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 중독사회에서 승리하는 신앙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중독사회에서 승리하는 신앙
본문 / 에베소서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오늘날 이 시대는 감각적인 시대입니다. 느낌(feeling)에 충실한 시대입니다.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감각적인 시대에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느낌이 강하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보다 느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결론 날 텐데,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각적인 시대에는 느낌이 매우 강하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인 시대는 말초(末梢)신경을 자극하는 시대입니다. ‘말초’는 나무로 말하면, 가지의 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시대는 아주 가벼운 만족을 얻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문화의 특징은 ‘빨리빨리’에 익숙합니다. 사람들이 오래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래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편리하고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에는 밥을 직접 지어서 먹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떼어 밥을 지어먹었습니다. 뜸을 들여야 했습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한참 기다려야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빨리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자신의 배입니다. 자신의 배를 채워주고 만족시켜주면, 모든 것이 오케이입니다.
사람들은 자극을 좋아합니다. 감각적인 시대의 특징은 ‘좀 더(more)’를 강조합니다. 음악을 듣다가 볼륨(volume)을 점점 높입니다. 그림도 굉장히 강렬해집니다. 먹는 것도 자극적인 맛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찾습니다. 초콜릿(chocolate)의 맛이 얼마나 자극적입니까. 맛이 굉장히 진합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좀 더 강한 것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처음에는 만족스러운데,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오감(五感)은 항상 좀 더 강한 것을 원합니다.
우리가 좀 더 강한 것을 찾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그 속에 빨려듭니다. 우리가 운전해서 가다 보면, 좀 더 빨리 달리고 싶어집니다. 좀 더 빨리 가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데,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여 우두커니 있을지라도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를 밟고 싶습니다.
우리가 좀 더 강한 것을 찾을수록 우리는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내성(耐性)’이라고 합니다. 집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갈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강도(强度)를 점점 높이게 됩니다. 강도를 높이면, 만족할 수 있습니까? 강도를 높여도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만족을 느낀다 해도 만족이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또 다른 만족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만족의 간격(interval), 우리가 만족하고 만족이 사라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예전에는 하루는 견딜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하루도 견디지 못합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만족을 찾고 싶어 합니다.
만족의 간격이 계속해서 짧아지면서 나중에는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감각이 파괴된 상태입니다.
감각이 무디어지고 파괴되면,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강도를 점점 더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로잡힌 상태를 ‘중독(addiction)’이라고 말합니다.
중독과 함께 금단현상(禁斷現象)이 나타납니다. 중독된 행동을 중단하는 순간, 금단현상이 나타납니다. 중독된 행동을 중단하면, 갑자기 불안해집니다. 짜증이 납니다. 정서가 불안해집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나중에는 자신이 집착하던 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의지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의지가 약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던 것을 철저히 의존하게 됩니다. 주의력이 산만해집니다. 자신이 집중하는 것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주의력이 산만해집니다.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컴퓨터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책을 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중독사회입니다. 중독 증세는 앞으로 더 가속(加速)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도 중독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독 증세가 가속되는 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독 증세와 싸워야 합니다.
중독사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면, 굉장히 심각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중독에 빠지게 하는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우리를 중독에 빠지게 하는 문화가 가득합니다.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독에 빠지는 과정이 오래되고 깊을수록 치료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독이 진행되는 각 과정마다 많은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중독을 치료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의 감각, 정서, 심리구조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정서적 건강뿐 아니라 육체적 건강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중독은 어느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으로 인해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해집니다. 어떤 것에 집착할수록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집니다.
중독 환자들은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딘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중독이 우리의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심리적, 정신적, 사회적, 관계적으로도 영향을 끼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독은 영적 사회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중독의 증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독된 상태를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방인들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18~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상태에 대해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해 “그들은 감각 없는 자가 되어”라고 말했습니다. 중독된 상태는 감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라고 설명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컨트롤(control)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중독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준 것입니다.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암(癌)은 육체의 세포가 굳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독은 마음이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독은 심리적, 정서적 암과 같습니다. 삶을 파괴해버립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살게 됩니다.
감각이 망가지고 마음이 굳어져서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총명함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욕심에 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총명이 없다는 것은 판단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깨어졌습니다. 이렇게 된 상태에서는 인생 전체가 망가집니다.
감각이 망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감각이 망가졌다는 것은 감각이 정상(正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중독사회에서 일어나는 치명적인 현상은 영적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중독은 집착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상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집중력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집중력이 떨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총명이 흐려집니다.
