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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보편적 그리스도 /계시의 상대성 /배타주의 포용주의 /심리학적 종교다원주의/ 로고스 기독론/ 우주적 그리스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의 흐름

 

현대인은 싫든 좋든 다원주의 사회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최대의 난점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에 대한 도전을 어떻게 수용할까하는 점이다.


  

다원주의를 언급함에 있어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과 종교적 다원성(religious plurality)는 구분되어야 한다. 다원주의와 다원성은 같은 것은 아니다. 다원성은 단순히 기술적인 용어(descriptive term)이다. 이 용어는 많은 종교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다원주의는 하나의 정책이나 계획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사실을 진술하는 것에 자기 자신을 제한 시키지 않는다.  종교적 다원성은 문화적 다원성과 같은 것으로, 그 안에서 불가피하게 피할 수 없이 종교와 문화(혹은  오히려 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들)가 만나게 되고, 이들은 합께 살아가야 할 길을 발견하는 곳은 어디든지 종교 다원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원문화주의처럼 종교다원주의는 같은 마을이나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주장되는 사회적 이론으로, 인간은 종교적 가치를 포함하여 서로의 가치를 수용해야하며, 그들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원주의의 기본전제는 모든 종교는 동등하거나 동등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애서 출발한다. 이것은 각종교의 창시자나 그 종교의 배후에 있는 인물들이 동등하게 타당하거나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에 직면한 오늘의 기독교를 페린더(Geoffrey Parrinder)는 제3의 종교개혁으로 보고 있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에 대하여 일으켰던 개혁과 19세기의 신학적인 물결을 제2의 종교개혁으로 보고 그리스도교가 타종교와 대화를 하기 시작한 것을 제3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명명되어진 종교다원주의의 배경을 살펴 보도록한다.

 

 

종교다원주의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

 

1. 에른스트 트뢸치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종교들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한계가 있고 진리와 실재를 바라 보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에 상대적이라는 인식을 정직하게 한 기독교의 종교 사학자는 트뢸치 였다(1865-1923). 그는 본 대학, 하이델베르그 대학, 베르린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가장 위대 했던 종교 사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트뢸치는 종교적 역사적 다원주의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러한 다원주의의 실재가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관해 배운 바와 어떻게 충돌하는가를 실감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시대의 징조”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응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교는 부적합성과 맹목적 신앙의 위험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트뢸치는 그의 시대의 역사적 의식과 그가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 속에서 인식할 수 있었던 바, 흔들리지 않는 종교적 위임 및 가치들에 대한 필요성, 이 양자 사이의 갈등과 주로 씨름 하였다.


한편으로 19세기의 지적 계시 및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의식이 있었다. 인간은 단지 이성적, 사회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또한 “역사적” 존재 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여러 분야의 학자들은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것과 인간이 생산해 내는 모든 것은 그의 역사적 콘텍스트에 의하여 한계 지워지며 역사적 발전의 법칙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콘텍스트는 하나로 획일화되지는 않으며 항상 변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콘텍스트 내의 모든 것들은 -인간의 문화와 지식 전체를 포함해서- 제한적이고 동시에 변화 한다. 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이러한 것은 다른 역사적인 상황 가운데서는 그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인간적 업적들의 역사적인 성격은 모두 절대적인 것들, 즉 “하나이며 유일한” 혹은 불변의 진리를 배제한다.  그렇다면 복음의 확실한 불변적 진리는 역사적 의식 및 그것이 부과하는 상대성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트뢸취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갈등이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역사적 상대주의 상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트뢸치는 신은 실로 초월적이며, 유한자 보다 크시고 유한자와는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적 현존은 유한한 역사의 전개 속에서 발견 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그의 생명을 갖고 있다고 본다. 신성 혹은 절대자는 역설적으로 역사를 초월한 동시에 역사 안에 존재한다.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는 참여, 연속성, 그리고 공유의 형식이 있다. 트뢸치에게 있어서 신은 “역사와 인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트뢸치는 이것을 인간의 정신적 내부에 있는 “종교적 아프리오리”-인간 본성 속에 새겨져 있는 바 신성에의 선천적 정위 또는 신적인 경험-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트뢸치에게 있어서 이러한 종교적 아프리오리, 즉 신성한 것을 향한 타고난 충동은 단지 개인의 내적 경험 속에서만 -다시 말해 오로지 개인과 신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만- 인식되고 실재되는 것은 아니었다. 트뢸치는 개인의 중요성을 고창한 것 못지 않게 우리는 본질 적으로 오직 역사 내에서만 존재 할 수 있고 또 자기 자신을 경험 할 수 있는 “역사적 존재임을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종교적 아프리오리는 오로지 역사적 과정 안에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살아 있을 수 있고 경험 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들이 등장한다. 종교들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신에 대한 느낌이 역사 내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띄게 되는 바 매개체들이다. 종교들과 종교적 아프리오리 사이에는 상호 의존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 되어 있는 종교적 아프리오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 종교적 아프리오리는 종교들 없이는 구체적으로 존재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뢸치의 입장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모든 인류 속에 작용하고 있는 보편적 계시의 구체적이며 독립적이고 다양한 현현인 것이다. 트뢸치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종교들은 공통적인 그 무엇, 즉 신의 현존 또는 신의 계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 종교는 그 현존의 서로 다른 역사적 현현이기 때문이다.


트뢸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는 그의 저서 ꡔ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종교사ꡕ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절재적 종교가 아니며, 어떤 주어진 시점에 그것의 환경을 구성하는 역사적 조건들로 부터 자유로운 전적으로 유일회적인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종교의 보편적 원리라고 생각되는 것의 불변적, 최종적, 무조건적 실현이 아니다. 다른 위대한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 그 역사의 매 순간에 있어서 철저히 역사적인 현상이며, 모든 개별적 역사 현상이 직면하게 되는 모든 제한에 종속되어 있다”


트뢸치는 이렇게 종교의 상대성을 말하였는데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우월성 내지는 규범성을 주장 하였다. 트뢸치가 주장하는 종교의 우월성의 기준은 두 가지 였다. 첫번째 기준은 그 종교가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는데 성공 하였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기준은 영성과 관계있는 것이었다. 이 기준을 적용 함에 있어서 트뢸치는 원시 종교와 윤리적 영적 위대성을 가진 종교들로 나누 었다. 트뢸치는 전자는 최고의 종교적 가치들의 문제와 무관한 것으로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후자의 범주는 다시 구분하여 궁극적 존재를 다시 비인격적 존재로 보는 종교들(동양종교들, 힌두교 그리고 특히 불교)과 인격적으로 보는 종교들(유대교,그리스도교, 이슬람교)로 나누었다.  이 두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임을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그는 또한 대담하게도 종교사 속에서 인격주의적 종교들의 보다 우월한 가치를 가리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격주의적 구원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최고의 그리고 가장 의미있게 발달된 종교적 삶의 세계이다’라고 했다.


종교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트뢸치의 견해를 따를 경우 기독교의 핵심적인 확신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 즉 나사렛 예수는 역사 내에서의 신의 유일회적 성육신이요 모든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라고하는 확신과 상충함을 알 수 있다.


트뢸치는 모든 종교적 보편성을 인정하면서 주로 윤리적인 면에서 종교의 우열을 주장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토인비

 

토인비는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분명하고 떳떳하게 역사가로서의 그의 작업에 신학적, 혹은 종교적 관심을 이입 시켰다.


