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설교자들에 주는 조언
Advice for Young Preachers
Theodore L. Cuyler(1822-1909) / 김병훈 역
테오도르 커일러는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으로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라파예트街 장로교회의 목사이며, 진리의 깃발사에서 출판한 ‘먹구름 사이의 하나님의 빛(God’s Light on Dark Clouds)’을 포함한 여러 베스트셀러의 작가이다.
시작하는 말
프린스턴에서 보냈던 지난 3년 세월 동안 내게는 즐거움과 유익이 많았다. 할 수만 있으면 자주 밖에 나가 이웃에 있는 학교와 집들에서 작은 모임을 갖고 말씀을 전했다. 이것은 연습을 하기에 매우 유익한 방법이었다. 젊은 설교자라면 반드시 자신의 목소리가 어떠한지에 대해 익숙히 알아야 한다. 즉 만일 본래 목소리가 힘이 없다면 청중들 앞에서 소리를 내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하며, 그 후에 똑똑하게 전달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젊은 설교자에게는 회중의 규모가 작은 곳에서 실습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공부할 시간을 더 가질 수가 있으며, 사람들 개개인에 대해 친밀하게 알아갈 수 있는 좀 더 좋은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또한 좀 더 작은 규모의 회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처음 책임을 맡게 된 회중은 뉴저지주 벌링톤에 있는 교회로 대략 40가정 정도의 규모였다. 이들 가운데 3, 4가정들은 부유하고 교양이 많았으며, 다른 가정들은 정원사와 마부들 몇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기술정비공들이었다. 그 때 나는 집 끝에 있는 정원사들과 마부들에게 나의 설교를 맞추었고, 교양이 잘 갖추어진 사람들은 나름대로 설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당시 출석하던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 필라델피아의 탁월한 변호사였던 찰즈 촌시(Charles Chauncey)가 있었다. 그는 여름 몇 달을 벌링톤에서 보내곤 하였다. ‘영혼의 고귀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간단하지만 진지하게 전하고 난 뒤에, 집으로 가서 “변호사 촌시는 틀림없이 내 설교를 한낱 정치 집회의 격려사로 생각했을 것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런데 주중에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놀랍게도 내게 말하기를 “젊은 목회자 친구, 지난 주 설교로 인해 고맙습니다. 그 설교에는 아주 훌륭한 두 가지 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단순성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열정이었습니다. 내 법률 사무소에 있는 어떤 학생이 치안판사 앞에서 10 달러 양복 하나를 얻고자 할 때, 만일 그의 열정이 영혼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열정보다 더 낫지 못하면, 내 사무실에서 그 학생을 쫓아낼 것입니다.” 나는 저명한 변호사가 말해준 그 말로 인해 신학교 시절의 그 어떤 공부보다 더 큰 도움을 받았다. 이때 나는 교양 있는 회중들도 글을 모르는 사람들 못지않게 평범하며 단순한 성경의 진리들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숨김없는 열정이 설익은 젊은 설교자들에게 있는 수많은 허물들을 가려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내게 좋은 교훈을 준 목회 초기의 경험을 들어보자. 강도사 인허를 받고 약 2년 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스피링즈의 사라토가(Saratoga of Springs)에 있는 장로교회에 설교 요청을 받았다. 오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기’라는 제목으로, 저녁에는 ‘심판의 날’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다음 날, 마을을 떠나려고 기차역에서 표를 구입하고 있을 때, 그 마을의 빵집 주인이었던 한 평범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어제 모임에서 설교하신 그 젊은이 맞지요?” 그렇다고 답을 하자, 그는 말하기를 “사실, 어제처럼 미안해 본 적이 없었어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묻자, 그는 이렇게 답을 했다. “난 속으로 ‘이제 막 신학교를 졸업한 젊은 친구가 왔구만. 이 친구는 사라토가(Saratoga)의 회중들이 전국 각 지역 출신의 매우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설교 시작한지 10분이 되었을 때, 만일 설교자가 회중들의 영혼을 구원하기에 애를 쓰고 있음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비평의 눈초리들을 잠재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는 영민한 빵집 주인의 말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하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그의 말은 설교학과 관련하여 내가 들었던 가장 심도 깊은 철학이 담긴 교훈이었다. 그 뒤로 나는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그의 말을 인용하여 전했다. 만일 우리 목회자들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복음의 살아있는 진리를 회중들의 귀와 심령에 쏟아 부을 수만 있다면, 회중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기에 급급하여 설교자나 설교의 방식에 대해 불평을 쏟아 부을 시간이 전혀 없을 것이다.
