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 故 최자실 목사 일대기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상) / 故 최자실 목사 일대기

 

 

(하) / 故 최자실 목사 일대기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하) / 故 최자실 목사 일대기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오늘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팀을 이루어 한국에 오순절 성령운동을 크게 일으키고

 

세계최대의 교회로 성장시켰으며 이 땅에 금식기도운동을 일으켜

 

역시 세계 최대의 금식기도원을 창설한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의 주인공인

 

최자실 목사에 대해 포스팅합니다.

 

그녀는 1915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2살 때 우연히 친구와 함께

 

천막 부흥성회를 하는 이 성봉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하여

 

옆집의 곰배팔이 아저씨가 안수기도 받고 낫는 것을 보고

 

밤낮 머리 아프다고 하는 그녀의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참석하여

 

이 목사님의 안수를 통해 어머니의 두통을 고침 받게 된다.

 

이로서 그녀와 모친은 예수를 열심히 믿게 되었다.

 

그녀는 이후 1935년 평양 도립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압록강 국경지대 간호원과

 

신의주 도립병원 산파주임으로 근무하면서 한경직 목사님이 담임하던

 

신의주 제2교회에 출석하며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그녀의 모친은 권사로 계셨다. 그녀는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냥공장,

 

비누공장, 샷틀 제조업 등 활발한 사업을 했으나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자 어머니와 장녀를 잃었고 남편에까지 소박을 맞고

 

사업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는 극약을 산 다음 삼각산 골짜기로 올라갔다. 개울가에서 약봉지를 꺼내

 

먹으려는 순간 돌개바람이 불어 약은 물 속으로 빠졌다. 이제 그녀는

 

동굴 속에서 굶어 죽으려고 6일을 버티다가 정말 죽겠다 싶어

 

산밑으로 내려가는데 30년 전 헤어졌던 친구를 마나 자초지종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성령 받으라고 충고를 해주면서

 

바로 산 너머에 열리는 부흥회로 인도했다.

 

 

그 날 밤 기적적으로 바로 30년 만에 다시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를 거기서 듣고

 

, 돼지같이 살아온 지난날을 밤새도록 회개하자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게 되었다.

 

이목사님과 상담하니 순복음 신학교에 가라는 조언을 듣고

 

19569월 순복음신학교에 들어가 거기서 조용기 학생을 만나게 된다.

 

20대 초반의 조용기 학생회장이 그녀에게 전도 부장직을 주어

 

그때부터 노방전도를 시작하였다.

 

1958년 신학교졸업과 함께 고아사업을 시작하려다가 또 한차례 매를 맞고

 

복음전도의 외길로 들어선다. 조용기 전도사와 함께 자신의 자택 거실에서

 

5명이 가정예배형태로 출발하여 공동묘지 곁에 세운

 

대조동 천막교회를 시작했다. 불과 3년 만에 크게 부흥하여 서대문으로 나와

 

1962년 순복음 중앙교회가 되었으며 1965년 조용기 목사를 사위로 맞게 된다.

 

 

그녀는 일본과 대만 등의 해외선교여행을 통해 복음을 증거했고

 

1966년 남편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1969년에 여의도 성전신축을 시작했으며

 

1972년 일본하나님의 성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73년 순복음 금식기도원(최자실 기념금식기도원)을 설립하여

 

최자실 하면 금식기도로 인식될 정도로 금식기도를 통해 성령세례 받고

 

신유와 문제해결의 은혜를 체험하는 곳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되었다.

 

1979년 성도 10만명 돌파, 8120만명, 8550만명으로 성장하였다.

 

그녀는 계속되는 해외선교여행을 통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고

 

복음을 전했으며 1989년 미국 L.A에서 집회를 마친 후

 

74세를 일기로 조용히 주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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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의 신분 변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 설교)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15절)


예수 믿을 때 상상 뛰어넘는 변화 다가와
그리스도를 모시면 새로운 피조물·국적·생명 돼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계시면 평안과 행복 얻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보는 아주 매섭고 사나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았고 그로 말미암아 돈도 많고 부자였습니다. 또 성경은 그가 유대인의 선생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학자요,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지키고 관원생활을 하고 유대교의 선생이었지만 그 마음속에 황량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텅 비었습니다.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마음이 착잡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데 앉은뱅이가 걸어 나가며 장님이 눈뜨고 귀머거리가 듣는 것을 보고 그는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 그는 밤이 어두울 때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랍비여, 랍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않고는 이런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육으로 난 사람은 아무리 잘 먹여도 육이고 잘 입혀도 육이고 교육을 잘 시켜도 육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에서 변하지 않습니다. 소는 언제나 소입니다. 닭은 닭이고, 개는 개고, 말은 말입니다. 육으로 난 사람은 언제나 육입니다.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와 통하지 않습니다. 육과 영이 어떻게 통합니까? 안 통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죽은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과 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니고데모가 물으니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서 뱀에 물린 사람마다 바라보고 낫게 한 것처럼 나도 너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높이 들려서 속죄제물이 될 터이니 나를 보고 믿는 자마다 거듭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새로운 피조물


 우리는 모두 피조물로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데 아담과 하와는 영혼이 죽었습니다. 영혼이 죽고 나니까 이제는 육체가 온 몸과 마음을 다스립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 육적인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로 육은 감각적인 세계에 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캄캄한 밤 속에 사는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헤밍웨이는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을 필요조차 없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지고 전기가 흐르지 않는 텅 빈 전구와 같다”고 말하고 사냥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감각적으로 살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의 가장 중심인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을 다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체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유대교의 율법도 지키고 관원이 되어 높은 지위도 얻고 돈도 가지고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도 텅 빈 마음, 공허한 마음, 무엇인가 잃어버린 심정, 고독한 마음, 이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노벨상을 타도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우리 본체인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결코 평안함이 없습니다. 돈을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져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명예를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쾌락을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체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평안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고 입술로 시인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서 하나님과 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육은 영과 통하지 않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언제나 육이요, 하나님과는 절벽으로 담이 쌓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굽니까? 우리의 고향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야 비로소 행복합니다. 돈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쾌락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권력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명예가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옛날 삶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옛사람은 장례지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영적으로 통한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도 영의 세계와 통하기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영적 세계로 통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고 강한 사람이 있겠지만, 약하면 약한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하늘나라와 통합니다. 교통이 있습니다. 교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혀 모르던 하늘나라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술 먹고 담배 피고 부인을 때리고 마약 중독자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고 변화됐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서 조롱했습니다. “야! 너 교회 가고 가정 중심으로 됐다는데 한번 물어보자. 성경은 누가 적었느냐?” “몰라” “교회는 누가 세웠느냐?” “몰라” “목사님은 무슨 설교를 하더냐?” “몰라” “봐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무슨 교회를 간다고 야단하냐?” “한 가지는 내가 알아” “뭘 아는데?” “술과 마약이 싫어졌어. 그리고 마누라를 때리고 애들을 겁주던 그 생활이 사라졌어. 마누라하고 애들하고 있는 시간이 좋아. 그리고 교회 가는 날이 기다려져. 나는 그것이 변화된 것을 알아. 그 이외에는 아직 아무 것도 몰라” 그렇습니다. 교리를 모르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그 마음속에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남이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국적 


 제가 며칠 전에 프랑스 여인으로서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이다도시 자매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프랑스 여자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지만 한국 남자하고 결혼해서 한국 국적을 얻었다. 나는 국적이 한국이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도 파랗고 얼굴도 하얗고 머리도 노랗고 완전히 프랑스 사람인데 국적이 한국인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 모양새나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국적이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프랑스 법에 적용받지 않습니다. 한국 법 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몸무게가 무거운 사람이 말라서 빼빼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귀 나라 백성이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나라 백성일 때는 동물적인 인본주의로 살기 때문에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따라 살고 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부패하고 부정하고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옛사람과 얼굴도 같고 옷도 같이 입고 말도 같이 하고 몸무게도 같고 키도 같지만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 백성이 되면 예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고 세속과 마귀에서 자유를 주고 병에서 고쳐주고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고 죽음과 절망에서 건져내주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면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꿈을 얻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되고 자화상을 갖게 되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어느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 하나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껄껄 웃었습니다. “다 낡은 바이올린이 줄도 다 헐었으니 누가 사겠느냐?” 그런데 어느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좀 달라고 하더니 바이올린을 켜는데 기가 막힌 음악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전부다 감탄할 정도의 아름다운 연주가 있은 뒤에 경매장 주인이 “이 바이올린을 살 사람은 손드세요”하니까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겠다며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바이올린도 줄도 다 낡았지만 실력있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잘 타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소리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바이올린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낡은 바이올린입니다. 우리를 마귀에게 맡겨 놓으면 도둑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받아서 멋지게 연주하는 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일류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에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류이기 때문에, 일류의 손에 우리가 들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학교 교육을 잘못 받았어도 집안이 좋지 않았어도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도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누군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 되신 예수님은 무력한 분이 아닙니다. 저 하늘과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3. 새로운 생명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날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나의 불의와 추악을 걸머지고 내 병을 짊어지고 내 저주를 짊어지고 내 죽음을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체험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6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함께’입니다. 나 혼자 죽고 나 혼자 장사지낸바 되고 나 혼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하늘에 앉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은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 전능한 능력으로 우리의 짐을 같이 짊어지심으로 함께 시련도 통과하고 고난도 통과하고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삶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값 주고 나를 사셨으니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에게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로 죄 없는 분이 죄를 대신하고 부패하지 않는 분이 부패한 우리를 대신하고 병 없는 분이 병 있는 우리를 대신하고 저주받지 않은 그분이 저주를 대신하고 죽지 않은 그분이 죽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고 장사지낸바 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주인은 누굽니까?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살려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마귀가 주인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남편도 주인이 아니고, 아내도 주인이 아닙니다. 날 위하여 죽으시고 날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의로움이 됩니다. 내가 값을 지불하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없어도 값도 없어도 그냥 주님이 의로움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성결입니다. 나는 깨끗하지 못합니다. 항상 더러운 생각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하고 더러운 수렁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성결하게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건강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었든 불구자든 아프든 그것은 나의 체험이고 성경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예수님은 나의 건강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건강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잘나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는 가난이 물러가고 저주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영생이 되십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영생이기 때문에 예수를 내 구주로 모셔 들이고 내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하면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부활이므로 예수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부활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와 같이 계시면 나는 이미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니?” 그러니까 애들이 “꽃바구니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 바구니에 꽃 대신 비린내 나는 생선을 잔뜩 집어넣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바구니니?” “생선 바구니에요” “똑같은 바구니인데 왜 전에는 꽃바구니라고 하고 이제는 생선 바구니라고 하니?” “전에는 내용물이 꽃이고 지금은 비린내 나는 생선이니까요” 맞습니다. 세상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사람이고 천국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 사람인 것입니다.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깨끗하게 만들었으면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있어야 우리가 중생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가 있어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가 있어야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을 알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됐으니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났으니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니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야 하고 새로운 국적을 얻었으니 새로운 국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 중에 살게 됩니다. 예수를 꼭 마음속에 깊이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를 놓치면 천국도 놓치고 생명도 놓치고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텅 비고 공허하고 허무하고 맹랑한지 체험을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고 난 다음에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통 가운데 빠진 사람은 살아있을 동안에 예수를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없을 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거칠지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고 비가 올 때 우산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고 변화 받게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예수의 사람이 되고 하늘나라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아직 예수를 모시지 않은 사람은 이 육체를 떠나기 전에 예수를 빨리 모셔서 절망적인 고독과 허무와 공허와 좌절과 고통 가운데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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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중략)…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1장 5∼10절