토인비는 종교는 본질과 역사 안에서 그 역할에 대한 분석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특징을 강조함으로써 시작했다. 각개 종교 안에는 “본질적인 권고와 진리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비본질적인 의식과 명제가 있다”고 그는 보았다 즉 모든 종교에는 각기 공동의 본질이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독특한 특징을 소유하기도 한다고 본 것이다.


토인비는 7개의 중요한 세계종교(소승불교,대승불교,힌두교,유대교,이슬람교,그리스도교 및 배화교)에서 발견한 공통적인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1)우주가 궁극적으로 신비적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부터 나온다. 세계의 의미는 단순히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인간성 안에 내포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2)우주의 의미는 절대적 실재 안에서, 그리고 우주 안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우주와 동일시되지는 않는 현존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3)그리고 이러한 현존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갈망하는 선도 포함 한다. 그래서 인간성은 이러한 실재를 경험하려고 할 뿐만이 아니라 이와 조화 하려고 한다. 4)이러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들은 스스로 그의 내적 자기 중심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각 종교들의 중요한 차이들은 종교의 비본질적인 것들 안에서 발견되어지는데 다음과 같이 그것을 열거 한다. 거룩한장소들, 제의, 금기들, 사회 관습들, 그리고 특별히 신화들, 교리들, 신학 학파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토인비의 보다 중요한 주장은 이러한 비본질적인 것들은 항상 재평가하고 폐기하고 대치하고 조정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라야 종교는 항상 변하고 있는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또한 종교에 있어서 공동의 목적이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그는 모든 종교의 기원은 악에 대한 인식, 즉 인간의 자기 이익이 세상 위에 초래케 할 수 있는 황폐성에 직면하는데 기초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느 종교도 다른 종교들과의 참된 교류 없이 문화적으로 고립된 채 자기의 길만을 가는 경우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오히려 토인비는 다양한 세계의 종교들을 “어느 점에서도 우위성을 가질 수 없는, 종교 수만큼의 세계적인 디아스포라들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세계 도처에서 서로 혼합 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서로 다른 문화적, 영적 유산들은 점점 “전인류의 공동재산”이 될것이라고 보았다.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토인비와 일치하여 종교 안의 공동의 핵을 인정하는 사람들로서는 칸트, 쉴라이에르마허, 오토(Rudolf Otto), 하일러(Friedrich Heiler), 호킹(Ernest Hocking), 슈리 라다크리슈난(Sriadhakrishnan) 등이 있다.


토인비는 종교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본질적인 것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서 그것은 늘 폐기되고 재조정 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심리학적-인간학적 사실과 상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어떤 구체적인 형태 혹은 상징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든 종교 안의 보편적인 것은 단순히 취해지기 쉽게 거기 그냥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그체적인 현현을 통해-보편적인 것이 설혹 항상 어떤 구체적인 표현의 구속력을 깬다고 하더라도-그 자신을 현시화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공통적 본질을 지닌다고 본 토인비의 종교 보편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의 유일회성,규범성,궁극성에 대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신념을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니기도 한다.


토인비를 비롯한 종교 보편론자들이 가졌던 역사적 특수종교의 배타성을 비판한 점은 높이 살만 하지만 역사적 종교로 하여금 특유한 생명력과 고유한 유형적 특징을 제거해 버린 과오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3.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적 종교 다원주의

 

인간의 ’마음‘이라고 포괄적으로 부르는 ‘정신’(Psyche)의 바다 심연에 모든 종교의 공통적 원형이 해저의 금광맥 처럼 놓여 있다고 주장한 것은 스위스의 분석 심리학자 칼 융의 인간 심성론은 특히 그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론에서 집약적으로 표현 된다.


칼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개혁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 났으나 곧 그리스교에 대한 그의 아버지와의 신앙심을 끊었다. 융의 연구의 결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동본질’과 ‘상대성’ 그리고 세계종교간의 대화의 필요성을 일관성있게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칼 융의 무의식론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프로이드가 초기에 생각 했던 것처럼 의식으로 부터 억압되어 생긴 것만으로 구성 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으면서 의식에 의해 그것이라고 인식되지 못한채 정신 작용에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라고 보았다. 그는 특히 개인의 출생이후 특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적 무의식’과는 다른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성격을 띄게하는 ‘집단적 무의식’ 또는 ‘보편적 무의식’  을 강조 하였다.  무의식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기도 한데 만약 무의식이 각 개인 속에 존재하는 보다 깊은 우물이나 샘으로 간주 될 수 있다면, 모든 개인적인 우물들은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곹통의 지하수로 합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은 인간에게 주어진 여러가지의 근원적 유형(원형,Archetype)들에 의해 구성 된다. 근원적 유형 또는 원형이란 지리적인 차이, 문화나 인종의 차이와 관계 없이 존재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 유형을 말하는데, 이것은 신화를 산출하는 그릇이며 우리의 마음 속의 종교의 원천이기도 한것이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 안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신관념은 심리학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무의식과 그 안에 담긴 신의 이미지의 현존으로 부터 기존 종교의 본질, 그것들의 차이, 그것들의 유사성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 내면서 모든 계시가 개인적, 집단적 무의식 속에 그 기원을 가지며, 최소한 그 기원에 속한다고 말한다. 이것 때문에 계시는 본질적으로 심리적인 사건이다. 계시는 안으로부터 말하는 신 체험이며, 본질적으로 이것은 모든 인간존재에게 있어서 동일하다고 한다.


윌리암 제임스도 융과 같이 공통의 심리학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종교들은 광범위하고도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본질적인 동일성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종교의 모든 영역을 살펴 보면 거기에 편린되어 있는 사상체계는 상당한 다양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행동은 거의 비슷하다. 왜냐하면 스토아 철학, 기독교, 불교의 성인들은 그 실천 면에서 보면 그 삶에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원에 대하여 마르틴 부버와 다른 많은 신학자들은 융이 초월적인 신을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어 놓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부버의 견해로는 융이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 시켰다는 것이다. 즉 신은 신성에 대한 능력과 느낌과 의식, 자의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융은 신과 유한자는 각각 안에서 두 존재를 가진다고 보고, 또 이들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가 없이는 실재할 수 없다고 본다.


종교에 대한 융학파의 접근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는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인류학자들에 의하여 제기 되었다. 즉 이들은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이며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융의 관점은 예수가 구원을 이룬 것은 주로 그가 무엇을 행함에 있어서가 아니라(예를 들면 신의 빚을 갚는 행위 같은)무엇을 계시함으로써-인간을 깊이 감동 시켜서 그들이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신의 이미지와 삶의 비전을 보여 줌으로써 -라고 보아서 전통적인 구속론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대로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 공동본질 그리고 심리학적 기원 주장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 통찰과 관심을 제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너무나 단순하고 획일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모든 종교를 상대적으로 파악한 트뢸치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도록 촉구하고, 우리를 갈라 놓았던 문화적, 역사적 장벽들을 극복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들 상대주의적인 관점은 기독교의 핵심적 확신중 하나인 나사렛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너무 단순하게 상대화 시켜 버릴 수 있다.


