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풍성한 삶 가능한가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소비사회, 풍성한 삶 가능한가
본문 / 마태복음 6:24~3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합니다. 몇 주 전에 중독에 대해 설교한 바 있는데, 소비사회와 중독은 서로 통합니다.
소비사회가 중독을 낳았습니다. 소비사회에 빠져들어가면, 중독 상태가 됩니다. 소비하게 하는 문화 안에서 중독은 꽃을 피웁니다. 소비를 조장하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중독되기 쉽습니다.

소비사회에서는 소비하는 것이 미덕(美德)입니다. 사실 소비해야 경제가 움직입니다. 경제가 움직이려면, 소비해야 합니다.
월급을 받았다면,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써야 합니다.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월급을 받지만, 월급을 받는 이유는 열심히 소비하라는 것입니다. 소비해야 회사가 움직이고, 회사가 움직여야 경제가 움직이고, 경제가 움직여야 국가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소비사회에서 가장 나쁜 행위는 소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소비해야 세상이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소비하지 않으면, 경제가 멈추어버립니다.
때로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돈을 풀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돈을 쓰게 만듭니다. 돈이 회전되지 않으면, 경제가 막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국민들로 하여금 돈을 쓰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이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많은 것을 구입하고, 소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비사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돈을 벌면, 그 돈을 써야 할 곳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쓰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돈이 생기면, 돈을 써야 할 곳이 반드시 생깁니다.

광고가 강렬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때로는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광고에 노출됩니다.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거대한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합니다. 높은 빌딩에서 액정TV를 통해 화려하게 광고합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도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눈을 둘 곳이 없어 광고를 수없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외울 지경이 됩니다. 버스, 지하철, 택시, 심지어 전봇대에도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3천 번 이상 광고에 노출된다고 합니다. 무슨 재주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세뇌당하고 있습니다. 보험광고를 보면, 당장 가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건강과 관련된 상품광고를 보면, 그것을 구입하지 않으면, 병에 걸릴 것 같습니다.

소비사회는 우리에게 염려하도록 계속해서 다그칩니다. 세상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합니다. 좀 더 행복해지고, 안전한 삶을 살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를 좇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광고는 우리에게 ‘당신은 지금 충분하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합니다.

요즘 광고는 과시적 소비를 부추깁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려고 소비하게 합니다. 어떤 물건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불안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소비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구입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그러므로 소비사회에서는 만족이 불가능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가졌다 해도 더 좋은 것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비사회는 끝없이 비교하는 문화를 조장합니다. 나만 좋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억만장자라 해도 또 다른 억만장자를 따라잡으려면,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듭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요트(yacht)가 있습니다. 사우디 왕가(王家)에서 보유 중인 147m의 호화 요트가 있습니다. 요트가 147m라면, 요트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두바이 국왕(國王)이 그것보다 더 큰 160m의 요트를 제작 중이라고 합니다. 147m보다 13m 더 긴 요트를 제작 중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부호(富豪)가 그것보다 더 큰 요트를 제작 중인데, 길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길이를 공개하면, 누군가가 더 큰 것을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동독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나아졌습니다. 통일되기 전, 동독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통일 이후 서독에서 많이 나누어주고, 서로 왕래하면서 동독이 경제적으로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동독 사람들의 만족도는 이전보다 떨어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독 사람들과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취직했어도 동독은 공산권 속에 있었기 때문에 숙련공이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보니 임금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 이전보다는 많이 받지만, 서독 사람들과 비교되니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고, 갈수록 가난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필리핀의 빈민가를 돌면서 ‘어쩌면 이렇게 못 살 수 있나,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일행 중에 탈북한 자매가 있었는데, 이들에 비하면 북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절대 빈곤층이 있지만, 필리핀의 빈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방글라데시보다, 필리핀보다 행복지수가 낮습니다.

