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 잘 듣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잘 듣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본문 / 요한계시록 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2~3). 이를 통해 말씀과 복이 연결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는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신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읽고, 듣고,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핵심은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혼란의 원인은 진리의 부재(不在)입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시대의 큰 특징입니다. 진리가 실종되었다고 말합니다.
느낌이 강조되고, 상황에 따라 이론이 바뀌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진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다닌다고, 예배에 참석했다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옵니다.
누가 신자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듣고 따라오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앙에서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잘 듣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 하십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사무엘 시대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왜 희귀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근원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무엘 시대에는 말씀이 희귀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없으면, 하늘이 닫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시대를 가리켜 ‘기근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서 기근인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풍성해도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그 시대는 기근의 시대입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다른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신앙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잘 듣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하기 이전에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열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듣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보면, 마리아는 듣는 것을 우선시했고, 마르다는 듣는 것보다 행동, 사역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원망 불평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귀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귀로 듣고 우리의 마음에 받습니다. 이것을 이해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에서 깨닫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깨닫는 단계의 다음은 순종입니다.
듣는다는 말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듣는다는 것이 아니라,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깨닫고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읽는 것, 듣는 것, 그리고 지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가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우리에게 밀고 들어옵니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첫째,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충 흘려듣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정보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듣지만 너무 많기 때문에 집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충 읽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둘째, 무관심입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기 때문에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다 반응하면 병납니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은 듣지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있지만 사실은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져야 온전히 들을 수 있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보화 시대의 특징입니다. 자기가 관심이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합니다. 들어도 깊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아는 것은 많지만, 가볍게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깊이가 없습니다.
돈이 되는 정보에만 귀 기울이고, 돈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려오는 수많은 정보에 무관심해져서 마침내 무지해집니다.
현대인들은 듣는 것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흘려듣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수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 뿐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 교회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설교만 골라 들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설교를 듣다 보면, 나중에는 설교를 음악 듣듯이 듣게 됩니다.
진리에 대해 깊이 경청(傾聽)하는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마치 음악을 듣듯이 듣고 지나가버립니다. 설교를 들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설교를 많이 듣지만, 가볍게 듣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하여, 진리를 소홀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은 듣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냥 듣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경청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듣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잘 듣지 못합니다.
믿음은 듣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듣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첫째, 들음을 통해 믿음이 자랍니다.
듣는 것을 통해 변화가 일어납니다. 듣는 것을 통해 우리 안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들어야 합니까? 듣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기독교는 스스로 도를 깨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철학의 명제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 우리의 생각보다 먼저 존재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우월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심오한 사상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것을 의존하여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세계 안에서 무엇인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 메아리만 칠 뿐입니다. 우리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思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啓示)의 종교’라고 합니다.
계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바깥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의(他意)에 의해 수여(受與)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합니다.
믿음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밖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어떻게 하시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낸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열심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무언가를 쥐어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열정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위로부터 부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하신 말씀을 내가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듣는 것입니다.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깥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게 지혜가 있어서 의미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셔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기도는 전투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주여 삼창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으면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초신자들은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별로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기도를 잘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은 말씀에 반응하기 때문에 기도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신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기도하려고 해도 하나님께 할 말이 없습니다. 들은 말씀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처음에 말을 배울 때에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을 마구 합니다. 그런데 엄마로부터 끊임없이 말을 들은 아이가 말을 잘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말을 별로 하지 않으면, 아이도 말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엄마들은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듣지 못하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을 통해 말씀을 듣지 못하면, 자아 중심적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고집이 세어집니다.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해왔기 때문에 자기 고집을 강화(强化)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아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일방통행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에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잘 듣지 않고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초입(初入)에서부터 듣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잘못 배워서 신앙생활의 틀이 잘못 잡히면, 잘못된 틀이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듣는 것이 훈련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잘 들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로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해도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자기가 하나님께 말하려 하고, 자기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화되면,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윤리성은 많이 떨어져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세계 교회 가운데 떨어집니다. 