공동 본질을 주장하는 토인비와 그의 지지자들은 본질과 비본질적인 것의 차이, 신앙과 집적된 전통의 차이, 혹은 종교의 내적 중심과 신조, 법전, 의식에 나타난 그 외적 표현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 차이는 정당하며 사실상 불가피 하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 본질적인 것을 찾기 위하여 비본질적인 것을 간과 한다면 잘못하면 본질적인 것마저 잃어 버릴 수도 있게 된다. 보편적인 것은 항상 어떤 구체적인 현현을 통해서만 자신을 현시화하는 것이다. 종교의 공동본질에 대한 모든 경험과 모든 진술은 일정한 비본질적인 것들과 관계하고 있는데 이들 공동본질학파는 이를 간과하고 있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융에 의해 발전된 신과 무의식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인들에게 신과 세계 사이의 이원론을 인식하고 극복하라는 도전을 했다. 그러나 이들 융과 종교심리학과는 그들의 주장이 일종의 환원주의(reductionism)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현대 종교 다원주의의 토양을 준비해온 우리 시대의 정신적 상황을 트뢸치, 토인비, 칼 융을 통해 살펴 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태동하기 시작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나타난 반응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를 살펴 보도록 한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입장

 

1. 보수 배타주의

 

다른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태도, 특히 보수적인 입장에 대하여 말할 때에 복음주의를 빼 놓을 수 없다.


“복음주의적 부흥”이라는 말은 독일의 경건주의, 영국의 감리교 운동, 북미의 대각성 운동 등에 의해서 18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발흥된 광범위한 운동을 포함하는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 그 말은 금세기에 접어 들면서 근본주의의 형태로 형성된 새로운 그리스도교 형태를 가리킨다. 한편 근본주의는 1910년과 1915년 사이에 ꡔ근본주의ꡕ라는 제목의 12권 분량의 총서가 수백만 부가 팔려 나가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공격을 시작함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의 계열 속에서 분열이 일어 났다. 1940년대, 1950년대를 거치는 동안 근본주의의 신학적 확신에 동참했던 사람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신학자와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논쟁 지향적 심성,반지성주의,사회적 무관심에 반기를 들었다. 1941년 이들 반항자들은 “미국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결성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기본적인 신학적인 관점들을 공유했다: 1)성서의 문자적 영감설,무오성,절대 권위, 2)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며, 인격적 신앙 경험을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 3)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개종시킬 절박성에 대한 단호한 위임, 4)현대신학, 특히 역사비판적인 성서해석 방법에대한 불신 등이었다.


이러한 복음주의도 다시 분열 되었다. 1960년대, 특히 1970년대 이래 복음주의자들은 현대 세계와의 보다 적극적인 조정을 요구하여 왔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움직임은 이른바 “신복음주의”운동을 탄생 시켰다. 이들의 관심은 세가지 영역으로 집중 된다: 1)이들은 교회일치에 대해  개방적이며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미국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 한다. 2)성서의 절대 무오성에서 벗어나 오히려 성서의 ’제한된 무오성‘혹은 ’제한된 무오류성‘을 역사나 과학의 문제에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의 실천적인 문제에서 확신한다. 3)이들은 과거의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단순했고 그들 자신이 압박의 현상 유지를 위한 수호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분열된 복음주의의 각 계열은나름대로의 주장을 가지고 분열을 했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노선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세 부류의 집단은 복음주의 내의 아주 중요한 발전을 함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하나의 복음주의 집단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들은 신과 인간의 샹태에 관한 지식의 절대적 출처로서 성서가 가지는, 성서가 무오한 것으로 간주되든 안 되든,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수한다.이들은 또한 세계의 유일한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보편적 주 되심과 그의 구원의 능력을 인격적으로 경험할 필요성을 선포한다. 끝으로 이들은 선교를 통해서 모든 백성들에게 주 예수를 증거 함으로써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게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다른종교들의 이해에 대한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의 일반적인 모습은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프랑크푸르트선언”(Frankfurt Declaration)에서 분명하고도 힘있게 표현 되어 있다.


이 선언의 입장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다른 종교를 평가하는 제1차적인 참조의 틀은 성서이고, 오직 성서일 수만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른 종교들에 대한 성서의 판단이 제시 된다. “구원은 단 한번, 영원히 인류를 위해서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십자가 사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오직 신앙의 참여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 세계관들도 그리스도 신앙과 유사한 구원의 길들이라는 거짓된 가르침은 거부한다”이것은 그리스도교 교회와 다른 종교들의 사이에는 “본질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거칠고도 비타협적인 성격은 1974년 7월16일에서 25일까지 스위스 로잔에서 모인 세계복음화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에서 약화 되었으나 그 기본적인 메세지는 재확인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성서의 절재적 권위, 그리스도의 유일회성, 그리고 그에 따른 복음주의의 절박한 요청을 강하게 재확인 했다.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들 혹은 이데올로기들을 통해서도 똑 같이 말한다고하는 일종의 절충주의나 대화를 일체 거부 했다. 다른 종교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은 분명하게 거부 되었다. 이 대회는 “그리스도교의 사회적인 책임성”을 인정하고 “성의 있게 들음으로써 이해에 도달하려는 대화의 방법”의 필요성을 인정 했다.


1989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2차 로잔대회(Lausanne Ⅱ in Manila)는 세게의 급격한 변화를 의식하고 오늘의 사회와 타종교, 이데올로기의 변천상황과 그들의 도전을 토의하고 그에 따른 신학 정리도 하였다. 이 대회를 통하여 로잔 신학은 타종교와 연관 시킨 어떠한 상대주의나 혼합주의도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마닐라 선언은 “다른종교나 이데올로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또 다른 길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영성은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이른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한다. 또한 마닐라 선언은 기독교가 선교전선에서 “타종교 신앙인들에대한 무지. 거만, 무례, 혹은 대적의 태도를 취하는 잘못을 범해왔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회개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선포하는 자도 모든 사람이 설혹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개방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언급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때문에 흔히 갖기 쉬운 배타적이고 소외적인 태도를 지양하려고 마닐라 대회는 애썼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닐라 선언은 “타종교와 대화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음 그리고 부활에 나타난 그의 유일성을 적극적으로 증거 하면서 결코 타협조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의 선민의식과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같은 태도를 지니는 타종고들과의 마찰로 인한 전쟁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기독교 국가 설립을 목적으로 비기독교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통치자의 기반을 구축해 줄 염려가 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뜨거운 확신과 선교 열정, 성서에 대 영적 신뢰와 복종, 기독교의 고유한 초대교회 케리그마 언어 속에 표현된 메세지를 지키고 보존하며 손상 없이 전수 시키려는 전통에 대한 충실함, 또 무엇보다도 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주적 주권에 대한 고백 등은 종교 다원적 세계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에 공헌 했다고 볼 수 있다.

 

2. 개방적 포용주의

 

모든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관한 계시 체험을 동반하지만, 구원계시의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포용주의는 타종교들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대화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포용주의를 크게 개신교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카톨릭의 노선, 이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카톨릭의 태도는 개신교의 태도 보다 더 진보적인 형태를 띄고 있으며 종교 다원주의를 향해 나가고 있다.


