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배경사 요약
1.메소포타미아의 역사
1)아라랏 산에서 짐승 사냥으로 먹고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북쪽의 산악 지방으로부터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거쳐 페르샤만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곳에는 우바이드족이라고 알려진 백성들이 처음 등장을 했다고한다. (고고학적 유물) 2)우륵시대 : 주전4000년 경의 수메르족의 문명이 시작면서 메소포타미아 하류의 우륵, 와르카(창10:10의 에렉) 수사, 갈대아 우르(창11:28,아브라함의 고향) 테페 고라 등지에서 촌락을 형성하고 거주하던 이들의 문명은, 상형문자 10진법과60진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늘의 신 아누와 어머니신 이난나 아카드어로 어스탈을 숭배 하였고 아누 신전은 벽독로 만든 인공대지 위에 건축되었고 둘레에 계단이 있는 피라및형의 신전의 원형이 되었다. 통치자는 (루갈: the lugaal,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 정치와 종교 분리가 없는 신정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3)젬뎃 나슬시대 : 주전3000-2800년 특별한 기록이 없다.
메실림시대 : 주전2800-2500년.
반상형문자단계에서 쐐기모양의 설형문자단계로 발전, 기술과 공예가 발달하였고, 중심도시 국가인 우륵의 경우 10킬로미터의 담벽과 900개가량의 망대가 건설되었다. 모래땅을 파서 그 위에 신전을 건설. 도시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신전의 역할이 약화되고 대제사장과 함께 왕이 부각되면서 왕조들의 등장. 기스의 메시림 왕이 활동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메실림 시대라고 부름. 우르의 첫왕조시대 : 주전2500-2360년 메사니파다가 우르의 첫 왕으로 등장 80년간 통치. 우르 근처의 알 우바이드에 신전건축 니훌삭 여신에게 봉헌. 우르 외에도 마리, 앗수르, 니풀, 수룹팍, (노아의 고향으로 알려짐) 촌락들이 조금 확대 되었던 것을 국가라고 하였다.
아카드시대 : 주전2360-2180년
셈족의 사르곤1세가 창립. 동쪽으로는 엘람. 북쪽으로는 수바르투. 서쪽으로는 수리아와 소아시아까지 5400명인구, 다람신이 엘람에서 32명의 동맹군을 퇴치. 구트족에게 멸망. 수메르국 달과 별을 신으로 숭배 태양신 샤마스 숭배.
우르3세시대 주전2060-1950.
왕의 이름 안에 신 이라는 이름이 많이 들어간 것을 볼 때 신의 숭배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엘람은 아모리 족속으로 이루어 져있어서 북서쪽의 셈족 방언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됨. 지중해 해변가에는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다. 가나안은 자주빛 빛깔의 땅인 베니케 본토를 말한다.애굽의 영향권안에 있었다.
이신 라르사시대: 주전1960-1830년
입비신을 폐위시킨 아모리족속은 한 무리는 마리 출신의 이스비 이라의 영도하에 이신에서 통치했다. 라르사 에서도 이신과 같은 10명의 왕이 세워졌다. 이신의 5대왕인 리핏 이스탈은 최초의 법전 우르남부 법전을 집대성하였다. rimsin에게 멸망 rimsin은 바벨론에게 정복당함
2.고대 바벨론시대: 주전1830-1530.
사붐을 거쳐서 함무라비가 왕이됨 라르사를 정복하고 함무라비는 우르남부법전과 리핏 이스탈 법전을 포함하는 함무라비법전을 집대성하였다. 모세의 법전보다 먼저였지만 명령형으로 되어있는 모세의 법전과는 다르다. 노예의 인권보호를 중요시하고 있었고 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값을 치루고 신부를 데려왔고 신부는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 아내는 이혼을 할 수 있었고 이혼 후에는 친정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결혼은 문서로 된것만 유효.
