보고를 통해서 제기된 고린도교회 내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답변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1-6장 말씀을 통해서 그 문제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1-4장에서는 고린도교회 내의 분열과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한 오해에 대한 답변을, 5장에서는 근친상간과 같은 부도덕한 행위들에 대한 답변을, 그리고 6장에서는 세상 법정에서 다른 성도들을 송사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살펴봤습니다.

 


둘째는, 7-15장 말씀으로 고린도교회의 대표자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답변입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7장에서는 혼인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고, 8-10장에서는 우상의 제물과 관련된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답변을, 그리고 11-14장은 공공 기도 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와 무질서한 만찬 문제와 성령의 은사의 활용과 예배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그리고 1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육체의 부활에 관한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입니다.

 


오늘 우리는 7:1-7절 말씀을 통해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의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이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시 고린도 지역은 헬라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헬라철학의 대표적인 영향이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고귀하다고 보는 영지주의입니다. 이런 생각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거의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나라도 선비를 높게 쳐주고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겨왔습니다. 물질보다 정신적인 세계는 신의 세계에 가깝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영향으로 두 가지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질은 더러운 것이기에 떨쳐버려야 할 짐으로 보고 금욕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반응은 육체는 더럽고 아무 것도 아니기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며 방탕과 쾌락으로 자기 몸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안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음행을 하는 사람도 있고, 금욕주의로 나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첫번째 질문으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가 쓴 말에 대하여는’라는 말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질문을 보고 그에 대해서 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말은 모두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7장에서 바울 사도의 전체적인 논지는 지금 있는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17-23절을 보면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 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구별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습과 전통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목숨을 거는 할례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으로 있으나 주인으로 있으나 그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시는 분과 함께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7장 말씀에서 바울 사도의 결론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러한 결론은 “자기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앞에서 본 대로 전부 독신으로 지내라는 말이 아니라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 말씀에 보면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느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각각의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독신으로 지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하여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인륜지대사로 여겨서 아주 성대하게 결혼식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왜 결혼하는가를 음행의 연고라고 합니다. 2절을 보면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결혼을 꼭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지 못해서 하는 것처럼 말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창설하신 것은 성적 욕구만을 해결하고자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창세기에서 공부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창설하신 것은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8-9절을 보면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혼인 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권면하기를 자신처럼 혼인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고 합니다.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혼을 하는 것이 이런 정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한다고 하면 우리가 무슨 짐승같이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고상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짐승보다 더 못한 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소도 그 주인을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내가 아비로서 길러낸 내 자식, 곧 내 백성은 나를 모른다고 한탄한 것입니다(사 1:2-3).

 


그러면 정말 결혼이 정욕이 불타서 절제가 되지 아니하여서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에베소서 5:22-33절을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서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결혼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비밀을 결혼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는 결혼을 말하면서 음행의 연고로 결혼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고린도전서 6:15-18절에서 본 대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음행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거룩한 성전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음행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자기의 몸이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는 것이며,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성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며 사는 모든 부분에 다 해당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 모습 중에 하나가 바로 결혼과 부부관계를 통해서 어떻게 자기 몸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한다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6:17절에서 본 것처럼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라고 하신 것은 결혼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가 신랑과 신부가 되는 것으로 에베소서에서는 보았습니다(엡 5:22-33). 그러므로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는 것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님을 확인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작업인 것입니다. 물론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다루시지만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몸을 주님께서는 결혼을 통하여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남편이나 아내나 간에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요구하는데 아내가 거부하지 못하며, 아내가 요구하는데 남편이 거부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결혼 생활 전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부부는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네가 누구의 몸이냐 하는 것입니다. 곧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한 몸으로 산다는 것을 통해서 처절하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직장생활에 얼마나 힘이 듭니까?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때려치우고 싶지만 처자식을 생각해서 참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우리 몸을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다보면 유혹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아내를 생각하고 남편을 생각하기에 즉 자기 몸이 아니기에 절제하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전혀 그런 유혹이 없다는 분이나, 또는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분은 아직도 자기의 이상형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거나 또는 자기가 너무 못생겼기에 그런 것이라고 보아야지 다른 사람보다 자기는 더 나은 인품이나 신앙 때문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온갖 스캔들이 발표될 때 그런 일들은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이길만한 힘들이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의 성격이나 기호로 인하여 성적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습의 유혹들은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까지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실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자기 몸을 관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였든지, 하지 않았든지 간에 우리 주님께서 관리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욕주의도 아니고, 쾌락주의도 아닙니다. 내 몸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알고 살도록 부부 사이에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부 사이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동등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마땅히 하여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마땅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5절 말씀에서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얼마간 분방할 수는 있지만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합방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마귀가 틈을 탈까봐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행복을 위한 결혼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자기의 몸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관리하시는 것입니다.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남편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고 기선을 빼앗기는 것도 아닙니다. 둘 다 자기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님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7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을 주신 것은 자기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부 관계가 막히면 기도가 막힙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늘 경험하지 않습니까? 또 우리는 함께 유업을 받을 자임을 알아 서로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가운데 이런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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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Series 1) - 박 한 응(朴 漢 應)

본  문 : 로마서 12 : 1 - 3
제  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찬  송 : 213, 214, 321, 325, 327, 539

 

할렐루야!!
오늘도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려고 오늘 거룩한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충만하게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예>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저, 목사님 긴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예,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라고 대답을 하자 그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 목사님, 저 아무래도 권사를 못하겠습니다.’
‘아니 권사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습니까?’
‘일도 많고 너무 바쁘고 해서 집사하고 바꿔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권사는 못하고 집사는 할 수 있습니까?’
‘네 가만히 보니까 집사는 심방도 하지 않고, 또 하는 일도 별로 없고, 이름만 가지고 있어도 되잖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우리 교인들 중에는 권사라고 해도 심방 한 번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속장이라고 해도 속회 심방 한번 하지 않는 속장도 있습니다.
집사, 권사라고 해도 새벽기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달에 감사헌금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안 한다고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으면 따라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은 주님 심판대 앞에 가 보아야 합니다.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불신앙적인 행동이 나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라 행하여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신앙생활이 남에게 믿음의 상처를 준다거나 실족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잘못하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기왕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도둑놈 따라가면 결국 도둑놈 됩니다. 노름꾼 따라다니면 결국 노름꾼 됩니다. 게으름뱅이를 따라가면 결국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민수기 16: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바네아에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더불어 당을 조직하고 모세를 반역하였습니다. 이때 고라를 추종하는 사람이 250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땅을 갈라서 생매장을 시켰고 추종하던 250명은 제단에서 불이 나와 모두 타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공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함께 자라지 않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가라지를 먼저 묶어 지옥 불에 던져 태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9-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또한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사람은 더 악해지고 선한 사람은 더 선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가 가까울수록 믿음 있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음 없는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과 멀어지고 교회와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집니다.
(계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 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완악 하여져서 바른 교훈이나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래서 신앙으로 말씀으로 권면을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여야 하늘의 신령한 영적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여 주시며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황충을 금하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는다고 아무리 설교를 하여도 마이동풍이고 권면을 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사, 권사, 속장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르기 좋으라고 붙여준 이름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그 직분이 어떤 것이든 간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도 그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에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겔16: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 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지금까지 쌓여만 가던 모든 죄악은 모두 아침 안개의 사라짐같이 빽빽한 구름이 물러감같이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로 씻음 받아 거듭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래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방법론이 제기되겠습니다만 저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사랑이요 은혜이며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만약에 우리에게 예배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허락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선교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입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까지 예배에 대한 말씀으로
오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오늘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
다음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지 말자”
그리고 다음 주일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이렇게 시리즈로 말씀을 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아멘!>
우리 ○○교회 성도들은 기왕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1.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건축케 하신 후에 성소에서 만나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출30:6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날 것이라” 고 하셨고 왕상 9:3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시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광야가 아닙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골방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안방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1) 하나님과 만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삭개오는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하여도 평생소원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오시고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정이 구원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②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죽어가면서도 메시아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③요한복음 4장 5절 이하의 기록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은 남편을 다섯씩이나 거느린 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온 성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④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일평생 주님을 섬기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장사지낸 지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과 만나고 예수님과 만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출15:26) 고 말씀 하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② 여리고성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③ 열 명의 문둥이를 고치셨습니다.
       ④ 거라사 지방의 군대 마귀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만나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병 고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는 줄로 믿습니다.<아 멘!>

(3) 하나님을 만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 창21:14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난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지고 온 물과 떡이 모두 떨어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방성대곡하여 울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샘물을 주시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② 요한복음 6장의 말씀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5병2어를 가지시고 저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병2어를 가지고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였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입니다. 바로 한 소년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③ 왕상 17:8절 이하의 말씀에는 사르밧의 한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구를 듣고 순종하였을 때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기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예배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집을 나간 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허랑 방탕하여 허비한 후에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들어서 아사 상태에까지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그 아들을 얼싸 안았습니다.
아들이 생각하기엔 아버지가 도무지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아들은 고사하고 그저 품꾼으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모든 일을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아들로서의 모든 권한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고,
또 기억치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렐루야!!