이 유형은 다른 종교를 통한 신의 은총과 구원의 행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 계시의 최종성, 독특성, 규범성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칼 라너이다. 라너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보편성을 긍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다.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론에서 하나님이 보편적 구원의지와 구원을 위해 교회에 소속해야할 필요성을 동시에 받아 들인다. 이를 위해 라너는 전 인류를 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 한다. 여기에서 비그리스도교인들도 선험적으로 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 됨으로써 이들에게 특정한 그리스도교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너는 중세의 ‘자연과 은총’이라는 도식을 끌어 들인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로 하지만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 시키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신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자기 전달은 신이 자신을 알릴 수 있고 신의 자기 전달을 받아 들일 수 있는 피조물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것을 그의 계시 속에서 인지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를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교성‘의 동일한 평면 위에 세운다. 그러나 교회 소속성과 상이한 등급을 강조 함으로 그리스도교의 고유성을 보존하고자 한다.52)  그러나 교회 소속성의 등급들이 각각 다르게 규정되더라도 모든 인간은 교회에 속한다. 결국 라너의 입장은 타 종교가 그리스도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로 수렴되고 성취 된다는 교회 중심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라너는 타신앙인에 대한 보다 ’낙관적인’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밝히고 타신앙인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줌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깨뜨리려고 했다.


개신교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성령의 편재적 활동에 근거를 둔 개방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유한적인 현현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확증하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계시 경험은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모든 종교에는 계시와 구원의 능력이 있다. 계시는 유한한 인간에 의하여 수용되기 때문에 항상 왜곡되며, 따라서 신비적, 예언적, 세속적 종교 비판이 가능해진다 고   보았다.  틸리히는 다른 종교들을 비판 하면서 동시에 타종교들로 부터의 비판을 수용하는 개방된 그리스도교의 태도를 예로 제시한다. 또한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대신 자기 비판과 대화를 모색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자기 비판과 대화의 목적은 종교들의 습합이나 어떤 힌 종교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며, 자기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종교의 심층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틸리히는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독특성이 영적인 자유로 스며들고, 인간 실존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다른 표현들에서 찾을 수 있는 영적 현존의 비젼으로 스며들 수 있는 지점이 있다”58)고 이다. 이처럼 틸리히는 인간의 궁극적 실재를 지향하는 모든 종교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신학적 다원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종교사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출현으로 본다. 그리스도교는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종교이지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해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틸리히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우월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열등한 다른 종교들을 배제 하거나 포괄하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종적인 계시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중심으로 타종교와의 관계를 맺는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관계적 절대성’(relational absoluteness)이 입증 된다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틸리히의 타종교에 대한 우호적인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절대성에 대한 주장은 타종교와의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데 있어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3. 다원주의


지금까지 살펴본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입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넘어선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를 궁극적 실재에 대한 다양한 인간 반응으로 보며 모든 종교는 진지한 상호간의 대화를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종교를 성숙 시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는 이미 트뢸치의 역사적 상대주의, 토인비의 종교 보편주의, 칼 융의 원형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을 통해서 태동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급진적인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은 오늘의 세계 신학은 ‘신학적 사고’(theological thinking)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거치고 있다고 보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중세의 우주관의 변화에 혁명을 가져 왔듯이 신학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주의로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궁극적 신비로서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삶의 양식의 다양성에 따라 그에 대한 인간의 체험과 반응도 다양하다고 본다.


또한 힉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신화로 이해 함으로써 하나님을 ‘오직’ 예수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참으로’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가 모든 다른 인간 존재들을 위한 중심 혹은 규범이라고 주장하지 않고도 예수가 그들의 삶을 위한 중심과 규범이 됨을 선언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폴 니터는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종교간의 대화의 가능성과 동시에 그 필연성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본다.


파니카는 종교 다원주의를 근본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세가 모델을 제시한다.  첫째는 물리적 모델이다. 여기서 그는 무지개 자체의 빛과 프리즘에 나타나는 그 색을 대비 시켜 말한다. 우리는 무지개 빛을 프리즘을 통해 빨강에서 보라까지의 색으로 구분해서 말한다. 그렇지만 파니카에 의하면 그러한 구분은 인위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빛의 색은 사실 농도의 차이는 비록 있겠지만 서로가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즉 여러 색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빛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파니카는 이 빛을 실재에, 색들을 제 종교에, 프리즘을 인간 경험에 각기 연관 시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제 종교들을 하나의 실재(절대자, 신, 또는 절대종교)에 대한 여러 상이한 인간 경험의 구체적인 서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기하학적인 모델이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제 종교들을 기하학적인위상의 변형으로 이해 한다. 이 위상은 근원적인 인간의 경험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파니카는 결국 여러 상이한 종교들을 근원적인 경험이 시.공 속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변화된 채로 드러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인류학적인 모델이다. 여기선 언어를 예로 들고 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언어들이 있다. 그들은 제 각기 자신의 고유힌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언어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실재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더욱 정확히 할 수 있고 잘못된 생각은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 특정 언어가 다른 언어 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특정한 종교가 다른 종교 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 종교들은 다원주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계시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고 보는데 이들은 대부분 신 중심적 모델(Theocentrism)을 취하고 있다. 신중심적 모델이란 종래의 교회중심적인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 방법을 지양하고 신학의 초점을 신을 중심으로하여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기존의 교회 중심적인 신학 방법과 모든 신학의 규범을 그리스도에게 설정하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부터 “신 중심주의”에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신 중심적 모델은 배타주의의 성서영감설에 바탕을 둔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 유일회성은 물론, 라너에 의해 제기 되었고 한스 큉에 의해 발전된 포용주의의 간접적인 구원과 계시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은 여러 다른 신앙을 통한 구원과 계시의 보편성을 말한다.

 

 

종교다원주의의 기독론 비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5)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형태 로 우리의 주변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응답이 신학의 다양성을 가져 왔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기독교를 상대화하고 절대적 계시종교에에서 보편적 종교로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 제기 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함으로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 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하여 복음주의는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도록 하겠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그리스도론

 

1. 존힉의 그리스도론 : 보편적 그리스도


영국의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존힉은 다른 종교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오늘날 현대 서구 신학에서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 방법과는 상이한 신 중심적인 모델을 제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힉은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다른 모든 구세주들에 비해 반드시 유일회적이거나 규범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회적인 구세주로서 계속 확신할 수있는 해결책을 모색한다. 힉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를 말씀의 성육신으로 그리고 신의 아들로 말하는 것은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이 예수가 자신들에게 주었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많은 상징적, 신화적 모델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힉의 그리스도론의 핵심은 인간 예수이다. 예수는 철저하게 신의 현존과 범위 안에서 일생을 산 존재라는데서 힉의 그리스도론은 출발한다. 그는 오랜 기간을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보냈다. 항상 자신을 신의 대행자(God'S Agent)롤 묘사 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고 인류를 위해 고통을 받는 주님의 종에 관한 예언에 비추어 삶을 살았다.


예수의 이와 같은 신중심적인 태도는 제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제자들은 예수의 신을 그들의 아버지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비전으로 인해 제자들은 그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고, 결국 예수를 그들의 살아 있는 주님으로 선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예수를 공개적으로 입증할 만한 타당한 칭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교자들이나 당시의 청중들은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까닭에 그 칭호가 메시아가 되는 것이 불가피 했다. 이 메시아는 신이 아니었다. 다만 특수한 신분을 가진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의 아들”이라는 새 칭호가 그에게 덧붙여 졌다. 당시 이 칭호는 유대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의 그리스 문화권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말아었으며, 이 문화권에서 한 위대한 인물을신의 아들로 표현하는 것은 통상 있는 일이었다.  힉은 왕들을 신의 아들로 이해했던 유대교의 전통(시2:7,삼하7:14)을 근거로, 다윗 왕의 자손이며 참된 이스라엘 왕으로 여겨진 예수가 “신의 아들”로 불리는 것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로마 문화권으로 이동해 가면서 위대한 인물로서의 “신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는 성육신이라는 유일회적 신성화의 개념으로 굳어져 갔다. “신의 아들”로 부터 형이상학적 “성자”,즉 “삼위일체의 제2격”에로의 매우 중대한 전이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요한복음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10:30), 따라서 “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14:6)등의 표현으로 반영되고 있다. 공관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러한 표현은 역사적 예수에게 소급되지 않은 1세기 말엽 교회 신학의 반영이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신의 아들로 부를 때 이들이 선언하고 있는 것은 예수가 그들을 구원 했다는 것, 예수는 그들이 신을 알게해 주는 수단이라는 것, 예수는 전적인 위임의 대상이며, 그들의 삶을 변혁한 계시라는 데에 힉의 초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본다면, 신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만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에수 안에서 “참으로”만나질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가 다른 모든 인간 존재들을 위한 중심 혹은 규범이라고 주잔하지 않고도 예수가 그들 삶을 위한 중심과 규범이 됨을 선언할 수 있다고 본다.


