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요한23세 종교간 대화/ 배타주의 포괄주의/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에 미치는 위기고찰과 대응자세
현대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시대이다. 아득한 인류의 기원 이래 인간의 의식이 확대되고 그 의식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각각 그 자신의 궁극적 해답을 제시하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해왔다. 다양한 종교의 공존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 수세기 동안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이 세계사에 긴장을 조성해 왔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종교 자체의 본질과 종교들간의 상호작용,나아가 현재 팽배해지고 있는 다원주의적 경향속에서 종교의 역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만이 참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기독교 절대주의 (Christion absolutism)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는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위한 주제가 된 동시에, 다원주의는 기독교인에게 큰 도전과 위협이 되었다.
기독교처럼 자신을 절대적으로 유일한 종교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인류는 어느 특정종교 하나가 제시하는 신념체제에 의하여 구원 받을 수 없도록 다원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기존의 논리들이 혼란하게된 다원주의 시대속에서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과 다종교 시대속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종교다원주의의 발생 배경과 주요사상,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반응,내제하는 문제점등을 살펴봄으로서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A.종교다원주의의 발생 배경
아담과 하와 이후 부터 지금까지, 종교다원화의 문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 왔다. 구약 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관계 문제,교부시대의 기독교와 고전문화의 관계문제,그리고 현대의 종교 혼합주의로 인식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기독교는 절대주의의 입장을 고수해왔다.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에 의하면 종교적 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선교사들과 비교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최근 한국에서 퍼져가는 종교신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다원주의와 때를 같이한 신학이다. 이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또한 종교다원주의의 발생점으로 본다. 한편,과학의 발전도 들수 있겠다.
가. 선교사들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공인받게 되며 데오도시오스 황제 치하(379-395)에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로마 제국은 기독교 왕국이 되었고 제국의 안정은 교회의 안정과 직결되었다. 이에 따른 18,19세기의 기독교 선교정책은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이었다. 서구의 종교가 동양의 나라를 점령하면,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기독교로 그 지역의 종교를 점령하는 정책이었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선교의 목적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확산에 도움을 주지만,정복식의 선교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 정부는 개종을 주 목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그 후 선교사들은 각지에서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선교상황이 이론과 실제 양면 모두에서 위기에 처하게 되자,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그와 대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비교종교학자들
비교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종교사학파의 대표자 트뢸치(Ernest Troeltsch,1865-1923)가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했으며,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 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이렇듯,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교다원주의가 일어났다고 볼수 있다.
다. WCC
WCC안의 다원주의적 동향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한 제2차 세계선교 협의회(IMC)에서 이미 폴(K.T.Paul)과 차오(T.C.Chao)에 의하여 나타났다.
그리고,종교다원주의적 관심은 1938년 탐바람에서 개최한 제3차 IMC대회에서 크래머(H.Kraemer)와 충돌을 격은 후 잠잠해 졌다가,1950년에 타종교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61년에는 뉴델리에서 개최한 제3차 WCC총회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총회에서 인도신학자 더바너난단(P.Devanandan)은 피조물의 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타종교들의 다양한 종교체험을 혼돈함으로써 쟝교뎌?隙瑛퓔? 수립하려고 했다.
라. 과학의 발전
과학의 발전도 종교적 다원주의의 발생을 촉진했다고 볼수 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콜롬부스,마젤란등의 탐험으로 기독교 세계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기독교와 서로 다른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역사,인류학,과학 연구가들이 인류 기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세계의 다른 곳에도 종교의 유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되자,동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한 서구의 기독인들이 다른 종교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헌에 긴급하게 일어났다.
B. 종교다원주의의 중심사상
가.종교의 상대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사상이다.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상대성을 띈다는 것은 기독교와 큰 차이점이 될수 있다.