 

3.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수 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5:8-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고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만이 할 수 있습니다.

 

4. 예배는 우리의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 귀한 시간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식물들까지도 성장할 수 있는 양식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영적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오직 귀한 시간이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 시간이야 말로 얼마나 귀한 시간인 것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예배를 소홀히 하는 성도가 있어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분을 내시며 저들을 책망하여 내쫓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영적으로 기갈이 들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갈급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이 시간마다 순간마다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07:9)
         (사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기름진 것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심과 두려움과 세상의 재리와 염려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가 되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하나님의 주시는 신령한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22;1-14절 말씀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이 종들을 불러 청한 사람을 모셔오라고 하였지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사양을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청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무슨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고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 상태는 지금 아사(餓死) 상태인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말세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암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 하여 피곤하리라”
        이와 같은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이때에 오늘 예배드리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여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 오히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2) 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예배는 피 흘림이 있는 예배입니다.
        피 흘림이 있는 예배는 희생과 헌신과 감사가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희생이 없고 감사가 없고 제물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 쌓는 곳에 강림하셨고, 제물 있는 곳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또 제물 있는 곳에서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3) 새롭게 변화된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는 것” 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으로써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세상 것을 다 끊어버리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성령이 역사 하시고 거듭남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며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옷도 아무렇게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또 지각이나 하고, 와서는 졸기나 한다면 이런 예배를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부르짖고 찾아서 만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렘29:12-14)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막혔던 모든 문제들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구원의 문이 열려지고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모든 질병도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아무쪼록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총과 축복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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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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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용규 목사 간증 -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다!


우연히 연로하신 선배목사님으로 부터 오래전에
고 박용규목사님의 천국과 지옥 간증
비디오테프를 받았으며 그것을 본지가 한참 오래
된것같은데 얼마전 
새삼 천국과지옥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면서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자 비디오테프를 동영상파일로
작업하여 유튜브에 올려 놓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교인들은 한 번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듣고 나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될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모든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우리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주님의 명령임을 기억합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시고
모두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동영상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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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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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명락교회 이 명선 목사

 

사무엘상 2장 12-26절을 중심하여 ‘엘리와 한나의 자녀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본문에서 두 가정을 보게 되고, 두 결과의 종말을 보게 됩니다.

한 가정은 엘리라는 제사장의 가정으로 이스라엘의 명문가정입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불행한 인생으로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제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합니다. 나중에는 법궤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전쟁터에 무기로 가지고 갔다가 빼앗기며, 두 형제가 동시에 죽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서 아이의 이름을󰡐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 가정에서 떠났다)이라 지었고, 아버지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정의 종말, 나아가 한 민족의 종말을 이 사건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런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엘리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한 가정은 한나의 가정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괴로운 한 여인,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 하나님으로 인해 구별된 삶은 사무엘이라는 자식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시대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큰 역사적인 시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결단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영향력을 준 인물입니다. 동시에 다윗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발굴해서 키워내는 선지자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그런 삶은 바로 한나에서 시작됩니다.

엘리와 한나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자녀 교육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 제사장과 한나의 자녀교육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분별력이 있고, 없고’입니다.

분별력은 영적 감수성을 말합니다. 분별력은 때를 잘 분별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들어가야 할 때, 말해야 될 때와 침묵할 때,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웃어야 할 때와 울어야 할 때를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을 잘 분별하지 못해서 울어야 될 때에 웃고, 나가야 할 때 들어오고 합니다. 또 붙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 사랑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 할 것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워해야 할 것을 붙들고, 버려야 할 것을 붙듦으로써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분별해야 합니다.

엘리의 아내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홉니와 비느하스는 엄마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엄마 없는 자녀를 보는 엘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그 아이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자녀를 사랑할 줄은 알았지만,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자녀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다는 것을 분별해서 가르쳐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삶이 게으르고 나태하고 분별력이 없습니다. 제사나 지내주고 백성들이 오면 재판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아이들이 다 배워버렸습니다. 정말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될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모 품을 떠난 자녀는 아버지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제물로 가져온 고기를 함부로 건져 먹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과 동침해서 백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게 했습니다. 엘리는 그 상황에서도 자녀를 바르게 지도하지 못했습니다.

한나는 어떠했습니까? 자녀가 없을 때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아이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도록 제가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결단했습니다. 매년 제를 드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품안에서 가르칠 수 있을 때 그 아이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를 가르쳤고, 예배를 가르쳤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아이의 기본적인 인격은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다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엄마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자기 품안에 있을 때에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주고, 젖을 떼어도 되었을 때에 아이를 하나님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주의 성전에 맡겼습니다. 세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자녀가 얼마나 눈에 그려지겠습니까? 그러나 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우선순위로 드려지기를 바라며 철저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합니다. 그가 정말 분별력 있는 여인임을 이 대목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자녀가 내 품을 떠나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녀를 바르게 지도하는 한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삶의 자리’입니다.

엘리의 삶의 자리는 ‘성전’이 아니라, ‘자기 처소’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성전에 누워’ 있지만,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에 관한 본문을 읽다보면 '자기자리에 앉았더라'는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제사장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섬기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자리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입니다. 그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다가, 즉 교만한 자리에 앉아만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자리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자녀와 이웃과 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지, 나를 주장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나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그녀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고통이 있었을 때 원망하는 자리로, 낙심하는 자리로 갈 수도 있었지만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기 자녀 앞에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하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무엘은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불립니까? 모든 신학자들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기도를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자기의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 나이가 들면 기도는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은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섰고 영적인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에 정말 존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고, 그들의 멸망이 민족과 나라의 멸망으로 직결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세상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권위의 소리, 자기 내면의 아집의 소리, 기득권의 소리를 듣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엘리의 자리는 정말 존귀한 자리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지만, 고통의 자리가 되었고, 한나의 자리는 고통의 자리였지만, 축복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 성전에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아이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잘 길러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쓸 만한 인물이 생긴다는 것은 굉장한 생명의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위한 확실하고 분명한 교육 지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아이들도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인물이 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경건한 부모에게서 그런 믿음의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비전’입니다.