겁을 잔뜩 먹고 강단에 서 있는 설교자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고의 사용여부
이 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완성된 설교와 즉흥적 설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은 가에 대한 끝없는 논쟁이 아니다. 나의 관찰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최선의 규칙은 어떤 규칙도 세우지 않는 것이었다. 각자가 연습을 통해 어느 방법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지를 찾아서 그것을 추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 자신의 장점을 잘 아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법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온갖 노력을 다해야 겨우 즉흥적 설교를 할 수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글래드스톤(Gladstone)처럼 두 발로 꿋꿋이 서서 회중들과 교감을 나눌 때가 설교하기에 최고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목회 초기 몇 년 동안 나는 거의 모든 설교를 미리 작성을 하였다. 이렇게 했을 때의 장점은 젊은 초보 설교자라 할지라도 원고를 조직적으로 주의 깊게 작성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원고 스타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스펄전도 나중에는 강단에서 무엇을 전할 것인지를 단 한 마디도 미리 준비하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설교 원고를 작성해서 그대로 읽은 적도 있었다. 매우 유창한 즉흥적인 설교자이었던 스토르 박사(Dr. Richard S. Storrs)도 20여 년 동안 모든 강론들을 주의를 기울여 작성하였었다. 나의 경우 한 동안 설교의 일부를 먼저 작성한 다음에, 감동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반영하기 위하여 일단 원고를 떠난 후에, 다시 원고로 돌아오곤 하였다. 목회를 한지 삼십년이 지난 후에는 설교를 작성하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단지 몇 몇 ‘제목들’만을 준비하여 그것을 박스터 성경(Bagster's Bible)에 붙여 놓았다. 홀 박사(Dr. John Hall)는 주의를 기울여 원고를 작성을 한 후에, 그 원고를 집에 남겨 두었다. 대영제국에서 최고의 설교자로 인정을 받는 맨체스터의 맥러렌 박사(Dr. Alexander McLaren)도 그렇게 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유창한 설교자인 거스리(Guthrie)는 그의 설교를 완전히 외운 다음에, 경건한 감정을 쏟아내며 설교를 하였다.
설교 준비
나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월요일은 휴식을 취하고, 화요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서재로 가곤 하였다. 설교를 준비하는 자들에게 하루의 가장 좋은 시간은 해가 정오를 지나기 전이다. 이 시간에 사람의 생각은 가장 맑고 활기가 넘친다. 나는 저녁 시간을 지나서 설교를 준비한 적은 열두 차례 밖에 되지 않는다. 저녁 시간에 머리를 혹독하게 굴리는 일은 편안한 밤잠을 방해하기 마련이며 불면증은 우리 뇌의 많은 활동을 상하게 할 뿐이다. 불필요한 방해를 받지 않는 개인시간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나는 서재 문 앞에 ‘매우 바쁨’이란 표시를 걸어두곤 했다. 이런 방법은 시간을 잡아먹는 모든 일들을 차단하는 데에 매우 유익했으며, 다소 중요한 볼 일로 연락해 오는 사람들도 줄어들게 해주었다. 설교 주제는 혹시라도 만일을 대비하여 주로 화요일 아침에 본문을 정했고, 설교의 큰 그림을 그려두었다. 나는 강단에서 전하기에 좋은 주제와 그에 맞는 성경 본문을 다 적어놓을 수 있는 큰 공책을 소지하고 있었다. 또한 모든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스쳐가는 생각들을 공책에 적어두는 것도 매우 좋은 습관임을 알게 되었다. 적어놓은 생각들은 나중에 설교 준비 때 매우 유용한 설교 자료로 사용된다. 이 방법 덕분에 나는 매주 넘치는 글 중에서 필요한 내용을 골라 사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독자들은 ‘본문’이란 단어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아주 장황하고, 신학적이며, 도덕적이고 또한 사회적인 설교문을 준비하고 성경본문 하나를 정하여 그 위에 얹혀 놓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다. ‘내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은 설교자의 생각에서 나온 긴 논문에 그저 명목상 몇 개의 성경 문구를 걸치라는 의미가 아니다. 최고의 설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감 된 무오한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 좋은 설교와 설교 본문 사이의 연관성은 마치 복숭아나무와 그 뿌리 사이만큼이나 중요하다. 가끔 게으른 목사가 이전의 설교를 본문만 바꿔서 마치 새로운 설교인 것처럼 속이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이것은 마치 강아지의 머리를 절단하고 다른 동물의 머리를 붙여 놓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총명한 회중은 그런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경멸할 것이다.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성경의 본문을 뿌리로 하며 기도로 물을 주었을 때 설교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본문의 중심 사상이 설교와 모든 주장의 중심 사상과 일치할 때, 설교의 모든 가르침과 권고는 나무의 몸통에서 뻗어 나오는 가지이며, 설교 전체의 유기적 완성에 통일성과 활기와 영적 아름다움을 부여해준다. 