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현 교회 전임 목사 / 새벽기도회의 횃불 든 길선주
먼저 길선주 목사님을 소개해드리면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대현 교회 전임 목사로 취임한다.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종이 왕실 고문으로 와달라고 간청하기도 했고,
3.1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40여 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60여 곳에 교회를 세우는 불같은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일생에 남긴 저서로는
<해타론>, <만사성취>, <말세학>, <강대보감>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무슨 뜻인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떤 비상한 때에도 흔들릴 수 없는 믿음으로, 굳게 세워졌다는 고백이다.
ㅇ 이런 신앙의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무슨 위험이 닥쳐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안정된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며 살겠다 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자신을 향하여 ‘깨어 일어나라’고 스스로 권하고 굳은 결심을 선포했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기 ‘영광’은 ‘케보디’란 말인데 그 원형 ‘카보드’를 시108:1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그래 여기 ‘영광’도 ‘마음’이 더 적합하다는 평이 있다. 영어성경도 마음, 영혼(soul)로
번역해서, 'Wake up, my soul !'이라 했다.
ㅇ 온 세상이 다 잠든 고요한 새벽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내 영혼아 깨어 일어나라.
비파와 수금도 깨어 함께 찬양하자’ 이 표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여 새벽을 깨워 산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이겠는가!! 이런 일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하도록 횃불을 밝혀 든 사람이 길선주 조사다.
Ⅱ. 길선주의 생애와 사역
1. 그의 출생과 성장: 그는 평안남도 안주의 끼니 분별이 어려운 집에서 출생(1869) 했다.
그는 총명하고 체격이 뛰어났다. 4세부터 한문을 배워 7세에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17세에 상점을 시작했으나 실패하고 낙심하여 방탕하고 방황하다가, 친구 따라 선도(仙道,
신선이 되려는 도)를 시작했다. 부자 되고 외적을 물리치는데 그 목적을 두고, 3년을
몰두했으나 달라지는 것이 없어 포기했다.
ㅇ 그는 시력이 약해지고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그 무렵 평양에는 야소교(‘耶蘇敎’, ‘예수’의
取音)를 전하는 양귀자(洋鬼子) 소문이 파다했는데, 선교사 마펫에 대한 소문이다. 길선주는
거의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 친구 김종성이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는 간증을 들었다.
ㅇ 길선주는 삶의 기쁨과 평안을 찾았다는 친구의 간증을 듣고 도저히 못 믿을 소리지만,
‘하나님’이란 신에게 기도해 볼 생각을 가졌다. 그날 밤 하나님이란 신이 있다면, 내게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가 애써 기도하는데 “선주야, 선주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살려주소서!!” 그는 그날 밤 기도를 계속하는 동안 의심,
불안, 육체의 질병 등 모든 것들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새로운
사람으로 일어나, 기독교인 된 증표로 이렇게 살기 시작했다.
➀ 머리를 깎아버렸다.
➁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며, 그날 일을 하나님께 상의했다.
➂ 매월 세 번씩 작정하고 특별기도를 했다.
④ 날마다 낮 12시와 밤 12시에 기도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⑤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20분씩 요한계시록을 암송했다.
ㅇ 그는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1897. 8.15) 기도와 성경 읽기에
몰두하여, 성령 충만함으로 전도했다. 토지 800평과 재산을 모두 교회에 헌납했다. 그는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고(1901) 다음 해에는 그 교회 ‘助事’로 시무하며, 평양신학교가
개교하자, 신학생이 되었다(1903)
ㅇ 길 조사는 1905년에 장대현교회 박치록 장로와 함께, 매일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
하기를 시작했다. 이 일이 교인들에게 차츰 알려지면서 교인들이 모여들고 드디어 당회가
결의하여, 세계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새벽기도회’를 실시하게 되었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 말씀처럼, 새벽마다 종을 울려 교인들이 몰려와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새벽을 깨워살았다.
ㅇ 그들은 새벽마다 모여 울며 애통하여 죄를 살펴 자복하고 교회와 잃어버린 조국, 고통받는
민족을 위하여 울부짖어 기도했다. 그러다가 그 교회는 새벽만이 아니라, 정오에도 종을 쳐
어디에 있든지 종소리 듣고 기도하게 했다.
ㅇ 길선주는 1907년 한국의 최초의 신학교 졸업생 7인 중 한한 사람으로서, 한국 첫 노회로
조직한 ‘조선야소교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고, 본 교회인 장대현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ㅇ 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 운동은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의 불길과 함께, 전국 교회로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세계선교역사에서 말하는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은 성령님의
역사이지만, 목회자 길선주와 장로 박치록 두 사람의 합심으로 시작한 새벽기도의 작은
불씨에 불이 붙어 타올라서, 드디어 전국으로 번져 한국교회와 민족을 깨웠던 것이다.
ㅇ 이런 길선주 목사의 장남이 독립운동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1911) 경찰 고문으로
사망하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1919년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구속 되어 옥중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ㅇ 그는 만년에 시력을 잃었지만, 평생 성경을 많이 읽었다. 요한계시록을 1,200회 이상,
요한서신을 500회 이상, 구약을 30회 이상, 신약을 100회 이상 읽었고, 요한계시록 등 성경
전체의 중요한 부분은 다 암송했다.
ㅇ 1935년 11월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한 주간 사경회를 인도하고, 그 마지막 시간
축도를 하고 돌아서다가, 강단에서 쓰러져 67세로 최후를 마쳤다.
Ⅲ. 그의 삶이 주는 교훈
➀ 그의 초년의 고난과 방황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신호였다.
➁ 친구 김종성의 눈물의 간증과 권면은 그를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시는 목소리였다.
➂ 목회자와 장로 두 사람은 새벽을 깨워 기도하다가, 영광스러운 ‘새벽기도회’를 출발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았다.
④ 그는 불타는 믿음과 사랑으로, 고통받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살았다.
⑤ 그는 기도와 성경 속에 취하여, 충만한 은혜와 권능으로, 온 세계 목회자들에게 목회를
어떻게 할지를 본 보여 주었다.
⑥ 그는 평생 말씀을 선포하다가, 마지막도 말씀의 단에서 숨을 거두어 거룩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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