가난, 저주, 질병의 어둠 속 우릴 위해
생명의 빛이 되신 주님, 해방과 자유 주시고 
갈길을 인도하셔 참된 행복 누리며 살게 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을 제일 먼저 지으셨습니다. 빛이 없으면 영양분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빛이 비춰진 모든 식물들은 엽록소를 통하여 탄소동화작용으로 영양분을 만들어 동물들의 양식이 되고, 또 사람들은 그 동식물들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둠이 점령하고 다스리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의 빛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빛은 어둠을 멸하신다

 우리가 불을 켜서 캄캄한 곳으로 가면 어두움은 그냥 사라져버립니다. 어두움은 영적인 의미로 마귀를 가리키는데, 어두운 그곳에 예수님의 빛이 나타나면 마귀의 온갖 어두움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5∼7절에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며 따라가면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비춰서 어두움이 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에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써 정결하고 깨끗한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온갖 사나운 짐승들이 으르렁 거리고 돌아다녀도 빛이 비치면 모든 짐승들이 다 도망을 치듯이 예수님의 빛은 마귀의 일을 멸해버립니다. 어두움은 빛 앞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쫓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찾아와 집안이 복잡하고, 우환과 질고가 끊이지 않고, 슬픔이 가득할 때 우리는 예수를 믿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불러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그 순간 그 집안에 우환과 질고가 사라지고, 마귀가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빛이시므로 우리가 빛을 찾아가면 예수님은 우리의 세계를 비춰 주십니다. 예수님의 빛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의 빛을 비춰 주시며, 복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면 가난은 사라지고, 복 받아 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고 하면 기복신앙을 전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것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마귀의 어두움의 세력이 있을 때는 춥고 어둡고 외롭고 가난하고 굶주리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면 따뜻해지고, 부요해지고, 소망차게 됩니다. 실제로 복 받는 인생이 되기 때문에 기복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빛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의 빛을 비추는 것이고, 가난을 물리칠 수 있는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1958년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 불광동 그 동네는 말할 수 없이 어두웠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매일같이 싸우고 술주정뱅이가 동네를 휩쓸고 다녔습니다. ‘이 동네에 희망이 있겠느냐’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삼박자 축복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진다”고 하니,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느냐? 천당 이야기하지 말고 천당의 부스러기라도 우리에게 가지고 오라”고 하면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한 결과로 3년 만에 그 동네에 비참한 가난은 사라지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술주정뱅이들이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고, 직장 없는 사람이 직장을 구하고, 정부의 도움도 받게 되고, 서로 협조도 하게 된 것입니다. 빛이 비치니 어두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니 어두움의 일들이 사라지고 동네에 웃음소리가 들리고 즐거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의 빛이요, 포로 된 자에게 자유와 해방의 빛이며, 눌린 자, 압제당한 자들에게는 치료의 빛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빛 안에 생명이 있다

 예수님의 빛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펄떡 거리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나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내려갑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으면 이 세상에 살면서 운명과 환경을 정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살지만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런 기쁨과 즐거움 없이 세상 습관에 떠내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없고, 좌절과 절망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죄와 허물, 질병과 고통, 저주와 궁핍, 죽음과 멸망을 가져오는 어두움의 임금이요, 모든 고통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도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고 거짓말을 했고, 거짓말을 믿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 저주 받아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저주받은 그들이 자녀를 낳으니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쳐서 죽이는 비극적인 살인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이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노예가 되었고, 그 마귀는 오늘도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두움의 세력이니 어두움이 떠나가면 마귀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예수 안에서 즐거워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라 그 앞에 어두움인 마귀가 서지 못하고, 예수님의 빛이 어두움의 열매를 멸해버리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4절에 보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고 그 빛이 비치면 생명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된 곳으로부터 문명이 피어났습니다. 제가 처음 세계 선교를 시작하면서 다니는 곳마다 부럽기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유럽 가는 곳마다 사회가 안정되고 잘 사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언제 저렇게 잘 살 수 있을까?’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들 나라를 면면히 들여다보니 모두가 예수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이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 받은 민족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가 잘 되는 길은 예수를 믿어서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비치고, 예수의 생명이 넘치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되어야 잘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그렇게 못살던 한국에 복음이 들어와서 성도수가 100만이 되고, 200만이 되고 300만이 되고 1000만이 넘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에 빛이 비춰졌지만 어두움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마귀가 멸해지고 생명이 넘쳐났습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서 오늘날 한국의 어느 중소 도시에 가도 미국이나 유럽 부럽지 않은 복 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눈부신 발전과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비결이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십자가가 마귀의 어둠을 몰아냈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신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비춰져 우리에게 생명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빛은 사람들에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평안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면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빛이신 예수님이 들어오시기 때문에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는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난하다고 탄식할 필요가 없고, 몸이 약하다고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해주는 빛이 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요한복음 12장 35∼3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고 했습니다. 빛을 믿고 빛의 아들들이 되면 어두움은 떠나가고 밝고 맑고 환한 좋은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의 슬픔이 사라지고 좌절과 절망이 사라지게 되며, 빛의 밝은 손길을 따라가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요한복음 12장 46∼47절에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 어둠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우울, 불안, 초조 뿐 아니라 사업이 무너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좌절과 절망까지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처절한 절망 가운데 빛 되신 예수님이 비치면 성령이 역사하여 주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고, 개인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세상 종교 가운데 하나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을 쫓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가난은 어두움입니다. 병도 어두움입니다. 허무와 절망도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얼굴만 봐도 그 얼굴에 어두움이 없습니다. 얼굴에 빛이 비칩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사람은 얼굴에 어두움이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생명의 빛을 비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어두움을 다 짊어지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어두움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마귀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사와 권세가 다 빼앗겨버렸고, 완전히 파멸된 것입니다. 십자가보다 더 위대한 곳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마귀는 자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쳐 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했습니다. 용서와 의의 빛이 비치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빛이 비치고, 치료와 건강의 빛이 비치고, 축복과 형통의 빛이 비치고, 부활 영생 천국의 빛이 비치는 처소가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곳에서 생명의 빛이 우리의 가슴속에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일을 멸하려면 주님 앞에 꿇어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감사와 찬양이 우리에게 기적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4장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 처럼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비춰 치료하는 광선되어 영도 치료하고, 마음도 치료하고, 환경도 치료하여 송아지 같이 기뻐 뛰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빛은 우리의 갈 길을 비추어 주신다

 예수님의 빛은 우리 삶의 갈 길을 밝히 비춰주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스도께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는 악한 자의 꾀에 빠지게 만듭니다. 악한 자의 꾀라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지도 않고, 인본주의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악한 자의 꾀에 빠지지 않도록 예수님은 우리를 붙잡아서 광명한 빛을 비춰주십니다.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의 꾀에 빠지지 않도록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 되시고, 죄의 길에 서지 않도록 우리를 의롭게 이끌어 주십니다. 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에베소서 5장 8∼9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의롭고 거룩하고 착하게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야만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와 생명이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 받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빛을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와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채워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빛이 늘 우리에게 비추일 수 있느냐 하면 매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입각해서 기도하고, 기도와 함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빛이 우리의 삶속에 좋은 일이 가득 일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빛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