3.고대 앗수르 왕국 :주전1950-1677년
200년 어간 .아카드시대 사르곤 왕국의 속국으로 통합되었다가 1950년에 우르의 3왕조가 멸망당하자 독립. 일루수마를 첮왕으로 출발.
마리왕국: 주전.1695년.
약기들림 야스마-아닷 1732-1715년. 60평방킬로가 넘는 왕궁을 마리에 건립.
4.힛타이왕국 주전: 1800-1200년.
성경의 햇족속으로 명명됨. 아니타스 치하에서 히타이트족이 주전2000년경 통일왕국을 형성. 호리족속.주전3000중엽-1350.년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지방에 주로 거주했던 샘족계통의 인종으로서 미타니왕국의 지배적인 인종. 미타니왕국의 수도는 하란. 유프라테스 중류계곡을 중심으로 형성. 앗수르를 지배하기도 함. 카시트왕국 : 주전1530.-1150. 바벨론의 함무라비 후계자들이 약해지고 무능해진 틈을 타서 메소포타미아북서쪽에 왕국을 세움. 앗수르가 연약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가 바벨론왕조를 다시 일으킨 엘람족에의하여 1155년 멸망을 고함. 바벨론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신 앞에서 도덕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5.중간앗수르: 주전 1356-932년
호리족속의 미타니왕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앗수르 왕국은 미타니의 혼란기를 틈타서 왕국을 제건. 앗수르 최초의왕 우발릿1세. 바벨론을 침략, 살만에셀1세 때 미타니의 반란을 진압 1128년 토착민이었던 느부갓네살 1세가 일어나 카시트왕조를 무너트리고 토착바벨론 왕국을 제건함. 디글랏빌레셀1세. 1116-1078에 등장하여 앗수르의 군사력을 절정에 이르게 하고 무자비한 살인군대를 형성한다. 침략과 정복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정복한 거민들을 먹여살리며 인구가 늘어 가지만 정복할 곳이 없자 자멸을 하게 되었던 앗수루.
6.새 앗수르의 제국 : 주전932-612년
주전 932년에 앗수르-단2세가 즉위하면서 앗수르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살아났다. 단의 앗수르에 이르러 앗수르 제국은 전성기에 들어섰다. 서쪽으로는 소아시아까지. 동남쪽으로는 바벨론을 침공하여 평화조약을 체결. 앗수르의 왕들은 온 우주의 왕으로서 경배를 받고자 하는 교만을 보여주었으며. 무자비하게 적들을 학살했다. 도시를 불태우고 반항하는 적들을 산 채로 껍질을 벗기고 목을 자르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은 끌고 가거나 불 태워 버렸다.(영화 아포칼리포와 유사한 내용) 이런 잔인한 행위는 우레의 신인 앗수르 신에게 드리는 예배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앗수르의 왕권이 악화될 기미만 보이면 소국들이 끓임없는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앗수르의 군대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고 전쟁비용으로 국가자원을 탕신 하여 자멸을 하게 된다. 살만에셀3세는(858-824)은 생존을 위하여 정복을 계속하고 정복에서 얻은 물자에 명맥을 이어가는 정치를 하였고 바벨론까지 정복한다. 앗수르내에서 형제의 왕권다툼이 벌어지고 앗수르바니팔이 죽은 후 앗수르는 엄청난 전비를 충당하지 못하고 항복해온 사람들을 먹여 살릴 힘도 없었다. 이사이에 바벨론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을 당하고 메데와 갈대아연합군이 힘을 규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고 바벨론도 앗수르를 공격했다. 앗수르는 애굽과 연합하여 대항을 하였지만 패전을 하고 앗수르는 종말을 고했다.(612년)
7.새바벨론제국(주전625-539)
