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결혼예배 / 기독 예식 설교 

 


성경봉독     고린도전서 13:4-13   행복한 가정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서론

1. 먼저 이렇게 혼인 예배를 들릴 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가정 대사에 제가 주례를 맞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그간 이 결혼 예식이 있기 까지 여러 모양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특별히 양가의 부모님의 사랑의 수고에 감사와 찬앙을 드립니다.

2. 특별히 여기 신분00는 00 선생님과 00 여사님의 삼녀로써 어릴 때부터 정숙함으로 일등 신부감으로 잘 키워주셨습니다.  넘 예쁘고 축복이 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3. 또한 여기 신랑 000 군은 000 선생님과 000 여사님의 차남으로써 최고의 엄하면서 합리적인 사람으로 키위주시고 더구나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자라난 참신한 일등 신랑감입니다. 

 


4. 이런 가문과 가정에서 제가 더 할말이 없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비결 몇 말씀드리고져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오늘 성경 고린도전서에는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메셋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 받고 자신이 기도가운데 개척한 고린도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곳에 담긴 메시지는 사랑이라는 제목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두 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두분은 그런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잘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몸된 교회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결혼을 하고 2,3년지난면 몇 번의 고비가 있습니다. 그때 신앙 곧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문제의 정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가정은 수숩이 어럽습니다.

더불어 위로 하나님을 믿는 것 처럼 서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집니다. 저사람이 콩으로 메주를 쑷대도 나는 믿는다는 확신을 가질때 좀 늦어도 바쁜가보다 하지... 믿음이 없으면 별 생각을 다하는 것입니다. 두분은 이런 행복한 가정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립니다.


둘째는, 소망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도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에게 좀 힘들일이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희망 소망 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두분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좀 어려워도 내일의 희망있고 비젼을 있다는 것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에 대한 소망 사업에 대한 비젼 헌신에 대한 포부를 가지시고 위를 바라보는 두분이 될 때 행복의 파랑새는 이집에 계속 머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은 하면 관계가 더 넓어 집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 전에는 혼자의 관계가 이제는 두 셋 넷으로 복잡해 집니다.  특별히 양가의 부모님를 잘 섬기는 부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낳으신 수고 기르신 수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을 때 수치를 가려주신 분이 부모님입니다. 양가의 부모님의 관계 어르신들과의 관계가 더 좋아 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부모하고 원수가 되고  부모님 않보는 사람 모든 것 다 가졌으나 행복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친구 친척 동료 교우 이웃에게 진정한 장미의 향기가 풍기는 두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세번째로,  사랑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여기 사도바울이 세우신 고린도교회와 성도의 관계에서 최고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누구나 머물고싶고 함께 하고 싶으나 미움이 있는 곳에는 다 피라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그 속에 결혼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독립선언입니다. 그런 뜻에는 의무가 있는가 하면 책임도 있습니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마음도 하나 몸도 하나 주머니도 하나 집도하나 침대도 하나입니다.

 그 하나됨을 이루어 가는 진한 에너지가 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함 같이하라입니다. 먼저 사랑하는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해 합니다. 또 신부는 사랑만 받는 관계가 아니라 복종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복종은 내 의견이 다르드리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의견이 같을 때 따르는 것이라면 복종은 내 의견이 다르드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남편이기에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신 피의 사랑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는 아가폐적 사랑입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논리적으로 맞던 틀리던 무조건 두분이 이런 복종과 사랑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행복합니다. 여자를 힘으로 지배하라고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고.. 남자를 말로 이기려고 하지말고 순복으로 이기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되어서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 가정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사랑이니라  아멘


끝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르는데 저와 오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주례를 맡아 달라고 찾아오는 젊이들에게 반드시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약속을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실이 분명하지를 묻습니다. 아니면 믿게 하고 예수를 않믿는다고하면 노합니다.  또 하나는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음이외엔 갈라서는 일이 없다고 약속한다고 하면 주례를 응답합니다.

 

  제와 여기 계신분들이 바로 지금까지 이 두사람 곁에서 여러모양으로 함께 하셨던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결혼했기에 끝이 아니라 더욱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책망해 주시기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증인석에 앉아 계셨던 분들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대 일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신분의 가정에서 딸을 보낸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사위 아들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시고 신랑의 가정에서는 새 사람이 들어 왔으니 어떻게 하나 보자하고 감시 카메라 달라 놓치 말고 내 딸이라고 이제는 내 식구다 생각하시고 예쁘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이 두 사람의  행복한 가정이루고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다같이 힘찬 응원에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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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추도예배순서

 

 

 

 

※ 예배선언 : 인도자

 

"오늘 우리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모하며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시간 신령과 진리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편90:1~10)


 

※ 신앙고백 : 다함께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기로 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찬 송 : 492장, 다같이

 

1.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2.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나와 동행하소서

 

3. 어둔 골짝 지나가며 험한 바다 건너서 천국 문에 이르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후렴]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아멘

 
 

 

※ 기 도 : 작은아들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할머니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 날을 기억하며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할머니에게 다하지 못했던 부족함을 용서해주시고 이제 여기 남겨진 가족들끼리라도

 

못다 했던 사랑과 우애를 나눌 수 있도록 행복이 가득한 가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부모님의 건강을 소망하고 자녀들의 일이 잘 풀려가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들 모두가 믿음이 성장하고 더더욱 단단하여져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가정이 되길 간구하오니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우리 가정을 축복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봉독 : 욥기14 : 1-12절, (큰며느리)

 

1.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5.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6.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7.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 설 교 : (짧고 덧 없는 인생)

 

