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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3장]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3~11)

 

복음성가 158장 ‘날마다 숨 쉬는 순간 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고린도후서 1장 3절로 11절 말씀을 가지고 “모든 위로의 하나님”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모든 위로의 하나님” “모든 위로의 하나님”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다 그 마음속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적치유세미나’라고 마음에 상처 입은 주님의 백성들을 치료하는 그런 세미나가 있는데 가서 얘기를 나눠보면 참석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상처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상처의 기억들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 나이가 50세가 다 된 분이 3살 때, 4살 때 상처 받은 걸 기억해요. 7살 때, 8살 때 받은 상처, 다 30년, 40년 지난 상처들인데 그 상처들을 잊지 못하고 그 마음 한 구석에 갖고 있다가 그 아픔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라날 때 부모에게 받은 상처, 또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받은 상처,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게 잘해야 되겠다’ 그러한 생각을 했어요. 또 부모님들도 어린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상처받을 이야기를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 부모가 화났을 때 막 쏟아내는 얘기들이 아이들 마음에 그대로 다 상처로 남아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화났을 때는 정말 우리가 말을 잘 다듬어야 되겠다. 말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 성장해서 믿던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 결혼생활에서 온 상처, 뭐 많은 상처들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누군가 와서 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고 치료해 줄 분이 필요한데, 세상 사람들의 도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치료자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께 나아올 때만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함 받을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자살입니다. 자살문제입니다. 대통령 직속의 사회통합위원회 2012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요 OECD국가 가운데 인구대비 지금 자살률 1위를 8년째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우울증 통계를 보니까 4년 사이에 우울증 환자가 12.4 퍼센트가 증가했고요, 특별히 젊은 층 가운데에 우울증 환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옵니다. 지금 또 하나의 사회 가운데 큰 문제는 고등학교 중퇴한 학생들이 28만 명입니다. 어디선가 지금 사회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중퇴하고 나니까 갈 길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쉽게 타락의 길로 갑니다. 이런 많은 문제를 우리가 안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그 마음에 가진 깊은 상처 때문에 그들은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와 방황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올 때만이 이 같은 치료할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들을 치료함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1. 위로의 하나님
 먼저 위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 성경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할렐루야.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저는 성경을 묵상하다가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몰라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 나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아시는 우리 주 하나님. 염려할 것이 없어요. 걱정할 것이 없어요. 복음성가에도 있잖아요. “내 눈물 씻어 주시는 예수 복된 예수”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어요, 걱정할 것이 없어요, 슬퍼할 것이 없어요. 사도 바울이 평생 주님 일 하는 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서른 살 까지는 승승장구, 정말 전도유망한 청년입니다. 좋은 가문에, 좋은 학벌에, 좋은 배경에, 그래서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에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 같은 기관인데, 그 당시 유대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기관입니다. 거기서 아주 차세대 주자로, 지도자로 뽑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을 앞세워서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그 일을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를 무너뜨리고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사건이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됐어요. 그때까지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었는데, 그날 이후 남은 여생을 주님을 위해 바쳤습니다. 보통 그가 60세를 살았다고 보는데, 처음 30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은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유대교 지도자들이 볼 때는 변절자입니다. 배신자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의 일을 얼마나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고, 계속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하는 모든 일을 방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환란 가운데, 모든 절망 가운데, 사도 바울이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어요. 1장 4절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본인이 환난 당하는 것에서 긍정적으로 해석을 했어요. 이 환난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 주위에 우리처럼 고난당하는 사람, 슬픔 당하는 사람을 우리가 위로할 수 있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요,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고난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가 있어요.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성경은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나니까 주님이 주신 위로가 풍성하여서 그 위로함으로 새 힘과 용기를 얻고,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길 때, 때때로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믿지 않는 집에 시집 가가지고 핍박을 당하고, 제삿날 되면 늘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었지만은, 때가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고난이 변하여서 축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게 되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복된 가정으로 변화되는 날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뒤에 다가올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토요일만 되면 우리 성도님들 자제분 주례를 많이 하는데, 그 웨딩마치 딴딴따단 하면 이제 신부가 들어오잖아요. 그 웨딩마치를 들을 때마다 “아, 고난은 웨딩마치 같은 것이다.”, “고난은 축복의 전주곡이다.” 그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그날 제일 아름다운 거예요. 그날 이후론 또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신부가 들어오는 모습을 신랑이 흐뭇해가지고, 어저께 그 신랑은요, 기다렸다가 맞이해야하는데 중간까지 데리고 들어오더라고요. 아직 걸어 들어올 시간이 있는데도, 버적버적 가가지고 가서, 급하긴 참 급해요. 뭐 좋아서 뭐 빨리 가서 손을 잡고 들어오는 거니까 결혼식 때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중요한 것은 고난은 그런 웨딩마치같이 우리에게 축복을 예고해주고,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의 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낙심하지 마세요. 슬퍼하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세요. 고난 뒤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누가 와서 흔듭니까? 누가 와서 문제와 어려움을 가져다줍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좋은 일이 일어나려는가보다.” 주님 앞에 감사하세요. 영광을 돌리세요. 그 믿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고난을 당한 사람이, 고난당한 사람을 이해해요. 병원에 누워 본 사람이, 환자의 마음을 압니다. 오래 병중에 있으면요, 사람 성격이 예민해져요. 아주 성품이 유하고 좋은 사람도, 6개월, 1년만 병실에 있다 보면 굉장히 날카롭고 예민한 분이 되요. 이해해야 되요. 그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만 낸다고, 아픈데 짜증까지 낸다고. 그게 아니에요. 아프면 짜증나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하게 되니까, 고난을 당했을 때 고난을 당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다 실패해봐야,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 거예요.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내 잘못도 아닌데, 부도가 나가지고 연쇄반응으로 내 사업이 무너질 때 그 마음을 누가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까? 실패의 경험들, 우리나라는 또 입시라는 게 있어가지고 참, 한번 시험 쳤다 떨어지면 재수한다고 그래가지고, 그 1년 동안 그 마음의 고통을 누가 알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고난당하면, 고난당한 이웃들을 기억하고 주의 사랑으로 보살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가 일생 당하는 모든 고난을 우리 예수님이 앞서서 미리 당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히브리서 4장 15절에 설명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죄 없으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대신 당하셨는데,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멸시받는 모습으로 주님이 고난 당하셨어요. 이사야서 53장 2절, 3절에요, 우리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셨는가 보세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렸다는 표현은 뭐냐 하면요, 예수님을 나환자, 문둥병자같이 취급을 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예수님이 그 모습이 상했던지, 예수님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 상한 모습은 모든 사람이 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온 몸이 채찍으로 맞아 등이 갈기갈기 찢어져 온 몸에서 피가 흐르고, 얼굴은 부어서 멍이 들고 피멍이 들고, 머리부터 머리 면류관에서 피가 쏟아지고, 그 비참한 모습,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 그 고난을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고난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사야서 53장 4절로 5절에, 이어서 설명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할렐루야. 일찍이 많은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친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교수님은 예일대학교의 그 교직을 내려놓고 정신박약아 공동체에 들어가서 그들은 섬기다가 1996년 9월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는데요, 상처 입은 치유 자에 대해서 책에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뭇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제자들의 배신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며 가족들로부터 거절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살이 찢겨지는 상처를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커다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받았던 상처 때문에 사람들을 원망불평하지 않고, 자학하지 않았으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치유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온 인류의 상처를 홀로 체험하신 그 분이 온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받은 인생을 이해하십니다.”우리의 모든 슬픔, 아픔, 상처를 우리 주님이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119편 71절에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2. 고난을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감사한 것은 둘째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견디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1장 6절로 9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아멘. 누구만 의지해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얼마나 고난이 심했던지 죽기 직전까지 이른 사형 선고받은 모습이 되었다고 그랬어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너무나 고난이 심하면, “주님 좀 빨리 데려가 주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가 있어요. 엘리야를 보세요. 갈멜산 상에서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멸하고 난 다음 3년 동안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고 비가 쏟아지게 만들었는데, 아합왕의 왕비인 이세벨이 “너 내일 그 사람들처럼 죽을 거다”라는 그 말 한마디에 무너진 거예요. 그래가지고 바로 광야길 들어가서, 로뎀나무 밑에서 이런 기도를 했어요. 열왕기상 19장 4절에,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야훼여 넉넉하 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이제 내가 일을 다 했고, 저는 이제 피곤하고 지치고, 더 이상 무엇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제 목숨을 거둬가 주세요. 모세도 얼마나 고통이 심했던지 민수기 11장 15절 보니까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같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우리가 처했을 때, 그때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옵소서. 이대로 나는 그저 죽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시고 이 절망의 자리에서 저를 건져주시옵소서. 이 슬픔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내 맘에 평화와 위로함이 다가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옵소서.”여러분, 온 몸에 암이 가득 차도요 이러한 믿음이 있으면 주님이 치료해주세요. 그러나 몸에 조그마한 병이 들어와도 “아이고, 나 죽네.”하고 쓰러지면 그것이 큰 병이 되는 거예요. “주여 나를 살려 주옵소서. 주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주여 나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고난당한 것이 우리의 유익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자신의 잘못된 모든 모습을 고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믿음이 더 자라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그 심한 환란을 다 통과하고 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기 23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할렐루야. 고난을 통과한 다음에 욥이 자신의 스스로 의롭다 한 그런 영적 교만을 회개했어요. 욥기 42장 5절로 6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여러분, 고난당할 때 회개하세요. 그러면 더 큰 은혜 가운데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고난은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다 같이 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아멘. 미국 휘트워스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인 제럴드 싯처(Gerald L. Sittser) 목사님이 계신데, 아 참 이 목사님 얘기하려면 마음이 아파요. 고속도로에 가족이 차를 타고 나갔는데 역주행하는 차와 정면충돌해서 그 차에 타고 있던 아내, 장모, 자녀들을 다 잃었어요. 여러분, 이러한 충격, 이러한 고난은 보통 믿음 갖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그 고속도로에 미친 사람이 뛰어 들어와서 그 차를 거꾸로 몰고 들어와서 정면 충돌해가지고 아내, 장모, 아이들이 다 한꺼번에 죽으니까 그 충격, 그 고난은 괴로워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참 위대한 분이예요.“삶이란 평탄치 않다. 그것이 본연의 모습이다. 오히려 삶은 어렵고 냉혹하고 잔인할 때가 많다. 그러나 결국은 잘될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고 세상을 당신이 본래 의도했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지금도 신비롭게 일하고 계신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대단한 믿음이에요. 여러분, 어떠한 고난이 다가와도 이런 절대긍정의 믿음을 갖고 주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3.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셋째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1장 10절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어제 우리를 절망 가운데서 건지셨고, 오늘도 건지시고, 일생 다가도록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저는요 절대긍정, 절대감사를 우리 주님께로부터 받아서 너무나 감사해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결국 잘 될 것이니 염려하지 마라.” 엎드려 기도만 하면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사람들은 몰려와서 얘기를 합니다. “어휴, 큰일 났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네네” 속으로는 ‘별 일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절대로 별일 없습니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 갑자기 뭐 큰일이 나서 뭐가 다 안 되는 것 같고 무너지는 것 같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잘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어두운 세력이 교회를 흔든다고 하면 오히려 교회는 더 부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부정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 없습니다.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잘 될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지, 어렵다는 소문이 들어올 때마다 더 부흥을 주시고 더 우리 성도들이 잘되게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시편 71편 20절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예수님은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고 난 후에 부활의 영생 그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어요. 고린도후서 4장 14절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영광에서의, 저 천국에서의 새 출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환란과 핍박과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슴을 피고 주님의 그 영광의 내일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뿐인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괴로움도 우리는 넉넉히 싸워 이깁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고난의 때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고린도후서 1장 11절에,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성도님들이 교회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때, 주의 종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교회를 붙드시고, 주의 종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염려할 시간에 찬양하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보세요.


