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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년주일 예배 대표기도문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2024년 시간의 문을 여시고, 영광과 은혜와 은총으로 주일성수를 허락하신 은혜와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간구와 사모의 마음으로 부름 받은 백성들이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배 드리오니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을 거룩하게 구별시켜 주시옵소서.

오늘 거룩하게 하시는 기름부음을 통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모하는 심령들 머리 위에, 통회하는 영혼들 심령 위에 주의 기름부음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꺼지지 않는 불에 타서 없어질 쭉정이와 같은 우리의 믿음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겸손과 진실, 의로움과 성실함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망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와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참으로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처가 되며,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의지처가 되며,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주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고백을 열람하시고 이제 주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거룩한 영을 충만케 하옵시며,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잠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을 주재하시는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2024년이 밝았사오니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새롭게 결단하게 하시고, 새롭게 서원하게 하시어 2018년도 풍성한 열매로, 풍성한 은혜로, 풍성한 은총으로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욕심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시어 언제나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한 믿음되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헌신의 믿음도 더하여 주시옵소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힘들어 하는 북녘 땅 동포들을 기억하시어, 함께 나누게 하시며,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며, 더욱 더 담대히 선교하며 나누며, 전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흔들리고 있는 교계와 떠다니고 있는 교인들의 중심을 잡아 주시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새해를 영접하게 하시어, 교회를 새롭게 하는 역사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 선포를 위하여 강단에 세우신 목사님을 기억하시고, 권능과 권세의 입술이 되게 하시어 선포되는 말씀마다 생명으로 축복으로 화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 기관들을 기억하시어 인도하시고 축복하여 주시오며, 예배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손길들을 기억하시어 손길손길 마다 축복의 열매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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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기본교리] 구원의 10단계


1. 작정.  2. 예정.   3. 부르심.  4. 회개.    5. 영접.  6. 중생.  7. 칭의.  8. 성화.   9. 영화.  10. 구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제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는 말씀과 같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를  자세히 모르고서는  확실하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다음과 같은  10단계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1. 작정.  2. 예정.   3. 부르심.  4. 회개.    5. 영접.  6. 중생.  7. 칭의.  8. 성화.   9. 영화.  10. 구원.

1. 작정.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奇異)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 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定)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冊)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139:14-18)라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섭리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시고,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은  수의 이미 정해진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작정 섭리와 뜻대로 움직이며 주관하시다가,  결국 최종  심판을 하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지어 우리의 인생의 사소한  일들이라도 우리의 형질이 이루기 전에 미리 계획되고 작정된 대로 주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져 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성취하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예정.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
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7)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어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3. 부르심.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라는 기록대로,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영원한  때  전부터 예정된 성도들을 자녀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을 부르는 주인의 음성을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3)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
르느니라.  요10:26-27)  혹자는 아무나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
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하는 자를  보내어 말씀을  듣게하면, 믿음이 생겨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섭리인 것입니다.



4. 회개.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후7:10)라는 말씀과  같이, 성도가 자신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근심하게 하심으로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5. 영접.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라는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도 믿는 집안이라서 혹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것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라는 것은 이 시공  세계가
아닌 영원한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들은 비록 육체로는 이 세상 가운데 살고 있어도, 그 속의 내재하는  영은 영원한 세계의 존재로서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6. 중생.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중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  영이  '죽은 영'으로 태어납니다.  이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처음 창조함을 입었을 때에는  '산 영'이었지만,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그 영이 죽어 버렸던 것입니다.(첫째  사망)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여야만이 그  죽은 영이  다시 중생 되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7. 칭의.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6)라는 기록대로, 죄인된 성도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아무나 누릴 수가 있는것도 아닌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8-9)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살후3:2)    

8. 성화. : 대체로 1에서 7단계까지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은 인정하여도,  이 성화  과정만큼은 성도 스스로가 애쓰고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과정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6:17-18)라는 말씀과 같이, 성도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예정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보증으로 맹세까지 하심으로 확실함을 증거   하시고, 그 증거로써 보혜사 진리의 성령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보내어 진리를 생각나고 깨닫게  하여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있음으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와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1:8)'라는 말씀과 같이, 주께서 성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성화시켜주시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영혼의 생명의 양식으로 주셔서 그 영혼이 무럭무럭 자라 가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벧전3:18) 
 
9. 영화.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라는 기록대로, 성도들이 이 세상 삶을  마치고 그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 후, 마지막 심판의 나팔 소리에 성도들은 생명의 부활로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어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이  중생 되지 못하고  죽은 영으로  있는 사람들도 그 육체가 죽은  후에  결국 부활하게  되지만,  그들은 최후의 심판을 거쳐 둘째  사망 곧  영원한 지옥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0. 구원.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예약이 되어
있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믿음이라는 것을 한 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성도들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일평생에 걸친 인생 여정동안,   하나님의 예정섭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중생하여 그 영혼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심으로  점차  성숙하여지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눙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한 성도는 복음을 듣게 하여  믿도록 하여  주시고, 불택한 사람들은 그 영혼의 귀를 막으셔서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6:9-10)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하시느니라.  롬9: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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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병원과 요양원 차이
1. 정의
요양 병원과 요양원은 노인 및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관리와 돌봄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그러나 이 둘은 목적과 서비스의 성격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2. 서비스 범위
요양 병원은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 전문가들이 상주하며, 병원의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의료 진단, 약물 처방, 치료, 수술 등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또한, 물리치료, 작업치료 등의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반면, 요양원은 간호사와 간병인 등의 보호자들이 상주하며, 식사 제공, 목욕 도움, 세탁 등의 생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필요한 경우 의료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의료 서비스도 받을 수 있습니다.

