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본문 / 빌립보서 3: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 인생은 문제투성이입니다.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느라 세월을 보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생을 다 보내면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문제 속에 갇힙니다.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는 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제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에 도달해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에 매이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문제를 따라가지 말고, 목표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문제를 푸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기도하다 보면, 수세에 몰릴 수 있습니다. 문제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든 해결되지 않든 문제 속에 갇히게 됩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향해 기도하며 나아가다 보면, 문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늘 고민을 풀어놓고, 넋두리하듯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과녁이 정확해야 합니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떻게 필요한지 목표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를 정확하게 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방향이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문제로, 고민으로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문제에 휘말려버리고, 달려가야 할 목표를 놓쳐버리면, 문제 속에 갇혀서 문제를 풀다가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나중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삶의 방향을 놓쳐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기 원하시는지, 우리는 큰 그림(big picture)을 보아야 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좁고 작게 보지 말고, 크게 보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의 어디쯤 가고 있는가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어디쯤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푯대의 방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미완(未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영적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초신자가 아닙니다. 웬만큼 믿은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상당히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도입니다. 영적 성취를 맛보았던 사도입니다. 삼층천까지 경험한 사람입니다. 신비한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헌신에 있어서도 굉장한 수준에 이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영적 고지(高地)에 이른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세계와 사역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베테랑 산악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해발 5천m 이상 올라갔음에도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찍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어느 정도 받고 나면, 포만감(飽滿感)을 느낍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누려야 할 구원의 부요함을 이야기합니다. 미래에 천국에 갔을 때, 완성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구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미래에 우리가 가게 될 천국도 있지만, 이 땅에서 확장되어야 할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과 기쁨이 무궁무진하게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도 끝이 없습니다. 찬송가 304장에 보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세계를 향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에 더욱 목말라합니다. 좀 더 깊은 사랑을 원합니다. 갈망이 일어납니다.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 목마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성경을 대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대한 책도 읽었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린 아이가 손으로 물을 움켜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의 초입(初入)에서 찰랑거리는 정도만 경험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디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悔心)한 후에 굉장히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는 율법에 통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들어와서 율법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신서에 “달려가노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멈출 줄 모르는 열정을 서신서를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그는 질주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끝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해도 끝이 없습니다. 은혜의 바다에서 아무리 헤엄쳐도 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영적 세계 안에 깊이 들어가고 싶은 열망과 함께 성도들을 영적 세계 속으로 좀 더 깊이 끌어들이려는 갈망을 느낍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자신이 도달하지 못하면, 성도들을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세계가 있는데, 성도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놓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8).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세계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크다는 의미입니다. 완전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비록 연약하고 무력하고 속이 좁고 무너지고 깨어지고 시험에 들고 죄를 짓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는 높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속상한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 때문에 속상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 때문에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산과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자신은 영적 세계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달려가야 할 목표가 여전히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결론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경지에 이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었고, 양육 과정을 다 마쳤고, 봉사도 어느 정도 했다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만만한 사람과 비교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준을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는 한없이 부족한 자가 됩니다. 교회에서 양육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많은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너무 심오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영적 정상(頂上)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13~14).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있습니까? 영적 세계에서 안주(安住)는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어느 시점에 멈추어서 세월을 보내면 안 됩니다.
갈증이 일어나야 합니다. 간절함이 생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간,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만하고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바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바울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바울과 우리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도달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등정 길에서 수많은 능선을 넘으며 비경(秘境)을 맛본 사람은 더 오르려는 갈증을 느낍니다. 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고, 사모함이 일어나고, 갈증을 느낍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가 달려갑니까? 누가 멈추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숙제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착각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자신을 볼 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때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주님 앞에서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세계 안으로 들어간 후, 비쳐진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수록 은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집니다.
한없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면서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비쳐주시기를 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이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을 모르면, 착각하게 됩니다. 자신만만해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자신만만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힘을 믿고 목회할 때에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때 겸손해집니다.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 고통이 옵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했습니다(롬 7:24). 이것은 고통의 절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절규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상태로 인해 안타까워한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이 깊이 느껴지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런 고통이 찾아오면 처절해집니다. 갈 곳이 없어집니다.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지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만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면,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냥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달려간다고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연약함을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기 위해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발견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딘가에 도달한 것처럼 만족하거나 멈추어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복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가 적잖게 무거웠습니다. 심심찮게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다 보면, 자신은 부적격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죄가 수치(羞恥)로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 생활로 깊이 나아가려 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 하면, 자신의 과거의 부도덕한 삶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이전의 삶이 현재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전의 상처가 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아름답다고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수치스러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나쁜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 들은 것보다 욕들은 것이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은 수없이 들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의 욕을 들은 것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비극적인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성공한 기억보다 실패한 기억이 더 뚜렷합니다. 그것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과거를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뒤로 돌아갑니다.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만 감옥은 아닙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지 않은 경험과 실수를 계속 떠올리다 보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런데 불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을 삼켜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미래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등 끔찍한 일을 행했던 사울과 같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요, 포행자였던 자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자신을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과거의 어떤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워주시는 능력이 복음인 줄 믿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된 기록을 지워도 통신사를 통해 휴대폰을 처음 샀을 때의 기록을 다 복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과학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는 은혜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이 계속 반추(反芻)되고 복기(復棋)되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죄책감에 시달리며 과거로 도망쳐버리는 안타까운 삶을 사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움과 실수 때문에 굴을 파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보혈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義)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입니다. 뒤가 아니라, 앞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과거는 끝났습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덮이시기 바랍니다.