나보폴라살의 등장으로 새바벨론제국이 등장한다. 앗수르보다 힘이 약했던 바벨론은 군사력보다는 외교력으로 제국을 유지한다. 메데와 조약을 맺고 북부메소포타미아지배를 허용하고 중부바벨론과 수리아지방을 통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605년에는 애굽까지 정복을 하고 바벨론의 무너진 신전과 성벽을 재건하였다. 주전501년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여호야긴 왕과 그의 모친을 인질로 끌고 가고 왕으로는 시드기야를 세웠다. 9년 후 시드기야가 애굽의 바로 호프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멸망을 시키고 주전586년에 유다왕국은 종말을 고하고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처형을 당하는 것을 본 후에 장님이 되어 느브갓넷살에게 끌려갔다. 아벨 마르둑이 왕이 되었을 때(561-560)여호야긴 왕을 특사로 풀어주었다. 이후에 유다는 바벨론의 한 지방처럼 되어 버렸다. 애굽의 지지를 받던 두로는 13년을 방황하다가 멸망을 당했다. 고레스의 영도아래 페르시아의 세력이 점점 증대하고 있었고 페르시아가 동쪽 통상로를 차단하자 바벨론은 서쪽과 남쪽으로 통상을 확대해야 했다. 나보니두스가 신년축제에 참여하기를 소홀히 하자 백성들이 등을 돌렸고 티그리스강 동편에 있던 구티움영토를 다스리던 구바루가 고레스와 합쳐버렸다. 구바루군과 나보니두스군이 싸우게 되었고 이틀 후에 페르샤군이 싸움도 하지 않고 승리하여 주전539년10월29일에 고레스는 바벨론에 해방자로 환영을 받으면서 바벨론에 입성했다.
8.애굽의 역사
애굽왕조는 주전3000년경에 시작되어 주전32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정복 될 때까지 30대가 계속되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 북부산악지역에서 살던 종족들이 아프리카 북동부 산악지대로 내려왔고 이들은 산악지대의 물이 마르고 사냥하는 들짐승만 으로는 식량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나일강변으로 내려 왔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주전3000년 경 한 가족이 애굽전체를 정복하는데 성공을 하고 이들은 나일강 하류멤피스에 도읍을 정한다. 주전2700년경에 제3왕조가 등장하면서 애굽의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고 이 무렵부터 피라 및 시대가 시작된다. 왕이 신으로 숭배되며 신정사회에서 왕의 아들들이 정부의 중요한 직책들을 맡았으며 왕과 왕자들이 사후 세계에서도 영원히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피라및이 건설되었다. 지방의 귀족들이 왕의 불멸을 불신하고 자신들의 독립된 무덤을 세우기 시작했다.
제6왕조 이후에 무력한 왕들이 등장하여 애굽전역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이전에는 장례식이 왕만이 누리는 특권이었으나 모든 귀족들의 권리가 되었고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을 때 오시리스 신이 될 것이며 영원한 행복에 들어갈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수리아는 애굽의 문화적지배권하에 있었으나 애굽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장악하시는 못했다. 제12왕조가 약화되자 셈족계통인 힉소스족이 무력으로 침략하여 애굽을 통치했다. (주전1720-1570)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 총리대신이 된 것이 이 시기인데, 애굽왕실이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셈족계통이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는 학자들이 있다. 나중에 힉소스 왕조가 몰락하고 애굽 본토 출신의 왕권이 들어서자 셈족 출신의 히브리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다시 살아나 박해가 시작되었다. 박해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미디안에 있던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야 했다. 힉소스 왕조는 삼각주를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테베스스로 부터는 공물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힉소스 왕조를 통하여 바알,호론, 레세프, 아스다롯, 아나스, 아세라, 신과 같은 가나안신들이 애굽에 소개되었다. 출애굽기 1장8절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아모세1세를 가르킨다.