부처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의 실존 앞에 고민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길을 찾았고 그것을 해탈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처보다 훨씬 오래전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욥이 발견한 인간의 실존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1~4절) 여인에게서 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며칠이나 살다가 죽을까요? 욥은 그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회상할 때 대부분의 나날은 시들어 버린 꽃과 같고 실체 없는 그림자 같이 허망하며 순식간에 지나갔기에 진정 그에게 의미 있고 행복했던 나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욥은 지난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다 경험한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일이 자신에게는 괴로움뿐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생각할 때 이런 인생은 하나님 보시기에 눈 여겨 볼만한 대단한 것도 없고. 심판할 만한 어떤 가치도 없으며, 거룩함을 기대할만한 꼬투리조차 없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둘째,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5~6) 욥은 사람이 사는 날이 정해져 있고 그 달수가 주께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 한계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고 일정한 시간 동안 일하기로 한 노동자처럼 주님과 약속된 시간까지 일하다가 우리는 어느 순간 그 때가 되면 모든 고단한 일상을 마치고 고향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3개월씩 늘어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이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애를 써도 오늘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나의 수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셋째, 인간은 결국 허망하게 사라져 버립니다.(7~12) 나무가 잘려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 한 새 순이 나오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심지어 땅 속에서 그 뿌리가 늙고 그 밑동이 죽는다 할지라도 물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거기서 연한 순이 돋아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가뭄에 말라버린 강물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건강했던 사람도 어느 날 땅에 묻히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영웅호걸도 절세가인도 지나가는 청춘을 잡을 수 없고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다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이 이렇게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의 수명이 그 날과 달수가 하나님께 정해져 있으며, 이 땅에서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결국 이렇게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며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 해체되고 그 구성 물질들은 불에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지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베드로후서 3:11~13) 이것이 기독교가 불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2013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찬 송 : 221장 다함께

 

1. 나 가난복지 귀한성에 들어 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 버렸네 죄 중에 다시 방황할 일 전혀 없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2. 그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니 나 가는 길이 형통하겠네 그 요단강을 내가 지금 건넌 후에는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3. 내 주린 영혼 만나로써 먹여 주시니 그 양식 내게 생명 되겠네 이 후로 생명 양식 주와 함께 먹으며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후렴]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 주기도문 : 다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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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헌신예배 - 거룩한 사역자


 


 


제목 : 거룩한 사역자

말씀 : 대하20:20~23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 당시 암몬과 모압과 에돔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유다를 침공하였는데 여호사밧은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라며 너희가 싸울 것이 없이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대열을 이루고 서서 내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희한한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대열을 이루고 그 앞에 성가대를 앞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요. 찬송이 시작될 때에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자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칼 한번 안 쓰고 오직 찬양으로 전대미문의 승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성가대가 가져야 할 자세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성가대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할지를 살펴볼 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성가대원들은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먼저 오늘 21절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여기에 보면 거룩한 예복 즉 성가대 가운을 입혀서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비상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송은 왠 찬송이며 거룩한 예복은 또 뭡니까? 그럼 왜 이런 비상상황에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찬양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룩한 사명감의 고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힘으로 그들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가대도 거룩한 예복 즉 가운을 입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폼으로 입는 게 아닙니다. 사람보기에 멋있으라고 입는 게 아닙니다. 목사 가운이나 장로 가운이 성가대 가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는 거룩히 구별되어 그리스도로 옷입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거룩한 사명을 받은 자로 구별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운을 입는다고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그 거룩한 직분이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원들은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을 위하여 특별히 세움 받은 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입는 예복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믿음과 고백과 사명감이 진정한 예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있다면 일상적인 삶도 거룩하게 성결하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아무렇게 하면서 성가대석에 앉아서 아무리 꾀꼬리 같은 소리로 찬양을 해도 그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물론 예배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세상에서는 그냥 내 마음대로 살다가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럴듯하게 찬양한다고 그게 온전한 찬양이 되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인자와 자지를 높여 드리는 일인데 그러한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해야 하고 그렇게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당연히 일생생활에서도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 성가대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나는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성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 사역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일상생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며 믿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며 더욱 생명의 은총과 능력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성가대는 믿음으로 앞장 서야 합니다.

성가대는 귀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니 만큼 일상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나 모범을 보여야 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귀한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모든 일에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1절 다시 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여호사밧은 성가대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군대의 앞에 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전술적으로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다. 적군이 성가대를 향해 돌진해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가대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두렵고 떨려서 찬양도 제대로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선두에 서서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20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즉 여호사밧이 ‘걱정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면 형통할 것이다.’라고 하자 성가대원들이 그 말씀을 믿고 적을 눈앞에 두고 군대의 제일 앞에서 담대히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성가대원들은 이런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믿음 생활에서 앞장서고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교회는 성가대가 목사님 강단보다도 더 앞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성가대원들은 목사님 뒤통수 보면서 예배를 드리더라고요. 오늘 이 말씀을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뭐니뭐니해도 예배의 꽃은 말씀인데 말씀보다 앞에 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또 어떻게 보면 뭐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일 앞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하려면 마주보고 해야지 뒷모습보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야기할 때 한 사람이 뒤돌아서서 하면 어떻겠어요?

여하간 여러분,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귀한 사명,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은 언제나 남보다 앞장서야 하고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성가대도 동일합니다. 특히 성가대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마찬가지지만 성가대는 정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면 예배에 빠지면 안됩니다. 안 그래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빠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바쁘다고 빠지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빠지고 상황이 그래서 여건이 그래서 빠지고... 아닙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예배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로 예배를 방해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그런 합리화나 변명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닙니다. 사탄의 소립니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휴 목사님, 세월이 그런데요. 요새 교인들 다 그런데요. 그러면 교인들 다 도망갑니다. 그러면 힘들어서 교회 생활 못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가 힘들어진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따라 환경 따라 상황 따라 사람 따라 사람 생각대로 편한대로 하니까 믿음이 죽어가고 교회가 힘을 잃고 교회가 욕을 먹고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면 안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모든 일에 본이 되고 앞장서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졸면 안됩니다.

