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저녁예배] 감정보다 믿음에 우선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자 / 감정보다 믿음에 우선하라

본문 / 열왕기상 19:1~8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우리의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 감정의 영역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 우리의 행불행(幸不幸)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감정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 세대에서는 감정이 무시되었습니다. 감정을 표출하는 데 문화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울지 못하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큰 소리로 웃지 못하게 하며 감정을 억압시켰습니다.

과거에는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참아야 했습니다. 외로워도 참았습니다.
한국 문화 속에는 참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병(火病)이 되었습니다. 화병은 세계에서 통용되는, 한국인의 병을 가리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만 있는 병입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병이 됩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억압하고 무시합니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그것이 암이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감정이 순화(純化)되어야 합니다.

감정은 중요한 것입니다. 감정의 영역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감정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감정이 죽으면, 사람은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감정에서 오는 것입니다. 감정이 살아있어야 모든 것이 생동감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이 건강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생동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줄 압니다. 좋은 것을 좋다, 좋지 않은 것은 좋지 않다고 표현할 줄 압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 점점 사라집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것을 ‘포커페이스(poker face)’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표현하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박장대소하는 등의 모든 것이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애하고 사귐이 깊어지려면, 감정적 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을 너무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감정 때문에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정의 요소를 잘못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 전체가 무너집니다.
감정에 빠져 살다 보면, 감정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면서 삶의 위기를 맡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감정의 문제에 구멍이 생기고, 감정이 깨어지면, 감정의 영향력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큰 사고가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의지보다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느낌(feeling)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설화법(直說話法)을 사용하여 말합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느낌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느낌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면,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오늘날 감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초래되는 위험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무엇보다 감정이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의 대전투에서 승리한 전사(戰士)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냥 선지자가 아닙니다. 대선지자입니다.
그는 어둡고 불의한 시대와 맞서서 하나님 편의 선두에 서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850명을 홀로 상대했던, 강성(强性)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그 엘리야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우울해진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자살충동을 느꼈습니다. 자살할 수 있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간단하게 다룰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엘리야,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대선지자였습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승리했던 전사였습니다.
그런데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라면,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살하지는 못하고, “하나님, 데려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간 것을 의미합니다. 감정이 곤두박질친 상태입니다. 절망의 상태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갈 데까지 간 것 아닙니까. 더 이상 갈 곳이 있겠습니까.

기막힌 승리를 거둔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交感)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뜨겁게 경험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영역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가 영적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영적 침체(depression)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감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모든 것이 싫습니다.

감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영향을 준 것은 감정적 요소입니다. 감정을 잘못 다루면, 감정이 우리의 삶 전체를 뒤집어놓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습니다. 그 상태로 내버려두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감정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묘한 것입니다. 어떤 감정에 휩쓸리면,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심장, 신장 등의 기관이 아플 때, 약을 먹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감정의 문제는 약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이 오르고, 밥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최악의 상태에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것이 감정의 영역입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중심에 놓이는 순간, 삶은 불행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삶은 위태로워집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앞에 와있게 됩니다. 우선됩니다. 감정이 나를 이끌고 갑니다. 감정이 나를 주도합니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사로잡아버리면, 감정이 나를 어떤 지경에 빠지게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감정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가에 매우 민감합니다. 자신이 지금 즐거운지, 외로운지, 슬픈가에 매우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상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면,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게 됩니다.

우리는 감정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충동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의 말 “내일 너를 죽이겠다.”는 한 마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갑자기 곤두박질쳤습니다.
그에게서 강력한 전사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승리했던 선지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갑자기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길르앗에서,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입니다. 그는 전사 중의 전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과 기적을 한두 번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엘리야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고,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하고, 온갖 훈련을 받았다 할지라도 엘리야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뒷부분에 보면, 야고보는 엘리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기록했습니다(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정상에서 850대 1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위대한 역사는 엘리야 자신의 인간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력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주목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갈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시선을 놓치고, 지금 일어난 형편을 주목하고, 한 여인의 말이 비수에 꽂혔습니다. 그때 본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는 순간, 추락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 등의 직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했다 해도 내일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잘 했던 사람들 중에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상태에 몰두하는 순간, 갑자기 허망해집니다. 갑자기 낙심하게 됩니다. 갑자기 절망하고, 갑자기 울적해집니다.

화려한 무대가 끝나고, 커튼이 내려진 후, 무대 뒤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습니다. 자신을 묵상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비참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자기를 비하하는 감정에 빠집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빠지면, 감정이 무너집니다.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울적해집니다.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감정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감정은 변화무쌍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갖습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합니다. 감정이 파도를 탑니다.
바다를 보면, 파도가 없을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파도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다양한 파도가 다양한 모습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감정의 바다가 그렇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파도처럼 불안정합니다. 바다 물결에 밀려 요동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천의 얼굴을 갖습니다.

감정의 파도가 높이 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파도가 난폭해지면, 큰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파도에 자신이 휩싸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외로움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양합니다. 그런데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는 순간,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본래 쉽게 변하는 존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변하는 것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변하는 것 중에 가장 잘 변하는 것이 감정입니다. 감정보다 쉽게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에 의존한 삶을 믿을 수 있을까요? 감정의 영향을 잘 받는 기질을 가진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늘 불안정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불안정합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영역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자주 사고를 칩니다.

신자가 감정의 영역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자주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우울증 환자가 많습니다. 신자가 되었지만,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전의 기질이나 감정의 영역이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영역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위험한 상태에 빠질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삶을 살아갑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귀는 우리의 감정에 집중하라고,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라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지금 느끼는 것이 옳은 것이고, 전부라고 속입니다. 그것에 충실하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감정을 들끓게 합니다. 충동질합니다. 감정이 앞장서서 우리를 끌고 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감정에 끌려 다닌다면, 감정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감정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은 미래가 없습니다. 어디로 끌려갈지 알 수 없습니다.
감정에 빠지지 마세요. 감정에 몰입하지 마세요. 감정에 속지 마세요. 감정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도 습관입니다. 오래된 죄성에 의해 속박된 감정은 습관이 되고 기질이 됩니다.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환경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질입니다. 어두운 감정이 그 사람을 계속해서 지배했기 때문에, 감정을 다루지 않은 상태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두 번 은혜 받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화된 슬픔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음에도, 습관화된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울해집니다.
우울이 삶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자신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기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울한 기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울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감정적으로 침체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의 힘으로 감정을 해결하려 하면, 실패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기려고 하다가 오히려 참담한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두운 감정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외롭고 우울한 감정을 이기려고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를 만날 때에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외롭고 우울한 감정이 다시 찾아옵니다.
감정을 이겨보려고 나들이하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신나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다시 우울해집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동안에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즐거워지려고 노력할수록 실패합니다.
자신이 해결하려 할수록 자신의 상태가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불쌍하게 보이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둠의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울의 감정에서 기쁨의 감정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렇게 전환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무궁한 기쁨을 누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 우리는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감정이 여러분의 중심에 놓이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놓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좌소(座所)에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실 때, 우리의 삶의 감정을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고개를 돌리면, 놀라운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예수님께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려고 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깊이 빠져들 뿐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의 감정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웃고 싶다고 해서 웃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기쁨은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려고 하지 마세요. 감정에 집중하지 마세요. 때로는 외로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외로움의 감정에 매달려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관심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 더욱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전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주목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외로운 감정, 우울한 감정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행복과 즐거움 때문에 춤을 추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울할 틈이 없습니다.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즐거움과 행복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무한히 흘러넘칩니다.

기쁨이라는 단어 속에는 ‘충만’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그 속에는 우울함, 울적함, 답답함 등의 어두운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다운되고, 무엇인가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즉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곤경에 처하고 절망 속에 있을 때,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감정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을 때,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납니다.

우울증은 영적 태만으로부터 비롯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울증의 요인이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울증의 요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영적 태만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요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찾는 것에서 다른 것으로 시선을 옮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고통이 우울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둔 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 상태에 매우 예민하여 그 속에 빠져듭니다.
여러분의 감정 상태에서 빠져나와 그리스도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찾되 간절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가져야 할 처방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느낌이 대세입니다. 느낌이 강조되면, 감정이 왕이 됩니다. 감정이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느낌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이 중요합니다. 감정이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더 이상 약이 없습니다.
감정에 빠진 사람들은 사실 여부보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무게를 둡니다. 자신의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34편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34:8). 여기서 ‘맛본다’는 것을 감정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목사는 “맛보아 안다는 것은 어떤 느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험해보기 전에는 느낄 수 없다. 이것은 감정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맛보고 난 후,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시편 기자가 맛보아 안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진리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깨달을 때에 찾아오는 것이 기쁨입니다.

맛본다는 것을 체험에만 초점을 두면, 핵심을 놓쳐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관심의 초점은 진리에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깨달을 때에 오는 기쁨은 순간적으로 느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온몸이 전율하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말씀의 의미가 깨달아지고, 말씀이 영혼을 파고들어오는 것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체득함으로 느끼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다’라고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삶을 살면, 감정의 지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은 부분입니다.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것은 사실입니다. 진리입니다.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도 아닌데, 응답을 받지 못하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질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영적 거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느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은 느낌입니다. 자기 느낌입니다.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상황에 집중하다 보면,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는 상황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심한 모습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우리도 엘리야처럼 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처한 형편을 보니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니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이세벨의 독기어린 말이 그의 가슴에 꽂혔습니다. 외로워하고 있을 때에 영향력 있는 사람의 한 마디는 사람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당함의 근거는 우리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이나 모습에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믿음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감정의 지배를 벗어나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우울한 감정을 이겨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끌고 가야 합니다. 그때 생기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의 활기를 유지할 때, 강력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의 횡포에 시달립니다. 더 우울해집니다. 더 힘듭니다. 이겨내지 못합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울하면 술을 마십니다. 과할 정도로 운동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화가 나있습니다. 늘 우울해합니다.

살다 보면, 감정이 망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에 위로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소금을 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우리의 삶을 참 복잡합니다. 감정이 파도칠 때,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사고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망증이 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역사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점점 빠져 들어갑니다. 마침내 낙심합니다. 그는 진리가 아니라, 감정에 집중했습니다.

비가 와도 구름 위에는 태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이 없다고 느끼면, 태양이 없습니까? 태양이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힘든 순간에도 주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침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난에 대한 해석입니다. 자신의 처지로 인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어내어 자신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을 자기가 만들어내어 자기에게 일어난 고난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자기 스스로 공격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가라앉아있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정을 분석하지 마세요. 말씀을 묵상하고, 믿음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충만하여 여러분의 감정이 말씀의 지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가 여러분을 붙잡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라고 말했습니다(엡 6:14). 그러므로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를 둘러 무장해야 합니다.
허리띠를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단단히 매어야 합니다. 말씀을 놓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놓치면, 감정이 그 자리에 끼어듭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진리의 허리띠가 나를 붙들어주고, 나로 하여금 중심을 잡게 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진리가 느슨해지면, 감정이 밀고 들어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리스도에게서 시선을 떼게 되고 혼란스러워집니다. 그 지점에서 모두 추락하게 됩니다.

상황을 떠올리지 마세요. 말씀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파도치는, 여러분의 감정을 믿지 마세요. 요동치지 않는 진리를 믿으세요.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시선을 놓치면,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영적 시야가 흐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시선이 산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믿음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시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시선을 맞춥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여호와께로 얼굴을 돌립니다.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정은 어려운 상황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고, 어려운 상황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의지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지속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감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있게 하는 동안 말씀이 강화됩니다. 말씀이 강화될수록 감정의 파도는 잠들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오고,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염려, 우울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울증 환자들이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괴로워 술을 마시는 여 성도가 있었습니다. 의사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약물을 복용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말씀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회복되었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시편 42편 11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불안하십니까? 낙심 가운데 갇혀있습니까? 지쳤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까? 그 가운데 멈추어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가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문제 가운데 휩싸여 기분이 나쁘고, 짜증이 나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감정에 따라 춤추지 말고, 믿음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무엇을 느끼는가에 몰두하지 마시고,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집중하지 마세요. 믿고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환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감정도 안정감을 얻고, 믿음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회가 굉장히 불안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불안정한 것이 특징입니다. 굉장히 요동칩니다. 정치적으로도 변화가 많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합니다. 별 사건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자살 원인의 1위가 우울증입니다. 한국에서는 화병이 더 많습니다. 분노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뛰어내립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감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환경은 언제나 파도칩니다. 그 속에 우리의 감정을 던져놓으면, 감정이 어떤 파도가 되어 나를 삼켜버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의 감정을 지배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감정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순화되어야 합니다.