3. 입소 기준
요양 병원은 환자의 의료적인 상태를 기준으로 입소가 결정됩니다. 즉, 질병이나 상태로 인해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 입소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요양원은 주로 노인 또는 장애인들의 요양과 일상 생활 지원이 필요한 경우에 입소가 이루어집니다. 의료적인 상태보다는 생활 자체를 도와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기간
요양 병원은 의료적인 치료와 감독이 필요한 기간 동안 환자가 입소하여 치료를 받은 후 퇴소합니다. 이는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다양한 기간이 소요됩니다. 한편, 요양원은 장기적인 생활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 오랜 기간 동안 머물 수 있으며, 일상적인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5. 의료 서비스
요양 병원은 의료 전문가들이 상주하여 진단, 치료, 감독, 수술 등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약물 처방 및 투약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요양원은 의료 서비스보다는 간호, 재활, 식사 지원 등의 생활 서비스에 중점을 둡니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 의료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6. 비용
요양 병원은 의료 서비스와 병원 시설을 제공하기 때문에 비용이 교적으로 높습니다. 입원 기간, 치료 방법 등에 따라 비용이 달라집니다. 요양원은 생활 지원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의료 비용보다는 비교적 저렴합니다. 그러나 요양원에서도 서비스 범위와 기간에 따라 비용이 달라집니다.
 

요약하자면, 요양 병원과 요양원은 목적과 서비스 범위, 입소 기준, 기간, 의료 서비스, 그리고 비용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요양 병원은 의료 서비스와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입소하여 의료적인 관리를 제공하는 반면, 요양원은 일상 생활에 지원이 필요한 노인 및 장애인들에게 입소하여 생활 도움을 제공합니다. 출처 요셉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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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절기- 맥추 감사절에 관한 내용
 
맥추절, 맥추 감사절

 맥추 감사절은 구약의 3대 절기의 하나인 맥추절을 계승한 절기이다. 유대인들의 추수 감사절이었던 맥추절은 히브리 원어로는 '하그 하카츠르'이며 '거두어 수확하는 절기'란 뜻을 가지고 있다.

맥추절은 관련 명칭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출 23:16) 후대에는 일반적으로 칠칠절, 오순절 등으로 불리워졌다. 칠칠절(七七節)은 이때가 보리 수확의 첫 단을 하나님께 드린 초실절(初實節)로부터 시작하여 7주간의 곡물 추수기가 끝난 뒤의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오순절(五旬節) 또한 추수기와 관계된 말로, 이 날이 초실절 다음날로부터 계산하여 제 50일째 되는 날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 외에 축제일 자체보다는 맥추절의 의식에 초점을 맞춘 '성회'(聖會)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유월절, 초막절과 같이 이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회로 모였음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맥추절은 한 해의 수확을 끝낸 기쁨 속에서 그 수확을 가능케 해주신 하나님께 기뻐하며 감사를 드린 축제였다. 동시에 인생의 모든 것은 오직 여호와께로만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심정으로 일상의 모든 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재무장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에 현대의 우리도 맥추 감사절을 맞을 때마다 감사의 축제속에서 여호와 제일주의로 신앙 재무장을 새로이 하여야 하겠다. 특히 단순 농경 사회가 아닌 현대 사회의 우리는 나는 지금 어떤 사업을 하여 내 인생에 필요한 것을 공급받고 있는지, 또한 거기서 얼마큼 추수를 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겠다. 또 육식을 위한 추수와 함께 영혼의 추수 곧 전도 사역에서도 얼마만한 수확을 얻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겠다.

1. 시기

맥추 감사절은 곡물을 수확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추수 감사절의 하나이다. 즉 맥추 감사절은 보리와 모맥 추수 직후에 거행되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절기인 칠칠절, 즉 오순절과 관련을 갖는 날이다. 오순절은 본격적인 추수를 시작하기 전 곡식의 첫 이삭 한단을 하나님께 바치는 유월절 후 첫 안식일 그 다음날인 초실절 절기 후 50일째 되는 날로, 유대의 종교력으로 이 날은 7주전에 시작한 곡물 추수를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로 엄숙한 가운데 하루 동안만 행해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오순절은 성령 강림의 의미로 교회에서 더 크게 기념되어 진다. 그리고 곡물 수확에 관련된 감사절은 11월의 추수 감사절에 더 성대하게 기념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쌀 추수에 맞추어 지켜지는 추수감사절과 더불어 보리 수확과 관계되는 맥추감사절 역시 계속 지켜져 오고 있다.

이러한 맥추 감사절은 한해의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하는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날은 전반기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후반기에도 역시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기원을 하여야 한다. 

2. 유래
창조 시대의 아담과 하와는 수고하지 않고도 에덴 동산의 풍족한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나게 되었고, 그 후에는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서 땅의 소산을 먹게 되었다. 인류가 씨를 뿌리고 수고함으로 수확을 얻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린 것은 아담과 하와의 직속 자손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 기사(창 4:3,4)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 가인은 땅에서 얻은 곡물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를 드렸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추수한 산물과 그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는 풍습은 아주 오랜 전부터 인류에게 있어 왔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제가 하나의 절기로 자리를 잡은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유대인을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곡물 추수 감사제를 맥추절이라고 하여 하나의 절기로 기념하였다. 애굽을 떠나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인에 정착하여 그 땅의 소산을 먹게 된 것은 그들을 돌보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거둔 곡물의 처음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렸다(신 26:1-11). 이렇게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 땅에서 생산된 소산물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율법에 기초한 것이다. 이처럼 백성들이 드린 곡식단은 제사장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졌는데, 바쳐진 제물의 일부는 제단에 드려졌고 그 나머지는 제자상의 몫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 절기가 유대의 전통 절기로 확고히 자리를 잡고 연례적인 순례 축제로 정착된 것은 그보다 뒤인 솔로몬 시대였다(대하 12-14장). 솔로몬은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곳에서 번제를 드렸으며, 모세가 명한 규례대로 무교절, 초막절과 함께 칠칠절, 즉 맥추절을 지켰다. 이에 따라 유대의 남자들은 이 절기에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도시의 경계까지 나와 있다가 예물을 드리기 위해 온 사람들이 이 도시의 경계에 이르면 그들을 성전으로 안내했다. 한편, 봉헌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첫 열매의 예물을 바칠 때 신 26:3-10의 말씀을 낭송했다.

