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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예배 인도  기도

 

 


1. 시작 하는 기도

(성경구절 읽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헛어 졌던 사랑하는 성도들이 멀리서 가까이서 주님의 전으로 달려 나오게 하셔서 예배드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배가 복된 예배로 드려지게 하옵소서,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 영광받아 주시옵시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소원을 응답받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는 주님을 모르시는 분은 예수님을 만나는 결단의 시간과 성도들에게는 새 힘과 용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한 드림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식하게 하옵시고,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밝은 마음 친밀한 교제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의 예배가 아벨의 산제사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과  솔로몬의 일천번제와 같이 하나님께 응답받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며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 설교 말씀전 기도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여 운준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는데 오늘 그런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잘 막힌 못과 같이 우리 심령에 심겨져서 잎나고 꽂이 피어서 60배 100배의 결심이 맺게 하옵소서.  오늘 이곳에 구원받지 못 한자가 있으면 구원해 주시고  연약함과 방황함하는 분이 있다면  치유해 주셔서  믿음에 생활에 새로운 출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옵나이다.  아멘

 


3. 헌금 기도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주님  오늘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가 드림으로 복 된자가  된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뿐만아니라 오늘도 시간을 드려 예배하며  몸을 드려 헌신하고, 재능을 드려 봉사하고, 물질를 드려 헌금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헌금을 드림은 우선순위가 확정되었으며 땀과 감사의 표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드린 한분한분 위에 하나님의 손길이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특별히 감사의 예물을 드린  00분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고 기도응답과 평강과 가정의 행복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그리지 못한 분까지 기억하시고 같은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 끝기도(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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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설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데살로니가후서 1장 3∼5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 때 세상에만 속한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선택이 가능합니다. 이는 세상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삶입니다(마 16:18).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빛이 되는 삶입니다(벧전 2:9).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 삶입니다(고전 1:18).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오직 이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 모두를 축복의 자리로 초청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뻤고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통치가 그들에게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이들의 믿음이 발전한 것에 감사했습니다(3절).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환난의 시기는 믿음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속단합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어려움을 통해 믿음의 성장을 이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세상에서 직면한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현혹되지 않고 하나님께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삶을 보호하시고 마침내 가장 선한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에게 연단의 시기는 역설적으로 절망이 아닌 믿음이 자라는 절호의 찬스가 됩니다.

다음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서로 풍성하게 사랑하는 것을 감사히 여겼습니다(3절). 많은 이들이 사랑은 평화의 때에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값싼 사랑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값진 사랑은 어려운 시기에 등장합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플 때 깊은 가족애가 생겨나고, 나라가 외세 침략을 당할 때 백성들의 깊은 애국심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박해와 환난은 서로 더 풍성한 사랑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됐습니다.

바울은 끝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의 자랑이 되는 것에 감사했습니다(4절). 바울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서 세상을 능히 이기고 있는 열매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되 자신의 시민권이 우선적으로 하늘에 속했다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빌 3:20). 그래서 세상보다 하늘의 법을 따릅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그 나라의 영광을, 불의가 아닌 정의를, 받기보다 주기를 기뻐합니다. 정욕이 아닌 성령이 인도하는 삶을 누리며 세상의 자랑이 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삶은 오늘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요청됩니다. 500년 전 10월 마지막 주간,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외치며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각자 소명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정체성을 굳건히 붙잡을 때입니다. 신자는 결코 세상에 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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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이 넘는 노인이 되는 연습  그리스도인의 가정   
 

-- 어느 한 미국 할머니 집을 방문하고 나서 --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대에 접어 들고 있다. 영아 사망, 교통사고 등을 포함해서도 그 정도 수치라니, 이제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노인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노인이 될 준비를 잘하고 있는가?  이것은 단지 저축을 잘 하여 여생을 편히 보낼 준비를 하라는 질문은 아니다. 노인으로서 정말 존경을 받을 훈련을 제대로 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경로사상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에도 특히 그러하다. 노인들은 코메디 프로에서 멸시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오히려 노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존경을 받을 훈련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나이 그 자체가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게 하여(대표적으로 존대어), 나이가 들면 자동적으로 존대를 받게 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서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우러나오게 하는 훈련은 잘 못하는 것 같다.

지난 주 나는 이곳에 사는 룻이라고 하는 독신 할머니를 방문하였다. 내가 미국인 교회 다닐 때, 친절하게 잘 대해 주신 분이다. 이제 나이가 80을 바라 보는 분이시다. 아직, Nursing Home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다. 수퍼마켓에서 만났는데, 소변을 조절하지 못하여 기저귀를 찰 정도이지만 아직까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여, 남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셨다.  만남 김에 한 번 방문하고 싶다고 하여, 그 다음날 2시 쯤 갈 것이라고 약속을 잡았다.  그 다음날 1시 45분 쯤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2시 20분 쯤에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간에 맞추어 도착을 하였다. 20분 늦은 이유는 그곳에 도착하여서야 알 수 있었다. 룻 할머니는 머리를 드라이하여 머리를 단정히 가꾸어 놓았고, 옷도 화사한 것으로 갈아 입고, 화장도 진하게 한 후에 우리 가정을 맞을 준비를 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우리 아이 셋 모두를 위해서 선물을 하나씩 준비 놓았다. 처음, 할머니에 어색하였던 아이들도 선물을 받으니 금새 친해졌다.  큰 딸아이의 생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케이크와 간단하 다과도 친히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찍어 두었던 우리 아이들의 사진들도 모아서 주었다. 80 먹은 할머니의 집이지만, 우리나라 신혼 방보다 더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70이 넘게 되면, 죽을 준비를 한다. 그 중에 하나는 자기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변호사를 선임하여 유언장을 작성한다. 자식 중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아니면, 유산을 물려주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교회, 학교, 사회단체, 장학금 등으로 기부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교회는 나이든 분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그들에게 잘 대해 주어야, 교회에 기부하는 액수도 많아 질 것이기 때문이다.