트뢸치는 "역사주의에 의한[순전한 상대주의 ]역사주의의 극복"에다 초점을맞추었다. 뢸취의 역사주위에는 세계에 내재할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 초월적이기도 한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즉 하나님의 실재를 배제한다. 그리고,그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실질적인 근거를 오직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경험적 혹은 "과학적" 관찰에서만 온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은 과학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순전한 상대주의의 심각한 가능성과 싸워야 했다. 그의 "역사의 형이사학"에도 불구하고,그의 최후의 말은 "상대성 속에 있는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트뢸취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순전한 상대주의에서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트뢸취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전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나. 신념의 동일성
세계 60억 인구중에서 15억만이 예수를 믿고있다. "나머지 45억은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들이 생기게 된다. 이런 물음들 속에서 모든 종교는 같다고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만약,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 다면 시간과 공간,문화와 상황을 넘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며,깊이 관찰해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고 단지 모든 문화와 상황 배후에는 하나의 신,즉 공동의 본질이 있고,이것에 도달하는 방법이 각 종교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의 유일회성과 규범성의 궁극성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 것이 되버린다.
다. 심리학적 기원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무의식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초조의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같은 학자들이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서 모든 종교를 각 개인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융의 주장은 종교를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예수의 유일회성을 부정한 것이 된다.
C.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의 반응
가. 기독교
기독교는 배타적인 선교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혹스러한 문제였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주장은 예수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근거해 왔다. 그것은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조에 의하여 교회는 스스로 모든 진리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는 고립된 생활을 자랑스럽게 영위하고 외부 세계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고수하면서 다른 종교와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23세가 "쇄신과 적응(aggio-rnamento)"이라는 슬로건을 공포한 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화를 겪게되었다. 다른 종교 전통들과 대화를 시작했고,'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 포기되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만남에 대한 반응은 세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1)폐쇄적인 배타주의
바르트는 모든 종교를 은총에 의한 계시의 경험과 변증법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반격을 가하고 기독교를 신의 은총과 계시가 나타나는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2)개방적인 포괄주의
다른 종교를 통한 신의 은총과 구원의 행위를 인정하고,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구원 계시의 최종성,독특성,규범성을 주장한다.
① 칼 라너(Karl Rahner)
칼 라너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긍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다. 라너는 다음의 네가지 명제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한다.
첫째,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절대적인 종교로서 자신을 이해하며,그러므로 어떤 다른 종교도 그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
둘째,복음이 한 개인의 역사적 상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비기독교적인 종교는 그 개인을 위해서 하느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과 은총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셋째,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성원을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서 대할 것이 아니라,익명의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넷째,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에 대한 권리를 가진 배타적인 공동체로서가 아니라,오히려 역사적인 선구자,다른 종교에 숨어 있는 실재로서 나타나 있는 기독교적 희망의 명백한 표현으로 여겨야 한다.
이러한 4가지 명제를 통하여 라너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은 은총과 그것에 대한 명백하고 완전한 기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동시에 수용한다. 결 라너의 입장은 타종교가 그리스도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로 수렴되고 성취된다는 교회 중심주의적 입장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타 신앙인에 대한 보다 '낙관적인'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밝히고,타신앙도'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깨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 세계의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려한 것일까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② 폴 틸리히(Paul Tillich)
폴 틸리히는 유한적인 현현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확증하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계시 경험은 인간에게 보편적이고,모든 종교에는 계시와 구원 능력이 있다. 계시는 유한한 인간에 의해 수용되기 때문에 항상 왜곡되며,따라서 신비적,예언자적,세속적인 종교비판이 가능해진다. 틸 히는 다른 종교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타종교들로부터의 비판을 수용하는 개방된 그리스도교의 태도를 예로 제시한다.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를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대신 자기 비판과 대화를 모색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궁극적 실재를 지향하는 역사상의 모든 종교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신학적 다원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는 열등한 다른 종교들을 배재하거나 포괄하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최종적인 계시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중심으로 타종교를 관계를 맺는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관계적 절대성(relational absoluteness)'이 입증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종교적 다원주의
① 존 힉(John Hick)
힉은 다른 종교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오늘날 서구 신학에서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과 상이한 신 중심적 모델을 제안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인이나 힌두교인,혹은 유태교인들을 "익명의 기독교인(an anonymous Christion)"으로 간주하는 칼라너와 같은 신학자도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위치시킨 해
묵은 교회안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단지 기독교인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그래서 우리는 경건하고 독실한 비기독교인들을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의 기독교이거나,혹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힉은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유로 들어 그의 입장을 전개시켰다. 프롤레마이로스의 천동설에서는 지구를 다른 혹성들이 그 둘레를 공전하는 태양계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프롤레마이오스 시대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종교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의 주위를 맴 도는 것으로 여겨지며,기독교와의 원근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기도 한다. 힉은 그러한 프롤레마이스적인 접근이 다른 종교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힉은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힉 신학은 칸트적 배경위에 있다. 하느님은 인간 경험에 의해 구조화된 선험적인(a priori) 관념이다. 그러나 잠재된 문제는 힉이 "신"이란 용어를 불교인이나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불이일원론)의 힌두교인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선험적인 것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다.