어둠의 감정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에게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오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신앙생활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객관적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쁨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대했던 엘리야,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연약한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도 보장되어있지 않습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감정에 집중하지 마시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사로잡히면, 진리가 나를 지배하고 통제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으로 인해 충만한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울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펴세요. 말씀을 들으세요.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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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본문 / 빌립보서 3: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 인생은 문제투성이입니다.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느라 세월을 보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생을 다 보내면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문제 속에 갇힙니다.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는 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제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에 도달해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에 매이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문제를 따라가지 말고, 목표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문제를 푸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기도하다 보면, 수세에 몰릴 수 있습니다. 문제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든 해결되지 않든 문제 속에 갇히게 됩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향해 기도하며 나아가다 보면, 문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늘 고민을 풀어놓고, 넋두리하듯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과녁이 정확해야 합니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떻게 필요한지 목표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를 정확하게 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방향이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문제로, 고민으로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문제에 휘말려버리고, 달려가야 할 목표를 놓쳐버리면, 문제 속에 갇혀서 문제를 풀다가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나중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삶의 방향을 놓쳐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기 원하시는지, 우리는 큰 그림(big picture)을 보아야 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좁고 작게 보지 말고, 크게 보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의 어디쯤 가고 있는가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어디쯤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푯대의 방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미완(未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영적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초신자가 아닙니다. 웬만큼 믿은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상당히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도입니다. 영적 성취를 맛보았던 사도입니다. 삼층천까지 경험한 사람입니다. 신비한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헌신에 있어서도 굉장한 수준에 이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영적 고지(高地)에 이른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세계와 사역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베테랑 산악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해발 5천m 이상 올라갔음에도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찍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어느 정도 받고 나면, 포만감(飽滿感)을 느낍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누려야 할 구원의 부요함을 이야기합니다. 미래에 천국에 갔을 때, 완성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구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미래에 우리가 가게 될 천국도 있지만, 이 땅에서 확장되어야 할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과 기쁨이 무궁무진하게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도 끝이 없습니다. 찬송가 304장에 보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세계를 향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에 더욱 목말라합니다. 좀 더 깊은 사랑을 원합니다. 갈망이 일어납니다.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 목마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성경을 대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대한 책도 읽었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린 아이가 손으로 물을 움켜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의 초입(初入)에서 찰랑거리는 정도만 경험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디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悔心)한 후에 굉장히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는 율법에 통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들어와서 율법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신서에 “달려가노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멈출 줄 모르는 열정을 서신서를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그는 질주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끝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해도 끝이 없습니다. 은혜의 바다에서 아무리 헤엄쳐도 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영적 세계 안에 깊이 들어가고 싶은 열망과 함께 성도들을 영적 세계 속으로 좀 더 깊이 끌어들이려는 갈망을 느낍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자신이 도달하지 못하면, 성도들을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세계가 있는데, 성도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놓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8).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세계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크다는 의미입니다. 완전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비록 연약하고 무력하고 속이 좁고 무너지고 깨어지고 시험에 들고 죄를 짓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는 높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속상한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 때문에 속상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 때문에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산과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자신은 영적 세계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달려가야 할 목표가 여전히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결론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경지에 이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었고, 양육 과정을 다 마쳤고, 봉사도 어느 정도 했다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만만한 사람과 비교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준을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는 한없이 부족한 자가 됩니다. 교회에서 양육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많은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너무 심오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영적 정상(頂上)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13~14).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있습니까? 영적 세계에서 안주(安住)는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어느 시점에 멈추어서 세월을 보내면 안 됩니다.
갈증이 일어나야 합니다. 간절함이 생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간,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만하고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바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바울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바울과 우리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도달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등정 길에서 수많은 능선을 넘으며 비경(秘境)을 맛본 사람은 더 오르려는 갈증을 느낍니다. 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고, 사모함이 일어나고, 갈증을 느낍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가 달려갑니까? 누가 멈추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숙제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착각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자신을 볼 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때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주님 앞에서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세계 안으로 들어간 후, 비쳐진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수록 은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집니다.
한없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면서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비쳐주시기를 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이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을 모르면, 착각하게 됩니다. 자신만만해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자신만만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힘을 믿고 목회할 때에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때 겸손해집니다.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 고통이 옵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했습니다(롬 7:24). 이것은 고통의 절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절규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상태로 인해 안타까워한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이 깊이 느껴지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런 고통이 찾아오면 처절해집니다. 갈 곳이 없어집니다.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지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만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면,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냥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달려간다고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연약함을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기 위해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발견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딘가에 도달한 것처럼 만족하거나 멈추어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복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가 적잖게 무거웠습니다. 심심찮게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다 보면, 자신은 부적격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죄가 수치(羞恥)로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 생활로 깊이 나아가려 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 하면, 자신의 과거의 부도덕한 삶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이전의 삶이 현재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전의 상처가 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아름답다고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수치스러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나쁜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 들은 것보다 욕들은 것이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은 수없이 들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의 욕을 들은 것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비극적인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성공한 기억보다 실패한 기억이 더 뚜렷합니다. 그것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과거를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뒤로 돌아갑니다.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만 감옥은 아닙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지 않은 경험과 실수를 계속 떠올리다 보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런데 불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을 삼켜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미래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등 끔찍한 일을 행했던 사울과 같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요, 포행자였던 자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자신을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과거의 어떤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워주시는 능력이 복음인 줄 믿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된 기록을 지워도 통신사를 통해 휴대폰을 처음 샀을 때의 기록을 다 복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과학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는 은혜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이 계속 반추(反芻)되고 복기(復棋)되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죄책감에 시달리며 과거로 도망쳐버리는 안타까운 삶을 사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움과 실수 때문에 굴을 파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보혈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義)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입니다. 뒤가 아니라, 앞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과거는 끝났습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덮이시기 바랍니다.

둘째,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현재에 집중하여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달려가노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계속해서 진행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변화와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경지로 나아가려면,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때부터 도태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됩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피카소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업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쇠퇴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삶도, 재능과 은사도 부지런히 달음질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쇠퇴해버립니다.

믿음의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앉아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삶 속에서 묵상할 때, 파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와 내 삶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상은 철학적이고 모호한 개념 덩어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살린 말씀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앞으로 치고 나아가는 사람의 기도에는 용맹함이 있습니다. 기도가 살아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음질치는 사람만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해 믿음의 행군을 하며 끊임없이 달음질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할 때에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열심히 해보세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행동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미래의 천국을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현실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말고 자라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는 쉬어서는 안 됩니다. 완주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한순간도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목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시선을 목표에 두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지만, 문제에 빠지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우여곡절이 있다 할지라도 마침내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표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한순간에 목표를 놓칩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은 산만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도록 우리를 흔들어놓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목표보다 현실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가 많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보지만, 낮게 나는 새는 먹이를 잘 먹습니다.
그러므로 먹이를 잘 잡으려면,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해버립니다.

해운대에서 오륙도까지 오가는 유람선이 있습니다. 유람선 옆에 항상 갈매기가 함께 날고 있습니다.
갈매기가 왜 유람선과 함께 나는지 아십니까?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서입니다. 갈매기는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 유람선 주위를 돕니다. 그래서 그 갈매기들은 더 높이 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현실의 유혹은 위험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에 시달리다 보면, 영적 성숙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영적 성숙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이 연마되는 일도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원숙해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서 어느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황당한 행동을 합니다. 말씀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아는 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체화(體化)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방향, 시선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푯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현실의 잡다한 문제들이 우리의 시선을 흐트러 놓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신앙은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과 시선을 놓쳐버리고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푯대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영적 성숙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달려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바라본 사람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목표지점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한 방향을 향해 질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시선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왜 삶이 복잡해집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한지 아십니까? 본질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삶이 유치해지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삶을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질에 집중하면, 삶이 심플해집니다.

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합니까? 기도와 묵상은 우리의 삶의 목표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탈선하지 않았는지, 시선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조준하며 달려가야 할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맞춰진 초점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왜 아이가 길을 잃어버립니까? 엄마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바둑판만 보고 있으면, 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으면, 비행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둑과 관련된 격언 중에 ‘반외팔목(盤外八目)’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둑판 안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데,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불안함이나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눈팔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에서 한눈팔지 말고, 푯대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집중력이 신앙의 관건입니다.

고난이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힘들어서 고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난 속에 파묻혀서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혼자 당하는 것 같습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은 모두 행복해보입니다. 나만 불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난에 파묻혀서 인생이 점점 죽어갑니다.

고난만 보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 너머에 계신 주님을 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나를 나답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면, 푯대가 보입니다.
푯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목표를 바꾸면, 습관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도, 그리스도는 끝없이 깊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복음의 빛을 발견하고, 너무 좋아 밤을 새워보았지만, 복음의 광채를 다 볼 수 없는 바울의 안타까움이 본문에 묻어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광채를 다 본다면, 우리의 눈을 멀게 됩니다. 우리는 한꺼번에 하나님을 다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좁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한꺼번에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건 속에서 푯대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다 보면,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스탠포드대의 졸업식 연설에서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인생을 만들며, 마침내 세계적인 신화를 창조한 애플사가 탄생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점들이 연결되어 오묘한 일들이 일어나 애플사가 탄생했습니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난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우리의 인생의 점들을 연결하셔서 우리를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거룩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하십니다.

살다 보면 아찔한 순간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을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생에 수많은 파도가 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입니다.
목표를 놓치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애쓰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의 세계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역사는 개인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야 합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까? 목표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를 완성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어렵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힘듭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틀린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완성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그 길만이 미래가 보장된 길인 줄 믿습니다.

쉬운 길을 찾지 마세요. 우리의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변화되게 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야 합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허물, 실수와 실패가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연약한 허물이 다 벗겨지고,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연약한 모습에 머물러있지 않고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 달음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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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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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저녁예배설교]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라
본문 / 사무엘상 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본문의 말씀은 어려울 수도 있고, 아주 쉬울 수도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이십니다. 제한이 전혀 없으신(unlimited)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한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접속(接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하나님과 떨어져 상관없이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접속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굉장한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것이 단절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다시 이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동선(動線)이 됩니다. 믿음이 강하면, 하나님과 강하게 접속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께 있는 능력과 지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무한한 자원들이 우리에게 흘러오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다양한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수원지의 물이 가정으로 오기까지 연결해주는 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관이 끊어졌거나 녹이 슬거나 막혀있으면, 물이 흘러올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와이파이(Wi-Fi)가 터지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곳에서는 인터넷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휴대폰이 발달되어있어서 어디서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연결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순간, 지구촌 어디와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고 싶은 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세계와 이어집니다.
연결된다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 최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보다 나은 접속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접속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지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삶은 한 순간에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연결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누구와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접속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흘려보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통로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접속된 곳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 됩니다. 하나님과 접속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아예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차이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연결하려고 해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신 상태가 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도 있고, 들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신 상태가 매우 양호한 사람입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 3장 1절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는 말씀이 거의 끊긴 상태였습니다.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 끊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자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송신(送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신(受信)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침묵하시면,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바로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기근 중의 기근은 말씀의 기근입니다. 가장 무서운 기근입니다.

아모스 8장 11~13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의 기근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있으면, 시대 전체가 어두움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일종의 재앙입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희귀하면, 영적으로 갈하여 쓰러집니다.

본문에 보면,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와 어린 사무엘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 지도자였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막에서는 밤에 등불을 켜서 아침까지 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밤임을 의미합니다.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3절 뒷부분에 보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2절의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는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야 할 것 같은데,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사무엘이 누워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직분이나 나이, 경륜과 상관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상태를 잘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과 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엘리 시대와 영적 상황이 비슷한 시대가 또 한 번 있었습니다. 엘리 시대에 영적 어두움이 있었던 것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직전에 영적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를 ‘하나님의 침묵기’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심각한 영적 접촉 불량이 일어난 시기에 하나님과의 최상의 접촉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를 가리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마 3:3).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出現)과 하나님의 새 시대를 여는 계시를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시대에 그 말씀을 송출(送出)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통로를 열어놓으셨습니다. 엘리 시대에는 어린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던 야인(野人)이었습니다. 멋진 성전 안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빈 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풀어놓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통로입니다. 누구를 통해 일하시는가, 누구에게 말씀을 흘려보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풀어놓을 자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접촉 상태가 양호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나 직분자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먼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도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나은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고 말씀의 능력으로 병이 나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 항상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들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시대 전체가 어두움에 휩싸여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제 엘리 시대는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와는 할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절연(絶緣)된 엘리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제 너와 일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너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끊어지면,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직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재앙에 가까운 일입니다. 기근 중의 기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결된 자와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결된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일어나는 곳이 역사의 주 무대가 됩니다.
우리가 평신도로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에 다니거나 무엇을 하든지 삶의 영역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엘리와 신약의 세례 요한을 대조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성전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서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엘리는 성전에서 살았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성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 세팅(setting)된 곳입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것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피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거룩하게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거창한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도권의 제사장이나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웃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소(聖所)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터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입니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으로 가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 제도나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이 성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는데,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긴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목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해박한 지식으로 성경을 꿰는 성경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목말랐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끊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궤변에 불과했습니다. 소음(騷音)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가슴이 탔습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없는 말씀으로 허기를 일시적으로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은 좋아지지만, 돌아서면 공허해졌습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이와 직분에 상관없습니다.

사무엘은 굉장히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직 성전에 대해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해 성전에서 일평생을 보낸 엘리는 성전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직분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엘리의 육신의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보면, 엘리는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넘어져서 죽었습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영은 자동적으로 어두워집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영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기능이 멈춘 것입니다.

엘리와 세례 요한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만 열심을 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만 열심을 내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포장되어있지만, 들여다 보면 자신의 일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엘리와 두 아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그것이 일이 되고, 일을 계속하다 보니 자신의 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경종(警鐘)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 답을 얻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잊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거창한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형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외치는 광야의 소리(voice)였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아실현과 성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의 삶을 요한복음에서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언제 짜증이 많이 납니까? 하나님께 대해 불평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왜 하나님께 불평합니까?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으실 때, 우리는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이 강화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계속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파수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인지 자신의 일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영광이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자아 중심적 삶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신하는 데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께 주장하고 싶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이기심이 굉장히 고질적입니다.