룻 할머니를 방문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인가?   나이든 사람들은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왜 존경을 받지 못하는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기성 세대들이, 모두 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도덕성에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탈법과 편법이 지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고, 쓸데없는 권위로 합리적인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이든 사람이 왜 존경을 받아야 할까?  나이 자체가 많다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들의 의견이 왜 경청되어야 할까?  단순히 경험이 많기 때문일까?  중요한 것은 나이가 많다는 자체가 아니라, 나이를 어떻게 먹었느냐일 것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나이 든 사람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에 대한 증인이다.

룻 할머니의 경우,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분은 특별히 열심있는 성도는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성도에 지나지 않았다. 예정과 부활의 확신 속에서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 속에서 참으로 신앙인으로 마지막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이곳에 있는 은퇴하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한결같이 느낀 것은, 비록 음성은 약하지만, 젊은 목사들 보다 성경 해석과 주석에 있어서 훨씬 탁월하다 것이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 은퇴하신 목사들이 설교를 들어 보면, 성경 해석 보다는 자신의 옛날 경험담을 무용담 비슷하게 하는 것과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나이가 들 수록, 노인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자신의 옛날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다 깊은 체험과 확신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젊은이들에게 존경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도 노인 사회에 접어 들었다. 아무리 젊었더라도, 어떻게 늙어야 할 지, 어떻게 노년을 보낼 지,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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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신다!  (감사한 마음)

 

제목 :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신다!

 

8:7-18, 17:11-19, 고후9:6-15

 

우리가 행복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마음에 기쁨

 

이나 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감사한 마음이 없는 행

 

복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감사

 

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순간 행복하다는 느낌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마음은, 그 마음에서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가질 수 없는 마음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욕심을 버

 

려야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럴 때에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집 디자이너 일을 하고 있는 노미숙이라는 분이 어느

 

잡지에 올린 글을 읽어 봤습니다.

 

이분은, 남편의 실직으로 인해서, 네 살 된 아이를 어린이

 

집에 맡기고 생활전선에 직접 뛰어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꿈

 

을 안고 결혼했는데, 이제는 그 꿈이 올라갈 수 없는 높은 나

 

뭇가지에 걸려버린 것처럼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피곤하게 살다보니, 이런 일 저런 일로 남편과 자

 

주 말다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남들에게는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써 씩씩한 척하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일하고 일터에서 만난 40대 여성

 

을 통해서, 그녀는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

 

. 이분이 일하던 곳은 보건소였는데, 이분이 보건소에서 만

 

난 그 40대 여성은 혼자 힘만으로는 도저히 밖에 나갈 수 없

 

기 때문에 항상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여성은 1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온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혼자 앉아 있을 수 없어서,

 

간병인이 24시간 돌봐주어야 했습니다. 노미숙 씨는 그 여성

 

에게 지금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

 

, 그 여성이 말하기를 걷고 싶어요. 아주 조금씩이라도 걸

 

어서 집 앞을 왔다 갔다 할 정도만 되면 정말 소원이 없겠어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노미숙 씨의 코끝이 찡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상태로 봐서는, 그녀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여성이 바라는 그 소망은

 

지극히 소박한 꿈이었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이 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소

 

망이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노미숙 씨는, 걷는 것, 보는 것, 먹는 것, 숨 쉬는

 

, 이런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

 

. 그런데, 40대 여성이 간절한 눈빛으로 걷고 싶어요.”

 

라고 말하자, 그 말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니, 40대 여성에 비해서, 노미숙 씨는 너

 

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

 

는 그가 누리고 있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누리지 못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 여성의 처지에 비하면, 노미숙 씨가 현재 괴로워하고 있

 

는 문제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너무나

 

하찮은 문제라서, 그런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

 

러운 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걷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그 40

 

여성의 간절한 외침을 떠올리곤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에베소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5:20)’

 

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5:18)’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처지에 있든

 

, 아니면 여유롭고 넉넉한 형편에 있던지, 어떤 형편에 있

 

든지 간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려

 

, 우선 감사의 씨를 열심히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씨가

 

싹이 트고 자라서 102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

 

.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감사할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리고 불평과

 

원망을 많이 하게 된다면, 그 불평과 원망이 불행의 씨가 되

 

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불평하고 원망할 일이 더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불평

 

과 원망의 가시덩굴과 엉겅퀴가 무성할 경우, 가뜩이나 연약

 

한 감사의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말하기

 

씨앗을 적게 뿌린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린 자는 많

 

이 거둔다.’고 하면서 진정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베풀어주시고 풍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을 사랑하

 

신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시

 

고 또 풍성하게 주신다. 그래서 그가 필요한 것을 다 채울 수

 

가 있고, 풍성하게 되며, 그 남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는 것이다(고후9:7-8)’

 

요컨대,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자신이 풍족하

 

게 살아갈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남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면서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

 

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곡간에 곡식이 넘쳐나도 늘

 

가난한 생활을 면할 수 없습니다. , 다른 사람과 나눠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통장에

 

잔고에 쌓여 있어도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

 

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은 재산이 아무리 넉넉해도,

 

제로는 늘 가난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이

 

주신 덕분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줄 수 있는 것이

 

.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 그들은 감사하여 하

 

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

 

들의 감사가 넘쳐흐르게 하는 좋은 결과를 낳게 해준다(고후

 

9:11-12)’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한 사람의 감사가 또 다

 

른 많은 사람의 마음에서 감사를 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

 

사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말하기를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습

 

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라는 것입

 

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형편과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

 

, 그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언제

 

나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

 

. 그런데, 우리가 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참으로 부족하고 허물

 

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처럼,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면, 혹시 일이 뜻대

 

로 잘 풀리지 않더라도 그다지 불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경우, 사탄의 세

 

력이 아무리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고 싶어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이 잘 안 된다고 해

 

서 불평을 하거나 원망할 때에는, 마귀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은 사람은, 어김없이 사탄의

 

밥이 되어, 그 심부름꾼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신명기 8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

 

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모세가 그의 백성에게 일러준 교

 

훈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그들이 그 땅에서 어떤 자세로 하나님

 

을 섬겨야 할지에 대해서 가르쳐준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서 살면, 그곳에서 그들은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 없이 풍족하

 

게 먹고 살면서 행복한 인생을 지내게 될 텐데,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정확하게 잘 지켜야 한다고, 모세는 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하게 될 가능성이 많

 

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죄에 빠지는 경우는, 그 형편이 어

 

렵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을 때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신상 아무 문제가 없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면,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