힉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관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종교간의 대화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있다.

 

 

2. 레이문도 파니카의 그리스도론: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

 

파니카는 스페인계 로마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 났다.75)  그는 종교들 사이의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범세계적’ 일치 운동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전통적 종교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독점하고 있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고 말한다. 또한 다른 종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 되었다거나 혹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전제하는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보편성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이해를 재해석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재해석해야 한다. 새로운 해석의 제안은 “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 사이의 구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 하였다는 것은 긍정한다. 즉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구체성은 그의 보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실재는 그것의 독특성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점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과 별 차이가 없으나 그는 다음의 주장에서 새로운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고 있다. 즉 그는 성육신이  예수 안에서 유일하게,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발생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파니카에 의하면 “구원의 보편적 상징인 그리스도는 객관화 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역사적 인물로 구체화될 수 없다. 이것은 구세주 그리스도가 단순히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로 변형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파니카는 역사적 예수의 한계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필요성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에서의 특수한 구체적 중보자들의 필연적 역할을 인식하고 있는 파니카는 어느 누구도 대화를 위해 예수를 극소화 하거나,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중심적 확신을 간과함으로써 초점을 흐리게할 권리가 없다고 경고한다. “무수한 형태로 주되심을 나타낼 수 있는 이러한 ‘주’(그리스도)는 나에게는 나사렛 예수와 불가분적으로 연결 되면서 궁극적인 형태를 갖추었다.”는 파니카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형태라는 점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분명하게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지만, 이말은 곧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모든 종교는 일정한 방식으로 이러한 그리스도(라마, 크리슈나, 이스바라, 푸루샤,타타가타 등)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수긍할 수 있고 수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나카는 기독교인들에게, 궁극적 진리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 속에서 다른 기독교인들이 똑 같이 경험하는 동일한 신비에 대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3.스탠리 J 사마르타 : 모든 계시의 상대성

 

사마르타는 우리시대의 요청으로서 세계 종교간의 대화를 주창하여 왔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포함해서 어떤 종교도 자기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고 강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화를 위해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반에서 벗어나 신 중심적인 토대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계시를 경직화 시키고 진리를 독점하는 소유의 배타성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자유롭게한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봉헌은 주변을 향해 문을 걸어 닫지 않고 신앙의 중심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대화를 “우리 자신의 유산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정신적인 유산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정의 한다.


사마르타는 오늘날 다원주의 세계에서 기독교인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대화의 방법이지 “신학적 우격다짐”(theological bull-dozing)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화만이 각 종교의 독특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각각의 종교가 변화 하도록 기여하게 한다고 본다.


파니카와 마찬가지로 사마르타는 그리스도의 절대적 궁극성과 보편적 규범에 이의를 제기한다.  모든 종교적 특수한 인물과 계시들을 상대화 함에 있어서 사마르타는 파니카와 마찬가지로 그 필연성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공통분모로 환원 시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신비적 타자는 특수한 중보자를 통해 우리와 만나져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사마르타는 “모든 특수성들은 똑같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특수성도 보편성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또한 사마르타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침투되어 예수를 절대화시킨 후 그를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 인물”로 바꾼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을 경고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신은 성육신에서 그 자신을 상대화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마르타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그리스도 일원론적 접근 대신 예수 자신의 원초적인 메세지에 보다 충실하게 될 신 중심적 접근 방법을 주창한다.


복음주의적 응답

 

1. 종교다원주의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응답

 

우리는 위에서  전통적인 기독론 (Vere Deus et Vere homo)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은 ‘종교 다원주의’와 그에 근거한 ‘상대적 세계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칼빈도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의 씨(religionis semen)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든지 종교에 노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종교심 때문에 모든 종교는 보편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그들의 논리의 출발점을 성서에 두고 있지 않다. 그들은 비교 종교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접근하기 때문에 정당한 그리스도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둘째, 타 종교와 대화해야하는 이유로서 오늘날 도래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를 들고 있는데 이것도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면밀히 연구한 성서학자나 조직신학자라면 이미 초대교회 시대에 그 당시에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기성 종교들이 많이 있었음을 인정 할 것이다. 이미 신약성서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지주의나 로마의 황제숭배, 유대주의, 헬레니즘 등의 수 많은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순교의 위협 가운데서도 예수만이 그리스도요, 신의 아들이며 인자이고 메시아요,주(主)요, 왕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로마인의 박해로, 희랍인의 논리로, 유대인의 반대로, 비판과 취사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수정되고 다듬어진 것이 니케아 신조이며 칼케돈 신조인데 그것들이 형성되기 까지는 400년이나 걸렸으면서 그 당시 지성을 총동원하여 교회의 신앙을 분석하려 하였으나 실패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오히려 확인되고 정리된것이 그리스도론이라할 수 있다.


세째,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은 아 프리오리(a priori)론이 아니고 아 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론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 기자들이 유대교의 묵시 문학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론과 엣세네파의 종말론을 종합하여 어떤 틀을 미리 만들어 놓고 예수를 신의 아들, 사람의 아들,메시야로 묘사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이나 성서의 기자들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그러한 작품을 만들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 앞에 전개되는 엄청난 사건들을 확실히 체험한 후 제자들이 모여 종합해 본 결과 그는 그들이 믿는 구세주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추상적인 교훈을 통한 종교가 아니라 삶의 광장(Sitz im leben)에서 우러나온 종교이다. 신학은 어떤 사상의 체계가 아니라 체험의 고백인 것이다.


네째, 신본주의적 그리스도론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사실은 그리스도론을 분해하고 군주신론을 개현시키려는 운동이다.  신성이 제거된 그리스도론은 없다. 예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합일되어 존재 한다. 신성이 없이는 예수론은 가능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론은 불가능하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신중심의 그리스도론은 결국 군주신론의 재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로 종교 다원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타종교와 대화를 하라고 한다. 예수의 신성을 제거해 버리고 다르마나 석가나 마호멧과 같은 차원으로 내려가서 대화를 하자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성을 상실하게 된다. 자체의 주체성 없이 타자와 대화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교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양극이 신비적 조화를 이룸으로서 형성된 종교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게될 때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다워질 수 있다고할 수 있다.


신성이 배제된 그리스도교는 인물론이나 역사에 그칠것이며 인성이 배제된 그리스도교는 추상적 철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론을 통하여 가능해질 것이다.