힉소스왕조 말기에 테베스스의 왕인 카-모세(1580)가 새로운 전쟁무기들을 수입하여 힉소스 왕가를 삼각주까지 밀어내는데 성공을 하였다. 힉소스왕조에 의하여 외국 통치를 받아본 애굽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마음 속에 제국주의적인 애국주의 감정이 찾아 왔다. 새 왕이 등장한 후에 요셉의 주선으로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을 포함한 셈족들은 노예나 농노의 신분으로 전락한체 타니스에 남아 있었다. 애굽 안에서는 사회구조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제정일치 사회가 제국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문화되고 직업화되면서 제정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람세스 1세는 수도를 삼각주에 있는 라메세스로 옮기고 람세스 1세는 제국이 재건을 목표로 하여 수에즈 경계로부터 갈릴리의 산악지방까지 출정을 하여 반란을 일으킨 팔레스타인 군주들을 진압했다. 모세가 애국에서 태어나고 애국에 내려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왔던 때는 제 19왕조 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애굽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앗수르의 산헤립은 유다를 침공했을 때 유다가 애굽을 의지 하는 것은 부러진 갈대를 의지 하는 것과 같다고 설득했다.(사36:6)산헤림은 주전 700년에 팔레스틴에 있는 애굽군을 패퇴시키고 진군을 하다가 688년에 애굽변방에서 재앙을 만나서 더 이상 진군을 하지 못하게 된다.
호프라왕이 유다를 선동하여 함께 바벨론을 항거하였으나 오히려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주 원인이 되었다. 이후 골륙상전에 빠진 애굽은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했다. 주전525년에 애굽은 페르샤의 캄비세스의 손에 넘어갔고 다리우스1세가 애굽의 합법적인 왕이 되고자 선정을 베풀고 토착민 제자장들에게 신전을 건축하게 해주었다. 다리우스가 죽자 애굽의 반란이 있었지만 크세르크세스1세가 진압을 하고 341년까지 애굽은 페르샤의 지배하에 있었다. 주전333년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애굽으로 향했고 애굽에 있던 페르샤총독은 항복을 하고 주전332년 알렉산더는 애굽의 신들을 찾아가서 경의를 표하고 알렉산드리아라는 국제적인 대 도시를 세운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애굽에 존재하지 않던 세계적인 대 도시로서 헬라문화와 동방문화를 접목시킨 문화의 중심지였다. 알렉산더사후에 복중의 아들이 상속자였으나 이들은 원로 장군들의 손안에 있었다.
주전306년 제국은 분열되어서 애굽에는 프톨레미 장군이 등극을 하였고 프톨레미1세는 고대 애굽의 종교를 존중하고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뮤스 신전박물관을 세우고 특별한 학자들을 상주시켜서 사본연구와 비평을 하게 하였고 50만개의 두루마리를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모아 들였다. 내부문제로 격심한 집안 싸움을 하다가 약화된 프톨레미 왕조가 신흥세력인 로마에 지원을 호소한 이후에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어 버렸다. 약 한세기 정도 외교를 이용하여 애굽의 독립을 유지시켰던 크레오파트라가 시저와 안토니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애굽을 지키려 했으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패전을 하고 주전20년에 자결을 하고 애굽은 완전히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9.페르시아 제국의 역사
페르샤제국은 고레스의 시작이며 이스라엘의 해방이야기이다. 고레스의 부친은 캄비세스. 모친은 메데 왕국의 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전559년 고레스는 40세의 나이로 메데제국의 속국인 안산이라는 작은 나라를 상속받아서 통치를 하고 있었다. 당시 바벨론에는 나보니두스가 왕위에 있었고 자신의 취미생활에 도취되어서 바벨론제국의 국력을 약화시킨 상태였다. 주전550년에서 549년에 고레스는 메데에 반란을 일으키고 메데의 왕이 되어서 소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을 점령하여 군대만 관리하고 그 나라의 종교와 왕권은 그들에게 위임을 하는 관대한 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낙타를 적군의 말들에게 보여서 말들이 도망을 가도록 하는 전법을 사용하기도 하며 세계를 정복해 나가는 고레스는 바벨론정복을 계획하게 되었고 당시의 바벨론은 벨사살의 통치아래서 바벨론의 독직과 악정이 반복되어 거의 기아상태로 전락한 상태였다.
