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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관예배설교 영원한 고향집으로

 

 

 

 

*입관예배설교
말씀 : 고후5:1~4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귀한 육신을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려 보내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육신을 관에 고이 모시기 위하여 모였다. 지금 사랑하는 임을 보내드리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이분을 만날 수도 없고,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정으로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쓰리고 안타깝다.

 


또한 물론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서로 사랑하며 아끼며 살아오셨을 줄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했어도 우리가 온전할 수 없기에 언제나 후회는 남은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를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더 효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더 마음이 쓰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 유족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육정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이러한 아픔과 안타까움과 쓰린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해도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는 끝내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의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잠시 떨어져 있다가 곧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라. 우리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하였다. 장막집은 우리 육신을 말한다. 왜 장막집인가? 영혼이 잠시 거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장막이 무언가? 임시 처소이다. 즉 우리 육신은 영혼의 임시 처소인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장막집은 곧 무너진다. 그리고 나면 영혼은 영원한 나라로 가는데 거기가 바로 영원한 처소인 것이다.

 

그래서 요1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처소가 예비되어 있다고 하셨고, 또 계21장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은 지금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지금 그 영원한 본향집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축복을 누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고  ○○○성도님을 영원한 본향집으로 먼저 보내드리고 물론 마음이 쓰리고 아프고 마음 한 켠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함이 있겠지만 그러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랑하는 임은 무거운 짐을 다 벗어던지고 천국에서 안식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그리고 우리도 머잖아 그 분의 뒤를 따라가 영원한 천국에 만날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소망을 갖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다 하지 못한 사랑과 효도도 잊어버리고 오직 믿음 안에서 더욱 사랑하면서 성실하게 열심히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다가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날에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감사와 감격과 기쁨 속에 사랑하는 임을 만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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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헌신예배]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

 

 

 

말씀 : 느12:27-30

제목 :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먼저 오늘 이렇게 성가대 헌신예배를 드리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오랫동안 성가대를 운영하고 있지 못하다가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성가대를 재조직하여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며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리게 됨을 무한감사 드립니다.

여러분, 찬양은 우리 기독교인의 삶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하나님을 찬양케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43:21절에 보면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케 하기 위해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 찬송만 부르게 하기 위해서 지으셨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지으셨다는 것,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일중의 하나는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존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 그 인생은 진정으로 값지고 의미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원수들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힘과 뜻을 모아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나서 낙성식을 거행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기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성벽 낙성식의 모습을 보면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느혜미야는 성벽 중건의 낙성식을 찬양의 축제로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오늘 말씀에 있는대로 노래하는 자들과 악기를 다루는 자들을 전국에서 불러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면서 즐겁게 봉헌식을 행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이렇게 찬양을 중심으로 낙성식을 거행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겠습니까?

1.하나님께서는 찬양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찬양케 하기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봇이 내가 의도한바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여러분이 의도한대로 그대로 움직이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때 여러분의 마음이 흡족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찬양하는 삶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중의 하나는 역시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의 특징이 무엇이냐 찬양 잘하기로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찬양을 잘한다고 해서 단순히 노래 실력이 좋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기쁘나 슬프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언제나 찬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느헤미야도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찬양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아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앎으로 찬양의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지혜로운 믿음 생활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효자, 효녀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을 알아 그 원하는 바를 해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모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하면서 제깐에는 부모에게 효도한답시고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드린들 그것을 부모님이 어찌 기뻐하겠습니까?

부모는 자식과 함께 살고 싶은데 양로원에 보내 놓고 어쩌다 한번씩 찾아간다면 그것이 어찌 효도가 되겠습니까? 부모는 자녀들이 서로 화목하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늘 싸움만 한다면 이것이 어찌 효도가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효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 원하시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곧 효도인 것입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헌금은 얼마나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은 그 분에게 우선 집에서 약국에서나 늘 찬송을 하라고 했습니다. 손님이 와도 일부러 한번 들어보라는 듯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정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선은 그 자신이 정말 기쁨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찬양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그의 심령속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이 정말 늘 밝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 약사가 늘 그렇게 감사하며 기쁘게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손님들도 훨씬 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업도 더욱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요, 일석이조요,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래서 또한 하나님이 찬양을 그토록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정에서 찬양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만큼 복된 가정이 없습니다. 물론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 자신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그 모든 가족구성원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근심걱정이 물러가게 해 줍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열심히 찬송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성가대원들은 그중에서도 일부러 빼내어 찬양하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찬양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은혜와 기쁨을 선물하는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찬양하는 삶이 쉽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찬양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과 직책을 주셔서 찬양케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찬양하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는데 그 중에서 또 빼내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으니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아멘하며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연습에 참여하시고 정말 감사와 감격과 기쁨속에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범사에 잘되어지고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족과 성도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찬양의 회복이 진정한 영성의 회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가장 좋았을 때는 다윗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믿음이 가장 좋았을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성대한 찬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시대는 날마다 성전에서 성가대의 우렁찬 찬양 소리가 온 예루살렘에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삼하6:5에서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다윗이 행했던 찬양의 모습을 보십시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대상23:5 이하를 보십시다. 찬양하는 레위인들이 몇 명이라고 했습니까? 4,000명입니다. 25:1이하에 보면 그 중에서 악기를 다루는 자와 노래에 아주 익숙한 자의 수가 288인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찬양대의 규모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이 내는 헌물로 생활하였으며 온 종일 성전에서 찬양을 준비하며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시대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온 백성이 참여하였고, 거대한 성가대를 조직하여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의 물결이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 시대로 들어가면서 점점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왕상 8:3-5절에 보면 솔로몬이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를 옮기는 장면이 있습니다. 법궤를 성전에 안치하면서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왕상8: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구절에서도 하나님께 큰 찬양을 드렸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 왕상 8:62-64절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광경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14일동안 낙성식을 행하게 되는데 그때 화목제로 드린 제물은 소가 22,000마리이고 양이 무려 120,000마리나 합이 142,000마리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거의 10,000마리의 제물을 잡아서 드렸던 것입니다. 하루에 만 마리면 한 시간에 거의 500마리의 소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니 얼마나 대단한 광경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성대한 성전 낙성식에도 이상하리라 만치 찬양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던 것입니다.

