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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히 서리라

 

(92:12-l5) 

 

함정과 올무가 많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성도들에게는 견고한 보장이 절실하게 요

 

구되는데, 본문은 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1 의인은 번영한다.

 

의인은 번성할 뿐만 아니라 강하다.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지만 그들의 부리가 뽑히거나 가지가 꺽이는 일이란 도무지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펀에 계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이 잠시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의를 행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2, 노년은 영광스럼다.

 

사람이 늙으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나 경건한 사람들이 노년은 풍족하고 영광스럽다. 바울이 증거했듯이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웃ㄱ한 신앙과 인격에 있음을 명심하고 진정한 미를 가꾸도록 힘서야 하겠다.

 

 

 

3, 인생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높고 규모가 큰 건물일수록 기초가 견고해야 하듯이 인생도 기초가 견고해야 실패함이 없게 된다. 의인이 늙어서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한 까닭은 그들의 인생 뿌리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초가 되시는 인새은 영원토록 견고하여 흔들림이 엇으며 실해하게 되는 법이 도무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의인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으므로 견고하여 영광스러움이 들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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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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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에 관한 예화 모음

▣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

  오리건의 엘리자베스 코넬리 여사는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썼다. "나는 국방성에서 보낸 전보를 받았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던 조카가 전사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축 늘어졌습니다. 내 마음은 쓰라리고 미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직을 하려고 책상을 정리하는데, 편지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몇 년 전 내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조카가 내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조카는 나를 위로하려 했던 것입니다. '물론 모두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지만 아주머니께서는 특히 더하실 겁니다. 그러나 아주머님은 이겨 나가실 것입니다. 저는 항상 웃으며 모든 일을 남자답게 대하라고 하신 아주머님의 말씀을 늘 기억할 것입니다.' 마치 내 옆에서 '아주머니, 저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해보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웃으면서 헤쳐 나가세요' 하고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을 계속했습니다. 나는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도 보내고 성인 교육반에도 나갔습니다. 과거의 쓰라림은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마치 내 조카가 바랬던 것처럼 매일을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말했다. "발생한 사건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모든 불행을 극복하는 첫걸음이다." 조지 5세는 버킹검 궁전에 있는 그의 도서실에 "저버린 달 때문에, 쏟아진 우유 때문에 울지 않게 가르쳐주소서"라는 좌우명을 걸어놓았다.   

▣ 불행의 변수 

  1950년대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가 쓴 소설이며 시의 결정들을 가차 없이 서로 비평했다. 그것은 그들의 창작에 도움이 되는 듯 보였다. 한편 여학생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에서는 혹평은 일절 피하고 좋은 부분만 칭찬했다. 10년 후,그 여학생들 중 대부분이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유망하던 남학생들 중에서는 단 한명의 뛰어난 작가도 나오지 못했다. 사람은 보통 95%의 좋은 점과 5%의 좋지 않은 점을 갖고 있다. 100%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95 %의 좋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5%의 좋지 않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95%를 보고 사는 사람은 자신감 있게 산다.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 수도 없다. 상대방의 5%쯤은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채워주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행복하다. 
[국민일보] 장자옥 목사(간석제일교회)  

▣ 불행한 미국 가정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든 제도가 가정이다. 가정이야말로 인간 생존의 보금자리요 행복의 안식처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세계에서 가장 문명국인 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면 하루에 9,077명이 태어나는데 그 중 1,282명은 사생아이고, 하루에 5,962쌍이 결혼하는데 그 중 1,986쌍이 이혼을 한다. 또 하루에 2,740명의 아이들이 가출하고, 하루 69,493명의 십대들이 성병에 감염된다. 강간은 매 8분마다, 살인은 매 27분마다, 강도는 매 78초마다 일어나며, 자동차는 매33초마다 분실된다. 그리고 2,740명의 10대 소녀들이 임신이 된다고 한다. 
 미국의 어느 대학 교수가 가정문제를 연구한 결과 가정의 최대 불행은 75퍼센트가 십계명중의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하바드 대학의 피티릿 소로킨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결혼 25건중 1건이 이혼으로 끝나고 있는데 부부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경우, 1,015건의 결혼 중 단 1건의 이혼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아도 행복한 가정은 주님을 그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그 가정에 모시지 않고 행복을 바란다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 불행한 황태자비 다이애나 

  지난 1997년 8월 31일 새벽0시35분(현지시각·한국시각 31일 낮12시35분) 36세로 마감한 '세기의 신데렐라' 다이애나 황태자비, 그녀는 무엇이 부족했겠습니까? 애정입니다. 두 아이를 낳을 때까지도 챨스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았습니다. 승마교수와 염문, 황태자와 이혼, 그리고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 마지막 남자 도디 알 파예드(42)와 프랑스 남부 생 트로페즈에 있는 파예드의 아버지 소유 별장에서 함께 휴가를 보낸 뒤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안전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메르세데스 벤츠 600. 그러나 도로 중앙 분리대에 한 차례 부딪힌 뒤 다시 터널 벽에 충돌한 벤츠 600은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습니다. 라디에이터가 자동차 앞좌석까지 깊숙이 처박혔고 차량 운전사와 다이애나의 애인 도디는 이미 숨져있었습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량 속에서 다이애너를 구출, 응급조치를 취하다 새벽2시쯤 파리 동남쪽의 피티에 살페트리에르 병원으로 후송, 긴급 수술을 받았으나 새벽 4시쯤 결국 폐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현대판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행복과 불행 

  1968년 6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은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길거리에 지갑을 떨어뜨린 후 그 속의 신분증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확인했다. 그 결과 약 45%의 신분증이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6월4일은 단 하나의 신분증도 주인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날은 바로 미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로버트 케네디가 괴한에 의해 암살당한 날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한 가지 나쁜 소식이 사람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소식은 전염성이 강해서 금방 전체 분위기를 침울하게 만든다. 또한 좋은 소식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인간의 삶은 그 출발점을 ‘부정’과 ‘긍정’중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진다. 불행과 행복은 항상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 탐욕의 종점은 불행과 죽음 

