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좋은 신자는 갈망이 식지 않는다
본문 / 시편 34:8~10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행복한 순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 행복을 느낍니다.
본문에 보면,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간결하면서도 멋지게 묘사했습니다.
신앙은 맛보는 것입니다. 맛보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맛본다, 얼마나 실제적인 표현입니까. 느낌이 와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 아닙니다. 사상도 아닙니다. 애매모호한 사설(私說)을 늘어놓는 것도 아닙니다.
‘맛본다’는 단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맛본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입니다. 맛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먹고 맛을 느끼는 순간, 행복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입맛이 살아있습니다. 아무리 아픈 사람이라도 입맛이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입맛이 곧 살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맛을 볼 때에 혀의 기능이 중요합니다. 혀는 맛을 분별합니다. 좋지 않은 것을 계속해서 먹으면, 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맛만 좋은 것을 계속 먹으면, 성인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유해(有害) 식품이 많습니다.
우울증과 먹는 것과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한 보고가 있습니다. 호주의 멜버른대학교에서 10년 동안 1천 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가공하거나 기름에 튀긴 음식,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 등 서구식 식단을 섭취한 여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50%나 높다고 합니다.
반면, 채소나 과일, 잡곡, 생선을 먹은 사람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에 걸릴 확률이 30% 낮다고 합니다.
정크푸드(junkfood)는 일시적으로 기분을 상승시켜주고,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증가시켜주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불만과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우선은 좋지만, 나중에는 힘들어집니다.
어떤 맛에 길들여지느냐, 어떤 맛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맛을 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맛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 맛을 들여가는 것입니다. 신앙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영적 세계의 깊은 맛을 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맛을 아는 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맛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직 신앙이 깊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하는데, 옆에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맛을 아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맛을 찾습니다. 참맛을 알기 때문에 맛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맛을 모르면, 다른 것을 찾아다닙니다. 딴 데를 기웃거립니다.
신앙세계에서 최고의 맛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선하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정(climax)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것은 신앙의 노른자입니다.
맛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맛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맛을 본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맛본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혀를 통해 맛을 느끼지만, 뇌에서부터 만족을 느낍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영혼 깊숙이 감동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혀끝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 사람들은 탄성(歎聲)을 지릅니다. 너무 좋으면 온몸을 흔들리고 합니다.
사실 식욕을 일으키는 것은 입이 아니라 뇌입니다. 배는 부른데, 음식이 계속 당기는 것은 뇌의 작용 때문입니다.
맛을 보고 알게 된 것은 잊을 수 없습니다. 깊이 각인됩니다. 경험하고 난 후에 아는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은 매우 다릅니다.
여러분의 신앙세계를 잘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경험해서 아는 것이 쌓여가고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쌓여가고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쌓여가는 것과 경험을 통한 지식이 쌓여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혀 다른 길입니다.
맛을 보고 나면, 그 후에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맛을 보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듯 말 듯 합니다. 그러나 경험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명한 식당에 갔다 온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뛰어난 셰프(chef)가 만든 요리를 먹고 와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먹으면서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식당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습니다.
김치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김치의 맛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김치 냄새라도 맡아보았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김치를 본 적도 없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김치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직접 먹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것은 김치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김치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오묘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만큼 압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맛보는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닷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친 자들에 대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와서 나의 사랑을 먹으라”, “나의 용서를 먹으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용서가 무엇인지 공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용서에 대해 강연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온몸으로 용서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들은 도망가고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들을 용서한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전율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조반을 맛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주님의 성품은 제자들의 온몸을 감싸고, 그들의 영혼까지 흔들어놓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먹는 행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먹으면 음식이 위장으로 들어갑니다. 위장에 들어간 음식이 소화되면서 영양소로 분해됩니다.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흘러갑니다.
마지막 만찬은 하나의 의식(儀式)이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가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기막힌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한 이론가가 아닙니다. 심오한 진리를 알 듯 모를 듯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아서 먹으라”, “마시라”라고 말씀하시며,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는 것 이전에 맛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단순히 아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맛을 본 후에 알아야 합니다. 맛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늘 추상적으로 알 뿐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에는 ‘배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맛을 본 후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공부하는 것으로 여기지 마세요. 말씀을 배우셨으면, 그것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신앙의 추상화가 오늘날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 경험하지 못하고,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알 듯 모를 듯 모호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박이 인체와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문학적 소고(小考)’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고 합시다.
수박을 먹어본 사람 1천 명을 만나 수박을 먹어본 느낌과 먹고 난 후에 일어난 인체의 반응에 대해 조사하여 정리했습니다.
수박을 예리한 칼로 다양한 각도에서 잘라서 분석하여 두꺼운 논문을 썼다고 합시다. 다양한 기호와 도표가 첨부되고, 수박을 먹어본 사람들의 진술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논문을 쓴 장본인은 수박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수박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요? 이 사람은 수박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학자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는 뛰어난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목사가 있다는 것을 유럽에서는 신기한 일로 여깁니다. 성경 지리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특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맛을 보고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맛을 보고 아는 신앙의 세계로 진입하시기 바랍니다. 맛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의 맛을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의 맛이 어떻습니까? 기도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하나의 기도의 형태에 있어서도 기도의 깊이는 매우 다릅니다.