또 왕하23장에는 이스라엘에서 다윗왕 다음으로 성군이라고 부르는 요시야 왕의 대대적인 종교개혁의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우상을 멸하고 율법을 부활시켰던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찬양의 회복에 대한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후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점점 쇠하여져 갔고, 레위인들은 점점 성전을 떠나 농사를 짓거나 기타의 일을 하며 연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본연의 임무를 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 생활의 비극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영적인 타락과 함께 찬양이 사라졌고, 동시에 찬양이 식어져 갔을 때 영적으로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양과 영성은 비례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은 찬양의 고백입니다. 기쁨이 없이는, 감사함이 없이는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고, 감격이 있고, 주님안에 있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있는 자에게는 찬양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하는 영혼이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며, 찬양하는 순간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밝게 빛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 상태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히 측정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찬양입니다. 즉 내가 얼마나 찬양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 받았을 때는 흥얼흥얼 찬양이 입에서 절로 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식었을 때는 찬양 대신 불평과 불만이 쌓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아니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만났는데 어떻게 찬양이 나온단 말입니까”.“목사님도 저와 같은 상황을 당한다면 그런 말씀을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8)”고 고백한 하박국의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했던 바울과 실라와 같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뻐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더더욱 충만히 누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설령 어려움이 있더라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라도 찬양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라도 찬양을 해야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거듭거듭 불순종하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를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 크신 권능과 지혜로 우주를 운행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은 음악 이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입니다. 직장에서도, 길을 가다가도 찬송을 부르십시오. 기쁨이 밀물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평안이 찾아 올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는 사람마다 찬양의 입술에서 피어나는 향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것입니다.

잘 못해도 좋습니다. 음정 박자 가사 좀 틀리면 어떻습니까? 음정이나 박자나 가사를 잘 모르겠거든 작사 작곡을 해가면서라도 찬송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술이 좀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재능이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함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실력도 길러야 합니다. 되도록 많이 연습해서 기술적으로 훌륭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좀 실력이 없어도 능력이 없어도 지혜가 부족하더라도 마음을 다해서 기쁨과 감격으로 그 은혜에 눈물 흘리며 찬송하는 그 찬송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교가 있고,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그 마음에 믿음이 없고,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신앙고백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가사 박자 음정이 좀 틀리더라도 그 은혜와 사랑과 긍휼하심을 깨닫고 감격과 기쁨과 은혜로 부른다면 그것이 진정한 신앙고백이요, 그것이 진정한 찬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무엇보다도 우리 성가대가 이와같이 귀한 찬양의 사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비록 좀 실력이 딸려도 능력이 좀 부족해도 때로는 바쁘고 힘이 들더라도 언제나 감격과 은혜속에 주님을 찬양하는 성가대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열심히 연습에 참여하고 마음으로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받은 바 그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이 사역에 열심히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찬양을 좋아했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는 성가대가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도 늘 찬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축복된 인생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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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설교]   장수의 축하 설교 (환갑, 진갑)

 


 

 
장수의 축하

 


인간은 누구나 장수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장수를 축복으로 생각하고 장수하면 축하하는 모임

이 그 나름대로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

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 : 10)라

고 을었습니다.

동양에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여 장수는 희귀한

일로 찬양했습니다.

성경에는 의인은 복을 누리고 장수하고(신 2 :7), 악인은 잘되지 못

하며 장수하지 못한다(전 8 : 13)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장수의 비결을 첫째,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고(잠 28 :

16)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고(잠 10 : 27) 셋째, 부모를 공경하

면 땅에서 장수하고 넷째, 백발은 의로운 길에서 얻는다(잠 16 31)고 했

습니다. 과러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고(잠7 : 15),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잠 8 : 17)고도 하였습니다.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는 것은 축복이므로(욥 5'76), 시인은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라"(시 71 : 4)고 노래했

습니다.

 

1. 환갑의 의미

  사람의 장수를 기념하여 축하하는 잔치를 수연(壽宴)이라고 하는데 61

     세 되는 돌을 가리키는 말을 환갑(環甲), 회갑(回甲), 화갑(華甲), 주갑

     (周甲), 화갑(化甲)이라고도 합니다.