베드로가 붙잡혀 사형집행 당하기 직전에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12장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옥에서 베드로를 꺼내신 것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사형집행 하려고 보니까 베드로가 없어요. 그래서 그를 지키던 모든 그 간수들을 다 사형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 같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넘치는 감사로 나아가십시다. 고린도후서 4장 15절에,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전신마비 장애가 와서 참 절망의 삶을 살았던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기적을 노래하는 ‘바퀴달린 성악가’로 불리는 이남현 씨. 키가 192센티미터 이구요,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의 건장한 성악을 전공하는 한 청년이었습니다. 2004년도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그만 떨어져서 수영장 벽에 목을 부딪쳐 목뼈가 부러지면서 목 아래로는 쓸 수 없는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다가온 고난 앞에서 ‘하필이면 왜 저입니까? 왜 내가 이러한 일을 당해야 합니까?’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근데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버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남현아,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야.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돼.” 부모님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로 다시 믿음을 갖고 자기가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고 도전해 나갔습니다. ‘내가 가진 달란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니 내가 찬양을 통하여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겠다.’ 전신마비가 온 장애인이 노래를 부른다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제대로 복식호흡 하기는커녕 기침이 자꾸 나오고 온 몸이 경련이 나서 노래가 안돼요. 그러나 재활치료를 하면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려고 노력을 합니다. 한참 재활치료 하고 난 다음에 ‘도레미파솔라시도’ 한 옥타브를 노래를 할 수가 있어요.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숨이 차서 한 곡을 끝까지 잘 못 부르는데도 온 몸에 힘을 다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노래하고 노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온 몸에 장애를 갖고도 대학교, 대학원을 전공해서 졸업을 하고 이제는 여러 곳에 나가 찬양을 통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참 귀한 분이에요. 이런 간증을 했어요. “비록 풍부한 성량이나 화려한 테크닉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저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그리고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제 인생의 목표를 좌절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선물로 주셨으며,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심으로 제 삶에 ‘감사’하며, 저를 이끄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먼저 흘러나옵니다. 참 신기하면서도 이 또한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것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쉽지 않아요. 목뼈가 다쳐서 온 몸 다 마비가 돼서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그런 장애인이 어떻게 감사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보면 우리들은 참 문제가 좀 있어요, 그쵸? 문제가 많다고 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멀쩡한 몸을 가지고 감사보다 불평이 먼저 나올 때가 많잖아요. 제가 오늘 손들어보라고 하지 않겠지만 마음속으로 회개하셔야 돼요. “주님 내가 아무 것도 아닌데 불평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짜증냈습니다. 남 탓 했습니다.” 꼭 문제만 생기면 누구 때문에 그랬다고, 누구 때문에 그랬다고. 그 옛날에 노래에도 “그건 너” 그런 노래가 있는데 밤낮 남 애기만 하고요. 여러분, 따라하세요. “다 내 탓입니다.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오래참고 살겠습니다.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면 기적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축복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은혜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는 감사하며 살게 하시고, 사랑하며 살게 하시고, 용서하며 살게 하시고,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잘 견디고 싸워 승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는데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이 계절에 주님 우리 삶 속에는 감사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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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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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0장 1절-3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야훼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야훼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오늘 저는 이사야서 60장 1절로 3절 말씀 가지고 “빛을 발하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빛을 발하라” “빛을 발하라”


모든 사람이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절망입니다. 절망 가운데 태어나서 절망 가운데 살다가 절망 가운데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는데 그것이 절망이라고 그랬습니다.


누가 우리를 이 절망에서 건져낼 수가 있습니까? 많은 철학자들이 종교지도자들이 절망에서 헤어 나오는 길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몸부림 쳤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희망이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절대 희망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어떠한 문제에 처하고 절망에 처하고 슬픔에 처해도 주님만 바라보기만 하면 새 힘과 능력을 허락해주셔서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2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예언의 음성을 듣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짓고 불의하고 타락해서 그들이 말할 수 없는 문제와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그리고 그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없고 나라가 기울어져서 멸망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깜깜한 밤에 불빛 하나 없어서 어디를 갈지 모르고 방황하는 것 같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예언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장차 너희가 모든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게 되고 빛을 발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할 것이라. 모든 열방이 너희들 앞에 나아올 것이다.”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저희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문제와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요, 희망의 말씀이요, 기적의 말씀이기도합니다.