엘리는 자기 자녀들에게 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자녀들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때 엘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책망으로 그쳤습니다. 그 이상 하나님의 뜻과 사명, 즉 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 겉옷을 지어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 옷은 직접 한나가 지은 옷입니다. 그 팔을 기우면서 “이 팔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의 팔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가슴을 기울 때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등을 기울 때는 “주님의 사명을 지고 가는 씩씩한 아이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 옷을 지어 주면서 그 아이에 대한 비전과 꿈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부모는 자녀를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또 한나는 사무엘에게 에봇을 입혔다고 나와 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그 옷을 아들에게 입히며󰡐“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라는 꿈을 심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꿈과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말씀, 인격과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본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우리들의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했던 하나님의 일을 우리 자식들이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꿈을 이어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영적인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자녀들에게 비전을 물려줘야 합니다. 한나처럼 하나님의 꿈을 물려주는 여러 성도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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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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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설교 : 찬양 받으실 왕


눅19:28-40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33.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37.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그분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기마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12영도 더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는 조그마한 나귀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에미가 아니라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길들여진 나귀가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태울 수가 없어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얼마나 초라합니까? 왕의 입성으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입성 하셨습니다. 왜냐구요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셨습니다. 빼앗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 둘을 불러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메여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끌고 오라 누가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래서 제자들이 갔습니다. 정말 나귀새끼가 있고 저들이 끌고 갈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왜 남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 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니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습니다.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습니다. 안장하나 없어서 겉옷을 안장으로 삼았습니다. 궁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금으로 만든 안장을 깔고 다니는데 예수님은 천으로 된 안장 하나도 없습니다. 가시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탄자를 못 깔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겉옷은 겉옷이 아니라 사랑의 양탄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들이 큰소리로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는 왕의 입성을 알리는 소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때 주님의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입성하는데 왕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왕이면서 만 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 가슴이 뭉클 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무엇인데 왕께서 나를 위해 고초를 당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1.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누가 세우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왕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정신 병원에 한 환자가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하고 가니까 저 앞에서 고무신을 끈으로 묽어 끌고 오는 환자가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를 임명했냐 그러더 랍니다. 세상에는 원하지도 않는데 세우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폭력으로 제가 왕이 된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심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 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고 증언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고 강제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나서 들리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2.나귀 타고 오신 왕
왕의 입성이라면 뭔가 화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나귀 타고 입성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국에 내빈 하나만 와도 빨간 융탄 자가 깔리고 고급 쎄단차가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나귀는 장사꾼들이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타고 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오는 것을 겁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그들과 친숙한 동물입니다. 그들 삶 속에는 언제나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모신 자리가 평화입니다. 또한 나귀 타고 오심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심입니다.  만 왕의 왕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쓸데없는 교만과 허세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언제든지 빈 수레가 요란 하구요 가벼운 것이 멀리 날라 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님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겉치레로 화려한 것 보다 든든한 속마음을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를 진정 사랑하는 제자들의 순종이 더 좋은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겉옷이 양탄자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양탄자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사랑은 돈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입니까? 무엇이 더 귀한 것입니까? 그분은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며 도리어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3.찬양 받으실 왕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 되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4.죽으러 오신 왕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남들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주님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의왕처럼 군림하러 가는 줄 알고 자기들도 한자리 할 줄 알고 좋아하나 주님은 그러하질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시기에 인간적으로는 더욱 고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발을 옮기자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지금 답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가 안됩니다. 왜 죽으러 간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로마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왕으로 올라앉으면 그만인데 왜 저렇게 꾸물거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담배를 피우더랍니다. 그래서 꼬마 놈이 왠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더니 “ 마음이 답답해서 피운답니다. 네가 뭐가 그리 답답하냐 했더니 남북통일이 안돼서 그럽니다 하더랍니다. 어른들이 답답 한거요 빨리빨리 철조망 뜯어내고 손잡으면 될 터인데 맨 날 무슨 회담이나 하고 앉았으니 답답하지요. 제자들이 그래요

믿음생활하면서 답답한 일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맞추지 말고 나를 예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찢으신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기 무엇인지를 알고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김 애남 목사/ 헤브론교회

 

은혜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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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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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히브리서 31~3)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브리서 3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한 평생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난후 유대 사회로부터 추방당하고 로마 정부의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떠한 존재이며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우리의 정체성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31절은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아무도 주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644절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56절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우리는 구원받을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4:1).

 

괜찮습니다 다 괜찮습니다책의 저자 안희환 목사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중학교 때 신문 배달하다가 사고를 당하게 되어 왼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 팔이 없음을 절망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사람 만들어 달라는 것, 공부 못하지 않게 지혜 달라는 것, 설교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기울었던 가세가 살아나게 되었고, 사고 때문에 한 학년 유급해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공부가 재미있어지며 전교 1등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 현재는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며 절망하거나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사람들에게 왼팔 없는 목회자 안희환 목사는 이렇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가난해도, 못 배웠어도 많은 실패를 경험했어도 몸에 장애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마음을 고쳐먹으면, 사람이 변하면, 나머지 것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능력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을 향해 날마다 기도 여행을 떠난다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거룩한 형제들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과 구별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11절은 말씀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거룩케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과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526절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과 말씀으로 구별된 거룩한 형제들답게 세상에 물들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세상을 다스리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우리의 믿음의 대상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 31절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신앙고백의 대상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사도이십니다. 요한복음 638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사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요, 그가 하신 표적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시므로 그의 말씀과 행동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귀신이 떠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입고,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길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2021절은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한 길을 가고 있는 나귀 선교사권병희 선교사를 소개합니다. 그는 서울대 농학과 박사학위를 마치고 농업 전문가로 일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가 쓰시겠다는 부르심에 묵묵히 끌려가던 벳바게의 나귀처럼 그는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 방글라데시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가나안농군학교의 분교를 세우고 오직 복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기경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10년 동안이나 척박한 땅을 묵묵히 기경한 방글라데시를 떠나 다시 새로운 땅 캘커타를 향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도 캘커타를 향해 떠났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교사가 되면 어떻게 될 거라는 계산도 없이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삶은 내가 계획하고 꿈꾸던 것보다 훨씬 보람되고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걸음만 앞서 가시면 곧장 따라가겠다고 결심하고 순종했더니 주님의 귀한 일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늘 나보다 한 수가 높으신 주님께 그저 감사와 함께 항복의 손을 듭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소외되고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십자가에서 피 흘려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단번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12절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죄에서 자유를 얻습니다(4:1415).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가시관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비방과 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가난과 비난과 배신과 버림받는 아픔과 고통을 다 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사 우리를 도우십니다.

 

히브리서 725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어떤 절망과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습니까?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사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주님께 연결해 주는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

 

 

하나님의 자녀가 역경과 고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절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의 1차 수신자들은 유대교의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대교와 타협하거나 유대교로 복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서 눈을 돌려 환난과 핍박 가운데 고난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그들을 도우시는 예수님께 영적 시선을 집중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일수록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12:23).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삶을 점령하시도록 예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그리할 때 환난을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를 체휼하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마음을 쏟을 때 담대한 믿음이 생겨 어떤 환난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넉넉히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살았던 것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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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5장3절-4절]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5장 3절과 4절 말씀 가지고 “고난의 유익”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고난의 유익” “고난의 유익”.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잘 살고 성공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기치 않은 고난이 다가옵니다. 문제가 다가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우리 삶 속에 어려움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때때로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자녀들이 속을 썩이기도 하고 사업이 곤두박질하기도 하고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환난이 다가와도 문제가 다가와도 어려움이 다가와도 위대한 승리자 예수님을 붙잡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 고난을 잘 극복해 나가야 될 것이냐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이 고난을 맞이하고 어떻게 이 고난에 잘 대처해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고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삶
 첫째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하기를, 로마서 5장 3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누구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환난 중에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어요? 문제를 만났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 이 말씀은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갖고 어떠한 환난이 다가와도 문제가 다가와도 어려움이 다가와도 고통이 다가와도 마음에 염려, 근심, 걱정, 불안해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주시려고 하는 축복을 바라보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을 바라보고 문제를 바라보면 낙심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 안에서 평안함을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까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고통도 괴로움도 슬픔도 어려움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희망의 새벽은 밝아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장 겨울밤에 추울 때가 동트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만 지나고 나면 환하게 아침 새벽이 밝아오듯이 아무리 고난이 힘들고 어렵고 깊은 밤 속에 있는 상황인 것 같을 지라도 곧 희망의 새벽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전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위대한 선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 이 모든 것이 다 얽혀져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먼 훗날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이루셨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밝은 색깔만 가지고 그리지를 않아요. 어두운 색깔, 밝은 색깔이 어우러져서 나중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고 문제를 만나게 하시고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신 후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여러분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돼요.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명령형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기뻐할 수 없어도 기뻐하라. 바빠서 기도할 수 없어도 기도해라. 감사할 수 없어도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절대긍정의 믿음을 갖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위대한 찬송작가 파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눈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만 치료를 제대로 잘 못 받았어요. 치료하는 분이 잘 못해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패니 제인 크로스비는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다음 단 한 번도 자기를 잘못 치료해 준 분을 원망한 적이 없어요. 그때 제대로 날 치료를 해줬으면 눈이 정상적인 눈이 되었을 때 평생 고통을 주었다고 그런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아니하고 주 앞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했더니 하나님께서 장수의 복을 주셨어요. 1820년에 태어나서 1915년까지 95세를 살았어요.