        환갑은 우리 나라 나이로 61세의 생일, 즉 만으로 60세 되는 것을 의

     미하는 것입니다. 6갑(六甲)의 간지( 干支)가 60년 만에 한 바퀴 돌아온

     다는 뜻에서 온 것입니다.

     간지(干支)란 10간(干)과 12지(支)의 총팅으로 중국 은(殷)나라 때부


    터 있었던 것으로 10간과 12지를 짜 맞춘 것이 60간지(干支)로 날자를

    세는데 쓰인 것이 그 기원입니다.

 

       10간은 갑(甲) ․ 을(乙,) ․ 병(丙) ․ 정(丁) ․ 무(戊) ․ 기(己) ․ 경(庚) -

    신(辛) ․ 임(壬) ․ 계(癸)이고, 12지는 자(子) ․ 축(丑) ․ 인(寅) 묘(卯) -

    진(진) ․ 사(巳) ․ 오(午) ․ 미(未) ․ 신(申) ․ 유(酉) ․ 술(戌) ․ 해(亥)이며,

    이것을 짜 맞춘 것이 60간지로, 난 해가 60년 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간(干)은 날을 가리키기 위해서, 12지(支)는 달(月)을 가리키기 위해서

    은(殷)나라 때 만들었고, 12인지(支)를 하루 시각(時刻)에 배당하는 것은

    전한(前漢)시대 시작했다고 합니다.

       환갑을 맞으면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은혜에 감사하며 그 노고를 위로

    하기 위해 친턱과 친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면서 더욱 장

    수를 바라는 뜻이 있습니다.

       환갑맞는 이가 저명한 인사이면 뜻있는 이들이 발기인이 되어 기념 사

    업을 계획하기도 합니다.

       환갑맞는 이를 위해 자녀들이 음식상을 차려 드리고 절하면서 오래 사

    시기를 바라는 것을 헌수(獻壽)라고 합니다.

       만일 환갑 되신 분의 부모가 생존해 계실 경우에는 부모를 위해 음식

    을 차려 드리고 인사를 한 다음 환갑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환갑 자리에 부모를 같이 모시고 장수를 축하여야 합니다.

       수연에 초대하는 경우에 대개 그 자녀들이 이름으로 초대장을 내는데,

    공직이나 단체에 관계가 있으면 단체명으로나 혹은 뜻있는 분들이 발기

    인이 되어 초대장을 보낼 수 있습니다.

 

2. 진갑(進甲)의의미

        진갑에 대해서는 지방에 따라 그 계산법이 다릅니다. 서울과 그 이남

     지방에서는 회갑 이듬해 생일을 진갑이라 하고, 이북 지방에서는 회갑 지

     난 지 10년 만인 70세 생일을 진갑이라고 합니다. 만 70세를 7순(七旬)

 

이라고 하는데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두보(杜甫)의 시를

인용도 하지만, 옛날에는 칠십까지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칠순 잔치를

합니다.

틸순 잔치는 팔십을 바라보는 잔치라 하여 망팔(望八)이라 부르면서 오

래 살기를 축원합니다. 또는 칠순 잔치는 희귀하다고 하여 희연(쏜륜)이

라고도 하고, 80세의 장수를 미수(米壽)라고 합니다.

   장수를 축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 심정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는 것은 인간 된 도리이기도 합니다. 장수를 축하

한다고 허례 허식에 치우치지 말고, 부모를 외롭지 않게 모시고 보람을

갖고 마음 편하도록 해드리면서 부모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축하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잠 16 : 31)이며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

(잠 20 :29)이라 하였고,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

경하라(레 19 :37)하였으며, 바울은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1 전 5 1)고

하였으니,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감사할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

다.

   어떤 이는 회갑을 기독교적이 아니라고 배척하지만, 간지(干支)는 동

양적인 계산 방법일 뿐입니다. 어떤 미신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인생의 한 시기를 정하고 생명을 주시고 지켜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고 인생의 본분을 다시 한번 각성해 보는 뜻 깊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

다.

 

3. 환갑 축하 식순

 

개식사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닝께서 지금부터 60(70)년 전에 ㅇㅇㅇ씨를

 세상에 보내시고 오늘까지 그 분을 지키시고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

 

    니다. 이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ㅇ ㅇ ㅇ씨의 환갑(혹 고희)

    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주악, 혹 묵상(이 사이에 시편 23편을 낭독하면 좋을 것입니다)

 

                  찬   솜 :343장(본인이 즐겨 부르는 찬송)

                  성   경 :시편 1 : 1~9, 9 : 1~17, 27'1~5, 128 : 1-5

                           에베소서 4 13-lS

                  설   교 : 설교자

                  기   도 : 축가, 혹 가족 합창

                  축   사

                  답   사

 

                  인사 및 권고 '

 

                  송   엉 : 찬송가 3장

                  축   도

 

 <주의할 것>

   1. 축사나 축가가 예배에 합당치 않을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그러한 순

      서는 예배 후로 돌리는 것이 좋습니다.