 예수님의 빛이 비치면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됩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니 마귀가 쫓겨 나가고, 죄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생명의 성령의 빛이 되어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 나라로 옮겨서 그 하늘나라에서 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충만히 계시고,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우리 가운데 비치고 있는 천국 백성으로서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당은 최후 종착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늘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죽어 천국에 가서 누릴 영광만 바라고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를 믿어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의 빛을 통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주시고,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질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케 하사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해주십니다. 이런 빛의 열매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많이 허락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져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참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이 세상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과 같이 생명 속에서 참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은 어둠을 멸하고, 생명을 충만히 채워주시고, 갈 길을 비춰주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자는 더 이상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들어와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고,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과의 교통 속에 밝고 맑고 환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살도록 예수님 앞에 늘 나와서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면 마귀는 자동적으로 쫓겨나가고, 우리는 빛 가운데서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빛으로 오셔 이땅 가운데 생명을 허락하신 우리 주님! 마귀의 권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시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시며, 모든 가난과 저주와 질병의 세력들을 몰아내어 참된 해방과 자유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믿는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갈길을 인도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이땅에서도 그 천국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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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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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와 심판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중략)…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장 1∼11절

 

스스로 어떤 죄도 없는 의인은 세상에 없어
예수님처럼 용서하며 살아야 행복한 삶 이뤄


 어느 날 아침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소란하게 들렸습니다. 바리새교인과 율법사들이 신발도 벗겨지고 옷매무새도 다 흐트러지고 머리가 다 산발이 된 여자를 끌고와서 예수님 앞에 내동댕이 쳐놓고 기세등등하게 주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1. 죄인임이 입증되었으므로 심판을 집행할 의인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가 전혀 없는 ‘의인’이 돼야만 죄지은 사람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도 감춰진 죄가 있어 죄인이 된 사람은 다른 이들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면 자기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으니 돌로 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사람이 돌로 쳐야 한다는 중요한 자격이 존재합니다. 스스로도 죄가 있는 사람은 그 여인을 돌로 칠 자격이 없습니다. 스스로 어떤 죄도 없는 자만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도 어기지 않고 거룩한 사랑도 버리지 않으시고 둘 다 멋있게 이루셨습니다. 오직 우리 예수님만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고 이런 일을 이룰 수 있으십니다.

 

 2. 죄인을 돌로 칠 자격이 있는 의인은 그 곳에 없었습니다

 그 여인을 돌로 칠 자격이 있는 스스로 죄없는 의인은 그 곳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검증을 받고 돌로 쳐야 하는데 아무도 양심상 스스로 ‘의인’이라 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글로 쓰자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 어깨 너머로 그 글로 쓰인 죄를 보고 다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3.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23)라고 기록합니다. 세상에 의인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의인’이란 죄를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전혀 부끄럼 없이 가슴을 펴고 “내가 왔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자격자가 의인입니다. 이런 의인이 돼야 죄인에게 심판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인은 세상에 단 한명도 없습니다. 죄인만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것을 심판할 의인은 오직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치면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정죄치 아니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율법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 죄인은 넘쳐나는데 그들을 심판할 의인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죄를 짓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요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 앞에 서게 되면 모두 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지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모두 다 죄인이므로 주님이 구원해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5.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근본 동체이신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지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고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은 구원하려 하시지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죄인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이 보혈의 목욕탕에 우리를 목욕시켜 주시고 사랑의 타올로 몸을 닦아 주시고 주님의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서 주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6. 우리는 매일 이웃을 정죄하며 심판자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웃을 심판하는 심판으로 나중에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은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비판하고 나면 나중에 그 비판을 내가 받게 되고 우리가 정죄하게 되면 나중에 그 정죄를 내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용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심판자가 아닌 용서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7.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 됩니다. 현재는 예수님께서 용서와 구원의 주님으로 와 계시지만 재림하실 때는 더 이상 용서와 구원의 주님이 아닌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지금은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심판주로 재림할 때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을 동안 더 늦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아야지 주님께서 재림할 때는 오직 심판만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거저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용서는 참 힘든 일입니다. 비판과 정죄로 심판하기는 쉬워도 용서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용서하며 살아야 됩니다. 용서하면서 살아야 우리 자신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합니다.

 부부는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관계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히폴리트 아돌프 텐(Hippolyte Adolphe Taine)은 “부부는 3주 동안 서로 관찰하고, 3개월 동안 서로 사랑하고, 3년 동안 서로 싸우고, 30년 동안 서로 용서하며 산다”고 부부관계를 정의했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가시거든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고 남편은 아내를 용서해주며 살아갑시다. 부부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서로를 참고 용서하지 않으면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깨달아 알고 이웃을 비판하거나 심판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정죄치 말고 심판치 말고 용서하고 오랫동안 서로 참아주며 살다 주님 부르실 때 천국에 함께 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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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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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마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3장 8절

 

우리 삶의 절망적 상황은 모두 불순종의 결과
하나님 말씀과 이름, 보혈의 능력에 의지하여
선한 것만 바라보며 믿고 시인하면 복을 얻어


 죄는 헬라어로 ‘하말티아’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죄를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과녁을 빗나가버린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순종치 않고 곁길로 나가버리면 죄를 짓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1.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주 정신이 번쩍 들게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뱀에게 넘어간 하와는 하나님의 엄하신 명령을 자기 멋대로 다시 해석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3절은 “그런데 뱀은 야훼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이것을 따먹기만 하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알아 하나님이 분별하고 같이 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유혹하였고, 이렇게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나무를 보니 이미 마음에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6절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기록합니다. 결국 마귀의 꾐에 빠져 그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거역해 죄를 지으면 죄 안에 마귀가 있고 마귀 안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죄와 마귀는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바로 죄이며, 그 죄가 반드시 또 마귀를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보면 악한 원수 마귀들이 많이 찾아와 우리를 공격하는데, 그것에 대적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자의적인 변형 없이 정확하게 사용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했는데, 하와는 이를 “죽을까 하노라”로 자기 마음대로 변형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주장은 굉장히 강했습니다. “아니다! 절대 죽지 않는다.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되는 것이 싫으셔서 너희에게 선악과를 못 먹게 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단호하게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과 동등 되려하는 끝없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가 직접 할 수 없으니까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권인 선악간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자기가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소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런 마귀의 소원에 이용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으니 이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사는 땅은 원래는 복된 에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땅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과 저주는 바로 사람을 따라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 받은 사람이면 우리가 들어가는 집은 복을 받습니다. 사업을 하면 사업이 복을 받고, 짐승을 기르면 짐승의 새끼까지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주를 받으면 아무리 좋은 땅에 가도 그 땅에 저주가 내리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고, 우리가 집에 들어오면 그 집도 저주를 받고 사업을 하면 사업도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저주도 사람을 통해 오고 복도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제일 중요하고 제일 영광스러우면서도 제일 무서운 존재입니다. 우리 한국이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한 이유는 바로 주님을 믿는 천만명의 하나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열 명중에 의인 한 사람이 있으면 그 한 사람 때문에 열 명이 똑같이 복을 누리게 되는 원리입니다.

 네비게이토선교회의 리로이 아임스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는 책에서 ‘마귀의 유혹’에 대해 “저의 고향으로 가는 길에 어느 날 고속도로 공사를 하기 때문에 ‘출입금지’라는 화살표를 세워 놓았는데, 그 동네의 장난꾸러기들이 와서 도로에 있는 화살표를 다른 데로 옮기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이정표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차들이 길을 잘못 들어와서 많은 사고가 나고, 엄청난 정체현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하는 짓이 바로 이것과 똑같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요사이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는 우리에게 이처럼 잘못된 이정표 즉, 잘못된 지식을 넣어주고 우리에게 거짓 정보를 주어 유혹합니다. 잘못된 정보를 받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마귀가 주는 잘못된 정보에 넘어가서 결국 하나님을 반역하고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갈 길을 정할 때, 이것이 잘못된 길인지 바른 길인지 깊이 알아보고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날 서로를 믿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도 없으며, 그저 죽음의 공포에 억눌려 불안과 공포가 마음에 꽉 들어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대가를 우리가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고 산업이 발달되고 생활이 향상되어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들었으며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하고 허무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해결하고 구원할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타락한 첫 아담 대신 새로운 아담으로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마지막이요 새로운 조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아버지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육신적인 아버지의 DNA나 유전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시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새로운 조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왔을 때, 마귀는 이러한 예수님조차 타락시키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것처럼, 예수님께 와서 온갖 유혹과 감언이설로 설득시켜 타락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이 타락하면 인류는 완전히 희망이 없어집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2.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30세가 되셨을 때, 그는 요단강에 가셔서 침례를 받으시고 이어서 성령을 받으신 후 40주 40야 금식하시며 자신의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이때 악한 마귀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을 변하여 떡을 만들어 보아라. 너 40일동안 굶주려서 배고프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라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어떤 논쟁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를 꾸짖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 내려라. 그래서 발에 돌이 부딪히지 아니하고 살짝 내리면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며 너를 인정할 것이다”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말씀에 굳세게 서서 요동치 않으셨습니다.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네가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넘겨주고 네가 세상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마귀를 완전히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받거든 인간의 생각으로 대적해서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귀의 올무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서 단호하게 물리치고 절대로 타협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가장 좋은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다가오는 마귀의 여러 가지 흉악한 궤계를 말씀으로 대적하십시오. 말씀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내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는 예수님의 보혈을 보면 몸서리치며 도망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을 의지하여 말씀으로 물리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대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면 마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영혼이 잘됩니다. 마귀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잘됩니다. 범사에 잘됩니다. 그리고 강건해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완전한 구원을 누리며 살다가 하늘나라에 갈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인류의 새로운 조상인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거뜬하게 이기고 우리 구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3. 죄와 마귀를 대적하라