설교의 통일성과 영적인 힘은 주로 영감 된 성경에 담겨 있는 위대한 신적 진리에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성경 본문은 우리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부분이다. 우리 영혼에 성경 본문을 더욱 깊이 파고들수록 설교가 듣는 회중의 의식에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고정된 한 가지 틀에 박히지 않기 위해, 나는 거룩한 성경의 끝없는 다양함을 연구하였다; 성경의 이야기와 성경인물들의 자서전, 기쁨에 넘치는 시편 고백, 그 안에 담긴 심오한 교리의 내용들, 자비로운 긍휼의 마음, 시내산의 우렁찬 천둥소리, 그리고 갈보리에서 나타난 구원하시는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멜로디.
나는 성경의 위대한 주제들을 손에 쥐었고, 30분의 간절한 기도가 두 세 시간의 연구보다도 훨씬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도는 보좌로부터 오는 순간의 영적 깨달음을 이따금씩 내가 작성하던 설교문에 더해주곤 했다.
스스로 진리임을 드러내는 권위의 말씀
주일 설교를 준비할 때 나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란 모든 지식의 총합이었으며 ‘그러므로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은 나의 변함없는 안내자였다. 나는 신학의 가장 참된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가장 새로운 것들의 대부분은 진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한 가지 점에서 나는 많은 형제들이 행하던 습관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단 한 순간도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방어하는 일에 시간을 사용 해 본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성경은 스스로 증거하는 책이라 믿었고, 만일 우리 목사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충실히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돌보실 것이라 믿었다. 우리는 중력의 법칙을 방어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방어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 맨체스터의 맥라렌 박사(Dr. McLaren)는 말하기를, 만일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방어하려고 하는 대신 단순히 사람들을 십자가로 향하게 한다면, 더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옳은 말이다. 많은 ‘변증학’은 종이와 잉크의 낭비일 뿐이다. 설령 변증학 책들이 모두 큰 모닥불에 불로 태워진다할지라도, 빛은(성경) 그 어떤 때보다도 훨씬 더 밝히 비추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에게 주신 강한 요새인 진리에 돌을 던지는 모든 회의론자들에게 답을 주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만일 도비야와 산발랏이 우리를 들판으로 불러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그들의 기준에서 대적한다면 우리의 답은 항상 다음과 같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이다. 내가 그 일을 멈추고 너희에게 가서 너희들의 칼은 그저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이유가 없다.’
나의 젊은 형제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말씀을 전파하라. 너의 마음을 다하여 전하고 여호와의 영의 힘으로 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
예화의 사용
나는 좋은 예화들을 찾아 사용할 때 설교의 효과가 더욱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나, 예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 신중히 주의를 기울였다. 예화가 그저 설교를 아름답게 꾸미는 차원에서 설교 안으로 끌어들여진다면 그것은 마치 쟁기의 손잡이에 꽃다발을 단단히 묶어 놓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꼴이 된다. 예수님은 자주 비유를 통해 말씀을 하시고 여러 실제 사건들을 상기시켜주셨다. 이러한 본을 통해서 중요한 진리들이 예화를 통해 잘 이해할 수 있음을 직접 본을 통해 가르쳐 주셨다. 사건이나 이야기가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되고 교회에서 나눌 수 있는 진지한 내용과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 일에 도움이 될 때, 회중들은 그 예화들을 좋아한다.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되는 한 가지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고, 죄인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워 그들의 영혼을 회심케 하며, 신자들의 믿음을 세우고 정직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일에 더 효과적인 것은 결코 강단에서 어울리지 않는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영혼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할 때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진리의 무기들을 동원하여 사용할 수 있다.