  7. 예배 분위기에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사전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3. 예물을 드리거나 그 밖의 축하 순서는 예배와는 별도로 진행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4. 예배 시간에 시편 1편, f3편, 46편, 95편, 마태복음 5장, 요한복음 15

      장을 교독문으로 사용하는 것도 뜻깊은 일입니다.

 

*.요약 실교 1 - 새 힘을 얻으리니 (이사야 40 :28-31)

     오랜 세월 동안을 지켜 보호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우리의 육신은 점점 쇠퇴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영원 불변하신 분이 계시니,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이제 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를 더욱 앙망하는 자에겐 어떤 복이 주어지는가?

1) 새 힘을 얻게 된다.

2)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신앙이 상승하게 된다.

3) 어떠한 경우를 당해도 곤비치도, 피곤치도 않을 것이다.

 

*.요악 실교 2- 우리 평생얘 키쁘고 즐굅케 아소서 (시편 90 : 10-17)

        칠십, 강건하면 팔십인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께 무엇을 간

     구할 것인가?

     1) 지혜의 마음을 갖게 하소서(12절)-인생은 짧고 무상함을 알아서 내

         세를 위해 준비하며 살자.

    2) 주의 인자로 만족케 하소서(14절)-하나님을 의뢰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3) 영광을 자손에게 나타내소서(16절)-후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4)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17절)-영원한 보호와 인도를 기원

         하는 것이다.

 

출 요약 실교 3 - 어호외을 경외이는 자 (시편 128 : 1-6)

        사는 날 동안 힘써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복받

     는 생을 살아야 한다. 어떠한 복을 허락하시는가?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다(2절).-재물(재산)의 축복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2절) -생활의 축복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자식은 감람나무 같으리라(3절) -처

         자의 축복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볼 것이다(5절)-영적인 축복

     5) 자식의 자식을 볼 것이다(6절)-장수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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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Today's preaching ] 주님과의 아침식사

 

 

 

요한복음 21장 15∼19절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종 시험 과목은 ‘항복’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다윗, 사도 바울 등 하나님의 용사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항복의 날’을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배반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순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도 항복의 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베드로는 결정적인 배신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날 밤, 3년 전 주님을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3년 전에 하던 바로 그 일을 그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입니다. 그는 밤새 수고하였지만 빈 배였습니다. 하지만 새벽에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만선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 후 주님은 먼저 호숫가에 내려가셔서 떡과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때 배에서 내린 베드로는 주님께 다가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생선이 필요했다기보다 주님께 다가올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생선을 가지러 간 베드로는 생선을 세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또다시 베드로에게 다가가십니다. “와서 아침 먹어라.” 짤막한 주님의 식사 초청입니다.

식사를 끝내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세 번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원어 성서에는 주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아가페(헌신적인 사랑)’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 다 ‘필리아(친구의 사랑 혹은 우정)’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아가페’로 묻는 주님께 ‘필리아’의 사랑 고백은 거절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질문에서는 주님이 단어를 바꾸십니다. ‘필리아’로 말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 번째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필리아!’ 그런데 베드로의 세 번째 대답은 ‘노’가 아닌 ‘예스’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정답을 맞힌 것이 아니라 주님이 베드로의 정답에 맞는 문제를 내신 겁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두 번씩이나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결정적인 주님의 방문은 두 번이지만 매일매일, 숨 쉬는 순간마다 방문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게 순교를 암시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누군가가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은 원치 아니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를 항복하게 했습니까.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찾아오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다가설 수 있도록 명분을 제공해주십니다. 아침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 ‘필리아’의 사랑으로 질문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무장된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인격의 깊이와 넓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작은 사랑의 고백을 쓰시기에 우리의 큰 일도 작은 일이 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사랑 고백을 사용하십니다.

안성우 목사 (로고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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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도회헌신예배] 헌신의 은혜

 

 

 

 

제목 : 헌신의 은혜

말씀 : 고후8:1~9

1.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제법 오래전에 경기도 의정부의 미군 부대 옆에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교회는 교인이라야 약30여 명 남짓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두 분 장로님을 중심으로 교인들이 두 패로 갈려 분쟁이 생겨 서로 헐뜯고 이간질하며 싸움만 교회는 잘 돌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종을 치는 사람이 없어 목사님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꼬마 아들에게 종을 좀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예하고 달려가 종을 치고는 막 달려오다가 그만 과속으로 달려오던 미군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고 시간이 되어 강대상에 올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조금 있으려니까 뭔가 웅성웅성하더니 교인들이 빨리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끝까지 예배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왔고 그때서야 아들이 차에 치어 죽은 사실을 알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사고현장에는 경찰과 미군 장성이 와 있었고 아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었습니다. 이를 본 사모님은 졸도하여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미군 장성이 다른 부관들과 함께 와서 목사님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운전병의 실수로 이런 일이 일어난 점 진정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목사님, 무엇이든 목사님께서 해 달라는 대로 정성을 다해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장군님,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내 아들은 하나님께서 뭔가 뜻이 계셔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제게 아무것도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운전병도 너무 책망하거나 징계하지 마십시오.”