 

며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

 

로 사람들은, 그 형편이 여유롭게 되면, 자신이 잘나서 그렇

 

게 된 줄 착각하고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백성이 그렇게 될까봐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지어 행복하게 살면

 

, 소 떼와 양 떼도 불어나고, 은과 금도 많아지고, 여러분의

 

모든 재산이 많아졌을 때, 여러분은 절대로 교만해지지 마십

 

시오. 그리고 그럴 때, 여러분의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으

 

,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합니다(8:12-14)”

 

모세는 17절에서 다시 한 번 거듭 말하기를 여러분은 아

 

무 탈 없이 잘 살게 되더라도 이 모든 재산은 내 손으로 일

 

해서 모았고, 내가 잘나서 부유하게 되었다.’하고 착각하지 말

 

.”고 경고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경고한 것도 결국은,

 

람이 그처럼 착각하거나 교만해지게 될 경우, 반드시 사탄이

 

찾아와서 그런 사람을 넘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베풀어주신 은혜라 생각하고,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우리의 감사가 넘쳐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여유까지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교만에 빠지

 

게 될 경우, 거의 100%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시험에 빠지면, 우리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고, 아울러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와 고통

 

을 안겨주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2.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어려운 이

 

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소설가가 가장 좋은 것은 다 공짜다.’라는 제목으로

 

월간 좋은생각’ 12월호에 기고한 글을 읽어봤습니다.

 

이분이 지난봄에 하와이에서 두 달 정도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와이에서의 생활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말한다

 

, ‘하와이의 가장 좋은 것은 다 공짜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텔에서의 생활을 비롯하여, 맛있는 음식이나 쇼

 

핑 등은, 하와이 관광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달콤한 공기, 화려한 꽃과 나무

 

, 맑은 바다와 수많은 물고기 등. 이처럼 좋은 모든 것은

 

다 공짜였다는 것이죠. 이런 것은, 그 누가 그만 보라고 간섭

 

을 하거나, 봐서는 안 된다고 금지시키는 일도 없습니다.

 

래도록 감상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공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댓가 없이 모든 사

 

람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하와이에만 그런 공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글쓴이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보니,

 

리나라에도 그런 공짜가 너무나 많더라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아침에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붉은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주 멋

 

진 광경을 구경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조금만 더 일찍 일어

 

난다면, 동녘에 붉은 노을이 지면서 동트는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멋있고 황홀한지 모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공짜로 얻어서 살고 있는 것이 얼

 

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임플란트를 하시는 분들이 많은

 

, 임플란트 하나에 23백은 주어야 하는 줄 알고 있습니

 

. 그런데, 우리는 오래 전부터 돈 한 푼 안 주고서도 많은

 

치아를 제공받아 살고 있습니다. 모두 28개이니까, 적어도

 

5600만원치를 공짜로 얻은 셈입니다. 사랑니까지 따진다면,

 

모두 6400만원 치입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우리가 하나

 

님께로부터 공짜로 얻은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가 어쩌다가 먹는 물까지도 사먹게 되는 세상이 되었

 

지만, 아직 공기만큼은 돈 한 푼 내지 않고서도 무한정 호흡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공기만큼 귀한 것은 이 세상에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기는 공짜입니다. 저는 그래서

 

아직도 가장 귀한 것은 공짜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공기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

 

사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공기가 귀하다고 해도, 그 공기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공기가 귀한 줄을 모르고 지

 

낼 것입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믿음만큼 더 귀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

 

이지 못한다면, 믿음이 귀하다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의 말씀을 보면, 아주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사할 줄 알게 될 경우, 주님의 구

 

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나병환

 

자 열 사람이 다가와서 자신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호소했습니

 

.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주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

 

한테 가는 도중,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와 큰소리로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하다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사람

 

밖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시고, 주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한 그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구원했다.’는 말을, 어떤 번역본에서는 낫게 했다.’라고 번

 

역했습니다. 분명히, 나병환자들은 그 이전에 다 깨끗이 되었

 

는데, 다시 돌아와서 감사하다는 말을 한 그 사람에게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전인적(全人的)인 치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여겨

 

집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의 그 몸만 깨끗하게 된 것이 아

 

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깨끗하게 되어서 진정한 구원을 받았

 

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전인격적(全人格的)인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전인격적으로 구원을 받

 

도록 노력합시다. 그렇게 되려면, 언제나 항상 감사한 마음으

 

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게 되든지,

 

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에 진심으로 항상 감사

 

함으로써, 지금보다 더욱 풍성한 인생이 되어 살아갈 수 있기

 

,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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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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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1.들어가는 말


교회는 경건한 신앙인의 집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며 갱신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공동체는 '공동 체로 계신 하나님'을 닮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썼던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혼자로 계신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인들의 하나님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로 계시는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교회, 즉 친교 혹은 사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더불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표현하니까, 교단의 어떤 분은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좌익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셨는데, 본래 이 용어는 개인주의와 대립된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 용어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와 동일한 어휘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단순하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공동체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면, 이 때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적 민주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유사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늘 불완전한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한 사회체제나마 이를 수용하고 신앙의 눈으로 늘 이를 개혁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양식입니다. 또 본인은 교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이런 각도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사귐'이라고 불립니다.

 

2.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 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이 세계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세워지고 경험되는 영원히 현재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 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반영(反影), 복사(複寫), 거울, 즉 피사체(被寫體)입니다, 교회는 그 나라의 여명(黎明), 전조(前兆)이요, 그 나라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입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신앙과 희망의 대상인 하나님의 나라는 1.정치적 독재-억압이 없는 민주주의적 정치, 2.경제적 독점-착취가 없는 사회주의적 경제, 3.차별-소외가 없는 평등주의적 사회, 4.자연의 지배-착취가 없는 공생주의적 생태계, 5.죄책감과 심판과 무의미로부터 해방된 하나님과의 교제 안의 영원하고 복된 생활을 지향하는, 성서의 중심되는 구원개념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 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 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사랑과 희생의 능력으로써 교회를 통치 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새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창설자는 능력있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를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도 교회는 여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택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충설명: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임재)하는 곳 혹은 형식은 1.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도적 생활(마태 28,18 이하), 2.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떼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 공동체(고전 11, 23 이하), 3.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사귀고 예배하는 형제-자매적 공동체(마태 18, 20), 4.헐벗고 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곳(마태 25,31 이하; 교회 밖의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익명적 그리스도인!), 5.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능력으로써 충만해진 그분의 몸, 하나님의 대성전이 된 우주(골로새서, 에베소서)입니다.