이러한 형태의 맥추절은 신약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교회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인 오순절 성령 강림후, 이날은 성령 강림일로 기념하게 되었고('성령 강림절' 참조), 교회에 있어 맥추절의 의미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추수로 인한 감사는 민간 차원에서 계속해서 드려졌다. 그러던 것이 미국에서는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에 의해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부각되면서 추수 감사절이란 명칭으로 바꾸어져 지켜지게 되었다('추수 감사절' 참조).

우리 나라에서도 일반적으로 추수 감사 행사를 미국에서 유래한 감사절에 근거해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교계 일부에서는 우리 나라 실정에 맞는 추수 감사절을 기념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며, 일부 교회에서는 우리 고유의 민속 절기인 추석을 추수 감사절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맥추 감사절은 이모작을 하였던 우리 나라 에서는 보리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계속 지켜져 오고 있다.

3. 풍습

(1) 이스라엘의 풍습

유대인들은 밀추수가 끝난 직후 풍성한 수확을 기념하는 맥추절에 새로 추수한 첫 곡물을 고운 가루로 빻아 그 가루에 누룩을 넣어 만든 떡 두덩이를 요제(搖祭), 즉 흔들어 드리는 제사로 드렸다(레 23:15-17).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전통 절기에 드려졌던 이 두덩이의 떡을 상징하는 유제(乳劑) 음식과 고기를 먹는다. 한편 이때 제단에는 떡 두덩이와 함께 어린 숫양 두 마리가 화목제물로 드려졌는데,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 사이의 화목과 교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 난 나머지는 제사장과 함께 봉헌자가 먹을 수 있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제가 드려지는 이때에는 성전 봉사자인 레위인, 초대된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이 함께 공동 식사를 하였는데, 이는 미국에서 첫 번째 추수 감사절에 청교도와 인디언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예식이 끝난 후에는 예식에 참가했던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렐(시 113-118편)을 부르고 춤을 추는 풍습이 있었다.

추수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독특한 풍습이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하여 밭 모퉁이 곡식을 거두지 않으며 나무의 열매도 다 거두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은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한 형제라는 공동체 의식에 기초한 것으로서, 가난한 자들을 자연스럽게 구제하는 방법이 되었다(레 23:22).

한편 이때 이스라엘에서는 고대 추수 광경을 배경으로 기록된 룻기서가 읽혀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성전파괴 후에는 시내산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의미가 부여되면서 토라, 율법서등 율법과 관계된 구약 성서 등이 읽히거나 낭독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 이스라엘 사회에서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다.


(2) 세계 일반 교회의 풍습
   

맥추 감사절이 이스라엘의 전통 절기의 하나인 맥추절로부터 유래하기는 하였지만, 곡물 수확 후 감사제를 드리는 것은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을 아니었다. 농경을 하는 모든 나라에서는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수확으로 인한 감사제를 드렸다.
   
이러한 풍습은 중세 교회 시대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접목되어 추수 감사절로 이어지게 되었다.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는 예수의 승천일 3일 전에 추수제의 한 형태로 풍년 기원제를 드렸으며, 영국에서도 라마스(Lamas)라 하여 8월 1일에 수확 감사 예배를 드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추석이라 하여 음력 8월 15일을 민속 전통의 추수 감사일로 기념하고 있다. 추석은 일년 농사를 거의 마무리 지은 때로, 이날에는 조상을 생각하며 성묘를 하고, 햇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8월 대보름 달을 구경하는 등 다양한 풍습이 행해졌다. 또한 오늘날 교회의 추수 감사절을 유래케 한 미국에서는 이날 칠면조 고기 등 추수 감사절 음식을 먹으며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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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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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림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5-33)

1. 얼마나 희생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이해 관계를 가진 보통의 자아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도덕’이라든가 ‘점잖은 행동’, ‘사회의 이익’ 같은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희생시킨다. 왜냐하면 대개 그러한 것들은 자아의 욕구에 제동을 걸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하게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요구에 대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의 자아가 하고 싶어 했던 일이 때로는 소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마땅히 그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행히 ‘옳은’ 것으로 판명될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에는 마땅히 그것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모든 요구 조건이 충족되어도 여전히 자아가 남아 있어서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고,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기회와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사실상 우리는 세금을 정직하게 꼬박꼬박 내는 사람과 매우 흡사하다. 그 사람은 세금을 확실하게 잘 내기는 하지만 세금을 내고도 여전히 자기가 먹고 살 만큼의 돈이 남아 있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의 자아를 여전히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이다.