 

 

2. 통전적 그리스도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조금도 손상 시키지 않고 어떻게 오늘날의 이 다원화 사회에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할 것인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시대가 요청하는 통전적 그리스도론의 정립은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이종성 교수는“통전적 그리스도론은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고백한 모든 신조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학의 형성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기간인 제2세기부터 제7세기까지의 에큐메니칼 교회 회의가 결정한 모든 신조를 기본 신조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신조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조가 교회 생활에 지침이 되었으며 신 이해에 근본 구조를 밝혀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신조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모든 신조는 시대의 제한성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든 절대화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조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인에 의하여 고백되고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후세인에 의해서 성서의 시대적 해석과 이해에 맞춰서 재해석하고 보충되어야한다.


세째, 그리스도론을 우리의교회의 토양에 토착화하고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서는 일부 교단을 제외하고는 외국교회가 작성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성서와 전통적 그리스도론과 우리의 주체적인 결단에 따라 전통적 그리스도론을 토착화해야하는 것이다.


네째, 통전적 그리스도로네 있어서 그리스도의 한 단면을 다른 면보다 더 강조해서는 안된다. 취급 방범에 있어서는 선후가 있을 수 있으나 가치의 경중을 두어서는 안된다. 특히 최근의 급진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토대로한 새 그리스도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통전적 그리스도론은 그러한 편파적인 그리스도론을 지양하고 언제든지 삶의 현장에서 나와 삼위일체 신과의 실존적 만남과 주체적 결단을 통해서 이해되는 통전적이고 통합적 그리스도론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통전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성서가 가르친 범위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그리스도론은 그의 통치권을 개인과 교회와 역사에만 국한 시켰다면 이제는 피조물 모두를 그리스도와 관련지어서 생각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성서의 입장

 

성경에는 그리스도교와 타종교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구절이 있는가하면(행4:12), 타종교와의 연속성을 시인하면서도 기독교를 절정으로 이해하여 예수의 규범성을 긍정케하는 구절이 있다(고전10:4). 때로는 타종교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 표시 되었는가하면(마12:30), 반대자에 대하여 관용을 베푸는 구절도 있다(막9:40). 심지어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원을 받는 특수한 예가 마태복음에 나타남을(25:31-46) 지적하면서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규범성까지도 가볍게 생각하는 신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면을 볼 때에 구원의 대상으로서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었던 것이지 이방종교에 대하여서도 개방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앙태도

 

유대-기독교는 세계 여러 종교들 가운데 유일신교로 지칭 된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떤 다른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일신교이다. 종교사에서 신관의 변천과정을 살펴 볼 때에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여러 신들이 함께 존재하는 다신교(Polytheism), 다음 단계는 그 중의 한 신만이 주(主)신으로 인정되는 단일신교(Henotheism)로, 마지막 단계는 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유일신교(Monotheism)로 발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와 다른종교들 간의 관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처음으로 시작 되었다. 모세오경의 다양한 전승들은 이스라엘이 가난안에 정착하기 전에 에돔 족속, 겐 족속, 미디안 족속, 들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히브리인들의 야훼종교의식이 처음 소개 되었을 때에 그곳에도 역시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착의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신인 야훼가 가나안에 소개 되었고 서로 다른 종교간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착의 신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야훼만이 참 신이라고 선포하게 되었다. 즉 야훼가 오랜동안 국가적인 신으로서 여겨지게 되었고 오랜동안 그는 주도권을 잡고 토착민의 신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정복자 이스라엘의 신을 섬길 것인가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점차로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이 확립되어 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일찌기 유일신 신앙이 강조 되었다. 십계명 제1계명에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20:3)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을 언급했고 여호와 외에는 천상 천하에 어떤 신적인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유일신 신앙이 명실상부하게 공인된 때는 다윗왕조 때(주전 1000년대)로 본다. 다윗왕은 당시 중동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승자 였다. 정치 경제와 군사 모든 면에서 월등 했음으로 주변 여러 나라들을 제압했을 뿐아니라 교역을 통하여 그의 강한 실체를 보여 주었다. 따라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실체도 이웃 사람에게 소개 되었고 그들에 의해 인정 되었다. 당시 명실상부하게 여호와는 유일신으로 인정케 된 것이다.


그러나 그후 이스라엘 사회가 혼탁하고 부패하여 여호와를 망각했을 때 호세아 같은 선지자는 유일신 신앙을 재천명 했다(호13:4). 포로기의 예언자도 같은 유일신적 신앙을 강조 했다(사40:25). 이 때가 가장 유일신 신앙이 강조 되었던 시기이다.  그 후 바벨론 포로 중에 있던 다니엘도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했고(단2:20), 느브갓네살 왕도 여호와 하나님을 모든 신의 신으로 말하고(단2:47) 이러한 유일신 신앙은 신명기 6:4절에서 쉐마교리(Shema Doctrine)로서 정착 되었고 신약성경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막12:29ff,요14:6,요17:3,행4:12,롬3:30,16:27,고전8:4-6,갈3:20 등등).


본래 구약성경은 유일신 사상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는 분으로 전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심사는 오직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전능하신 분인가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magmanila Dei)과 업적에 초점이 모아지고 았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주 내용은 아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활동과 베푸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양들이다.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유일신적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로 포로기와 같은 상황에서 타종교에 동화될 가능성이 많은 때에 주로 언급 되었고 여호와 신앙의 위기때에 주로 강조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생존의 기반이 약화 되었을 때에 유일신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존재를 구축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유일신 신아의 문제점은 배타성으로 지적 된다. 구약성경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배타적인 성격은 강하지 않다. 하나님은 세계 만민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명하신다. 더우기 예수 그리스도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존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단지 배타적인 요소가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상치되는 신적인 요소에 관해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신적인 존재는 우상이다. 엘리야 시대의 바알 신과 앗세라 신과 그들의 제사장들은 질시의 대상이 되었지만 바알 신이나 앗세라 신을 섬기던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는자요 구원의 대상들 이었다(욘4:11).신약시대 베드로도 복음의 보편성을 깨닫고 그의 민족적 배타성을  청산하고 가이사랴에서 이방전도의 문을 열었다(행10장).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앙 태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도 세계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공동체를 가지기고하고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초점은 만인의 ‘주’로서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함을 보여준다(롬10:14-17).


윌슨(S.G.Wilson)은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배타주의”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사실은 “의로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바울의 복음에 의해서 신학적인 이해를 바꾸지 아니하고서도 구원을 얻게 할 것이라고 한다. 윌슨은 바울의 시각은 다원적 종교 공동체 가운데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종교 안에서 역사 하시나 진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메시야적 왕국에 대하여 선포 하였다(눅11:20, 17:21). 그의 메세지는 구원과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의 사상 역시도 유일신앙에 대한 강조 였다(고전3:23, 15:28).


신약은 말씀이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 되었음을 단언한다(요1:14). 이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등 특별한 역사적 계시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주(Lord)라는 명칭 속에서도 나타난다(빌2:12). 신약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최종적이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결정체 이다.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이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그의 주권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배타주의”는 오늘날의 종교 다원적인 상황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져야 한다.  마태복음28:16-20절에 나타난 명령은 보편적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와 구원의 새로운 공동체에 결합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바울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여 진다고 주장한다(롬3:21-26).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모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정직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롬3:9-20) 인간의 불성실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하지 못한다(롬3:3-7) .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인간의 불성실하심을 극복하게 하심을 명백히 보여준다(21-26).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하나님의 의로 부르셨다.  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9-11장에서 말하기를 이스라엘은 믿음에 대하여 실패하였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인간이 부정직하고 책임성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믿는자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예수를 ‘하나뿐이신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한다(10:9,12).