짜증이 많이 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화가 많이 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가장 민감하게 행동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자신과 연관된 것에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입니다. 자신과 연관되지 않은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거슬리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화를 내거나, 그리스도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엘라 골짜기의 다윗의 영성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족속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불쾌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소년 다윗 외에는 분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자아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임할 수 없습니다.
접속 불량이 일어납니다. 자아로 충만해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탐욕이 가득하여 자아 중심적이고, 세상의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삶에 하나님의 음성이 끊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매일 자신의 일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엘리도 제사장 업무로 바빴을 것입니다.
사실 제사장의 일은 굉장히 많습니다. 엘리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주님보다 일을 더 신경 썼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셔놓고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인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 자신이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망과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눅 10:40).

자아중심적인 사람과 일 중심적인 사람은 동일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아 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가해자로 생각합니다. 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마저도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 일, 자기 생각, 자기 계획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마르다는 온통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고 일했지만, 주님과 상관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모습은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사람이 매일 매일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가끔 주님을 생각할 뿐,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내기에는 매우 바쁩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습니다. 한나의 통절한 기도로 하나님께서는 영적 불임을 치유하시고, 사무엘을 말씀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무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흘려보낼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 있습니까?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영혼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오는, 영혼을 흔드는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흔들어 깨우십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듣는데, 영혼이 깨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에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속삭이듯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인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감합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에 어두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죄와 타락한 본성,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덮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임해야 합니다. 영혼을 관통해야 합니다. 심장의 폐부(肺腑)를 갈라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한다면, 그냥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양가 없는 농담을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으십니다.

저는 말씀사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신 것을 전합니다. 제게 임했던 말씀이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여 성도가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에게로 흘려보내는 말씀의 통로가 됩니다. 말씀이 흘러가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고, 부흥이 임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부터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엘리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엘리에게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반응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방 안에서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는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말씀이 임하면,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아이냐 어른이냐, 목사냐 평신도냐, 10년 믿은 사람인가 초신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들린다면, 놀라운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과 일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로로 사용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수신 상태가 좋다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수신 상태가 좋다는 것은 자아 중심적 삶을 버리고,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말씀이 홍해를 가릅니다. 그 말씀이 흘러나갈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에스겔서에서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어 일어난 것처럼. 절망 속에 있던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시고, 수많은 일꾼을 일으키는 역사가 말씀이 임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삶이 위험한 모험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모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것보다 확실한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한다면, 그것보다 위대하고, 그것보다 멋있는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 역사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가 삶의 전성기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반응했던 사무엘처럼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하나님,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게 말씀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왜 답답해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슬퍼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무능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혼란에 빠져있습니까? 왜 갈등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지금 암에 걸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열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은 재앙입니다. 기근입니다. 가장 위험한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가장 중요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이와 형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써나가셨습니다.
학력, 사회적 지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사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이 역사의 중심부입니다. 그곳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사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어머니의 서원에 의해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다시 반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여러분의 심령에서 흘러나온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것이 능력이 됩니다. 이것이 축복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엘리,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말씀이 끊어졌습니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 규율을 지키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열심을 낸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아 중심적 삶을 내려놓고, 철저히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십시오. 무슨 말씀에든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길이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가슴이 미여집니다. 통곡하게 됩니다.
말씀의 홍수시대이지만, 먹을 물이 없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말씀이 끊어진 시대입니다. 영적 어두움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찾지 마세요. 말씀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잡다한 소음과 같은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같은 말씀, 영혼에 빛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 능력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끼시며, 주의 말씀을 들을 귀를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엘리는 눈만 어두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도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말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가며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고도 남는, 존재를 흔들어놓는, 폭풍처럼 임하시는, 영혼을 뒤덮는, 생명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밀고 들어와 말씀 앞에 압도당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시작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십니다.
여러분 모두 그 일에 쓰임 받는 통로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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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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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좋은 신자는 갈망이 식지 않는다
본문 / 시편 34:8~10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행복한 순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 행복을 느낍니다.

본문에 보면,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간결하면서도 멋지게 묘사했습니다.
신앙은 맛보는 것입니다. 맛보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맛본다, 얼마나 실제적인 표현입니까. 느낌이 와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 아닙니다. 사상도 아닙니다. 애매모호한 사설(私說)을 늘어놓는 것도 아닙니다.
‘맛본다’는 단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맛본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입니다. 맛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먹고 맛을 느끼는 순간, 행복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입맛이 살아있습니다. 아무리 아픈 사람이라도 입맛이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입맛이 곧 살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맛을 볼 때에 혀의 기능이 중요합니다. 혀는 맛을 분별합니다. 좋지 않은 것을 계속해서 먹으면, 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맛만 좋은 것을 계속 먹으면, 성인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유해(有害) 식품이 많습니다.

우울증과 먹는 것과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한 보고가 있습니다. 호주의 멜버른대학교에서 10년 동안 1천 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가공하거나 기름에 튀긴 음식,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 등 서구식 식단을 섭취한 여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50%나 높다고 합니다.
반면, 채소나 과일, 잡곡, 생선을 먹은 사람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에 걸릴 확률이 30% 낮다고 합니다.
정크푸드(junkfood)는 일시적으로 기분을 상승시켜주고,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증가시켜주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불만과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우선은 좋지만, 나중에는 힘들어집니다.
어떤 맛에 길들여지느냐, 어떤 맛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맛을 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맛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 맛을 들여가는 것입니다. 신앙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영적 세계의 깊은 맛을 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맛을 아는 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맛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직 신앙이 깊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하는데, 옆에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맛을 아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맛을 찾습니다. 참맛을 알기 때문에 맛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맛을 모르면, 다른 것을 찾아다닙니다. 딴 데를 기웃거립니다.

신앙세계에서 최고의 맛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선하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정(climax)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것은 신앙의 노른자입니다.

맛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맛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맛을 본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맛본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혀를 통해 맛을 느끼지만, 뇌에서부터 만족을 느낍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영혼 깊숙이 감동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혀끝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 사람들은 탄성(歎聲)을 지릅니다. 너무 좋으면 온몸을 흔들리고 합니다.

사실 식욕을 일으키는 것은 입이 아니라 뇌입니다. 배는 부른데, 음식이 계속 당기는 것은 뇌의 작용 때문입니다.
맛을 보고 알게 된 것은 잊을 수 없습니다. 깊이 각인됩니다. 경험하고 난 후에 아는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은 매우 다릅니다.

여러분의 신앙세계를 잘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경험해서 아는 것이 쌓여가고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쌓여가고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쌓여가는 것과 경험을 통한 지식이 쌓여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혀 다른 길입니다.
맛을 보고 나면, 그 후에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맛을 보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듯 말 듯 합니다. 그러나 경험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명한 식당에 갔다 온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뛰어난 셰프(chef)가 만든 요리를 먹고 와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먹으면서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식당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습니다.
김치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김치의 맛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김치 냄새라도 맡아보았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김치를 본 적도 없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김치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직접 먹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것은 김치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김치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오묘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만큼 압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맛보는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닷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친 자들에 대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와서 나의 사랑을 먹으라”, “나의 용서를 먹으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용서가 무엇인지 공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용서에 대해 강연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온몸으로 용서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들은 도망가고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들을 용서한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전율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조반을 맛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주님의 성품은 제자들의 온몸을 감싸고, 그들의 영혼까지 흔들어놓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먹는 행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먹으면 음식이 위장으로 들어갑니다. 위장에 들어간 음식이 소화되면서 영양소로 분해됩니다.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흘러갑니다.
마지막 만찬은 하나의 의식(儀式)이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가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기막힌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한 이론가가 아닙니다. 심오한 진리를 알 듯 모를 듯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아서 먹으라”, “마시라”라고 말씀하시며,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는 것 이전에 맛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단순히 아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맛을 본 후에 알아야 합니다. 맛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늘 추상적으로 알 뿐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에는 ‘배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맛을 본 후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공부하는 것으로 여기지 마세요. 말씀을 배우셨으면, 그것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신앙의 추상화가 오늘날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 경험하지 못하고,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알 듯 모를 듯 모호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박이 인체와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문학적 소고(小考)’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고 합시다.
수박을 먹어본 사람 1천 명을 만나 수박을 먹어본 느낌과 먹고 난 후에 일어난 인체의 반응에 대해 조사하여 정리했습니다.
수박을 예리한 칼로 다양한 각도에서 잘라서 분석하여 두꺼운 논문을 썼다고 합시다. 다양한 기호와 도표가 첨부되고, 수박을 먹어본 사람들의 진술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논문을 쓴 장본인은 수박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수박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요? 이 사람은 수박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학자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는 뛰어난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목사가 있다는 것을 유럽에서는 신기한 일로 여깁니다. 성경 지리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특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맛을 보고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맛을 보고 아는 신앙의 세계로 진입하시기 바랍니다. 맛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의 맛을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의 맛이 어떻습니까? 기도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하나의 기도의 형태에 있어서도 기도의 깊이는 매우 다릅니다.
기도에 관련한 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에 대한 책은 다 명저(名著)입니다. 내용이 심오합니다. 최근에 출간된 팀 켈러(Timothy Keller) 목사가 쓴 〈기도(Prayer)〉도 명저입니다.
안식의 기도에 대한 내용만으로도 어마어마합니다. 묵상의 기도가 얼마나 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것처럼, 기도의 맛은 끝이 없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기도의 맛과 연관 있습니다.
기도의 맛을 경험한 사람은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가 당깁니다. 식욕이 당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관습에 따라 기도합니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지만, 기도의 맛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관습에 따라, 직분에 따라 의무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하면 시간이 갈수록 맛이 깊어집니다. 기도의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높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냥 말씀을 읽지 마시고,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의 맛을 느끼셔야 합니다. 말씀의 진미(眞味)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읽는다’는 표현보다는 ‘말씀을 맛본다’, ‘말씀을 먹는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말씀을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계 10:9).
시편 119편에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19:103).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을 사도 요한도 동일하게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몸속에서 소화되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흘러 근육이 되고, 뼈가 되고, 살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내 영혼에 힘이 솟고, 영적 근육이 생기고, 영적 에너지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영적 작용이 내 영혼 속에서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의 입에는 항상 무엇인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우물거립니다. 그것이 묵상입니다.
맛없는 것을 어떻게 계속 씹어 먹을 수 있겠습니까. 묵상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말씀의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펼치기만 해도 잠이 온다면, 그 사람은 아직 말씀의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말씀에는 음미할수록 맛이 있습니다. 끝없이 우러나오는 맛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빨아먹고 곱씹고 핥아먹어야 합니다.
이전에 여러 번 묵상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다시 묵상해보세요. 이전에 경험한 맛이 아닌,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 은혜를 받은 말씀이지만, 세월이 지나 다시 묵상하면, 또 다른 맛으로 다가옵니다.

시편 119편은 총 176절로,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절부터 176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을 보면, 말씀의 맛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시편 119편 103절에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19편 131절에 보면,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맛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시편 기자들은 말씀의 강력한 맛을 다양하게 묘사했습니다.

예배의 맛을 아십니까? 예배의 맛은 깊습니다. 공적 예배든, 삶에서 드리는 예배든 예배는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맛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기름 부으심(anointing)이 있고, 하나님과의 결합이 일어나는 순간에 압도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갈 때에 경험하는 즐거움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깊어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사람마다 경험하는 맛은 제각기 다릅니다. 맛의 강도(强度)와 질도 다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율하게 됩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기절할 것 같은 감격이 밀려옵니다. 예배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의 입술에서 “충분합니다(It's enough).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그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의 속삭임, 주님의 터치(touch), 주님의 안아주심, 주님의 호흡, 주님의 향기를 느껴야 합니다.
찬양할 때에 느낄 수도 있고, 기도할 때에 느낄 수도 있고, 묵상하는 가운데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혼자 앉아있는 동안에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온몸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의 깊은 맛을 경험하면, 세상의 것에 대한 욕망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 준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만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가 가장 최고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경험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은 맛을 안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세상을 압도하는 영적인 맛을 찾는다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와 복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배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매주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양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특히 보혈 찬송을 부르는 것이 매우 좋았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찬송을 부르면, 너무 행복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매우 행복했습니다. 기독교방송을 틀어놓고 귀에 갖다 대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회 장소가 아무리 멀어도 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강렬한 맛을 경험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맛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오직 그것만을 구합니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를 통해 깊은 은혜를 경험한 적이 많습니다.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압니다.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에는 압도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좋은 신앙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맛을 보았기 때문에 갈망이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은 상대적으로 점점 줄어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점점 깊어집니다. 그래서 쉽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진짜 맛을 경험한 사람은 그 맛을 다시 찾게 되어있습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은 초콜릿을 늘 찾습니다.
고강도(高强度)의 맛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맛에 이미 중독(addiction)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맛을 경험한 사람에게 갈망이 생깁니다. 진짜를 맛본 사람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과 대체(代替)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조곰탕집에서 우려내고 우려낸 국물을 먹은 사람이 다른 것을 먹으려 하겠습니까.

세상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고프면 밥을 찾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고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더 크고 강력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로잡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 갈망이 깊어져야 합니다. 맛을 찾는 영적 선호(選好)가 뚜렷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이 점점 더 강해져야 합니다.