그리고 찬송을 짓는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찬송가를 가사를 9,000편이나 지었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찬송가에 21곡이나 들어있어요. 여러분이 잘 아는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말 들으사”, 또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나의 영원하신 기업” 아주 주옥같은 은혜의 찬송들을 그분이 다 지었습니다. 누가 와서 그런 질문했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처한 상황이 정말 절망할 수밖에 없고 원망과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감사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그때 고백을 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이 놀라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동안 감사를 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만 문제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또 억울한 일 당하면 정말 낙심하고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괴로워도 감사하고, 답답해도 감사하고, 슬퍼도 감사하고, 몸이 아파도 감사하고, 억울해도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실 것이에요.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만을 바라보지 말고, 문제보다 크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2. 인내하는 삶
 둘째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인내라고 하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들이 가장 큰 약점이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부싸움을 잘하는 분을 가만히 보면, 두 분 다 인내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열심히 싸우는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사역할 때 아주 부부싸움만 했다하면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싸움하는 분이 있는데 30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싸우시더라고요. 나중에 왜 싸웠냐고 했더니 그 부인되시는 분이 남편이 고집불통이어서 내손아귀에 안 잡혀서 싸운대요. 남편분은 뭐라고 하면 저 사람이 걸핏하면 신경질을 잘 내고 화를 잘 내가지고 그걸 못 견뎌서 싸운다는 거예요. 30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싸우는데 어느 날 은혜 받고나서 그들이 변화됐어요. 인내하지 못하니까 싸우는 겁니다. 인내하지 못하니까 소리를 지르고, 인내하지 못하니까 화를 내고, 인내하지 못하니까 결정적일 때 실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절로 3절에 이와 같이 권면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항상 자기가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를 합니다. 서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기를 시편 37편 7절에, “야훼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누가 그런 질문을 한 거예요. “아니 저 악한 사람은 저렇게 멀쩡하게 잘 다니고 잘 먹고 잘사는데 왜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됩니까?” 그런데 주님 말씀하시기를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저들은 푸른 채소같이 금방 쇠하여 질 것이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잡초는 빨리 자라지만 한번 베어버리면 금방 시들어 버린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왜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이렇게 사람들은 질문하는데 하나님의 때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한번 확 심판의 날에 칼을 드시면 잡초는 빨리 자라지만 쉬이 시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참고 기다려야 돼요. 하나님의 때를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사울 왕이 참지 못해서 큰 실수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과 이제 전쟁을 해야 하는데 전쟁을 하기 전에 꼭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사장 사무엘이 와서 예배를 드려줘야 하는데 제사를 드려줘야 되는데 일주일째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급해서 제사장이 드릴 제사를 자기가 드려버렸어요. 그 후에 사무엘이 도착을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될 텐데 급해요. ‘아휴, 전쟁에 나가야 되는데’ 사무엘은 오지 않고. ‘내가 대신 드릴께’하고 제사장이 할 일을 왕이 대신 해버렸어요. 하나님이 그 때로부터 사울 왕의 마음을 돌려버리시고 2대 왕으로 어린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 한 번의 실수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어요. 그 위대한 모세가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가나안을 보기만 하고 못 들어갔어요. 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모세가 화가 나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가로챘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고 반석을 두 번이나 쳤어요. 하나님이 슬퍼하셨어요. 네가 나를 위해서 40년간 충성을 했지만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80세에 부름을 받아서 120세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가나안 땅을 느보산에서 내려다만 보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여리고가 무너질 때가 있는 거예요. 하루 한번 돌아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을 돌고 마지막 날 일곱 번을 더 돌아서 무너진 것입니다. 단번에 무너뜨렸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처음에 무너뜨릴 수 있어요. 하나님이 그냥 한번 손짓하시면 여리고 무너집니다. 그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주일을 돌아라.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라. 그러니까 모두 열세바퀴를 돌고 열세바퀴를 돌았을 때, 소리를 외치매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때는 75세입니다. 너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데 언제 이루어 주셨느냐? 100세에 이루어 주셨어요.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겁니다. 그 100세 때까지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해서 중간에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어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라 자기 아내의 몸종을 불러서 아이를 낳아가지고 그 아이 후손이 중동의 아랍족속이 되어가지고 계속 후손들끼리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중동의 문제인 것입니다. 기다려야 됩니다. 요셉이 거룩한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이 이루어 질 때까지 13년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때까지 13년이 걸렸고 그로부터 9년 후에 그 꿈꾼 그대로 형들이 와서 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때가 있는 거예요.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시 합격한 청년들의 신앙이야기>라는 책이 나왔는데요. 여기에 53회 사시에 합격한 정선열 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선열 자매는 너무너무 힘들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셨고 어머니가 나가서 아픈 다리로 살림을 꾸려나가셨는데 그 어려운 과정에서도 1차 고시를 패스했습니다. 그런데 2차 고시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어머니가 대수술을 받게 되시고, 사고가 나서 아버님은 상태가 위독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그가 교회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절대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고 열심히 준비하고 다시 도전해라.” 그래서 그때부터 그 전에는 사법시험 공부한다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했었는데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되고 시간이 부족할텐데도 열심히 구역예배 참석하고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매달렸어요. 그래서 드디어 그가 사법고시 2차를 패스 합니다. 그러고 이런 간증을 합니다.


“시험 당일, 연습 때와 달리 모든 문제를 시간 내에 다 쓸 수 있었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날 도우셨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저는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때와 내가 바라는 때가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과 내가 원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셨고, 교만한 저를 회개시키셨으며 이기적인 재물의 욕심도 버리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겸손한 판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저를 성숙시키는 도구였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고난의 때에 참고 견디고 기다리면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기적으로 응답과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의 선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3. 연단 받는 삶
 셋째로 우리는 고난의 때에 인내 할 뿐 아니라 연단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5장 4절에,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우리가 참고 견디면 우리가 잘 훈련받아서 하나님의 준비된 일꾼으로 잘 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연단이라는 것은 우리를 다듬고 다듬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준비된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완성된 그러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주님이 고난이라는 용광로에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을 때부터 여러 가지 부족한 것도 많고 문제가 많은 그대도 예수 믿은 거예요.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다듬으시는 거예요. 우리 삶속에 불순물들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도 제거하시고 고집도 또 내 마음 속에 있는 인간적인 모든 정욕과 탐욕도, 또 내 마음속에 있는 불순종의 모습도 또 내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도 주님이 다듬어서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또 내 마음속에 있는 불순종의 모습도, 또 내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도 주님이 다듬어서 깨트리시는 겁니다. 욥이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기 23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할렐루야. “주님이 나를 단련하셔서 내가 순금 같은 그러한 신앙인으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금에 대해서 연구를 좀 해봤어요. 순금같이 되라는데 금이 인류 역사상 화폐가치로 지금까지 계속 가치의 중심이 되어있는데. 금이 어떻게 나오느냐. 이 지각이 균열될 때 기체와 액체가 충돌해가지고 거기에서 그것이 퇴적되어서 금이 되는데 금이 계속 물 흐르는 대로 따라가서 모래 속에 섞인 것이 사금이라고 그러고 그 광맥 속에 있는 금을 산금이라고 그러는데 이 금광맥을 찾아가지고 그걸, 금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돌을 떼어내서 그것을 잘게 부셔가지고 먼저 물로 가벼운 돌을 떠나보내게 하고 나머지 것을 용광로에 처리를 합니다. 그 중에 여러 가지 것이 함께 섞인 동광석이 있어요. 이 동광석은 세 번 1,000도에 되는 용광로에 집어넣는데 첫 번째 1,000도에 집어넣어 가지고 거기서 동이 나오고 두 번째 1,000도에 집어넣으면 은이 나오고 마지막 세 번째 1,000도에 집어넣으면 이제 금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불같은 연단을 세 차례나 받은 후에 순도 99%의 금이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런 순금같이 정금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고난의 용광로에 집어넣으시는 거예요. 그 고난의 용광로에서 우리가 활활 성령의 불에 타서 우리의 욕심도 미움도 내 잘못된 성격도 과거의 상처도 다 태워지고 우리는 정금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우리를 훈련시키고, 훈련시키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야곱은 좀 사기꾼적인 기질이 있었어요. 형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서 형 옷을 입고 들어가 가지고 대신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이 죽이려고 하니까 도망가서 20년 동안 그 외삼촌 밑에서 살았는데 얼마나 연단을 받았는지 자기가 남을 속인 죄로 외삼촌이 계속 품삯을 또 바꾸고, 바꾸고, 바꾸고 하면서 연단시키고, 연단시키고 연단시켜서 20년을 연단시키고, 20년 후에 돌아올 때 마지막 얍복강 나루에서 완전히 깨어져가지고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일군으로 세워주셨어요. 그 형 에서가 2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죽이려고 칼을 들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왔다가 자기 동생이 다리를 절름절름 절면서 초췌한 모습으로 오는 것을 볼 때에 20년의 미움이 싹 녹아지고 자기 동생을 부둥켜안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다시 형제간의 사랑을 회복한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칼에 맞아 죽었을 거예요. 온 가족들이 다 잡혀서 아마 노예처럼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야곱 하나 깨어지니까 온 가족도 다 살고, 그가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서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깨어지고 낮아지면 그러한 은혜가 임합니다. 많은 연단 속에서 유명한 크리스천 작가가 된 캔 가이어(Ken Gire)가『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책에서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괴롭히든지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이 뭔가를 만들어내시는 원재료이다. 조각가가 돌을 깎아 작품을 만들듯 하나님도 우리 안의 자아를 깨트려 그분의 명작으로 완성하신다. 예수님이 장차 누릴 기쁨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변할 것을 믿고 나아가면 기쁨으로 고난의 길을 갈 수 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는 과정의 일부이다.”