3) 교회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이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성령 안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부르시고 모으신 것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 속에는 언제나 성령도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신약성서 시대에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셨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얻고 구체적인 모습, 즉 '성령의 교제'라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동체 의지(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선택)에 있고,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 사(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새로운 백성의 선택)에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출발점은 바로 성령강림(오순절 사건과 선교적 파송)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선사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를 생기있고 활기차고 능력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두운 거짓 영들의 한복판에서 참 증인, 세상의 빛과 소금, 변화의 누룩으로 만드십니다.


보충설명: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과 차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들 간의 구분은 존재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은사가 있는데, 1.'선포의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가 속해 있고, 2.'봉사의 은사'에는 병고치는 자, 사랑을 베푸는 자(집사)가 있고, 3.치리의 은사에는 감독(장로)이 속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심지어 고난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남 모르는 사랑의 행위, 기술적 봉사, 결혼, 순결(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적 삶) 등도 은사로 인정됩니다.이처럼 주님이 부르신 자에게는 모두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독점이나 획일화, 횡포나 지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것대로,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과 그 은사들의 코이노니아(사귐, 교제), 즉 카리스마적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자신 안에서 이미 공동체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각기 교회를 이루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듯이, 이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 의 몸-성령의 교제가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이룹니다.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주로 강조해 왔고, 개신교 회의 대다수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성령의 교제'를 특히 강조해 왔습니다. 이 세 가지 교회론의 공통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하 나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만, 각기 독특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역사성-시간성-세상성을 나타내고, 2.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영원성-공간성-구별성을 나타내며, 3.성령 교제는 교회의 구체성-사회성-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하며,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2.그리고 교회는 시간대(성부 시대- 성자 시대-성령 시대 혹은 구약 시대-신약 시대-교회사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공간성(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일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지니며,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3.교회의 사명


교회가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해야 하는 역할, 임무 혹은 사명과 봉사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이 땅에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이 증언으로 요약되며, 교회의 모든 봉사는 이 증언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증언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와 치유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듯이, 교회도 말과 행위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교회가 말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찬양, 설교, 교육, 전도, 선교 및 신학(6개)을 포함시켰고, 행위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기도, 목회상담(영혼치유),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생활, 봉사, 예언자적 행동 및 친교(6개)를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12개). 그러나 본인은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지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사명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먼저,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바로 세상에서 불러 모여진 자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도의 교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받아 모인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런 모이는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은 예배와 찬양, 설교, 교육, 신학, 목회상담 및 친교입니다(6개).

그리고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결국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남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기능에는 기도, 전도, 선교, 봉사, 모범적인 생활 및 예언자적 행동이 있습니다(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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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교회  (에베소서 5:25-27)

논  지 : 말씀과 성례로 깨끗해 져서 거룩한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이다.


지난 번에 유난히 추운 날, 제가 음식점에 앉아서 음식을 시켜 놓고는 창 밖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한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음식점을 향해서 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팔장을 꼭 끼고, 꼭 달라 붙어서 걸어 들어 오길래 젊은 사람들처럼 왜 저렇게 유난스러울까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그 연배 되시는 분들을 보면, 부부라고 해도 같이 팔장을 끼지 않고, 한 1-2 미터씩 떨어져 다니곤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보면 젊은 사람들은 꼭 붙어 앉지만, 연세가 많은 분들은 r그렇게 꼭 붙어 앉질 않은데, 이 부부는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니까 부인이 몸이 건강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이 좀 붓고, 걸음걸이가 완전치 못해서 남편이 부인을 부축하느라 꼭 붙들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식탁에 와서도 의자를 빼서 앉히고 외투를 벗어서 갖다 걸면서 남편이 아내의 시중을 들면서 잘 돌보는 아름다운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까 흐믓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보통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시중들며 살아가는 모습은 많이 봅니다만, 남편이 아내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잘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경우를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25절 이하의 본문 말씀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희생적으로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할 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말씀합니다.

가. 피로 세운 교회(25)

1.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데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5).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한 이 사랑을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 무제한적인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렇게 귀한 기관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을 내 놓기 까지 사랑한 것이 바로 교회이고, 하나님께서 너무나 소중히 여기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관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기관들과 교회하고는 세워진 건립 배경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기업, 많은 기관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기관들과 교회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교회를 사랑하며, 잘 세우며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교회를 위하여 주셨는데, 그렇게 목숨을 내놓기까지 자기를 주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교회가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로 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 놓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

1. 27절에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티와 주름과 흠이 없이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가 될 때에,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란 찬란하고 아름다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아내가 남편 앞에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서게 되고, 신부가 신랑 앞에 찬란하게 아름다운 여성으로 서게 되는 것 같이, 그래서 남편이 자기 아내를, 신랑이 자기 신부를 볼 때에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는 것 같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찬란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서게 될 때에 우리 주님께서 사랑스럽게 그 교회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라는 것은 티나 주름, 흠이 없이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여야 한다고 본문 말씀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신부가 결혼식을 준비할 때에 준비해야 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신부가 결혼을 위해 준비하는 항목을 보니까, 피부관리, 맛사지, 바디케어, 화장도 하고……  이 모든 것들이 하루에 다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여러 날 걸려서 많은 돈을 드려서 해야 합니다.  티나 흠이나 주름이 없이 신랑 앞에 아름답고 깨끗하게 서기 위해서 자신을 그렇게 단장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지하철을 타고 어디를 가는데, 한 역에서 젊은 여성 두 사람이 탔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여성 두 사람이 타니까 얼마나 튀는지 지하철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로 옷차림과 화장이 굉장히 요란했습니다.  그 중의 한 여성은 가죽잠바 같은 번쩍번쩍한 잠바를 입었는데 아주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앉자마자 좀 떠들더니 그 다음엔 졸기 시작했습니다.  둘 다 고개를 숙이고,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거리며 조는데 처음 얼굴을 봤을 때는 립스틱이 굉장히 화려하고 강렬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립스틱이 고개를 숙이고 졸기 시작하니까 잠바에 묻고 옆으로 번지고, 잠바에 묻었던 것이 또다시 뺨과 턱에 묻어서 얼굴 전체가 볼쌍사납게 되었습니다.  제 자리에 묻으면 아름답지만 그러나 엉뚱한 데에 묻으니까 얼마나 볼쌍 사나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흠과 티가 없이 깨끗하고 단정해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3.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양은 흠과 티가 없이 가장 건강하고 완전한 것을 드려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도 흠이나 티나 주름이 없이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여야 신랑되신 우리 주님 앞에서 아름다운 교회, 영광스러운 교회로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무슨 흠과 티가 있을까요?  교회에도 흠과 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교회에 있는 흠과 티 가운데 하나는 영적으로 게으른 것입니다.

