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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주의 종교주의 도전에 직면한 21세기 교회/ 종교의 연합과 일치/ 에큐메니칼 /변종 나르시즘

 

혼합주의·종교주의 도전에 직면한 21세기 교회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의 공격방향은 전방위적이다. 사방이 적군들로 싸여 있다. 교회의 배타성에 대한 일반종교나 사회의 시선은 예전에도 곱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위협받는 절대 진리


진리의 유일성과 구원에 대한 오직 예수는 기독교의 존립기반이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종교의 연합과 일치, 교회 안에서의 에큐메니칼을 넘어 타종교와의 에큐메니칼을 외치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이해되고 공감하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의 보도, 영화와 인터넷의 왜곡된 정보의 재생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누룩보다 더 빠르게, 광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일부 진보주의나 다원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고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한 구원의 주장은 언론들이나 타 종교에서 매우 좋아하고 흐뭇해하는 메뉴들이다.


한국교회에서 얼마 전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대해 진보그룹의 여성신학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가부장적 아버지로부터 억압당하는 여성들이나 남성들이 아버지로 소개되는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더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사회문화적인 권위 가운데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었다.


인간의 죄성과 그로 인해 야기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변해야 하는 쪽으로 주문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돌리는 곡해가 일어났던 것이다.

 

구원에 대한 왜곡


그러나 하나님만 왜곡한 것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부분도 왜곡시켰다. 감리교의 변선환 학장의 사건은 종교다원주의의 단적인 예다. 산 정상을 올라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다는 논리로 구원에 접근한다. 일반은총 가운데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서 다르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 주장이 옳다고 했을 때 한 하나님이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해놓고, 다른 종교에서는 다른 방법의 구원을 제시하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만약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나님이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만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신이 한 입가지고 두 말하는 이중성과 거짓말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논란의 핵심은 기독교를 종교로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종교가 아니다. 굳이 종교로 분류할 때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만, 일반 종교가 세워지는 과정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21세기는 그런 기독교의 독특성을 거부한다. 자기들의 종교와 비슷하거나 동일하기를 요구한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종교단원주의와 포스트모던에 부응하는 신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 중에 하나다. 성경이 독특한 영감성을 부인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다양한 길과 하나 되는 종교


미국의 경우도 성 윤리 논란이나 구원의 다양한 길에 대한 수용 폭이 매우 넓어지고 있다. 미국성공회는 지난 2월 불교선수행자인 케빈 듀 프레스터는 북부 미시건 교구 주교로 선출했다. 또한 4월 초 시애틀 교구의 앤 홀름스 레딩 신부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지만 또한 무슬림이라고 밝힌 뒤에 자신의 직임을 사퇴하기도 했다.


미국 성공회의 이런 경향은 점차 심해질 것으로 신학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웨이드 클라크 루프 종교학 교수(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대학교)는 “혼합주의와 관련해 성공회의 문제는 미국에서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며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해, 자신의 종교에서보다는 다른 믿음체계에서 영적지혜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미국성공회는 2003년 동성애 주교를 선출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혼합주의 확산은 교회 안에 점점 동성애의 문제나 각종 성윤리 문제에 대한 허용이 미국을 넘어 각 나라로 확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동성애 대한 시각은 점점 선이 흐릿해지고 있다.


동성애를 질병의 차원으로 보기시작하면서 모든 동성애자들에 대한 시각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죄를 인권과 질병으로 몰아가고, 포장하다보면 절대 선을 넘어가는 것은 쉽다. 그러나 동성애를 죄라고 지적하는 이들을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폄훼한다는 점에서 참기 힘들고 버티기 힘든 사회적 정죄가 깊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화석화 되는 기독교


개신교의 경우도 교회는 딱딱한 껍질로 쌓여진 종교화로 더 많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종교생활은 암흑시대라고 하는 중세시대의 교회로만 족할 수 없을 만큼 21세기 교회는 종교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교회의 조직을 위해 이뤄지는 설교가 있고, 봉사가 있다. 사회의 안전망을 위한 노력과 봉사에 분주한 교회가 많아지지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지역교회들이 뛰어든 노인복지에 대한  부분도 한 편으로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 해결이 동기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만큼 솔직한가 묻고 싶다.


교회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기보다 후원확보를 위한 개인적인 역량과 아이디어를 발휘하는게 옳은가 자문해야 한다. 21세기 교회가 싸워야 할 것은 외부적인 환경만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겪는 복음의 본질에 대한 부분이다.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서 있지 않은 가운데 외부의 강력한 도전을 이길 힘은 없을 것이다.


혼합주의, 다원주의, 포스트모던의 도전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 하나님 되심의 포기다. 그러나 이것을 포기하면 기독교의 진리와 핵심을 잃는다. 다른 것은 변할 수 있지만 이것은 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변종 나르시즘

 


그러나 미국에서 나타나는 ‘변종 나르시즘’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자신에게 효과 있는 믿음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는 종교적 성향이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날 여지가 충분하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할 때 하나님이 내게 어떤 복을 주실 것인가를 저울질 한다. 교회 출석은 선택사항이다. 이 선택 사항은 타종교에도 문을 열어놓고 환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성령의 인도와 회개케 하는 구원의 역사는 미미하게 일어난다.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공식을 외듯이 믿고, 삶의 변화가 없는 지식적이고 의지적인 영접은 매우 위험스러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성공회가 다른 교단보다 혼합주의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긍정의 신학은 미국 교회를 덮고 있다. 자기계발서 같은 설교와 주장이 미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은 “내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룰 수 있다”는 “내가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면 가능하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생각’을 ‘믿음’으로 환치했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전자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 긍정의 신학을 환호하고, 교회 교육의 주요 메뉴로 가져왔다. 매우 위험한 사상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혼적인 능력은 매우 활발한 문화적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가인이 놋 땅에 거하면서 이룩한 눈에 보이는 것들처럼 말이다.


누룩의 성령 역사


그러나 영적인 성령의 역사는 눈에 그다지 띄지 않는다. 매우 느려 보이며,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확산된다. 성격이 급한 이들은 이 방법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선동하고, 주장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뭔가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당장 결과물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이 없이 감정적인 충만을 성령의 충만으로 오인하면 어떡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누룩을 택해야 한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인도하심에 의지하는 의존적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개입하고 통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권리의 포기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21세기 교회를 향한 도전은 20세기와 다른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전략을 짜기 전에, 대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전에 우리의 순결과 본질적인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21세기에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파도를 넘길 수 있는 힘은 우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한 선언 가운데,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앞장서서 나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그리고 그분만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혼합과 다원의 요구 속에, 우리의 이 답변은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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