중독이 심해지면 멍해집니다. 알코올 중독자를 보십시오. 항상 술을 생각합니다. 밤에도 술에 찌들려있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술을 생각합니다. “술은 술로 깨운다”라고 말하면서 몽롱한 상태를 술로 깨우려 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기 전까지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밥을 먹기 전에도 술을 먹어야 합니다. 술로 찌든 속을 술로 풀려고 합니다.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중독은 힘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 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틀 동안 정신을 빼놓을 수 있는 것은 도박 밖에 없습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습니다. 도박에 중독되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도박장에 앉아있습니다.
돈 중독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봅니다. “돈”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술이나 도박, 마약에 중독되는 것 외에도 많은 중독이 있습니다. ‘권력 중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기도 중독됩니다. 거기에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요즘은 음식 중독도 많습니다. 한 가지 음식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중독도 있지만, 덜 파괴적인 중독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소비주의 사회입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중독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오히려 소비주의 사회가 중독을 부추깁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는 계속해서 팔아야 합니다. 상품, 프로그램 등을 팔아야 합니다. 상업주의의 기법을 동원하여 소비를 조장해야 합니다. 쇼핑(shopping) 중독, 신상녀(新商女) 등이 바로 소비주의 사회로 인한 중독입니다.
소비주의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에 빠지게 만듭니다. 화려한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빼앗습니다.
중독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욕구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다 보면, 중독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애정결핍의 상태에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을 느끼기 때문에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 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해도 빈 공간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애정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빈 공간을 채우려 하는데, 주변에서 소비주의가 소비를 조장하고, 우리의 감각이 그것에 끌려가니 그것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게임(game) 중독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스포츠(sports) 중독이 대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단적 광기(狂氣)가 있습니다. 취미가 적당한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갑니다. 그것은 중독입니다.
음악 중독도 있습니다. 스피커(speaker) 하나에 수억 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미디어(media) 중독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요즘 지하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잘 보지 않습니다.
중독에 빠지면 몽롱해집니다. 총기(聰氣)가 사라집니다. 심한 경우, 일상의 삶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영적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은혜를 받는 듯하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빨리 돌아가 버립니다.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에 돌아가 버립니다.
은혜를 받아도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중독된 것에 빨려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은혜가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예전에는 우리로 하여금 중독되게 할 만한 문화가 없었습니다. 굉장히 심플(simple)한 문화였습니다.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TV채널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영화도 집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문화가 우리의 말초신경과 정서를 굉장히 자극합니다. 돈만 내면 무엇이든 제공하겠다는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집중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빠져들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중독되게 만들고, 탐닉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문화의 바다에 떠있습니다. 이 상태가 되면, 영적 집중력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영적 갈망(desire)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중독은 엉뚱한 것에 갈망(渴望)하게 만듭니다. 중독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집착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촉각(觸角)이 곤두서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늘 생각합니다. 그것을 갈망합니다. 그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가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집착하는 것입니다.
갈망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망치는 것을 갈망할 것인지, 하나님을 갈망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갈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갈망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갈망하는 대상(對象), 방향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갈망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길이 달라집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중독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심각한 훼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상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에 영적 갈망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 갈망, 영적 사모함이 사라져버립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영적 갈망입니다. 영적 갈망이 없으면, 신앙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게 만드는 힘은 영적 갈망에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영적 갈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밥을 먹고 싶지 않으면, 병들어 죽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아도 입맛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최고로 좋은 반찬은 배고픔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입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끼만 먹지 않아도 무언가를 먹고 싶어 하는 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살게 합니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음식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는 사람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식욕이 넘쳐나기 때문에 집회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영적 식욕이 충만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하기에 바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느라 바쁘지만, 즐거운 이유는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성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적 식욕이 전혀 없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집중하지 못한다면, 설교하는 사람은 힘이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영적 사모함을 가진 성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영적 사모함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갈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갈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그것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영원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아무리 해봐도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갈망하도록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영적 갈망이 채워지면, 다른 갈망이 시시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보다 더 강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을 갈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장애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중독 현상입니다.
영적 굶주림이 있는 사람에게 영적 채워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관해 말씀하실 때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을 사람은 가장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의무적으로 오는 사람과 갈망하는 마음으로 오는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무덤덤한 마음으로 오거나 강요에 의해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사모함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갈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갈망 없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다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영적 갈망이 식어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기울어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이 이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것이고,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전혀 몰랐습니다.
단순히 의무감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고, 그것을 자신의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늘 시무룩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t)가 그린 그림〈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 보면, 큰 아들은 입구에 애매모호하게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어둡습니다.
그의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는 욕구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귀환을 즐거워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았을 때에 그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비록 나쁜 짓을 했지만, 방황의 끝에서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매우 깊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떠나보니 아버지의 집만한 곳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근처에 있기만 해도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갈망입니다.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모함, 갈망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신앙생활은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독은 갈망을 깨어버립니다. 그래서 중독은 위험합니다. 갈망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립니다.