저는 한때 콜라를 좋아했습니다. 심방을 가면, 성도들이 콜라를 내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콜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콜라를 아예 마시지 않습니다. 대신 탄산수(sparkling water)를 마십니다. 선호하는 것이 바뀐 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호하는 것이 바뀝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에 대해서는 시들해집니다. 하나로 집중하게 됩니다. 영적 세계에 맛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오는 진짜 맛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계속 먹으면 싫증납니다. 이것이 세상의 것이 가진 한계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전에는 미칠 것처럼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시큰둥해집니다. 예전에 집착하고 바보처럼 좇아 다녔던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것보다 강한 맛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좇아 다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끝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신비롭고 새롭기 때문입니다. 풍성하고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오늘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새로운 분이십니다.
10년, 20년, 30년, 50년 간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나님이 변함없이 새로운 분으로 느껴지십니까?

신앙생활의 적신호(赤信號)는 영적 입맛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영적 식욕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찬양을 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리가 그리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면, 영적 입맛이 사라진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젊은 사자와 여호와를 찾는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식욕이 왕성한 젊은 사자가 주린 상태로 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넓은 사막에 있다 하더라도 먹잇감을 찾을 때까지 돌아다니며 주린 상태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젊은 사자와 여호와를 찾는 자를 대조함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젊은 사자가 주린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갈망해야 함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구하고 또 구해야 합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난 후에 지은 시입니다. 매우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미친 체하며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비참한 세월을 보내며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아주 절박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만 절실하게 갈망하며 시편 34편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젊은 사자가 주린 것보다 더 주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너무 좋아서 교회에 나오는 것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것을 맛보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식욕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런 증세가 오늘날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신앙의 갈등이 일어납니까? 갈등이 일어나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산만(散漫)하게 합니다.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밥 먹기 전에 아이가 엄마 몰래 사탕을 먹고 나면 밥맛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밥을 열심히 먹지 않습니다.
오늘날 영적 유해 식품이 세상에 널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맛을 잃게 만듭니다. 예배의 참맛, 말씀의 참맛, 기도의 참맛을 잃고, 세상의 맛에 점점 빠져듭니다. 우리는 아차 하면 영적 삶을 놓치고, 세상의 너저분한 것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육욕(肉慾)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영적 식욕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보기에 좋고, 만족을 주는 것 같아도,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망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우선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입을 즐겁게 하는 것을 찾으면, 성인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에 좋은 것은 맛이 없습니다. 텁텁한 밥이 건강에 좋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갈망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영적 집중력을 흩뜨려 놓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여러분의 영적 입맛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결판납니다.
영적 입맛이 24시간 살아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기꺼이 반응하십니까? 늘 하나님을 사모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식지 않습니까?
세상의 것들로 배부른 자가 아니라, 평생 하나님으로 인해 배부른 자로, 하나님께 굶주린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기 원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즐거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적 식욕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언제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영적 입맛이 약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 구미(口味)가 당기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며 거기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영적 입맛이 살아있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영혼을 만족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잘 먹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면, 이 땅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거기서 힘이 납니다. 영적 입맛이 살아있으면 됩니다. 말씀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을 행복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 식욕이 떨어지면 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입맛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영적 입맛이 살아있으면,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합니다. 갈망합니다. 사모합니다. 배부를 때까지 물러서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늘 주린 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기 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또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채워지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소원은 사라질 것입니다. 기쁨의 극치(極致)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홀합니다. 거룩한 즐거움이 넘쳐흐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때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살맛이 날 것입니다.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좋은 것이 흘러나올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승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영적 입맛이 사라지지 않기를 원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예배에 대한 갈증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 전 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식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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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잘 듣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잘 듣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본문 / 요한계시록 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2~3). 이를 통해 말씀과 복이 연결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는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신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읽고, 듣고,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핵심은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혼란의 원인은 진리의 부재(不在)입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시대의 큰 특징입니다. 진리가 실종되었다고 말합니다.
느낌이 강조되고, 상황에 따라 이론이 바뀌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진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다닌다고, 예배에 참석했다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옵니다.
누가 신자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듣고 따라오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앙에서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잘 듣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 하십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사무엘 시대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왜 희귀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근원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무엘 시대에는 말씀이 희귀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없으면, 하늘이 닫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시대를 가리켜 ‘기근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서 기근인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풍성해도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그 시대는 기근의 시대입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다른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신앙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잘 듣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하기 이전에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열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듣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보면, 마리아는 듣는 것을 우선시했고, 마르다는 듣는 것보다 행동, 사역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원망 불평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귀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귀로 듣고 우리의 마음에 받습니다. 이것을 이해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에서 깨닫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깨닫는 단계의 다음은 순종입니다.
듣는다는 말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듣는다는 것이 아니라,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깨닫고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읽는 것, 듣는 것, 그리고 지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가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우리에게 밀고 들어옵니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첫째,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충 흘려듣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정보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듣지만 너무 많기 때문에 집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충 읽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둘째, 무관심입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기 때문에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다 반응하면 병납니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은 듣지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있지만 사실은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져야 온전히 들을 수 있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보화 시대의 특징입니다. 자기가 관심이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합니다. 들어도 깊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아는 것은 많지만, 가볍게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깊이가 없습니다.
돈이 되는 정보에만 귀 기울이고, 돈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려오는 수많은 정보에 무관심해져서 마침내 무지해집니다.
현대인들은 듣는 것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흘려듣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수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 뿐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 교회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설교만 골라 들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설교를 듣다 보면, 나중에는 설교를 음악 듣듯이 듣게 됩니다.
진리에 대해 깊이 경청(傾聽)하는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마치 음악을 듣듯이 듣고 지나가버립니다. 설교를 들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설교를 많이 듣지만, 가볍게 듣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하여, 진리를 소홀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은 듣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냥 듣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경청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듣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잘 듣지 못합니다.

믿음은 듣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듣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첫째, 들음을 통해 믿음이 자랍니다.
듣는 것을 통해 변화가 일어납니다. 듣는 것을 통해 우리 안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들어야 합니까? 듣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기독교는 스스로 도를 깨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철학의 명제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 우리의 생각보다 먼저 존재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우월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심오한 사상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것을 의존하여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세계 안에서 무엇인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 메아리만 칠 뿐입니다. 우리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思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啓示)의 종교’라고 합니다.
계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바깥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의(他意)에 의해 수여(受與)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합니다.
믿음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밖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어떻게 하시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낸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열심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무언가를 쥐어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열정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위로부터 부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하신 말씀을 내가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듣는 것입니다.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깥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게 지혜가 있어서 의미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셔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기도는 전투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주여 삼창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으면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초신자들은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별로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기도를 잘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은 말씀에 반응하기 때문에 기도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신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기도하려고 해도 하나님께 할 말이 없습니다. 들은 말씀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처음에 말을 배울 때에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을 마구 합니다. 그런데 엄마로부터 끊임없이 말을 들은 아이가 말을 잘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말을 별로 하지 않으면, 아이도 말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엄마들은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듣지 못하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을 통해 말씀을 듣지 못하면, 자아 중심적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고집이 세어집니다.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해왔기 때문에 자기 고집을 강화(强化)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아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일방통행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에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잘 듣지 않고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초입(初入)에서부터 듣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잘못 배워서 신앙생활의 틀이 잘못 잡히면, 잘못된 틀이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듣는 것이 훈련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잘 들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로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해도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자기가 하나님께 말하려 하고, 자기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화되면,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윤리성은 많이 떨어져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세계 교회 가운데 떨어집니다. 그래서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자신의 소리를 죽여야 합니다. 기도나 묵상의 핵심은 듣는 데에 있습니다. 듣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응답이 무엇입니까? 기도응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띄게 응답 받는 것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에 응답 받는 것을 별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응답 받았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온전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응답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자신이 찾고자 하는 말씀이나 자신이 원하는 말씀을 읽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었는데, 왜 순종할 수 없습니까? 말씀을 듣는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큐티를 오랫동안 하신 분들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큐티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본문을 여러 번 접하게 됩니다. 처음에 본문을 접했을 때에 줄을 그어놓은 말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순간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 안에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강한 필요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려우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지 못합니다.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으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꾸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꼬아버립니다.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순종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처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응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은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이 많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많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주일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의 욕망이 온전히 처리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에서 죄성이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우리의 환경 가운데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원하다, 갖다, 하다 이 세 가지 동사에 집중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탐하고 움켜쥐느라 안식을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듣기 위해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야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들리는 그때부터 신앙생활이 출발합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신앙생활은 불완전한 것이고, 앞길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그리고 말씀이 들린다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15, 눅 8:8).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7,11,17,29, 3:6,13,22).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듣는 것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대방이 말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곡해(曲解)하려고 합니다.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듣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듣고 또 듣는 가운데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많이 들어야 합니다. 많이 들을수록 좋습니다. 들음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를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聽從)하려는 자와 대화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라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것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소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 등에 시달립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남들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잘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많이 듣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소리를 많이 듣습니까? 사람들의 소리, 잡다한 소문, 인터넷 뉴스 등 어떤 것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요즘 사람들은 무언가를 듣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운전할 때에도 무언가를 듣습니다. 걸으면서도 무언가를 듣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소리를 단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목하고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들음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신앙은 깨어지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듣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듣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둘째, 들음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듣다 보면, 우리에게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가 들릴 때, 진리가 들렸다는 것이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깨달아지지 않으면, 단순히 정보(information)밖에 남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듣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를 흔들어놓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관통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체계와 관념을 흔들어놓습니다. 새로운 영적 질서를 세웁니다. 그래서 영혼에 빛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고민이 많아 복잡하고 어지럽고 정신없던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어둠의 세계에 빛이 임한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 빛이 임한 것입니다.
때로는 몸에도 이상 증세가 나타납니다. 몸에 열이 납니다. 특이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삶을 누르던 것들이 벗겨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가 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들이 벗겨지고, 어둠이 사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찌꺼기가 사라지면서 웅크리고 있던 것들이 기지개를 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신이 납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집니다.

아직 깨달음이 없다면, 말씀을 온전히 들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가 생깁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지혜가 생깁니다. 인생의 답을 얻게 됩니다.

잠언에 보면, 솔로몬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라고 말했습니다(잠 4:20).
듣고 깨달은 것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게 지혜로워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의 말씀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깨달음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식적으로 주워 담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혜’라는 말 속에는 ‘듣는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잘 듣는 사람은 지혜자입니다. 듣는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이 삶에서 지혜의 세계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세상의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신구약성경 66권은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원저자(原著者)는 한 분이시지만, 수많은 기록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지혜로 충만합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도 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망합니까?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생명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지혜의 근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을 읽고 깨닫는 가운데, 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생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생각하고, 책을 많이 읽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깨달으면,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시 1:2~3).

지혜가 없으면, 헛되고 미련한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삶을 청산하는 길은 지혜를 얻는 것이고,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듣는 것에서부터 옵니다. 잘 듣는 사람은 깨닫게 되어있습니다. 지혜를 얻게 되어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힘이 생깁니다. 깨닫는 것이 힘이 됩니다. 듣는 것이 모두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이 힘이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고, 설교를 많이 하지만, 제가 깨달은 말씀이 제 인생을 붙들고, 다른 말씀과 연결되어져서 제게 힘이 됩니다. 그것이 제게 힘입니다. 진리의 힘이 곧 깨달음의 힘입니다.

깨달음이 오기까지는 진리가 내 것이 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온전한 깨달음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놓습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에 힘이 됩니다.
깨달음이 많이 쌓인 사람을 우리는 고수(高手)라고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을 고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쌓이면, 강력한 인생이 됩니다. 깨달은 진리가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힘이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합니다.
깨달음이 주는 힘은 강력합니다. 삶의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깨달은 진리가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게 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기쁨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무엇에서 기쁨을 구하십니까? 진리를 통해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나이, 환경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기쁨은 진리를 통해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다른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우리의 영혼에서 기쁨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죽으나 사나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참된 진리를 알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기쁨과 같습니다. 뚜렷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무질서와 혼란을 한순간에 잠재울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들릴 때에 기쁨이 오고, 평화가 넘치게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을 순종으로 온전히 옮길 때에 우리가 들은 것이 완성됩니다.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종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온전하게 들은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청종하면 살리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설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디자인하신 것을 우리가 읽고,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듣는 것이고, 깨닫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아직 들은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복잡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의 내용 중에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성경은 어렵게 써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읽으면, 성경의 내용이 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자기만의 주석을 붙입니다. 자기 이론을 만들어냅니다. 말씀을 액면 그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좋은 신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는데 말씀대로 살고 싶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을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을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무감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선교사는 “나는 한 번도 희생해본 적이 없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했던 어떤 것도 의무감으로 힘들게 희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듣고 깨달은 후에 자연스럽게 순종으로 이어지는 삶을 통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통해 깨달음이 올 때에 우리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가진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기막힌 칭찬을 들은 사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어떠했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라고 칭찬하셨습니까?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8:8).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한 순종의 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눈에 백부장이 얼마나 예쁘게 보였을까요.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만을 바랐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믿을 때, 그 믿음은 경지에 오른 믿음입니다.

삶이 힘들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이 왜 귀합니까? 그것은 단순히 듣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움직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은 자의 태도입니다.
나에게 죽으라고 말씀하시면 죽을 것이고, 포기하라고 하시면 포기할 것이고,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이해(利害)와 상관없이, 내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순종했을 때에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옳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백부장의 한 마디의 말에는 믿음이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 내포되어있습니다. 여기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순종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순종하는 것은 쉽습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진리가 나의 영혼을 관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순종이 멀게 느껴집니다.
말씀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깊어집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외적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가 가장 위기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묵상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듣게 되고, 빨리 깨닫게 되고, 순종으로 옮기고 싶어집니다.
작은 음성에도 귀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음과 전쟁하고 있습니다. 소음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서 우리의 영혼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못하게 유혹하는 문화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소음과의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소음을 어떻게 차단하고 살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이 많습니다. 유튜브(Youtube)에서도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드나듭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1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집중력을 깨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가볍고 짜릿한 정보에만 익숙해져서 하나님의 진리 앞에 기다리지 못합니다.

