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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Prayer to answer

 

 

성도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가난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은 대부분 기도 해 놓고 응답이 자기 방식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무엇을 구했는지 기도 해놓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소한 응답은 체험을 못한다.

 

또한 기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세상 안일에 빠져 영적인 일에 무관심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것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신앙을 좀먹는 무서운 병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무관심한 신앙을 책하셨다.

[눅 7:31-32]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영적인 가난을 모르는 라오데기에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 3:14-17]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오데기에 교회에 하신 말씀이 토하여 내 치리라 했다.

그 이유는 신앙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것은 영적인 가난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라오데기야 교회가 우상 숭배하거나 간음하거나 살인하거나 하지 않았다. 세상 안일에 빠져 영적인 무관심이었다. 이것을 회개하지 않을 때 토하여 내 치신다고 했다.

 

영적인 가난을 모르는 라오데기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기도는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도는 나의 영력 테스트이다. 기도하는 만큼 나의 영력이 있다.

 

기도는 영적 노동이다. 그러기에 힘써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가 저절로 되어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몰론 내가 힘을 쓰면 성령께서 도우신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믿음과 비례한다.

 

1.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묵은 땅을 기경하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했다.

(렘4:2-4)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기도하는 손이 피가 가득하기에 눈을 가리운다고 했다.

(사1: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묵을 땅을 기경하라고 하였다. 기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을 헤아려 행하라고 하였다.

 

마음에 가죽을 벗기고 악업을 버리고 하였다. 네가 손을 펼 때에 눈을 가리운다고 하셨다. 네 손이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손을 씻으라고 하였다.

 

위의 말씀은 철저하고 진실하게 회개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들어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고 하신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난날의 죄악을 진실하게 숨김없이 고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행실을 고치겠다는 철저한 약속이 있어야 한다. 범죄하면 징벌도 감당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죄악이 담겨 있는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를 줄 수 없다. 진정한 회개는 용서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한 채찍도 징벌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용서는 면제이기도 하지만 탕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것이다. 그러기에 거룩한 그릇에 담아야 한다.

(마 5: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다.

(마 7: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2. 기도의 목적이 선하여야 한다.

 

정욕에 쓰려고 구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고 했다.

(약4:2-4)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에 쓰려고 구하기에 줄 수 없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목적이 선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목적이 악한 것을 두시면 하나니은 악의 동조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방탕하기 위하여 구하는 것을 주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미래의 마음을 아신다. 그러기에 믿음이 성숙되지 아니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

 

3. 믿음으로 구하여야 한다.

 

무엇이든지 받을 줄로 여기라 했다.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내 방식대로 응답하시지 않는 다는 말씀이다. 내 욕구대로 주시지 않는 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응답 하신다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후 12:8-10]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눈이 보이지 않았다. 아나니아의 기도로 다시 보게 되었지만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눈병 때문에 전도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또한 자기의 병도 고치지 못한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느냐 하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세 번을 절실하게 기도했다. 그랬더니 바울의 욕구대로 응답하시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응답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현제 네가 받은 은혜만도 족하다고 했다. 그리고 네가 약한데서 하나님이 도 온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인 바울 자신이 아니라 바울 자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소위 말하면 자기의 안질 하나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순순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하는 일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한다는 것이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바울은 더 강해지고 기뻐하였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약1:6-8)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흔들린다는 것이며 환경에 따라 흔들린다는 말이다. 두 마음을 품기 때문에 순결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인지 자신의 능력인지 자연 순리인지 구분을 못하고 신앙에 순수하지 못하다고 했다.

 

백부장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라고 했다.

(마8:12-13)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위의 말씀은 내가 구하는 것을 받을 줄로 믿고 구하라고 하였다. 확신하는 마음으로 구하라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의심하고 구하는 것은 얻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인데 진리를 믿는 믿음이다. 그리고 하나는 능력을 믿는 믿음이다. 전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의 기도는 들으실 수 없다. 능력을 의심하는 자는 받을 수 없다.

 

4. 인내하며 끝까지 중단하고 구하여야 한다.

 

응답되는 기도는 신앙적 인내를 동반한다 했다.

[눅 18:1-5]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신앙적 인내는 이루어 주실 때까지 구하는 것이다.

(눅11:7-9)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 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위의 말씀 한 과부의 비유한 말씀과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는 기도에 대한 신앙적 인내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인정 없는 불신앙인인 재판장도 강청함 때문에 들어주었다고 하였다. 친구의 비유도 끈질기게 구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적극적으로 구하라 하신다.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장사꾼이 문을 두드리는 것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 아들이 문을 두드리는 것같이 두드려야 한다.

 

가나안 여인은 끈질기게 기도한 여인이다.

(마15:26-27)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위의 말씀은 가나안 여인의 간구이다. 이 여자는 가나안 원주민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조가 쫓겨나 시돈에 거주하게 된 여자이다. 예수님이 이 지방에 지나가실 때에 딸을 위하여 간구하였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기 위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절하고 무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간청하였다.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셨다.

 

5. 최후에 순간까지 회개하고 기도할 때 응답하셨다.

 
 
십자가의 강도의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기도이다.

[눅 23:41-43]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강도는 형틀에 매달리는 순간까지 강도였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외편에 있는 강도 한 사람에게 우리는 이런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그 말은 자신은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지금까지 행위는 이렇게 죽어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영혼을 생각했다. 염치를 불구하고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다. 그의 기도는 정욕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영혼을 단순이 영혼을 위한 기도였다. 주님은 이 강도의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죽는 순간에도 기도하는 것은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영혼을 위한 순수한 강도의 기도를 들으셨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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