그래서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자신의 소리를 죽여야 합니다. 기도나 묵상의 핵심은 듣는 데에 있습니다. 듣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응답이 무엇입니까? 기도응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띄게 응답 받는 것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에 응답 받는 것을 별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응답 받았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온전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응답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자신이 찾고자 하는 말씀이나 자신이 원하는 말씀을 읽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었는데, 왜 순종할 수 없습니까? 말씀을 듣는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큐티를 오랫동안 하신 분들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큐티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본문을 여러 번 접하게 됩니다. 처음에 본문을 접했을 때에 줄을 그어놓은 말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순간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 안에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강한 필요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려우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지 못합니다.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으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꾸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꼬아버립니다.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순종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처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응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은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이 많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많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주일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의 욕망이 온전히 처리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에서 죄성이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우리의 환경 가운데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원하다, 갖다, 하다 이 세 가지 동사에 집중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탐하고 움켜쥐느라 안식을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듣기 위해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야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들리는 그때부터 신앙생활이 출발합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신앙생활은 불완전한 것이고, 앞길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그리고 말씀이 들린다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15, 눅 8:8).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7,11,17,29, 3:6,13,22).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듣는 것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대방이 말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곡해(曲解)하려고 합니다.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듣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듣고 또 듣는 가운데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많이 들어야 합니다. 많이 들을수록 좋습니다. 들음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를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聽從)하려는 자와 대화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라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것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소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 등에 시달립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남들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잘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많이 듣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소리를 많이 듣습니까? 사람들의 소리, 잡다한 소문, 인터넷 뉴스 등 어떤 것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요즘 사람들은 무언가를 듣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운전할 때에도 무언가를 듣습니다. 걸으면서도 무언가를 듣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소리를 단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목하고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들음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신앙은 깨어지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듣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듣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둘째, 들음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듣다 보면, 우리에게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가 들릴 때, 진리가 들렸다는 것이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깨달아지지 않으면, 단순히 정보(information)밖에 남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듣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를 흔들어놓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관통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체계와 관념을 흔들어놓습니다. 새로운 영적 질서를 세웁니다. 그래서 영혼에 빛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고민이 많아 복잡하고 어지럽고 정신없던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어둠의 세계에 빛이 임한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 빛이 임한 것입니다.
때로는 몸에도 이상 증세가 나타납니다. 몸에 열이 납니다. 특이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삶을 누르던 것들이 벗겨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가 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들이 벗겨지고, 어둠이 사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찌꺼기가 사라지면서 웅크리고 있던 것들이 기지개를 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신이 납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집니다.
아직 깨달음이 없다면, 말씀을 온전히 들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가 생깁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지혜가 생깁니다. 인생의 답을 얻게 됩니다.
잠언에 보면, 솔로몬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라고 말했습니다(잠 4:20).
듣고 깨달은 것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게 지혜로워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의 말씀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깨달음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식적으로 주워 담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혜’라는 말 속에는 ‘듣는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잘 듣는 사람은 지혜자입니다. 듣는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이 삶에서 지혜의 세계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세상의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신구약성경 66권은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원저자(原著者)는 한 분이시지만, 수많은 기록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지혜로 충만합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도 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망합니까?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생명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지혜의 근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을 읽고 깨닫는 가운데, 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생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생각하고, 책을 많이 읽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깨달으면,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시 1:2~3).
지혜가 없으면, 헛되고 미련한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삶을 청산하는 길은 지혜를 얻는 것이고,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듣는 것에서부터 옵니다. 잘 듣는 사람은 깨닫게 되어있습니다. 지혜를 얻게 되어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힘이 생깁니다. 깨닫는 것이 힘이 됩니다. 듣는 것이 모두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이 힘이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고, 설교를 많이 하지만, 제가 깨달은 말씀이 제 인생을 붙들고, 다른 말씀과 연결되어져서 제게 힘이 됩니다. 그것이 제게 힘입니다. 진리의 힘이 곧 깨달음의 힘입니다.
깨달음이 오기까지는 진리가 내 것이 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온전한 깨달음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놓습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에 힘이 됩니다.
깨달음이 많이 쌓인 사람을 우리는 고수(高手)라고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을 고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쌓이면, 강력한 인생이 됩니다. 깨달은 진리가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힘이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합니다.