그리고 물론 교회의 다른 일에도 앞에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폼 나게 싹 차려입고 하는 일에는 제법 참여하고 궂은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부모들도 보면 자녀들을 폼나는 일은 안시켜주면 뭐라고 그러고 궂은 시킨다고 뭐라 그럽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궂은 일에도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주의 어떤 교회 이야기인데 그 교회 장로님이 자기 교회는 성가대 찬양 소리가 잘 안 들릴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성가대가 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다른 쪽에서 학생들이 관현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합주를 하는데 그 악기 소리 때문에 성가대가 찬양할 때에 고음은 그런대로 들리는데 저음은 안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악기연주자를 줄이자고 하니까 목사님이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서운해 해서 곤란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학생들에게 교회 화장실 청소를 시키다가 그만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아니 화장실 청소를 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여러분, 폼나는 자리는 안 앉혀 준다고 뭐라 그러고, 궂은 일은 시킨다고 뭐라 그런다면 이게 믿음있는 행동입니까? 여러분,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도 궂은 일도 해야 합니다. 궂은 일 하는 사람 따로 있고 폼나는 일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폼나는 일만 하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요 자기가 영광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특별히 너무나 귀한 찬양의 사역을 맡은 우리 성가대는 찬양하는 일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모범을 보이고 앞장섬으로 삶의 예배가 뒷받침되어 여러분의 찬양이 진정 향기로운 찬양이 되고 여러분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성가대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자기 만족이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찬양을 하면서 우리도 은혜와 위로가 되고 소망도 갖게 되고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찬양은 그게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찬양이 뭡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찬양은 나의 기쁨이나 만족이나 은혜나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기쁘시게 해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상황이나 환경도 이기게 되고 위로도 받고 소망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바뀌어 자신이 뭔가 얻으려고 찬양을 한다면 그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노래이므로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절 후반부 다시 봅니다.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보세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힘을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 저들을 물리쳐 주소서. 그렇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자하심을 믿고 그래서 그렇게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찬양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도와달라고 위로해달라고 힘을 달라고 소망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진짜 찬양입니다. 나의 위로 소망 구원 도움이 목적이 되면 찬양이 아니라 찬양을 나의 필요를 채움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진정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가대는 이 찬양 사역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되새겨보며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는 일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생활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보기에 그럴듯한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앞장 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정말 여러분의 찬양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상달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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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현 교회 전임 목사 / 새벽기도회의 횃불 든 길선주 

 

 

  
먼저 길선주 목사님을 소개해드리면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대현 교회 전임 목사로 취임한다.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종이 왕실 고문으로 와달라고 간청하기도 했고,
3.1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40여 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60여 곳에 교회를 세우는 불같은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일생에 남긴 저서로는
 <해타론>, <만사성취>, <말세학>, <강대보감>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무슨 뜻인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떤 비상한 때에도 흔들릴 수 없는 믿음으로, 굳게 세워졌다는 고백이다.

ㅇ 이런 신앙의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무슨 위험이 닥쳐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안정된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며 살겠다 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자신을 향하여 ‘깨어 일어나라’고 스스로 권하고 굳은 결심을 선포했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기 ‘영광’은 ‘케보디’란 말인데 그 원형 ‘카보드’를 시108:1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그래 여기 ‘영광’도 ‘마음’이 더 적합하다는 평이 있다. 영어성경도 마음, 영혼(soul)로

번역해서, 'Wake up, my soul !'이라 했다.

ㅇ 온 세상이 다 잠든 고요한 새벽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내 영혼아 깨어 일어나라.

​비파와 수금도 깨어 함께 찬양하자’ 이 표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여 새벽을 깨워 산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이겠는가!! 이런 일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하도록 횃불을 밝혀 든 사람이 길선주 조사다.

 

     Ⅱ. 길선주의 생애와 사역

1. 그의 출생과 성장: 그는 평안남도 안주의 끼니 분별이 어려운 집에서 출생(1869) 했다.

​그는 총명하고 체격이 뛰어났다. 4세부터 한문을 배워 7세에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17세에 상점을 시작했으나 실패하고 낙심하여 방탕하고 방황하다가, 친구 따라 선도(仙道,

​신선이 되려는 도)를 시작했다. 부자 되고 외적을 물리치는데 그 목적을 두고, 3년을

몰두했으나 달라지는 것이 없어 포기했다.

ㅇ 그는 시력이 약해지고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그 무렵 평양에는 야소교(‘耶蘇敎’, ‘예수’의

​取音)를 전하는 양귀자(洋鬼子) 소문이 파다했는데, 선교사 마펫에 대한 소문이다. 길선주는

거의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 친구 김종성이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는 간증을 들었다.

ㅇ 길선주는 삶의 기쁨과 평안을 찾았다는 친구의 간증을 듣고 도저히 못 믿을 소리지만,

‘하나님’이란 신에게 기도해 볼 생각을 가졌다. 그날 밤 하나님이란 신이 있다면, 내게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가 애써 기도하는데 “선주야, 선주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살려주소서!!” 그는 그날 밤 기도를 계속하는 동안 의심,

​불안, 육체의 질병 등 모든 것들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새로운

사람으로 일어나, 기독교인 된 증표로 이렇게 살기 시작했다.

➀ 머리를 깎아버렸다.

➁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며, 그날 일을 하나님께 상의했다.

➂ 매월 세 번씩 작정하고 특별기도를 했다.

④ 날마다 낮 12시와 밤 12시에 기도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⑤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20분씩 요한계시록을 암송했다.