2. 두 가지 결과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때 두 가지 결과가 예상된다.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자아에 충실하든가, 아니면 자아를 버리고 완전히 불행해지든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희생을 요구하는 모든 요구 조건들을 진정으로 충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틀림없이 자기에게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살면 살수록 그 양심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매 순간마다 굶주리고 괴로워하며 염려하게 되므로 점점 더 화를 내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소위 ‘남을 위해 살면서도’ 늘 우리 자신을 순교자로 자처하고 남이 그것을 더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불만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나면, 처음부터 솔직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해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3. 어렵고도 쉬운 길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쳐라. 나는 너의 시간과 물질과 일을 원하지 않고 바로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자아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려고 왔다. 미봉책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나는 여기저기 가지만을 잘라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를 베어 넘어뜨리기를 원한다. 자아 전체를 내어 버려라. 악하다고 생각되는 욕망만이 아니라 선하다고 생각되는 요구까지도 모두 내어 버려라. 마음의 소욕을 모두 내어 버리면 그 대신 내가 새로운 자아를 주겠다. 사실, 나는 너에게 나 자신을 줄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도록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우리 모두가 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어렵기도 하고 더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매우 어렵다고 하셨고, 또 때로는 매우 쉽다고도 하셨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포로 수용소에서 맞아 죽을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다.

4. 더 어렵게 일하지 말고 더 지혜롭게 일하라

       교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게으른 학생일수록 결국에는 가장 어렵게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학생에게 똑같은 기하학 문제를 주었다고 하자. 수고하고 땀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은 그 문제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고, 게으른 학생은 지금 당장은 노력이 적게 들기 때문에 그것을 암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6개월 후 정작 시험 준비를 할 때, 미리 땀을 흘린 학생은 금방 이해하고 자신있게 푸는 문제를 게으른 학생은 여러 시간을 애써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게으르면 결국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한 번 살펴보자. 전투를 하거나 등산을 할 때에 종종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용기와 결단이 결국에는 가장 안전한 것이 될 수가 있다. 한편 결단해야 할 순간에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어 결단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겁한 일이 가장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이 물음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전부 주님께 바치는 것, 즉 우리 마음의 소원이나 앞날에 대한 대책까지도 모두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거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소위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면서 개인의 행복을 인생의 커다란 목적으로 삼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선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소욕을 좇아 돈이나 쾌락이나 야망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고자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정숙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엉겅퀴가 무화과를 낼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잡초 씨만 뿌려진 밭이라면 밀을 생산할 수 없다. 그 잡초를 잘라 낸다 해도 다만 짧아지는 것 뿐이다. 여전히 잡초를 낼 뿐이며 밀은 낼 수가 없다. 만일 밀을 생산하고 싶으면 밭의 표면만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 밭을 갈아 엎고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6.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몸에 배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문제가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찾고 있지 않는 곳에서 생기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우리가 그날 그날 갖게 되는 모든 소원과 희망이 사나운 야수처럼 우리에게 덤벼든다. 매일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문제를 뒤로 미루어 놓는 것 뿐이다. 그리고는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며, 좀더 크고 좀더 강하며 좀더 경건한 다른 삶이 내 삶에 흘러 넘치게 하는 것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을 사는 것이다. 하찮은 일로 야단법석을 떨고 소란을 피우는 것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깥 바람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는 잠시 동안만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점점 새로운 종류의 삶이 우리의 생활 영역 전반에 걸쳐 퍼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바로 우리 우편에 서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단지 표면에만 칠해지는 페인트와 속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염색이나 녹의 차이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막연하거나 이상적인 헛된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온전하라”고 했으면 그 말 그대로 온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다. 사실 타협이란 불가능하다. 알이 변하여 새가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알이 새로 변하지 않고 날기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로 더 어렵다. 우리는 지금 알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냥 무한정 평범한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알은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7.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앞서 말한 것을 한 번 돌이켜보자. 그것은 기독교 전반에 관한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고 혼란해지기가 매우 쉽다. 교회가 교육, 건축, 선교, 예배 등 많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마치 국가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 외에 많은 다른 목적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훨씬 더 단순하다. 국가는 단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 인간의 일상적인 행복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남편과 아내가 난로를 쬐며 대화를 나눈다든가, 몇몇 친구들이 선술집에 모여서 다트 놀이를 한다든가, 아니면 정원을 판다든가 하는 이런 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법률과 국회와 군대와 법정과 경찰과 경제 상태 따위가 이러한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을 증진시키고 연장시키며 보호해 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다. 만일 모든 교회와 성직자와 선교와 설교가, 심지어 성경 그 자체까지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단지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때로는 온 우주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온 우주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락한다고 말한다.




8.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자



       나는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일이 온 우주에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구에서 수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과연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이 우주 공간에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말이다). 심지어 이 지구상에서조차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에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말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왕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드리고자 했던 그 멋진 선물 속에 우리가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까지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지음을 받은 유일한 목적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연 만물까지도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암시가 많이 나와 있다. 그때가 되면 악몽은 물러가고 아침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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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림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5-33)

1. 얼마나 희생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이해 관계를 가진 보통의 자아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도덕’이라든가 ‘점잖은 행동’, ‘사회의 이익’ 같은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희생시킨다. 왜냐하면 대개 그러한 것들은 자아의 욕구에 제동을 걸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하게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요구에 대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의 자아가 하고 싶어 했던 일이 때로는 소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마땅히 그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행히 ‘옳은’ 것으로 판명될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에는 마땅히 그것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모든 요구 조건이 충족되어도 여전히 자아가 남아 있어서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고,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기회와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사실상 우리는 세금을 정직하게 꼬박꼬박 내는 사람과 매우 흡사하다. 그 사람은 세금을 확실하게 잘 내기는 하지만 세금을 내고도 여전히 자기가 먹고 살 만큼의 돈이 남아 있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의 자아를 여전히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이다.