 우리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 마귀의 유혹에 대적하고 조심을 해야 됩니다. 마귀가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선악과 밑에 데려가서 그것을 바라보게 하고 “자! 봐라! 어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을 만큼 탐스럽지 않냐?”라고 유혹하여 결국에는 따먹게 만든 것입니다. 무언가를 자꾸 바라보면 결국 그리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을 바라보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한 대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도박을 하는 오락실 아르바이트였습니다. 그 학생은 오락실에서 청소하고 돈 바꿔주는 일을 했는데, 손님들이 게임 하는 것을 옆에서 자꾸 쳐다보고 있다가 그만 유혹이 돼서 자기도 도박을 하고 돈을 빌리다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도박비를 마련하려고 사채를 써서 시달리다가 강도짓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미용실에 들어가 주인을 협박하여 돈을 뺐고 미용실 주인의 카드로 돈을 인출하다 CCTV에 찍혀 결국 인생이 파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학생은 잘못된 것을 자꾸 바라보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을 잘 관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든지 그 보는 것으로 결국에는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바라 봄으로 말미암아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에 끌려가면 사망 즉,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좋은 것을 바라봐야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늘 바라볼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게 제일 좋습니다. 무조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를 위해 몸찢기고 피흘려 죽으신 모습이 우리 마음에 뚜렷이 각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위해서 다 이루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너의 죄와 불의도 내가 청산했고 질병도 다 고쳤다. 마귀도 물리쳤고, 삶의 가난과 저주도 해방시켜 놓았다. 그리고 너희를 위해 죽음 저 건너편에 천국도 예비해 놓았다. 내가 너와 같이 한다. 두려워하고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며 항상 우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며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악한 궤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우리 주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며, 죄와 질병의 멍에도 메지 말고, 저주와 가난의 멍에도 메지 말고, 두려움과 절망의 멍에도 메지 말고 온전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가지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다 탐심이 생겨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바라보느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잘못된 바라봄으로 인해 죄에 빠져 절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도 잘못된 바라봄으로 인해 마귀에게 넘어가 죄를 지었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다윗이 이제 온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늦잠을 자고 일어나 초저녁이 다 되었을 때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왕궁 뒤를 거닐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보니 백옥같이 흰 살에 얼마나 매혹적이고 예쁘던지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전쟁터에 나가 있는 장수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그날 다윗은 남의 아내인 밧세바와 동침을 하여 아이를 갖게 만들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드는 간접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로 다윗은 일생동안 굉장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것의 원인도 바로 잘못된 바라봄의 법칙 때문입니다.

 요사이는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통해 무제한적으로 세속적인 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다 보면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잘못된 것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으로 큰 고통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 삽니다. 영적으로도 기도해야 영적인 힘을 얻게 되고, 육신적으로도 기도해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와서 역사할 수 있으며, 마귀와 싸우는 것도 기도해야 싸워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우리는 승리의 말을 해야 됩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입술로 언제나 승리를 고백해야 됩니다. “나는 의롭다. 나는 거룩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축복받았다. 나는 하늘나라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는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다”고 늘 희망 찬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죄는 살아있는 마귀의 촉수입니다. 죄와 마귀는 늘 함께 합니다. 마귀가 오는 곳에 죄가 오고, 죄가 있는 곳에 마귀가 옵니다. 마귀와 죄는 완전한 일체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죄를 용납하면 마귀가 죄의 옷을 걸치고 우리를 억압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파멸과 멸망으로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마귀를 말씀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님 보혈의 능력으로 대적해서 쫓아내면 마귀는 쫓겨나가고 마귀가 쫓겨나가면 죄가 쫓겨나가고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깨어서 마귀와 싸워 승리해야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받은 은혜를 늘 생각하고 좋은 것과 선한 것만을 바라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고 믿으면 우리의 인생은 평안하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됩니다. 종교적으로 의식적으로 왔다갔다만 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리는 매일같이 뜨거운 성령의 감동을 통해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좋은 날을 기대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의 유혹이 날마다 우리를 흔들어 넘어뜨리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죄를 통해 아담을 넘어뜨렸던 것처럼,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고 보혈의 능력만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온전히 죄와 사망이 권세와 종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좋은 것과 선한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여 날마다 복과 은혜를 체험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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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신분 변화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15절


예수 믿을 때 상상 뛰어넘는 변화 다가와
그리스도를 모시면 새로운 피조물·국적·생명 돼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계시면 평안과 행복 얻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보는 아주 매섭고 사나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았고 그로 말미암아 돈도 많고 부자였습니다. 또 성경은 그가 유대인의 선생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학자요,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지키고 관원생활을 하고 유대교의 선생이었지만 그 마음속에 황량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텅 비었습니다.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마음이 착잡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데 앉은뱅이가 걸어 나가며 장님이 눈뜨고 귀머거리가 듣는 것을 보고 그는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 그는 밤이 어두울 때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랍비여, 랍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않고는 이런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육으로 난 사람은 아무리 잘 먹여도 육이고 잘 입혀도 육이고 교육을 잘 시켜도 육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에서 변하지 않습니다. 소는 언제나 소입니다. 닭은 닭이고, 개는 개고, 말은 말입니다. 육으로 난 사람은 언제나 육입니다.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와 통하지 않습니다. 육과 영이 어떻게 통합니까? 안 통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죽은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과 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니고데모가 물으니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서 뱀에 물린 사람마다 바라보고 낫게 한 것처럼 나도 너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높이 들려서 속죄제물이 될 터이니 나를 보고 믿는 자마다 거듭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새로운 피조물


 우리는 모두 피조물로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데 아담과 하와는 영혼이 죽었습니다. 영혼이 죽고 나니까 이제는 육체가 온 몸과 마음을 다스립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 육적인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로 육은 감각적인 세계에 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캄캄한 밤 속에 사는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헤밍웨이는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을 필요조차 없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지고 전기가 흐르지 않는 텅 빈 전구와 같다”고 말하고 사냥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감각적으로 살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의 가장 중심인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을 다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체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유대교의 율법도 지키고 관원이 되어 높은 지위도 얻고 돈도 가지고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도 텅 빈 마음, 공허한 마음, 무엇인가 잃어버린 심정, 고독한 마음, 이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노벨상을 타도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우리 본체인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결코 평안함이 없습니다. 돈을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져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명예를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쾌락을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체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평안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고 입술로 시인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서 하나님과 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육은 영과 통하지 않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언제나 육이요, 하나님과는 절벽으로 담이 쌓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굽니까? 우리의 고향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야 비로소 행복합니다. 돈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쾌락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권력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명예가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옛날 삶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옛사람은 장례지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영적으로 통한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도 영의 세계와 통하기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영적 세계로 통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고 강한 사람이 있겠지만, 약하면 약한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하늘나라와 통합니다. 교통이 있습니다. 교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혀 모르던 하늘나라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술 먹고 담배 피고 부인을 때리고 마약 중독자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고 변화됐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서 조롱했습니다. “야! 너 교회 가고 가정 중심으로 됐다는데 한번 물어보자. 성경은 누가 적었느냐?” “몰라” “교회는 누가 세웠느냐?” “몰라” “목사님은 무슨 설교를 하더냐?” “몰라” “봐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무슨 교회를 간다고 야단하냐?” “한 가지는 내가 알아” “뭘 아는데?” “술과 마약이 싫어졌어. 그리고 마누라를 때리고 애들을 겁주던 그 생활이 사라졌어. 마누라하고 애들하고 있는 시간이 좋아. 그리고 교회 가는 날이 기다려져. 나는 그것이 변화된 것을 알아. 그 이외에는 아직 아무 것도 몰라” 그렇습니다. 교리를 모르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그 마음속에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남이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국적 


