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초기 선교정책: 선교지 분담 정책

 

 

 

복음 효율화 위해 교파별로 선교지 나눠

 

알렌의 입국 후 여러 선교단체가 한국에서 일하게 되자 특정 지역의 집중화를 막고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위한 선교부 간의 조정이 필요했다. 이런 배경에서 선교지역 분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복수의 선교부가 한 지역에서 일하게 될 때 야기될 수 있는 불필요한 대립이나 경쟁을 막고 인적·재정적 낭비를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아펜젤러는 이미 1888년 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 선교부 간의 선교지 분담을 제안한 바 있고, 미국남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했을 때(1892)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간에도 선교지 분담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이런 점은 합리적인 선교지역 분할이 긴요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선교지 분담에 가장 적극적인 교파가 장로교였다. 미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선교부의 연합체인 ‘장로교 공의회’는 선교지 분담을 포함하여 한국에서는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도록 힘쓴다는 점에 합의했다.

후에 호주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교회가 이 일에 동참하게 된다. 장로교공의회는 장로교치리회가 조직되기 이전까지 상회(上會) 역할을 했다. 이 장로교공의회는 1893년 1월 회원 선교부 간 합의를 거쳐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 남장로교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와 충청도,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 지방을 맡기로 했다. 부산과 경남지방은 호주와 미국북장로교 공동구역으로 했다.

 

미국북장로교와 북감리회의 선교지 분담안

 

1893년 6월에는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와 북감리회 선교부 간의 선교지 분담협의가 이루어졌다. 이 분담안은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나 개항장(開港場)은 공동선교구역으로 하고, 5000명 이하의 지역의 경우 이미 선교를 개시한 선교부의 선취권을 인정해 주고 타 선교부는 가능한 한 이 지역을 피하고 미점유지역 선교를 권장한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또 교회권징은 상호 인정해 주고,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도들의 교단 이동을 인정하되 이명서가 없는 이를 영입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이런 합의에 대해 감리교 감독 포스터(R S Foster)가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리교에서 공식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회도 이 협정을 존중했다.

 

선교지역 분담 논의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경남지방에서는 1900년부터 미북장로교와 호주선교부 간의 협의를 시작하여 1903년 10월 20일 양 선교부 간의 지역조정에 합의하였다. 흔히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구분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경남지역의 남서쪽, 곧 울산 기장 언양 양산 거제 진해 고성 지역은 호주장로교가, 동북쪽, 곧 김해 웅천 밀양 영산 창녕 칠원 창원 지역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구집중지역인 부산 동래 마산은 양 선교부의 공동구역으로 하였다. 이때의 지역분담에 대해 왕길지가 그린 분담도를 필자가 보관하고 있다. 협의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고 북장로교는 1913년 말 부산·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장감연합공의회 조직

 

1905년에는 장감연합공의회가 조직되어 그동안 미온적이었던 감리교와도 선교지역 분담에 대해 협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커다란 발전이었다. 일단 평안북도 지역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북장로교는 영변 지역을 북감리교에 이양하는 대신 북감리교는 안주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에 이양했다. 각 선교부의 사역이 확대되고 새로운 선교사들이 내한하게 되자 선교지 조정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런 필요에 따라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논의가 계속되었고, 1909년 9월 16일과 17일 양일간 모인 ‘지역분담협정위원회’에서는 주한 미국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등 4개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북감리회와 남감리회 등 2개 감리교 선교부, 곧 6개 선교부가 참여하는 선교지 분담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협정은 선교부 간의 상호존중과 양보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교계예양(敎界禮讓)’ 혹은 ‘예양협정(禮讓協定·Comity Arrangement)’이라고 불리고 있다. 몇 차례의 조정이 뒤따랐으나 대략 다음과 같이 분할되었다. 미국 북장로교는 강계 선천 평양 재령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일부 지역과 경상북도 지방을 맡았고,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대전 부여 등 충청남도 일부와 제주도를,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 지방을, 그리고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부산 진주 마산 거창 통영 등 경남지방을 맡았다.

또 미 북감리교 선교부는 영변 해주 평양 서울 인천 원주 영월 충주 원주 등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북 강원도 일부지역을, 남감리회는 원산 서울 송도(개성) 춘천 등 함남 경기 강원 일부지역을 각각 담당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처럼 서울 평양 원산 등 세 도시 지역은 두개 이상의 선교부가 공동으로 선교한 곳이고, 나머지 지방은 대체로 중복을 피하도록 했다. 다른 교파들, 곧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그리고 성공회 등은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 교파는 자유롭게 선교하였다.

이 선교지 분할정책은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적 인적 낭비를 줄이고 한국을 효과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한 선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으나 해당 선교회의 신학적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신학을 이식하였고, 1930년대의 지방색에 의한 교권 대립, 해방 후 교회분열의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지적은 타당성이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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