여러분의 갈망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어져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비상(非常)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이 유지되는 만큼 우리의 심령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영원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중력이 사라져버리고, 갈망이 식어져버리고, 중독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해버리는 것보다 좀 더 길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선 완전히 만족하는 것보다 약간 모자라게 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무리 재촉해도 자신을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금방 응답해주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금방 금방 응답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망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기도한 것이 빨리 응답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하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할 때, 부모가 금방 해결해주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先進)들 중 영적 세계에 깊이 들어가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시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절망의 순간을 경험하고 난 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해져가는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위험한 것은 조급성(躁急性)입니다. 믿음은 조급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조급한 것은 믿음과 반대됩니다. 믿음생활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독에 빠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조급해집니다. 그래서 빨리 채우려고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빨리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불안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00을 다 채울 수 있어도 약간 덜 채워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약간 모자란 듯이 먹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무엇이든 조금 모자란 상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꽉 찬 것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뷔페(buffet)식당에 가면, 먹을 것이 많이 보입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는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배부름으로 인한 기분 나쁜 현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100% 다 채우면, 만족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만족을 느낍니다. 참 신기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100% 채웠다고 생각할 때, 만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만족을 느낍니다. 욕구 불만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다 채울 수 있어도 다 채우지 않고, 약간 모자란 상태에서 만족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100% 채워진 것으로 인해 만족하려고 하지 말고, 90%에 만족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훈련되면, 우리의 삶의 질(quality)는 높아집니다.
우리는 100%를 채워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00%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족할 수 있어야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수치(數値)의 개념을 떠나 어떠한 형편에 처한다 해도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외부 환경이 나를 주장할 수 없는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축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중독과 맞서 싸우는 훈련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절제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오늘날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절제(self-control)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절제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소비를 조장하고, 상업적 마케팅(marketing)이 주를 이루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절제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을 훈련하지 않으면, 우리는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독에 빠지면,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다른 것에 빼앗겨버리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무너져버립니다.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는 절제할 수 없습니다. 왜 성령의 열매라고 했을까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만, 성령께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므로 절제의 열매를 맺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놀랍게 역사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버리지 않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제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쓰십니다. 절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낭비됩니다. 방출됩니다. 엉뚱한 곳에 쏟아져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 중독으로 망가진 감각을 금식을 통해 복원해야 합니다.
금식은 절제의 훈련이며, 중독의 가장 좋은 처방 중 하나입니다. 금식은 우리의 영적 갈망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금식은 감각적인 것에 탐닉하려는 성향을 억제하는 훈련입니다. 육체의 욕구에 빨리 반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훈련 중 하나입니다. 금식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인가에 빠져들 것 같고, 컨트롤(control)되지 않고, 감각적으로 변해가고, 영적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면, 금식(fasting)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중독에 빠질까요? 내적 욕구가 찾아올 때, 채우려고 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욕구를 차단하려는, 적극적인 공격방법입니다.
음식을 금식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거스르는 훈련입니다. 식욕은 육체에 만족을 주는, 강렬한 욕구입니다. 이것을 거스르는 훈련이 금식입니다. 그러므로 큰 싸움입니다.
요즘은 음식만 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디어(media) 금식도 있습니다. TV,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영상물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미디어와 거리를 두는 훈련은 요즘 매우 힘든 훈련입니다. 특히 청소년에게는 힘든 훈련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인터넷과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훈련입니다.
이런 금식은 일종의 저항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본성적인 유혹을 저항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묶인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그 훈련을 통해 내 영혼이 묶인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금식 자체는 힘들지만, 육체의 본성을 거스르고, 그것을 묶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때, 금식을 통해 영적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금식은 일종의 나눔입니다. 움켜쥐려는 삶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심각한 중독은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쌓아놓으려는 것입니다. 움켜쥐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훈련은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초고속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적 부를 누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불안정하고, 어두운 가운데 있고, 사람들의 삶이 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쌓으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주는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가 사는 길은 나눔의 삶입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사는 길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부가 쌓일수록 이것을 해체하려는 세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은 나눔입니다.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탐욕의 성에 갇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삶이 끝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에서는 러브부산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노숙자사역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누는 것은 오늘날 중요한 이슈(issue)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담아놓거나 쌓아놓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이웃과 주변 교회, 한국 교회, 북한, 열방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여름이 되면, 농어촌교회에도 가시고, 해외 선교지에도 가셔야 합니다. 그것도 나눔입니다.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시간과 물질을 나누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집착과 중독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소비사회입니다. 그리고 중독이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딜레마(dilemma)입니다.