둘째,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현재에 집중하여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달려가노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계속해서 진행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변화와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경지로 나아가려면,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때부터 도태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됩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피카소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업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쇠퇴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삶도, 재능과 은사도 부지런히 달음질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쇠퇴해버립니다.
믿음의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앉아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삶 속에서 묵상할 때, 파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와 내 삶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상은 철학적이고 모호한 개념 덩어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살린 말씀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앞으로 치고 나아가는 사람의 기도에는 용맹함이 있습니다. 기도가 살아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음질치는 사람만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해 믿음의 행군을 하며 끊임없이 달음질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할 때에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열심히 해보세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행동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미래의 천국을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현실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말고 자라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는 쉬어서는 안 됩니다. 완주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한순간도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목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시선을 목표에 두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지만, 문제에 빠지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우여곡절이 있다 할지라도 마침내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표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한순간에 목표를 놓칩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은 산만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도록 우리를 흔들어놓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목표보다 현실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가 많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보지만, 낮게 나는 새는 먹이를 잘 먹습니다.
그러므로 먹이를 잘 잡으려면,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해버립니다.
해운대에서 오륙도까지 오가는 유람선이 있습니다. 유람선 옆에 항상 갈매기가 함께 날고 있습니다.
갈매기가 왜 유람선과 함께 나는지 아십니까?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서입니다. 갈매기는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 유람선 주위를 돕니다. 그래서 그 갈매기들은 더 높이 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현실의 유혹은 위험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에 시달리다 보면, 영적 성숙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영적 성숙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이 연마되는 일도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원숙해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서 어느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황당한 행동을 합니다. 말씀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아는 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체화(體化)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방향, 시선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푯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현실의 잡다한 문제들이 우리의 시선을 흐트러 놓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신앙은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과 시선을 놓쳐버리고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푯대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영적 성숙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달려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바라본 사람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목표지점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한 방향을 향해 질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시선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왜 삶이 복잡해집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한지 아십니까? 본질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삶이 유치해지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삶을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질에 집중하면, 삶이 심플해집니다.
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합니까? 기도와 묵상은 우리의 삶의 목표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탈선하지 않았는지, 시선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조준하며 달려가야 할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맞춰진 초점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왜 아이가 길을 잃어버립니까? 엄마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바둑판만 보고 있으면, 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으면, 비행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둑과 관련된 격언 중에 ‘반외팔목(盤外八目)’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둑판 안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데,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불안함이나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눈팔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에서 한눈팔지 말고, 푯대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집중력이 신앙의 관건입니다.
고난이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힘들어서 고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난 속에 파묻혀서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혼자 당하는 것 같습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은 모두 행복해보입니다. 나만 불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난에 파묻혀서 인생이 점점 죽어갑니다.
고난만 보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 너머에 계신 주님을 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나를 나답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면, 푯대가 보입니다.
푯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목표를 바꾸면, 습관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도, 그리스도는 끝없이 깊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복음의 빛을 발견하고, 너무 좋아 밤을 새워보았지만, 복음의 광채를 다 볼 수 없는 바울의 안타까움이 본문에 묻어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광채를 다 본다면, 우리의 눈을 멀게 됩니다. 우리는 한꺼번에 하나님을 다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좁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한꺼번에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건 속에서 푯대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다 보면,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스탠포드대의 졸업식 연설에서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인생을 만들며, 마침내 세계적인 신화를 창조한 애플사가 탄생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점들이 연결되어 오묘한 일들이 일어나 애플사가 탄생했습니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난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우리의 인생의 점들을 연결하셔서 우리를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거룩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하십니다.
살다 보면 아찔한 순간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을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생에 수많은 파도가 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입니다.
목표를 놓치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애쓰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의 세계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역사는 개인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야 합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까? 목표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를 완성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어렵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힘듭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틀린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완성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그 길만이 미래가 보장된 길인 줄 믿습니다.
쉬운 길을 찾지 마세요. 우리의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변화되게 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야 합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허물, 실수와 실패가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연약한 허물이 다 벗겨지고,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연약한 모습에 머물러있지 않고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 달음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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