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저녁예배] 감정보다 믿음에 우선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자 / 감정보다 믿음에 우선하라
본문 / 열왕기상 19:1~8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우리의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 감정의 영역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 우리의 행불행(幸不幸)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감정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 세대에서는 감정이 무시되었습니다. 감정을 표출하는 데 문화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울지 못하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큰 소리로 웃지 못하게 하며 감정을 억압시켰습니다.
과거에는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참아야 했습니다. 외로워도 참았습니다.
한국 문화 속에는 참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병(火病)이 되었습니다. 화병은 세계에서 통용되는, 한국인의 병을 가리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만 있는 병입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병이 됩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억압하고 무시합니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그것이 암이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감정이 순화(純化)되어야 합니다.
감정은 중요한 것입니다. 감정의 영역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감정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감정이 죽으면, 사람은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감정에서 오는 것입니다. 감정이 살아있어야 모든 것이 생동감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이 건강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생동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줄 압니다. 좋은 것을 좋다, 좋지 않은 것은 좋지 않다고 표현할 줄 압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 점점 사라집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것을 ‘포커페이스(poker face)’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표현하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박장대소하는 등의 모든 것이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애하고 사귐이 깊어지려면, 감정적 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을 너무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감정 때문에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정의 요소를 잘못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 전체가 무너집니다.
감정에 빠져 살다 보면, 감정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면서 삶의 위기를 맡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감정의 문제에 구멍이 생기고, 감정이 깨어지면, 감정의 영향력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큰 사고가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의지보다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느낌(feeling)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설화법(直說話法)을 사용하여 말합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느낌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느낌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면,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오늘날 감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초래되는 위험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무엇보다 감정이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의 대전투에서 승리한 전사(戰士)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냥 선지자가 아닙니다. 대선지자입니다.
그는 어둡고 불의한 시대와 맞서서 하나님 편의 선두에 서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850명을 홀로 상대했던, 강성(强性)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그 엘리야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우울해진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자살충동을 느꼈습니다. 자살할 수 있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간단하게 다룰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엘리야,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대선지자였습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승리했던 전사였습니다.
그런데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라면,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살하지는 못하고, “하나님, 데려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간 것을 의미합니다. 감정이 곤두박질친 상태입니다. 절망의 상태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갈 데까지 간 것 아닙니까. 더 이상 갈 곳이 있겠습니까.
기막힌 승리를 거둔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交感)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뜨겁게 경험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영역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가 영적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영적 침체(depression)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감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모든 것이 싫습니다.
감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영향을 준 것은 감정적 요소입니다. 감정을 잘못 다루면, 감정이 우리의 삶 전체를 뒤집어놓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습니다. 그 상태로 내버려두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감정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묘한 것입니다. 어떤 감정에 휩쓸리면,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심장, 신장 등의 기관이 아플 때, 약을 먹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감정의 문제는 약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이 오르고, 밥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최악의 상태에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것이 감정의 영역입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중심에 놓이는 순간, 삶은 불행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삶은 위태로워집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앞에 와있게 됩니다. 우선됩니다. 감정이 나를 이끌고 갑니다. 감정이 나를 주도합니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사로잡아버리면, 감정이 나를 어떤 지경에 빠지게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감정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가에 매우 민감합니다. 자신이 지금 즐거운지, 외로운지, 슬픈가에 매우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상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면,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게 됩니다.
우리는 감정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충동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의 말 “내일 너를 죽이겠다.”는 한 마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갑자기 곤두박질쳤습니다.
그에게서 강력한 전사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승리했던 선지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갑자기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길르앗에서,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입니다. 그는 전사 중의 전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과 기적을 한두 번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엘리야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고,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하고, 온갖 훈련을 받았다 할지라도 엘리야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뒷부분에 보면, 야고보는 엘리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기록했습니다(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정상에서 850대 1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위대한 역사는 엘리야 자신의 인간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력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주목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갈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시선을 놓치고, 지금 일어난 형편을 주목하고, 한 여인의 말이 비수에 꽂혔습니다. 그때 본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는 순간, 추락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 등의 직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했다 해도 내일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잘 했던 사람들 중에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상태에 몰두하는 순간, 갑자기 허망해집니다. 갑자기 낙심하게 됩니다. 갑자기 절망하고, 갑자기 울적해집니다.