소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차단기 역할을 합니다.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없습니다.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잡다한 것들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고,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우리의 집중력이 깨어져버립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보는 것을 조심하세요. 우리는 늘 무엇인가 보아야 하고, 무엇인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적 집중력을 얼마나 떨어뜨리는가를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감각을 소멸시키고, 영적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잡다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고 하고,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마세요. 범죄 기사(記事)들은 보지 마세요. 영혼에 해(害)가 됩니다. 그런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거룩한 무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영혼이 풍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차단 기능을 작동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신(交信)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의 영은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오염되기 쉽고,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자칫하면 어둠의 영이 우리 속에 밀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뜰을 관리해야 합니다. 영혼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오늘날 옥토는 어떤 곳일까요?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부터 보호받는 마음 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진다고 해서 그냥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준비된 영혼에 말씀이 뿌려질 때,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길이 열리고, 삶의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도우셔서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밝혀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나 성경을 읽을 때나 공부할 때나 언제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여, 깨닫게 하소서. 성령이여, 진리를 밝혀주소서. 성령이여, 도우소서. 진리를 열어주소서. 진리가 들리게 해주소서. 진리를 깨닫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과 시간을 가지면서 말씀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가지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 안에 꽉 차 있는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말씀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데, 내 안에 말씀이 별로 들어있지 않다면, 성령께서 난감하실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는 내가 아는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입을 여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순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말씀을 읽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제대로 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나는 안 되구나.’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연약합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씀 앞에 다시 서면,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 가운데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연약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순종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최종 승리는 하나님의 편에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비로소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이구나. 축복이구나. 생명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복이 됩니다. 실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상황이나 형편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므로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3장 10절에 보면, 사무엘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의 믿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듣고 있다면,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고 강해질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할 것이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인생을 당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따라가면, 당할 자가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모든 질서를 잡아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말씀이 가장 우선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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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풍성한 삶 가능한가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소비사회, 풍성한 삶 가능한가
본문 / 마태복음 6:24~3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합니다. 몇 주 전에 중독에 대해 설교한 바 있는데, 소비사회와 중독은 서로 통합니다.
소비사회가 중독을 낳았습니다. 소비사회에 빠져들어가면, 중독 상태가 됩니다. 소비하게 하는 문화 안에서 중독은 꽃을 피웁니다. 소비를 조장하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중독되기 쉽습니다.

소비사회에서는 소비하는 것이 미덕(美德)입니다. 사실 소비해야 경제가 움직입니다. 경제가 움직이려면, 소비해야 합니다.
월급을 받았다면,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써야 합니다.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월급을 받지만, 월급을 받는 이유는 열심히 소비하라는 것입니다. 소비해야 회사가 움직이고, 회사가 움직여야 경제가 움직이고, 경제가 움직여야 국가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소비사회에서 가장 나쁜 행위는 소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소비해야 세상이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소비하지 않으면, 경제가 멈추어버립니다.
때로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돈을 풀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돈을 쓰게 만듭니다. 돈이 회전되지 않으면, 경제가 막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국민들로 하여금 돈을 쓰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이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많은 것을 구입하고, 소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비사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돈을 벌면, 그 돈을 써야 할 곳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쓰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돈이 생기면, 돈을 써야 할 곳이 반드시 생깁니다.

광고가 강렬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때로는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광고에 노출됩니다.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거대한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합니다. 높은 빌딩에서 액정TV를 통해 화려하게 광고합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도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눈을 둘 곳이 없어 광고를 수없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외울 지경이 됩니다. 버스, 지하철, 택시, 심지어 전봇대에도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3천 번 이상 광고에 노출된다고 합니다. 무슨 재주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세뇌당하고 있습니다. 보험광고를 보면, 당장 가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건강과 관련된 상품광고를 보면, 그것을 구입하지 않으면, 병에 걸릴 것 같습니다.

소비사회는 우리에게 염려하도록 계속해서 다그칩니다. 세상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합니다. 좀 더 행복해지고, 안전한 삶을 살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를 좇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광고는 우리에게 ‘당신은 지금 충분하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합니다.

요즘 광고는 과시적 소비를 부추깁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려고 소비하게 합니다. 어떤 물건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불안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소비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구입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그러므로 소비사회에서는 만족이 불가능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가졌다 해도 더 좋은 것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비사회는 끝없이 비교하는 문화를 조장합니다. 나만 좋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억만장자라 해도 또 다른 억만장자를 따라잡으려면,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듭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요트(yacht)가 있습니다. 사우디 왕가(王家)에서 보유 중인 147m의 호화 요트가 있습니다. 요트가 147m라면, 요트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두바이 국왕(國王)이 그것보다 더 큰 160m의 요트를 제작 중이라고 합니다. 147m보다 13m 더 긴 요트를 제작 중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부호(富豪)가 그것보다 더 큰 요트를 제작 중인데, 길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길이를 공개하면, 누군가가 더 큰 것을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동독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나아졌습니다. 통일되기 전, 동독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통일 이후 서독에서 많이 나누어주고, 서로 왕래하면서 동독이 경제적으로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동독 사람들의 만족도는 이전보다 떨어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독 사람들과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취직했어도 동독은 공산권 속에 있었기 때문에 숙련공이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보니 임금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 이전보다는 많이 받지만, 서독 사람들과 비교되니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고, 갈수록 가난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필리핀의 빈민가를 돌면서 ‘어쩌면 이렇게 못 살 수 있나,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일행 중에 탈북한 자매가 있었는데, 이들에 비하면 북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절대 빈곤층이 있지만, 필리핀의 빈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방글라데시보다, 필리핀보다 행복지수가 낮습니다.

소비사회는 아무리 가져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늘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피곤합니다. 늘 무언가에 쫓깁니다. 염려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소비사회에 끌려다니다 보면, 아무리 벌어도 가난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궁핍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고성장시대에 있지 않습니다. 저성장시대에 있습니다. 고성장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시대에는 검은 돈도 있고, 눈먼 돈도 있고, 갑자기 떼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저성장시대입니다. 고속으로 성장할 때에는 갑자기 돈이 생기고, 부동산가도 폭등하는 등 별 일이 다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은 일부러 전세로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삶의 방식(pattern)이 과거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소비가 조장되어 마음껏 소비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우리의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한데, 본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상대적 빈곤을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가난하고, 궁핍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주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소비주의 사회에 기막힌 답을 제시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을 정확하게 가르쳐줍니다.
본문 31~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TV를 보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관련한 프로그램과 광고로 가득합니다. 세상은 여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에 올인(all in)합니다. 이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에만 관심을 두어도 끝이 없습니다. 그냥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먹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는 먹는 것이 기업 마케팅과 연결되어 우리에게 수많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소비에 대한 유혹은 끝없습니다. 소비를 따라가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방인들은 염려합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꽂혀있으면,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는 염려, 불안, 걱정, 두려움, 공포 등입니다.

우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이것은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오늘날과는 맞지 않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오늘날 우리의 삶의 괴리가 매우 큽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지만, 말씀을 적당히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입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강력한 소비문화가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버립니다.
소비문화로 뒤덮인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비교를 부추기며 우리 안에 있는 욕망에 불을 지르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2천 년 전의 말씀을 오늘 우리 안에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차보다 더 좋은 차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설교는 훌륭한데, 목사님은 현실을 이해하시지 못하시는 것 같아. 말씀은 좋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무리야.’라고 생각하며, 우리 마음대로 적용해버립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성경의 주석을 달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부록을 자기 스스로 만듭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않는 태도가 우리 안에 아주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주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본문의 말씀대로 지키면, 전혀 염려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굉음(轟音)을 울리며 여러분들을 흔들어놓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진리를 추구하려고 합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시대가 지나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믿습니다.
진리가 한 시대에는 멋지게 적용되고 타당한 원리였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또 다른 진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왜 믿겠습니까. 시대가 바뀌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수천 년이 흘러도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진리입니다.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절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수학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공식을 바꿉니까? 수학문제는 공식에 따라 풀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삶에 정확한 해답이 됩니다. 여기서 한 치도 물러서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적당히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미궁에 빠집니다. 가장 위험한 삶은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문화가 주는 메시지를 삶의 기준으로 삼지 마세요. 상황을 가지고 말씀을 해석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의 문화와 상황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상황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 합니다. 그것은 넌센스(nonsense)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은 2천 년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효(有效)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삶의 진리로 붙들면, 이방인과 같이 염려하지 않아도 멋지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어지면, 우리는 말씀을 고쳐서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야.’라고 생각하며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삶이 힘들어지고 어려워질수록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더 접근해야 하고, 더 집중해야 합니다. 힘들수록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꼬여있고,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있다면,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타협하며 적당히 애매모호하게 말씀을 붙잡았다면, 다시 확실하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문제로부터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상황에 밀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진리는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고, 무질서해지고, 혼란에 빠질 때, 우리를 건져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도 만족하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초점을 맞춘 삶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비주의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은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먹지 말라, 마시지 말라, 입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소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소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돈을 벌고, 돈을 써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지,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이 말씀은 사람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막의 수도사(修道士)가 될 수 없습니다.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금욕주의자가 된다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금욕주의자가 된다면,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특별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선순위를 강조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가 잡힌 삶입니다. 우선순위가 잡힐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삶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염려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에 집중할 때 염려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에 집착할 때, 마음이 깨어지면서 염려가 찾아옵니다. 여러 가지를 좇다 보면, 마음이 짓눌립니다. 마음이 짓눌리므로 염려가 찾아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생각은 반드시 염려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분명해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삶의 태도를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초점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두라는 의미입니다. 삶의 태도와 관점을 바꾸는 순간, 우리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소비중심의 문화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식주에 우리의 눈길을 두는 순간, 우리는 가난해지고, 염려에 빠질 것입니다.
소비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로 인해 낙심하게 되고, 불행해집니다. 소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낙심하게 되고, 불행해집니다. 소비에 관심을 두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문화의 간섭과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를 받는 순간, 우리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풍성해집니다.

좋은 집을 갖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하고, 선교사님을 접대하는 등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집을 활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의 크기가 삶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여야 합니다. 자기 혼자 만족하려고 더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계속해서 갈증만 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은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을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의 공급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무엇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결재 없이 우리 마음대로 물질을 사용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돈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돈의 주인인 것처럼 돈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누구의 통치를 받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의 지배를 받고, 세상 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는지, 어둠에 속했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돈을 어디에 사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적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것은 맘몬(mammon, 탐욕을 상징하는 악마)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탄을 어떻게 대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이 사탄을 강력하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재 없이 우리 마음대로, 육체의 본능을 따라, 욕망이 이끄는 대로 돈을 사용하면, 사탄의 권세 아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탄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라고 해서 귀신 쫓는 것이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직결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의 돈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이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의(異意)가 없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주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조금의 타협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

애매한 태도로는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재물이나 세상의 것에 관심을 보이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재물에 대해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돈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위해 돈을 구한다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이 많이 소비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또 구입하고 쌓고 또 쌓습니다.
우리는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가만히 보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필요 없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전혀 필요 없는 것임에도 꼭 필요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앞으로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즉각 사지 말고 기도해보세요. 답이 금방 나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소비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특별히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불안해합니다. 폴 투르니에(Paul Trurnier)가 쓴 〈강자와 약자(The Strong and The Weak)〉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회에는 강자와 약자가 있는데, 이들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강자는 늘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약자는 절망합니다.
경제적 강자도 언제나 불안해합니다. 경제라는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늘 절망합니다. 그런데 둘 다 똑같습니다. 더 가지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은 강자나 약자나 동일합니다.

경기(景氣)는 변화무상합니다.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가진 것으로 인한 염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중독사회에서 금식은 중요한 해독제가 됩니다. 소비사회에서 중요한 해독은 ‘나눔’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화해와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4).
이사야 58장에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사 58:6~7). 사람들의 짐을 벗겨주는 것이 의를 실현하는 것이요, 진정한 금식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으로 나를 위해 소비하는 삶에서 남을 돕는 삶으로 삶의 패턴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부요해집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남을 돕는 삶을 살 때,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더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잠언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잠 19:17). 도울수록 부요하게 되는 원리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아이가 자신의 오병이어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을 때, 5천 명이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눔을 통해 함께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샬롬(shalom)이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입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소비주의에 빨려 들어가 살다 보면, 인간 자신이 소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현대인들은 소모되어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에너지, 젊음 등을 쏟아 붓고 난 후에 얻은 일부를 소비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벌어서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잘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합니다.
이웃과 풍성하게 살아가는 삶이 우리를 부요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0). 예수님은 물질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물질을 어디에 쌓아둘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삶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의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때, 더욱 풍성해지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의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의 강한 급류(急流)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천하는 일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이 단순해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된 삶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비주의 세상의 급류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소모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우리의 삶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염두에 두지 말고, 그것에 관심을 두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선명합니까.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문(反問)하셨습니다. 거듭해서 강조하시며 쉬운 예화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내 자녀가 아니냐, 내 백성이 아니냐, 내가 너희를 책임지지 않겠냐, 왜 염려하느냐. 이방인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마라. 네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우리를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소비주의 문화에 휩쓸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소비주의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고상하고 매력적이고 여유롭고 안정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한 사람이 부자입니다.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영혼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영혼 가운데 하나님이 없음에도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 행세를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거지입니다. 나눌 줄 모르고, 돈을 가지고 부들부들 떨고, 남들이 자기를 무시할까봐 허세를 부립니다. 그런 사람을 부자라 할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부요한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천하에 부러운 것이 없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부러운 것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여유와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꽉 찬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기죽지 않습니다.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나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는 사람만 부러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돈으로 세상의 것을 마음껏 즐기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소유하고 소비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은 바닥을 긁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의 공급을 받으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집중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더 부유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면, 내가 가진 물질에 하나님께서 더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재산, 재능과 능력, 경험 등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넘치게 부으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까지도 부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흩어놓는 소비주의에 우리가 끌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질서정연하고 멋지고 매력적이고 풍성하고 집중력 있고 파워풀(powerful)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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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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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축복하고 축복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축복하고 축복하라
본문 / 민수기 6:23~27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성경을 보면, 선명하게 구분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성경 속에서 대조되는 주제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로 나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축복하셨는데, 아담의 죄로 인해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에게 저주가 찾아왔습니다.