ㅇ 그는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1897. 8.15) 기도와 성경 읽기에

몰두하여, 성령 충만함으로 전도했다. 토지 800평과 재산을 모두 교회에 헌납했다. 그는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고(1901) 다음 해에는 그 교회 ‘助事’로 시무하며, 평양신학교가

개교하자, 신학생이 되었다(1903)

ㅇ 길 조사는 1905년에 장대현교회 박치록 장로와 함께, 매일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

하기를 시작했다. 이 일이 교인들에게 차츰 알려지면서 교인들이 모여들고 드디어 당회가

결의하여, 세계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새벽기도회’를 실시하게 되었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 말씀처럼, 새벽마다 종을 울려 교인들이 몰려와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새벽을 깨워살았다.

ㅇ 그들은 새벽마다 모여 울며 애통하여 죄를 살펴 자복하고 교회와 잃어버린 조국, 고통받는

민족을 위하여 울부짖어 기도했다. 그러다가 그 교회는 새벽만이 아니라, 정오에도 종을 쳐

어디에 있든지 종소리 듣고 기도하게 했다.

ㅇ 길선주는 1907년 한국의 최초의 신학교 졸업생 7인 중 한한 사람으로서, 한국 첫 노회로

조직한 ‘조선야소교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고, 본 교회인 장대현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ㅇ 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 운동은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의 불길과 함께, 전국 교회로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세계선교역사에서 말하는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은 성령님의

역사이지만, 목회자 길선주와 장로 박치록 두 사람의 합심으로 시작한 새벽기도의 작은

불씨에 불이 붙어 타올라서, 드디어 전국으로 번져 한국교회와 민족을 깨웠던 것이다.

ㅇ 이런 길선주 목사의 장남이 독립운동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1911) 경찰 고문으로

사망하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1919년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구속 되어 옥중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ㅇ 그는 만년에 시력을 잃었지만, 평생 성경을 많이 읽었다. 요한계시록을 1,200회 이상,

​요한서신을 500회 이상, 구약을 30회 이상, 신약을 100회 이상 읽었고, 요한계시록 등 성경

전체의 중요한 부분은 다 암송했다.

ㅇ 1935년 11월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한 주간 사경회를 인도하고, 그 마지막 시간

축도를 하고 돌아서다가, 강단에서 쓰러져 67세로 최후를 마쳤다.

 

     Ⅲ. 그의 삶이 주는 교훈

➀ 그의 초년의 고난과 방황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신호였다.

➁ 친구 김종성의 눈물의 간증과 권면은 그를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시는 목소리였다.

➂ 목회자와 장로 두 사람은 새벽을 깨워 기도하다가, 영광스러운 ‘새벽기도회’를 출발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았다.

④ 그는 불타는 믿음과 사랑으로, 고통받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살았다.

⑤ 그는 기도와 성경 속에 취하여, 충만한 은혜와 권능으로, 온 세계 목회자들에게 목회를

어떻게 할지를 본 보여 주었다.

⑥ 그는 평생 말씀을 선포하다가, 마지막도 말씀의 단에서 숨을 거두어 거룩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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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속회  예배공과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는 하나님
 
◎ 찬송가(다같이) : 304장(통일 404장), 310장(통일 410장)
◎ 신앙고백(다같이) : 사도신경
◎ 말씀봉독(다같이) : 시편 37편 23∼29절
◎ 본문읽기
◎ 주기도문(다같이) : 맨 마지막에

◎오늘의 만나

 시편 37편은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핵심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의지할 때, 악이 범람하고 혼란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절대 주권자 하나님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종종 ‘악한 사람들도 잘 사는데, 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생 여정에 친히 간섭하신다고 말합니다.
 “야훼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 37:23).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의인이 고통당하고 도리어 악인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에 따라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놓으신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야훼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는 것 같으나 그 일의 성취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잠 16:9).
 창세기 45장에 보면 요셉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아넘겼던 비정한 형들 앞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요셉은 형들의 시기 질투로 인해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요셉에게 크나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믿어야 합니다. 시편 37편 5절은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2. 붙들어주시는 하나님

 사람은 누구나 환난을 당합니다. 의인에게도 실패와 가난과 병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다시 일어나도록 붙들어 일으키십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야훼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다윗은 많은 역경을 겪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10여 년을 쫓겨다니며 광야와 황무지에서 숨어지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과 가장 믿었던 신하 아히도벨이 반란을 일으켜 밤에 맨발로 울면서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을 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밤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고 낙심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숱한 고난 속에서도 나를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굳건히 섰습니다.
 때때로 악인이 형통한 것 같고, 그 기세가 등등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강한 오른팔이 붙드시기에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잠언 24장 16절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시카고 하비스트 바이블 채플의 담임목사인 제임스 맥도널드는 그의 책 『언제나 진실하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련의 목적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의인의 시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절대 주권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라고 외치십시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를 붙들어주시고 일으켜 세워 마침내 승리하게 하십니다.”


3. 의인에게 주시는 복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영원한 축복을 보장하십니다. 시편 37편 25절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의인이 잠깐 고난을 당할 수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베풀고 나누는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그 풍족함이 후손들에게까지 미치도록 복을 부어주십니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 37:26).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인하여 영원히 보호받지만, 악인의 자손들은 끊어지게 됩니다(시 37:28). 또한 주님께서는 의인의 일생을 형통하게 하시고(시 37:29), 그 자손들에게 축복의 터전을 마련해주십니다(시 25:13).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잘될 뿐만 아니라 천국에 가서도 상급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걸어가는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환난은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깐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영원한 승리와 축복을 보장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날에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생이 다 가도록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예비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 간추린 만나

<절대 주권자 하나님>
1.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생 여정에 친히 간섭하십니다.
2. 의인이 고통당하고 도리어 악인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에 따라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3.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붙들어주시는 하나님>
1. 사람은 누구나 환난을 당합니다. 의인에게도 실패와 가난과 병약함이 있습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붙들어 일으키십니다.
3.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의인에게 주시는 복>
1.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영원한 축복을 보장하십니다.
2. 의인이 잠깐 고난을 당할 수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3. 환난 날에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생이 다 가도록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선을 실천합시다.