화려한 무대가 끝나고, 커튼이 내려진 후, 무대 뒤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습니다. 자신을 묵상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비참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자기를 비하하는 감정에 빠집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빠지면, 감정이 무너집니다.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울적해집니다.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감정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감정은 변화무쌍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갖습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합니다. 감정이 파도를 탑니다.
바다를 보면, 파도가 없을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파도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다양한 파도가 다양한 모습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감정의 바다가 그렇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파도처럼 불안정합니다. 바다 물결에 밀려 요동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천의 얼굴을 갖습니다.
감정의 파도가 높이 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파도가 난폭해지면, 큰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파도에 자신이 휩싸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외로움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양합니다. 그런데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는 순간,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본래 쉽게 변하는 존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변하는 것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변하는 것 중에 가장 잘 변하는 것이 감정입니다. 감정보다 쉽게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에 의존한 삶을 믿을 수 있을까요? 감정의 영향을 잘 받는 기질을 가진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늘 불안정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불안정합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영역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자주 사고를 칩니다.
신자가 감정의 영역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자주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우울증 환자가 많습니다. 신자가 되었지만,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전의 기질이나 감정의 영역이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영역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위험한 상태에 빠질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삶을 살아갑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귀는 우리의 감정에 집중하라고,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라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지금 느끼는 것이 옳은 것이고, 전부라고 속입니다. 그것에 충실하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감정을 들끓게 합니다. 충동질합니다. 감정이 앞장서서 우리를 끌고 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감정에 끌려 다닌다면, 감정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감정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은 미래가 없습니다. 어디로 끌려갈지 알 수 없습니다.
감정에 빠지지 마세요. 감정에 몰입하지 마세요. 감정에 속지 마세요. 감정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도 습관입니다. 오래된 죄성에 의해 속박된 감정은 습관이 되고 기질이 됩니다.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환경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질입니다. 어두운 감정이 그 사람을 계속해서 지배했기 때문에, 감정을 다루지 않은 상태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두 번 은혜 받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화된 슬픔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음에도, 습관화된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울해집니다.
우울이 삶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자신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기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울한 기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울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감정적으로 침체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의 힘으로 감정을 해결하려 하면, 실패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기려고 하다가 오히려 참담한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두운 감정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외롭고 우울한 감정을 이기려고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를 만날 때에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외롭고 우울한 감정이 다시 찾아옵니다.
감정을 이겨보려고 나들이하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신나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다시 우울해집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동안에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즐거워지려고 노력할수록 실패합니다.
자신이 해결하려 할수록 자신의 상태가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불쌍하게 보이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둠의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울의 감정에서 기쁨의 감정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렇게 전환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무궁한 기쁨을 누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 우리는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감정이 여러분의 중심에 놓이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놓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좌소(座所)에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실 때, 우리의 삶의 감정을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고개를 돌리면, 놀라운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예수님께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려고 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깊이 빠져들 뿐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의 감정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웃고 싶다고 해서 웃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기쁨은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려고 하지 마세요. 감정에 집중하지 마세요. 때로는 외로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외로움의 감정에 매달려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관심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 더욱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전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주목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외로운 감정, 우울한 감정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행복과 즐거움 때문에 춤을 추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울할 틈이 없습니다.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즐거움과 행복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무한히 흘러넘칩니다.
기쁨이라는 단어 속에는 ‘충만’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그 속에는 우울함, 울적함, 답답함 등의 어두운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다운되고, 무엇인가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즉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곤경에 처하고 절망 속에 있을 때,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감정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을 때,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납니다.
우울증은 영적 태만으로부터 비롯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울증의 요인이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울증의 요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영적 태만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요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찾는 것에서 다른 것으로 시선을 옮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고통이 우울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둔 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 상태에 매우 예민하여 그 속에 빠져듭니다.
여러분의 감정 상태에서 빠져나와 그리스도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찾되 간절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가져야 할 처방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느낌이 대세입니다. 느낌이 강조되면, 감정이 왕이 됩니다. 감정이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느낌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이 중요합니다. 감정이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더 이상 약이 없습니다.
감정에 빠진 사람들은 사실 여부보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무게를 둡니다. 자신의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34편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34:8). 여기서 ‘맛본다’는 것을 감정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목사는 “맛보아 안다는 것은 어떤 느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험해보기 전에는 느낄 수 없다. 이것은 감정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맛보고 난 후,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시편 기자가 맛보아 안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진리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깨달을 때에 찾아오는 것이 기쁨입니다.