영적으로 게을러서 모이기를 힘쓰지 않고, 헌신과 열심이 약해지면 그것이 흠과 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시고 처음 행위를 다시 가지라고 책망하셨습니다.(계 2:4)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책망하시기를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계 3:15,17)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처음 사랑과 처음 열심이 있었습니다.  덥기도 하고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처음 사랑과 처음 열심이 약해졌습니다.  교회가 예배하는 일이나 기도하는 모임, 성경 공부하는 모임, 전도하는 모임, 구역모임 등 이런 각종 모임이 소홀해지고 게을러지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흠과 티가 되는 것입니다.  열심이 없고 헌신과 희생이 약해진 교회는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교회의 흠과 티가 될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이 교회 안에 흠과 티가 됩니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흠과 티가 되어 그 교회는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즘에도 작은 교회는 그렇습니다만 교회가 작고,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에는 추구할만한 권력이나 명예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희생과 헌신만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직분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큰 희생이고, 큰 헌신이고, 큰 고생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커지고 재정적으로 넉넉해지면 교회 안에 추구할만한 권력과 명예가 생깁니다.  뭔가 그럴듯한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과 헌신은 약해지고 점점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의 모습이 더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에 이런 흠과 티가 생기지 않도록 경계하고 늘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로 서야 합니다.   이런 흠과 티가 없이 거룩하고 깨끗할 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아름다운 교회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3) 여러분, 교회에 주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도 주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생기는 것이 주름 아닙니까?  주름진 얼굴도 아름다운 얼굴이 있습니다.  우리 어릴 때 가졌던 기억에, 우리 할머니는 주름이 자글자글 많은 얼굴이지만, 아름다운 얼굴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한경직 목사님 같은 어른은 그 얼굴에 많은 주름을 가졌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경륜과 성숙한 인격과 인품을 보게 되고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에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성숙한 신앙과 인격을 가진, 주름진 얼굴을 가진 성도들이 우리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름진 얼굴도 아름답습니다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주름진 보기 싫은 얼굴도 있습니다.  완고하고 고집이 세고 심술이 느껴지는 얼굴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주름이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신부가 주름이 있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 그러나 주름이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기 위해서 신부들이 화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이 들어도 주름을 없애기 위하여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의 주름이라는 것은 역사가 오래되면서, 완고하고 경직되고 텃세가 심한 교회가 되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주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책망하시기를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생명력이 다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생명력이 없어지고,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완고하고 경직된 모습으로 그대로 있으면 그 교회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영광스러운 교회라는 것은 흠이나 주름이나 티가 없는 깨끗한 교회가 바로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열심 있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영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교회가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아름다운 교회, 영광스러운 교회로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 영광스러운 교회를 만드는 방법(26)

26절 말씀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광스러운 교회로 만들어 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 영광스러운 교회를 만드는 방법은 말씀과 성례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깨끗하게 씻는 세제, 아름답게 단장하는 화장품이 말씀과 성례라는 것입니다.

1.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고 정결하여(시19:8,9)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에, 죄 가운데 있던 사람이 자기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내가 죄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고,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고 정직하여(시19:7,8), 우둔한 사람이 지혜롭게 되고,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깨끗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성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 위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이나 제도나 법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 위에 서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토론이나 행사, 사업 계획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 위에 서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집회와 회의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의논과 토론과 계획을 세울 때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견해, 내 말, 내 계획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것인가 늘 돌이켜 보고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진리 위에 서야만 그 교회가 거룩한 교회,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성례 – 세례, 성찬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는 두번째 방법은 성례입니다.  우리 신교에는 성례를 세례와 성찬 두가지로 얘기합니다.  우리 성도는 세례 받으므로 죄 씻음 받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에 신앙고백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생명과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 받은 확신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칩니다.  세례교육을 받고, 문답을 하고, 예배시간에 세례식을 거행합니다.  세례교육을 할 때에 성경지식도 가르치고, 교회제도나 헌법도 가르칩니다만 그러나 세례 교육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신앙고백 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문답할 때에도 목사님, 장로님들이 여러 가지 성경지식, 교회 생활에 대해 문답을 합니다만 이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인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점검이 되고, 세례식을 하게 되는데, 이 때에 세례 받을 사람들이 일어나서 제가 서약하는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역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을 모든 교인들이 모인 공적인 자리에서 고백하는 것이 세례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고, 거룩한 교회를 형성하는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성찬에 참여하면서 자기 신앙을 유지하고 또 강화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례 받고 거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성찬이 있을 때 마다 빠짐없이 참여하여 그 성찬을 통해서 자기 신앙을 유지, 강화하고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장하는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에 보이는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죄가 생각나고 회개하고 더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공동체가 모두 깨끗하고 거룩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우리가 성찬식을 월 1회 거행하기로 했습니다.   주일 낮에 2회, 찬양 예배시 10회를 합니다.   이런 성찬식에 우리가 세례교인으로서 빠짐없이 참여하여 그 성찬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더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보통 선교단체 같은 곳에서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세례나 성찬을 하지 못합니다.  선교 단체에서는 말씀만을 가지고 양육합니다.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균형 잡히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라디오나 TV, 인터넷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하는 분도 있습니다.  혼자서 성경을 읽고, 혼자서 설교를 듣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양육 받을 뿐만 아니라 성례로 양육 받아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잘 이루어야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로 인해서 우리가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가 되고, 우리 주님 앞에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주시기 까지 희생하시고 헌신하면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열심과 헌신이 약해지게 되면,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면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생명력이 쇠잔해 지면 찬란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말씀과 성례로 교회 안에 흠과 티와 주름과 이 모든 것들을 다 깨끗이 씻어 버리고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렇게 깨끗한 교회, 거룩한 교회로 서게 될 때 우리 주님 앞에서 아름답고 찬란한 교회, 영광스러운 교회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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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신앙교육  (신6:1-9)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명기 6:1-9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관심은 우리 부모들이 어느 나라의 부모보다 더 뛰어납니다. 과거에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의식주 문제만 해결해주면 부모 된 책임을 다 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니까 이제는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 중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교육입니다. 과잉 교육열로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자녀교육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특히 신앙교육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는 것입니다.