◎ 내 삶의 만나

<옆 사람에게 인사>
1. 절대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2.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3. 의인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기 도>
1. 절대 주권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2. 어려움을 당할 때 붙들어 일으켜달라고 기도합시다.
3. 하나님의 의와 선을 실천함으로 의인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중보기도>
옆 사람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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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란 무엇인가?

 

1.들어가는 말


교회는 경건한 신앙인의 집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며 갱신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공동체는 '공동 체로 계신 하나님'을 닮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썼던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혼자로 계신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인들의 하나님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로 계시는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교회, 즉 친교 혹은 사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더불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표현하니까, 교단의 어떤 분은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좌익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셨는데, 본래 이 용어는 개인주의와 대립된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 용어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와 동일한 어휘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단순하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공동체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면, 이 때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적 민주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유사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늘 불완전한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한 사회체제나마 이를 수용하고 신앙의 눈으로 늘 이를 개혁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양식입니다. 또 본인은 교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이런 각도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사귐'이라고 불립니다.

 


2.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 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이 세계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세워지고 경험되는 영원히 현재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 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반영(反影), 복사(複寫), 거울, 즉 피사체(被寫體)입니다, 교회는 그 나라의 여명(黎明), 전조(前兆)이요, 그 나라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입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신앙과 희망의 대상인 하나님의 나라는 1.정치적 독재-억압이 없는 민주주의적 정치, 2.경제적 독점-착취가 없는 사회주의적 경제, 3.차별-소외가 없는 평등주의적 사회, 4.자연의 지배-착취가 없는 공생주의적 생태계, 5.죄책감과 심판과 무의미로부터 해방된 하나님과의 교제 안의 영원하고 복된 생활을 지향하는, 성서의 중심되는 구원개념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 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 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사랑과 희생의 능력으로써 교회를 통치 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새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창설자는 능력있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를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도 교회는 여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택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충설명: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임재)하는 곳 혹은 형식은 1.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도적 생활(마태 28,18 이하), 2.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떼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 공동체(고전 11, 23 이하), 3.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사귀고 예배하는 형제-자매적 공동체(마태 18, 20), 4.헐벗고 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곳(마태 25,31 이하; 교회 밖의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익명적 그리스도인!), 5.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능력으로써 충만해진 그분의 몸, 하나님의 대성전이 된 우주(골로새서, 에베소서)입니다.

 


3) 교회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이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성령 안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부르시고 모으신 것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 속에는 언제나 성령도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신약성서 시대에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셨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얻고 구체적인 모습, 즉 '성령의 교제'라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동체 의지(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선택)에 있고,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 사(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새로운 백성의 선택)에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출발점은 바로 성령강림(오순절 사건과 선교적 파송)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선사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를 생기있고 활기차고 능력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두운 거짓 영들의 한복판에서 참 증인, 세상의 빛과 소금, 변화의 누룩으로 만드십니다.


보충설명: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과 차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들 간의 구분은 존재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은사가 있는데, 1.'선포의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가 속해 있고, 2.'봉사의 은사'에는 병고치는 자, 사랑을 베푸는 자(집사)가 있고, 3.치리의 은사에는 감독(장로)이 속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심지어 고난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남 모르는 사랑의 행위, 기술적 봉사, 결혼, 순결(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적 삶) 등도 은사로 인정됩니다.이처럼 주님이 부르신 자에게는 모두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독점이나 획일화, 횡포나 지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것대로,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과 그 은사들의 코이노니아(사귐, 교제), 즉 카리스마적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자신 안에서 이미 공동체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각기 교회를 이루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듯이, 이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 의 몸-성령의 교제가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이룹니다.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주로 강조해 왔고, 개신교 회의 대다수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성령의 교제'를 특히 강조해 왔습니다. 이 세 가지 교회론의 공통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하 나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만, 각기 독특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역사성-시간성-세상성을 나타내고, 2.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영원성-공간성-구별성을 나타내며, 3.성령 교제는 교회의 구체성-사회성-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하며,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2.그리고 교회는 시간대(성부 시대- 성자 시대-성령 시대 혹은 구약 시대-신약 시대-교회사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공간성(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일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지니며,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3.교회의 사명


교회가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해야 하는 역할, 임무 혹은 사명과 봉사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이 땅에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이 증언으로 요약되며, 교회의 모든 봉사는 이 증언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증언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와 치유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듯이, 교회도 말과 행위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교회가 말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찬양, 설교, 교육, 전도, 선교 및 신학(6개)을 포함시켰고, 행위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기도, 목회상담(영혼치유),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생활, 봉사, 예언자적 행동 및 친교(6개)를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12개). 그러나 본인은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지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사명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먼저,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바로 세상에서 불러 모여진 자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도의 교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받아 모인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런 모이는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은 예배와 찬양, 설교, 교육, 신학, 목회상담 및 친교입니다(6개).