1. 일어나라


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할렐루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절망의 자리에서 고통의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들의 절망적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이와 같이 설명을 합니다. 이사야 59장 9절로 11절에,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그들이 마치 죽은 자처럼 살아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어두움 가운데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면서 그들이 고통가운데 울부짖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다가오게 되었습니까? 저들이 하나님 앞에 죄짓고 불의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죄짓고 불의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채찍을 들어 우리를 때리시는 것입니다. 환난이 다가옵니다. 문제가 다가옵니다. 때때로 질병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 회개해야 되요.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가지고 희망을 갖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예언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루는 나인 성 옆을 지나가는데 그 나인 성에 외동아들을 데리고 살던 과부가 있었는데, 아들이 갑자기 죽었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에 처했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유일하게 이 아들 하나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들이 먼저 죽은 거예요. ‘아, 차라리 날 데려가시지. 왜 내 아들을 먼저 데려가셨나요?’슬피 울며 통곡하며 아들의 관을 따라 나가는데, 성경을 보니 나인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그랬어요. “아유 참, 저 아주머니 안됐네. 아들 하나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들이 죽었으니 어떡하지? 어떡하지? 참 안됐네.”동네 사람들이 다 그를 불쌍히 여겨 따라 나오는데 주님이 지나가시다가 그걸 보니까 너무 불쌍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죽은 청년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14절에,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그 순간 죽었던 청년이 관을 박차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죽음의 상황에 처해있어도 주님이 “일어나라”말씀하시면 우리는 모든 절망적인 상황을 해치고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사랑하는 딸이 죽었습니다. 그때도 주님이 가셔서 그 사랑하는 딸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41절에,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할렐루야. 오늘 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이 음성을 기억해야 됩니다. “일어나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문제와 어려움에서 일어나라.” “더 이상 주저앉아서 낙심하지 말고 탄식하고 있지 말고 십자가를 붙잡고 일어나라.”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패배의식에 죽어있는 사람이 있고, 과거의 상처에 고통가운데 죽어있는 사람이 있어요. 늘 과거의 상처만 들여다보고‘아이고, 내 마음에 이 고통을 누가 알랴?’밤잠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눈물을 흘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일어나서 희망의 내일을 향해 걸어 나아가라.”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우리가 살아나서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복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어떠한 문제와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있다고 할지라도 오늘“일어나라”는 말씀을 듣고 일어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또 질병이라고 하는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도 주님이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은 가셔서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고 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마음에 병든 사람, 육신에 병든 사람, 환경에 병든 사람, 이러한 병 속에서 주저 앉아가지고 자포자기하고 한 숨 쉬며 탄식하며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 한국 정부에서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 전국에 노숙인들의 숫자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완전히 무기력증에 빠져서 두 손을 놓고 절망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 무기력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주님 앞에 일어나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어날 때 꼭 필요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 잘못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제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거짓되게 살았습니다. 탐욕을 갖고 살았습니다. 남을 짓밟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주님 앞에 나와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우리의 죄를 다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셔서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일어서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절망과 고통과 괴로움이 여러분을 묶어 놓고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제프 핸더슨(Jeff Henderson)이라는 분이『나는 희망이다(Impossible is Nothing)』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원래 그 영어책 제목은‘불가능은 없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어요. 지금 이 분은 라스베가스 최고급 호텔‘벨라지오’라는 호텔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흑인으로는 최초로 총 주방장이 된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제프는 참 불행한 삶을 살았어요. LA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 빈민촌에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약을 했어요. 그래서 마약하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또 많은 사람들이 마약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제프도 어릴 때 부모가 헤어지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랍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것은 도둑질하는 거예요. 10살이 되기 전에 오른쪽 눈이 손상이 되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그리고 10대에 들어와서 마약을 팔고 사는 일에 빠져 들었습니다.


24살이 되었을 때 마약 밀거래 죄로 체포되었는데 19년 7개월 형을 받았어요. 야, 24살인데 거의 20년 동안 감옥에 들어가 있게 된 것입니다. ‘난 이제 끝났구나.’그런데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무슨 일을 시켰느냐? 그 교도소에 1500명 죄수들이 있는데, 그 죄수들이 밥 먹고 난 다음에 식당에서 그릇 닦는 일을 시켰어요.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릇을 닦으면서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를 보면서 꿈을 가진 것입니다. 빵을 굽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을 보면서 꿈을 가진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꿈을 가지면 그 꿈이 여러분의 절망을 이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열심히 그 주방요리사의 보조 역할을 하면서 모든 면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니까 형을 줄여줘 가지고 10년 만에 보호관찰로 석방되었어요. 앞으로 당신은 계속 나가서 리포트하고 자유함을 주는데 더 죄짓지 말라. 그래서 19년 7개월이 10년으로 줄어서 보호 관찰로 석방이 되었는데 그가 석방된 이후로 로스엔젤레스 한 레스토랑에서 접시 닦이를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요리사 경력을 쌓기 시작합니다.


메리어트 호텔, 리츠 칼턴 호텔, 벨 에어 호텔, 큰 호텔의 주방을 거쳐서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 최초로 흑인 주방장이 되고 미국 테이스팅 협회 선정 2001년도 최고의 요리사 상을 받고, 마침내 세계적으로 유명한‘벨라지오 호텔’의 최초의 흑인 총 주방장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 제프는 흑인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희망전도사가 됐어요.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전해줍니다. “흑인들은 자기가 범죄자가 된 것이 사회의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총을 겨누며 죄를 지으라고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선택을 한 사람은 결국 여러분 자신입니다. 자기를 희생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희망이다'라고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렇습니다. 죄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지 누가 죄 지으라고 몰아넣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는 것도 내 자신이고 미워하는 것도 내 자신이에요. 또 사랑하는 것도 내 자신이고 용서 하는 것도 내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순간마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기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선택을 하기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제 사랑을 선택하기 바랍니다. 용서를 선택하며 살기 원합니다. 성실을 선택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절망에 자리에 절대 머물러있지 말고 일어나서 예수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믿음으로,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십시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의 보혈로 날마다 죄를 사함 받고 절망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믿음으로 걸어 나아갈 때 여러분 삶 가운데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자리에 앉자 있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문제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고통의, 괴로움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제는 믿음으로 굳게 서서 십자가를 붙잡고 전진 또 전진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빛을 발하라


둘째로 성경은 우리에게 빛을 발하라고 말씀합니다.


60장 1절에,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왜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냐?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일어나서 예수님에 그 사랑과 용서에 빛을 발해야 합니다.


60장 2절에,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야훼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온 세상이 절망에 어둠에 다 가리게 되었는데 이제는 우리는 희망의 빛을 발하는 주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빛을 발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참 빛이 되신 예수님께로부터 그 빛을 받을 때 우리가 빛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요한복음 9장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에 구원의 빛이 되십니다. 진리의 빛이 되십니다. 영생의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빛을 받아서 작은 예수가 되어 주님께서 주신 그 구원의 빛을 비추고, 사랑의 빛을 비추고, 용서의 빛을 비추는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따라하세요.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사랑의 빛입니다. 희망의 빛입니다. 용서의 빛입니다. 치료의 빛입니다.” 할렐루야.


빛을 발하라 할렐루야. 달이 스스로 빛을 못발해요. 해에서 빛을 받아갖고 빛을 발하는 거예요. 우리도 달처럼 태양 빛인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이 돼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빛을 비추면 그 빛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빛이 어둠을 밝힙니다. 지금 빛이 있어 이 예배당 안이 성전 안이 환한데 빛을 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빛을 켜기만 하면 어둠이 순식간에 다 사려져 버리는 거예요. 절대로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빛입니다. 절망이, 어두움이 여러분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의 어두움이, 슬픔의 어두움이, 고통의 어두움이, 과거의 상처의 어두움이 여러분 못 이겨요.


왜? 빛이니까.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이 다가와도 불을 켜기만 하면 어둠은 도망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하는 주님에 일꾼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한때는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가두는 그러한 잘못 된 길을 갔지만, 예수님을 만난 다음 사랑의 사도가 되어서 그가 빛을 발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에베소서 5장 8절로 9절에 이와 같이 고백을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빛을 비추면 우리에 빛을 통하여 사람들이 변화 받고, 치료 받고, 용서 받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아출신의 CEO 데이비드 부소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300만 자리의 일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어요. 1940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이 데이비드 부소는 9살 때 고아원에 버려졌어요. 그러나 그 후로 한 번도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가 주님을 만난 이후 얼마나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 했는지 하나님이 도와 주셨어요. 17살 때 핫도그 가게를 열었습니다. 핫도그 가게를 열었는데 호주에 와서 그가 사업을 하는데 35살 때 20개가 넘는 사업채를 거느린 호주의 핫도그 백만장자가 됐어요.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1974년 태풍이 몰아진 호주에‘다윈’이라고 하는 도시에 구호 활동을 하러 갔다가,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참 귀한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불쌍하고 어렵고 가난함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그런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1975년‘마라나타 트러스트’라고 하는 신탁기금을 만듭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돈이, 기초 적인 자금이 있어야 뭐를 할 수 있는데 돈을 빌려주는 데가 없잖아요. 뭐 담보를 잡는 게 없으니까. 그런데 또 돈을 빌린다고 해도 고리사채로 돈을 빌려서 더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분은 무담보, 무보증 제도로 자본을 빌려주기 시작하고, 아주 저리로 자본을 빌려주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빌려서 사업들이 일어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는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이렇게 베풀고 나누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나누어주어서 그들을 살아나게 한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이 사람이 돕는 자선사업을 보고 도와 달라 그럽니다. 2004년에는 북한도 와서 도와 달라 그랬어요. 지금은 전 세계 27개국에 그의 자선사업이 확대 되어서 빈민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업을 계속해서 활발하게 진행시켜나가고 있습니다. 2003년에는 올해의 호주기업인 상을 받고 2008년에는 호주의 대표적인 국가리더에게 주는 올해에 호주 시니어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사람을 그냥 단순히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자립 기금을 빌려주어서 옆의 문제 있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성공의식을 불어 넣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고 300만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서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빛이 되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빛을 발하면 여러분 혼자서만 문제를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 어둠에 처한 사람들에게 빛이 비춰줌으로 그들도 변화되고 치료받고 새 삶을 얻게 되는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빛은 빛과 함께 열을 내는 것입니다. 열은 모든 생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전달해 줍니다. 이렇게 날씨가 춥고 그래도 따스한 해가 떠서 비추면 열이 모든 얼음을 다 녹이고 그 다음에 땅속으로 들어가서 땅속에 있는 그 씨앗들이 싹을 낼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의 태양되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발하면 사랑의 열이 전도되어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새 힘을 얻게 되고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 은혜가운데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기 이 빛을 허락하여주셔서 우리가 빛을 발하는 주님의 일꾼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빛과 함께 예수의 사랑에 열정을 함께 전하게 하여주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치료와 용서를 전하는 주님의 일꾼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재의 열매를 맺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치료하고 용서하는 주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이에요. 찬송가 새 찬송가 510장에 이와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새 찬송가 510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 길이 빛나니
 우리들도 등대되어 주의 사랑 비추세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 내어 살리세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의 빛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사랑의 빛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절망에 찬 사람들을 구원하는 주님의 일꾼 되게 하여주옵소서.