크게 외치기를 아끼지 말라
내 강단 앞에 앉아본 자들은 내가 설교를 할 때 사람들의 귀를 배려하거나 내 목소리를 아낀 적이 결코 없음을 증언할 것이다. 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영적인 포격과도 같은 것이다. 충분히 장전된 탄창들이라도 그것을 밀어 낼 탄약이 부족하면 표적을 맞추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하나님의 사자들의 가장 주된 임무는 그의 강단에서 영혼들을 불러일으키고, 무관심한 자들을 각성하게 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깨우치고, 슬픔에 잠긴 자들을 위로하고,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고, 믿는 자들을 세워가는 것이다. 형사재판에서 변호인은 배심원들의 귀를 완전히 사로잡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자는 어떤 댓가를 치러서라도 들음을 요구하고 명령해야 한다. 그러나 차갑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방식으로 회중에게 전해진다면, 그러한 들음은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에베소서에서 위대한 사도가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을 때, 듣는 자들의 이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의식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설교의 전달이 싸움의 절반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강하게 말한다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표적을 쏘지 못할 것이라면 왜 총을 장전하겠는가? 만일 설교자가 열정과 땀만 있었더라면 큰 효과를 나타냈을 아주 귀한 생각이 담긴 많은 설교들이 졸린 귀에 그저 주저 앉아버리고 만다. 평범한 설교라도 직접적이고 열정적인 전달로 인해 매우 놀라운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뜨겁게 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결코 그의 회중을 뜨겁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자 뜨거운 마음
우리가 강단의 끌어당김(pulpit magnetism)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교묘하여 정의하기 쉽지 않다. 가장 근접한 정의를 내려 본다면, 그것은 설교자가 듣는 자들의 관심을 강화시키고 그들의 주의를 끌어내는 자질 혹은 능력이며,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에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듣는 자들의 마음에 설교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설교자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마음이다. 영혼을 얻는 복음을 전한 거의 모든 설교자들의 공통점은 강단에서의 열정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강단에서 불은 타올랐고, 그 불은 회중의 자리에서도 타올랐다.
내 경험에 의하면 부분이든 전체이든 작성된 설교에서 얻는 것만큼이나 즉흥적으로 전한 설교에서도 종종 영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결과는 물론 회중의 상태에 크게 달려 있고, 회중의 중보기도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겠지만, 핵심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 불세례가 임하게 하는 데에 있다. 종종 한 설교가 아주 작은 인상만을 남기기도 하지만, 똑같은 설교가 또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는 회중을 크게 감동시키고 풍성한 영적 결과를 얻어내기도 한다. 설교자의 전달에 물리적 상황이 약간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죄인들을 깨닫게 하고 회심시키고, 그리스도인을 더 강하게 하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의 가장 큰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다.