이에 미군 장군이 너무나 감격하여 세상에! 이렇게 귀한 주의 종이 있다니 하면서 재삼재사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부대로 돌아가서는 참모들과 목사님에게 어떻게 해 드리면 좋을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참모들이 그 목사님의 교회가 너무 초라하니 좀 더 크게 새로 지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결국 전적으로 미군이 부담하여 넓은 부지를 구입하고 초라한 교회는 헐어버리고 크고 멋진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배당 건축되고 봉헌식을 드리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예배당 열쇠를 드리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열쇠를 가지고 강단으로 올라가다가 그만 중간에 멈추어서더니 그 자리에 서서 울면서 올라오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어서 올라오시라고 하자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감히 강단에 올라 갈 자격도 없고, 목사님께 열쇠를 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장로로서 허물어져 가는 성전을 건축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기는커녕 싸움만 했는데 어떻게 올라가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를 대신하여 목사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이 되어 교회가 세워졌는데 제가 어떻게 이 열쇠를 목사님께 드리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내려가서 장로님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그만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다음에 목사님이 장로님의 손을 잡고 올라와서 열쇠를 봉헌하여 헌당식을 마치게 되었고 이후로 교회는 온 교우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를 섬김으로 아름답게 부흥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들이 사고로 죽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목사님은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으니 아들이 죽은 것도 분명의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 일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그 아들을 통하여 성도들을 깨닫게 하여 교회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뜻대로 되어 목사님의 아들이 희생제물이 되어 교회를 살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것이니 주님 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 하면서 주님께 맡기며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그럴 때 우리 자신도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6:19,20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래서 롬14: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이제 내가 살아도’라는 복음성가도 있지 않습니까? 함께 불러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신앙의 고백가운데 살기를 바랍니다.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 어차피 사라질 것을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영광입니까? 어차피 무엇인가에게 바쳐져야 할 것들,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바쳐진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2.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힘껏 주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는 그들도 너무나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주신 물질도 힘껏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오늘2,3절을 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여러분, 보십시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이 있었고 극심한 가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연보를 하였습니다.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극심한 가난이 도리어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환난의 많은 시련 속에서도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극심한 가난이 도리어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있습니까?

우선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며 적은대로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록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천배만배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도 주님이 주신 은혜가 더 크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은 그것을 얼마든지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까지 오셨습니다. 침뱉음과 뺨맞음과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로마 병정들이 휘두른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모와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여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찌 헌신하고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한 권사님이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권사로서 잘 한 일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하나님, 저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 믿음 안에서 자라나서 다 결혼하고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도 귀한 일이다. 그런데 자녀를 위한 헌신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 아니냐? 그보다 나를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지 말해봐라.

그러자 권사님은 ‘저는 주일 예배도 드리고,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 청소도 하고 점식식사 준비도 하고 설거지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것도 잘 한 일이구나. 그런데 그것도 권사가 아니라 일반성도라도 다 해야 할 일이 아니냐? 그런 것 말고 나를 위해 네가 특별히 한 일을 말해 보거라.’ 그러자 권사님이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섭섭하구나. 나는 네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심지어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했고 앞으로 네가 와서 살 천국 집도 마련해 놓았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위해서 별로 한 일이 없나 보구나. 너무 섭섭하구나.’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비록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그래도 주신 은혜가 천배만배 큽니다. 게다가 주님은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2:20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게다가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 이 큰 은혜를 받았으니 어찌 그 분을 위해서 살지 않겠느냐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고, 주의 은혜가 더욱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헌신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과 봉사하고 충성하라고 하신 것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고귀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또한 그렇게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역사에 참여한 심령들에게는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고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요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만을 받으시게 합당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난하게 되고,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은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인류를 살리고, 부활을 통하여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로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고 부활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힘들고 지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그런 귀한 사역을 통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요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만 부요케되고 우리는 어렵고 힘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도 감사와 기쁨과 자부심과 보람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또한 그런 귀한 사역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복을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상급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마19:29절을 보십시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물론 무조건 전토를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에 영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이 땅에서도 여러 배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평안북도 정주에 백사겸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그 마을에 선교사가 들어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 분은 열심히 교회 일에 충성을 다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온 성도들이 함께 나와 벽돌을 찍고 땀을 흘리며 일했지만 그래도 건축비가 부족하여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사겸성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 1000평을 모두 팔아서 건축비로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완공되었고 백사겸 성도는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교회 사찰로 임명되어 겨우 생활비를 받아 연명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님이 백성도의 신실함을 보고 그의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은 파커대학과 프린스톤신학교와 대학원을 거쳐 예일대 철학박사, 파커대학 신학박사, 스프링필더대학 인문학박사, 디포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연세대교수, 서울대 교수, 연세대총장을 거쳐 제2대 문교부장관을 지내고 정부에서 대한민국무궁화 훈장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신 후에는 국립묘지 애국지사의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책임져 주시고 백배천배로 갚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심은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누릴 뿐 아니라 이 역사에 참여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려 하심입니다. 그 생명의 역사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귀한 사역입니다. 그래서 그 귀한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귀히 여기시고 그래서 큰 상급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여전도회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 몸과 마음과 시간가 물질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이 땅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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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예배 Funeral service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자들로 발견되지 않으

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잇는 우리가 집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

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애개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

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1. 서 론

 성경은 인생을 여러가지 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

하고 이 세상에 와서 나그네 생활을 하다가 언젠가는 본향을로 돌아가

는 것이다.