 제가 며칠 전에 프랑스 여인으로서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이다도시 자매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프랑스 여자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지만 한국 남자하고 결혼해서 한국 국적을 얻었다. 나는 국적이 한국이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도 파랗고 얼굴도 하얗고 머리도 노랗고 완전히 프랑스 사람인데 국적이 한국인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 모양새나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국적이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프랑스 법에 적용받지 않습니다. 한국 법 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몸무게가 무거운 사람이 말라서 빼빼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귀 나라 백성이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나라 백성일 때는 동물적인 인본주의로 살기 때문에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따라 살고 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부패하고 부정하고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옛사람과 얼굴도 같고 옷도 같이 입고 말도 같이 하고 몸무게도 같고 키도 같지만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 백성이 되면 예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고 세속과 마귀에서 자유를 주고 병에서 고쳐주고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고 죽음과 절망에서 건져내주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면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꿈을 얻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되고 자화상을 갖게 되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어느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 하나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껄껄 웃었습니다. “다 낡은 바이올린이 줄도 다 헐었으니 누가 사겠느냐?” 그런데 어느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좀 달라고 하더니 바이올린을 켜는데 기가 막힌 음악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전부다 감탄할 정도의 아름다운 연주가 있은 뒤에 경매장 주인이 “이 바이올린을 살 사람은 손드세요”하니까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겠다며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바이올린도 줄도 다 낡았지만 실력있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잘 타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소리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바이올린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낡은 바이올린입니다. 우리를 마귀에게 맡겨 놓으면 도둑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받아서 멋지게 연주하는 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일류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에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류이기 때문에, 일류의 손에 우리가 들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학교 교육을 잘못 받았어도 집안이 좋지 않았어도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도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누군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 되신 예수님은 무력한 분이 아닙니다. 저 하늘과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3. 새로운 생명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날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나의 불의와 추악을 걸머지고 내 병을 짊어지고 내 저주를 짊어지고 내 죽음을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체험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6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함께’입니다. 나 혼자 죽고 나 혼자 장사지낸바 되고 나 혼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하늘에 앉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은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 전능한 능력으로 우리의 짐을 같이 짊어지심으로 함께 시련도 통과하고 고난도 통과하고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삶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값 주고 나를 사셨으니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에게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로 죄 없는 분이 죄를 대신하고 부패하지 않는 분이 부패한 우리를 대신하고 병 없는 분이 병 있는 우리를 대신하고 저주받지 않은 그분이 저주를 대신하고 죽지 않은 그분이 죽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고 장사지낸바 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주인은 누굽니까?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살려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마귀가 주인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남편도 주인이 아니고, 아내도 주인이 아닙니다. 날 위하여 죽으시고 날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의로움이 됩니다. 내가 값을 지불하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없어도 값도 없어도 그냥 주님이 의로움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성결입니다. 나는 깨끗하지 못합니다. 항상 더러운 생각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하고 더러운 수렁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성결하게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건강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었든 불구자든 아프든 그것은 나의 체험이고 성경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예수님은 나의 건강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건강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잘나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는 가난이 물러가고 저주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영생이 되십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영생이기 때문에 예수를 내 구주로 모셔 들이고 내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하면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부활이므로 예수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부활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와 같이 계시면 나는 이미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니?” 그러니까 애들이 “꽃바구니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 바구니에 꽃 대신 비린내 나는 생선을 잔뜩 집어넣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바구니니?” “생선 바구니에요” “똑같은 바구니인데 왜 전에는 꽃바구니라고 하고 이제는 생선 바구니라고 하니?” “전에는 내용물이 꽃이고 지금은 비린내 나는 생선이니까요” 맞습니다. 세상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사람이고 천국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 사람인 것입니다.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깨끗하게 만들었으면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있어야 우리가 중생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가 있어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가 있어야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을 알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됐으니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났으니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니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야 하고 새로운 국적을 얻었으니 새로운 국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 중에 살게 됩니다. 예수를 꼭 마음속에 깊이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를 놓치면 천국도 놓치고 생명도 놓치고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텅 비고 공허하고 허무하고 맹랑한지 체험을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고 난 다음에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통 가운데 빠진 사람은 살아있을 동안에 예수를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없을 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거칠지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고 비가 올 때 우산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고 변화 받게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예수의 사람이 되고 하늘나라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아직 예수를 모시지 않은 사람은 이 육체를 떠나기 전에 예수를 빨리 모셔서 절망적인 고독과 허무와 공허와 좌절과 고통 가운데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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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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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님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장 25∼26절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성령님을 매일같이 인정·환영·모셔들여야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제일 이해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공기 없이 살 수 없는 것 같이 성령님 없이는 영적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성령과 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의 무디 목사는 초등학교만 나와서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다가 주의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나오자 어느 여성도가 “목사님!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는데 나는 한시간 내내 졸고 앉아 있다가 갑니다. 목사님 말씀은 잘하시는데 은혜가 없어요. 지금부터 목사님 은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무디 목사는 “하나님이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시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나이 34살 때 11월에 뉴욕 거리를 걸어가면서 “하나님이여 저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때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후에 미국과 영국을 뒤흔드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어 수천만명을 주께로 이끌어 들이는 위대한 종이 된 것입니다.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을 졸게 만드는 목사였는데, 성령을 받자마자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님


 우리는 성령께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뚜렷이 알아야 합니다. 인격을 가지려면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즉 지·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의 구성요소를 다 갖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지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7절에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이 우리 생각과 양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내 마음속에 성령이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성령은 다 통달하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전지하신 지성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이 가슴을 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데서 방황을 합니다. 성령이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데 이것이 뭔지 모르고 ‘저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은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모를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우리교회 권사님 한 분이 지역장으로서 구역예배를 인도하러 가다가 종로 사거리에서 가슴에 기도가 솟아오르는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왔다갔다 하고 기도할 자리도 없는데 가로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만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얼마나 큰소리로 방언기도를 했던지 나중에 정신차려 보니까 사람이 인산인해로 둘러싸서 구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은 시원해졌습니다. 그래서 구역예배를 잘 인도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도둑이 왔다 갔습니다. 현금을 서랍 속에 넣어 놓았는데 만일 그 돈을 도둑 맞았으면 큰 곤란을 겪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그것은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도둑의 눈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성령님은 근심, 걱정을 하는 감정을 가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결의한 의지를 가지십니다. 성령이 결정하면 우리가 성령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니까 성령이 못하게 했습니다. 성령은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은사를 주실 때도 우리가 원하는대로 주시는 것 아닙니다. 성령이 보아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지·정·의를 가진 성령으로서 우리에게는 보혜사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보혜사란 곤고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부름을 받아 와서 곁에서 도와주는 자입니다. 어렵고 곤고한 사람을 도와주는 변호사로서 곁에 와서 도움을 베푸는 분이 보혜사입니다. 또 그 사람을 위해 변호하고 권고하며 위로하므로 그 사람을 굳세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가르치고 위로하고 대언하시고 상담해 주시고 대속해 주셨지만 예수님이 가시고 난 다음에 온 분은 똑같은 보혜사인데 다른 보혜사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데 예수님 몸을 가지고 오시고 보혜사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을 모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의 역사


 모든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 일하시나 그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만물을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좇아 그 만물을 만드시고 구속하시고 성령님은 만물을 유지하시고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맡은 직분은 다르면서 또 함께 계시고 함께 계시면서 다릅니다. 아버지 안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와 성령님이 계시고 성령님 안에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는 아버지 하나님 시대로 예수님과 성령님은 아버지 안에 있었습니다. 신약초기 예수님 시대에는 아버지와 성령님이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지금은 성령 시대니까 아버지와 예수님이 성령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절대로 서로 분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사역을 합니다.

 우리와 함께 성령님이 계시고 우리 속에 지금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마음문을 열어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교수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예수를 잘 믿는데 본인은 안 믿습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글자가 하나도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신문은 잘 읽는데 성경은 못읽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것 입니다.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 믿은 다음에는 성경을 잘 읽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계셔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가르쳐주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기억나게 해주십니다. 나이 먹으면 제일 걱정 되는 것이 치매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서 기억나게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뇌세포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령이 기억나게 하시는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꾸짖으러 오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꾸짖으십니다. 예수 안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모든 죄도 다 많지만 예수를 믿으면 그 피로써 다 씻음을 받고 청산을 받습니다. 우리가 지옥 가는 것은 우리 죄로 말미암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안믿어서 지옥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안내하는 사람이나 안내견이 꼭 있어야 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도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르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성령이 우리 눈을 밝혀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2절로 14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진리도 가르쳐 주시고 세상의 진리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하면 세상 공부도 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머리도 좋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에도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장래 일을 가르켜 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미국 선교를 시작하면서 저는 미국에 많은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주의 종을 초청할려고 하니까 그당시만해도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신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양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도할 때마다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때마다 신학교 설립에 대한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저녁 집회 설교때 그 부분을 언급했습니다. 신학교를 세우자면 땅도 건물도 돈도 있어야 하는데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후에 한 젊은 사업가가 오더니만 “자기가 안쓰고 비워 놓은 집이 한 채 있는데 쓰면 어떠시겠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이구나’ 생각하고 그 집에서 신학교를 시작한 것이 오늘날 베데스다대학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서 성령의 생각을 우리 마음속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생각지 않게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일어나고 생각이 자꾸 그곳을 통해서 나오며 양심에 거리낌없이 생각이 나오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 마음에 소원과 생각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뜨거운 소원과 생각을 통해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뜨거운 소원과 생각이 내 양심을 통해 걸러나올 때 부끄러움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한다고 우리가 작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환상을 보고 계시를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또, 귀에 음성이 들려오면 더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오지 않고 생각이 자꾸 계속해서 머리에 남고 마음에 소원이 줄기차게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줄 알고 성경을 다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결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부패한 자식들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부패한 심신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함과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거룩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들어와서 우리 속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우리도 거룩하고 깨끗하게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이 우리는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성령님에 의지하고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는 또한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능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전도도 잘 못합니다. 말씀 증거는 더 힘듭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늘 묻습니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 그래서 “한평생 걸립니다. 뭐 엎드려서 연필 들고 종이 위에 적으면 설교가 나오는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온 과거를 말씀 속에서 현재에 비춰보고 주의 성령님께 인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은 혼신을 다하여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요, 뼈의 기름을 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대로 농담식으로 만담하는 식으로 해가지고 하나님의 영혼을 어떻게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못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도와주는 분이 옆에 와 계신데도 불구하고 그 도와주는 분을 무시해 버리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자기 혼자 발버둥 치다가 실패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와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내게 힘을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원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도우심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의 임재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있어도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늘 함께 와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잘못 먹으면 속이 쓰리지만 만족하게 먹고 나면 속이 편하듯이 성령이 들어와 계시면 우리 맘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님이 와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면 속에 계신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곁에 계시고 안에 계시고 위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 곁에 있고 믿는 사람은 속에 중생의 영으로 와 있고 성령 침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체험을 하면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고 그 결과로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거듭나게 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어서 천국 갑니다. 그러나 권세와 능력을 받으려면 성령 침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증거로써 우리가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어린 소년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들이 예수님을 믿고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어떻게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성령님을 믿으라고 합니까?” 그러자 전기공이던 아버지는 “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마”하고 아들을 데리고 발전소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전기가 나오는 동력기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여기가 우리에게 빛을 주고 우리의 집을 따뜻하게 해주는 힘이 나오는 곳이 바로 이 기계란다. 우리는 전기를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힘이 기계 속에서 나온단다” 그러자 발전소와 동력기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들이 “아∼ 전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 믿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믿을 수 있지. 네가 전기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전기를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전기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전기가 있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말해주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자신들의 삶 속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성령이 와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이 초자연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면 우리 마음에 비정상적으로 불안, 고통, 좌절, 분노 등이 생기지만,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 마음에 기쁨, 평안, 믿음, 소망, 사랑 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면 마음에 평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혈압이 오르고 심장이 뛰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다가옵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로 16절에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말씁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와서 이와 같은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쁨과 평안과 믿음, 소망,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 생각을 통해서 생각하시기 때문에 내 생각인지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기도할 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주시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알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점령하시면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들어오면 기도가 달라지고 설교가 달라지고 은혜로운 분위기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유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모두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성령님을 매일같이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성령께 의지해서 사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오늘도 하늘나라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주님께서 오늘 교회로 모아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무리 무능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더라도 성령께서 임하시면 모세의 마른 지팡이가 권능의 지팡이로 변하듯이 변할 수가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도록 성령충만한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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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예수님을 믿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4절∼21절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살지만, 나는 예수님 없이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을 더욱 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 안에서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본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셨으므로 우리가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계신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있고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육신의 장막집을 벗어 버리고 하늘나라 집으로 가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땅에 있는 육신은 장막집이 되어서 언제 거두어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천국에 아름다운 집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천국은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실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처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허무하게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볼 때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며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건강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된다