그래서 시편 119편 71절, 시편 기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내가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게 되고 말씀을 따라 하나님 영광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요즘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시대가 되어서 우리나라에 여성대통령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만은 이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이 사관학교 졸업생이 최우수 졸업생이 여자 생도들입니다. 그런데 올해 육군사관학교의 수석으로 졸업한 양주희 생도는 들어갈 때 꼴찌로 들어갔어요. 왜냐하면 제주도에서 그가 학교를 다닐 때 육사학생들이 와서 학생들을 모집하는 설명하는 것을 보는데 너무나 그 육사생도가 잘생기고 멋있어가지고. ‘나도 육사가야겠다.’ 그래가지고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어요. 예비번호를 받았어요. 누가 등록을 안 하면 대신 들어가는 거예요. 하여간 예비번호 1번을 받고 있다가 등록을 안 하는 바람에 들어갔으니 꼴찌로 들어간 거예요. 꼴찌로 들어갔는데 4년 후에 수석졸업을 합니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게 된 것은 4년간 학업과 체력을 단련하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결과였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육사에서 소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힘들 때마다 달리기를 하며 마음과 체력을 추슬렀고, 고난은 제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는 마음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했습니다. 앞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훈련시키는 훈련소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준비된 일꾼으로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소망을 이루는 삶
 마지막 네 번째로 고난은 결국 우리를 소망을 이루게 만들어주십니다.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4절에,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꿈을 이루게 합니다. 요셉이 그 꿈을 이룰 때까지 당한 그 연단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그가 13년을 인내하고 연단 받았습니다.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노예로 팔려갔지요. 노예에서 또 억울하게 누명쓰고 감옥에 들어갔지요. 그 고난, 그 연단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어요. 17년 젊은 나이에, 한창 꿈을 꿀 그때에 붙잡혀서 13년 동안 그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밑바닥 인생을 살았으니 누가 그 삶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참고 견디고 또 견디고 훈련받고 훈련받아서 다 준비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셨어요.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후에 우리는 우리 주위에 고난당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의 사도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나처럼 고난당하는 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당할 때 아무도 날 보살펴주지 않아서 얼마나 때때로 외롭고 낙심했습니까?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렇게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우리 주변에 아직도 그런 어려움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With You 당신에게 힘이 될께요』라고 하는 손경미 사모님의 책을 최근에 읽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강원도 평창 산골에 태어나서 음악적으로는 재능이 있었어요. 그래서 본인이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그 마을에서 1호, 대만유학생 1호로 대만에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러 갔다가 그만 그분을 보고 반한 그 중국인의 청혼을 받아서 결국 결혼하게 됩니다. 예수 안 믿으면 결혼 안한다고 하니까 열심히 또 교회를 다녀가지고,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 이제 자기가 중국사람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사는 것이 참 쉽지가 않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적인 습관도 다르고, 참 말할 수 없는 연단을 겪고, 그 다음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요. 하나님이 그 연단 속에 은혜를 주셔가지고 남편이 자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는데 나중에 목사가 되었어요.


목사가 되었는데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당하는데 두 번째 교통사고는 좀 크게 당해서 입원을 했는데 “고난당한 것이 네게 유익이라 그랬어요.” 왜냐하면 교통사고로 들어가서 검사를 받다가 암이 발견된 겁니다. 암이 발견되었는데 여섯 번 암수술을 합니다. 너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지냅니다. 지금도 머릿속에 콩알만 한 뇌종양이 있어요. 그런데 그 고난을 당할 때 왜 내가 한국 강원도 산골에서 대만에까지 가게 되었고, 대만에서 또 중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중국 사람과 만나서 미국까지 오게 되었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통해서 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어요. 그것은 본인처럼 이 암 가운데 고통당하는 이웃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에 ‘아시안 암 환우회’라고 하는 조직을 설립하고 지금 아시아 사람들 중에 암 걸려서 고통당하는 분들을 만나서 위로해주고 같이 기도해주고, 본인이 암환자여서 지금도 암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이 금방 마음의 문을 열고 그냥 눈물 펑펑 쏟으면서 같이 손 붙잡고 기도해서 다시 꿈과 희망을 갖고 암과 싸우고 믿음으로 일어나고, 할렐루야. 그래서 많은 고난당한 이웃들에게 주의 사랑을 전하고 있어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처음엔 원망과 충격과 실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내가 작아지는 순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단지 암 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암 환자에게 다가가 진실된 소통을 하며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커튼 뒤에 진짜 행복을 숨겨두셨습니다” 할렐루야. 고난 중에 우리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영어 성경에는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라 그랬어요. 예수님께 딱, 초점을 맞추라. 고난의 때에 사람 바라보지 말고,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내 자신 바라보지 말고, 딱,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어려움 당한다고 슬픔당한다고 낙심하고 주저앉지 마세요.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이 지나고 난 후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절망이 끝이 아닙니다. 절망의 끝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낙심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영광의 내일을 바라보며 믿음의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고난의 때에 감사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감사합니다. “아! 하나님이 이를 통하여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는구나. 이를 통해서 나를 더 깨뜨리시고 낮추시고 이를 통해서 우리교회를 더 튼튼하게 만들고 견고하게 세워주셔서 더 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이끌어주시는구나.”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주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미래를 바라보고 꿈과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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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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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6장 24-28절] 

오늘 저는 에스겔 36장 24절로 28절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을 뒤돌아볼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 무엇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 오늘 이 시간 이 자리까지 주님이 인도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고 마음에 평안함을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게 다 선물로 주어진 거예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무엇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서 여러분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생명도 선물로 받았고 건강도 선물로 받았고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 대한민국도 다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첫째도 감사요, 둘째도 감사요, 마지막도 감사라. 감사의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전 재산을 잃고 열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고 아내는 떠나가고 친구들은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욥기서 1장 21절에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야훼시요 거두신 이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할렐루야. 얼마나 위대한 신앙입니까? 고난 중에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슬픔 중에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함께 했기 때문에 절망 중에서도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일생 다가도록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신 그 내용입니다.