깨달음이 주는 힘은 강력합니다. 삶의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깨달은 진리가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게 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기쁨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무엇에서 기쁨을 구하십니까? 진리를 통해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나이, 환경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기쁨은 진리를 통해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다른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우리의 영혼에서 기쁨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죽으나 사나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참된 진리를 알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기쁨과 같습니다. 뚜렷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무질서와 혼란을 한순간에 잠재울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들릴 때에 기쁨이 오고, 평화가 넘치게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을 순종으로 온전히 옮길 때에 우리가 들은 것이 완성됩니다.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종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온전하게 들은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청종하면 살리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설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디자인하신 것을 우리가 읽고,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듣는 것이고, 깨닫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아직 들은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복잡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의 내용 중에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성경은 어렵게 써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읽으면, 성경의 내용이 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자기만의 주석을 붙입니다. 자기 이론을 만들어냅니다. 말씀을 액면 그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좋은 신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는데 말씀대로 살고 싶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을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을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무감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선교사는 “나는 한 번도 희생해본 적이 없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했던 어떤 것도 의무감으로 힘들게 희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듣고 깨달은 후에 자연스럽게 순종으로 이어지는 삶을 통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통해 깨달음이 올 때에 우리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가진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기막힌 칭찬을 들은 사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어떠했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라고 칭찬하셨습니까?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8:8).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한 순종의 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눈에 백부장이 얼마나 예쁘게 보였을까요.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만을 바랐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믿을 때, 그 믿음은 경지에 오른 믿음입니다.
삶이 힘들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이 왜 귀합니까? 그것은 단순히 듣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움직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은 자의 태도입니다.
나에게 죽으라고 말씀하시면 죽을 것이고, 포기하라고 하시면 포기할 것이고,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이해(利害)와 상관없이, 내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순종했을 때에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옳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백부장의 한 마디의 말에는 믿음이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 내포되어있습니다. 여기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순종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순종하는 것은 쉽습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진리가 나의 영혼을 관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순종이 멀게 느껴집니다.
말씀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깊어집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외적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가 가장 위기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묵상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듣게 되고, 빨리 깨닫게 되고, 순종으로 옮기고 싶어집니다.
작은 음성에도 귀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음과 전쟁하고 있습니다. 소음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서 우리의 영혼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못하게 유혹하는 문화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소음과의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소음을 어떻게 차단하고 살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이 많습니다. 유튜브(Youtube)에서도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드나듭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1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집중력을 깨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가볍고 짜릿한 정보에만 익숙해져서 하나님의 진리 앞에 기다리지 못합니다.
소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차단기 역할을 합니다.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없습니다.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잡다한 것들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고,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우리의 집중력이 깨어져버립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보는 것을 조심하세요. 우리는 늘 무엇인가 보아야 하고, 무엇인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적 집중력을 얼마나 떨어뜨리는가를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감각을 소멸시키고, 영적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잡다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고 하고,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마세요. 범죄 기사(記事)들은 보지 마세요. 영혼에 해(害)가 됩니다. 그런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거룩한 무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영혼이 풍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차단 기능을 작동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신(交信)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의 영은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오염되기 쉽고,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자칫하면 어둠의 영이 우리 속에 밀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뜰을 관리해야 합니다. 영혼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오늘날 옥토는 어떤 곳일까요?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부터 보호받는 마음 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진다고 해서 그냥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준비된 영혼에 말씀이 뿌려질 때,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길이 열리고, 삶의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도우셔서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밝혀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나 성경을 읽을 때나 공부할 때나 언제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여, 깨닫게 하소서. 성령이여, 진리를 밝혀주소서. 성령이여, 도우소서. 진리를 열어주소서. 진리가 들리게 해주소서. 진리를 깨닫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과 시간을 가지면서 말씀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가지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 안에 꽉 차 있는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말씀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데, 내 안에 말씀이 별로 들어있지 않다면, 성령께서 난감하실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는 내가 아는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입을 여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순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말씀을 읽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제대로 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나는 안 되구나.’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연약합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씀 앞에 다시 서면,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 가운데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연약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순종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최종 승리는 하나님의 편에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비로소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이구나. 축복이구나. 생명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복이 됩니다. 실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상황이나 형편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므로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3장 10절에 보면, 사무엘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의 믿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듣고 있다면,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고 강해질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할 것이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인생을 당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따라가면, 당할 자가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모든 질서를 잡아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말씀이 가장 우선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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