3.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마지막 셋째로 우린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60장 1절에, 야훼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 성경말씀 보니까 이미 임했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어나서 빛을 발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서 주님의 기적이 따라오고 축복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 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를 뒤덮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였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주님에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빛이 있으라”명령하실 때 빛이 생긴 것처럼,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랑을 선포할 때 사랑이 생겨나고 용서를 선포할 때 용서가 생겨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치료가 넘쳐나는 그와 같은 역사가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그 창조의 영광이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가장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구원의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이여, 우리도 주님의 복음의 증인되어서 구원의 영광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게 하여주옵소서.


이 빛은 영원한 빛이에요. 주님이 함께 하시는 빛은 생겼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기 때문에 세상의 빛은 껐다 켤 수 있고 없다가 생길 수 있지 만은 하나님의 빛은 영원합니다.


이사야 60장 19절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야훼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빛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능을 가지고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할렐루야.


미국 그 보스턴 그 외각 지역에‘고든콘웰신학교’가 있습니다. 아주 명문 신학교인데요, 이 신학교를 설립한 분은‘럿셀 콘웰’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원래 신앙이 없는 사람이요. 무신론자였어요. 그런데 예일대학교에서 법학공부를 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남북전쟁이 일어났는데 북군의 장교로 나가게 됐습니다.


전쟁을 하다가 급히 후퇴 할 일이 있어 후퇴하다 보니 장교들이 차고 있는 그 칼을 막사에 놓고 내려온 것이 알게 됐어요. 그래서 밑의 병사한테 가서 그 칼을 찾아오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장교의 상징인데 그걸 잃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밑의 병사가 가서 그 칼을 찾아오다가 그만 총에 맞아서 피를 흘리며 이 칼을 럿셀 콘웰 그 자기 상사에게 갖다 줍니다. 이 칼 때문에 자기가 한 사병을 죽게 한 것 아닙니까? 너무나 괴로웠어요. 살려보려고 해도 피를 너무 흘려서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 병사가 죽어갈 때 눈물 흘리면서“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니? 이렇게까지 할 것이 아니었는데..”그러니까 이 소년이 죽어가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저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저의 친구이기 때문에 저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둡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던 럿셀 콘웰이 그 병사의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오, 주여! 이 소년은 저를 위해 죽었습니다. 이 소년 앞에서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 이 소년이 찾은 예수님을 위해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됐습니다. 그가 전 재산을 바쳐 새운 것이 고든콘웰신학교입니다. 원래는 학교가 필라델피아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친구 고든 목사님이 같이 학교를 키워나가자고 해서 보스턴 근교로 학교를 옮겨서 이름을‘고든콘웰신학교’라고 이름을 짓게 됐고, 그 다음 필라델피아에 1884년 템플대학교를 세워서 그가 초대 총장직에 올라 많은 영적 지도자를 양성한 귀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변화되니까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니까 한 소년의 죽음이 이와 같은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세운 신학교와 대학교가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지금도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았지만 나의 개인의 욕심, 개인의 유익, 개인의 야망을 위해 살았지만은 오늘 이후로는‘주님 내가 하나님에 영광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다 모두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삶을 살기 원하오니 주님 함께 하여주시옵소서.’


어둠이 다가올 것입니다. 문제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주님이 함께하고 계시면 주님이 빛을 발하게 하시고 영광을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60장 2절 3절에,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야훼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제 너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지금은 문제와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지만은 장차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일어나 빛을 발하게 하시면 열방들이 와서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려움에 처한 것 같고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부르짖고 주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열린 문에 복을 주셔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오고 비둘기 떼처럼, 비둘기가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오는 것처럼 교회로 몰려 올 것입니다.


이사야 60장 8절로 9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야훼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우리는 영화롭게 이미 변화를 받았습니다. 절망과 고통과 실패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 온 천지는 변해도 영혼토록 변치 않는 약속의 말씀에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음으로 이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영화로운 존재로 일어나서 빛을 발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와 용서와 사랑을 전하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우리가 어둠가운데 살았습니다. 절망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난 다음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 비춰져서 이제는 우리가 일어나서 치료의 빛, 희망의 빛, 용서에 빛을 비추며 하나님에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나의 영광이 너에게 임하였다.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올 한해 하나님 은혜가운데 일어나서 빛을 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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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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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2: 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버가모 교회가 세 번째 방문한 교호이지만 성지순례단들에게는 마지막 교회였습니다. 지중해성 기후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4월이지만 꽤 추운 날씨 였습니다.
도착한 시간은 5시 10분이었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표지판에는 관람시간이 5시 30분이라고 되어 있지만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서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들어가지 못했고 밖에서 성경을 읽고 촬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문이 닫히면 들어갈 수 없구나!
그리고 우리가 모여서 성경을 읽고 촬영하는 모습을 터키사람들이 바라보고, 때로는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구나! 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금을 늦어도 늦는 것이고, 들어가지 못하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ㅣ
12.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우리가 지난 두주 동안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분, 그리고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아니라, 오늘은 좀 비장합니다.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가. .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지난 두 교회보다는 훨씬 강도 높은 말씀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버가모 교회에 대한 칭찬으로 시작됩니다.
칭찬
13.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아셨고, 서머나 교회가 당하고 있는 환난을 아시는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처한 상황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찾아와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어떤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될 수도 있겠지요?
지금 버가모 교회의 상황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입니다
 버가모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지 모르지만,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이교 신앙의 강력한 중심지'로 나와 있습니다. 버가모는 지역적으로 에베소와 서머나와는 달리 내륙 깊은 곳에 있는 도시입니다. 서머나에서 대락 100km 북쪽에 있는 도시로, 로마가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는데 매우 중요한 행정 수도 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정치적 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게 되었고, 초고의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와 비교될 만한 당시 20만 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학문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주전 29년 전에 이미 그 곳에서 최초로 살아있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신전이 세워지도록 허가가 떨어진 곳, 그리고 3년 후에 신전에 세워진, 황제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제가 버가모 교회에서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산 위에 세워진 하드리안 황제와 트라얀 황제의 신상이 있었고,
버가모 교회가 본래 이집트 이시스 신전으로 쓰여지던 곳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세워지기 몇세기 전에 길이 100m 폭 40m의 신전이 세워졌다는 것 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을 주님이 알고 계셨고,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제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교의 중심지에서 버가모 교회가 칭찬 받을 만한 점이 있는데,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고 하는 말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이 어쩌면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버리겠습니까?
왜 예수님이 이런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고 계실까요?
예수님의 최대 관심이 "진리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세상의 빛"으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요 14;6, 8:12)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리고, 진리만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빛으로, 진리로 살지 못한다면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에게 진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나뉘거나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닌 결단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유일한 행동이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안디바'가 진리를 지키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그는 총독 앞에 송환되었습니다. 총독 공관이 버가모에 있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을 이야기 합니다. 당시 총독은 정치적인 지도자일 뿐 아니라, 황제 숭배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황제의 흉상 앞에 향을 피우고 '시저는 주님이시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만 하면 안디바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은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하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말 쉽게 타협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진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타협하는 순간 거룩함을 상실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입술과 행동이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면 거짓이기에 그는 거룩함을 지키며 죽었습니다.
바로 버가모 교회에는 그 거룩한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룩한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에 문제가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버가모 교회가 우리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에 또한 유혹과 시련 이단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하기 때문에 교회로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불완전해도 우리가 있어야 할 곳, 불완전한 사람을 품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모습"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기관의 모습보다는 가족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기관을 떠받치는 것이 신분과 계급이라면, 기업의 세계에서는 직함과 연봉이라면,
기관에서는 어떤 업무의 성과에 따라서 신분이 보장된다면,
가정은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가족의 신분을 어떻게 얻습니까? 어떤 능력을 가지고 어떤 성과를 냈느냐가 조건이 아니라, 그 가정에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는 한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가족의 권리를 얻는 것입니다.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가족에서 내 쫓기보다는 특별하게 돌봐주어야 하는 대상이 가족입니다. ‘생산성’이 낮은 병약한 자식은 도저히 계산으로는 나올 수 없는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가족, 교회는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어떤 인위적인 구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햇볕에 녹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은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한 지체를 다른 지체보다 더 중히 여기지 말라고 엄히 경고합니다. 어느 집안이나 더 성공한 사람이 있고 실패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모든 구성원이 함께 앉고 함께 식사를 합니다.
어떤 유명인이라 해도, 그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 그리고 모든 식구들에게는 가족의 일원일 뿐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정이란 내가 거기로 가야만 할 때 식구들이 나를 받아 주어야만 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는 “어떤 자식을 제일 사랑하느냐구요? 나는 병든 자식이 나을 때 까지는 병든 자식을 제일 사랑하고, 집 떠난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집 떠난 자식을 제일 사랑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제도 중에 유일하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 가족입니다. 출생 자체로 이미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로 묶이게 되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런데 바로 교회가 그런 가정과 같은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정보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나와 다른 정말 별난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입니다.
“공동체는 가장 함께 살기 싫은 사람이 반드시 살고 있는 곳”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이 정의는 명절 때마다 모이는 가족과, 매 주일 모이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똑 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책망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회에는 몇 가지 책망 받을 일이 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그리고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올바른 신앙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이단에 빠진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고,
신앙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과 미신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실 수 있습니까? 이재철 목사님이 쓴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라는 책에 보면 이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당을 찾아간 사람이 두 손을 비비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보다 훨씬 더 경건하다. 굿을 잘하기 위해 용한 무당에게 희사하는 금액을 알아보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보다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이 용한 무당에게 받은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관찰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다룬다. 하지만 그들을 가리켜 어느 누구도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미신을 좇는 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신은 인간이 돈이나 능력 혹은 재주로 신의 마음을 달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즉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재주껏 신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이 바로 미신의 특징이다. 이에 비해 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그분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항상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자기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이란 미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변화해 가는 참된 신앙의 소유자이기보다 하나님을 달래고 얼러 자신의 목적만 성취하려는 미신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성찰해야 한다.