1. 나는 내 자녀의 부모인가?

좀 쌍스러운 표현입니다만 '저것도 에미냐' 혹은 '저것도 애비냐'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식을 낳은 부모이긴 하나 더 이상 부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더 이상 부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부모이나 부모가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을 낳고는 버리는 부모가 있습니다. 물론 자식을 버려야 하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어떻게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식을 버릴 때에는 이미 부모임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이면 마땅히 자기 자식을 돌보고 사랑하며 마음껏 자라도록 뒷바라지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부모, 자녀들을 잘 돌보지 않는 부모, 낳기는 했지만 그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모를 진정한 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낳은 것만으로 그 책임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된 우리 모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는 진정 부모입니까? 지금까지 자식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부모다운 부모였는가?

사람은 자기 자식을 버리기도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버리시지 않습니다(시27:7-10). 하나님은 절대로 그의 자녀를 버리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2. 내가 낳은 자식은 내 자식인가?

부모가 자식을 낳았어도 자기 자식이 되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바로 북한입니다. 북한은 부모보다도 수령이 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수령의 자식으로 교육을 시킵니다. 북한은 제도적으로 수령의 자식이 되지만 우리의 상황 속에서는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도 부모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속만 썩이므로 자식이 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치 못된 청개구리처럼 부모의 뜻에 거역하는 자식 말입니다. 그런 자식 때문에 부모는 평생 속을 태웁니다. 어떤 자식은 부모를 우습게 여기는 일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학대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요즈음 효도관광이다 뭐다 해서 부모와 함께 여행을 가서는 부모는 남겨두고 자식만 몰래 돌아오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누구를 믿고 살 것입니까? 여러분!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과연 내 자식입니까? 혹 속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진정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3. 육의 혈통의 관계

육의 혈통을 이은 자식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육의 혈통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품안에 키울 때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워놓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들 합니다. 자식이 품안에 있을 때에 부모고 자식이지 떠나면 더 이상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지만 언젠가는 육의 혈통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미국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보모가 자식을 잘 돌보지 않으면 그 부모는 부모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법적으로 자식을 보호하게 됩니다. 부모가 그 역할을 잘하지 못했을 때에 법이 육의 혈통을 끊어놓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적인 혈통만 맺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영적인 혈통을 이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육의 혈통을 끊으라는 말씀을 했습니다(갈4:22-30). 즉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육의 혈통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육의 혈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영의 혈통입니다.

4. 영의 혈통관계

'일 년을 내다보고 씨를 뿌려라 십 년을 내다보고 나무를 심어라 백 년을 내다보고 자식을 가르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서 영원을 내다보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영원한 농사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역사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이 어느 민족보다도 탁월한 것은 바로 신앙교육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어렵고 힘들 때, 어떤 위기를 맞았을 때 '엄마, 아빠'를 찾는 것은 어릴 때에 먼저 '엄마, 아빠'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가르치면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것은 이처럼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집중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작은 민족이지만 세계를 쥐고 있는 강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은 특이합니다. 어려서부터 선민의식을 가지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신뢰감을 심어줍니다. 부모와 이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신뢰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립정신을 가르치고 훈련합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강한 자립정신을 넣어줍니다. 더 나아가서는 환경을 지배하고 정복할 힘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합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훈련하기 때문에 어디를 갖다 놓아도 잘 적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의 교육의 핵심이요 내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입니까? 우리는 육적인 혈통관계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혈통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녀들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여러분 가정에, 특별히 자녀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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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마땅히 가르칠 일   (잠언 22:6-8)

 

가정은 부부 중심으로 자녀들과 부모님으로 구성되는 사회의 최소단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세포사회입니다. 윌리엄 하킹(William Harking)은 “가정이 없는 곳에는 국가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국가의 경제나 기술이나 모든 제도가 잘되었다 할지라도 가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에 복을 내리시고, 가정에 행복을 주시고, 가정에 세계를 지배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가정을 강조하시고 성경의 가르침도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가정의 위기’를 말하지만 가정이 없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의 관심은 어린이들의 교육과 바른 양육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교육하는가의 교육 주체의 문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은 교육의 내용이며, 그리고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의 교육방법론의 문제로 집약됩니다.

1. 자녀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부모입니다.
어린이들이 가정과 학교와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 배우지만 그 일차적 교육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작가요 의사인 사무엘 스마일스(Samuel Smiles)는 그의 인격론에서 “가정은 사람의 인격을 단련시키는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학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최고, 혹은 최악의 도덕 교육을 받는 곳이 가정이며, 죽을 때까지 이행할 행동원칙을 습득하는 곳이 가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국가나 사회에 주신 것이 아니라, 가정에 주셨고, 가정이 생명의 선물로 주셔서 양육의 책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말에도 “가정이 인간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Allen Paterson)에서 “자녀교육의 일차적 문제는 자녀교육이 아니라,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를 교육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녀를 가르치자’(Andrew Merey)는 책에서 애기가 그 부모를 닮기 이전에, 애기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 앞에서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적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도 모세의 주변환경의 어려움을 감지하고, 거기로부터 모세를 보호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서 큰 인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가정에서 부닥치는 자녀교육의 문제는 양부모의 책임이지만,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책임이 더욱 크고 중요합니다. 가정은 여성의 영역이며, 여성이 자녀에게 절대적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성은 가정의 주인이며, 사무엘 스마일스의 말과 같이 “가정은 여성의 왕국이요, 자녀에게는 백명의 교사보다 훌륭한 어머니가 더욱 가치있다”고 하였습니다.