② 파니카(R.Panikkar)
파니카는 기독교와 힌두교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대화의 삶을 살아왔다. 로마 카톨릭 내에서,파니카의 저술은 종교간의 관계를 다루는 영역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종교들 사이의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범 세계적'일치운동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종교적 차이는 생동적인 힘을 발휘하며,'근본적인 종교적 사실'에 대한 각각의 해석과 각각의 이름들은 '순수하게 초월적'인 것만도,순수하게 내재적인 것만도 아닌 그 신비를 풍요하게 규정한다.
파니카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모든 종교의 진정한 영역 차원이 기독교적 사상안에서 함께 만나는 접합점이다.
D.종교다원주의에 내재하는 문제점
가.선교 활동
어려움이 분명히 드러나는 곳은,자가 자신의기준을 타자에게 부과하는 문제가 타자를 개종시키려는 노력으로 지속되면서 발생하는 선교 활동에서이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확신을 타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어려움은 자신의 설교나 가르침을 타자에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과 방향성이 투쟁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될때,그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 다원주의는,우리 자신의 특수한 종교 이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늘 요구해 올것이다.
이러한 다원주의에서는 모든 종교는 표현 방법과 규정내용 및 의식이 다를 뿐이지 결국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또는 다른 명칭의 조물조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주장으로서,어떤 종교든지 열심히 그리고 종교가 요구하는 율법과 교리를 성실하게 준행하기만 하면,구원을 받게 된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한편 또다른 주장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데,다른 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문화권에서 믿고 있는 종교를 성실하게 믿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반드시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고,불교도나 회교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나. 평등
현대의 종교다원주의에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은 "평등"에 대한 헌법상의 진술(미국과 인도의 헌법속에서 발견되는)과,개인의 이해에 있어 각 개인들을 영적인 깨달음의 다양한 단계들에 걸쳐 있는,따라서 평등하지 않은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는 종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다. 그러한 갈등이 생길때,평등과 요청은 힌두교와 같은 종교의 교훈과 관행들을 합법적으로 짓밟고,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는 현대의 문화와 종교의 다원주의에 의해 야기된 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전통및 인식과 세속적인 전통및 인식이 서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다. 배타주의
종교다원주의의 창조적 기여에 대한 한 가지 위협은 때때로 몇몇 종교인들이 다원주의의 도전에 투쟁적인 배타주의로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대응은 현대 이란이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보통 영적인 침체와 "종교적 폭력"을 야기시킨다는 점에서 항상 유감스러운 것이다. 가정에서처럼 상호 존중과 상호 인정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차이의 수용은 선을 위한 강력한 촉매가 될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인 편협한 마음은 항상 파괴적이며,어떤 종교 전통에서는 진정한 종교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E.종교다원주의에서의 기독교의 대응책
가. 기독교적(성서적)인 자세
한스 큉(Hana Kung)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기독교 민족이 서구의 기독교 민족을 수적으로 훨씬 앞질러 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를 생각할때도 당신들은 여전히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고 감신대의 변선환 교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면 인류의 대다수는 신의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함으로,기독인만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이들일 수 없다는 큉의 주장은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했다. 또 홍정수 교수는 "우리의 신은 제 자식만 사랑하는 편협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가? 아니면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자비를 베푸는 가없는 은총의 신인가? ... 하나님께서 만일 무신론자나 이교도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한다."라고 말을했다.