먼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는 민수기 22-24장에 등장합니다. 모압 왕 발락이 당시 탁월한 선지자였던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바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그런데 발람이 입을 열면 저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이 말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에게 축복을 명하시는데 모압 왕 발락이 내 놓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집니다. 베드로 후서 2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옳은 진리의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탐심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이스라엘을 몰락시킬 꾀를 생각해 냅니다.
즉, 모암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해 우상 숭배의 음란한 연회에 참석하게 하면 된다고 발락에게 귀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의로우신 하나님이 진노를 유발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버가모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탐심 때문에 진리를 가리는 일을 한 것이지요.
본문 15절에 보면 이어서 '니골라 당'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에베소교회에서 잠시 언급된 적이 있는데 조금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니골라 당은 발람의 행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 니골라 당은 교회 안에 사악한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죄짓는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조금 더 설명을 해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은혜를 계속 경험하기 위해서는 죄 가운데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은혜를 누리기 위해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죄를 정당화 하는 교리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입니까?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아주 신앙적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죄에 대하여 우리를 참 평안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사실 그 은혜를 입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픔과 참음, 그리고 용서가 있었는지를 간과한 거짓된 신앙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니골라 당'은 그렇게 교묘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해 크리스천의 삶을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버가모 교회에 있었던 현상에 대하여 무섭게 질책하십니다.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다른 성경의 사본에 보면 15절이 이렇게 끝납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나는 그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우리가 한 가지 교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단은 옛날 그림에서 나오는 것처럼 뿔을 달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많이 그렸던 그림을 보세요. '북한괴뢰'라고 빨갛게 뿔 달린 여우와 늑대의 모습으로 그렸던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지 않습니까?
 '간첩'하면 참 무섭게 생각했는데, 우리 옆에 가장 선한 이웃이 간첩이 아니었던가요?
지금 영적인 면에서 여러분들을 무너뜨리는 존재들은 눈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아니 이마에 나는 '사탄이다'라고 써 붙인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선하게, 우리를 가장 편하게 만들며 접근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이단들의 전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단 교회에 들어와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한답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사람들도 신천지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을 유혹한답니다.
요즘은 목회자를 쓰러뜨리는 방법 중에 하나가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열심히 봉사하던 교인이 어느 날 목사님을 좀 만나자고 한답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무서운 것은 거짓과 불의의 모습을 한 자들이 아니라, 선함을 가장한 불의한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진리로 가는 길은 좁은 문이라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많지 않다고 말입니다. 진리에 관한 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조선일보 위클리 비즈를 보면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는 한 사례를 보게 되었습니다. 흔히 가구업계의 애플이라 불리는 ‘허먼밀러’사의 워커 회장의 일성입니다. “소비자 말 듣지 말라”
그동안 많은 기업들이 소비자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소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는데 무슨 이유일까요?
로저 마틴(Martin) 토론토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에서 디자인 경영의 성공 사례로 이 회사를 자세히 소개했다. 이 회사의 일하는 방식을 보면 애플이나 다이슨 같은 혁신기업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를테면 이 회사는 소비자조사를 하지 않는다. 워커 회장은 "소비자조사의 문제점은 소비자는 자신들이 이미 아는 것만을 대답합니다. 단순히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다면 실패하지 않고 평범한 수준을 유지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렇게 하면 혁신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은 하지 못한 채 남들이 다 하고 있는 것을 똑같이 답습하게 될 겁니다."
예) 팩시밀리를 처음 개발할 때 개발자들이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문서를 즉시 보낼 수 있고, 편지도 즉시 받을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좋겠습니까?"
모두 이렇게 답했다.
 "이틀 정도면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돈을 더 들여서 그렇게 해야 하죠? 그리고 그런 기계가 없는 친구와는 어떻게 편지를 주고받으란 말이죠?"


허먼밀러는 디자인을 경영의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도 애플이나 다이슨과 비슷하다. 에어론 의자를 처음 출시할 때 마케팅 부서의 반발이 심했다. "디자인을 고치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 회사의 창업자인 고(故)D.J. 디프리(De Pree)는 디자인 담당 수석부사장에게 "마케팅팀의 반응이 어떠냐"고 물었다. 부사장은 태연히 "그건 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디프리는 "맞아요. 마케팅 담당자에게 디자인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되죠"라고 맞장구쳤다. 허먼밀러는 이 디자인을 고수했을 뿐 아니라 전략 상품으로 밀고 나갔다.
이 회사는 새 프로젝트를 할 때 외부 디자이너에게 맡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에어론 의자도 그랬다. 요즘 경영계의 화두인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을 일찌감치 실천해온 셈이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교회가 힘을 잃는 이유,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타락하는 이유가 있다면 “진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세상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이 땅위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제가 요즘 가장 고민하는 것 중에 하나가 그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이렇게 가고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길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도 하나님의 생각과 맞는 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권면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러면 승리의 길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오늘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떤 구절이 생각나시나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어떤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심령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어. . ." (히브리서 4:12)
초대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검의 두 날이 신약과 구약의 말씀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잘못된 것을 교정하는 것은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위에 서야 잘못된 이단들, 우리를 교묘하게 유혹하는 교리들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신다고요? "내가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런데 어느 날 그 검의 기능이 무섭게 바뀝니다. 진리를 드러내고 심판하는 것이지요.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는 복음이 이번에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멸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늘 검의 양날과 같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심판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무엇인가요?
거짓된 가르침에서 진리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글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 합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순례의 길을 걸어온 한 젊은이가 수도자를 만났습니다. 젊은이는 수도자에게 어떻게 하면 인생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수도자는 젊은이를 연못으로 데리고 가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물에서 올라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수도자는 계속 이 젊은이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젊은이가 허우적거리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수도자는 그를 끌어 내놓고 물었습니다.
 "물속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가?"
 "숨 쉬는 것이었습니다."
 "자네는 진리를 찾기 위해 그렇게 갈급하게 노력해 보았는가? 진리는 그렇게 간절하게 찾는 자만이 얻게 되는 것이라네."


축복의 말씀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결국 하나님의 때가 이르게 될 터인데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이름을 새길 흰 돌"입니다.
만나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굶주린 자를 채우시는 생명의 만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것 같으나 생명의 만나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참 떡"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
그렇습니다. 우리가 맛보는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생명의 만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 때에 돌 위에 새겨진 우리의 이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 비밀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흰돌에 새겨진 우리의 이름이 무슨 의미 입니까? 이름이 새겨진 자들은 잔치에 초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쾌락을 이겨낸 사람들은 결국 생명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쓴 큐티 365에 나오는 간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영국의 한 기자가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노력은 사실상 성공할 가능성이 1%도 없는데, 어째서 이런 고생을 계속 하십니까?”
그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진리가 졌다는 기록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진리 편에 있는 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간디는 자신을 진리 편에 세우는 것이 바로 승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세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가 정말 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우리가 간직한 진리의 말씀에 따라 전진하십시오.