1.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첫째로,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고아같이 혼자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채워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4절에,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포로생활 하고 있을 때 저들을 인도하여 내어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예비해주신 가나안 땅으로 저들을 이끌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보면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타국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지내면서 노예생활 하던 때고, 그 다음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약 70년간 포로생활을 하며 노예의 삶을 살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절망 중에 처한 저들의 모습을 잘 아시고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셔서 저들을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7절과 8절에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할렐루야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하나님이 건져내셔서)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하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아멘.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절망 가운데 처했을 때 문제 가운데 있을 때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주님이 보시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이 들으시고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우리를 그 절망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해방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왔는데 그로부터 약 800년 정도 지나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을 당했어요.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70년 동안 포로생활 하게 됩니다. 바벨론에 끌려가서 저들이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 그들의 노래가 시편 137편입니다. 1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울었도다, 여러분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그러죠. 그것도 먼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그 삶이 절망적이겠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오페라로 만든 것이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입니다. 이 ‘나부코’라는 말은 이탈리아 말인데 느부갓네살 왕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바꾼 것이 ‘나부코’입니다.


베르디가 두 번의 오페라 곡을 만들어 냈다가 엄청난 실패를 거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와 두 아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가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이 고난 중에 부른 찬송에 영감을 받아서 작곡한 것이 이 유명한 오페라 ‘나부코’입니다.


1842년 4월 9일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졌는데요. 그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의 침략을 받아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자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제 3막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올 때 감동하여 이 날 기립박수를 하고 이 오페라가 그들 국민의 노래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980년 이 오페라 제 3막에 있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불려지고 난 다음, 그때 토스카니가 지휘를 했는데 온 청중이 일어나서 30분 동안 기립박수를 30분.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수가 좀 인색하잖아요. 잘 안 쳐요. 그런데 30분 동안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어요. 그만큼 큰 감동을 준 그 합창이 이 오페라 속에 들어 있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오, 사랑하는 나의 잃어버린 조국이여
 소중한 추억과 불행한 기억이 있는 곳
 예언의 시인들의 황금 하프여
 왜 버드나무 위에서 침묵하고 있는가!
우리 가슴 속 기억에 다시 잃어버린 불을 붙여
 옛 시절 이야기를 들려다오
 예루살렘의 잔혹한 운명을 위해
 쓰디 쓴 비탄의 노래를 들려다오
 아니면 우리가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주님께 노래를 청해다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도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화 했을 때 36년 동안 고국을 떠나 정처 없이 살던 많은 우리 선조들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황성옛터’, ‘타향살이’ 그런 노래들이 고국을 잃은 슬픔에 불려진 노래들이고 동요가운데서는 ‘울밑에선 봉선화’, ‘오빠 생각’ 다 그것이 그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 가운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모른척하신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고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에,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1편 21절로 22절에, “야훼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우리의 간구하는 그 부르짖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절대로 낙심하고 포기하고 절망해 주저앉지 말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내어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죄의 모습에서 정결케 만들어주십니다. 얼룩진 모든 죄를 예수의 보혈로써 정결케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게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2.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


둘째로,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에스겔 36장 25절에,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함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멸망을 당하게 되는데 이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70년간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절망 가운데 부르짖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들이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러분의 삶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면 물질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여러분이 가진 그 무엇을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권세이든지, 명예든지 그 무엇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나의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상을 다 내려놓게 하시고 주의 보혈로 씻어서 말씀으로 정결함을 받아서 변화 받은 모습으로 새로워진 모습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요한일서 1장 9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아침에 세수를 하고 나왔는데도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또 세수를 해야 돼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먼지가 많이 묻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와서 말씀 듣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씻음 받아도 세상에 나가서 알게 모르게 죄의 먼지가 묻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보는 것이 죄고, 듣는 것이 죄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죄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이 말씀의 물에 자신을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합니다. 이 말씀엔 예수님의 피가 방울방울 적셔져 있어서 말씀 읽을 때 예수 피가 우리 마음에 뿌린바 되어 우리를 새롭게 하고 치료하고 용서하고 회복시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주의 말씀으로 깨끗하여 졌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5장 5절로 6절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늘 자신을 살펴서 주님 앞에 정결함을 받고 귀하게 아름답게 쓰임을 받는 주님의 일꾼 되기를 바랍니다.


평생 성경을 붓으로 써서 말씀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박재현 작가를 소개합니다. 구약 39권을 열세 살부터 37년간 붓으로 써서 5,300여장에 달하는 성경을 썼는데 쌓아놓은 높이가 4미터랍니다. 말씀서예가. 그가 평생 말씀을 쓰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방탕한 삶을 사심으로 엄마가 집을 나가셨어요. 그때 나이 일곱 살입니다. 일곱 살에 혼자 버려졌을 때에 어느 날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를 가게 됩니다.


거기서 친구가 성경을 주는데 그 성경을 받고 너무 감동해서 일주일동안 말씀을 읽다가 은혜를 받아버렸습니다. 자기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어요. “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여기 계시구나. 어떻게 내가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할까?”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며 성경을 붓글씨로 써나가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에게 배운 그 서예실력으로 열세 살 때부터 성경을 써나갑니다. 그런데 너무 집이 어려워서 열여덟 살 때 학교도 못 가고 도자기 공장을 다녔는데 어느 날 몸이 너무 힘들고 계속 기침이 나와서 병원에 가니 폐결핵 중증이에요. 얼마 살지 못한다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이때 죽으면 죽으리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금식하면서 하루에 열여덟 시간까지 성경을 붓으로 써나갔어요. 그렇게 성경을 쓰는 동안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곧 죽는다는 그가 성경을 쓰면 쓸수록 자꾸 새 힘이 나요. 새 힘이 솟아오르는데 말씀을 쓸 때 예수의 피가 또 적시고 또 적시고 또 적셔져서 병원에 가서 조사해보니 병이 깨끗이 나음 받았어요. 할렐루야.


너무 감사해서 더욱 더 열심히 성경을 쓰기 시작했고요. 1993년에 창세기부터 아모스까지 쓴 성경에 불이 나서 다 사라졌는데도 또 다시 쓰기 시작해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성경을 쓰는 동안에 은혜를 주셔서 2000년도에는 서예월드컵으로 불리는 중국 국제서법대전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대상을 받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에 특선작으로도 올랐습니다.


전국 미자립 교회 32곳과 국제선교선 ‘로고스 호프’호에 ‘말씀의 벽’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전 재산을 바쳐 글 쓰는데 헌신하니까 좋은 집도 마련해 주시고요. 이제는 신약성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신약성경을 다 쓴 후에 통일을 준비할 것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휴전선 근처에 ‘모든 벽을 성경 말씀으로 채운 교회’를 세우고 싶어요. 통일을 기도 하면서요!”


할렐루야. 꿈이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치료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의 말씀 묵상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말씀의 정결함을 받을 때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 마음이 사람들은 철저히 부정적 이예요. 그래서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을 비판합니다.


칭찬하는 데는 굉장히 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남을 험담하고 나쁘게 얘기하는 것은 시간이 안 걸리고 그냥 듣자마자 옮깁니다.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전하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한국에 많은 사람들이 이 악성루머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새 마음을 가지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6절, 27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주님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여주시고 변화시켜 주셔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셔서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삶 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됩니다. 내 입으로 예수를 믿으려 하면 힘듭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임할 때에 우리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 받으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 됩니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마음이 자꾸 굳어집니다. 상처를 받고 나면요 마음이 다쳐요. 마음이 다치고 나면 쉽게 부정적인데 영향을 받고, 또 마음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잘 내고 다투고 그래서 문제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이 깨어져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만들어주시고 미워하고 다투며 살지 않게 하시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분노로 굳어진 마음, 미움과 상처로 굳어진 마음을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장 7절로 8절에,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완고하게 하지 말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을 깨뜨리고 회개해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베드로의 첫 설교에서 베드로가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시편 51편 10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고 약속을 했다가도 어기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3절로 4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할렐루야!