맛본다는 것을 체험에만 초점을 두면, 핵심을 놓쳐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관심의 초점은 진리에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깨달을 때에 오는 기쁨은 순간적으로 느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온몸이 전율하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말씀의 의미가 깨달아지고, 말씀이 영혼을 파고들어오는 것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체득함으로 느끼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다’라고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삶을 살면, 감정의 지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은 부분입니다.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것은 사실입니다. 진리입니다.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도 아닌데, 응답을 받지 못하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질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영적 거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느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은 느낌입니다. 자기 느낌입니다.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상황에 집중하다 보면,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는 상황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심한 모습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우리도 엘리야처럼 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처한 형편을 보니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니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이세벨의 독기어린 말이 그의 가슴에 꽂혔습니다. 외로워하고 있을 때에 영향력 있는 사람의 한 마디는 사람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당함의 근거는 우리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이나 모습에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믿음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감정의 지배를 벗어나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우울한 감정을 이겨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끌고 가야 합니다. 그때 생기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의 활기를 유지할 때, 강력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의 횡포에 시달립니다. 더 우울해집니다. 더 힘듭니다. 이겨내지 못합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울하면 술을 마십니다. 과할 정도로 운동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화가 나있습니다. 늘 우울해합니다.
살다 보면, 감정이 망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에 위로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소금을 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우리의 삶을 참 복잡합니다. 감정이 파도칠 때,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사고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망증이 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역사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점점 빠져 들어갑니다. 마침내 낙심합니다. 그는 진리가 아니라, 감정에 집중했습니다.
비가 와도 구름 위에는 태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이 없다고 느끼면, 태양이 없습니까? 태양이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힘든 순간에도 주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침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난에 대한 해석입니다. 자신의 처지로 인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어내어 자신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을 자기가 만들어내어 자기에게 일어난 고난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자기 스스로 공격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가라앉아있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정을 분석하지 마세요. 말씀을 묵상하고, 믿음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충만하여 여러분의 감정이 말씀의 지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가 여러분을 붙잡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라고 말했습니다(엡 6:14). 그러므로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를 둘러 무장해야 합니다.
허리띠를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단단히 매어야 합니다. 말씀을 놓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놓치면, 감정이 그 자리에 끼어듭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진리의 허리띠가 나를 붙들어주고, 나로 하여금 중심을 잡게 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진리가 느슨해지면, 감정이 밀고 들어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리스도에게서 시선을 떼게 되고 혼란스러워집니다. 그 지점에서 모두 추락하게 됩니다.
상황을 떠올리지 마세요. 말씀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파도치는, 여러분의 감정을 믿지 마세요. 요동치지 않는 진리를 믿으세요.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시선을 놓치면,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영적 시야가 흐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시선이 산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믿음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시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시선을 맞춥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여호와께로 얼굴을 돌립니다.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정은 어려운 상황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고, 어려운 상황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의지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지속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감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있게 하는 동안 말씀이 강화됩니다. 말씀이 강화될수록 감정의 파도는 잠들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오고,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염려, 우울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울증 환자들이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괴로워 술을 마시는 여 성도가 있었습니다. 의사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약물을 복용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말씀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회복되었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시편 42편 11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불안하십니까? 낙심 가운데 갇혀있습니까? 지쳤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까? 그 가운데 멈추어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가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문제 가운데 휩싸여 기분이 나쁘고, 짜증이 나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감정에 따라 춤추지 말고, 믿음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무엇을 느끼는가에 몰두하지 마시고,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집중하지 마세요. 믿고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환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감정도 안정감을 얻고, 믿음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회가 굉장히 불안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불안정한 것이 특징입니다. 굉장히 요동칩니다. 정치적으로도 변화가 많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합니다. 별 사건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자살 원인의 1위가 우울증입니다. 한국에서는 화병이 더 많습니다. 분노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뛰어내립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감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환경은 언제나 파도칩니다. 그 속에 우리의 감정을 던져놓으면, 감정이 어떤 파도가 되어 나를 삼켜버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의 감정을 지배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감정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순화되어야 합니다.
어둠의 감정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에게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오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신앙생활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객관적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쁨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대했던 엘리야,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연약한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도 보장되어있지 않습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감정에 집중하지 마시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사로잡히면, 진리가 나를 지배하고 통제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으로 인해 충만한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울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펴세요. 말씀을 들으세요.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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