우리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잘 아는 말이 있습니다.
“이겨 놓고 싸운다!”
버가모 교회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고난 가운데 포기 했지만 이들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더 무서운 유혹에도 쉬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 믿은은 “그래서” 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풀무불 앞에서 믿음을 지켰던 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믿음을 지키는 일이 믿음입니다.


얼마 전 Christian MBA과정에서 설교를 하고 이경숙 전 숙대 총장의 특강을 듣게 되었습니다. 빛에 시달리던 대학 총장이 되어 2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가야 할 만큼 어려움이 시달렸답니다.
세금 고지서는 계속 날라오고, 학생들은 등록금 동결 투쟁을 하고, 노조는 임금을 올려달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깨닫게 하신 것이 있었답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 .
“천부여 의지 옵소서 손들고 갑니다. . .”
새벽예배 시간에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끊임없이 무거운 짐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자신은 질 수 있는 것 다지고 나머지 것만 맡기는 모습,
빨리 기도하고 자신의 할 일을 위해 바삐 뛰어다니는 모습.
그래서 자신이 모든 일을 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음성을 듣고 움직이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답니다.
원우 중에 하나가 물었습니다. 총장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예, 저는 제가 만난 좋으신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가장 좋은 학교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짐을 주님은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 ."
버가모 교회가 반으로 갈라진 모습을 봅니다.
마치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가 쪼갠 것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의 몸이 거룩한 교회일진 데, 주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몸이 쪼개지는 아픔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끝까지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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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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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Action Plan’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다시 한 번 만나교회의 슬로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나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소망을 던져 줄 수 없다면 더는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지난주 신년 집회를 인도한 이루다 목사님을 통해 참 인상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 거룩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는 ‘거북’한 것은 아닌지. 선지자 요나를 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로 ‘yes’라고 했으면 1장에서 끝났을 것을, 미루고 미루다 성경 통독을 하는 우리에게 3장이나 더 읽도록 만들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의 사명에 대하여 거룩하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가장 큰 이유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과 생명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명을 위한 우리의 ‘mission’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과 세상을 섬긴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모임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배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며 섬기는 힘을 얻습니다.
‘힘’이란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헌신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1년 전 제가 여러분과 함께 “Radical Gospel”이라는 주제에서 “믿음으로 살아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것처럼 “주님, 제가 제 몸을 온전히 드립니다!”라는 말 자체가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참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우리 같은 것을 고쳐 쓰시려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자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격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사명에 충실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예배합니까?
예배하지 않는 어떤 선행과 훈련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를 통해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혹시 우리의 만족이나, 감정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의 기쁨과 감격!”
혹시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억지로 한다면 잘못된 것 아닌가요?
현재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이 예배의 지루함을 호소합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예배가 지루하다, 설교가 길다 등등의 이유입니다.


어느 40대 아들과 60대 어머니의 대화입니다. 여러분에게 공감이 갈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나는 예배드리기 싫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일 아침은 늦잠 자고 싶어요.
둘째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요.
셋째 성가대의 불협화음이 싫어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둘째, 예배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셋째, 너는 담임 목사니까 결석하면 안 된다.


학창시절을 지난 여러분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학교에 가고 싶은 날도 있고 가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기 때문에 학교에 갑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가정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가정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내가 가정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고, 어머니고, 자식이기 때문에 다시 가정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점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예배가 우리의 사명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은, “예배가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보세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절)
오늘 본문에서는 “제물”(제사)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 제사를 수식하는 말로 “거룩한 산”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제사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레위기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제사장을 중보자로 세우고 제물을 드리는 예식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있었고, 피를 흘릴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신약시대로 넘어가면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시므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따로 제사장도, 제물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중보자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물 된 우리에게 예배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드리라는 것”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그러므로 구체적인 행위를 동반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몸보다는 마음을 드리므로 예배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은 드리기 쉽지만, 몸은 드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구별된 우리의 몸이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예물을 원하시지도 않으시지만, 마음만 있고 몸이 따르지 않는 예배를 거룩한 예배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인 헌신의 행위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헌신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의 관객이 아니라 예배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가 있기 위해 어떤 헌신을 하고 계십니까?
언젠가 [대찬 인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영화배우 강수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천재 배우인 그녀의 대본은 늘 깨끗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너널너덜하게 연습한 대본 말고 또 하나의 대본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말입니다.
주연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외워야 할 분량도 많고, 애써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에 조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배의 주역이 아니라, 예배의 관객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 갖추어진 예배에 관람한 사람들과 그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헌신한 사람들의 예배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예배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형식적인 면이요 다른 하나는 내용적인 면입니다.
먼저 형식적인 면에서 예배를 정의해 보겠습니다.
“어떤 예배도 성경적인 예배란 없다.”
모든 예배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이 모든 표현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단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면, 요한복음 4장 23~24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기준이란 ‘영’과 ‘진리’입니다. 어떤 형식으로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혼란스러워서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왜 만나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나요?
왜 만나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가운을 입지 않으며, 강대상이 없나요?
왜 만나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전자 음악을 사용하나요?
왜 만나 교회는 광고를 설교시간 전에 하나요?
왜 만나 교회는 헌금 바구니를 돌리나요? 등등.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의구심이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드려왔던 예배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가?’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예배에 대한 형식적 정의를 다시 내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달라도 신령(영)과 진정(진리)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용납할 수 있다.”
예배는 수없이 다른 모양과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언젠가 예배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유행한 “대-한민국” 손뼉을 함께하게 시켜본 적이 있습니다. 이 손뼉은 엇박자로 되어 있어서 모든 사람이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간에는, 이 손뼉을 칠 수 있으면, 젊은이요 그렇지 않으면 늙은이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손뼉을 치자고 했더니, 거의 모든 사람이 따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선 대부분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익숙함이 다른 사람의 익숙함과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결국, 모든 형식이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대하여 마음을 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마음을 열고 마음껏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왜 만나 교회에서 1~5부까지 주일 예배의 형식이 다른지 아시겠습니까?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은 이유는 여러분이 가장 기쁘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예배 가운데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형식이라 해도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더욱 중요한 만나 교회 사역 철학 중의 하나는, 아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예배 가운데 끌어들이기 위해 문화적인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 교회의 예배를 이렇게 또한 정의합니다.


“우리 교회 예배는 교회 중심적인 예배가 아니라 선교 중심적인 예배입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배 가운데로 들어오도록 준비하는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매일 듣던 사람의 사랑 고백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의 고백과 아직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고백을 더욱 기쁘게 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백성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예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예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서 찬양을 받으시지 못하고, 지루함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아프실 것입니다.