소비사회는 아무리 가져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늘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피곤합니다. 늘 무언가에 쫓깁니다. 염려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소비사회에 끌려다니다 보면, 아무리 벌어도 가난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궁핍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고성장시대에 있지 않습니다. 저성장시대에 있습니다. 고성장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시대에는 검은 돈도 있고, 눈먼 돈도 있고, 갑자기 떼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저성장시대입니다. 고속으로 성장할 때에는 갑자기 돈이 생기고, 부동산가도 폭등하는 등 별 일이 다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은 일부러 전세로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삶의 방식(pattern)이 과거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소비가 조장되어 마음껏 소비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우리의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한데, 본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상대적 빈곤을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가난하고, 궁핍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주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소비주의 사회에 기막힌 답을 제시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을 정확하게 가르쳐줍니다.
본문 31~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TV를 보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관련한 프로그램과 광고로 가득합니다. 세상은 여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에 올인(all in)합니다. 이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에만 관심을 두어도 끝이 없습니다. 그냥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먹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는 먹는 것이 기업 마케팅과 연결되어 우리에게 수많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소비에 대한 유혹은 끝없습니다. 소비를 따라가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방인들은 염려합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꽂혀있으면,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는 염려, 불안, 걱정, 두려움, 공포 등입니다.

우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이것은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오늘날과는 맞지 않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오늘날 우리의 삶의 괴리가 매우 큽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지만, 말씀을 적당히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입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강력한 소비문화가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버립니다.
소비문화로 뒤덮인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비교를 부추기며 우리 안에 있는 욕망에 불을 지르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2천 년 전의 말씀을 오늘 우리 안에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차보다 더 좋은 차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설교는 훌륭한데, 목사님은 현실을 이해하시지 못하시는 것 같아. 말씀은 좋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무리야.’라고 생각하며, 우리 마음대로 적용해버립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성경의 주석을 달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부록을 자기 스스로 만듭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않는 태도가 우리 안에 아주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주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본문의 말씀대로 지키면, 전혀 염려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굉음(轟音)을 울리며 여러분들을 흔들어놓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진리를 추구하려고 합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시대가 지나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믿습니다.
진리가 한 시대에는 멋지게 적용되고 타당한 원리였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또 다른 진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왜 믿겠습니까. 시대가 바뀌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수천 년이 흘러도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진리입니다.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절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수학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공식을 바꿉니까? 수학문제는 공식에 따라 풀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삶에 정확한 해답이 됩니다. 여기서 한 치도 물러서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적당히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미궁에 빠집니다. 가장 위험한 삶은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문화가 주는 메시지를 삶의 기준으로 삼지 마세요. 상황을 가지고 말씀을 해석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의 문화와 상황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상황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 합니다. 그것은 넌센스(nonsense)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은 2천 년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효(有效)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삶의 진리로 붙들면, 이방인과 같이 염려하지 않아도 멋지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어지면, 우리는 말씀을 고쳐서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야.’라고 생각하며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삶이 힘들어지고 어려워질수록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더 접근해야 하고, 더 집중해야 합니다. 힘들수록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꼬여있고,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있다면,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타협하며 적당히 애매모호하게 말씀을 붙잡았다면, 다시 확실하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문제로부터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상황에 밀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진리는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고, 무질서해지고, 혼란에 빠질 때, 우리를 건져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도 만족하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초점을 맞춘 삶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비주의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은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먹지 말라, 마시지 말라, 입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소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소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돈을 벌고, 돈을 써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지,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이 말씀은 사람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막의 수도사(修道士)가 될 수 없습니다.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금욕주의자가 된다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금욕주의자가 된다면,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특별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선순위를 강조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가 잡힌 삶입니다. 우선순위가 잡힐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삶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염려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에 집중할 때 염려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에 집착할 때, 마음이 깨어지면서 염려가 찾아옵니다. 여러 가지를 좇다 보면, 마음이 짓눌립니다. 마음이 짓눌리므로 염려가 찾아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생각은 반드시 염려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분명해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삶의 태도를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초점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두라는 의미입니다. 삶의 태도와 관점을 바꾸는 순간, 우리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소비중심의 문화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식주에 우리의 눈길을 두는 순간, 우리는 가난해지고, 염려에 빠질 것입니다.
소비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로 인해 낙심하게 되고, 불행해집니다. 소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낙심하게 되고, 불행해집니다. 소비에 관심을 두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문화의 간섭과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를 받는 순간, 우리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풍성해집니다.