 사람은 희망과 꿈이 없으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오늘 어떤 고생이 있어도 참을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아도 그 가운데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재앙을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어떠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은 사람이 되고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 은혜로 치료받고 축복받고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것이 되었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더러움이 씻어진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병은 명령하여 내쫓아야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병이 다가와도 저항을 안합니다. 병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쫓아야 합니다. 마귀와 싸울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면 새사람은 마귀에게 집을 허락해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병에서 해방되고 건강하게 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23편 1절에서 6절까지에 선한 목자로써 내 삶을 자비와 긍휼로 채워주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사사건건 안되는 일만 있었는데 나중에 그 길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좋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풍성한 삶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이유는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목숨까지 버렸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 버려서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이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차원 높은 삶

 감각적이고 이성적이고 체험적인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세계에 살수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믿음의 세계를 모릅니다.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물리학자 홉킨스 박사도 사람이 죽으면 컴퓨터가 꺼지는 것처럼 뇌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죽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믿음의 세계가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운명을 바꾸고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된다고 믿으면 기쁘고 행복한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켜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 올해보다 나은 미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안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마귀의 공격속에 살면 우리는 실패하고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마귀의 텃밭입니다. 두려워하면 마귀가 춤추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병을 두려워하면 병이 오고 가난이 두려우면 가난이 오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가 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같이 계시므로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시며 우리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이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극한 염병에서 건져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 박사는 노이로제나 우울증 환자들에게 하루에 두 번 아침 저녁으로 시편 23편을 묵상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환자들이 노이로제에서 나았습니다. 미국의 하워드 캘리 박사도 “성경 말씀은 매우 훌륭한 의술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처방대로 했을 때 한 사람도 치료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치료하고 우리를 승리와 평안의 분위기로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심으로 사는 이유도 알고, 희망과 꿈도 가질수 있고, 강하고 담대하게 창조적인 믿음으로 마음과 환경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희망과 꿈을 꾸며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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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희망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중략)…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1~11절)

 

 사람들은 마음속에 고통과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가 가장 슬플 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절망의 어두운 환경과 마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최선을 다해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위로를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 인생의 쓴물을 달게 하는 기적적인 응답인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하나님 앞에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었습니다. 신약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도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잃은 줄 알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두가 위로와 희망을 받아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언제나 위로와 희망을 주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새로운 생기를 얻게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버림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이 와서 위로와 희망을 얻는 곳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하여 위로와 희망을 얻고 인생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로해 주지 않더라도 내가 나를 위로해 주면서 살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나라의 한 대형서점에서 책과 함께 꽃을 배달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주문자의 23%, 즉 4명 중 1명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꽃을 선물한답니다. 아무도 꽃을 선물해주는 사람 없으니까 자기가 책방에 부탁해서 자기 이름으로 꽃을 배달하게 하고, 그 안에 메시지를 적은 카드를 동봉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용기를 내라. 파이팅!”이랍니다. 남이 위로해 주기만을 바라지 말고 이런 방법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1. 부정적 생각을 버려라 (생각이 부정적이면 꿈도 믿음도 다 물거품)


 생각이 부정적이면 꿈도 믿음도 다 물거품입니다. 광야 생활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나쁜 모습은 생각이 부정적이어서 늘 불평과 원망의 밧줄에 포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절로 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야훼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민수기 14장 26절로 30절에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 앞에 파수꾼을 세워서 생각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격려하고 칭찬하십시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라는 것은 성경구절 속에 담긴 의미를 묵상하고 준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외우면 성경 안에 우리를 구원하고, 힘을 주는 말씀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고 보호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보호를 받아야 됩니다. 내 마음과 생각을 아무데나 내뒹굴어 놓으면 온갖 부정적인 것이 마음과 생각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 간의 위로와 격려를 해야 됩니다. 내가 나를 격려하고 “용기를 내어라. 파이팅!”을 할 뿐 아니라 가족끼리 서로 시간을 내어서 위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결혼한 사람이 혼자 사는 사람보다 몇 년 더 오래 살겠습니까? 결혼한 가족은 결혼 안한 것보다 8년을 더 오래 산답니다. 빨리 안 죽으려면 가족을 이뤄야 됩니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보다 2년 정도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갖가지 스트레스를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둔 부모가 더 오래 사는 것은 자녀로부터 받는 위로 때문이라고 합니다. 키우기에 고달프지만 귀엽잖아요?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그것이 부모가 2년이나 더 오래살 수 있는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배우자나 자녀가 주는 위로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됩니다.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생각을 잘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날 때에는 서로 격려하고 지지해 주는 것이 더욱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위로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가족이나 친구의 위로가 큰 힘이 되기는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말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었을 때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최근에 저의 친구 몇 사람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을 하러 갔는데,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하시느냐?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이다. 살 필요가 없다.’라고 탄식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위로할 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했음으로 짧은 인생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다.’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를 해 주었으나, 사람의 말로써는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또 며칠 전 발생했던 소래 어시장 화재 사건을 보더라도 평생을 바쳐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몽땅 재로 변하였는데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사람의 말로써 말해봤자 아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극한 고난을 당할 때,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두고 섭리하시고, 만물을 가지고 위로하여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9편 7절에 “야훼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때에 뿐 아니라 평소에 늘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위로로 삼아야 됩니다. 매일 아침 성경을 펴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루를 시작하면, 그 하루가 위로가 넘치는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2. 용서하고 사랑하라 (용서와 사랑을 마음을 치료하는 효과가 크다)


 용서와 사랑은 마음을 치료하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을 하면, 우리도 위로를 받고,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위로를 받습니다. 스스로 위로하고 희망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2절로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을 통한 위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위로의 힘을 주십니다. 요한복음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데,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위로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장 29절~31절)라는 말씀을 이루어 주십니다. 때문에 그 성령의 위로를 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부흥회를 가게 될 때 언제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위로를 주시옵소서.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의 위로를 받아야 부흥이라는 이 큰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매 주일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굉장한 부담입니다. “60년간 복음을 전했는데 무슨 부담이 되느냐? 조 목사님이야 입만 열면 하나님 말씀이 술술 나올 것인데.” 모르는 소리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매 순간이 부담스럽습니다. 수많은 생명에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니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면 전할수록 그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에 중압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성령님의 위로를 믿기 위해 성령님 도와달라고 부르짖어서 기도해서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성도들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을 통해 주시는 위로도 우리가 등한시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청난 고난과 괴로움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 고뇌와 괴로움을 당하신 것은 자기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예수님이 대신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시면서 이걸 감당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면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기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 비치잖네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오래 전에 제가 지은 찬송입니다만, 기도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과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니 성령께서 이 찬송을 주시더라고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배신하는데도 선구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찾아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며 용납하고 사랑하시며,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사건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베드로에게 평생 잊지 못할 위로와 격려가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찾아가서 “이 자식아, 3년 반 동안이나 내 밑에서 밥을 먹고, 배우고, 따라다녔는데, 그렇게 무참하게 비난할 수가 있느냐? 내가 살아 나왔다. 어떻게 할래?”라고 책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사용한 사랑이라는 말은 ‘아가페’라는 말하고, ‘필레오’라는 말로 쓰는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나를 아가페(사랑) 하느냐?” 즉 ‘아가페’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내가 아니요. 나는 예수님을 필레오(사랑)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을 하지, 영원한 사랑은 못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그냥 필레오하면서 사명을 감당하라.”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사도직이 복구된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에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103편 12절로 14절에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로마서 5장 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로마서 5장 10절)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약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을 원수로 행할 그런 못된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버림받은 그대로를 끌어안고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3. 꿈을 격려하라 (목적 있는 꿈을 격려하라)


 꿈을 주심으로 주님이 또 격려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꿈을 주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에, 형의 보복을 피해서 집을 떠나 어머니 친정집에 피신을 갔습니다. 외삼촌이 사는 머나먼 땅으로 길을 떠난 야곱은 밤이 되자 하늘을 지붕 삼고, 돌을 베게 삼아 들판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때에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자기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까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시어 야곱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말해주심으로 그를 격려해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8장 13절로 14절에 보면 “나는 야훼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꿈을 이룰 때까지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8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장래에 대한 약속을 꿈으로 확인한 야곱은 ‘내가 이 들판에서 자도 사나운 짐승이 나를 공격 못 할 것이고, 외삼촌 집에 가면 외삼촌이 나를 환영해주겠구나.’라는 위안을 얻게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꿈도 귀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적인 꿈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예언적인 꿈을 많이 꾸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꿈을 주시면 마음에 그것이 큰 위로가 되고, 의지하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꿈을 주심으로 격려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십자가가 주는 위로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같은 고난을 당해 본 사람의 위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이 겪는 고난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배고플 때 먹이고, 아플 때 치료해 준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셨고, 수년 동안 함께했던 제자들에게도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답답함과 막막함을 주님께서 이해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청산하시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됩니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위로의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1장3절)’이신 것입니다.