2. 두 가지 결과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때 두 가지 결과가 예상된다.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자아에 충실하든가, 아니면 자아를 버리고 완전히 불행해지든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희생을 요구하는 모든 요구 조건들을 진정으로 충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틀림없이 자기에게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살면 살수록 그 양심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매 순간마다 굶주리고 괴로워하며 염려하게 되므로 점점 더 화를 내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소위 ‘남을 위해 살면서도’ 늘 우리 자신을 순교자로 자처하고 남이 그것을 더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불만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나면, 처음부터 솔직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해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3. 어렵고도 쉬운 길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쳐라. 나는 너의 시간과 물질과 일을 원하지 않고 바로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자아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려고 왔다. 미봉책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나는 여기저기 가지만을 잘라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를 베어 넘어뜨리기를 원한다. 자아 전체를 내어 버려라. 악하다고 생각되는 욕망만이 아니라 선하다고 생각되는 요구까지도 모두 내어 버려라. 마음의 소욕을 모두 내어 버리면 그 대신 내가 새로운 자아를 주겠다. 사실, 나는 너에게 나 자신을 줄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도록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우리 모두가 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어렵기도 하고 더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매우 어렵다고 하셨고, 또 때로는 매우 쉽다고도 하셨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포로 수용소에서 맞아 죽을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다.

4. 더 어렵게 일하지 말고 더 지혜롭게 일하라

       교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게으른 학생일수록 결국에는 가장 어렵게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학생에게 똑같은 기하학 문제를 주었다고 하자. 수고하고 땀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은 그 문제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고, 게으른 학생은 지금 당장은 노력이 적게 들기 때문에 그것을 암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6개월 후 정작 시험 준비를 할 때, 미리 땀을 흘린 학생은 금방 이해하고 자신있게 푸는 문제를 게으른 학생은 여러 시간을 애써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게으르면 결국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한 번 살펴보자. 전투를 하거나 등산을 할 때에 종종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용기와 결단이 결국에는 가장 안전한 것이 될 수가 있다. 한편 결단해야 할 순간에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어 결단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겁한 일이 가장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이 물음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전부 주님께 바치는 것, 즉 우리 마음의 소원이나 앞날에 대한 대책까지도 모두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거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소위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면서 개인의 행복을 인생의 커다란 목적으로 삼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선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소욕을 좇아 돈이나 쾌락이나 야망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고자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정숙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엉겅퀴가 무화과를 낼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잡초 씨만 뿌려진 밭이라면 밀을 생산할 수 없다. 그 잡초를 잘라 낸다 해도 다만 짧아지는 것 뿐이다. 여전히 잡초를 낼 뿐이며 밀은 낼 수가 없다. 만일 밀을 생산하고 싶으면 밭의 표면만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 밭을 갈아 엎고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6.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몸에 배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문제가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찾고 있지 않는 곳에서 생기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우리가 그날 그날 갖게 되는 모든 소원과 희망이 사나운 야수처럼 우리에게 덤벼든다. 매일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문제를 뒤로 미루어 놓는 것 뿐이다. 그리고는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며, 좀더 크고 좀더 강하며 좀더 경건한 다른 삶이 내 삶에 흘러 넘치게 하는 것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을 사는 것이다. 하찮은 일로 야단법석을 떨고 소란을 피우는 것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깥 바람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는 잠시 동안만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점점 새로운 종류의 삶이 우리의 생활 영역 전반에 걸쳐 퍼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바로 우리 우편에 서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단지 표면에만 칠해지는 페인트와 속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염색이나 녹의 차이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막연하거나 이상적인 헛된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온전하라”고 했으면 그 말 그대로 온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다. 사실 타협이란 불가능하다. 알이 변하여 새가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알이 새로 변하지 않고 날기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로 더 어렵다. 우리는 지금 알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냥 무한정 평범한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알은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7.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앞서 말한 것을 한 번 돌이켜보자. 그것은 기독교 전반에 관한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고 혼란해지기가 매우 쉽다. 교회가 교육, 건축, 선교, 예배 등 많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마치 국가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 외에 많은 다른 목적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훨씬 더 단순하다. 국가는 단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 인간의 일상적인 행복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남편과 아내가 난로를 쬐며 대화를 나눈다든가, 몇몇 친구들이 선술집에 모여서 다트 놀이를 한다든가, 아니면 정원을 판다든가 하는 이런 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법률과 국회와 군대와 법정과 경찰과 경제 상태 따위가 이러한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을 증진시키고 연장시키며 보호해 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다. 만일 모든 교회와 성직자와 선교와 설교가, 심지어 성경 그 자체까지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단지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때로는 온 우주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온 우주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락한다고 말한다.




8.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자



       나는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일이 온 우주에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구에서 수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과연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이 우주 공간에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말이다). 심지어 이 지구상에서조차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에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말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왕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드리고자 했던 그 멋진 선물 속에 우리가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까지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지음을 받은 유일한 목적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연 만물까지도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암시가 많이 나와 있다. 그때가 되면 악몽은 물러가고 아침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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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대표기도 요령 (How to pray in church)


오늘은 기도하는 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처음 기도를 하게되면 어려움을 격지요
그리고 대표기도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부터도 처음에 그랬으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포스팅합니다. 

대표기도의 방법 

가. 기도의 요소 

기도하는 데는 따라야 할 여러 절차가 있다. 절차가 필요한 이유는 계획성 있게 준비함으로써 효과적이고 완전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표기도나 공중기도에 있어서는 순서를 마음속에 정해 놓고 메모하여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1) 찬 양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앞서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에서 보면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영광이 서두에 나와 있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기도가 우선 되어야 한다.