로마서 5:12-21과 7:7-11, 8:19-22에는 각기 다른 전통에 근거한 보편적인 죄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보편적인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새 아담”으로서 첫번 아담의 불순종을 돌이켜 순종하고 죄와 사망의 결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로마서1:18-3;23절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죄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새로운 아담에게 순종하고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게 될 때에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롬6:1-14).


또한 성경에 나타난 로고스 전승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갖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전승은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주’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구속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이세상 안에서 활동하는데 이 예수는 (1)하나님의 형상 (지혜서7:26)이며 (2)처음 난 것이며(잠8:22,25) (3)모든 것을 하나님과 함께 소유 하고(잠8:27-30) (4)세상이 그에 의해 창조 되었으며 (5)하나님의 광채(지혜서7:28)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표현은 하나님과 관계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에 찬 찬양이다(고전1:15-20, 히1:3-4,요1:1-18).이러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주로서 그리스도를 화신케해 주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능력이 그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보여진 것이다(요1:14,18).


신약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언한다.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거부한다. 사마르타는 예수의 독특성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주장 속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주적 그리스도가 타종교 안에서 익명으로 역사 한다고 가정한다. 그는 단지 사람들에게 감추어지거나(hidden) 혹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unknown)이다. 말씀의 신비가 역사적 성육신의 독특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발견 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수긍할 수 있다.  성경은 초월이 역사에 들어 왔을 때 그 분은 자기를 비우셨으나, 그 독특성은 손상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세상에는 익명의 하나님이 있을 분, 그 분이 낮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성육신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약성서에도 기독교의 개방적인 태도를 고무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주재하는 신이라는 관념은 그대로 신약성서에 유입 되었다. 따라서 마태도 예수를 육화한 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중보자로 이해하고 있다. 아울러 예수는 결코 편협하고 배타적인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진실한 신앙심을 가진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존경심을 표시 하였다.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한 예수의 견해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개방적인 기초가 마련된다.


이와 같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 중심의 편협한 사상 흐름과 좀 더 개방적인 흐름이 모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배타적이고 하나는 포용적이라고할 수 있다. 이방종교와 우상숭배에 관하여서는 배타적이라고 한다면 비록 이방인이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개방적이며 포용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성경해석 비판

 

다원주의자들의공통적 구원관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새로운 피조물은 구원의 목표라고하며 변선환 교수는 이 “새인간성”회복은 불교에서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동식 교수도 역시 종교의 목적을 “인간화” 내지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하고, 구원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의 괴로움을 없이하며 기쁨을 나누는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종교다원주의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보편주의라는 개념에 입각해서 구원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보편주의, 그리고 세상과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주제로 글을  쓸 때에 많이 사용되는 성경 본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요1:1,로고스이신 그리스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초기의 변증가인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로부터 칼 라너, 한스 큉, 그리고 존 힉등  현대 신학자에 이르기 까지 로고스(logos)라는 용어는 어느정도 감추어진 모습으로 이긴 하나, 모든 종교와 철학에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견해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어왔다. 존힉은 “만약 우리가 인간을 향해 일하시는 로고스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모든 종교내의 모든 구원은 그 로고스의 사역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기술함으로서 로고스를 보편화 시키는 것을 알수 있다.


헬라어 로고스를 번역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헬라어에서 로고스라는 명사는 원래 ‘말하다’(legein)라는 의미에서 비롯 됐는데, 이것은 일상적인 담화와 대화(lalein)와 대조되는 중요한 진술이 발언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발언을 계시하고 완성하는 말씀의 구약적인 배경에 반하여, 요한은 서론에 하나님과 로고스(따라서  하나님을 세상에 계시할 자격을 가진)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과시한다. 나아가 요한은 1장 18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자로서 로고스를 말한다.   요한이 서론에서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묘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신화적인 혹은 철학적인 구상을 덧 붙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한은 더 나아가 이 복음서에서 로고스이신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20장 31절에 확언 되어 있다.


힉은 요한복은 1장1절을 석의 함에 있어서 ‘인간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모호하게 묘사함으로서 로고스를 비인격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삼중 관계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아버지와 관계하여 그리스도는 이렇게 소개된다.


선존재이심 : 태초에 계시니라(en arche).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와 밀접한 교제를 가짐:하나님과 함께(pros ton Theon).


하나님이심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Theos en ho logos).


미완료 직설법 ‘있었다’가 세 구절 모두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게속적이고 영원한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절은 아버지와의 이 관계가 영원하고 밀접한 것임을 강조한다.


둘째, 세상과의 관계는 3절 이하에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의 창조주시다. 3절에서 헬라적, 영지주의적 개념들(즉 물질은 영원하며, 세상을 창조하는데 천사가 사용되었다는 생각)은 반대를 받는다.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만이 창조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피조물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피조물과 로고스에 대하여서는 두개의 다른 동사가 사용 되었는데 로고스에 대하여서는 “계셨고”(to be), 피조물에 대하여는 “지은바 되었다”(to become)라는 말이 사용되어 둘을 구별하고 있다.


계속해서 4절은 중요한 진술을 담고 있다. 먼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라는 진술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전치사는 “통하여”가 아니라 “안에”이다. 따라서 생명이 항상 말씀 안에 거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그 말씀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4절 후반부에서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다. 5절에서 이 빛은 어두움에 의하여 정복당하지 않고 어두움 속에 비친다. 7-9절에서 요한은 이 빛에 대해 증거하러 왔다. 그러므로 이 빛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며, 불가불 그리스도와 관련되며, 심지어는 동일시되는 것이다. 요한의 글에서 생명과 빛은 관련이 있으며, 강한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핸드릭슨은 ‘생명’이 ‘하나님의 실체의 충만’을 가리키며, 모든 육체적 영적 삶의 원인이자 보존자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진술은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는 진술이다. 3절에서 언급된 창조의 사실, 4절에서 포괄적으로 언급된 사람, 그리고 5절에 최소한도 암시되어 있는 타락을 근거로 할 때, ‘사람들의 빛’은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가리킨다. 로고스가 이 세상 속에 충만한 빛으로 오셨지만 그가 오신 근본 목적은 구속이다. 라너, 큉, 힉 등이 가르친바와는 반대로 일반계시에는 구속적이고 구원적인 기능이 전혀 없다. 인류의 통일성, 일반계시의 사실은 물론, 사랑이라는 신적인 속성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을 불필요하거나 ‘상징적’인 것이 되지 못하게 한다. 요한복음의 서론은 이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세째, 세상과의 관계이다. 요한복음의 서론은 14절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다”라는 말은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한 로고스는 빛이며 모든 사람들은 다 어둠에 있지만 바로 빛인 로고스에로 오도록 초청 받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 행 17:22, 바울의 진술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저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17:22).