 

 4. 믿음을 가져라 (믿음은 꿈과 말씀에서 주어진다)


 믿음은 꿈과 말씀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자꾸 의심이 생기는데 어찌할까요?’ 의심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반대인 의심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한 방울도 없는 사람은 의심도 한 방울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난 다음 ‘정말일까? 정말일까?’ 그런 의심이 생기면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의심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여러분 말씀을 입으로 자꾸 시인하면 의심은 말씀에 부딪혀 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의심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기면, 마귀는 곧 와서 의심을 자꾸 던져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말씀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던져주는 의심이 우리 말씀의 고백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등불처럼 우리가 들고서 걸어야 됩니다.
 시편 119편 50절에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로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와서 사흘 길을 가되 물을 얻지 못하다가, 물을 발견하여 백성들이 허둥지둥 물을 마시다보니 그 물은 독이 있는 쓴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통곡하고 낙심하였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쓴물이 있는 주변에서 나무를 꺾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의 생활에도 시험과 환난의 쓴물을 마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나무를 던지면, 그 물이 달아집니다. 죄악의 물이 위로 달아지고, 부정부패한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로 쫓겨나가고,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우리의 생활에 부요함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시기 때문에 부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죽어서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고, ‘예수 승천 내 승천’이 되고, ‘예수 천국 내 천국’이 되니 굉장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면 수많은 고통을 당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최고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를 앙망하고 기다리면, 주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마음에 부어주심으로 쓴마음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매달리신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축복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십자가를 놓치지 말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위로와 희망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 이 땅을 사는 동안 수많은 위기와 환난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와 죽음과 질병과 가난을 청산하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과 소망과 위로와 축복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긍정적인 사람으로, 의심의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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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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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저는 “즐거운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확실히 차원이 다른 점이 무엇이냐면 다른 종교처럼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해탈과 도덕적인 훈련과 공부와 명상과 고행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주님께 나와서 믿기만 하면 예수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다른 점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어느 훌륭한 스님이 10년을 누워서 주무시지 않고 앉아서 주무시고 고행을 했으나 세상 마지막날 죽음 마지막날 오셨을 때 나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탄식하는 것을 제가 신문에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인생이지만 오늘 죽더라도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천당갑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가르치는 선각자나 선생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여 년 전에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과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다 부활 승천하여 구원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 크리스마스인데 크리스마스날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기념일인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
첫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미리 예언된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주의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보통 출생한 것이 아니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도 이사야 9장 6절로 7절에 분명히 말했습니다. 보통 어린 아기가 아니에요.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아이 핏덩어리를 강보에 싸서 엄마가 안고 있는데 그 어린 아기를 보고 당신은 이름이 기묘자요, 묘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라고 해 보십시오. 기막힌 일 아닙니까? 상상을 초월한 일입니다. 기묘자라는 것은 기묘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모사는 지혜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핏덩어리 어린 아기를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여러분과 나를 지으시고 있게 해주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평강의 왕,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써 전쟁을 그치게 하고 싸움을 그치게 하고 평강을 가져오는 임금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어린 아기가 없었어요. 예수 이외에 이와 같은 이름을 갖고 태어난 이가 없었고 이것도 예수님 탄생 700여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된 일인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사야 32장 2절의 말씀은 굉장한 위로가 됩니다.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광풍을 피하는 사람, 폭우를 가리우는 사람이 바로 그 어린 아기였다는 것입니다.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이 그림자가 이루어지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2. 예언의 성취
둘째로, 바로 예수님의 탄생은 예언된 것 뿐 아니라 그 성취가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막연히 상징적으로 예언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됨을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겠다고 했으니까 진짜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요셉하고 정혼을 했으나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속도위반을 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속도위반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때는 그런 것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들은 정결한 청년이요,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잉태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로 35절에 보면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상상으로 생각만 해도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마리아가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배가 불러옵니다. 요셉이 가만히 보니까 큰일났습니다. 자기 약혼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배가 불러지니까 일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기를 원치 않아서 어찌하든지 조용히 마리아하고 헤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사람들은 요셉보고 저 나쁜 놈의 자식 기다리지 못하고 속도위반을 해서 마리아를 잉태하게 만들었다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그 책임을 걸머지고라도 뒤로 물러가기로 작정을 하고 마리아하고 약혼을 파혼하기로 작정을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로 25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참 요셉은 칭찬할만 합니다. 그의 약혼녀가 아무리 성령으로 잉태했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얻을 모욕과 정죄의 시선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몸서리칩니다. 그런데 밤에 꿈속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사연을 설명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그 천사의 말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은 다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왈가왈부 말을 하고 이유를 대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따르는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해할 수 없어도 무조건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믿고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마리아가 무사히 해산하도록 전력을 다하여 도와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로마의 황제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땅에 가서 호적하라고 했습니다. 등록을 하라.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혈통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가 불러오는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그는 베들레헴으로 서서히 걸어갔습니다. 늦게 도착하니까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온 사람들이 다 미리 와서 여관을 다 점령하고 민가도 다 점령하고 올데갈데 없어요. 그런데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아는 해산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일났습니다. 급하니까 올데갈데 없으니까 짐승의 우리가 하나 비어 있어서 짐승의 우리에 들어가서 해산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양의 우리에서 태어나서 제일먼저 누인 곳이 양의 여물먹는 여물통에 누인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물통에 누인 것은 우리 모든 인류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구원 얻는다고 하신 것처럼 태어나서 제일 먼저 뉘인 곳이 밥그릇입니다. 짐승의 밥그릇에 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도 부드러운 자리에 드러눕지 못하시고 짐승의 여물통에 누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들판에서 양무리를 치고 들판에 양무리 사이에서 잠을 자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2장 8절로 20절에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목자들만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한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 세사람도 방문했습니다. 동방박사니까 그 당신에 오늘날 이란이나 이라크에 있는 박사인데 이 사람들은 베들레헴까지 오는데 몇 달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나타난 별은 벌써 몇 달전에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이끌어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쯤 되어서 그들이 유대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헤롯궁을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틀림없이 임금님의 궁전에서 태어나신 줄 알고 헤롯궁에 찾아가니까 헤롯이 놀래서 반역자가 태어날 것을 생각하고 이 사람들에게 만일 그 아기가 태어난 곳을 발견하거든 내게 말하면 나도 가서 경배하기를 원한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왕궁에서 나오니까 별들이 또 인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간곳이 짐승의 우리에서 말구유에 누워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들이 선물을 가져온 것을 드렸습니다.


유향과 황금과 몰약을 들렸었습니다. 황금은 임금을 상징했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태어날 것을 상징한 것이고 유향은 선지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를 말하는 것이고 몰약은 쓰지 않습니까? 몰약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재물이 될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주님께 드린 선물이 임금이요, 선지자요,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는 희생양으로써의 그리스도가 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들의 꿈에 하나님 사자가 나타나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마라. 다른 길로 고향으로 가라.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서 빨리 이곳을 떠나라. 헤롯이 어린 아이의 생명을 찾는다.