  한 농부가 부지런히 일해 제법 넓은 농지를 갖게 됐다. 그는 항상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괴로웠다. 그런데 일정액의 돈을 내면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만큼의 땅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농부는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 그곳으로 갔다. 과연 그 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평야갸 펼쳐져 있었다. 광야의 추장은 농부에게 말했다.“당신이 하루 종일 걸어 다닌 만큼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소.단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단 한평의 땅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농부는 중얼거리며 마라톤 선수처럼 광야를 질주했다. “내 땅….해가 지기 전에…” 그는 많은 땅을 차지할 욕심에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했다. 태양이 막 대지에 얼굴을 묻을 무렵, 그는 출발점에 도착했으나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탐욕의 종점에는 ‘불행’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 불행한 사람들의 몇 가지 공통점 

  불행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첫째,완벽주의자는 불행하다.그는 모든 걱정을 껴안고 인생을 살아간다. 둘째,항상 남과 비교하려 한다.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경쟁심은 평안을 앗아간다. 셋째,자기 자신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아무도 이런 사람과는 함께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그래서 늘 고독하다. 넷째,작은 일에 신경을 집중시킨다.이런 사람의 표정은 항상 불만과 우울함으로 가득차 있다. 다섯째,매사에 의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여섯째,이웃을 위해 절대로 사랑과 물질을 베풀지 않는다.한번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밖으로 나올 줄을 모른다.
 사람은 더불어 살때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삶의 과정을 통해 참행복을 누린다.행복은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다.오늘의 삶이 비록 구차하게 여겨질수 있으나 사실은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숨어 있다.영화의 결론을 알면 무슨 재미가 있는가.인생도 마찬가지다.오늘에 충실한 사람이 행복의 열매를 수확한다.   

▣ 내가 불행한 이유 

  "왜 난 이렇게 불행할까? 릴라가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왜 그녀는 나를 원하지 않는 걸까? 내가 너무 작고 초라해서일 거야. 

그럼 왜 나는 이렇게 작아진 거지? 그거야 내가 불행하니까. 결국 내가 불행한 이유는, 내가 불행하기 때문이군."   

▣ 행복할 때 불행을 생각하라. 

  행복할 때는 타인의 호의를 쉽게 살 수 있고 우정도 도처에 넘친다. 이는 불행할 때를 위해 저장하는 것이 좋다. 그때를 위해 지금 친구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라. 지금은 높이 평가되지 않는 것이 언젠가는 귀하게 여겨지리라. 미련한 사람은 행복할 때 친구를 두지 않는다. 지금 행복할 때 친구를 모르면 불행할 때 친구가 그대를 알지 못할 것이다. 행복할 때 불행을 생각하라.   

▣ 불행한 공전 

  자기 꼬리를 붙잡기 위해 빙글빙글 도는 어린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자신의 꼬리를 뒤쫓으며 저것만 붙잡으면 뭔가 대단한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늙은 개는 강아지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얘야, 너는 행복이 꼬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불행한 공전이다. 너는 꼬리를 잡기 위해 뛰지만 나는 내 할 일을 위해 뛴단다. 내가 마땅히 내 할 바를 좇아가면 꼬리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거든.” 
 자기 꼬리를 붙들기 위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어린 강아지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의 기준은 나입니다. 그런데 행복의 기준을 나로 잡아서는 결코 꼬리를 붙들 수 없는 어린 강아지처럼 아무리 나를 위해 살아도 진정한 행복의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보통 행복을 자신을 하나님처럼 신격화하면서 누리는 즐거움으로 착각하는데 진정한 행복은 창조 목적대로 돌아간 삶 속에서 누리는 영혼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 불행을 예술로 승화시킨 베토벤 

  어느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남편은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심하게 구타합니다.거기다가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가 힘들 정도입니다.그런데 그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태아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그 아이는 낙태시켜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다네!” 그 임신된 생명은 바로 베토벤이었다.그를 낳은 어머니는 결국 그가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어머니를 여읜 베토벤은 11세 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예술을 시작했다.베토벤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불행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는 그 불행의 조건을 오히려 위대한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창조적 조건으로 승화시켰다.시편 기자도 고난의 긍정적인 면을 노래한다.“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 '불행'과 '사망'의 씨앗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은 간단하다.원주민들은 원숭이들이 다니는 길목의 나뭇가지에 열매를 넣은 조롱박을 매달아 놓는다. 그리고 조롱박에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놓는다. 원숭이는 조롱박에 맛있는 열매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원숭이는 조롱박의 구멍이 너무 작아서 열매를 움켜쥔 손을 빼내지 못한다. 사냥꾼들이 몰려오면 자신이 쥐고 있는 과일을 놓고 도망을 가야 하지만 원숭이에게는 그런 자각이 없다. 결국 원숭이는 한 손을 조롱박에 넣은 채 사람들에개 붙잡힌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사람이 재물을 움켜쥔 손을 놓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있다. 재물을 숭배하는 사람은 그 자신도 재물로 변화된다. 진정 행복을 얻으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과욕은 ‘불행’과 ‘사망’의 씨앗이다.   

▣ 불행한 가정생활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와 미국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불행한 가정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부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허물을 깨닫고 자기가 남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것을 그 자식들 앞에서 자인하고 자기의 행한 일들이 미친 사람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비통하게 고백하였다. 또 아브라함 링컨은 난폭하고 무례한 자기 부인에게 어쩔 수가 없어서 가정을 점점 멀리하고 여관에서 외박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생활을 계속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 불행한 조건에서도 귀하게 살다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그 저자 디포가 감옥에 있을 때 쓰여졌다. 하루에 자기의 시력을 5분씩밖에 쓸 수 없었던 나쁜 시력의 프레스코트는 위대한 역사가가 되었다. 거의 완전한 귀머거리가 되고 그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찼던 그때에 베토벤은 위대한 교향곡들을 작곡, 완성했다. 모짜르트도 불치의 병으로 희망 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의 불후의 오페라들을 작곡했다. 존 칼빈은 육신의 병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는 생활 중에서 위대한 신학 저술을 했다. 「천로역정」이라는 영구히 빛나는 책도 그 저자 존 번연이 눈썹에 곰팡이가 슬 정도의 음침하고 습기찬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쓴 것이다. 원수들이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찾아다니는 동안에 발트부르크의 성 안에 숨어 있던 마르틴 루터는 유명한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여 농부나 평민이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드디어 펴낸 것이었다. 평생을 소경으로 살아야 했던 크로스비 여사는 영감이 충만한 수많은 찬송들을 써서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고 있다.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불구자였던 헬렌 켈러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내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걸어 다닐지라도, 나의 굽힘 없는 영혼은 저 하늘의 독수리마냥 드높은 창공으로 오릅니다!" 이것은 하늘을 한번 보지도 못했고, 독수리의 소리를 한번 듣지도 못했던 위대한 사람의 말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한탄이나 열등감, 불행한 조건 등에 얽매여 사는 패배자의 생활을 하지 말자. 당신은 축복을 받았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당신은 귀중한 인생이다. 당신은 넉넉한 승리를 거둘 사람이다. 안심하자! 확신하자! 그리고 기뻐하자!(목사, 윤영준)   