 

사도행전 17장 22절에 나오는 ‘종교성’은 헬라어로 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deisidaimonesterous)로서 에보트-스미스사전(Abbot-Smith Lexicon)은 ‘신을 공경하는, 종교적인’이라는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아덴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이며 많은 신들을 섬겼다. 도시 전체에, 공적인 장소이건 사적인 장소이건 신전들과 신들이 가득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들에 대해 매우 종교적이라거나 혹은 신들에 열심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이 사실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와 그렇게 많은 위하는 것들(23절,sebasmata)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덴 사람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Unknown God)'이라고 새겨진 단을 발견하였음을 언급한다.134)


다원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들어 있는 종교성을 인정하고 또한 성경에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23절의 진술은 현대의 보편주의를 바로 잡는 매우 중요한 진술이다. 아덴 사람들이 새겨 놓은 글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메세지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agnoountes-무지하다, 알지 못하다, 여기에서는 현재분사형)을 확언해 준다.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무지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보편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를 성실히 숭배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한 분의 초월적인 하나님을 숭배함을 나타낸다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르치지도, 암시하고 있지도 않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3. 엡1:10과 골1:15절, 우주적인 그리스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 게하려 하심이라”(엡1:10).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만물이 완전히 주님의 권세 아래 있게 될 때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이 이곳에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을 문맥에 따라 해석하지 아니하고 어느 한 구절 만의 의미를 가지고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에베소서 1:3-14에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풍성한 복을 찬송하고 있다. 여기서는 오직 신자들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의‘(1절)이라는 말과 크리스찬들이 선택 받고(4절), 예정 되었으며(5절), 구속과 죄 사함을 받았고(7절), 특별계시를 전달 받았고(8-9절), 영광을 기대하며 즐거워한다(13-14절).


10절에서 ‘통일되게하다’는 헬라어 아나케팔라이오사타이(anakephalaiosathai)를 번역한 것으로‘종합하다’,‘통합하다’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는데, 로바서 13장 9절에서 모든 계명을 사랑의 계명이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종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구절에서는 또한 그리스도가 만물의 머리가되신다(kephalaion)는 사상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교훈은 1장 20절부터 22절에서 강조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들어갈 것이며, 그리스도께 대한 만물의 복종은 세상 끝날에 성취되고 실현될 것임을 알게 된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리스도으 인격과 사역은 서로 나뉠 수 없는 연관을 지닌 것으로 묘사 된다. 15-20절에서는 성자의 선재적 탁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며 그 분의 유일한 인격이 의문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분은 피조물 보다 지고하신 분이며(15절), 창조의 행위자 이시며(16절), 만물이 그를 위해 창조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영원하시며 그 분에 의해 모든 피조물이 유지된다. 그런데 이 창조의 주님은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주 예수께서 모든 만물 중에 뛰어나게 되시는 것이다.

 

 

4. 고전 15:24-28, 보편주의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 나와 있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라는 구절을 들어서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의 그리스도와 성육신한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보편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문맥을 들어서 살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의 복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여기서 그리스도를 성육하신 성자, 그리서 신인(God-man),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로 생각하지 않을 경우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친히 우리를 다스렸지만, 승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중보자에게 주사(마28:18) 그를 통해 다스리신다. 이 우주적인 권세는 중보자로서 직책을 지닌 그리스도께 주어졌다. 그는 이 중보적 왕권으로 모든 원수를 멸할 뿐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북돋으며, 다스리시고, 보호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일단 사역을 완수하면, “아들 자신도...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될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완성 되었으므로 삼위 하나님 내에 기능적인 경륜이 필요 없게 되었으며,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다스리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 안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의 구절만을 가지고서 해석을 가하는 것은 오류를 낳게 됨을 알 수 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성경적이어야할 것이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는 성경관에 따라 달라진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선택의 폭은 매우 좁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종교 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며 따라서 원칙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로마서 5장 19절의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즐겨 인용한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말하지만 동시에 만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디모데전서 2장 5절의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고린도후서 5: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골로새서1장20절의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는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보편적 구원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해석에 대하여 복음주의에서는 만인 구원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이 균형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기록 되어 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을 성취시켜줄 이름이 없다는 것이며,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 줄 뿐만 아니라 예수에게서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이나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간과 화해 하셨으나(롬5:10-11), 모든 인간을  즉시 자동적으로  구원하셨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롬 10:9).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3:16)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구원의 계시는 이러한 맥락에 있어서 타종교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개방적이다(창12:3, 사56:6-7, 말1:11, 마8:11). 이것은 구원을 문제 삼는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배타성과 포용성을 넘어서는 “초청의 파라다임”(paradigm of invitation)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앞에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그들의 주장하는 바와 배경을 살펴 보았다. 종교 다원주의란 문화적 상황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여러 상이한 구원의 종교적 체계가 있다는 다원적 구원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특히 기독교적 신학의 독선적 배타성을 거절하며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1)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론 중심 신학을 신 중심적 사고로 대치할 것을 주장하며, 2)그리스도교적 신론의 독특성인 인격적 신론의 개념보다는 초월적 절대적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의 개념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3)기독교 신의 자기계시 차원보다는 신을 경험하는 인간의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구원의 길의 다원성을 개방시켜 놓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궁극적 실재’인 신이 인간의 문화적 존교적 환경과 맥락에 따라 상이한 종교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반응으로는 첫째 배타주의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하나의 참 종교가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진리는 오직 한 종교 안에만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므로 타 종교에는 진리의 가능성이 철저히 배제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을 종교적 진리의 유일한 혹은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대표적인 학자로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 헨드릭 크뢰머가 있다. 둘째는 개방적 포용적 입장으로 모든 종교는 궁극적 실재의 계시 체험을 동반하나 구원계시의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라고하는 입장이다. 타종교도 하나님이 현존하는 장이 될 수 있다고 보지만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기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입장이다. 세번째 다원주의의 압장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여러개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모든 고등종교는 다 신으로 부터 너온 것이요 각기 진리의 일면을 지니고 있으며 고등종교를 통해 주어진 계시의 내용과 정도는 다를지라도 그 원천은 같은 것이라고 본다.


종교다원주의의 그리스도론을 보면 그 주된 내용이 존 힉이 주장 하였던 바처럼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에서 벗어나서 신 중심적인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전통적 입장은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였다고보며 이것은 초대교회로 부터 체험과 고백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함을 알 수 있었다.


종교 다원주의는 19세기 성경 비평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 성경을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심판 받아야할 역사적 문서로 본다.여기서 본문(text)보다는 상황(context)이 우선하기 때문에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앙과 신학의 수정이 불가피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은 존립의 여지가 불가능하다.


복음주의는 기독교가 성경을 낳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독교를 탄생 시켰다고 믿는다. 물론 ‘역사적 기독교’는 오류와 허물이 있으나 진리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신적인 기구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독론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구주되심을 부인하는 기독론 부재의 신학이다. 19세기 서구의 자유주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점을 제기 하였는데 20세기의 다원주의는 너무 많은 그리스도와 로고스의 존재를 인정하여 신앙의 혼란과 상대주의를 초래한다(요일4:1-6).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인정되지 않은 그리스도교는 철학이며, 권위가 인정되지 않은 성경은 위인전이나 다름 없다고 할 것이다. 다원주의 상황 아래서 가장 효과적인 대화를 하기 위하여서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리스도교는 영적 다이나믹을 상실하며 나아가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소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될 것이다.


선교 2세기의 발걸음을 내딛는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경계해야하며 잘 준비해야 할 것은 다원주의의 도전이라고 할 것이다. 다양화된 세계는 오히려 더 많은 대화와 상호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이 때에 종교간의 대화 역시도 이에 못지않게 요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기독교가 싸워 왔던 것이 그릇된 교리의 해석으로 무장한 이단의 세력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기독교의 가장 큰 상대는 기독교와 그리스도를 보편화 하려는 보편주의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원화 사회를 살아 가면서 성경을 통하여 흔들리지 않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대화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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