2. 자녀에게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교육의 교과서는 예수님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인간을 배우고, 그리고 역사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함축되어있는 생명이요, 길이요, 인생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퍼니쉬(Dorothy J. Furnish)는 그의 ‘아이들과 함께 성서연구’라는 책에서 인간발달의 두 요소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 즉 인종, 성과 유전이 있고, 또 하나는 세상에 대처하는 기능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여러 가지는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이나 돈이나 기술이나 명예 권력보다, 그것을 바르게 얻고, 바르게 사용하는 인격을 배워야 하고 덕망을 세우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유치원에 가면 제일 먼저 유치원과 집에 오가는 길을 배우고, 버스타는 법과 내리는 법을 배웁니다. 미국에 가서 영어를 공부 할 때는 지도보는 법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인생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인생의 길입니다. 사회학자 셰퍼(Francis Schaeffer)는 “가정은 인생광야를 달리는 릴레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먼저 인생길을 달리고, 자녀에게 그 바톤을 넘겨주는 릴레이입니다. 유대인의 자녀교육은 신명기 6:4 이하에 기록된 말씀대로 “쉐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교육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외우고, 이해하고, 그 뜻을 깨닫고, 그 교훈을 공부합니다. 거기에 인생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은 곧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요 교육의 중심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3. 예수님의 교육방법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이 배우고 가르치는 방법에는 말이나 글로서 배우는 방법이 있고, 또 모방을 통해서 배우는 방법이 있고, 그리고 자기 스스로 실천하는 일 즉,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시행착오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모범적으로 행하시므로 제자들이 보고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가 친히 발을 씻기시고, 그리고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어릴 때 교육받은 것을 연구해 보면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부모가 성경말씀을 열심히 가르친 것이고, 둘째는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지도하심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옛날의 아브라함 링컨이 그러했습니다. 죠지 와싱턴 대통령이나, 토마스 제퍼슨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부모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주일 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때에 자녀에게도 바른 이해와 성서적 교육과 그 책임을 다시 한번 자문하고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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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가르치고 전하는 교회   (행5:17-32)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셔서 교회가 크게 흥왕하게 하신 역사를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사도들의 사역과 교회의 성장을 위해 베푸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사도들을 도우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주셔서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부근의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데리고 온 수많은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들이 다 낫도록 하셨습니다(행5:16).  그래서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환자들에게 덮이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행5:15).  백성들이 신자들을 칭송하게 되었고,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남녀의 무리가 갈수록 더 많아졌습니다(행5:13-14).

   그러자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하는 사두개인의 당파는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다고 여기고 사도들의 활동을 제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17절).  그들은 이미 그들이 사도들을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할 뿐 아니라, 사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열광하며 따르고 신자들을 칭송하며 그 무리가 날로 커지는 것 때문에 시기심까지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모두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18절).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가두고는 그 다음날 아침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도들에 대한 처리문제를 논의하려고 했습니다(21절).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셔서 아무도 모르게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나오게 하셨습니다(19절)  감옥에서 나온 사도들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21절).  아침에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불러 모은 대제사장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라 했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이 감옥에 가서 보니 사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22절).  그들이 대제사장에게 돌아와 보고하기를 감옥은 든든하게 잠겨있었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었지만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라고 했습니다(23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며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사도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를 했습니다(24-25절).  그러자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사도들을 잡아왔습니다(26절).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운 대제사장은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27-28절).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을 사도들이 듣지 않은 것을 추궁하기도 했지만, 사도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의도하는 바와 그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책임을 자기와 자기의 동료들에게 돌리는 것이 아닌지를 따진 것입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며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 말대로 이루어질까봐 내심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되면 그 귀하신 메시야를 죽인 자가 누구였는지를 따져 묻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입지가 크게 어려워질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 것을 엄히 경고했으며, 그 경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모든 사도들을 잡아가두는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에 대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29절)고 응수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즉 그들이 얼마나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지적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30-31절을 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보내셨고 임금과 구주로 높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덧붙여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32절).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높여 세우신 이 임금과 구주이신 예수에 대한 증인들이고, 그래서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신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사실이고, 이것은 바로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바라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이 말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하는 무리들의 감정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을 뒤따르는 33절은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때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던 바리새인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34-39절) 그들은 그 자리에서 사도들을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설득 때문에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만 하고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기를 금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40절).  채찍질을 당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뒤의 41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42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한 토막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며 또 그 이야기를 자세히 상고하게 만듭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도우심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감옥에 갇혀 교회의 전도사역이 전면적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기이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풀려나게 하시면서 교회를 살리시며 친히 역사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한 일입니다.  사자는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꺼내주려고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가 한 일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감방은 든든하게 잠겨있었고 보초들이 문에서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의 사자는 감방 문을 열고 사도들을 안전하게 이끌어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감방에서 나온 사도들에게 하라고 일러준 일입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이제는 다시 붙잡히지 않도록 멀리 안전한 곳에 도망가서 조용히 숨어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도들에게 성전으로 다시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과 온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이 다 모일 성전 바로 거기에 가서 다시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또 잡혀올 것이 뻔한 거기에 가서 백성들을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신 것은 사도들을 살리시고 편안하게 지내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주목할 것은 박해와 위협에 굴하지 않는 사도들의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 순종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하라는 대로 하면 즉시로 다시 감옥으로 끌려올 것을 알면서도 사자가 하라 한 대로 새벽부터 성전에 가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21절).  두말할 것 없이 그들은 또 잡혀와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27절).  그러나 사도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왜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과 그 문중(행4:5-6)의 경고와 명령에 순종하지 않느냐는 문책에 대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공회에서 채찍질을 당하고서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습니다.  주석가들은 이 때 사도들이 당한 채찍질이 사십에 하나 감한 매였으리라고 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란 한 대만 더 때리면 죽을지 모르는 무섭고 혹독한 형벌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들이 사도들을 죽이고 싶었지만 가말리엘의 권면에 따라 죽이지는 않되 그 대신 너무나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어 다시는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며 전하기를 포기하게 할만하다고 여겨 내린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을 자들로 택하여 세워주셨음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라 하시는 것이면, 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것이라면, 그 어떤 능욕과 고난도 기뻐 받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채찍질에 살이 찢기고 유혈이 낭자했을 몸을 이끌고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의 경고와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쉬지 않고 가르치며 전도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복음이 급속도로 확산된 것은 바로 이러한 사도들의 용기와 순종에 하나님께서 힘을 더해주신 결과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위한 귀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비록 사도들이 놀라운 능력과 이적기사를 행했지만 그것이 그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와 항상 함께하심을 확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자연적인 일을 일으키시면서까지 교회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결코 곤경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교회는 어려움에 처할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믿어야 하며, 환난을 당할 때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는 시련기에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언론, 특히 TV방송들은 기회만 있으면 교회를 비방하고 사회적 공신력을 떨어뜨리느라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 뒤에서 권력이나 반기독교 세력들의 뒷받침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억압하고 옥죄려 해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구해주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미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보장해주셨습니다.  그 대신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전하기를 그치거나 쉬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지켜주시고 교회에 온갖 은사를 주시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저 편하고 안전하게 쉬게 하시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를 얻으나 못 얻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는 일에 항상 최선선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사랑의 삶으로 쉬지 않고 예수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하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그 어떤 박해와 위협에 굴하지 않는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순종함에 있어서 감옥이나 채찍질이나 그 어떤 협박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우리를 택하여 세우셨음을 믿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라 하시는 고난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면 기꺼이 받는 것입니다.  그 일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얻어맞고 피를 흘리게 되더라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비웃고 부끄럽게 여겨도 우리는 그를 부인하지 않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그를 더욱 찬양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담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온 천하에 열심히 가르치고 전하는 우리 모두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확고한 소망으로 삼읍시다.  그리고 우리로 인하여 세상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의 소망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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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15-21 라합의 믿음