느브갓네살의 유능한 장군이 고레스에게 투항을 하고 바벨론의 제사장들마저 왕에게 등을 돌린 것이 바벨론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벨사살은 죽게 되었고 바벨론 백성들에게 해방자라는 칭송을 받으며 입성을한 고레스는 바벨론에 대하여도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앗수르의 정책과는 달리 고레스는 주민들을 추방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포로로 고향을 떠나오게된 실향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고레스의 관대한 정책은 인도주의 적인 발상이었다기 보다는 페르샤의 정복정책에 협력을 하도록 하는 고도의 정치적전략 이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러한 전략으로 고레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에 필적하는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있는 페니키아의 협력을 얻어냈다. 고레스의 포로민귀환 정책은 유대인에게도 적용되었고 바벨론포로로 잡혀온 유대인 포로중에는 바벨론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니엘서나 에스더서의 이야기나 페르샤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헤미야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고레스는 유대의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한 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성전 제건을 허용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 또한 바벨론과 애굽 그리고 예루살렘의 위치 와 페르시아의 위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도를 보면 고레스의 통찰력 있는 군사정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약 오만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 바벨론의 포로가 아닌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사는 것이 귀환을 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 보다 안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귀환자들의 통솔은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에게 위임이 되었다. 즉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통치아래서 바벨론의 정치적 직위를 담당할 수 있었던 환경이 주어졌던 환경이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마리아 인들은 페르샤 왕국에 뇌물을 주고 자신들을 동참시켜주지 않는 성전건축을 중단 하도록 방해를 하였고 이들의 작전이 성공하여 성전건축은 18년 동안이나 중단이 되었다. 고레스는 애굽정복을 부친의 이름과 같은 아들 캄비세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쪽 국경에서 일어난 유목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섰다.
이 전토에서 고레스는 부상을 입고 사망을 했다. 고레스는 페르샤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고 메소포타미아 ,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이스, 인디아의 각 문명들을 종합하려는 노력을 했었고 정복민들에게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았다. 캄비세스가 왕이 된지 4년만에 애굽정벌에 나섰다. 캄비세스는 애굽의 바로로 등극을 하고 자신이 태양신 레의 아들임을 발표했다. 캄비세스는 애굽의 서부인 암몬의 서부인 오아시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5만명의 대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대는 사막에서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는데 아마도 모래폭풍에 집어삼켜 졌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추정이 압도적인 견해이다. 캄비세스는 에디오피아 원정에도 나섰는데 진군도중 식량이 동이 나서 철수를 해야 했다. 이사이에 본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간질병으로 고생을 하던 캄비세스는 말년에 정신이상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그가 아버지 고레스와는 달리 애굽의 종교와 문명을 탄압하고 난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인지 마상의 부상때문인지 죽었지만 그의 충성스런 부하들은 반란을 한 새 왕(가마우타)을 체포해서 처형을 하였다. 캄비세스의 뒤를 이어 다리우스가 왕이 되었고 다리우스는 페르샤의 일곱 귀족이 연합을 하여 반란으로 왕위를 차지한 가마우타를 제거하고 일곱귀족들은 태양이 떴을 때 가장 처음에 우는 말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였는데 다리우스의 마부가 다리우스의 말을 먼저 울게 하여 다리우스에게 왕위가 주어졌다고 한다.
다리우스는 두달만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 왕위를 굳혔다. 다리우스는 반역자들에 대하여 코와 귀와 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족쇄를 채워 왕실법정에 두는 잔인한 형벌을 내림으로서 반역에 대하여 경고했다. 다리우스는 거대한 비문을(베히스툰)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비문은 한 개의 길이가 18미터에 달하며 고대 페르샤어, 고대 바벨론, 엘람어, 등으로 쓰여 있다고 한다. 다리우스 제2년에 중단 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하에 재개되었다. 유대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페르샤총독 닷드네에게 유대인들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을 했다. 닷드내는 반역의 기미만 있으면 처벌하려고 현장을 방문하여 질문을 했다.(스5:3)“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 이 질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고래스의 명령이 있었음을 말하고 조사를 원했다. 조사를 진행한 다리우스는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고 성전재건을 막지말고 오히려 왕의 재산 중에서 경비지원을 하도록 지시를 했다.