▣ 철학이 없는 유산은 자녀를 불행하게 한다.

  미국 조지아주 중서부에서 대부호로 명성을 떨친 레스터가(家)가 있었다. 레스터는 이곳에서 담배농사를 지어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주변의 농토들을 모두 사들여 담배농사를 지었다. 레스터의 땅을 밟지 않고는 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길을 토바코 로드(담배의 길)로 불렀다. 레스터는 후손들에게 엄청난 땅과 돈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그런데 레스터의 3대 후손들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3대손인 지이터가 소작농으로 전락해 유일하게 그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1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5명은 일찍 사망했다. 9명은 가출했다. 이 부부는 고향을 지키며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하루는 지이터 부부가 잡초더미에 불을 놓았는데 그 불이 집에 옮겨붙어 타죽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돈’ 대신 좋은 ‘습관’과 ‘전통’을 유산으로 남겨준다. 철학이 없는 많은 유산은 자녀를 불행의 늪으로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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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이런 동영상을 보았다 

설교 이상으로 지옥을 잘 설명해 주는듯 했으며

예수를 믿지 않고 지옥으로 가게 된다면 

분명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때문이다.

동영상을 올려주신 유튜브 [라이프TV]에 감사드린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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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헌신예배 설교 - 거룩한 사역자

  

 

제목 : 거룩한 사역자

말씀 : 대하20:20~23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 당시 암몬과 모압과 에돔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유다를 침공하였는데 여호사밧은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라며 너희가 싸울 것이 없이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대열을 이루고 서서 내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희한한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대열을 이루고 그 앞에 성가대를 앞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요. 찬송이 시작될 때에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자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칼 한번 안 쓰고 오직 찬양으로 전대미문의 승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성가대가 가져야 할 자세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성가대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할지를 살펴볼 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성가대원들은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먼저 오늘 21절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여기에 보면 거룩한 예복 즉 성가대 가운을 입혀서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비상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송은 왠 찬송이며 거룩한 예복은 또 뭡니까? 그럼 왜 이런 비상상황에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찬양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룩한 사명감의 고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힘으로 그들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가대도 거룩한 예복 즉 가운을 입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폼으로 입는 게 아닙니다. 사람보기에 멋있으라고 입는 게 아닙니다. 목사 가운이나 장로 가운이 성가대 가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는 거룩히 구별되어 그리스도로 옷입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거룩한 사명을 받은 자로 구별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운을 입는다고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그 거룩한 직분이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원들은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을 위하여 특별히 세움 받은 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입는 예복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믿음과 고백과 사명감이 진정한 예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있다면 일상적인 삶도 거룩하게 성결하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아무렇게 하면서 성가대석에 앉아서 아무리 꾀꼬리 같은 소리로 찬양을 해도 그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물론 예배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세상에서는 그냥 내 마음대로 살다가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럴듯하게 찬양한다고 그게 온전한 찬양이 되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인자와 자지를 높여 드리는 일인데 그러한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해야 하고 그렇게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당연히 일생생활에서도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 성가대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나는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성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 사역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일상생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며 믿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며 더욱 생명의 은총과 능력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성가대는 믿음으로 앞장 서야 합니다.

성가대는 귀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니 만큼 일상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나 모범을 보여야 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귀한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모든 일에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1절 다시 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여호사밧은 성가대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군대의 앞에 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전술적으로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다. 적군이 성가대를 향해 돌진해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가대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두렵고 떨려서 찬양도 제대로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선두에 서서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20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즉 여호사밧이 ‘걱정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면 형통할 것이다.’라고 하자 성가대원들이 그 말씀을 믿고 적을 눈앞에 두고 군대의 제일 앞에서 담대히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성가대원들은 이런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믿음 생활에서 앞장서고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교회는 성가대가 목사님 강단보다도 더 앞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성가대원들은 목사님 뒤통수 보면서 예배를 드리더라고요. 오늘 이 말씀을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뭐니뭐니해도 예배의 꽃은 말씀인데 말씀보다 앞에 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또 어떻게 보면 뭐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일 앞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하려면 마주보고 해야지 뒷모습보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야기할 때 한 사람이 뒤돌아서서 하면 어떻겠어요?

여하간 여러분,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귀한 사명,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은 언제나 남보다 앞장서야 하고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성가대도 동일합니다. 특히 성가대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마찬가지지만 성가대는 정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면 예배에 빠지면 안됩니다. 안 그래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빠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바쁘다고 빠지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빠지고 상황이 그래서 여건이 그래서 빠지고... 아닙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예배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로 예배를 방해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그런 합리화나 변명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닙니다. 사탄의 소립니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휴 목사님, 세월이 그런데요. 요새 교인들 다 그런데요. 그러면 교인들 다 도망갑니다. 그러면 힘들어서 교회 생활 못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가 힘들어진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따라 환경 따라 상황 따라 사람 따라 사람 생각대로 편한대로 하니까 믿음이 죽어가고 교회가 힘을 잃고 교회가 욕을 먹고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면 안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모든 일에 본이 되고 앞장서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졸면 안됩니다.