그리고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결국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남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기능에는 기도, 전도, 선교, 봉사, 모범적인 생활 및 예언자적 행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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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교회헌신예배 - 멋있는 사람

 


 
제목 : 멋있는 사람, 바나바

말씀 : 행9:26-31

1.멋있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상명대학교 김경일 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라기보다는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다. 여성을 제외시킨 남성만을 위한 도덕이었다. 생명을 위한 도덕이라기보다는 주검을 위한 도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농공상과 양반과 상인으로 대표되는 계급적, 신분차별적 사회, 토론 문화의 부재를 낳게 한 가부장적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도리, 온갖 갈등과 모함과 죽음을 불러온 혈연 사회, 여성을 거의 철저히 무시하는 남성 우월의식, 창조적 교육을 방해하는 스승의 권위 강조 등등을 지적하며 그런 의식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 사회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해 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사회가 보다 투명하고 평등하고 창의력이 있고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함으로 모든 갈등을 뛰어 넘고 나아가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길 줄 아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유교적 고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김교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꼭 기독교의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속에 만연되어 있는 형식주의, 혈연주의, 계급주의 등이 거의 대부분 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심각한 성차별도 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게다가 솔직히 유교의 문화는 산 자를 위한 문화라기 보다는 죽은 자를 위한 문화이기도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수많은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고 무덤에는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지... 그거 다 허세입니다. 내로라하는 거지요. 우리 이렇게 성대하게 제사 지낸다. 우리 이런 양반이다. 우리 선조가 이렇게 출세했었다. 우리 가문은 이런 가문이다.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죠.

그게 중요합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정말 아름답게 가치있게 의미있게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신분이 중요합니까? 자리가 중요합니까? 물론 의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떻게 아름답게 성실하게 정직하게 그 일을 수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귀한 존재로 태어나서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서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가치관은 세상 가치관과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그저 돈많고 빽있고 권세있고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는 자들을 알아줍니다. 그들이 목에 힘주고 다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치는 다릅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는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를 아름답게 섬기는 사람, 사람을 살리는 사람, 세워주는 사람, 화평을 가져다주는 사람, 은혜를 끼치는 사람, 기쁨을 가져다주는 사람, 섬기는 사람 이런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을 높여 주고 그런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고 상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0:26,2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그저 주님의 가치를 따라 그저 성실하게 섬기는 자의 위치에서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때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멋있는 사람은 남을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는 참으로 멋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이 바나바에 대해서는 행4장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레위족속으로 구브로 섬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바나바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바나바란 권위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권위란 권력과 지위를 말할 때 사용하는 권위가 아니고 권고하고 위로한다는 뜻의 권위입니다. 즉 그는 많은 사람들을 돌아보고 위로하고 격려하여 힘을 주고 용기를 주어 세워주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나바의 이런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울 즉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뒤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수행한뒤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협력하여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사도들은 아직 사울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26절 보세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그러니까 사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누굽니까? 그가 예수믿는 사람들으 잡아 죽였던 사람이 아닙니까? 심지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자기 나라도 아닌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날 예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도 하고, 3년간 수행도 하였다는 거예요. 그러나 제자들은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것도 아마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속에 들어와 보다 효과적으로 정보를 입수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바나바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바나자는 바울을 믿고 그를 사도들에게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데기고 가서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27절 말씀이지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신임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바나바라는 별명까지 지어줬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말이라면 안 믿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출입하겨 사도들과 교제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바울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전까지만 해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원수였습니다. 핍박자였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죽였던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거 저런거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를 인정해 주고 그의 보증인 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바울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바울이라는 지도를 세워준 훌륭한 일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의 이름을 한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열 개의 그림 중에 이 사람의 작품이 3개나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시골교회에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 목회했던 교회는 어떤 시골의 작음 교회였었는데 그 교회는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설교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목회하는 것이 어줍지않다고 푸념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목회를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갔으니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너무나 큰 인재를 잃었다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의 열정과 창의력을 볼때가 그가 만약 계속 목회를 했더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가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한번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세워주는 사람인가, 주저 앉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제직들은 교회를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구역장과 구역권찰들은 교회를 세우고, 구역을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힘빠지게 만들고, 맥이 풀리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고, 교회의 분위기를 가라 앉히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힘을 북돋아주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세워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분위를 세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일을 할 때 분위기를 다운시키지 말고 같이 참여해서 분위기를 세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회자가 악을 향해 가지 않고 무언가 주님의 일을 한번 해보려고 하면 분위기를 다운시키지 말고 뭔가 본 해보는 것 같이 할 수 있도록 돕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코 무슨 일에 든지 찬물을 끼얹는 자자 되지 말고 성령의 불을 붓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 분위기가 살고, 교회가 활력이 있고, 교회가 활기차게 움직여서 주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멋있는 사람은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이다.

바나바라는 분은 인격만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물질로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행4:36, 37절 말씀 보세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라는 섬입니다. 당시만 해도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곳입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이 났고, 벌꿀의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구브로 출신이라고 하면 부자로구나 하는 연상을 할 정도로 구브로는 풍성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이 지방 출신으로 집안 배경으로 상당히 넉넉한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짐작이 갑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신앙도 좋고 인격도 좋고 돈도 제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그는 지금 교회에 헌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가 어떤 명목으로 내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말해 무슨 건축헌금이나 선교헌금이나 구제헌금이나 어떤 명목을 정하지 않고 그냥 사도들 앞에 내어 놓습니다. 즉 그는 아무 조건없이 그냥 사도들 앞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사도들이 알아서 사용하십시오. 교회가 알아서 적당한 곳에 사용하십시오하면서 사도들을 전적으로 믿고, 교회를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것을 조건없이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얼마나 유익한 일입니까?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얼마나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입니까?

여러분, 헌금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이며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감사의 문제이며 이것은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있는 곳에 시간이 가고, 물질이 가고, 정열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협력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기기를 원하신다면, 주님의 교회를 아릅답게 세워가기를 원하신다면 헌금에도 인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 주신 물질과 시간과 능력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불쌍한 이웃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하여 사용할 때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여러분도 더욱 아름답고 가치있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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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현숙한 여인

 

 


제목 : 현숙한 여인

말씀 : 잠31:10-12

1.영혼이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워지기를 바랍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동일하겠지만 여성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성이라면 거의 다 화장을 합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하는 화장도 나이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고 합니다.