부산에 거하시는 집사님 한 분 계신데 이분은 참 돈이 많은 회사 사장님이신데요. 우리교회에서 1979년부터 성경학교를 시작했는데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오셔서 우리 교회 와서 성경학교, 성경대학을 다 졸업을 하셨어요. 근데 하루는 저한테 와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절대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왜냐? 제가 가장 가까운 친구한테 돈을 빌려줬다가 돈도 잃고 가장 가까운 친구도 잃었습니다.” 돈을 빌려줬는데 이 친구가 힘들고 어려워서 못 갚겠으면 와서 솔직히 얘기를 해야 되는데 사라져버린 거예요. 그 가까웠던 친구가 돈을 갚지 못하니까 잠적해버렸어요.


그래서 너무나 그 때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절대 내가 돈 빌려줘서 사람도 잃고 돈도 잃지 않아야 되겠다.” 그래서 누가 도와달라고 오면요, 돈 빌려달라고 오면 비서를 시켜서 알아봐요. 그래서 집이 어렵다고 하면 쌀도 사다주고 또 그냥 쓰라고 생활비도 줘요. 그러나 빌려주진 않아요. “아 이것 당신 쓰게. 나중에 돈 생기면 당신보다 어려운 사람 또 도와줘.” 그때 이후로는 믿는 사람들끼리 돈을 빌려 주고 빌려 받고 하는 일을 안 해서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빌려갈 때는 “아~ 내가 일주일만 쓸게.” 가서는 일주일이 한 달 되고, 한 달이 일 년 되고. 그래서 그 마음에 상처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바뀌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인도해주십니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토마스 오베다이아 치솜(Thomas Obediah Chisholm, 1866-1960) 목사님 간증으로 말씀을 마칩니다. 미국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교사가 됐는데 건강이 악화되어서 교사직도 내려놓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몸이 아파 쉬고 있다가 27세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무디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한 다음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계속 아파서 1년만 목회를 하고 그만 더 이상 사역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낙심 가운데 있을 때에 1923년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 23절 말씀이 마음에 팍 뛰어 들어왔습니다. “야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할렐루야!


이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데 주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영원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날마다, 날마다 나에게 새로우니 내가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할렐루야!
너무 감동을 받고 이것을 찬송 가사를 만들어서 곡이 붙여진 다음 이 찬송이 불리기 시작하는데 무디 신학교에서는 학교의 교가로 불려 질 정도로(비공식 교가로) 모일 때마다 이 찬송을 불렀고요, 그 때 총장이었던 학톤 총장은 이 찬송을 너무 사랑해서 자주자주 불렀고 장례식 때도 그 찬송이 불려 졌다고 합니다.


또한, 빌리 그래엄 전도단의 유명한 성악가 조지 베버리 쉐아 선생이 이 곡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이 찬양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치솜 목사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아세요? 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건강이 나빠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목사님이 찬송을 지을 때마다 건강을 주시고 또 건강을 주셔서 94세까지 살면서 1200편의 찬송을 지었습니다. 할렐루야!


몸 건강 안 좋으신 분 오늘부터 열심히 찬송 부르시고 열심히 찬송을 지으세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건강이 나빠서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함과 놀라운 보살핌’을 이 찬송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가 솟구쳐 올라옵니다!” 할렐루야!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봄철과 또 여름 가을과 겨울
 해와 달 별들도 다 주의 것
 만물이 주 영광 드러내도다
 신실한 주사랑 나타내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내 죄를 사하여 안위하시고
 주 친히 오셔서 인도하네
 오늘의 힘 되고 내일의 소망
 주만이 만복을 내리시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이 신실하신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일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인도해주시고 여러분을 정결케 만들어주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여러분에게 불어넣어주시고 날마다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변하지만 주님은 변하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주님 믿고 의지하고 약속의 말씀 붙잡고 나아가길 원하오니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케,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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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갖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짧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큰 은혜, 큰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없습니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의 신분이 바뀝니다. 마귀의 노예, 저주받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자녀, 축복받은 인생으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 받은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를 때는 죄와 절망가운데 살았지만은 예수를 믿고 나서 새사람이 되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한때는 예수님을 몰랐을 때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지만은 예수님을 만난 다음 그 후에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그의 일생의 가장 귀중한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 붙잡고 일생을 다가도록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그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내 삶에서 존귀케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서 참 기쁨을 누리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1. 내가 죽는 신앙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내가 주님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는 신앙으로 먼저 주님께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 다시 말하면 내 옛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죄에 속한 이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생각해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그 순간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죄 속에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제는 죄의 종노릇 하지 마십시오. 알고 있는데 잘 안 되요. 내가 미워하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쉽게 화내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속상해하고 답답해하면 안 되는데, 아는데 잘 안 되요.


왜? 아직 내가 살아있으니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옛 사람이 살아갖고‘자기가’, ‘자기가’,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다 보니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도‘아 잘 죽는다.’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완전히 그 삶이 바뀌어졌어요. 그는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는데 그것을 다 내버리고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고백이 빌립보서 3장 8절에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이와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자신의 자랑거리를 십자가에 다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누가 귀에다 대고“야, 이 나쁜 놈아”욕해도, 발로 걷어차도, 송곳으로 찔러도 반응이 없어요. 왜? 죽었으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옛 사람이 죽었으면 누가 뭐라고 그래도“못 들었습니다. 난 죽었어요.”누가 뭐라고 그러면 막 분노하고, 사실 확인하기도 전에 막 혼자 속상해하고, 밥 먹다 얹히고, 잠 못 자고, 그런 일이 종종 있어요.


여러분,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고집과 교만과 불순종과 하루에도 몇 번 씩 욱하고 화내는 것과, 다 죽은 거예요. 죽은 사람은 실망할 것도 없고, 불쾌할 것도 없고, 섭섭해 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어요. 죽었으니까. 문제는 어디 있습니까? 내 자신입니다. 이 내 자신이 죽은 것 같은데 또 살아나가지고, 또 미워하고, 또 속상해하고, 또 화내고, 또 소리 지르고, 그래서 이 내가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따라하세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할렐루야.


이 죽는‘나’는 뭐냐, 옛 사람. 미워하고, 분노하고, 속상해하고, 죄 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이 사람이, 옛 사람이 날마다 십자가에 죽어야 되요. 그래서 우리는 새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옛 사람의 모습에 끌려 살면 또 죄 짓지요, 또 미워하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 욕심덩어리예요.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가지려고 그래요. 뉴스 보셨지요? 땅에다가 돈을 27억을 묻어 놓고, 그 중에 4억을 빼 쓰고 잃어버렸다고 신고했다가 그 돈을 다 압수당했어요. 참, 좋은 일에 써야지, 땅에다 묻어놓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욕심덩어리예요. 자꾸 가지려고 하고. 잘못 도박에서 돈을 벌어갖고 이게 드러나면 안 되니까 밭에다 파묻어놓고. 사람마다 다 가서 밭을 파 볼지 모르겠네요. 뭐가 있나 하고. 여러분, 욕심덩어리예요. 그런데 죽어지면 그 욕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고백해야 되요.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내가 분노하던 옛사람도 죽었습니다. 미워하던 옛 사람도 죽었습니다. 속상해 하던 옛 사람도 죽었습니다. 늘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던 옛 사람도 죽었습니다. 밤 잠 이루지 못하고 마음속에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 차 고통하던 그 모습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을 했어요. 그분의 책「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의 무능을, 무능력을 깨닫고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나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모든 생명의 호흡과 힘이 내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따라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인 진리라고 말해요. 내가 죽어야 살아요. 살고자 하면 죽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내가 살고, 내가 죽어야 내 가정이 살고, 내가 죽어야 이웃이 살고, 내가 죽어야 이 사회가 살고, 내가 죽어야 이 나라가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으니까 늘 내 자신이 문제덩어리가 되고, 내가 살아있으니까 가정에서도 늘 소란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웃과의 관계가 그렇고,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 사회 속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나시면 좋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는 스스로가 죽을 수가 없어요. 주님이 함께 나를 도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실 때에만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 순간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어요.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 우리는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내가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놀라운 은혜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붙들고 기도할 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놀라운 일을 베풀어주십니다.