좋은 집을 갖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하고, 선교사님을 접대하는 등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집을 활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의 크기가 삶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여야 합니다. 자기 혼자 만족하려고 더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계속해서 갈증만 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은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을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의 공급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무엇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결재 없이 우리 마음대로 물질을 사용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돈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돈의 주인인 것처럼 돈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누구의 통치를 받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의 지배를 받고, 세상 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는지, 어둠에 속했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돈을 어디에 사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적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것은 맘몬(mammon, 탐욕을 상징하는 악마)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탄을 어떻게 대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이 사탄을 강력하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재 없이 우리 마음대로, 육체의 본능을 따라, 욕망이 이끄는 대로 돈을 사용하면, 사탄의 권세 아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탄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라고 해서 귀신 쫓는 것이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직결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의 돈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이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의(異意)가 없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주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조금의 타협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

애매한 태도로는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재물이나 세상의 것에 관심을 보이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재물에 대해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돈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위해 돈을 구한다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이 많이 소비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또 구입하고 쌓고 또 쌓습니다.
우리는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가만히 보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필요 없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전혀 필요 없는 것임에도 꼭 필요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앞으로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즉각 사지 말고 기도해보세요. 답이 금방 나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소비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특별히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불안해합니다. 폴 투르니에(Paul Trurnier)가 쓴 〈강자와 약자(The Strong and The Weak)〉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회에는 강자와 약자가 있는데, 이들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강자는 늘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약자는 절망합니다.
경제적 강자도 언제나 불안해합니다. 경제라는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늘 절망합니다. 그런데 둘 다 똑같습니다. 더 가지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은 강자나 약자나 동일합니다.

경기(景氣)는 변화무상합니다.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가진 것으로 인한 염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중독사회에서 금식은 중요한 해독제가 됩니다. 소비사회에서 중요한 해독은 ‘나눔’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화해와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4).
이사야 58장에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사 58:6~7). 사람들의 짐을 벗겨주는 것이 의를 실현하는 것이요, 진정한 금식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으로 나를 위해 소비하는 삶에서 남을 돕는 삶으로 삶의 패턴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부요해집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남을 돕는 삶을 살 때,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더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잠언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잠 19:17). 도울수록 부요하게 되는 원리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아이가 자신의 오병이어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을 때, 5천 명이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눔을 통해 함께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샬롬(shalom)이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입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소비주의에 빨려 들어가 살다 보면, 인간 자신이 소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현대인들은 소모되어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에너지, 젊음 등을 쏟아 붓고 난 후에 얻은 일부를 소비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벌어서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잘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합니다.
이웃과 풍성하게 살아가는 삶이 우리를 부요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0). 예수님은 물질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물질을 어디에 쌓아둘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삶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의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때, 더욱 풍성해지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의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의 강한 급류(急流)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천하는 일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이 단순해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된 삶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비주의 세상의 급류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소모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우리의 삶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염두에 두지 말고, 그것에 관심을 두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선명합니까.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문(反問)하셨습니다. 거듭해서 강조하시며 쉬운 예화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내 자녀가 아니냐, 내 백성이 아니냐, 내가 너희를 책임지지 않겠냐, 왜 염려하느냐. 이방인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마라. 네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우리를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소비주의 문화에 휩쓸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소비주의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고상하고 매력적이고 여유롭고 안정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한 사람이 부자입니다.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영혼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영혼 가운데 하나님이 없음에도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 행세를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거지입니다. 나눌 줄 모르고, 돈을 가지고 부들부들 떨고, 남들이 자기를 무시할까봐 허세를 부립니다. 그런 사람을 부자라 할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부요한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천하에 부러운 것이 없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부러운 것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여유와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꽉 찬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기죽지 않습니다.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나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는 사람만 부러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돈으로 세상의 것을 마음껏 즐기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소유하고 소비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은 바닥을 긁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의 공급을 받으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집중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더 부유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면, 내가 가진 물질에 하나님께서 더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재산, 재능과 능력, 경험 등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넘치게 부으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까지도 부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흩어놓는 소비주의에 우리가 끌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질서정연하고 멋지고 매력적이고 풍성하고 집중력 있고 파워풀(powerful)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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