(2) 감 사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써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하였다. 간구하기 전에 먼저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감사함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3) 회개와 고백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확립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지은 죄를 남김없이 회개하는 것이다. 이 회개와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만 정당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4) 간 구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간구이다. 간구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육체의 정욕을 위해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간구는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는 간구가 되어서는 안되며, 이웃과 섬기는 교회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먼저 간구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이다.

(5)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함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신자의 특권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보잘 것 없이 낮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하는 것이다.

(6) 아멘으로 마침
아멘은 "확인하다", "확증하다", "진실로", "확실히" 등의 뜻이 있다.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과 기도의 응답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다는 의미에서 "아멘"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멘"은 기도문의 총 결론으로 쓰여 지는 것이다. 

나. 대표기도 할 시 유의사항

기도의 형식에는 묵상기도, 개인기도, 공중기도, 통성기도, 윤번기도, 대화기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형식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 다만 공중기도는 여러 사람을 대표하여 하는 것이므로 다른 기도와는 다른 내용과 형식으료 준비해야 한다.

(1) 공중기도자의 자세
먼저 공중기도의 자세는 언제나 정직하고 바른 자세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 공중 앞에 나선 대표기도자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모든 잡념을 잠재워야 한다. 욕망이나 불만 그 어떤 슬픔과 기쁨도 잠재워야 한다. 공중 앞에 나서기 직전부터 오직 주님만을 그리며 자신의 생활에 얽힌 모든 것을 떨쳐 버려야 한다. 마음 가득히 주님만을 사모하며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한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것이 잡념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지만 눈을 뜨고 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렇게 기도를 해도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모아 정성껏 기도문을 준비해서 드리는 것은 전체 예배자들을 위해 크게 유익할 수도 있다.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공중기도를 할 때에는 예배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나 다 자신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쉬운 말로 기도를 해야 한다. 자신의 개인 사정이나 자기와 친한 그 어떤 사람의 특별한 형편을 함부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특별한 형편이 그 곳에 모인 모든 회중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일 때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이다. 공중기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공중기도는 단 한 번에 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가급적이면 참석자의 모든 형편을 자세히 아는 것이 좋다. 공중기도자의 기도를 들으며 함께 기도하는 회중의 태도 역시 진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대표로 인도하는 기도만 들으며 막연히 따라만 갈 것이 아니라 공중기도자의 기도에 자기가 바라는 진실 된 삶의 의미를 함께 실어서 주께 아뢰어야 한다. 그것이 함께 드리는 진정한 기도이다.
공중기도를 드릴 때 대표기도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이웃과 세상을 온전하게 섬기는 법을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 주의 나라와 그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전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갇힌 자를 해방시켜 주시며 소경의 눈을 여시며 의인을 사랑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며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개인기도이든 공중기도이든 기도의 대상은 분명히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영광을 찬양하고 참회하고 간구하는 우리의 자세는 겸허하고, 솔직해야 할 것이다. 결코 하나님 앞에서 가르치려 들거나 설교투의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자적이거나 철학적인 용어들을 동원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위선의 탈을 벗어야 한다. 웅변가의 그럴듯한 음성을 흉내 내는 것도 듣기에 따라서는 민망스런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구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필요 이상 인용하여 기도할 때가 있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역시 덕스럽지 못하다. 그럴 경우에는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훤히 알고 있는 양 자랑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가 쉽다. 또 한 가지는 대표기도를 하는 사람이 스스로의 슬픔과 고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습관처럼 시종 우는 음성으로 기도를 하는 이가 있는데 정말 난처한 일이다. 왜냐하면 참석한 회중들이 다 슬픔에 빠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는 사업이 잘되어 돈 많이 벌었거나 직장에서 승진 등을 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반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고 경쾌한 소리로 기도를 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참석자들 중에는 괴로움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대표기도를 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회중을 대표해서 기도하는 사람이다. 자기중심으로 하는 기도는 피해야 한다. 교회 전체가 공동으로 해야 할 일과 같이 염려하는 것들에 대하여 기도를 함이 좋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기도를 맡은 사람은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 못지않게 정성을 다하여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흔히 교회 내에서 대표기도를 길게 하면 믿음이 좋아 보이는 것 같고 짧게 하면 믿음이 적은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풍조는 속히 시정이 되어야 한다.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공중대표 기도자의 자세는 어떤 것일까. 먼저 원래의 자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평소에 행동이 민첩하고 말씨가 좀 빠른 편에 속하는 사람이 어느 날 대표기도를 한다고 해서 갑자기 근엄하고 엄숙한 표정에다 굵고 느릿느릿한 말투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다. 기도를 드릴 때는 철저하게 가식적인 요소가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쳐해 있는 그대로의 상황 속에서 꾸밈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괜히 무게나 잡거나 
근엄한 체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214장은 흔히 그런 자세를 취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언제나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이 찬송가의 후렴에 나오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는 가사는 바로 우리의 삶의 자세와 기도의 자세를 일깨워 주는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자가 명심해야 할 것 중의 또 하나는 기도를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회중들과 함께 깊은 공감대를 형성해 가야 하는 일이다. 혼자서 하는 개인기도라면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말을 빠르게 하든 느리게 하던 혹은 명상을 하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을 대표한 공중기도를 맡은 자의 입장은 그게 아니다. 회중들과 함께 기도하고 같이 호흡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회중은 그저 듣기만 하고 대표기도자만이 빠른 속도로 청산유수처럼 기도를 한다고 해서 좋은 기도가 될 수는 없다. 전체 회중이 바라고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을 추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고 대표자가 드리는 기도의 한마디 한마디가 전체 회중 속에 용해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찍이 우리에게 모여서 열심으로 기도하기를 촉구하시었다. 
 