그 후, 우리는 세상 속에서 축복과 저주라는 실체(實體)와 계속해서 마주칩니다. 어떤 곳에는 축복이 있고, 어떤 곳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아주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축복과 저주의 개념은 아주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불행스러운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정에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방황하고 불만족에 빠져있고, 중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한 삶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서 비껴나 있으면,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저주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노력 유무(有無)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가 불완전하지만, 야곱은 축복의 냄새를 맡으며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에서가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무관(無關)한 자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극명(克明)하게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축복과 저주가 아주 뚜렷하게 구별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한쪽에서는 장자(長子)가 죽는 저주와 통곡의 밤을 보내며 절규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반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에서는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선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축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한쪽에는 어두움이 가득하고, 한쪽에는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피를 바르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피가 어둠과 빛, 저주와 축복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피가 축복과 저주를 갈라놓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인류의 역사(歷史)를 선명하게 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의 관심은 복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하나님은 복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복을 되찾게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아브라함을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복을 되찾게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6).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면, 축복이 임하고, 저주가 떠날 것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첫 설교로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저주는 사라지고,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주는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우리에게 축복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게 떵떵거리며 살아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것도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만 가진 사람은 매우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주를 끊어버리고, 축복을 가져오는 출발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라틴어 ‘bĕnĕ dícere’(베네 디체레)에서 파생된 단어로, 칭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특별한 형태의 칭찬, 인정(認定)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야. 내가 기뻐하는 자야. 사람들이 너를 욕하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너를 핍박해도 너는 내 아들이야. 세상의 모든 저주가 너에게 쏠려있어도 너는 내 아들이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하시고, 아들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로 인해 기뻐해. 너를 인정해. 너는 존귀한 자야. 너는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야. 나는 너를 보면 기뻐. 너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야.”라고 존재를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기뻐해주는 것이 축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명했습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모세는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축복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은 그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하나님은 아들을 향해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다가 둘째를 낳으면, 둘째에게 관심을 갖느라 첫째에게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아이가 병이 납니다. 그래서 괜히 물을 쏟기도 하고, 동생을 때리기도 합니다. ‘나를 바라봐 달라’는 것입니다.
주목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욕구 불만이 생깁니다. 주목받는다는 것 자체가 사랑을 받는 것이고, 축복입니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데도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욕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먹을 것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주목받지 못하면 불안해합니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평안을 느낍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이 회복입니다.
어린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서 주목받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만족을 느낍니다.
부모의 주목을 받으며 자란다는 것은 아이에게 축복입니다. 빗나가는 아이들은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칭찬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주목받기 원합니다. 혼자서 놀 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엄마를 부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면, 승진한 것에 대한 기쁨도 있지만, 인정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더 큽니다. 주목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귀한 사람인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지구에 나 한 사람만 있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만큼 우리가 귀중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우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사람을 단체로 취급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려도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이십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잃어버린 것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등을 돌린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나는 너의 삶과 함께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관심을 받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라보는 것은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향하는 것이 곧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슬쩍 쳐다보시고 지나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라봐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셔서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시는 것은 재앙입니다. 저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나 자신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를 내가 끌어안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온몸으로 경험해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깨달은 만큼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커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기 전에 자신을 축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9:18).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보고 축복해야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에게 저주를 쏟고, 남을 못살게 하는 이유는 자신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축복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정말로 축복할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을 축복하며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계 속에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보면,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나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축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끌어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학(自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를 경멸합니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손사래를 칩니다. 자신을 스스로 낮게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목해보세요. 대충 넘어가지 말고, 주목해보세요. 대충 평가하고 끝내버리지 말고,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성경 곳곳에 표현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주목해보세요. 자신의 모습을 피하지 마세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평가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한 자기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열등감이 무엇입니까?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답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소용없습니다.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등감은 일종의 병입니다. 병 중의 병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데, 누가 건져주겠습니까. 건져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말하든,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기준은 늘 바뀝니다. 미인의 기준도 늘 바뀝니다. 시대에 따라 미남, 미녀에 대한 기준이 달라집니다.
방송에 나오는 미남, 미녀의 모습에 속지 마세요. 방송에 나오는 분들은 최고급 미용실에서 일류 미용사와 스타일리스트(stylist)가 비싼 화장품으로 가꾸어줍니다. 그런데 못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옷은 협찬을 받아 최고의 옷을 입습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카메라맨이 최고로 좋은 카메라를 이용하여 얼굴이 작게 보이도록 합니다. 그런데도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사랑의 눈으로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외형(外形)과 이목구비(耳目口鼻),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지금 나의 삶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열등감에 빠지는 이유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은 인구가 약 1억 명입니다. 그 중 4천 5백만 명이 절대 빈곤층입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주변에 약 5천만 명이 삽니다. 그런데 그곳의 도시 빈민은 아프리카의 빈민과 또 다릅니다. 아주 참혹합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만난 아이들은 다 행복해보였습니다. 그 아이들은 자기가 가난한 줄 모릅니다.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주 행복해보였습니다. 필리핀의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습니다.

왜 불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답게 만드셨고,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적합하게 선물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재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맡기신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는 왕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의 노랫소리가 사울 왕의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사울은 속이 뒤틀렸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인데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윗을 비교하는 노랫소리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왕인데도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가질 것이 없는 자가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무언가를 가져야, 무엇인가 갖추어야 열등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귀중하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축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입니까.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거울 앞에서 “멋져, 훌륭해.”라고 선포하세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너는 정말 귀해. 내가 너를 위해 내 아들을 줄 만큼 너는 귀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그런 나를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왜 힘들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가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축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내가 축복을 흘려보내는 데 인색했기 때문에 그가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여 그의 안에 있는 불만과 안타까움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내가 그를 축복하여 그에게 축복이 흘러갈 때, 저주가 바뀌어 축복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사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기계에 집착하고, 엉뚱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중독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나를 통해 축복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저주 받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축복하면, 우리 주변이 달라집니다. 주변에 축복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곳은 축복된 곳이 됩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곳이 밝아집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회복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태양이 비치면 먼지도 빛나기 시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축복해야 합니까? 상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주변을 바라보세요. 사랑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힘들어합니까?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바라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 김춘수 씨의 시 〈꽃〉은 아주 유명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꽃은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에게 주목합니다. 시선이 고정됩니다.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주는 것입니다.
주의가 산만하던 청년도 사랑에 빠지면, 대단한 집중력을 갖게 됩니다. 한곳에 꽂혀버립니다. 계속 바라보면, 그의 존재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면, 둘이만 보고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시선이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않는데, 나 혼자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목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임무입니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실천해보세요.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위력(威力)이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길은 다릅니다. 위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세요.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바라보며 열등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집중하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목받지 못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외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역사는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왜 주변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리핀에 며칠 머무는 동안, 빈민들이 사는 마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사는 집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습니다. 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지붕이 없는 집도 있었습니다. 집 옆으로 악취가 나는 하수(下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남자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어린 나이에 임신하면, 같이 살아가려니 막막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도망가 버립니다.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힘들어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삽니다. 그래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또 도망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빠가 다른 아이들을 엄마 혼자서 키웁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작은 집에 아이가 10~12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밥을 한 끼밖에 먹지 못합니다. 절대 빈곤의 나라입니다.
참혹한 광경을 많이 봐서 문화적 충격이 컸습니다. 며칠 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필리핀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기막힌 사역현장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스킨십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이 제게 다가와 제 손을 주무르며 만졌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볼을 만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꽃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계속해서 눈을 맞추었습니다. 아이들의 눈이 아주 예뻤습니다.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단지 불쌍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 아이들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눈을 맞추며 바라봐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을 때, 제 눈을 피하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빠에게마저 버림받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이 따뜻하게 웃으며 안아주고, 스킨십을 해주니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진 찍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자매가 “이 아이들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이 순간을 일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축복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저주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축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주만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더 저주스러운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지금 이슬람 국가들은 분노에 차있습니다.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기고, 나라가 없는 것으로 인한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을 향해 저주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누가 축복할 수 있습니까? 축복을 아는 사람들이 축복할 수 있습니다. 축복을 아는 사람들만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우리가 축복해주어야 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꽃이 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치유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회복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한 것을 칭찬하고, 그들을 향해 박수쳐주었더니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칭찬하고 박수쳐주는 것은 그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내놓을 만한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대한민국의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광경입니다.

집에서도 서로 축복해보세요. 남편이 아내를 축복하고, 아내가 남편을 축복해보세요. 부모는 자녀를 마음껏 축복해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누르고, 오히려 자녀를 축복해보세요.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약 3:10). 어떻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서는 축복만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축복이 나가지 않으면, 세상은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3장 11절에 보면,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축복만 말할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은 얼굴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다시 살아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의 입으로는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비관적(悲觀的)으로 말해서도 안 됩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절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과 교회를 향해, 주변의 어두운 곳을 향해 축복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축복할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우리의 최고 사명입니다.
세상의 불행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감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집 안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서로 바빠서 서로를 깊이 바라볼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병듭니까? 관심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도 관심을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쏟으면, 식물에서 빛이 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랑을 받고 주목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축복입니다.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봐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관심입니다. 그것이 이해입니다. 그것이 인정(認定)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빠져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통해 축복이 사람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존귀한 존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너는 충분히 멋져.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존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멋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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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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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중독사회에서 승리하는 신앙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중독사회에서 승리하는 신앙
본문 / 에베소서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오늘날 이 시대는 감각적인 시대입니다. 느낌(feeling)에 충실한 시대입니다.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감각적인 시대에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느낌이 강하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보다 느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결론 날 텐데,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각적인 시대에는 느낌이 매우 강하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인 시대는 말초(末梢)신경을 자극하는 시대입니다. ‘말초’는 나무로 말하면, 가지의 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시대는 아주 가벼운 만족을 얻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문화의 특징은 ‘빨리빨리’에 익숙합니다. 사람들이 오래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래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편리하고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에는 밥을 직접 지어서 먹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떼어 밥을 지어먹었습니다. 뜸을 들여야 했습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한참 기다려야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빨리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자신의 배입니다. 자신의 배를 채워주고 만족시켜주면, 모든 것이 오케이입니다.

사람들은 자극을 좋아합니다. 감각적인 시대의 특징은 ‘좀 더(more)’를 강조합니다. 음악을 듣다가 볼륨(volume)을 점점 높입니다. 그림도 굉장히 강렬해집니다. 먹는 것도 자극적인 맛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찾습니다. 초콜릿(chocolate)의 맛이 얼마나 자극적입니까. 맛이 굉장히 진합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좀 더 강한 것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처음에는 만족스러운데,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오감(五感)은 항상 좀 더 강한 것을 원합니다.
우리가 좀 더 강한 것을 찾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그 속에 빨려듭니다. 우리가 운전해서 가다 보면, 좀 더 빨리 달리고 싶어집니다. 좀 더 빨리 가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데,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여 우두커니 있을지라도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를 밟고 싶습니다.

우리가 좀 더 강한 것을 찾을수록 우리는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내성(耐性)’이라고 합니다. 집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갈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강도(强度)를 점점 높이게 됩니다. 강도를 높이면, 만족할 수 있습니까? 강도를 높여도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만족을 느낀다 해도 만족이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또 다른 만족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만족의 간격(interval), 우리가 만족하고 만족이 사라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예전에는 하루는 견딜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하루도 견디지 못합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만족을 찾고 싶어 합니다.
만족의 간격이 계속해서 짧아지면서 나중에는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감각이 파괴된 상태입니다.
감각이 무디어지고 파괴되면,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강도를 점점 더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로잡힌 상태를 ‘중독(addiction)’이라고 말합니다.

중독과 함께 금단현상(禁斷現象)이 나타납니다. 중독된 행동을 중단하는 순간, 금단현상이 나타납니다. 중독된 행동을 중단하면, 갑자기 불안해집니다. 짜증이 납니다. 정서가 불안해집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나중에는 자신이 집착하던 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의지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의지가 약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던 것을 철저히 의존하게 됩니다. 주의력이 산만해집니다. 자신이 집중하는 것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주의력이 산만해집니다.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컴퓨터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책을 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중독사회입니다. 중독 증세는 앞으로 더 가속(加速)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도 중독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독 증세가 가속되는 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독 증세와 싸워야 합니다.