 2. 본 론

 키에르 케고르는 인생은 날때부터 죽음이라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온

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도께서는 죽음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

다.

 본문에서는 죽음을 세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죽음은 탄식을 벗는 때이다.

     세계의 영웅 나폴레옹은 말하기를 "5대양의 가득찬 물을 인생의

     눈물이 아니오며 6대주에 불어오는 바람은 인생의 탄식소리가 아

     닌가? 라고 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죽음은 탄식을 벗는 때이다.

  2. 죽음은 짐을 벗는 때이다.

     인생은 고달프다. 많은 짐을 지고 허덕인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휘를 편히 쉬게 하리라." 주안에서 산 사람은 내 육

     신의 장막을 벗는 날 영원한 안식에 거함.

  3. 죽음은 썩지 않을 것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산 사람은 죽음의 문을 통과해서는 영원한 세계에서

     썩지 않을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 14:13에 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했다

 3. 결 론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나라 소망을

위하여, 복음 전파하는 수고를 치루어야 한다.

 김활란 박사는 나의 장례식에서는 승전곡을 부르라고 하였다. 믿음의

생활은 승리자민이 걸어가는 생활이다. 기독교 신지들은 한사람의 나

그네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목적을 두고 살고 그 목적을 이루게 되

는 순레자다. 이것이 곧 승리요 기쁨이요 믿음으로 받는 영원한 기업

이다.

 남은 유가족들은 본문 말씀대로 믿음안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

믿음으로 영원한 하늘나라 기업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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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설교] 성경대로 살자

 

 


사도행전 17장 10~15절

극단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극단적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늬만으로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엔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 예수님의 진리가 삶의 결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여전히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없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득실거립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됩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제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갖는 믿음이 부도 맞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내 이름표 달고 나대신 죽으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것이 우리의 핵심가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이 아니라, 내 생각과 지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현장으로 내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스타일의 삶입니다. 성경 스타일의 삶이란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우리를 보고 “어! 저 사람 성경대로 사네? 스타일이 완전 성경스타일이네?”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항상 적용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쫓겨 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다 유대인이며 상당히 영향력도 있고 품위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씀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이 진리라는 결론에 이르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다고 말합니다. 나름 배운 사람들이었고 귀족 출신들이며, 고상하고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었는데 말씀 앞에서 진지하게 반응하더라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듣지만 믿음도 생기지 않고 자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성경의 단편적 지식들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뭘 좀 깨닫는가 싶다가도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듣기 때문에 제자리걸음만 계속합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변화됩니다. 말씀을 절대 결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말씀이 결론이 되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진리가 결론이 되게 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결론 났으면 결론으로 삼아야지 토를 달고, 내 상황에 꿰맞추려 하거나 이리 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내 형편이 어떠한가를 상관하지 않고 말씀을 결론으로 받아 순종했던 사도바울처럼 사는 삶이 성경스타일의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우리의 신앙이 가짜이거나, 말씀이 머리에만 돌고 있거나, 천국과 지옥이 실제가 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겔 16:4∼6)처럼 예수 생명 붙잡고 성경스타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에서 모두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용비 목사(전주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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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예배설교  / Special Worship Preaching

 

 

 

제 목 : 내 영혼이 주를 찬양

말 씀 : 눅1:46-50

1.은혜의 포로가 된 사람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인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강림하사’ 3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여기서 사슬이란 쇠줄 즉 체인(Chain)을 말한다. 즉 주님의 은혜의 쇠사슬로 나를 주님께 꽁꽁 묶어서 완전히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고백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고백인가?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면 주님의 은혜의 쇠사슬에 꽁꽁 묶여 완전히 주님의 포로가 되어 살기를 노래했겠는가?

또 사실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가 완전히 포로가 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돈의 포로, 권력의 포로, 지식의 포로, 세상 향락의 포로 그 어떤 포로가 행복을 노래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포로가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 돈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세상 즐거움이든 세상적 사랑이든 다른 어떤 것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는 사람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은혜의 포로가 된 자의 찬양이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다. 마리아는 예수님 수태고지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 마리아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눅1:38절을 보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포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될 종입니다. 영광의 나라를 위한 종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황송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런 고백인 것이다.

이것은 마리아로서는 엄청난 모험이다. 그냥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사느냐 아니면 파혼을 당하든지 파혼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경험해야 하는 중대 기로에 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통해서 이룰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더 크고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았기에, 주님의 은혜의 사슬에 묶여 순종했고, 그래서 드디어 영광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은혜의 사슬로 나를 주님께 묶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2.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함.

마리아는 먼저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48절 말씀을 보라.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돌아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필요한 것들로 공급해 주셨다는 말이다. 잘나지도 거룩하지도 아름답지도 대단하지도 못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렇게 귀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이다.