음악이 예배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음악이 예배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을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시리라는 것이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예배할 때,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만을 받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스타일, 음량 혹은 곡의 속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하나님은 노래가 빠르든 느리든 시끄럽든 조용하든,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에 모든 종류의 음악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그 모두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두를 좋아하신다. 만약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그것이 예배의 모습인 것이다.”(릭 워렌)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음악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배경과 인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다양성을 받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셔, 혹은 이것은 예배 음악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예배로…
예배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내용적인 면에서 예배를 정의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로 “영적 예배”라는 말입니다. 즉 내용적인 면에서 예배는 영적 예배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우리 생각의 오류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선택하므로 나머지 부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송파에 있는 옛 교인들을 심방할 때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심방한 세 집 모두 빌라를 지어 세를 놓은 주인집이었습니다. 처음 심방한 장로님 가정은, 그다음 심방하게 될 권사님 댁을 전도했으며, 그다음 집은 그 권사님 가정이 전도하여 올해 신천 집사가 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집의 권사님이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인의 경험에 의하며 신앙성장의 첫 번째는 예배 참석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예배에 참여하며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예배시간에 임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사는 삶의 환경에서 모든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거나 참여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배가 우리의 “선택적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선택”이라는 말 가운데는 헌신보다는 ‘편의’라는 의미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예배의 주체가 ‘나’가 아니고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 예배는 나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선택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예배 회중을 또한 선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나는 저런 사람하고는 예배드릴 수 없어! 저 사람 때문에 나는 교회를 떠날 거야!”라고 하는데 우리 주님은 “바로 그 사람과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해!”라고 말씀하시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적 예배”라고 말하면서도 “관계”를 더 중요시하지 않은지 말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관계가 될 때는 다른 회중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관계가 깨어지면, 여러 가지 핑계들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말씀을 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주목하십시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얼마나 약합니까?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약 시대에 보면,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화목하게 시키셨습니다. 레위기 7장 15절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구약 시대의 제사에 보면, 드려진 제물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화목제물은 예배를 드린 모든 공동체가 함께 즐기며 먹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화목제물을 나누는 데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제사로 드리는 소 한 마리는 1,300근에서 1,500근이 나갔다고 합니다. 제사장 몫인 제물의 가슴과 뒤쪽 다리 하나를 떼 내었다 해도 나누어야 할 고기는 엄청난 양일 것입니다. 이 고기를 하루 이틀 만에 나누기 위해서는 한 두 사람과 나누어서는 안 될 일이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심지어는 “미운 사람”과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칙을 지킬 수 없게 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누구나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니 우리가 자랄 때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싸우고 난 아이들을 억지로 화해를 시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라고, 손을 잡으라고, 너희의 입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아주 어렸을 때는, 서로 안아주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힘든 행동을 통해서 무언가 화해와 사랑의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어색하고 강요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요와 어색함 속에서 화해가 이루어짐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영적인 예배에서 성공해야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또 하나 영적 예배에 대한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마치 예배를 미신처럼 드리는 것이죠.
예배는 두려운 감정을 제어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잘못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주일성수 한다면 그 근본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교우 중에는 사업차 출장을 가게 되면 꼭 주일을 거르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기거든요!”라고 덧붙입니다.
일견 체험적이고 좋은 신앙을 가진 것 같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의 관계 속에서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즉 예배의 미신적인 요소란, 의무감에서 드리는 것이냐 사랑의 관계에서 드리는 것이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당시의 잘못된 종교와 예배의 형태에 대하여 예수님이 분명하게 답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니”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 싶었던 일은 “하나님은 사물(things)이 아니시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영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지, 육체적인, 세상의 것과 관련지어 말씀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일어나는 일이죠. 우리 집사람이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께 조그만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하더라는 것이지요. “아니 학기가 끝났는데 왜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왜일까요? 학기 초에 가져다주는 선물은 “뇌물”이지 “감사의 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물을 드리고 싶었지 뇌물을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기쁘게 받으셨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감사의 고백”을 받고 싶으신 분이시지, 조건적인 뇌물을 받으시려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드리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 재능이란 조건적인 것, 혹은 물질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이만큼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 자체가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하게 구별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소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시간에 예배를 드리든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삶에서 구별된 시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류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진실 앞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거짓 고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예배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계신 곳에 우리가 머무르려는 것이 예배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오셨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예배일까요?
물론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훨씬 더 훌륭합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 교회라는 건물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의미는,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그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렸다는 것이고, 그것이 성도 간의 거룩한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성도 간의 거룩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는 헌신의 다짐이 있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이 약속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임재와 선교를 위하여 장소를 옮긴다면 의미가 있지만, 나의 편의대로, 자의대로 장소가 옮겨진다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Action Plan
이제 “구별”이라는 관점에서 예배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Action Plan’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거룩”이라는 말이 성경에서는 “구별”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예배는 구별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지요.
오늘 본문에서 로마서 기자도 분명하게 말하는 것처럼, 거룩한 산 제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드릴 때, “흠 없는”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찾고 찾아서 드리는 예물이 흠 없는 예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올 때, 제사를 드리는 것(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구별하여 왔습니까?
또 하나의 선택적 예배가 아니라,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었습니까?
시간의 구별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예배를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남는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예물을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물질 중의 하나를 지갑에서 꺼내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특별하게 구별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헌신과 봉사가 자신의 남는 시간과 자신의 즐거움으로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아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입니까?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가장 신뢰할 때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신다는 사실을.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드러날 때, 예배의 삶을 산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의한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나오셨습니까?
철저한 신뢰는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철저한 순종은 우리의 이해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의 삶을 살 때는, 우리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이 아니라, 지극히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주로 비상식적인 순종의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몸과 삶이 드려지는 헌신 말입니다. 자신의 것을 챙기고, 자신의 성을 쌓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과 재물을 쌓는 그런 일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분의 하시는 일들을 기뻐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야말로 예배자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합니다.
지금도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을 감사합니다.


만나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주일 1, 2, 3, 4, 5부 예배 중에 어떤 예배를.
새벽 5시 30분 예배와 저녁 9시에 매일 드려지는 예배.
수요일에 여성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시니어대학과 함께 드려지는 수요공감예배.
금요일에 말씀을 묵상하며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금향로 예배.
매월 초하루가 되면 새벽 5시 30분에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하며 성만찬에 참여하는 예배.
매년 전 후반기에 일주일씩 새벽에 드리는 변화산 새벽기도회.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송구영신예배와 같은 절기 예배.


지금 여러분은 어느 예배 자리에 나와 있으며, 그것이 자의적 선택인지 구별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여러분이 2015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기꺼이 구별하여 예배를 드리기로 한다면 어느 예배를 구별하시겠습니까?
오늘의 결단이 여러분의 Action plan입니다.


또한, 예배가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기꺼이 헌신하는 것이라면, 오늘 이 예배를 위해 여러분은 어떤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시간의 부분에서 예배 시간뿐 아니라
 주차 봉사 (1-4부까지)
헌금 위원 봉사 (1-4부까지)
안내 위원 봉사 (1-4부까지)
카메라와 통역이 필요한 곳에서 (2-4부까지)
새가족부와 사진 봉사
 찬양대와 악기로 봉사하는 곳에서


물질에 부분에서
 주일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사랑 나눔, 십일조 등
 어느 부분에서 우리의 귀한 물질을 구분하기를 원하십니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누구도 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구별하여 드리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줄 것입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곳에서 여러분이 예배자가 되고, 아무도 헌신하지 않는 곳에서 여러분이 헌신자가 되는 것 말입니다.
무엇보다 예배시간에 늦는 실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잠시도 끊지 못하고 놓지 못하는 스마트 폰의 버튼을 꾹 누르고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예배자로서의 여러분의 옷차림과 음식, 그리고 자세에 대한 부분을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헌금시간이 되었을 때 주머니에 손을 넣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예배자로서의 삶은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면서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Action Plan에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나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거슬리는가?”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내가 고쳐야 할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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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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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6-17절]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17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페리 노블의 책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살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기 위한 시간을 내지 않는 탓에 그분과의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늘 일정에 쫓겨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보여 주셔도 보지 못할 수밖에 없다.
예전에 내 삶의 속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루는 우리 딸을 목욕시키다가 딸이 목욕에 집중하지 않고 장난감에 한눈을 팔자 나는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그러자 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 왜 시간이 없어요? 왜 서둘러야 해요?”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위험천만한 속도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나도 모르게 딸에게도 똑같은 속도를 전염시키려 했던 것이다.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칠 당시 한 믿음의 친구가 이렇게 조언했다.
“자네의 속도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너무 빨라.”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은 명백한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도 쉽게 화를 낸다. 솔직히 나는 속도를 조정하고 싶지 않았다. 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나 외에 모든 사람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를 이해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절실했다.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마귀는 하루도 쉬지 않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꼭 마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하겠는가?”
지독히 바쁘단 시절에는 ‘쉼’이란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마침내 상담 치료사는 내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성경은 일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말하지만 쉬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불순종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명에 충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헌신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묵상이 주는 유익은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가 쓰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듣는 것 (Hear) (로마서 10: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 읽는 것 (Read) (요한 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3. 연구하는 것 (Study)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4. 암송하는 것 (Memorize) (시편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5. 묵상하는 것 (Meditate)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묵상’이라는 것은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는 것과 함께 완성됩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두꺼운 성경을 한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나요? 두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태롭게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 모두를 사용한다면 훨씬 더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묵상의 단계를 통해 우리가 배운 말씀을 적용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묵상은 우리가 배운 말씀들을 되새기고 삶으로 살아가도록 도움을 줍니다.

 

말씀의 적용
 말씀을 적용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묵상하는 것은 ‘묵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현실화되고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이라는 것은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죠.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것을 훈련할 수 있을까요?


만나 교회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가 “나무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미리 준비된 설교와 본문으로 묵상집을 만든다는 것이죠. 좀 더 생각한다면, 설교가 그냥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며 정해지고, 그 말씀은 3개월 전에 원고가 나옵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매주 설교 본문과 함께 묵상하도록 하죠.
우리 성도들의 삶이 주일의 말씀과 유리되지 않고 연관성을 가지게 한 것이 나무 생각입니다. 나무 생각은 매일 새벽예배, 나무모임, 혹은 홈페이지를 통해 계속 나눔을 가지고 적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서 이런 묵상이 이루어진다면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오늘 우리는 묵상이란 의미와 그 묵상이 주는 유익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때로 절망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렇게 예배를 많이 드리는데 왜 예배자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많이 듣는데 왜 행하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 예배의 문제는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가장 은혜롭지 못한 교회의 첫 번째는, “예배와 기도보다는 회의가 긴 교회”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저의 모습과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니까, 때로 회의를 하기 위해 잠깐 기도하고 긴 회의로 들어갈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사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회의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함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형식적인 예배와 기도를 마치고” 우리의 생각을 나누는 회의로 들어갈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적용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지난해 하용조 목사님 3주기를 기념해 [믿음은 기다림으로 완성됩니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죽은 자를 통해 믿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보았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의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르심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구별해야 할 진정한 믿음이 있습니다.
“약속의 믿음 vs. 희망의 믿음”입니다.
흔히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의 ‘희망”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용조 목사님 글에서 참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바로 창세기 12장 1절의 해석이었습니다.
첫째는,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노력이나 그가 도통했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오늘 나누는 ‘묵상’과 연관이 있는데,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믿음이 없습니다. 말씀 없이 믿음을 갖는 것은 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인데 믿음은 내 비전이나 내 묵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생각한다”와 더불어 “기다린다”는 것이 아닐까요?
아주 재미있는 비유인데, 아이를 배면 엄마는 열 달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급하다고 5개월 만에 출산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인내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올 때 믿음이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이 들어오면 믿음을 ‘가지려’ 하는데, 믿음이 들어오면 ‘집착을 버리게’ 됩니다. 집착을 버리면 자유로워집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평안과 자유를 누리는 이유입니다.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들어왔습니다. ‘가라’는 명령이 있었고, ‘떠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맹목적으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방황이 아닙니다. 믿음은 갑자기 찾아오는 로또가 아니라 약속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순간 소위 말하는 횡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 인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묵상의 유익이며, 묵상으로 믿음이 자라는 이유입니다.”