그리고 물론 교회의 다른 일에도 앞에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폼 나게 싹 차려입고 하는 일에는 제법 참여하고 궂은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부모들도 보면 자녀들을 폼나는 일은 안시켜주면 뭐라고 그러고 궂은 시킨다고 뭐라 그럽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궂은 일에도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주의 어떤 교회 이야기인데 그 교회 장로님이 자기 교회는 성가대 찬양 소리가 잘 안 들릴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성가대가 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다른 쪽에서 학생들이 관현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합주를 하는데 그 악기 소리 때문에 성가대가 찬양할 때에 고음은 그런대로 들리는데 저음은 안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악기연주자를 줄이자고 하니까 목사님이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서운해 해서 곤란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학생들에게 교회 화장실 청소를 시키다가 그만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아니 화장실 청소를 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여러분, 폼나는 자리는 안 앉혀 준다고 뭐라 그러고, 궂은 일은 시킨다고 뭐라 그런다면 이게 믿음있는 행동입니까? 여러분,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도 궂은 일도 해야 합니다. 궂은 일 하는 사람 따로 있고 폼나는 일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폼나는 일만 하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요 자기가 영광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특별히 너무나 귀한 찬양의 사역을 맡은 우리 성가대는 찬양하는 일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모범을 보이고 앞장섬으로 삶의 예배가 뒷받침되어 여러분의 찬양이 진정 향기로운 찬양이 되고 여러분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성가대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자기 만족이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찬양을 하면서 우리도 은혜와 위로가 되고 소망도 갖게 되고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찬양은 그게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찬양이 뭡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찬양은 나의 기쁨이나 만족이나 은혜나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기쁘시게 해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상황이나 환경도 이기게 되고 위로도 받고 소망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바뀌어 자신이 뭔가 얻으려고 찬양을 한다면 그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노래이므로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절 후반부 다시 봅니다.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보세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힘을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 저들을 물리쳐 주소서. 그렇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자하심을 믿고 그래서 그렇게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찬양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도와달라고 위로해달라고 힘을 달라고 소망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진짜 찬양입니다. 나의 위로 소망 구원 도움이 목적이 되면 찬양이 아니라 찬양을 나의 필요를 채움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진정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가대는 이 찬양 사역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되새겨보며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는 일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생활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보기에 그럴듯한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앞장 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정말 여러분의 찬양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상달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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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 예배의 이유> 존 맥아더 설교 중에서

 


예배의 이유


"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교회를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를 갑니다."       - 존 맥아더, '참된 예배' 중-

 

예배에 대한 훌륭한 강의나 저서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이야기에서 '예배란 무엇인가?' 혹은 '찬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말하는 것에다가큰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 한가지는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이든, 찬양이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간략하게나마 예배나 찬양에 대한 기초적 정의를 살펴보면 이것이 왜 중요한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드릴 가치가 있는 곳, 혹은 대상에게 가치에 맞게 자신을 쏟아 붓는 행위'입니다. 찬양praise은 단어 그대로 '칭찬, 찬양, 찬미하다'라는 뜻이라는 건 잘 아시겠죠?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모든 것을 다 드릴만한 가치 있는 대상을 섬기는 것이 예배이며, 그 대상에 대한 모든 것을 칭찬하고 찬미하고 선포하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건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시간과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 글의 제목과 관련 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당신은 교회에 무엇하러 옵니까? 이 질문의 답에 따라 여러분은 "예배자"일 수 있고, 혹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종교인"일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반드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고 재정하신, 정해진 법( 혹은 예식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는게 맞을지도 모르겠군요.)에 따라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나에게 위안이 되고, 어떤 힘을 얻기 위해, '교회의 예식' 이라고 하는 절차에, 자신이 조금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조금 희생함으로 어떤 '선물'을 얻고자 하는 것이면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금 다시 점검할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어떤 분들은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아니, 여기 누구라도 하나님의 위로를 얻으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게 잘못인가요?"라는 의문들 말입니다. ^^

우리가 예배드리고 나서 말하는 내용들, 즉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다", "오늘 새 힘을 얻었다",  혹은 '예배를 통해 위로를 받았다.'라는 말 자체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배 드리는 동기를 살펴보자면 아주 그것은 분명하고 극명하게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기쁘셔서, 예배를 드린 선물로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셨다면 분명 그것은 예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만을 위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예배를 드리러 왔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음과같은 생각을 합니다. '아, 오늘 예배는 위로가 필요해서 왔는데 본문 말씀이 나와 전혀 상관없었어', ' 찬양하는 스타일이 머 저래? 이거 원, 음악적인 성향이 맞는데로 가야지.'라는 말을 쉽게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왜냐면 그것은 그냥 여러분이 편하게 느끼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를 바랬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배에 참석했는데 운좋게도 모든 말씀이나 예배가 내가 좋아 하는 분위기,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오늘은 정말 예배다웠다고 말하게 되는 건 실은 예배가 아니었던 것이죠. 충격이 되실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교회 마당만 밟고 갔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기에 예배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이 주시는 힘으로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그 분을 주로 고백하지 않고, 그 분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서만 우리는 예배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기초가 있으면 우리는 비로서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으로 서로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예배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찬송이나 기도, 모든 것이 잘 준비되어진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오늘 찬양은 좋기는 하지만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어. 그러니깐 조심스럽게 한번 인도자에게 건의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음악적으로는 참 좋았지만, 다 함께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알 수 있으면서도 모든 회중이 하나님께 자신의 고백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야. 이런 건의는 찬양이나 예배를 준비한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힘이되고 살이 되는 것들입니다.^^

또한 이러한 예배에 대한 기초적인 기준 아래에서만 우리가 예배에 사용하는 '영상'이나 '음악'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라는 기초적인 관점에서 점검도 없이 '요즘은 영상이나 듣는 것에 익숙한 미디어 세대이니깐 당연히 문화적인 것을 예배에도 도입 해야 해'라고 하면서 장비나 어떤 것들을 도입한다면 이보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소중하게 교훈을 얻은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홈페이지' 디자인 작업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한번은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홈페이지 하나를 만들 때에도 저는 분명한 이유가 없이는 색깔이나 문양, 그림(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행을 따라 예배에 아무 것이나 도입 할 수 없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시대에 흐름에 따라 '복음'이라는 본질을 여러가지 도구에 담아 전파한 것은 사실이지만, 검증도 없이 시류에 따라 무엇이든 예배에 도입하는 건, 거의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아, 이 이야기에 대해 확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냐구요? 예, 당연히 있지요!