중독사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면, 굉장히 심각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중독에 빠지게 하는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우리를 중독에 빠지게 하는 문화가 가득합니다.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독에 빠지는 과정이 오래되고 깊을수록 치료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독이 진행되는 각 과정마다 많은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중독을 치료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의 감각, 정서, 심리구조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정서적 건강뿐 아니라 육체적 건강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중독은 어느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으로 인해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해집니다. 어떤 것에 집착할수록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집니다.
중독 환자들은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딘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중독이 우리의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심리적, 정신적, 사회적, 관계적으로도 영향을 끼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독은 영적 사회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중독의 증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독된 상태를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방인들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18~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상태에 대해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해 “그들은 감각 없는 자가 되어”라고 말했습니다. 중독된 상태는 감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라고 설명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컨트롤(control)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중독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준 것입니다.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암(癌)은 육체의 세포가 굳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독은 마음이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독은 심리적, 정서적 암과 같습니다. 삶을 파괴해버립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살게 됩니다.
감각이 망가지고 마음이 굳어져서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총명함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욕심에 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총명이 없다는 것은 판단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깨어졌습니다. 이렇게 된 상태에서는 인생 전체가 망가집니다.
감각이 망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감각이 망가졌다는 것은 감각이 정상(正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중독사회에서 일어나는 치명적인 현상은 영적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중독은 집착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상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집중력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집중력이 떨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총명이 흐려집니다.

중독이 심해지면 멍해집니다. 알코올 중독자를 보십시오. 항상 술을 생각합니다. 밤에도 술에 찌들려있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술을 생각합니다. “술은 술로 깨운다”라고 말하면서 몽롱한 상태를 술로 깨우려 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기 전까지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밥을 먹기 전에도 술을 먹어야 합니다. 술로 찌든 속을 술로 풀려고 합니다.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중독은 힘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 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틀 동안 정신을 빼놓을 수 있는 것은 도박 밖에 없습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습니다. 도박에 중독되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도박장에 앉아있습니다.
돈 중독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봅니다. “돈”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술이나 도박, 마약에 중독되는 것 외에도 많은 중독이 있습니다. ‘권력 중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기도 중독됩니다. 거기에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요즘은 음식 중독도 많습니다. 한 가지 음식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중독도 있지만, 덜 파괴적인 중독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소비주의 사회입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중독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오히려 소비주의 사회가 중독을 부추깁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는 계속해서 팔아야 합니다. 상품, 프로그램 등을 팔아야 합니다. 상업주의의 기법을 동원하여 소비를 조장해야 합니다. 쇼핑(shopping) 중독, 신상녀(新商女) 등이 바로 소비주의 사회로 인한 중독입니다.
소비주의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에 빠지게 만듭니다. 화려한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빼앗습니다.

중독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욕구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다 보면, 중독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애정결핍의 상태에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을 느끼기 때문에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 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해도 빈 공간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애정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빈 공간을 채우려 하는데, 주변에서 소비주의가 소비를 조장하고, 우리의 감각이 그것에 끌려가니 그것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게임(game) 중독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스포츠(sports) 중독이 대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단적 광기(狂氣)가 있습니다. 취미가 적당한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갑니다. 그것은 중독입니다.
음악 중독도 있습니다. 스피커(speaker) 하나에 수억 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미디어(media) 중독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요즘 지하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잘 보지 않습니다.

중독에 빠지면 몽롱해집니다. 총기(聰氣)가 사라집니다. 심한 경우, 일상의 삶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영적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은혜를 받는 듯하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빨리 돌아가 버립니다.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에 돌아가 버립니다.
은혜를 받아도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중독된 것에 빨려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은혜가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예전에는 우리로 하여금 중독되게 할 만한 문화가 없었습니다. 굉장히 심플(simple)한 문화였습니다.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TV채널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영화도 집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문화가 우리의 말초신경과 정서를 굉장히 자극합니다. 돈만 내면 무엇이든 제공하겠다는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집중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빠져들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중독되게 만들고, 탐닉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문화의 바다에 떠있습니다. 이 상태가 되면, 영적 집중력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영적 갈망(desire)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중독은 엉뚱한 것에 갈망(渴望)하게 만듭니다. 중독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집착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촉각(觸角)이 곤두서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늘 생각합니다. 그것을 갈망합니다. 그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가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집착하는 것입니다.

갈망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망치는 것을 갈망할 것인지, 하나님을 갈망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갈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갈망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갈망하는 대상(對象), 방향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갈망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길이 달라집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중독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심각한 훼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상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에 영적 갈망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 갈망, 영적 사모함이 사라져버립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영적 갈망입니다. 영적 갈망이 없으면, 신앙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게 만드는 힘은 영적 갈망에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영적 갈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밥을 먹고 싶지 않으면, 병들어 죽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아도 입맛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최고로 좋은 반찬은 배고픔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입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끼만 먹지 않아도 무언가를 먹고 싶어 하는 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살게 합니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음식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는 사람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식욕이 넘쳐나기 때문에 집회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영적 식욕이 충만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하기에 바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느라 바쁘지만, 즐거운 이유는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성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적 식욕이 전혀 없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집중하지 못한다면, 설교하는 사람은 힘이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영적 사모함을 가진 성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영적 사모함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갈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갈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그것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영원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아무리 해봐도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갈망하도록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영적 갈망이 채워지면, 다른 갈망이 시시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보다 더 강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을 갈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장애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중독 현상입니다.

영적 굶주림이 있는 사람에게 영적 채워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관해 말씀하실 때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을 사람은 가장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의무적으로 오는 사람과 갈망하는 마음으로 오는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무덤덤한 마음으로 오거나 강요에 의해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사모함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갈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갈망 없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다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영적 갈망이 식어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기울어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이 이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것이고,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전혀 몰랐습니다.
단순히 의무감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고, 그것을 자신의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늘 시무룩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t)가 그린 그림〈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 보면, 큰 아들은 입구에 애매모호하게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어둡습니다.

그의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는 욕구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귀환을 즐거워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았을 때에 그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비록 나쁜 짓을 했지만, 방황의 끝에서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매우 깊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떠나보니 아버지의 집만한 곳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근처에 있기만 해도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갈망입니다.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모함, 갈망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신앙생활은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독은 갈망을 깨어버립니다. 그래서 중독은 위험합니다. 갈망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립니다.
여러분의 갈망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어져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비상(非常)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이 유지되는 만큼 우리의 심령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영원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중력이 사라져버리고, 갈망이 식어져버리고, 중독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해버리는 것보다 좀 더 길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선 완전히 만족하는 것보다 약간 모자라게 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무리 재촉해도 자신을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금방 응답해주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금방 금방 응답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망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기도한 것이 빨리 응답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하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할 때, 부모가 금방 해결해주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先進)들 중 영적 세계에 깊이 들어가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시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절망의 순간을 경험하고 난 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해져가는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위험한 것은 조급성(躁急性)입니다. 믿음은 조급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조급한 것은 믿음과 반대됩니다. 믿음생활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독에 빠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조급해집니다. 그래서 빨리 채우려고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빨리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불안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00을 다 채울 수 있어도 약간 덜 채워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약간 모자란 듯이 먹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무엇이든 조금 모자란 상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꽉 찬 것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뷔페(buffet)식당에 가면, 먹을 것이 많이 보입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는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배부름으로 인한 기분 나쁜 현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100% 다 채우면, 만족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만족을 느낍니다. 참 신기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100% 채웠다고 생각할 때, 만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만족을 느낍니다. 욕구 불만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다 채울 수 있어도 다 채우지 않고, 약간 모자란 상태에서 만족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100% 채워진 것으로 인해 만족하려고 하지 말고, 90%에 만족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훈련되면, 우리의 삶의 질(quality)는 높아집니다.

우리는 100%를 채워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00%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족할 수 있어야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수치(數値)의 개념을 떠나 어떠한 형편에 처한다 해도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외부 환경이 나를 주장할 수 없는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축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중독과 맞서 싸우는 훈련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절제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오늘날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절제(self-control)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절제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소비를 조장하고, 상업적 마케팅(marketing)이 주를 이루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절제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을 훈련하지 않으면, 우리는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독에 빠지면,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다른 것에 빼앗겨버리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무너져버립니다.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는 절제할 수 없습니다. 왜 성령의 열매라고 했을까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만, 성령께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므로 절제의 열매를 맺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놀랍게 역사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버리지 않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제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쓰십니다. 절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낭비됩니다. 방출됩니다. 엉뚱한 곳에 쏟아져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 중독으로 망가진 감각을 금식을 통해 복원해야 합니다.
금식은 절제의 훈련이며, 중독의 가장 좋은 처방 중 하나입니다. 금식은 우리의 영적 갈망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금식은 감각적인 것에 탐닉하려는 성향을 억제하는 훈련입니다. 육체의 욕구에 빨리 반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훈련 중 하나입니다. 금식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인가에 빠져들 것 같고, 컨트롤(control)되지 않고, 감각적으로 변해가고, 영적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면, 금식(fasting)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중독에 빠질까요? 내적 욕구가 찾아올 때, 채우려고 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욕구를 차단하려는, 적극적인 공격방법입니다.
음식을 금식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거스르는 훈련입니다. 식욕은 육체에 만족을 주는, 강렬한 욕구입니다. 이것을 거스르는 훈련이 금식입니다. 그러므로 큰 싸움입니다.

요즘은 음식만 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디어(media) 금식도 있습니다. TV,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영상물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미디어와 거리를 두는 훈련은 요즘 매우 힘든 훈련입니다. 특히 청소년에게는 힘든 훈련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인터넷과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훈련입니다.
이런 금식은 일종의 저항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본성적인 유혹을 저항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묶인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그 훈련을 통해 내 영혼이 묶인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금식 자체는 힘들지만, 육체의 본성을 거스르고, 그것을 묶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때, 금식을 통해 영적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금식은 일종의 나눔입니다. 움켜쥐려는 삶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심각한 중독은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쌓아놓으려는 것입니다. 움켜쥐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훈련은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초고속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적 부를 누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불안정하고, 어두운 가운데 있고, 사람들의 삶이 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쌓으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주는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가 사는 길은 나눔의 삶입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사는 길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부가 쌓일수록 이것을 해체하려는 세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은 나눔입니다.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탐욕의 성에 갇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삶이 끝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에서는 러브부산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노숙자사역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누는 것은 오늘날 중요한 이슈(issue)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담아놓거나 쌓아놓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이웃과 주변 교회, 한국 교회, 북한, 열방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여름이 되면, 농어촌교회에도 가시고, 해외 선교지에도 가셔야 합니다. 그것도 나눔입니다.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시간과 물질을 나누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집착과 중독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소비사회입니다. 그리고 중독이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딜레마(dilemma)입니다.
소비만 있고, 나눔이 없으면, 중독은 불가피합니다. 주어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것이 나를 사로잡아버립니다. 그래서 인생이 망가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고 베푸는 것은 구제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기 살기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질을 나누지 않으면, 물질이 나를 잡아먹습니다.
나만을 위해 축적하기만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한 돌봄의 삶을 살지 않으면, 중독으로 빠져버립니다. 자신만을 위해 쏟아 부으니까 중독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독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감각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금식은 스스로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족한 상태에 스스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의 목표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고,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집착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수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못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내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닌, 내가 집착하고 있는 우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 잡지 못하면, 세상의 것에 우리의 마음이 팔려버립니다. 세상의 종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면, 그때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결박으로부터 풀어주시고,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굶주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도시에서는 스스로 광야를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광야의 삶은 무엇일까요? 도시에 살지만, 불편한 것을 조금씩 감수하고, 부족한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부족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광야의 삶을 통해 비울수록 더욱 채워지는 은혜가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은 부요합니다. 스스로 광야를 선택하고, 도시에서 사막을 만들고, 좀 더 단순하게 살고, 집착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때, 그곳에 사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최상의 기쁨과 즐거움, 행복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았지만, 아버지의 집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종들도 풍족하게 누리는데, 아버지의 집 밖에서 거지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집착하고 중독된 삶은 가장 가난한 자의 삶입니다.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모셔 들이면, 온 세상을 가진 것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요동치는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부채질하는 주변 분위기에 의해 들떠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다른 것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빼앗긴 가장 심각한 것은 영적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속임이 강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 안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안해하고, 무엇인가에 쫓기고, 채우기 위해 지친 영혼들을 향해 주님은 “내게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매우 복잡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육신을 만족시켜줄 것처럼 유혹하는 것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문만 나서면, 우리의 후각(嗅覺)을 자극하는 음식들, 우리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좋은 물건들,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우리의 입을 황홀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감각은 날로 무뎌져가는 것을 모르고, 세상에 도취될 위험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은 간단히 빨리 해결해버리고,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곳에 줄을 섭니다. 우리의 감성, 정서 혹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많이 망가졌습니다.
초콜릿이 좋아 계속해서 먹다 보면, 이빨이 상하고, 밥맛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미 세상의 문화에 피할 수 없이 젖어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세상의 문화를 어느 정도 탐닉하고 있어 우리의 감각 기능은 현저히 떨어져있습니다.

