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명락교회 이 명선 목사
사무엘상 2장 12-26절을 중심하여 ‘엘리와 한나의 자녀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본문에서 두 가정을 보게 되고, 두 결과의 종말을 보게 됩니다.
한 가정은 엘리라는 제사장의 가정으로 이스라엘의 명문가정입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불행한 인생으로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제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합니다. 나중에는 법궤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전쟁터에 무기로 가지고 갔다가 빼앗기며, 두 형제가 동시에 죽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서 아이의 이름을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 가정에서 떠났다)이라 지었고, 아버지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정의 종말, 나아가 한 민족의 종말을 이 사건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런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엘리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한 가정은 한나의 가정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괴로운 한 여인,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 하나님으로 인해 구별된 삶은 사무엘이라는 자식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시대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큰 역사적인 시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결단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영향력을 준 인물입니다. 동시에 다윗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발굴해서 키워내는 선지자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그런 삶은 바로 한나에서 시작됩니다.
엘리와 한나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자녀 교육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 제사장과 한나의 자녀교육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분별력이 있고, 없고’입니다.
분별력은 영적 감수성을 말합니다. 분별력은 때를 잘 분별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들어가야 할 때, 말해야 될 때와 침묵할 때,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웃어야 할 때와 울어야 할 때를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을 잘 분별하지 못해서 울어야 될 때에 웃고, 나가야 할 때 들어오고 합니다. 또 붙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 사랑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 할 것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워해야 할 것을 붙들고, 버려야 할 것을 붙듦으로써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분별해야 합니다.
엘리의 아내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홉니와 비느하스는 엄마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엄마 없는 자녀를 보는 엘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그 아이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자녀를 사랑할 줄은 알았지만,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자녀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다는 것을 분별해서 가르쳐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삶이 게으르고 나태하고 분별력이 없습니다. 제사나 지내주고 백성들이 오면 재판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아이들이 다 배워버렸습니다. 정말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될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모 품을 떠난 자녀는 아버지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제물로 가져온 고기를 함부로 건져 먹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과 동침해서 백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게 했습니다. 엘리는 그 상황에서도 자녀를 바르게 지도하지 못했습니다.
한나는 어떠했습니까? 자녀가 없을 때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아이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도록 제가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결단했습니다. 매년 제를 드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품안에서 가르칠 수 있을 때 그 아이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를 가르쳤고, 예배를 가르쳤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아이의 기본적인 인격은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다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엄마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자기 품안에 있을 때에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주고, 젖을 떼어도 되었을 때에 아이를 하나님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주의 성전에 맡겼습니다. 세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자녀가 얼마나 눈에 그려지겠습니까? 그러나 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우선순위로 드려지기를 바라며 철저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합니다. 그가 정말 분별력 있는 여인임을 이 대목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자녀가 내 품을 떠나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녀를 바르게 지도하는 한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삶의 자리’입니다.
엘리의 삶의 자리는 ‘성전’이 아니라, ‘자기 처소’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성전에 누워’ 있지만,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에 관한 본문을 읽다보면 '자기자리에 앉았더라'는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제사장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섬기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자리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입니다. 그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다가, 즉 교만한 자리에 앉아만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자리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자녀와 이웃과 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지, 나를 주장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나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그녀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고통이 있었을 때 원망하는 자리로, 낙심하는 자리로 갈 수도 있었지만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기 자녀 앞에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하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무엘은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불립니까? 모든 신학자들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기도를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자기의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 나이가 들면 기도는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은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섰고 영적인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에 정말 존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고, 그들의 멸망이 민족과 나라의 멸망으로 직결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세상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권위의 소리, 자기 내면의 아집의 소리, 기득권의 소리를 듣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엘리의 자리는 정말 존귀한 자리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지만, 고통의 자리가 되었고, 한나의 자리는 고통의 자리였지만, 축복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 성전에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아이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잘 길러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쓸 만한 인물이 생긴다는 것은 굉장한 생명의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위한 확실하고 분명한 교육 지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아이들도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인물이 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경건한 부모에게서 그런 믿음의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비전’입니다.
엘리는 자기 자녀들에게 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자녀들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때 엘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책망으로 그쳤습니다. 그 이상 하나님의 뜻과 사명, 즉 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 겉옷을 지어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 옷은 직접 한나가 지은 옷입니다. 그 팔을 기우면서 “이 팔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의 팔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가슴을 기울 때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등을 기울 때는 “주님의 사명을 지고 가는 씩씩한 아이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 옷을 지어 주면서 그 아이에 대한 비전과 꿈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부모는 자녀를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또 한나는 사무엘에게 에봇을 입혔다고 나와 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그 옷을 아들에게 입히며“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라는 꿈을 심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꿈과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말씀, 인격과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본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우리들의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했던 하나님의 일을 우리 자식들이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꿈을 이어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영적인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자녀들에게 비전을 물려줘야 합니다. 한나처럼 하나님의 꿈을 물려주는 여러 성도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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