이와같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인도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우선,"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의 질문에 대답할 줄 알아야 한다. 존 힉(John Hick)은 "예수를 성육하신 성자 하나님이셨다."는 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한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진술인가? 그 의미는 문자적인가,비유적인가,상징적인가,신화적인가,아니면 시작인가? 그리고 그는 예수가 사람이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원이 사각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런 질문과 주장들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성자 하나님이 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계시며,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특성을 지니게 되셨고,그 양자가 그분의 신적인 인격의 통일성 속에서 '유지되고'결합되었다.그러므로 그분은 한 인격으로서 참 하나님이시며,참 사람이시다. 또한,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1:21)라고 말씀하셨다.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영역 밖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분명히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종교다원주의 자들의 또 다른 주장인 본질은 하나이고 이름만 다른 하나님이란 주장에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출20:#i 너희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찌니라"(출23:24),"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시96:5),"너희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는니라"(사44:6)
하나님께서 만약 타종교와 같은 신,이름만 다르지 동일한 신이라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겠는가? 다른 한편 구원에 대한 문제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몇 교수들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여 큰 혼란을 야기 시켰는데 성경은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4:12),"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1:8)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하며,이렇듯이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들을 보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2:8)라고 말씀하신다.
나. 대화의 자세
한스 큉은 [세계 도덕성의 과제]라는 책을 선보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도덕이 없는 생존은 없다. 종교 평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종교대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결국 추구되어야 할 세계도덕은 서로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로 부터 비로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종교진리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광신주의자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다른 모든 종교는 거짓 종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종교적 평화는 하나의 참된 종교에 의하여 달성되고 보장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종교적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배타주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종교가 기독교에 의해서 "완성"혹은 "보다 성숙"되어질 수 있다면,기독교도 타종교에 의해서 "보다 더"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대화를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적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면,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대화하여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서,자기 신앙을 감추고서 대화에 임하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대화에 이르는 길에서 신의 보편성과 종교의 특정 진리에 대한 절대적 헌신을 향한 인간적 욕구가 모두 강조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서로 다른 빛을,그것을 필요로 하는 영혼의 서로 다른 세계에 비추어줄 수 있는가?" 라 타고르가 제기한 물음이 함축하고 있듯이 서로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대화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보다 나은 기독교인으로 영적인 깊이를 더해야 되겠고 사랑과 봉사의 헌신적 삶을 통하여 보다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것이다.
다. 선교에서의 자세
이러한 다원주의 상황에서 선교관은 성경적인 선교관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다원주의적 선교의 목적은 인간화이며 세계평화 공동체의 형성이므로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부터의 회개는 요청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개종을 목적으로 선교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전도와 하나님께로의 회심이 아니라,오히려 탈기독교적 탈고백적,탈사도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선교에서 우리는 먼저 상황인식을 먼저 해야된다. 복음은 어느 선교지에서든지 현지문화와 충돌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려면 선교현지의 문화를 보면(물론 문화 자체를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기독교 문화 보다 열등하다. 그 문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그 문화속에서,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진리인 복음의 메시지가 단지 표현 방법이 다른 즉,다양한 "포장"을 하고 전달될때 선교지의 상황은 쉽게 파악될 것이다.
둘째,복음의 순수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복음의 순수성은 먼저 성경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그 내용의 정확성과 무오성을 믿으며 크리스챤의 신앙과 삶에 있어 최선의 기준과 척도가 된다는 것을 믿어야하다. 그래서 복음은 어떤 문화나 상황에서도 수정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메시지이며,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영적인 원리이다.
결론
현대의 다종교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간의 갈등이 있어서는 않되고,종교 사이의 평화야말로 세계평화를 위해 긴요한 조건임에도 종교간의 갈등이 전쟁과 다툼을 유발시키는 어두운 현실임을 보아왔다.
종교는 개인은 말할것도 없이 집단과 사회 더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평안과 화목,행복등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임을 안다. 그래서 이런 다종교 사회에서 갈등과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대화를 통해서 극복해야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타종교를 이해하고,또한 타종교에게 우리의 종교를 이해시켜야 한다.
다종교들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는데,타종교들이 말하는 신(god)은 우리 기독교의 신(God)과 비교될 수 없을 뿐더러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우리 기독교의 독특성과 당연한 진리들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물론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취급하여 갈등을 일으켜서도 않된다. 그러므로 선교적 차원에서도 타문화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속에 살며 그 문화속에서 서서히 문화와의 충돌없이 전해야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
또,기독교의 구원은 타종교들의 구원의 개념과 다름을 알고있다. 원죄로 인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의 굴레속에서 해방되어,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접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며,"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는 주장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 가 없는 것이다. 이 많은 논쟁들 속에 성경은 답을 주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요14:6),"다른 이로써는"(행4:12)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 다종교 상황속에서 기독교는 흔들리지 말고 진리를 보존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넓게 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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