 

여호수아서에는 가나안 정복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이 24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중에 여리고 성 정복 역사를 기록했으며(히11:30절), 그 사건 중에서 기생 라합의 신앙을 행함 있는 믿음의 대표적인 모델로 제시했습니다.(11;31절), 이스라엘 군대를 대적하려고 했던,여리고는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사람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라합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구원(救援)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이와 같은 라합의 행함은 참 믿음의 증표(證票)요 증거(證據)라고 성경(聖經)은 교훈(敎訓)하고 있습니다.

 

1.라합은 하나님의 군대를 영접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함락을 위해서 정탐꾼들을 보내었습니다. 정탐꾼이란 오늘날의 간첩으로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은밀히 파견되는 첩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던 중에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의 비밀경찰들에게 쫓기다가 기생 라합의 집에 뛰어들었습니다.(1절), 이때 기생 라합은 그들이 여리고를 함락하기 위해 보내진,정탐꾼임을 알았지만, 영접하고 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어떤 이유로 적이었던 정탐꾼들을 영접했겠습니까? 그녀가 지조 없는 기생이거나 자기 한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민족을 헌신짝처럼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라합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확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한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다"(히11:31절), 고 증언합니다. 그러면 그녀의 영접은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큰 결단입니다. 그녀는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역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8-11절),

 

그녀는 하나님을 "상천 하지의 하나님"(11절),이라고 고백했는데, 이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미입니다. 라합은 그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는 하나님과 자기 민족과의 사이에서 갈등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타락한 자기 민족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 결단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에 대한 영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라합처럼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고 그리스도를 영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라합처럼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결단이 곧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는 유일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2. 라합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영접할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들을 도피시켜 주었습니다. 15절에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도피시킨 일은 민족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요, 국가의 배신자가 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라합이 이스라엘의 첩자들을 도피시킨 일은 발각되기만 하면 중한 벌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가 보안법에 걸려 최고형인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라합은 그 자신은 물론 자기 가족의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보호해 주고 도피시키는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모험은 자신이 택하신 신앙의 길로만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목숨보다 신앙을 더 귀중하게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타락해 가는 세대 가운데서 신앙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참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음을 교훈해 줍니다. 기독교 역사상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분노하는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조그만 손해 때문에 가볍게 신앙을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은전 30에 예수님을 판 유다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은 세상의 허영과 이익 때문에 스스로 신앙을 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도들은 신앙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세상의 위협과 박해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는 경우를 당해도 라합처럼 하나님과 그 나라만을 섬기는 길만을 택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계2:10절)고 명합니다.

 

 3.라합은 약속을 믿고 붉은 줄을 내걸었습니다.

 정탐꾼들을 숨겨 도피시켜 준 대가로 라합이 받은 상급은 세상의 가치로는 계산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라합이 받은 상급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망과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믿음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라합과 그 가족에게 구원으로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시에 정탐꾼들과 맺은 약조를 믿고 붉은 줄을 그 창가에 내리웠습니다. 그 줄은 만일 이스라엘 군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 라합이 첩자와 내통했다는 증표도 됩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그녀와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수6:22-25절), 라합이 믿음으로 내린 붉은 줄이 라합과 그 가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줄이 된 것입니다. 결국 라합이 내린 붉은 줄은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대속의 피에 대한 믿음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은 어린 양의 붉은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죽음의 사자로부터 구원(救援)받은 경험(經驗)이 있습니다.(출12;13절), 마찬가지로 라합은 붉은 줄을 창가에 내리우므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가 라합은 더 커다란 축복(祝福)을 받습니다. 그것은 라합이 다윗 왕(王)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祖上)이 되어 그리스도의 족보(族譜)에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마1: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 사도의 지적처럼 "유령의 믿음"입니다.

 

약2:19.20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고 했습니다. 라합처럼 믿음을 실행하는 성도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축복과 영광을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가장 천한 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라합의 구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아무리 무능하고 가치없으며 천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그의 영광에 참예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라합과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2: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하며, 행위는 믿음의 증거요 열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라합이 행함의 열매를 통해 그 믿음을 입증하고 큰 축복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의와 진리를 행하는 산 믿음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라합이 내걸었던 붉은 줄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믿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장자의 재앙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죽음을 모면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믿는 이는 영생 구원을 얻게 됩니다. 라합의 행함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라합은 비록 기생의 몸이었지만,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도피시켜 줌으로서 여리고 멸망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을 실행해야 그 축복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믿으면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행위로 옮기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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