20대의 여성들이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고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은 화장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대가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은 분장이라고 한답니다. 분장은 뭡니까? 억지로 꾸미는 것이지요.

그럼 40대가 화장을 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때는 변장이라고 한답니다. 자신을 감추고 새로운 변모를 시도해 보는 거죠. 그럼 50대가 하는 화장은 뭐라고 할까요? 그때는 위장이라고 한답니다. 완전히 감추기 위해서 말 그대로 위장을 하는 것입니다. 60대가 화장하는 것은 무어라고 할까요? 포장이라고 한답니다. 완전히 덮어씌우는 겁니다.

연세드신 분들 그렇잖아도 나이 먹는 것도 서글픈데 그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은 전혀 관계없으니까요. 어차피 화장을 하든 분장을 하든 변장을 하든 위장을 하든 포장을 하든 하나님은 그런 것은 하나도 안 따지시니까요.

그럼 뭘 따집니까? 말할 것도 없이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의 아름다움을 보십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십니다. 마음과 영혼의 아름다움은 나이와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아무리 이팔청춘 미인이라도 마음과 영혼이 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머리에 살구꽃이 피었어도 마음과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향기가 폴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특별히 우리 여전도회 회원들은 모두 그런 미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마음과 영혼이 아름다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미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복되고 남도 복되게 하는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영혼이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2.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입니다.(30절)

우리가 정말 아름답고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이는 진정한 아름다움도 지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름다움이 뭡니까? 지혜가 뭡니까? 의로움이 뭡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생명의 풍요로움과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 그게 아름다움이고 그게 지혜이고 그게 현숙함입니다. 생명을 기쁘게 풍요롭게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 그건 결코 아름다움도 지혜도 현숙함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이 어떻게 진정으로 생명을 풍요롭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부분적으로는 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진짜가 아닙니다. 금방 지나가면 그 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을 바탕으로 사랑하고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고 지혜를 줄때 거기에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본장 30절 말씀 보세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고운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누가 칭찬을 받아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 그가 칭찬을 받는다.

고운 것, 아름다운 것, 그거 별거 아닙니다. 금방 지나갑니다. 인격적으로 아름다운 것, 물론 그것도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지나갑니다. 세상에서 잠시 유익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도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남는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거 자랑거리 삼고 살다간 낭패 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운데 하는 일들은 영원히 남습니다. 영원히 상급과 칭찬과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호와를 진정으로 경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으로 삼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이웃에게 칭찬받고 가정과 교회를 세워나가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덕망이 있는 여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움의 또 다른 모습은 바로 덕망이 있는 모습니다. 오늘 10절 다시 봅시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여기서 현숙함이란 lyIj'(하일)은 힘, 능력, 용기, 부, 재산이라는 의미와 함께 덕망 있는, 훌륭한, 선한이라는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덕망 있고 훌륭하고 선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힘과 능력과 부를 가지게 되고 그래서 그 값은 진주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능력있는 여성이 누구겠습니까? 정말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사회를 세워나가는 파워가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물론 지식도 영향을 미칩니다. 지식이나 능력도 가정과 교회를 세워나가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한 힘은 인간의 어떤 지식이나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결코 외적인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나옵니다. 현숙함 즉 덕망과 선함과 깨끗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아름다움과 힘과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자 보세요. 어떤 여인은 아름다우나 현숙함이 없다고 치고, 다른 한 여인은 비록 아름답지는 못하나 현숙하다고 칩시다. 그러면 누가 파워가 있겠습니까? 물론 아름다움과 현숙함을 두가지 다 가지고 있다면 더 좋긴 하겠지만 외적인 아름다움이냐 아니면 내적인 현숙함이냐를 놓고 비교 한다면 어느 것이 더 파워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따질 것도 없이 현숙함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현숙함이 없으면 그 여인은 가치가 없는 여인입니다.

잠11:22절 보세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여러분,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돼지코에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금고리를 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귀한 금고리마져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아무리 귀하고 아름답고 지식이 있어도 현숙하지 못하면 우스꽝스럽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돼지코에 달린 귀고리와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전도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현숙한 여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덕이 있고 선하고 정결한 모습을 통하여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진정한 힘을 가지고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를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현숙한 모습으로 주의 향기 발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듣고 상급받고 더불어 복음의 역사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우리 여전도회 회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책임을 다하는 여인입니다.

여러분, 오늘 다 읽지는 못했지만 13절부터 31절까지는 현숙한 여인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기록된 말씀들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씀드린다면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2절 봅시다.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그러니까 현숙한 여인은 가정에서 남편에게 최대한 선을 행하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현숙한 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족에게 덕을 끼치는 것은 물론 가정을 경제적으로 세우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절의 말씀을 보면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라고 말씀합니다. 즉 가정을 돌볼 뿐만 아니라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여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요, 현숙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즉 현숙한 여인은 단순히 덕을 행하고 가정을 돌보고 선을 행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숙한 여인은 결코 마음속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 아닙니다. 마음만 고운 것이 아닙니다. 그냥 참기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가지고 진정한 현숙이라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 덕망과 더불어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로써 어머니로서 집사로서 권사로 자신의 책임을 다 할 줄 아는 여인이 진정한 현숙인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성경은 결코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순히 마음속으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내의 사명, 어머니의 사명, 집사 권사로서의 사명. 이런 사명들은 모두가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명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 주님을 경외한다면 이런 사명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진정한 경외요 현숙이요 지혜요 덕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어렵게 느껴 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 역할을 다 하느냐, 하나님께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자식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게다가 경제적인 면까지 게다가 복음을 전하는 일까지 그렇게 하다간 제명에 못 죽겠다 그렇게 느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지치고 힘들어 쓰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엎드려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지혜를 주십니다. 그런 모든 종류의 일들에 대하여 분명히 지혜롭게 시간을 잘 배분하여 행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지쳐 쓰러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 31절 보세요.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어떻게 된다고요?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행한 모든 일에 분명히 풍성한 열매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일 하다가 지쳐서 쓰러지고 병나고 비실비실하고 그래서 남에게 비웃음당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일에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래서 남들에게 칭찬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고 교회도 살리는 그런 아름다운 그런 위대한 인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여전도회 회원들은 진정한 현숙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정을 돌보며 교회에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때에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듣고 이웃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많은 열매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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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찬양 예배 설교

