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침례교도
1638년 末頃에 칼빈주의 신학을 견지하면서 신자의 침례를 실행한 회중이 생겨났다(이들을 “특별 침례교도”라고 함). 이 침례교도들은 영국 최초의 독립파 회중에서 생겨났으며 그들이 언제 침례교도의 모든 견해를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청교도적 방식으로 교회의 원칙들을 본 급진적인 입장은 처음에는 교회를 함께 모인 공동체로 이해하였으나 후에는 오직 침례를 받은 신자들 만이 그 견해에 적합하다고 보게 되었다.
초기의 침례교도들은 네덜란드의 메노파와 관련을 맺었었고, 영국 분리주의자들 사이에서 생겨난 사도적 교회의 유형을 추구하려던 양심적인 탐구에서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초기의 침례교도들은 교회와 국가사이의 관계에 대한 당시의 논쟁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17세기 중반에 제기 되었던 천년왕국설에 대한 다양한 논의에 관련되었다.
챨스1세에 대한 의회에 반대가 강렬해 지고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크롬웰의 승리군은 의회의 국가장로회주의(State-Presbyterianism)와는 다른 종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독립교회와 침례교회는 군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다. 크롬웰은 국교회의 존속을 허락하였으나 침례교도, 독립 교회신자, 장로교도, 비왕당파 국교도는 그 국교회 내의 성직자로서 활동하게 했다. 국교회와 분리해서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 한 분리하여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어떤 침례교도들은 국교회 내의 직분들을 받아드렸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계속 독립적으로 행하였다.
침례교도들은 정치적 공백기간 중에 엄청난 세력을 확보하고 국가의 영향을 미치는 초창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정복구 이전에 이르러서는 퀘이커파와 같은 더 급진적인 파에게 교인들을 빼앗기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제 5왕당파의 혁명적인 견해들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임으로서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였다. 이 침례교회 중에 지역적 독립을 주장하였을 때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였던 바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들은 지역 회중으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회중 간의 상호 원조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일반 침례교도 사이에는 총회를 세우게 되었고 특별 침례교도들은 지역적인 연합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나 권징 문제를 논의 하거나 혹은 “침례교도의 관점”을 확립시키기 위한 공적인 협의회를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별 침례교회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논의 되었다 : 교회의 모임, 신자의 침례, 침례받지 않은 자와의 교제, 목사의 장립, 성직의 유지, 치안 판사의 위치, 선교, 예배 의식의 사용 문제 ( 예배시의 음악 문제, 떡을 떼는 것, 시편 찬송, 세족식, 환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 ),교회의 권징, 배제시킬 수 있는 근거와 방법, 가정의 의무와 관계 등이다.
1660년 경까지 거의 3백여 개의 일반 침례교회와 특별 침례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왕정복구 후 국가는 25년간 간헐적으로 핍박을 하였다.윌리암과 메리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침례교도들은 단지 한정된 부분에서만 묵인을 받게되었다. 39개 조항의 중요 내용을 찬성하는 삼위일체 신앙의 숭배자인 신교 비국교도들이 비록 형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압제의 법은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적인 견해에 관하여는 광범위한 관용책이 생겨났다. 비국교도들과 영국 국교도들은 모두 종교적인 활기 속에서 쇠퇴기를 견디어 냈다. 반면에 일반 침례교는 장로교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던 아리안주의의 확장을 위해 희생을 당하였다. 18세기 말 경에 많은 침례교도들은 그들 자신을 적어도 유니테리언파라고 부르고 있었다.
반면에 특별 침례교도들은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해 과도한 저항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 행위와 복음 전도가 모두 “과도한 칼빈주의”(hyper-Calvinism)라고 알려진 것 속에서 방해를 받았다. 침례교도는 대각성 운동에 의해 나타난 새로운 삶에서 즉시 유익을 얻을 만한 위치에 있지않았지만 몇 차레의 운동은 침례교를 각성하게 하였다.
1755년 레이세스터셔 지역의 노동자들이 침례교도가 되었고 단 테일러(Dan Taylor)가 형성한 교회와 더불어 일반 침례교회와 함께 “일반 침례교 신연합을 1770년에 형성하였으며 게속 확장되어갔다. 1785년 케터링의 Andrew Fuller가 만민이 받을 만한 복음(The Gospel Worthy of all Acceptation)을 발간 했을 때 특별 침례교에서도 새로운 생명의 운동이 찾아왔다. 그는 칼빈주의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교적 신학이라고 주장하였다.특별 침례교는 18세기에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당시 그들의 생활은 청교도와 복음주의 사이의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단 테일러의 열정주의를 반대하던 일반 침례교도들은 유니테리언파로 빠지게 되었다. 또한 복음주의적인 올바른 힘을 거절하고 성만찬에 그들의 회원만 용납한 특별한 침례교도들은 ”엄격한 침례교도“가 되었다.
풀러는 1781년에 그의 저서를 완성했으나 4년간이나 출간을 주저하였다. 1784년 그는 미국의 신학자 Jonathan Edwards(1703-58)의 사상을 영국의 종교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풀러의 동료인 John Sutcliffe는 노댐프튼셔의 침례교도들에게 ”기도에의 부르심“(Call to Prayer)을 출간하였다.1792년에 침례교 선교회가 창설되었다. William Carey(1761-1834)와 John Thomas가 이 선교회의 최초의 국외 대표자가 되었다. 1812년 특별 침례교가 보다 더 일반적인 연합을 바람직하게 수행하였고, 복음선교회가 탄생하였으며 교파적 조직의 선교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침례교 연합회(The Bapatist Union)가 형성되기까지는 그 후 20년이 걸렸다.
'신학과교회사 > 세계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교회사] 교회사/ 중세사 (0) | 2017.08.18 |
---|---|
[세계교회사] 로마의 기독교 10대 박해 (0) | 2017.08.18 |
[세계교회사] 서양 고대사 개관 (0) | 2017.08.09 |
[성서신학] 성서지리학의 중요성 (0) | 2017.08.09 |
[역사신학] 성서배경사 요약 (0) | 2017.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