세상에 빠져들수록 우리의 영혼은 빨리 쇠퇴하고 초라해져갑니다. 우리는 성미가 급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신경질을 내고, 쉽게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우 위험한 문화의 한 가운데에 갇혀있습니다. 문화의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매일매일 탈출을 시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혼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만연해있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23~24절에 보면,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부추기는 문화 속에 익숙해진 구습을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흉내 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다가는 큰 일 납니다. 감각이 무뎌져가는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갈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갈망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것이 좋든 좋지 않든, 어떤 갈망이든 갈망은 식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갈망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외부적 요소에 의해 우리가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혼을 거스르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강력한 갈망들은 하나님 외에는 다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만을 탐닉하고, 하나님만 집중하고, 하나님께 몰입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중독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 그 안에서 주어집니다.
우리의 영적 식욕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날마다 일어날 때,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맛보지 않았던 기쁨과 새로운 만족, 새로운 행복이 그 안에서 주어질 것입니다.
일시적이고 얄팍한 즐거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만족을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유해(有害)한 것에 익숙해져서 감각과 정서와 영혼이 상해버린 영적 환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중독되어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영적인 것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되 간절히 찾지 않는다면, 세상의 것에 중독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육신의 배가 고파 밥을 찾는 열망의 10배, 100배 이상으로 영적인 배가 고파야 합니다.
우리는 밥 한 끼만 먹지 않아도 욕구가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영적 갈망은 그것보다 훨씬 강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속임에 말려들지 마세요.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떡과 비교할 수 없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쉽게 떡을 만들어버리라는, 마귀의 얄팍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육체를 순간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유혹과 매일매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만족을 얻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주는 감각적인 것에 익숙해져있고, 중독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독(解毒)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굶주려야 합니다. 육신의 배가 고플 때마다 내 영혼의 배가 이렇게 굶주리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누리고, 그 안에서 영적 부요함을 얻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부요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온갖 것으로 우리를 흔들어대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주십니다. 가장 안전하고 만족한 삶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초점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세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다른 곳에 집착하지 말고,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갈망하세요. 하나님께만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 목말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의 강수(江水)로 초대하실 줄 믿습니다. 그 안에서 참된 만족과 참된 회복,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세상에 껄떡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하나님 안에 푹 빠져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맛보았던 기쁨은 진짜가 아닙니다.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 빠져들게 하고, 우리를 망가뜨립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만 갈망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일평생 식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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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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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본문 / 히브리서 5:8~10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신앙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믿어야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행위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뗄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뗀다면, 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은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순종은 붙어있습니다.

믿는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순종이라는 행위가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독립되어있지 않습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만 믿을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말로 합니다.
어디까지 믿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는 데까지가 믿음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아직 믿음이 증명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애매모호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민할 뿐입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갈등합니다.
믿음이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성 안에는 불순종의 뿌리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 뿌리가 깊습니다. 그 뿌리는 아담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에게 일어나는 불순종의 뿌리는 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마귀를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엡 2:2). 사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할 뿐, 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는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의 삶을 살면, 마귀의 부하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성 자체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태어난 영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순종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오늘도 온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영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든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이전에도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불순종의 영과 거역의 영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불순종합니다. 불순종의 영이 더덕더덕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밥을 먹을 정도만 되어도 그 아이에게 불순종의 영이 역사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불순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류에게 찾아온 저주, 인류에게 찾아온 모든 고통의 원흉(元兇)은 불순종에 있습니다. 불순종의 뿌리, 불순종의 잔재(殘滓)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순종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순종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생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말씀에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옮겨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깨어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순종은 그가 믿음으로 출발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불순종의 고리를 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의 삶을 배웁니다. 믿음의 최상(最上)의 질은 순종으로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위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키워드(keyword)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순종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병을 고치시고, 숱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초점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 행하시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8).
예수님의 사역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 속에 능력을 행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병이 낫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본문 8~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학교’에 다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순종의 삶을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있는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순종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클라이맥스(climax)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의 클라이맥스인 독자(獨子)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리는 사건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와 오버랩(overlap)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묶여 모리아 산의 제단 위에 있는 이삭처럼 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이 이 땅에 있는 불순종의 고리를 모두 끊어버리고, 모든 저주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깊고 깊은 불순종의 뿌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순종을 배웁니다. 순종을 배우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과 모든 아픔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까? 순종을 통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려는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함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그냥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실 때에도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종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순종은 자아(自我)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순종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갈보리 언덕과 비슷합니다.

순종의 첫 발을 내딛고, 구원의 길로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삶은 창세기 22장에서 순종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순종은 자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날로 내리치려는 제단 위에 누워있던 이삭의 모습에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의 핵심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순종이 쉽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진노의 잔을 마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은 순종을 결단하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요 19:30).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일에 순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외침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저주를 끊어버리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에 완전히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99%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100%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목적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보면 불순종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방향과 목적을 잃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찬사(讚辭)를 보냅니다. 그가 남긴 말, 그가 행한 행적(行蹟)에 대해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삶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에 맞춰져있었습니다.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은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시지만, 자신의 말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좋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철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할 말을 알려주시면, 그것을 전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단독으로 무언가를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권세 역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능력이 없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는가’입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역을 하더라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키워드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순종을 배운 것은 우리에게도 순종을 배우게 하셔서 순종을 통해 모든 저주를 끊어버리고,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통(貫通)하는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종이 새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이 순종하도록 하나님을 닦달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순종을 놓치면, 인생이 꼬여버립니다.

불순종은 딴 것이 아닙니다. 내 일에 몰두하고 사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외면하고, 내 일에만 빠져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기도하더라도 기도 안에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그 기도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고, 결국 모든 것이 자기에게로 돌아가거나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마지막 가장 숨 가쁜 고비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숨고르기를 하셨습니다. 매우 힘들고 벅찼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의 오물을 혼자 뒤집어쓰셨습니다. 죄악의 진노의 무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순종에 초점을 맞추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함으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일어난 원죄(原罪)적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50). 친가족이라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불순종의 고리를 끊고, 순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믿음에서 순종이 나오지만,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순종이 깊어집니다. 사랑은 깊은 순종을 낳습니다. 사랑은 의무적인 순종이 아니라,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순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한다면 말하기도 전에 이미 순종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순종할 때, 사랑으로 결속됩니다. 사랑으로 순종할 때, 아버지와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단계로 나아간다면,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더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은 순종을 낳고, 믿음이 순종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사랑하면 순종적인 관계가 됩니다. 믿음과 순종, 사랑과 순종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첫째, 순종은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는 삶 자체가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실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순종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순종이 능력을 낳습니다. 그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순종의 숨은 비밀은 놀랍습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숨어있습니다. 능력을 행하려고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순종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풀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 따라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제화됩니다.
말씀이 참된 말씀인 것을 확인하려면, 순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사실로 드러나고,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난 현장,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난 현장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돌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해서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는 행위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보십시오. 순종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고통과 불행이 찾아왔다면, 에덴에서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축복을 회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이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롬 5:19).
인류가 불행하게 살아가는 원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을 가로막는 주범(主犯)은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불순종의 삶을 사는 만큼 방황이 길어졌습니다.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돌고 돌며 고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겪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자초(自招)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소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이 불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모리아 산에서도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삭도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처음부터 불순종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세 사람 중 누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야곱은 나중에 자신의 입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창 47:9).

우리의 삶의 축복은 순종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순종의 삶을 살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인생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인생을 복잡하게 해석하려고 하십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풀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생애도 보면, 복에서 출발하여 복으로 끝납니다. 야곱은 복 때문에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복 때문에 인생이 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복이 출발하게 됩니다. 인류가 잃어버린 복이 출발합니다. 잃어버린 축복이 회복됩니다. 저주를 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3).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복을 되찾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1세대는 원망불평하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2세대에게 신명기를 주셨습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는 ‘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되찾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복을 약속하시고, 인류의 복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의 순종을 통해 복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복은 순종을 통해 흘러가게 됩니다.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찾아온 인류의 저주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을 통해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순종은 축복을 가져옵니다. 기억하십시오. 축복의 원리는 순종입니다. 우리의 삶을 순종의 원리 위에 올려놓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묶인 것이 자동으로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꼬인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꼬여있습니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왜 꼬였는지 살펴보세요.
순종해야 하는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순종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복과 연결된 경우에는 항상 명령형을 사용하셨습니다.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꼬여있던 것을 순종을 통해 푸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불순종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있다면, 생수의 강이 막힙니다. 여러분의 삶에 순종하지 않는 영역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죄가 타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막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뚫리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원리입니다.

순종은 성경 속에서 거대한 핵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형통이고,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셔도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순종이 축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최고의 순종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받으셨습니다. 아들이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은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통해 얻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자녀가 순종할 때, 부모는 기쁩니다. 순종을 통해 관계가 깊어집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의(祭儀)적 제사보다 순종이 중요하고,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순서와 의식(儀式)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삶이 참된 예배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순종하고 사는 것 자체가 예배입니다. 걸어가는 것이 예배이고, 모든 행위가 예배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계속 붙들어야 할 주제는 순종입니다.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복잡하게 하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키워드를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난 후에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을 익혀야 합니다. 순종이 점점 깊어져갈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나고,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순종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도 순종이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학습한다는 의미입니다. 한순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순종을 배워가므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한순간에 순종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오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원망 불평하면 안 됩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사건과 실패와 고통을 통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그 일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실 때에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고집이 죽지 않으면,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순종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했던 마리아를 보세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기를 겪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1:38).

순종은 조건과 상황을 따지지 않고, 말씀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순종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순종학교의 주 과목은 십자가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이지만, 우리를 가장 완전한 길로 이끕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합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기 위해서입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묵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를 들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합니까? 목적은 단 하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의 길을 열어주시고, 그의 영혼을 열어주셔서 말씀이 그 사람의 심비(心碑)에 새겨지게 하십니다.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령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귀가 닫혀버립니다.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닫혀버립니다. 불순종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불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稀貴)해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어도 소용없었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더 이상 들려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 같이 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려는 회중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까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죽어가는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해도 말씀이 벽을 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벽을 치고 다시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는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생명을 걸겠다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설교자의 머리와 영에 주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임하여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 말씀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이미 그런 역사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순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성령이 주님을 도우셔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훈련받고 기도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오직 하나,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을 들으면, 성령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오직 순종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종으로 귀착(歸着)됩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순종으로 결론 나야 합니다. 성령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런데 목적을 분명히 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깊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순종이 깊어집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말은 적게 하시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 가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들고, 얼마나 많은 역사를 일으키는지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변혁은 순종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을 틀어막고 있는, 모든 어둠, 저주 등이 순종을 통해 해결됩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 아들의 순종은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 받던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으셨습니다.
지난 날 우리 안에 있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순종의 뿌리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며 살았던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순종의 영이 여러분을 지배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말씀 앞에 거꾸러지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에 귀 기울이고, 힘들고 어려워도 순종해보세요.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No”라고 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오늘 이후로는 “Yes”라고 반응하셔서 묶인 것이 모두 풀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신앙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것까지만 믿음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해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순종으로 증명해야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편에서 99% 순종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인생이 도약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순종이 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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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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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Friday Night Sermon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눅11:1-4절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불이 붙으면 그 기도의 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를 배우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 기도란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라는 것은 크신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기도는 배우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잘 배워서 실천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1.귀한 존재가 됩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지 아니할 때는 창피를 당했지만 기도를 할 때는 전혀 다른 사 람이 되었습니다. 행5:15절에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들도 열심히 기도하면 이런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기도만큼 빨리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존재 의미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왜 달라집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쓰시니까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천한 쓰임이 아니라 귀한 쓰임을 받게 됩니다.

2.소원이 성취됩니다. 마15: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 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마15:23절에 "예수는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귀찮다고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크다고 하면서 소원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을 보시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시20:4절에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21:2절에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소원이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그 소원이 꼭 성취될 것입니다.

3.가나안 여자는 기도로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마15: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돈을 가지고 소원을 이루었던 것이 아닙니다. 인맥을 가지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의술이나 다른 방법이 아니라 기도를 알았고 기도를 배웠기에 소원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배우고 바로 하는 자에게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시37:42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145:19절에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4.한나는 기도로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한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한나는 아들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산부인과를 찾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배우고 바로 사용하는 자에게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악할 찌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이라고 했습니다.이 말씀은 주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소원을 성취해 주시는 것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바로 배우면 바로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5.문제가 있을 때 답을 빨리 찾습니다. 단2:18-19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했습니다.

6.기도를 배우면 힘있는 사람이 됩니다. 시86:16절에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 틀림없이 힘을 주십니다. 힘을 얻어본 경험이 있는 자는 알 것입니다.

영력도 주시고 체력도 주십니다. 수1:5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면 당할 자 없는 힘을 주십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힘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힘을주십니다. 기도의 코드를 꼽으면 힘이 솟아납니다. 단2:46절에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하자 어떠한 힘을 얻었습니까?

7.기도를 배우면 문제해결을 받습니다. 시109:4절에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기도로 해결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늘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을 통하여 기도로 해결하는 하나님에 참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8.인간 관계를 기도로 해결 해야 합니다. 시109:2절에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거짓 혀와 악한 궤계를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로 해결할 뿐이라는 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9.자기의 나갈 길을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방해와 자식의 방해와 주변 나라의 방해가 있어도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시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 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가는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10.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 물어 보고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삼상23:2절에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물어보고 해결했습니다. 삼상23:4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묻자온데"라고 했는데 또 물어보고 기도를 했 습니다. 오늘 우리가 삶 속에서 첫째로 해야 할 것은 기도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진행해야 합니다.

11.기도를 배우면 승리 합니다. 기도로 다니엘이 승리했고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승리했습니다.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시118:7절에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했습니다.

고전1:27-28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고전1:29-31절에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단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은 나약한 인간입니다. 주 안에서 믿음으로 자유함을 누리며 우리의 삶 자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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