다리우스는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으나 일곱귀족에 의하여 제약을 받기도 하였고 여섯 귀족은 거대한 땅을 하사 받았으며 왕이 왕가 출신이 아닌 여자와 결혼을 할 시에는 여섯 귀족의 딸들과만 결혼이 허락되었다. 법에 관한 일은 일곱재판장이 함께 협의를 하여야 했고 왕 자신이 내린 명령은 자신도 어길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다리우스의 신하들은 다니엘을 잡기 위하여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다리우스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 어인을 찍어서 변개치 못하는 규례를 만들었다. 다리우스가 마게토니아를 얻은 사건은 오리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고 다리우스는 마라톤전투에서 아테네군과 접전을 벌여 대패를 했다. 이 때 애굽은 노골적으로 다리우스에게 반기를 들었고 애굽의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다리우스는 사망했다. 다리우스가 건축한 페르세폴리스의 왕궁은 위대한 고대 건축물중의 하나다. 성경의 아하수에로왕으로 알려진 크세르크스가 35세의 나이로 다리우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주전486-465) 이 때 바벨론과 애굽의 반란들이 지속되었었다. 이 러한 상항들을 종식시킨 크세르크스는 그리스정벌을 다시 시작하였고 내부의 밀고자와 폭풍우등의로 많은 고초를 격으며 아테네까지 입성하여 신전을 불태우기 까지 하지만 살라미스에서 페르샤해군의 절반도 안 되는 그리스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그리스군은 그리스의 도시들이 페르샤에 의해서 불타는 광경들을 보며 사생결단으로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었다.
패전후 크세르크세스는 14년간 통치를 하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을 당했다. 정숙한 왕비 와스디를 폐위 시키고 잔치를 벌이면 6개월간 지속하는 한량이기도 했던 크세르크스는 조로아스타 교도였고 허식에 빠져서 과시를 좋아했고 아첨하는 신하들의 밀고에 민감했다고 전해진다. 즉위 20년 만에 그의 영화는 셋째아들에게 암살을 당하므로 막을 내린 것이었다. 뒤를 이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닥)가 왕위를 이었고 이 무렵 에스라가 유대인을 다시 유다로 귀환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고 에스라는 유대인 1500명을 모아서 일곱달에 걸친 긴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 유대인의 잡혼문제 때문에 총회를 연다. 그리고 성전보수를 계획하였지만 또 다시 유대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중지되고 이 때 느헤미야가 술 맡은 관운장으로서 청원을 하여 휴가를 얻어 성전보수작업을 마친다. 수산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다시 잡혼문제와 율법준수가 이행 되지 않는 것을 놓고 고민을 하던 끝에 유대자녀들이 이방인 어머니의 방언을 하게 되는 문제들을 방관 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신앙생활을 개혁하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는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모든 형제자매들을 살해하고 애굽반란에 동조했던 시돈을 불태우고 애굽을 다시 정복한 뒤 그리스와의 일전을 벌인다. 아테네가 페르샤와 동맹을 체결하자 마게도냐의 왕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이를 적대행위로 보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다. (주전 338) 주전336년에 는12:22의 다리오와 동일한 인물인 다리우스3세가 사촌과 숙부를 살해한 바고아스를 독살해 버리고 같은 해 알렉산더가 마게도냐의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명대로 페르샤를 쳐서 2년 후 페르샤의 중심부를 점령한다. 다리우스 3세는 피신처에서 사촌에게 살해를 당하고 그가 죽으면서 페르샤 제국은 멸망을 당한다. 페르샤시대의 유대인의 근황은 사마리아인, 엘레판틴의 유대인, 회당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확인 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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