(2) 공중기도의 내용

기도의 내용 또한 좀 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더욱 더 시야가 넓고 가슴이 뜨거운 것이 좋다. 
지나치게 기복적이거나 일방통행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응석받이 어린아이처럼 무조건 달라고만 조르는 경향은 지양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는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지녀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들이 항상 드리는 개인기도는 물론 공중기도 역시 자꾸만 편협해지고 있음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편협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중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갖아야 한다.

① 모든 기도자들의 감사의 마음이 반영되고,
② 모든 기도자들이 용서 받고자 하는 내용이 보편적으로 언급되어야 하며 
③ 간구의 내용이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간략하여야 한다.

즉, 회중의 심중을 헤아리는 기도, 회중이 공감할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하다는 말이다. 또한 개인이나, 우리교회만을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 정의와 평화, 사랑을 위한 기도로 발전되어야 하다. 그러나 이런 기도 역시 한탄이나 불평, 불만의 해소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교회와 개인이 하나님과 의논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역사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응답을 갈망하는 것이어야 하며,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의 기도여야 마땅할 것이다. 

(3) 공중기도의 준비

① 먼저 개인기도로 준비한다.
② 각 성도들의 형편과 사정 등을 종합하여 기도를 구상한다.
③ 기도하는 시기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④ 기도문이나 기도의 요약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⑤ 다른 사람이 들으라는 식으로 준비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대상으로 준비하여야 한다. 
⑥ 기도 전에 성경 구절을 읽는 것은 설교식이 되어 버림으로 삼가야한다.
⑦ 대표기도자는 적어도 평소에는 못해도 한 주간 정도 새벽기도를 통해 준비해야 한다.
⑧ 기도자는 그 주간 예배와 말씀과 통일성을 이룰 수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⑨ 기도자를 이끄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위탁하여야 한다.
⑩ 공중 기도는 개인기도가 아님을 명심하고 공중의 대표로서 그들의 마음으로 예배자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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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본 세례예식 그리고 세례의 의미 

 

 

 

 

세례의 의미?

 
 
세례는 회개의 표시다. 자신의 죄를 씻고 새 삶을 찾는다는 의미다. 유대인들끼리는 대체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지만, 비유대인이 정식으로 유대교를 받아들이고자 할 경우에는 세례를 받아야 했다. 성서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세례자는 세례자 요한이다. 그는 전통을 깨고 동포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다. 요한은 친척인 예수에게도 세례를 주었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예수는 죄가 없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요르단 강(요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에게 갔을 때 요한은 주저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때 예수는 묘한 대답을 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가 강에서 나오자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그에게 내려왔고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3~17).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공식 활동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 중에는 예수가 신의 아들로 태어난 게 아니라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의 아들로 간택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목소리가 그 점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이런 믿음은 양자론이라고 불리는데,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예수 자신은 누구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처형되었다가 부활한 뒤 그는 제자들에게 신앙을 널리 퍼뜨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했다(마태복음 28:19). 이 말은 지금도 그리스도교 세례에서 늘 되풀이되는 관용 표현이다. 성부, 성자, 성령을 말했기 때문에 세례 의식은 흔히 삼중세례(threefold baptism)라고 부른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도행전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베푼다. 그래서 일부 그리스도교파는 지금도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베풀고 있다.

 

성서의 세례는 물에 몸을 담그는 방식이었다. 즉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하던 대로 강이나 호수의 물속에 완전히 몸을 담가야 했다.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은 지금도 날씨만 허용된다면 옥외 세례를 좋아한다. 일부 교파는 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세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중 어느 때든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설교단 뒤에 세례당을 갖춘 교회도 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순결한 새 삶의 시작을 상징하는 의미로 흰 옷을 입는 게 전통이었다. 세례당 뒤쪽 벽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요르단 강의 그림이 있는 경우도 많다.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특히 강조하는 그리스도교파는 세례 대신 침례(浸禮)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물에 몸을 담그는 대신 물을 뿌리는 교파도 있다. 성직자가 손을 물그릇에 담갔다가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뿌려주는 것이다. 또 어떤 교파는 약간의 물을 부어주기도 한다. 예수의 세례를 묘사한 그림은 수도 없이 많지만 사실적으로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 예수와 요한이 발목까지만 물에 담근 채 요한이 예수의 머리에 물을 부어주는 장면을 그렸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아마 성서의 세례가 침례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날씨나 건강의 문제로 침례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형식과 무관하게 세례는 몇 가지 의미가 있었다. 우선 과거의 잘못을 씻어주는 정화의 의미였다. 또한 세례는 예수 자신이 겪은 죽음과 부활을 상징했다(로마서 6:4).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의 상징이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새 삶의 상징이었다.

 

대다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세례는 교회의 성원이 되는 통과의례다. 세례를 받으면 완전한 신도가 되고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들 간에 의견이 크게 엇갈리는 문제는 유아 세례다. 성서에는 유아 세례가 없기 때문에 일부 교도들은 '신도의 세례'를 주장한다. 즉 교회의 성원이 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모든 '식구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어린이나 유아도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다.

 

예수의 세례는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중요한 날로서, 예수공현일로 정해진 1월 6일에 기념한다. 이날은 "이중으로 신성한 날"이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다 자란 예수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공식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예언했다(마가복음 1:8). 오순절교파는 '성령의 세례'를 특히 강조하고, 그것이 물로 베푸는 세례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요한의 예언을 고려하면 일리가 있다). 성령의 세례는 교회 의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냥 "성령이 충만한" 상태를 자각하게 되면 그것이 곧 세례다. 그 상태는 보통 방언을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증명된다.