구약성경, 사무엘하 6장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이 있는 '다윗 성'에 모시려고 사람들을 보내어 ' 아비나답 '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서 그것을 옮기도록 합니다.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을 하던 중 갑자기 소들이 날뛰는 바람에 그만 그 궤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너무 자연스럽게 '웃사'라고 하는 사람이 법궤를 붙들게 되는데 그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 사람을 치셨고, 그로 인해 웃사는 죽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그만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아, 두렵다. 내가 어떻게 그 궤를 다시 모셔 올 수 있을까?'  그러다가 다윗왕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그 법궤에는 고리가 달려 있는데, 여기에 긴 막대를 끼워서 그것을 메고 옮겨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다윗은 이런 방법을 따라서 법궤를 무사히 가져 올 수 있게 되고 너무 기뻐서 춤을 춥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아주 두려운 일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호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가 / 성령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배에 대한 이해가 없이 우리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 도입하는 그 어떤 것도 조심하지 않고 검증하지 않고, 구별해서 드리지 않으면 웃사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안 벌어지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초반에 너무 이야기를 길게 한 것 같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러분의 예배의 동기는 무엇입니까?당신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으로서 예배하러 오신 '예배자'입니까?라는 질문을 드리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실 수 있도록 하는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다음번에 또 다른 주제로 만나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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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추모 예배 설교 (Christian Memorial Worship Preaching)

 


  
`그리스도인의 추모 의례

성도들이 조상의 기일에 드리는 추모식은 효의 한 방법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효도하고(엡6:1절)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서는 오늘을 살게 하심에 대한 감사와 함께 조상들이 섬겼던 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기를 다짐하며 조상의 그 뜻과 발자취를 더듬고 따르기를 다짐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추모 예배 설교

제목 : 평안히 거하는 영혼, (시25:12-14절, 304장(어머님) 235장(아버지)

고 ㅇㅇㅇ ㅇㅇ의 ㅇ주기 추모예배를 맞이하여 "평안히 거하는 영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져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세계는 평안의 세계입니다.

(1)하나님을 떠난 세계는 그 어디나 불안과 공포의 세계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의 세계는 언제나 평안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주안에 평안이요 죽음 후에도 그 세계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둘째. 평안을 얻는 길입니다.

(1)여호와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는 이 세상과 천국에서도 계속되는 성도의 의무요 사명인 것입니다.

(2)성도 자신과 자손이 평강을 얻습니다. 천국의 축복이 자손 만대까지 이어진 다는 것입니다.

고인은 주안에서 천국에 가서 평안의 품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자손된 여러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중에 그 평안을 함께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제목 : 의인의 자손의 복, (시37:25-29절, 304장 (어머님) 235장(아버지)

"의인"은 어떤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사는 자를 의인이라 합니다.(롬1:17, 3:21-25절), 그렇다면 고인 ㅇㅇㅇ ㅇㅇ는 믿음 생활을 하다가 주의 품으로 가셨으니 "의인"이라 할 수 있고 본문은 그의 자손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25상)
둘째. 의인의 자손은 걸식하지 않습니다.(25절하)
셋째. 의인의 자손은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는 삶을 삽니다.(26절),
넷째.그러므로 의인의 자손은?...

(1)악에서 떠나야 합니다.(27절), (2)공의를 사랑해야 합니다.(28절),

* 고인의 자손들은 그 어르신의 믿음을 잘 배워 그대로 살아야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고인을 추모하자.

살전4:13-18절. 찬송 304.(어머니) 235장(아버지)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고ㅇㅇ 부모님의 추모일을 맞아 "고인을 추모하자"라는 제목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고인의 과거 생활을 추모하시기 바랍니다.    

(1)어렵게 살았던 때를 추모해 보시기 바랍니다.

못 먹고 못 살아도 옛날 부모님들께서는 진실 되게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을 도와주었을 지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끓여줄 양식이 없어서 밥을 짓지 못하면 옆집에 눈치 보시느라고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가 솥에다 넣고선 불을 지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옆 집 친척집에서 안타까워하실까봐 양식이 없는 것처럼 하고 싶지 않아서 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불을 지피지 않으면 옆집에서 큰 바가지에다 쌀을 퍼가지고 오셔서 아이들 밥해서 주라고 주시는 것도 보고 자랐습니다. 그 옛날 1945-50년도에는 정말로 농촌에 생활하기 어려웠을 때 입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자식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정성 것 양육하셨습니다.

그러한 부모님의 사랑을 본 받아 우리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교육하시기를 바랍니다. 

(2)자손을 위한 삶을 살아오셨던 생을 추모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모든 부모는 자손을 위하여 희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핵가족이니 뭐니 해서 자녀 양육에 소홀함이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부모님들의 사랑과 정성을 본 받아 하나님의 선물인 귀한 자녀들을 바르게 신앙교육하고 신앙과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3)이웃을 위해 살으셨던 생을 추모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조상들이 지켜온 전통입니다. 좋은 미풍양속을 버려버리고 서양 것만 모방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현실입니다. 서양 것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의 좋은 것을 계승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둘째. 부모가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자손이 영생 얻을 것을 원하십니다. 자손이 천국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믿음 생활 잘 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자손이 진실 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진실 되게 사는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3)자손의 영육 성공을 원하십니다. 부모님께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도록 몸을 통하여 물려준 건강을 잘 지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귀한 도구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부모의 부탁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의 성공을 원하시니 그 성공은 오직 주 안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라 하겠으니 믿음의 생활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수24;15절에 여호수아가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가문과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의 복된 자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인을 추모하자.
살전4:13-18절. 찬송 304.(어머니) 235장(아버지)

고 ㅇㅇ 추모일을 맞아 "고인을 추모하자"라는 제목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고인의 과거 생활을 추모하시기 바랍니다.