소비만 있고, 나눔이 없으면, 중독은 불가피합니다. 주어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것이 나를 사로잡아버립니다. 그래서 인생이 망가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고 베푸는 것은 구제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기 살기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질을 나누지 않으면, 물질이 나를 잡아먹습니다.
나만을 위해 축적하기만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한 돌봄의 삶을 살지 않으면, 중독으로 빠져버립니다. 자신만을 위해 쏟아 부으니까 중독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독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감각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금식은 스스로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족한 상태에 스스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의 목표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고,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집착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수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못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내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닌, 내가 집착하고 있는 우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 잡지 못하면, 세상의 것에 우리의 마음이 팔려버립니다. 세상의 종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면, 그때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결박으로부터 풀어주시고,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굶주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도시에서는 스스로 광야를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광야의 삶은 무엇일까요? 도시에 살지만, 불편한 것을 조금씩 감수하고, 부족한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부족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광야의 삶을 통해 비울수록 더욱 채워지는 은혜가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은 부요합니다. 스스로 광야를 선택하고, 도시에서 사막을 만들고, 좀 더 단순하게 살고, 집착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때, 그곳에 사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최상의 기쁨과 즐거움, 행복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았지만, 아버지의 집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종들도 풍족하게 누리는데, 아버지의 집 밖에서 거지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집착하고 중독된 삶은 가장 가난한 자의 삶입니다.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모셔 들이면, 온 세상을 가진 것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요동치는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부채질하는 주변 분위기에 의해 들떠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다른 것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빼앗긴 가장 심각한 것은 영적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속임이 강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 안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안해하고, 무엇인가에 쫓기고, 채우기 위해 지친 영혼들을 향해 주님은 “내게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매우 복잡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육신을 만족시켜줄 것처럼 유혹하는 것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문만 나서면, 우리의 후각(嗅覺)을 자극하는 음식들, 우리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좋은 물건들,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우리의 입을 황홀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감각은 날로 무뎌져가는 것을 모르고, 세상에 도취될 위험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은 간단히 빨리 해결해버리고,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곳에 줄을 섭니다. 우리의 감성, 정서 혹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많이 망가졌습니다.
초콜릿이 좋아 계속해서 먹다 보면, 이빨이 상하고, 밥맛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미 세상의 문화에 피할 수 없이 젖어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세상의 문화를 어느 정도 탐닉하고 있어 우리의 감각 기능은 현저히 떨어져있습니다.
세상에 빠져들수록 우리의 영혼은 빨리 쇠퇴하고 초라해져갑니다. 우리는 성미가 급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신경질을 내고, 쉽게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우 위험한 문화의 한 가운데에 갇혀있습니다. 문화의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매일매일 탈출을 시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혼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만연해있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23~24절에 보면,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부추기는 문화 속에 익숙해진 구습을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흉내 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다가는 큰 일 납니다. 감각이 무뎌져가는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갈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갈망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것이 좋든 좋지 않든, 어떤 갈망이든 갈망은 식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갈망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외부적 요소에 의해 우리가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혼을 거스르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강력한 갈망들은 하나님 외에는 다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만을 탐닉하고, 하나님만 집중하고, 하나님께 몰입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중독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 그 안에서 주어집니다.
우리의 영적 식욕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날마다 일어날 때,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맛보지 않았던 기쁨과 새로운 만족, 새로운 행복이 그 안에서 주어질 것입니다.
일시적이고 얄팍한 즐거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만족을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유해(有害)한 것에 익숙해져서 감각과 정서와 영혼이 상해버린 영적 환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중독되어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영적인 것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되 간절히 찾지 않는다면, 세상의 것에 중독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육신의 배가 고파 밥을 찾는 열망의 10배, 100배 이상으로 영적인 배가 고파야 합니다.
우리는 밥 한 끼만 먹지 않아도 욕구가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영적 갈망은 그것보다 훨씬 강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속임에 말려들지 마세요.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떡과 비교할 수 없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쉽게 떡을 만들어버리라는, 마귀의 얄팍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육체를 순간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유혹과 매일매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만족을 얻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주는 감각적인 것에 익숙해져있고, 중독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독(解毒)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굶주려야 합니다. 육신의 배가 고플 때마다 내 영혼의 배가 이렇게 굶주리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누리고, 그 안에서 영적 부요함을 얻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부요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온갖 것으로 우리를 흔들어대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주십니다. 가장 안전하고 만족한 삶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초점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세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다른 곳에 집착하지 말고,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갈망하세요. 하나님께만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 목말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의 강수(江水)로 초대하실 줄 믿습니다. 그 안에서 참된 만족과 참된 회복,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세상에 껄떡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하나님 안에 푹 빠져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맛보았던 기쁨은 진짜가 아닙니다.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 빠져들게 하고, 우리를 망가뜨립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만 갈망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일평생 식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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