 

세례는 육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남을 상징하는 의식인데, 새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정식 구성원이 된다. 세례를 뜻하는 그리스어 밥티스마(βaπτσμ)는 '침수(浸水)한다'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원래의 세례는 몸통을 물속에 잠그는 침례(浸禮)예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동방교회·침례교회 등 몇몇 교파에서는 침례의식을 거행하지만, 가톨릭교회와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머리에 물을 적시거나 이마에 물을 뿌리는 약식(略式)이 보통이다. 한편, 물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끗이 한다는 관념은 고대 동방종교에서도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새로이 태어난다는 신생(新生) 또는 재생(再生)의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 한역(漢譯)에서 중생(重生:거듭난다)으로 번역하였으므로, 한국 교회에서는 이 용어로 많이 쓰이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세례예식은 고대 동방종교의 침수의식으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직접적인 배경은 구약성서이며, 팔레스티나 지방의 종교적 세례단체로부터 받은 영향도 크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교조인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자신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록은 없는데, 어쨌든 그리스도교의 세례의식은 초기 교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구약의 과월제(過越祭) 사건(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하여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던 사건) 및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기념하고 거기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세례의식이 베풀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처음으로 명백히 한 사람이 사도 바울로이다.

 

바울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세례가 가지는 기본적인 의미이다. 교파에 따라서는 유아(幼兒)세례 제도가 있는 곳도 있는데,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성년(成年)이 되면 입교식(入敎式)을 통하여 교회의 정식 구성원이 된다. 그러나 성서에 명시적(明示的) 근거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도 많다.

 

출처 교양인을 바이블 키워드?와 두산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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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절 인사말 문자

 

 

 

크리스마스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탄생을 그리면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떡과 맛난 과일 다과회와 푸짐한 선물로 친교로 나누 주고 이웃에도

나누 주는 기쁜 날로 오래 오래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크리스마스처럼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각자 마음이 들뜨는 날은 두고

크리스마스 날을 기해 여행도 가고 즐거운 추억을 가지기 위해

젊은이들은 그들대로 나이 든 사람은 그들대로 즐거운 시간을 가져 보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빛이 되시고 구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B,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피와 사망의 권세로 오셨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낮아지심과 섬김 희생의 삶은

온 인류의 꿈과 비전 희망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성탄을 맞이하여 소외된 이웃에게 희망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C,

성탄의 선물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이며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하시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의 사랑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고, 매일매일 건강하세요.

†─ 축 ── ☆

아기예수

탄생하신 날

 

F, 기쁜 성탄과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Best Wishes for 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1,Merry Christmas!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2,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늘 행복한 가정이루세요.

3,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늘 행복한 가정이루세요.

4,사랑, 행복, 기쁨이 두 손을 모아 기원합니다.

5,크리스마스소원을 빌어봐 이루어 질거야

6,온통 새하얀 세상 너와 함께할 크리스마스. 화이트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어

7,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모두모두 행복 가득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8,메리크리스마스 화이트 크리스마스

9,메리 크리스마스 사랑행복 만땅

10,크리스마스선물 메리크리스마스

 

11,사랑, 행복, 기쁨이 두 손을 모아 기원합니다.

12,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늘 행복한 가정이루세요.

13,크리스마스의 축복을 너에게루

14,이 세상 행복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사람 너랑 길고 긴이겨울 따뜻하고 이쁘게 보내고 싶당알럽 유

15,Merry Christmas!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16,크리스마스가 되면 세상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예쁘게 반짝이는 화려한 트리와 흥겹게 흘러나오는 캐롤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선물도 많이 받으시고, 즐거움도 가득한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연말 잘 마무리하시고, 희망 가득한 새해 기쁨으로 맞으세요!!

Happy Christmas!

Merry X-mas~!

 

17,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시고,

남은 시간들도 잘 마무리하시길 바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8,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19,Merry ChristMas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행복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20,메리 크리스마스 당신의 사랑과 행복, 그리고 기쁨을 두 손 가득히 모아 기원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늘 행복한 가정 이루세요.

 

21,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시고, 남은 시간들도 잘 마무리하시길 바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2,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 행복하게 보내시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새롭게 다가오는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뜻한 바 모든일 성취하시길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3,메리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에는 더 많은 축복과 더 많은 사랑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모두모두 행복 가득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24,메리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에는 더 많은 축복과 더 많은 사랑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모두모두 행복가득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25,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시고,

남은 시간들도 잘 마무리하시길 바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6,기쁜 성탄과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Best Wishes for 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27,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모두가 즐거운 크리스마스!

좋은 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지내온 한해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시는 연말 되시길 바랍니다.

새해에도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28,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즐거운 계획들 많이 만드셨는지요?

사랑과 기쁨 가득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더불어 남은 12월 잘 마무리 잘하세요!

다가오는 새해에는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9,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 행복하게 보내시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새롭게 다가오는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뜻한바 모든 일 성취하시길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0,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모두가 즐거운 크리스마스!

좋은 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지내온 한해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시는 연말 되시길 바랍니다.

새해에도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31,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의 사랑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고, 매일매일 건강하세요.

†─ 축 ── ☆

아기예수

탄생하신 날

32,즐거운 성탄절을 맞이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33,성탄절을 맞이하여 귀 가정에 항상 즐거움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되시길 기원합니다.

34,올해에도 가족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35,즐거운 성탄절을 맞이하여 늘 가정에 웃음꽃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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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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