(1)어렵게 살았던 때를 추모해 보시기 바랍니다.
못 먹고 못 살아도 옛날 부모님들께서는 진실 되게 살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을 도와주었을 지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끓여줄 양식이 없어서 밥을 짓지 못하면 옆집에 눈치 보시느라고 냉수를 솥에다 길러다 넣고선 불을 지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옆 집 친척집에서 안타까워하실까봐 양식이 없는 것처럼 하고 싶지 않아서 였습니다.

어떤 때는 불을 지피지 않으면 옆집에서 큰 바가지에다 쌀을 퍼가지고 오셔서 아이들 밥해서 주라고 주시는 것도 보고 자랐습니다. 그 옛날 1945-50년도에는 정말로 농촌이 생활하기 어려웠을 때입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자식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정성 것 양육하셨습니다.

그러한 부모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교육하시기를 바랍니다.

(2)자손을 위해 살으셨던 생을 추모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모든 부모는 자손을 위하여 희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핵가족이니 뭐니 해서 자녀 양육에 소홀함이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부모님들의 사랑과 정성을 본받아 하나님의 선물인 귀한 자녀들을 바르게 신앙교육하고 신앙과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3)이웃을 위해 살으셨던 생을 추모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조상들이 지켜온 전통입니다.

좋은 미풍양속을 버려버리고 서양 것만 모방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현실입니다. 서양 것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의 좋은 것을 계승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둘째. 부모가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자손이 영생 얻을 것을 원하십니다. 자손이 천국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믿음 생활 잘 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자손이 진실 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진실 되게 사는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3)자손의 영육 성공을 원하십니다. 부모님께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도록 몸을 통하여 물려준 건강을 잘 지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귀한 도구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부모의 부탁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자녀의 성공을 원하시니 그 성공은 오직 주 안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라 하겠으니 믿음의 생활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문과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자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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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Prayer to answer

 

 

성도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가난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은 대부분 기도 해 놓고 응답이 자기 방식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무엇을 구했는지 기도 해놓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소한 응답은 체험을 못한다.

 

또한 기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세상 안일에 빠져 영적인 일에 무관심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것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신앙을 좀먹는 무서운 병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무관심한 신앙을 책하셨다.

[눅 7:31-32]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영적인 가난을 모르는 라오데기에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 3:14-17]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오데기에 교회에 하신 말씀이 토하여 내 치리라 했다.

그 이유는 신앙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것은 영적인 가난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라오데기야 교회가 우상 숭배하거나 간음하거나 살인하거나 하지 않았다. 세상 안일에 빠져 영적인 무관심이었다. 이것을 회개하지 않을 때 토하여 내 치신다고 했다.

 

영적인 가난을 모르는 라오데기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기도는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도는 나의 영력 테스트이다. 기도하는 만큼 나의 영력이 있다.

 

기도는 영적 노동이다. 그러기에 힘써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가 저절로 되어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몰론 내가 힘을 쓰면 성령께서 도우신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믿음과 비례한다.

 

1.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묵은 땅을 기경하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했다.

(렘4:2-4)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기도하는 손이 피가 가득하기에 눈을 가리운다고 했다.

(사1: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묵을 땅을 기경하라고 하였다. 기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을 헤아려 행하라고 하였다.

 

마음에 가죽을 벗기고 악업을 버리고 하였다. 네가 손을 펼 때에 눈을 가리운다고 하셨다. 네 손이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손을 씻으라고 하였다.

 

위의 말씀은 철저하고 진실하게 회개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들어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고 하신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난날의 죄악을 진실하게 숨김없이 고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행실을 고치겠다는 철저한 약속이 있어야 한다. 범죄하면 징벌도 감당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죄악이 담겨 있는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를 줄 수 없다. 진정한 회개는 용서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한 채찍도 징벌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용서는 면제이기도 하지만 탕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것이다. 그러기에 거룩한 그릇에 담아야 한다.

(마 5: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다.

(마 7: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2. 기도의 목적이 선하여야 한다.

 

정욕에 쓰려고 구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고 했다.

(약4:2-4)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에 쓰려고 구하기에 줄 수 없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목적이 선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목적이 악한 것을 두시면 하나니은 악의 동조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방탕하기 위하여 구하는 것을 주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미래의 마음을 아신다. 그러기에 믿음이 성숙되지 아니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

 

3. 믿음으로 구하여야 한다.

 

무엇이든지 받을 줄로 여기라 했다.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내 방식대로 응답하시지 않는 다는 말씀이다. 내 욕구대로 주시지 않는 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응답 하신다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후 12:8-10]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눈이 보이지 않았다. 아나니아의 기도로 다시 보게 되었지만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눈병 때문에 전도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또한 자기의 병도 고치지 못한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느냐 하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세 번을 절실하게 기도했다. 그랬더니 바울의 욕구대로 응답하시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응답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현제 네가 받은 은혜만도 족하다고 했다. 그리고 네가 약한데서 하나님이 도 온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인 바울 자신이 아니라 바울 자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소위 말하면 자기의 안질 하나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순순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하는 일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한다는 것이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바울은 더 강해지고 기뻐하였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약1:6-8)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흔들린다는 것이며 환경에 따라 흔들린다는 말이다. 두 마음을 품기 때문에 순결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인지 자신의 능력인지 자연 순리인지 구분을 못하고 신앙에 순수하지 못하다고 했다.

 

백부장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라고 했다.

(마8:12-13)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위의 말씀은 내가 구하는 것을 받을 줄로 믿고 구하라고 하였다. 확신하는 마음으로 구하라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의심하고 구하는 것은 얻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인데 진리를 믿는 믿음이다. 그리고 하나는 능력을 믿는 믿음이다. 전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의 기도는 들으실 수 없다. 능력을 의심하는 자는 받을 수 없다.

 

4. 인내하며 끝까지 중단하고 구하여야 한다.

 

응답되는 기도는 신앙적 인내를 동반한다 했다.

[눅 18:1-5]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신앙적 인내는 이루어 주실 때까지 구하는 것이다.