그래서 어린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어린 아기를 어느 정도 길렀는데 그 세월은 얼마나 걸렸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심을 성경이 말한 대로 알 수 있는 것은 기적적인 탄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리스도는 그 태어난 현장에서 예언대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목자들이 와서 경배한 것은 예수님이 목자장인 것입니다. 야훼는 우리의 목사시니 우리가 부족함이 없다고 목자장이기 때문에 목자의 부하들인 일반 목자들이 와서 절을 했고 그 다음 동방박사들이 와서 예수님의 생애를 예언적으로 이미 선물을 하신 것입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주어서 왕이요, 선지자요, 희생제물이 될 것을 예언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는 오늘날 우리의 구원과 희망의 빛으로 오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구원과 희망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첫째,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였지 않습니까? 아담, 하와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죽음을 가져온 조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조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혈통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인류조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로 47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써 예수님 이후에는 인류 조상이 있을 수 없어요. 첫 아담은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왔으나 마지막 아담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어 그리스도는 사람들 생명의 빛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마지막 아담으로써 우리 조상으로 왔는데 그를 믿는 자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의 의로운 행동으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자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병든 적도 없습니다. 저주받은 적도 없습니다. 죽을 필요가 없는 분인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재물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몸찢고 피흘려서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한 거대한 희생을 하시고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고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를 흘려서 그 핏값으로 우리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 우리 인류의 조상들에게 주님께서 재물을 드릴 때 그냥 드리지 말고 꼭 양을 잡아 피를 흘려 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이 우리의 희생제물로 오셔서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속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 하다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을 잡아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바르고 난 다음에 나왔던 것입니다. 문설주에 피가 있는 집은 하나님이 멸하지 않고 그대로 다 나오게 했는데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다 멸하고 만 것입니다. 그 피를 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보혈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믿음으로 여러분 마음의 문설주에 피가 뿌려지고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는데 이 죄사함이라는 것은 그냥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한번도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지면 한평생에 한번도 죄를 짓지 않은 죄를 전혀 안 지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서 의롭다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피를 믿으면 죄를 한번도 안지은 사람으로 부끄럼없이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므로 삶의 목적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일이 끝나면 이 땅을 떠나서 우리는 천국에 가는 삶의 의미와 가치가 알려지고 죽음이 오지만 겁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십자가를 통해서 놀라운 것은 새생명을 받을 뿐 아니라 새생명의 보조인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주셔서 성령이 온 증거로써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당신 이 시간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라고 하면 이 사람 미쳤나?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렇게 하노? 구원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나는 요사이 텔레비를 보고 놀라운 것은 개를 가지고 이름을 붙여서 내가 너 엄마다. 내가 너 아빠다고 하는데 개하고 사람하고 어떻게 생명이 같습니까? 생명의 질이 다른데...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조금도 이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내 아버지의 그 자녀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나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마음에 이상하게 느껴집니까? 아니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5절로 16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하나님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보증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는 성령이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다 그 속에 성령이 들어와 있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 속에 마귀의 영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영이 들어와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끌고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이 들어와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전인치료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 마음속에 쓴물이 가득합니다. 왜, 이 세상에 살면서 늘 쓴물을 마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악의 쓴물을 마시고 미움과 원한의 쓴물을 마시고 질병과 고통의 쓴물을 마시고 저주와 가난과 낭패와 실망과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쓴물을 마시고 죽음의 공포와 좌절의 쓴물을 마십니다. 천지가 쓴물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쓴물이 가득하므로 불행합니다. 이 쓴물을 달게 해보려고 우리가 얼마나 애를 쓰는 것입니까? 지위, 명예, 권세, 돈, 교육, 아름다운 집, 좋은 옷,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마음속에 쓴물을 없애려고 하는데 쓴물이 없어지나요? 옛날에 우리가 자랄 때는 6.25사변 때이기 때문에 정말로 가난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밥먹고 산다는 것이 모든 삶의 가장 중심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여러분 보면은 뭐 노숙자가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그때는 모두다 헐벗고 굶주렸는데 지금은 그래도 밥은 먹고 옷은 다 입고 그때보다는 훨씬 잘 삽니다.


그런데 그때 사람하고 비교해서 지금 훨씬 행복하냐. 훨씬 덜 행복하거든. 왜, 그때는 죽도록 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날은 하루에 41사람이 자살합니다. 그중에 우리가 들어가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41명이 자살합니다. 환경이 아무리 아릅답게 되어도 마음속에 쓴물이 달아지기 전에는 행복해지지 않아요. 돈이나 지위나 명예를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아도 마음에 그것이 행복을 갖다주지 않습니다. 행복은 무엇이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모실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쓴물이 달아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영혼에 쓴물을 달게 하시고 마음에 행복을 갖다주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나가면 매일같이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쓴물을 달게 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쓴물은 매일같이 달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밖에는 우리 마음에 쓴물을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육신의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저가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실로 우리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법적으로 보면은 2천년 전에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병을 담당하셨어요. 이것은 법적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내가 병이 들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나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할까요? 법을 가지고 싸워야돼요. 여러분, 여러분 법적으로 여러분이 마땅한데 고소를 당하면 변호사를 사서 대응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의 종에게 찾아가든지 다른 성도들과 합쳐서 병의 원수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네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내가 네게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라고 했었습니다. 단호한 결심을 해야 돼요. 병 안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병이 듭니다. 병이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병을 이기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안에서는 이기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병을 짊어지고 갔기 때문에 병하고 매일같이 싸워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병을 극복해야 돼요. 오늘도 여러분 교회왔으니 예수 이름으로 병을 극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혼의 쓴 물도 달게 해주시고 육체의 질병에서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우리 육신의 조상 아담은 타락해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죽게 만들고 육신적으로 병들어서 죽게 만들고 환경을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 속에 뒹굴게 만들었는데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오셔서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병을 대신 짊어지고 그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에게 전인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소망 있네. 영원한 영적인 치료와 육신적인 건강과 환경에 가시넝쿨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 우리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의 복이 뭡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네게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고 번창케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새해에는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며 번창케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충만을 항상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음부와 지옥을 멸하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에서 천국 낙원으로 여러분을 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께서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천국 올라가셔서 2천년 동안 천국에 올라오는 당신의 자녀들의 거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나의 거처도 주님이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을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함께 이미 승천해서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있는 우리 처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놀라운 하나님 말씀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의 새로운 모습을 마음속에 확실히 바라보고 믿음으로 타협하지 않고 나가면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깨달아 알고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에 승리하려면 목표가 분명해야 돼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결코 이기겠다. 목표가 분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겨도 좋고 안 이겨도 좋다. 이길는지 안 이길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나는 승리하는 삶을 살겠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을 살겠다.


목표가 분명하고 꿈이 선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죄악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불퇴전의 믿음을 가져야 돼요.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절대로 물러가지 말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입술의 고백을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당당한 입술의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분 것이 되고 마귀가 다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희미한 신앙은 안됩니다. 싸움은 치열한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데 희미하게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싸움은 너죽지 너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목표가 뚜렷하고 꿈을 확실히 가지고 물러가지 않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시인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보통 싸움 같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를 걸머졌어요? 십자가가 여러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6시간 매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 고통 가운데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과 대항해서 싸우는데 그만한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애쓰고 힘써서 싸워야 주님이 우리를 구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워서 이겨놓은 것도 우리가 취하기 위해서는 그런 결심이 있어야 돼요. 새해에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다는 목적을 꼭 가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새롭게 된 모습을 항상 마음속에 상상 하십시오. 늘 꿈꾸십시오. 그리고 절대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한발자국 물러가면 두발자국 전진하고 두발자국 물러가면 세발자국 전진하더라도 물러가면 안됩니다. 물러가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강하고 담대하고 용감하게 말하십시오. 할 수 있다고 말하십시오. 이긴다고 말하십시오. 나는 안 죽는다고 말하십시오.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하십시오.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패배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마음을 통해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떠나서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필요하고 여러분과 함께 주님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무효가 되지 말고 효과를 발생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솔제니친이라 하면 여러분 위대한 문학가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탄분으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솔제니친은 구 소련의 작가로서 당시의 체제를 비판하다가 반역자로 몰려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강제 노역을 당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고통 가운데 암에 걸렸습니다. 춥고 헐벗고 굶주리고 배고프고 중노동을 하는데 암이 걸렸으니 이제는 죽은 목숨인 것입니다. 그는 좌절 가운데 정신력이 희미해지고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탈진하여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눈도 희미하고 정신도 아물아물하고 말도 더듬고 걸음도 잘못걸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철창을 이렇게 잡고 있는데 어떠한 사람이 앞에 오더니만 자기를 가만히 눈을 맞춰 보거든요. 보더니만 발로써 그리는데 보니 십자가를 크게 하나 그려요. 그려놓고 난 다음 손으로 십자가를 가르키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지나가버립니다. 말을 한마디도 안했어요. 솔제니친이 철창 밖에서 하는 그것을 보고 꿈인지 생시인지 그 사람이 천사인지 사람인지 구별을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지나고 난 다음 발로써 그리던 그 자리에 십자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십자가를 통해서 큰 생기가 그 몸속에 들어왔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했던 마음속에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살 수 있다. 살아가야 되겠다는 힘이 생기고 암을 이길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간수에게 부탁을 해서 성경을 하나 갖다달라고 해서 성경책을 넣어주기 때문에 그는 그때로부터 주야로 성경을 읽고 성경 가운데서 용기와 희망을 얻고 난 다음에 8년 동안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얻게 되고 암이 깨끗이 나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에게 갖다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짐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 생명 내 생명으로 부활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미국으로 추방당했는데 미국에서 추방되어서 그가 시문학 활동을 했고 그 문화 활동중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책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탔었습니다. “러시아의 양심”으로 오늘날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곤비하고 참담한 땅에서 고통 받을지라도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새 생명을 얻으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얻고 육체의 질병에서 치료 받고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각오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 다 잃어버려도 보배인 성경 하나 가지고 있으면 사지에서 다시 부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이 황무지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여러분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긍정적인 고백만 있으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하나님은 변역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걸머진 것은 우리 육신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우리 인생을 망쳐 놓은 것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 왔노라. 풍성한 기쁨, 풍성한 평안, 풍성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2천년 전 크리스마스에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여러분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행위로써 얻는 대가가 아닙니다. 구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모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내 손녀와 손자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갖다주는데 받으니까 기분이 참 좋더라구요. 대가를 좀 줄까하다가 안줬습니다. 왜냐하면 선물은 대가를 주면 안되기 때문에... 선물은 선물로 받아야 되므로 공짜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구원은 대가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대가없이 무조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그 아들 예수님을 주셨고 그 아들 예수가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영광이요 승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원받고 난 다음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변화와 성장은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시작되는 것인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로 오신 것을 기억하고 찬양해야 될 날인 것입니다. 이날보다 즐거운 날이 사실 없어요. 사람들은 모두다 죄와 정죄감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죄없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조용한 시간에 자기 마음속에 죄책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있다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러한 헛된 생활 속에서 고통 당하고 죽지요. 안 죽는 것같이 생각하지만 죽는 공포도 있고 죽음의 괴로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자가 왔으니 얼마나 큰 선물이요 위대한 은혜인 것입니까? 죄에서 건져 주시고 허무와 무의미에서 건져 주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원한 희망으로 우리 앞날을 비춰주시는 주님이 여러분의 구주로 오늘 오셔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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