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의료활동과 병원의 설립

 

복음 실은 현대의술로 조선인 마음을 잡다

 

학교의 설립과 함께 의료활동은 기독교의 값진 봉사였다. 아아(亞阿)제국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시약소의 설치, 환경위생 교육, 병원의 설립 등 의료활동은 선교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책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1830년대를 전후하여 의료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에게서 예시되듯이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문학을 통해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면, 개신교 선교사들은 현대의학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사고자 했다.


한국 선교는 병원과 함께 

한국에서의 의료활동은 한국 선교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다른 교파에서도 의료선교는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은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 폴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서양식 병원 건립을 제의했고, 고종의 윤허로 서울에 설립된 광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병원이었다. 북감리회의 스크랜턴, 북장로교의 헤론 의사가 이 병원에서 일했고, 1886년에는 부녀과를 신설하여 엘러스(Annie J Ellers)가 진료를 맡았다. 후에는 홀턴(Lillias Horton)이 이 일을 계승했다. 알렌의 뒤를 이어 헤론(J Heron), 빈톤(C Vinton), 하디(R A Hardie), 에비슨(O R

Avison) 등이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북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William Scranton)은 서울 정동에서 1885년 9월 민간병원을 설립했는데, 고종은 이 병원에 ‘시(施)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1886. 6). 1888년 12월에는 아현동과 상동에 분원이라 할 수 있는 진료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미 감리회는 남녀를 한 병원에서 진료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여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과 어린이만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여성만을 위한 병원이었다. 명성황후는 ‘보구녀관(保救女館)’이라는 병원 이름을 하사하였다. 하워드(Meta Howard),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Cutler), 해리스(Lillian Harris), 에른스버거(Emma Ernsberger) 등이 이 병원에서 봉사했는데,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각 지역의 선교병원  

 

의료활동은 서울에서만 아니라 각 선교부에 의해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평양에는 래드병원(Ladd Hospital)을 설립했는데 평양기독병원으로 개칭되었고, 후일 감리교의 기홀병원과 합병하여 1923년에는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되었다. 부산에서는 1891년 12월 브라운(Hugh M. Brown)에 의해 시작된 시약소가 어빈(Charles Irvin) 의사 등의 봉사로 정킨기념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으로 발전하였다. 대구에서는 1899년 존슨(W O Johnson) 의사에 의해 시작된 진료소가 동산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또 선천(미동병원), 강계(계례지병원), 원산(원산구세병원), 해주(구세병원), 개성(남성), 원주(서미감병원), 전주(예수병원), 진주(배돈병원), 심지어는 간도(용정, 제창병원) 등지에도 선교병원이 설립되었다. 특히 대구, 부산, 광주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보호시설(병원)을 설립하고 가련한 이들을 보살폈다. 그래서 1913년까지 전국에는 3개의 진료소를 포함하여 33개의 선교병원이 설립되어 있었다(표 참고). 

 

1884년 알렌 의사의 입국 이후 많은 의료선교사들이 내한했다. 1907년에는 한국의료선교사협의회(The Korea Medical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어 의료선교사들 간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1938년 당시 의료선교사 수는 328명에 달했다. 교파별로 보면 북장로교 84명, 남장로교 44명, 북감리회 59명, 남감리회 32명, 성공회 31명, 캐나다연합교회 22명, 안식교 10명, 독립선교사 35명 등이었다. 한국에 왔던 의료선교사 중 헤론, 홀, 랜디스(Eli Barr Landis), 오웬(C C Owen) 등은 격무와 과로로 순직하기도 했다. 

 

의료선교가 끼친 영향 

 

의료선교는 궁극적으로 복음 증거를 위한 방편이었으나 한국의 의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의료선교 사역이 남긴 가장 큰 공헌은 첫째로 시료(施療)와 시약(施藥)을 통해 한국인들의 육체적·정신적 혹은 심리적 아픔을 치료하고 재활, 재생의 길을 가도록 도움을 준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의료실태가 경험적 의술의 일종인 한의학 외에는 비과학적 샤머니즘과 관련된 무속신앙과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전근대적 의료수준에 머물고 있었음을 고려해볼 때 더욱 그렇다. 둘째, 서양의술의 전파를 통해 한국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셋째, 의학교육과 의료인의 양성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에비슨 박사는 초기 의료선교가 남긴 공헌을 5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로 호열자나 각종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의료선교사들의 시약, 시료, 종두 등 예방과 치료활동을 통해 병이 미신과 악신(惡神)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미신적 공포에서 해방한 점, 둘째로 종두(種痘)의 보급에 의한 어린이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 셋째로 이웃을 돕는 사랑의 정신을 구현함으로써 구제사업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 점, 넷째로 예방, 시약, 치료, 공중위생 및 보건증진 등 각종 의료활동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고 수용된 점, 다섯째로 의학교재의 번역 및 의료관계 저술을 통해 한국의 과학교육 혹은 의학교육에 영향을 준 점을 지적하였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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