(눅11:7-9)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 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위의 말씀 한 과부의 비유한 말씀과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는 기도에 대한 신앙적 인내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인정 없는 불신앙인인 재판장도 강청함 때문에 들어주었다고 하였다. 친구의 비유도 끈질기게 구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적극적으로 구하라 하신다.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장사꾼이 문을 두드리는 것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 아들이 문을 두드리는 것같이 두드려야 한다.

 

가나안 여인은 끈질기게 기도한 여인이다.

(마15:26-27)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위의 말씀은 가나안 여인의 간구이다. 이 여자는 가나안 원주민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조가 쫓겨나 시돈에 거주하게 된 여자이다. 예수님이 이 지방에 지나가실 때에 딸을 위하여 간구하였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기 위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절하고 무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간청하였다.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셨다.

 

5. 최후에 순간까지 회개하고 기도할 때 응답하셨다.

 
 
십자가의 강도의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기도이다.

[눅 23:41-43]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강도는 형틀에 매달리는 순간까지 강도였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외편에 있는 강도 한 사람에게 우리는 이런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그 말은 자신은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지금까지 행위는 이렇게 죽어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영혼을 생각했다. 염치를 불구하고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다. 그의 기도는 정욕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영혼을 단순이 영혼을 위한 기도였다. 주님은 이 강도의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죽는 순간에도 기도하는 것은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영혼을 위한 순수한 강도의 기도를 들으셨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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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믿음 특별한 은혜 <기생 라합에 관한 설교 Special Faith Special Grace>


 

 


특별한 믿음 특별한 은혜.

 

여호수아   2장  8절

 

하나님의 일꾼은 무엇보다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는 헌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했습니다.

 

노아도 방주를 짓는 생활로 믿음을 증거 했습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믿음을 보였고 했습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라합은 특별한 믿음으로 특별한 복을 받은 여인입니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 하였도다

 

1. 라합의 특별한 믿음.

 

1) 선교를 계시한 믿음이다.

  

가나안 종족은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종족이다. 가나안 종족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종족의 후손이다. 그러기에 노아로 하여금 땅을 상속 받을 소돔 고모라를 중심으로 하는 땅을 분할 받았다.

 

선민의 시대에 종족적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종족이다. 그런데 이방인으로서 여호와를 영접하고 그에게 속한 여인이다. 자원하여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이다.

 

저주받은 종족이지만 여호와께 돌아가면 받아 주실 줄로 믿는 귀한 믿음이다.

 

2) 종교적으로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시대이다.

  

당시에 메소포다미아 지역은 바알 신앙이 정성기를 이룬 시대이다. 바벨탑 이후에 시작된 바알신앙은 이미 애급에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원래 바알신은 바벨탑을 주도했던 니므롯과 그의 아들 담무즈를 태양신(바알)으로 신격화 했고 니므롯의 아내 이면서 담무즈의 아내인 세미라미스를 달신(아스타롯)으로 신격화한 바알 신앙이 메소포다미에 성행했고 전 역에 퍼져 있었다.

 

그런데 라합은 그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 2:10-11]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히브리인의 출애급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끌고 있음을 믿었고 그들의 출애급 소문을 듣고 하늘 에서도 땅 아래서도 유일하신 여호와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눈으로 목격 하고도 믿지 못했던 바로 왕에 비하면 소문만 듣고도 선택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인도하시는 천하에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었던 것입이다. 수많은 함의 후예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호와께 속한 귀한 믿음이었다.

 

바알 숭배소굴에서 살면서도 여호와를 알고 비록 우상 숭배한 죄인일지라도 받아 주실 것을 믿은 기한 믿음이다.

 

3) 직업 적으로 여호와를 믿은 수 없는 사람이다.

 

 

라합은 기생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직업이 여인숙 업이었다. 그리고 혼자 사는 여인이었다. 성결생활을 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여자였다. 

 

고대에는 기생은 인생의 가장 정죄하는 직업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종교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경에는 음행하는 사람은 처형하라고 명하셨다.

 

(레 19:29) 네 딸을 더럽혀 창녀가 되게 하지 말라 음행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신 23:17-18]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그런데 라합은 죄인으로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아무리 중죄인이라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낸 믿음었다.

 


4) 가난한 자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라합의 가정은 빈궁한 가정이었다.

(수 2: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그 당시 부자들은 성 중앙에 집을 지었습니다 서민은 성벽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라합은 가난하기에 성벽 끝에 집을 짓고 살았다

 

말씀을 보면 라합이 가족들을 거느린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 형제들 그리고 자에게 속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감당하는 위치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은 넉넉한 생활을 하는 직업이 아니고 보면 가난한 생활을 하는 여인이고 혼자 벌어서 가족을 돌보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가난한 자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마음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라합의 믿음은 흙속에 진주처럼 귀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다.

 

5) 목숨을 건 믿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탐꾼을 숨기면 중죄로 다스린다. 처형되든지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왕의 명령 한마디면 죽는 시대이다.

 

라합이 정탐꾼을 살리려고 숨긴 것은 만약 발각이 나면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있음을 각오하였을 것이다. 죽을 각오도 하였을 것이다. 고난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예상 했던 대로 위기에 왔다 발각이 되어 이 집에 정탐꾼이 왔는데 어데 있느냐고 행정 당국에서 왔다.

 

하나님은 라합에게 지혜를 주어 위기에서 건지신다.

[수 2:4-5]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그들이 우리 집에 왔었다고 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말 몰랐다고 하고 어두워 질 무렵에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고 급히 따라가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라합이 정탐꾼들이 자기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으면 집안을 다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왔다고 했다. 해질 무렵에 나갔으니 어둡기 전에 빨리 쫓아가서 찾으라고 했다. 하나님은 위기에서 지혜를 주신 것이다 만약 라합이 오지 않았다고 했으면 집안을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왔다가 바로 나갔는데 쫓아가면 잡을 것이라고 했다.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 있는 라합을 어려움을 당하도록 버려두시지 아니 하셨다 믿음으로 사는 라합을 죽도록 버려두시지 아니 하셨다 지혜를 주신 것이다.

 

지혜란 것은 배워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 때 순발력이다. 하나님은 라합에게 지혜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험에서 건져 주셨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말씀대로 목숨을 건 위험한 헌신한 자의 목숨을 살리셨다.

