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 성령을 속이는 사건 Friday Night Sermon
성령을 속이는 사건
(행5:1-11절)
우리들이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할 때 어떤 믿음과 정신으로 하느냐가 참으로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의 열정과 감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깊은 감동과 은혜 속에서 일하게 합니다.
본문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자리에서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기적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 같은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1.본문의 내용 줄거리와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내 놓을 때 판 금액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 내놓았습니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금액의 일부를 감추는 행위는 "사탄이 아나니아 속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는 결국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듣고 있는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죽게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메고 가서 장사지낸 이후 3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그후에 그의 아내 삽비라가 자기 남편이 이미 죽은 줄 모르고 들어옵니다. 남편인 아나니아가 금액의 일부를 감출 때 아내도 알았다고 합니다. 그 때 아내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이 이게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베드로는 책망합니다. 왜 주의 영을 시험하러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도 남편처럼 너에 시체를 메어 나가리라"고 하자 베드로 앞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온 교회는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초대 교회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빨리 죽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교회 나올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헌금하고 봉사한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지 장난 삼아 하나님을 놀린다면 자칫하면 내 생명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긴장감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들을 두렵게 하는 말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을 협박하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함부로 해석해서 협박하는 그런 말씀으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교회 당회장 목사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당회장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렇게 된다던가 또 헌금을 반드시 목사 발 앞에 내 놓아야 한다고 해서도 안됩니다.
또한 교회 건축헌금을 작정하는데 이용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아픔을 상담해 왔습니다. 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한 이후 마침 집을 팔아 이사하게 되어서 목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정헌금의 일부를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통해 치는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 교회에 붙어 있을 수가 없어서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 아나니아 삽비라부부에 해당된 그런 못된 신앙인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는 잘못된 적용을 낳고 그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돈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대로 헌금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물론 교회 헌금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하나님의 교회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초대교회를 설립케 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성령께서 주관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십니다. 이 일에 사도들이 쓰임 받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킴으로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그 증거와 그 증거에 따른 반응과 삶의 변화들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셨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곧 믿는 모든 무리들로 하여금 한 마음 한 뜻으로, 물건과 재물들을 서로 나누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뿐만 아닙니다. 행4:33-35정을 보시겠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어진 일들입니다.
초대교회에 활동했던 사도들이나 교회는 그 활동에 필요한 재정적인 보충이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36절에서 말하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36절에 보시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을 재정적으로, 얼마나 도왔으면 그의 별명을 권위자라고 했겠습니까? 이 권위자라고 했을 때 권은 권할 권(勸)자에 위로할 위(慰)자입니다.
요셉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은혜를 받고 땅을 팔아 낸 헌금이 초대교회에 상당히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아 권위자, 혹은 위로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영광과 칭송을 받는 것이 탐났던 모양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밭을 팔아 그 돈을 내면 교회에서 칭찬을 받고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돈으로 교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자신들도 그렇게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부부가 하는 행동과 생각이 죽을 만한 죄목에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작정한 금액의 반만 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죽음을 당할 일입니까? 여기서 성령께서 돈의 액수를 가지고 트집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의 결과 은혜를 받아 그분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광과 칭송이 탐남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봉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3.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유지되게 하 는 것을 추방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흉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봉사와 헌금생활도 흉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런 흉내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통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자신이 칭송을 받고 싶은 생각, 즉 그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특징은 항상 현실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할 때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돈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기록한 누가는 누가복음 22: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행동입니다.
우리들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마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지 말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멋대로 살도록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과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그래서 마태복음 26: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시험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자신이 과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면 지금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거부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마귀의 유혹으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7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 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승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우리들의 일차적인 관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 속에서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하는 어떤 규칙들을 찾아내어 그 규칙들을 신앙의 원리로 삼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그런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신앙의 생활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설명되고 있는가에 대한 분명한 진리가 설명되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들에게 늘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기룟유다와 같이 이들 부부들도 그들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탐욕과 허영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까지 이용하고 사도들까지 이용하겠다는 그들의 사탄적 발상에 철퇴를 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짐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에 구경꾼으로 다닌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어렵게 되었는데도 불보듯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정한 사람입니까? 과연 그런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크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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