 

 


제목 :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말씀 : 시43:1~5

1.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한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누리는 복은 물론 많다. 우선은 구원의 복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는 복이다. 그 다음에 현재의 복이다. 현재의 복에는 물질의 복이나 건강의 복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아무리 물질과 건강이 있어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면 헛일이다. 그러나 비록 물질과 육신이 좀 부족해도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된다. 요14:27절을 보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다. 우리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버리고 평안을 누려야 한다. 근심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일들을 올바르게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염려와 불안과 근심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과 평화와 감사와 기쁨의 영이다. 마귀는 죽음과 싸움과 원망과 불평과 저주의 영이다. 그러므로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러면 분명 우리는 그 능력과 은혜로서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평안과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늘 평안을 누릴까?

2.주님께 호소해야 한다.

오늘 말씀은 고라자손이 시온을 그리워하여 지은 찬송시이다. 오늘1,2절에 보면 그들이 얼마나 큰 고난 가운데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슬프게 다니나이까? 이 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 시에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로 여겨지고 있지만 확실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적 자들에 의하여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이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기도하고 호소했다. 하나님, 저희들이 불의한 자에게 고난 받고 있습니다. 원수로부터 억압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원망하고 불평하며 따지는 것이 아니다. 긍휼히 여겨달라는 애원이며, 죄를 용서해달라는 탄원인 것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혹시 어려울 때, 고난당할 때, 억울할 때 원망 불평 불만 낙심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호소하라.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탄원하라.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라. 그리하면 분명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힘을 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3.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한 다음에 시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간구한다. 시43:3절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 주소서. 나를 인도하소서. 주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다. 주님만이 희망입니다. 소망입니다. 빛이십니다. 진리이십니다. 그 주님의 빛과 같은 은혜로 충만하게 하소서. 진리의 빛 가득 채워 주소서.

곤고할 때 해결책이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주의 밝은 빛 가운데로 들어가라. 주의 진리의 빛을 충만하게 받는 것이다. 주님 앞에 세우고 말씀의 빛, 성령의 빛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어둔 심령이 밝아진다. 캄캄했던 앞길이 환히 밝아온다. 약하고 부족한 심령이 강하고 온전해 진다. 능력을 덧입게 된다. 돈이 해결책이 아니다. 사람이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도 물론 도움은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이 아니다. 은혜를 사모하라. 빛을 사모하라. 진리를 사모하라.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생명력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4.주님의 은혜를 믿어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시인은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주의 제단 앞에 나아가 기쁨으로 찬양하게 될 수 있을 것임을 고백한다. 4절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시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큰 기쁨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이를 것이요, 그곳에서 감사와 기쁨과 감격의 찬양을 하게 될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주께서 은혜를 베풀면 성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 가면 감사와 기쁨과 감격의 찬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주께서 은혜를 베풀면 우리는 주님 앞에 설수 있다. 혹시 우리가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님 앞에 호소하고 은혜를 간구하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사 주님 앞에 서게 된다. 주님 앞에 서면 분명 감사와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전을 사모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주님의 은혜를 받아 주님 앞에 서서 주의 은혜와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마음껏 누리자.

5.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찬양해야 한다

시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잘 보라.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마침내 나타나실 것이다. 나타나셔서 도우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전히 찬송할 것이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주께 소망을 두고, 주께서 마침내 나타나셔서 도우시사 구원해 주실 것을 믿으며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평안을 누리며 승리하는 비결이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호소할 때에 하나님께서 마침내 움직이신다. 역사하신다. 도우신다. 이기게 하신다. 그래서 더욱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은 비록 힘들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기에, 분명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기에,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이시기에 지금도 여전히 찬송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절대적인 믿음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할 때에 더욱 믿음은 강화된다. 성령의 은총을 덧입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개입하심으로 승리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바라보자. 주님께 호소하자.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자. 주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으심을 인정하자. 주님의 구원의 때가 되면 확실히 구원받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을 믿자. 그리하여 더욱 기도하며 찬양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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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뜻이 있다

 

 

 

프랭클린 그래함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 ⓒ게이트웨이 교회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믿는 자들을 부르실 때,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예외없이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텍사스 사우스레이크에 소재한 게이트웨이교회 주일 예배 설교에서 그래함 목사는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씨름하고 있는 많은 신자들이 있다. ‘너무 어리진 않은지, 너무 늙진 않은지, 준비가 안 된 건 아닌지’ 너무 많은 고민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함 목사가 전한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한 세부적인 가르침’은 △비용 지불 △우선 순위 △순종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비용 지불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께 초점을 맞춰야 하고, 다른 무엇보다 심지어 자신보다 그분께 헌신돼 있어야 한다. 그분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비용을 반드시 고려한 후,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14:25).

 

우선 순위 세우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길을 가시다가 한 사람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는 ‘먼저 아버지 장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남성은 예수님께 그분을 따르겠다고 했으나 먼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해야한다고 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고 말씀하셨다.

순종 

순종을 드리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시몬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라고 대답하고 이에 순종했다.?

 

순종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6~7)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시몬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깊은 회개를 하게 된다.

그래함 목사는 “예수님은 이들을 넘치게 축복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초청하셨다. 이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예수를 따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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