 

정탐꾼들이 숨겨달라고 사정하거나 고발하지 말라고 부탁한 일이 없고 라합이 자원해서 숨겨 주었기 때문에 헌신이라고 한 것이다.

 

2. 특별한 은혜.

 

라합은 크게 네 가지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

 

1) 육신적으로 자신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이 살았다.

   

(수 6: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자기 목숨만 산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들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같이 살게 되었다.


2) 생활 적으로 기생 업을 청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생이 없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에는 술집이나 기생집이 없습다. 그러므로 라합은 자연스럽게 기생직업을 청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대우 받으면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3) 라합은 육신만 산 것이 아니라 영혼도 살게 되었다.

 

 

그는 함의 후예로 태어났다. 저주의 자손이다. 그런데 믿었다. 믿음으로 선민이 되었다. 선민이 되었으니 영혼이 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의 영혼도 살게 된 것이다. 당시 가족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애냐 하면 그들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자손으로 선민의 자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4) 라합 개인은 왕족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왕족인 살몬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아스를 낳았다. 그리고 다윗왕의 조모가 되었다. 기생으로서 왕족인 살몬과 결혼을 했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의 증조모가 되어 왕족의 족보에 기록되었다. 당시 여성으로 족보에 오른 것만도 축복인데 왕족의 종부에 오른 것은 여간 큰 축복이 아니다.

   

 

 결 론

    

라합은 귀한 신앙을 가진 여인이다. 저주의 백성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바알숭배 아스타롯 숭배 신앙 속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성결 생활에 어려운 기생 업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가난한 생활에서도 여호와를 찾았다. 그리고 자기 목숨뿐 아니라 온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살게 되었고 기생직업을 청산하게 되고 선민의 왕조와 결혼하여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어 족보에 기록된 넘치는 복을 받은 여인이다. 라합은 툭별한 믿음으로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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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목장예배설교 <불행한 직업을 가진 여인>

 

 

 

사도신경 ;

찬 송 ; 369장(487) 죄짐 맡은 우리 구주

기 도 ; 박 정이집사

하나님의 말씀 ; 여호수아 2 ; 8 - 16

 성경에는 수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합’ 이라는 여인은 이방인이었으며 그 직업이 기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후에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그 이름이 올라간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생이었던 라합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게 될 수 있었던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든 여성목장의 가족들에게도 은혜가 되고 도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라합은 당시 여리고 성에 거주하고 있던 여자로 그의 집이 숙박업을 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앞서 이스라엘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여리고 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미 성 안에서는 이스라엘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어떤 민족도 당할 수 없는 민족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모두가 두려워할 때에 라합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때에 마침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자신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목숨을 걸고 숨겨주고 이 일을 통해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에 자신과 집안의 식구들의 안전을 보장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그녀의 집 창문에 붉은 밧줄을 매달아 놓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 붉은 밧줄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모든 사람을 진멸할 때에 붉은 줄이 있는 라합의 집만은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라합은 어떤 여인이었는가?

첫째로 라합은 불행한 직업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생이란 노래나 춤으로 술자리에 흥을 돋구어 주고 때로는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직업으로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소외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라합은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몸을 팔아 생활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라합이 거하던 곳이 바로 여리고성이었습니다.

본래 ‘여리고’ 는 요단 골짜기에 있는 요새로 가나안 땅의 관문과 같은 성으로 대단히 풍요로운 땅이었고 그만큼 여리고는 향락과 음란함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라합은 기생으로 살아가고 있다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숨겨주고 도와 준 것입니다.

사실 라합의 이와 같은 행동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해 라합의 행동은 국가를 반역한 것이며 가장 큰 죄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고 정탐꾼들이 임무 완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라합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녀는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위대한 모험을 하며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고 분명히 여리고 성이 함락 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라합은 이 분명한 현실 앞에 하나님께 자기의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할 생각만 하고 있을 때에 그녀의 이같은 신앙적인 선택은 결국 가족을 살리고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라합을 통해 보듯이 저와 여러분이 생각할 것은 비록 여인이라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도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갈 때에 놀라운 일들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스더도 여인의 몸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자신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합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고 하신 말씀처럼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탐꾼들을 도와 준 라합은 하나님의 일에 합력한 사람으로 인정 받았으며 이를 통해 자신과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여인의 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에 합력한 일은 주님께서 반드시 잊지 않으시고 갚아 주심을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특별히 라합은 수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어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라.’ 라고 하였듯이 그녀는 이미 하나님이 유일하신 신이심을 소문으로 듣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 듣고서도 부인하고 대적하려고 하였지만 라합은 그분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과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과 가나안 땅을 정복하실 하나님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똑같이 듣고서도 믿지 않지만 라합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합은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정탐꾼들을 도와주는 것이었으며 수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정탐꾼은 라합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으로 붉은 밧줄을 약속하였고 그것이 증표가 되어 라합은 구원의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창문에 드리운 붉은 줄은 ‘십자가의 보혈’ 을 상징합니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아무도 이 붉은 줄의 의미를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 줄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에 평안을 느끼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며 은혜입니다.

 

라합은 누구보다 자기 가족의 구원을 갈망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수2: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고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노아를 통해 그 일가가 홍수심판에도 구원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서 롯의 일가가 구원을 받았듯이 라합은 비록 이방 여인, 더군다나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의 종들을 선대한 것이 근거가 되어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져야 할 믿음은 무엇입니까?

비록 여인의 신분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나 하나로 인해 우리 가족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의 구원, 남편의 구원, 부모의 구원, 자녀의 구원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라합과 같이 그 믿음을 보이며 도전 하시겠습니까?

 

원하기는 라합이 여리고성 사람들 모두가 듣고도 믿지 않았지만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믿음을 가지고 자신도 구원을 얻고 가족을 구원한 여인이 되었듯이 저와 여러분 모두도 이와 같은 은혜를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 도 ;

찬송가 ; 320장(350) 나의 죄를 정케 하사 .... 헌금

광 고 ;

찬송가 ; 430장(456)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목사님의 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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