앤드류 목사님의 또 다른 책「나를 비우고 성령으로 채우라」그 글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거나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의 삶은 너무나 고귀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그 모양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런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삶이기 때문에 주님이 성령으로 친히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을 살게 하실 때 가능하다.”


주의 성령이 임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어떻게 화나는 것을 다스려요? 못 다스려요. ‘화내면 안 되지’생각하고 있지만 벌써 화 대고 있거든요. ‘내가 소리 지르면 안 되지’하면서 벌써 소리 지르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 하셔야 되요. 성령이 나를 사로잡아야 되요. 성령이 나를 사로잡아서 내 입술을 다스리고 내 생각을 다스리고 내 삶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나를 사로잡아주시옵소서. 내 삶 속에 주님이 역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2.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신앙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둘째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장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누가 사신다고요? 그리스도께서.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의 옛 사람, 옛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분명하게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도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도다. 따라하세요.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셨어요.


그래서 비즈니스를 해도 그 비즈니스의 사장님, 회장님이 내가 아니라, 이름은 나로 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그 회사의 회장이고 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사서 들어갔을 때 등기에는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공부를 해도, 좋은 데 취직을 해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그 자리는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주신 자리이기 때문에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요, 주님이 높이심을 받으시는 자리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증거하는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오직 주께 영광. 운전을 할 때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집에서 음식을 만들 때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는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최봉석 목사님은 일제 시대 때 아주 능력이 많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신 목사님이 되셔서 이름이 별명이 ‘최권능’ 목사입니다. 그런데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감옥에 갇혔어요. 그를 끌어내서 형사가 조사를 합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몽둥이를 갖다가 때립니다. “왜 이 늙은 영감이 말이 없어?” 하고 ‘탁’ 때리니까 “예수” “어, 이것 봐라.” ‘탁’ 때리니까 “예수”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입만 열면 “예수”, 걷어차도 “예수”, 때려도 “예수”. 그래서 기가 막혀서 “어디 예수뿐이야, 이 영감탱이야!” 소리를 질렀더니, 이 목사님이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 몸 속에는 예수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무리 때려도 예수 밖에 나올 것이 없소."


할렐루야. 여러분 그 신앙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가운데 예수님 밖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나를 아무리 흔들어도, 나를 짓밟아도, 나를 때려도, 나를 무시해도, 나를 멸시해도, 내 삶 속에서 예수님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할렐루야.


로마서 14장 8절에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을 위하여서.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심으로 말미암아 내 삶 속에서 주님이 영광을 받아야 됩니다.


주님이 내 삶 속에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오셔서 날 의롭게 만들어주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으로 오셔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주시고, 기쁨의 근원되신 예수님으로 오셔서 내 맘에 기쁨이 넘쳐나게 만들어주시고, 사랑과 용서의 근원으로 오셔서 예수님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과 용서가 넘쳐나게 만들어주시고, 치료자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모든 병에서 치료하여 주시고, 형통케 하시는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생활에서 형통케 만들어주시고, 영생의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영생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연세대 영동 세브란스 병원의 암센터 소장인 이희대 박사님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희대 박사님이『희대의 소망』이라고 하는 책이 다시 재출간되어서 도착이 되었어요. 제가 이 책을 받아들고 그 날로 다 읽었어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분을 만나서 같이 예배를 드린 적도 있는데 2003년도에 대장암이 발병이 되어가지고 지금까지 8년 동안 병과 싸우고 있는데 대장암을 비롯해서 온 몸에 암이 전이되어서 열 번 이상 재발을 하고요, 수술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현재 암세포가 간과 골반 뼈에 전이되어 암4기, 말기 암 상태이지만은 아직도 그는 절대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 붙잡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어요. 본인이 암센터 소장이에요. 본인이 암을 몸 여러 곳에 갖고 있으면서, 암4기는 암 말기입니다.


그런데 암말기라는 말을 안 써요. 이분은 “암4기 다음에 생명의 5기가 있다.” 그래가지고 절대 죽음을 선고받고도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갖고 전진해 나갑니다. 조용기 목사님께 두 번 기도 받고요, 사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목사님의 그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늘 고백합니다. 그래서 암이 분명히 있는데 일반 상식적으로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계세요. 원래 말기 암 환자가 3개월에서 6개월 선고 받거든요, 8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암이 허락 없이 와서 돈도 안내고 전세 살고 있다고.” 암과 싸우는 거예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암은 하나님을 만나게 채 주었기 때문에 저에겐 차라리 축복이었습니다. 기독교 학교도 나왔고 성경을 접한 적도 있었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암을 통해서 철저히 낮아짐으로써 비로소 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03년 6월에 저는 이미 4기였습니다. 말기입니다, 말기. 그때 죽는다, 죽는다 했더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적인 치료 외에 영적인 치료를 허락하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절망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믿음으로 암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의술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많은 암 환자들이 이분의 권면을 받고 암과 싸워서 이기고 죽음의 병상에서 일어나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이 주님의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날마다 죽어지고 내 삶 속에서 주님만이 높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내 삶속에서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의 옛사람은 쇠하여야 하리라. 오직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신앙


세 번째로 우리는 이제 내가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마세요. 문제를 바라보지 마세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세요.


히브리서 11장 6절에 이와 같이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보세요.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시고 희생하셨어요. 그 희생의 사랑에 감동되어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다가오고, 어떤 절망이 다가오고, 어떤 고통의 순간이 다가와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를 갖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육신의 질병이 있습니까? 자녀의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 믿음 안에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국 대학생 선교회를 창립하시고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셨던 김준곤 목사님께서 2년 전 향년 85세로 소천 하셨습니다. 그분의『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라는 책이 있는데, 2009년 8월8일자 국민일보에 마지막 글을 남깁니다. 그분이 따님이 세 분이신데 둘째 딸 신희가 세상을 떠나는 그 일에 대해서 고백을 합니다.


1982년 4월 26일 화창한 봄날에 사랑하는 둘째 딸 신희는 세 살, 다섯 살 난 두 딸과 남편을 남겨두고 만 2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암 수술을 받은 날부터 167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신희는 전주 예수병원 병실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 날 아침에도 기도를 해주고 병실을 나왔는데 딸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병원 응급실에 달려갔는데 이미 호흡이 멈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다들 이 병실에서 좀 나가달라고 그러고 딸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 사랑하는 딸이 눈앞에서 호흡이 멈춘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꼭 붙잡고 있는 신희의 손목이 서서히 굳어지며 차가와지고 있음을 느꼈다. 종잇장 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분명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같이 잔잔하다. 지상의 산 사람 얼굴 중에 이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조차도 정지된 제로점에 선 것이다(Be nothing, Do nothing, Say nothing). 십자가상의 주님을 쳐다본다. 가시관 밑으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주님의 제로와 나의 제로, 주님의 고통과 내 고통, 주님의 죽음과 내 죽음, 신희의 죽음이 만나고 있는 것일까.


잠시 뒤에 생각했지만 나는 주님이 섭섭했던 것이다. 그리도 가냘픔 아이에게 그리도 가혹한 고통을 주시다니. ‘주여...’하고 부를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요, 그, 그 죽음 앞에 가만히 멈춰선 순간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윽고 내게는 한 기적이 일어났다. 깊고 깊은 존재의 밑바닥, 주님이 뚫어버린 지하에서 지하수가 솟듯 세미한 음성으로 한 찬송이 터지고 있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심령 속에서 주님 앞에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것은 분명 내 찬송이 아니다. 내 속의 성령이 내 대신 부른 찬송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계셨다. 그때 그곳에도 나와 함께 내 위에 계셨다. 성령의 대송이다.”


여러분, 지금 죽을만한 그러한 고통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절망도, 어떠한 문제도, 어떠한 고통도, 어떠한 괴로움도, 어떠한 슬픔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가 강물을 이루어서 우리의 상처 난 곳을 적시고, 우리의 절망적인 환경을 적시고, 우리의 문제 있는 가정을 적시고,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을 적셔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낙심하지 말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절대 뒤로 물러가지 말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일어나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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