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너희의 회중을 심판의 자리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얼굴에 영생의 빛이 비춰지는 모습을 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당신이 영혼의 열정을 설교에 더 많이 쏟아 부을수록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 많은 영혼들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시대는 변해도 설교의 필요나 자료는 변하지 않는다
나의 60년을 되돌아보면 어린 시절 이후로 미국 강단에서 사용하는 방식에 매우 큰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이전 시대의 일반적인 설교자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교리적이었다. 이스라엘의 영적 스승들도 필립스 부룩스(Phillips Brooks)와 더불어 ‘영원처럼 깊은 위대한 진리를 고려하지 않는 행복한 삶을 위한 권고는 사람의 의식을 잡거나 붙들 수 없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지지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죄의 본질과 형벌, 속죄, 중생, 믿음, 부활, 미래의 심판과 같은 깊고 놀라운 주제들을 강력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현실과 함께 앞세워 강조했다. 그들은 죄의 가증함과 죄로 인해 받을 형벌을 강조함으로써 회개할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을 역설했다. 그러한 설교 방식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우리는 개탄해야 한다. 왜냐하면 글래드스톤(Gladstone)이 바르게 언급하였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증상 중 하나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죄에 대한 인식의 쇠퇴와 감소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설교자들 대부분에게서 보는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설교가 주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깨우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죄의 사악함을 강조하고, 구원의 길을 설명하고, 기독교의 주장들을 제시하고,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결단을 하도록 충고를 하였다. 오늘날 설교의 많은 부분은 이미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또 상당한 수의 설교들은 특별히 설교의 대상을 뚜렷이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불신자들을 향해 전해지는 신실하고, 열정적이며, 사랑과 설득력 있는 설교는 줄어들었다. 이것이 바로 회심하는 자들의 수가 슬프게도 줄어들고 있는 원인 중 하나이다. 만일 목회자들이 영혼을 돌보는 자들이라면, 영혼 구원을 무시하고서 어찌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열정적인 강단 설교가 줄어들고 있다는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나도 또한 동의한다. 설교의 방식에 변화가 있어 왔다. 이제 목회자 훈련생들은 침착하고 구어체를 사용하도록, 경구적인 글의 작성을 목표하도록, 사회학적인 문제들을 논하고 회중의 지성을 강의나 대학 강의실에서 있는 방식으로 다루도록 배운다. 마치 모세오경에서의 모세의 저작권에 대한 믿음이 이미 예전의 것처럼 여겨지듯, 위대한 찰머스 박사(Dr. Chalmers)의 ‘서까래를 울리게 하라’는 말씀은 아주 한참 전에 지나간 전통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는 예일대학의 부흥의 시기에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을 울게 만들었던 젊은 에드워드 커크(Edward N. Kirk)가 다시 돌아와 오늘날의 목회 후보생들에게 설교법을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을까 자주 소망해본다. 당시에 우렁찬 외침이나 수사적인 훈계는 없었지만 그의 듣는 자들로 하여금 인생을 살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은 구원 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섬길 가치가 있고, 천국은 확보할 가치가 있으며 이 모든 일들을 위해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란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아주 강렬하고, 엄숙하고 순수한 마음의 간절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순수하고 순결한 종교의 부흥 뿐만 아니라 영혼을 감동시키는 전통적인 강단 설교를 부흥시켜 주시기를!
과거의 목회자들은 오늘날의 후계자들보다도 유리한 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설교를 준비하고 교인들을 더 철저히 심방하는 일에 방해를 받는 일이 비교적 적었다. 그들은 여러 위원회 모임에 참석하여 섬기도록 요구를 받거나 각종의 사회 구호 단체의 회원이 되도록 요구를 받지 않았다. 모든 목사는 여러 개혁 운동들에 함께 하되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숭고한 부르심의 중요하고 필수적인 임무들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러해야 한다. 오직 한 가지로 마음이 모아져 있던 바울은 ‘나는 오직 한 가지 일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만일 바울이 오늘날 뉴욕이나 보스턴이나 시카고에서 사역을 하였다면, 그는 서재 문을 두드리면서 그를 방해하고 시간을 잡아먹는 많은 일들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열정이 가득 찬 오늘날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해 낮아진 대중의 신앙과 싸워야 하고, 주일에 대한 낮아진 경외심과 하나님의 예배에 참석하는 습관이 줄어든 상황과 싸워야 한다. 이처럼 어려움이 더 많아짐으로 인하여 새로운 복음이 요구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더 큰 믿음이 요구될 따름이다. 이런 어려움들로 인하여 새로운 교리가 요구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1900년간의 세월 동안 유지되어 온 진리들을 더 강력하게 설교할 것이 요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계시할 필요가 있는가?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충만히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보다 더 사랑이 넘치고, 용기가 있으며 더 거룩해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는 더욱 더 충만히 드러나야 한다. 성령의 새로운 세례가 필요한가? 진실로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강단은 능력으로 덮힐 것이며 우리 설교자들은 불의 혀를 가지고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곧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나라가 더 확장이 되고 확대가 되기에 더 좋은 변화가 될 것이다.
- 진리의 깃발 116호
[출처] 젊은 설교자들에 주는 조언 - Theodore L. Cuyler(1822-1909)|작성자 바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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