사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 될 만큼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다. 물론 신실한 믿음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감히 주님의 모친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인 은혜로 마리아를 택하여 주님의 모친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 사역을 감당케 하셔서 우리가 누릴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인 것이다. 안 그런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어떻게 믿겠는가? 어떻게 주신 사명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마리아는 오늘 46,47절에서 고백한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나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돌아보셔서 이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지 도무지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저 기뻐 찬양하노라며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주셨고,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셨고,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없는 엄청난 축복이고 은혜이고 영광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 은혜를 주신 하나님,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자. 그 은혜의 포로가 되어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3.크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함.

또한 마리아는 49절에서 크신 일을 행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여기서 큰일은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 엄청난 일을 자신을 통해서 행하심에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말하면 뭐 하겠는가? 이런 엄청난 일이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가 전 세계 만국을 다 통일하여 전쟁이나 기근이나 싸움이나 기아나 미움이나 갈등이 전혀 없는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건설해 준다해도 주님께서 하신 일보다 클 수는 없다. 모든 질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해도 이보다 더 큰 일일 수는 없다. 만분의 일, 억분의 일도 안된다. 그래봤자 천국까지는 못간다. 또 죽는다.

그러나 주님은 마귀 사탄의 권세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것이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먼저 내가 그 반열에 들어왔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 은혜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이 곳에 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찬양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50년 이룬 역사를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나는 솔직히 50주년 행사를 끝내고 아쉬운 게 있다. 물론 여러분들이 많이 수고하셨고 여러모로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신 것 감사드린다. 그러나 좀 아쉬운 것은 이 귀한 행사를 하는데 감사헌금 한 사람이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 교회가 50년 전 이곳에 세워져 이룬 복음의 역사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이라면, 내가 이 교회를 통하여 얻은 은혜가 너무나 큰 것이라면, 이 일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감사한 일이라면 감사헌금은 했어야 되지 않았을까? 우리 육신의 부모님의 회갑이나 칠순행사를 한다면 어땠을까? 교회는 내 아버지집이 아니던가? 내 아버지집에 이런 경사스런 일이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가겠는가?

이건 결코 헌금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마음의 문제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과 생명의 역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의식의 문제이다.

여러분, 크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인하여 내가 은혜 받고 구원받았음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기 바란다. 하나님께 이 어둡고 완고한 땅에 이루신 이 큰 역사를 인하여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4.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함

다음에 마리아는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55절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여기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물론 아브라함에게 하신 많은 약속이 있지만 특별히 창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 말씀이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구원받고 복을 받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오심을 이미 약속하신 대로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원의 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셨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그 약속 안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까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런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 약속대로 영광의 나라가 완전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로 인하여 소망가운데 즐거워하며 그 은혜를 누리며 마음껏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그런가? 우리에게 이 기쁨이 있는데, 이 소망이 있는데, 이 영광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엄청만 축복을 받았는데 어찌 찬양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것을 제쳐두고 세상의 무슨 다른 은혜를 구하겠는가? 다른 무엇 때문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이 은혜의 사슬에 묶여 살자.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자부심으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며 마음껏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여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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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에는 향기가

 

(벧전1:24-25)

 

풀들이 봄에 났다가 여름에 무성했다가 가을에 쇠하여지고 겨울에는 다 말라죽는 것처럼 인생도 그러한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풀이 무성 할 때는 꽃을 피우고 씨를 만듭니다. 쇠하여지면 종자만 남기고 죽듯이, 우리 인간도 풀과 다름이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지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마르고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므로, 창세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영원까지도 변하지 않는 세세토록 있는 말씀입니다.

 

첫째, 아름다운 꽃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고후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에게나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아름답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으며 향기 없는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호박꽃도 길가 흙먼지 속에 핀 꽃도 아름답고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꽃향기를 선물하여야 합니다. 향기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합니다. 웃음과 기쁨을 불러옵니다.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향기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꽃이 되어 웃음과 기쁨이 넘치도록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예수향기를 날려야 합니다. 마귀를 꼬여들게 하는 썩은 냄새를 풍기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웃을 행복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꽃에는 꿀이 있습니다.(24: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24:13) 꿀은 우리 몸에 유익한 영양소를 공급해 줍니다. 아주 달고 맛이 있습니다. 솔로몬 왕도 꿀을 만나면 족 하리 만큼 먹으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 꿀이 있어야 합니다. 이 꿀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달콤하게 하는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유익하게 하는 삶이 있어야 이것이 바로 꿀을 내는 삶입니다. 우리 인생의 풀이 마르기 전에, 황금기가 지나가기 전에, 꽃을 피우고 꿀을 냅시다. 꿀 같이 단사람, 꿀처럼 맛있는 성도가 되어 희생하고 봉사하여 모두에게 기쁨을 줍시다.