셋째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대이고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보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약속을 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25년의 세월을 통해 약속을 보았고, 죽을 때까지 약속을 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면…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오늘 말씀의 진도를 나갈 수 없습니다.
성경이란 말뜻은 영어로는 ‘canon’ 즉 ‘척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척도란 ‘정확하게 재는 자’라는 뜻인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갈대로 자를 대신했습니다. 갈대는 곧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를 대면, 잘못되어 삐뚤어진 것이 드러나게 되고, 잘못된 것이 드러나면 고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디모데후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교정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말입니다.


M-school을 통해 구약성경공부를 배우는 분들은 첫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1,500년이란 시간 간격을 두고 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한 사람이 아닌 40명의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66권의 내용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일관성을 가지는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위에 보내셔서 구원하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구속사”라는 주제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후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성경이 문자로 기록된 후 2,000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의 손에 이렇게 완벽하게 전달되고, 2,000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베스트셀러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할 때, 성경은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바꾸어 놓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되는 순간에,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예전에 구약성경공부가 끝나는 마지막 시간에 늘 공부한 사람들과 함께 주안감리교회에 있는 성서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에는 수만 가지가 넘는 성경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성경 중에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성경이 있습니다.
인천지역에 사는 어떤 경찰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손으로 쓴 성경입니다.
그분은 어느 날 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생각한 것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성경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성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한참 쓰다가 생각을 해보니까 죽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 보았더니, 성경을 쓰다가 암이 완전하게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바로 그 성경이 진열되어 있고, 그리고 그분이 두 번째 성경을 또 쓰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우리의 육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또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6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 유명한 살인마로 알려진 고재붕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군대에서 대대장 당번병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면회 온 애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대대장의 군화를 몰래 신고 나갔다 들켰습니다. 그런데 한번 용서해주면 될 일을 그 일로 감방에 가게 되었고,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나오면 그 대대장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오던 날, 담을 넘어가 대대장 가족을 다 도끼로 찍어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비참한 것은 그가 죽인 대대장 가족은 당시에 자신을 감옥에 보냈던 사람이 아니고, 후임자로 왔던 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분노와 억울함 복수심, 살인 질투의 마음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전달된 것입니다. 사형을 기다리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되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용서를 빌며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죽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한, 그것이 목사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강단은 목회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강단에서 주시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말씀을 묵상할 때, 역사적으로 쓰인 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그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는 친숙해야 합니다.
같은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도 많이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옵니다. 제가 처음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많은 사람이 불평을 했습니다. “목사님 말이 너무 빨라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제 다른 교회 가면 힘들어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투에 아주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묵상을 시작하지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익숙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면 삶을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심방을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중직들의 얼굴을 일부러 외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찾습니다.”라고 하면 찾지 못해 당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때로 찾다가 아무 곳이나 열어놓고 있으면, 제가 모를 줄 압니까? 두께를 보면 잘 아는데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무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겠다는, 알아야겠다는 열망이 생기시기를 바랍니다.


Billy Graham says: "Long ago I decided to accept the Bible by faith. This should not be difficult for anyone to do. Most of us do not understand nuclear fission, but we accept it. I don't understand television, but I accept it. Why is it so easy to accept all these man-made miracles and so difficult to accept the miracles of the Bible?"
빌리 그래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전 나는 신앙으로 성경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 중 대부분은 핵분열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인다. 나는 텔레비전에 대해 다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인다. 왜 사람들이 만든 기적과 같은 일들은 쉽게 받아들이면서 성경의 기적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워하는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우리의 삶에 기준으로 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성경이 여러분의 삶에서 역사할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기 시작할 때, 성경이 여러분의 삶에 진리의 영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만나 교회가 추구하는 사명이 무엇인가요?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 되는 것이고, 그 소망을 이루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동안 성경은 우리에게 사용설명서와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수없이 변하는 이 세상 가운데 말씀은 그때그때 정확하게 우리의 삶에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이 교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복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짓은 잠시는 우리를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곧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진리만이 영존(永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무엇이 참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단론을 연구하면서, 늘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을 배우면, 늘 인생이 부정적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확실하게 배우는 것입니다. 진짜를 배우면 가짜는, 거짓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캐나다 왕립 기마 경찰은 위조지폐를 방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경찰국에서는 경관들에게 절대로 위조지폐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종류의 진짜 10불짜리 지폐가 존재함을 알 따름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철저하게 진짜 지폐에 대해서 연구하기 때문에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위조지폐입니다.
사람들이 위조지폐를 만드는 방법을 다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마 경찰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위조지폐를 만드는가를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진짜만을 연구합니다. 진짜에 못 미치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아주 철저히 알아서, 하나님의 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것에서 돌이키십시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을 때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의논하지 않으셨습니다. 절대로 그것을 분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사탄이 “즉각적인 성공”을 위해 예수님을 다른 길로 가게 하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를 부르신 목적을 명심하고 잘못된 조언을 거부하셨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명심하여야 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5절입니다.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습니다.
주변이 시끄럽다고요? 들으려 하면 그 음성은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이 나의 목자냐 하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목소리 중에 목자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훈련 말입니다.
“묵상훈련”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는 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부분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근미 작가가 쓴 [대한민국 최고들은 왜 잘하는 것에 미쳤을까]라는 책에서 동화작가 고정욱 씨에 대하여 말합니다.
강의하러 가서 청중들에게 “내가 아는 소설가가 동화공부를 하기 위해 동화책을 많이 읽고 큰 성과를 냈는데 몇 권이나 읽었을까요?”라고 질문하면 대개 100권, 200권, 500권이라고 말한다. 정답은 2,000권이다. 고정욱 작가는 그해 여름 동화책 2,000권을 읽고 나자 눈이 밝아지면서 이야기가 마구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쓴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안내견 탄실이,’ ‘가방 들어주는 아이,’ ‘내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등 많은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했다. 고정욱 작가의 작품 주인공은 거의 장애인이다. 자신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1급 장애인이어서 누구보다 장애인들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를 공략하는 것이 성과를 내는 지름길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화를 쓰기 위해 2,000권의 동화를 읽고 났더니 눈이 밝아지면서 이야기가 마구 떠올랐다는 것이죠.


우리가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려져야 말씀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때 우리의 삶의 교정이 일어납니다. 옳은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책에 보면, 클라우드라는 사람이 시편 37편을 읽다가 경험한 간증이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날은 바로 시편 37편을 읽을 차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그 사람에게 유독 21절에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다음 봉급을 받으면 꼭 갚겠다고 약속하고 부모님께 꾼 500불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돈이 부모님의 것이었기에 그는 몇 달 동안을 잊어버리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악인은 꾸고 갚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클라우드에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는 부모님께 500불짜리 수표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방금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고 말입니다.
그 순간 그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책망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의 인생이 교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빚을 갚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악인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명백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인생에서는 이제 “조정” 작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순종”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경험”됩니다.


오늘은 마지막 저의 간증으로 끝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도 이런 간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년 전 제가 한동대학에 설교를 부탁받고 갔을 때입니다.
전날 신입생을 위한 전도 집회를 하고, 다음 날 전교생을 위한 예배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나름대로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하고 갔는데, 강사로 소개를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마음속에서 그 준비한 말씀이 적절하지 않다는 음성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그때가,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책을 읽다가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까? 행하는 자입니까?”라는 말씀으로 도전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고민을 하다가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고 강단에서 준비한 원고를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인도하심을 따라 설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시작했는데, 저는 속에서부터 아주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아주 강력하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아주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고 마음을 먹으십시오.
먼저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어떻게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저는 지난주에 감신 동문회 세미나에 가서도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만나 교회의 성도들이 주일에 모이면 여기저기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간증하는 꿈”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인생을 조정할 용기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서 경험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간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이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이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이런 간증을 가지고 모입시다. 이곳저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고, 내가 이렇게 바뀌었노라고,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주셨노라고 간증하는 사람들로 이 예배당이 꽉 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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