 

셋째, 꽃이 지면 열매를 맺으니 아름답습니다. (13:23)

 

하나님의 피조물중에 인생보다 아름다운 꽃은 없습니다. 아름다움이란 것은 다른 사람을 감복시키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꽂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열매를 맺을 때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아름다움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행함의 열매가 아름다워야 하고, 마음의 열매가 아름다워야 하고, 영의 열매도 아름답게 열려야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다 던진다는 말씀과 같이 인생도 아름다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언/ 예수향기로 살고, 희생의 꿀도 내고, 열매도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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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봉헌식(섬김관봉헌, 느12:27-30)

 


제목 : 기쁨의 봉헌식

말씀 : 느12:27~30

1.섬김관 건축의 의미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섬김관을 건축하고 기쁨으로 입당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봉헌예배는 50주년 기념행사때에 별도로 드리겠지만 오늘 이렇게 섬김관을 건축하고 예배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또한 이 일을 위하여 수고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특별히 이석금 집사님 몸이 성치 못한데도 불구하고 너무 수고 많이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이 일이 작게 보일 수도 있고, 또 실제로 대지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만큼 흡족한 규모로 짓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50명 교회에서 21평은 500명 교회에서 210평과 동일합니다. 5000명 교회에서 2100평과 동일합니다. 50명 교회에서 2500만원은 500명 교회에서 2억5천만원과 동일합니다. 5,000명교회에서 25억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서는 힘과 뜻을 다해서 지었습니다. 또한 이 건물은 교우들과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아름다운 목적으로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섬김관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분명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물이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될 것임을 믿습니다. 섬김관, 말 그대로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용도로 사용할때에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건물은 성도들이 식사를 하고 교제하는 일에 좋은 도구가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앞으로 안마기나 찜질기 등 간단한 헬쓰기구도 들여 놓으면 성도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장으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 지역주민들을 초청하여 봉사활동을 한다든지 경로잔치를 한다든지 주민들을 섬기는 용도로 사용될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다른 행사나 시찰회의 모임에도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을 섬김관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20:28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니 이 건물이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되는데 주님이 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귀한 섬김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욱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귀한 섬김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나가는 복음의 귀한 도구로 사용될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섬김관 건축의 의미를 기억하며 앞으로 정말 이 섬김관이 이름 그대로 성도와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힘쓰며 합력함으로 이 귀한 섬김관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복음의 역사도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희생과 헌신으로 지어진 성벽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자녀를 낳아 양육하려면 부모님들의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도 동일합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더 많은 헌신과 희생과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많은 난관속에서도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예루살렘 성벽 쌓는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 봉헌식을 하고 있는 장면 중 일부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성을 쌓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하는 동안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느4: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야 니들이 이제 뭘 하려느냐. 니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무슨 힘이 있다고 그 일을 하겠느냐, 해봤자 오죽하겠느냐,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거라며 비웃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느6장에 보면 느헤미야에게 온갖 협박을 하고 더 암살할 음모도 꾸몄습니다. 느6:2절입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그뿐 아니라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느5:2을 보세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우리 먹고 살기도 힘든데 성벽은 무슨 성벽이냐고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어렵게 성벽공사를 했는지는 느4:16,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외부의 적대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한손에는 연장을 한손에는 칼를 들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숱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거기에 지지 않고 열심히 성벽을 건축하여 기어이 완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일도 마찬가지만 교회의 일도 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우리 섬김관도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장소의 문제도 있었고 행정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물론 재정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석금집사님이 어찌하면 조금이라도 경비를 덜 드려서 잘 이을 수 있을꼬 하는 마음으로 참으로 힘을 다해서 지었습니다. 심지어 몸이 담석이 있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병원에 가는 것도 미루고, 하루종일 식사도 못하고 일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섬김관이 아름답게 잘 지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의 헌신과 섬김을 통하여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음 주에 있을 50주년 행사나 앞으로 어떤 일이든지 우리가 같이 힘을 합하여 하면 잘 될 것입니다. 주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하게 할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 가기 전까지 문제는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앞으로도 게속해서 마음과 뜻과 힘을 합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나가면 반드시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계속해서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조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참여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그 험한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생명의 역사는 결코 우리의 헌신이 없이는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더욱 몸과 마음과 뜻을 합하여 참여해 주 실때에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더욱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건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찬양과 감사와 기쁨의 봉헌식

여러분, 오늘 섬김관 입당예배를 드리며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섬김관을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짓고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찬양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오늘 27절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그러니까 많은 악기를 동원해서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하며 봉헌식을 거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 다 읽어드리지는 못했지만 31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간단히 말씀드리면 느헤미야와 유다의 방백들과 찬송하는 사람들이 성벽위로 올라가 양쪽으로 나누어 감사찬송을 하면서 행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와 여러 가지 어려움속에서 심지어 살해의 위협도 받고, 조롱당하고, 그래서 한손에는 병기를 들고 일을 하여 성벽공사를 마쳤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이 되겠습니까? 그로 인하여 성안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찬양 안하겠습니까?

우리도 동일합니다. 이 섬김관이 얼마나 기다리던 섬김관입니까?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섬김관 정말 다시 짓고 싶었습니다. 겉보기에도 너무 초라하고 협소하고 섬기는 일에 사용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 일을 주장하였습니다. 과정에서 어떤 분들을 그 필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같이 이렇게 이루어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섬기는 일과 교제하는 일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 될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와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복음의 역사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귀한 섬김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섬김관을 짓는 일에 헌신적인 수고를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교회를 섬기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더욱 한마음이 한뜻이 되어 참여 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귀한 섬김관을 도구로 잘 활용하여 성도와 교회와 지역사회를 잘 섬겨나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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