기도에 관련한 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에 대한 책은 다 명저(名著)입니다. 내용이 심오합니다. 최근에 출간된 팀 켈러(Timothy Keller) 목사가 쓴 〈기도(Prayer)〉도 명저입니다.
안식의 기도에 대한 내용만으로도 어마어마합니다. 묵상의 기도가 얼마나 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것처럼, 기도의 맛은 끝이 없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기도의 맛과 연관 있습니다.
기도의 맛을 경험한 사람은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가 당깁니다. 식욕이 당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관습에 따라 기도합니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지만, 기도의 맛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관습에 따라, 직분에 따라 의무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하면 시간이 갈수록 맛이 깊어집니다. 기도의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높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냥 말씀을 읽지 마시고,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의 맛을 느끼셔야 합니다. 말씀의 진미(眞味)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읽는다’는 표현보다는 ‘말씀을 맛본다’, ‘말씀을 먹는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말씀을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계 10:9).
시편 119편에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19:103).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을 사도 요한도 동일하게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몸속에서 소화되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흘러 근육이 되고, 뼈가 되고, 살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내 영혼에 힘이 솟고, 영적 근육이 생기고, 영적 에너지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영적 작용이 내 영혼 속에서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의 입에는 항상 무엇인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우물거립니다. 그것이 묵상입니다.
맛없는 것을 어떻게 계속 씹어 먹을 수 있겠습니까. 묵상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말씀의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펼치기만 해도 잠이 온다면, 그 사람은 아직 말씀의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말씀에는 음미할수록 맛이 있습니다. 끝없이 우러나오는 맛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빨아먹고 곱씹고 핥아먹어야 합니다.
이전에 여러 번 묵상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다시 묵상해보세요. 이전에 경험한 맛이 아닌,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 은혜를 받은 말씀이지만, 세월이 지나 다시 묵상하면, 또 다른 맛으로 다가옵니다.
시편 119편은 총 176절로,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절부터 176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을 보면, 말씀의 맛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시편 119편 103절에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19편 131절에 보면,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맛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시편 기자들은 말씀의 강력한 맛을 다양하게 묘사했습니다.
예배의 맛을 아십니까? 예배의 맛은 깊습니다. 공적 예배든, 삶에서 드리는 예배든 예배는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맛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기름 부으심(anointing)이 있고, 하나님과의 결합이 일어나는 순간에 압도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갈 때에 경험하는 즐거움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깊어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사람마다 경험하는 맛은 제각기 다릅니다. 맛의 강도(强度)와 질도 다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율하게 됩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기절할 것 같은 감격이 밀려옵니다. 예배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의 입술에서 “충분합니다(It's enough).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그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의 속삭임, 주님의 터치(touch), 주님의 안아주심, 주님의 호흡, 주님의 향기를 느껴야 합니다.
찬양할 때에 느낄 수도 있고, 기도할 때에 느낄 수도 있고, 묵상하는 가운데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혼자 앉아있는 동안에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온몸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의 깊은 맛을 경험하면, 세상의 것에 대한 욕망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 준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만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가 가장 최고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경험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은 맛을 안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세상을 압도하는 영적인 맛을 찾는다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와 복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배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매주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양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특히 보혈 찬송을 부르는 것이 매우 좋았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찬송을 부르면, 너무 행복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매우 행복했습니다. 기독교방송을 틀어놓고 귀에 갖다 대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회 장소가 아무리 멀어도 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강렬한 맛을 경험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맛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오직 그것만을 구합니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를 통해 깊은 은혜를 경험한 적이 많습니다.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압니다.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에는 압도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좋은 신앙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맛을 보았기 때문에 갈망이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은 상대적으로 점점 줄어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점점 깊어집니다. 그래서 쉽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진짜 맛을 경험한 사람은 그 맛을 다시 찾게 되어있습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은 초콜릿을 늘 찾습니다.
고강도(高强度)의 맛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맛에 이미 중독(addiction)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맛을 경험한 사람에게 갈망이 생깁니다. 진짜를 맛본 사람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과 대체(代替)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조곰탕집에서 우려내고 우려낸 국물을 먹은 사람이 다른 것을 먹으려 하겠습니까.
세상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고프면 밥을 찾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고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더 크고 강력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로잡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 갈망이 깊어져야 합니다. 맛을 찾는 영적 선호(選好)가 뚜렷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이 점점 더 강해져야 합니다.
저는 한때 콜라를 좋아했습니다. 심방을 가면, 성도들이 콜라를 내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콜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콜라를 아예 마시지 않습니다. 대신 탄산수(sparkling water)를 마십니다. 선호하는 것이 바뀐 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호하는 것이 바뀝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에 대해서는 시들해집니다. 하나로 집중하게 됩니다. 영적 세계에 맛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오는 진짜 맛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계속 먹으면 싫증납니다. 이것이 세상의 것이 가진 한계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전에는 미칠 것처럼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시큰둥해집니다. 예전에 집착하고 바보처럼 좇아 다녔던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것보다 강한 맛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좇아 다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끝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신비롭고 새롭기 때문입니다. 풍성하고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오늘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새로운 분이십니다.
10년, 20년, 30년, 50년 간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나님이 변함없이 새로운 분으로 느껴지십니까?
신앙생활의 적신호(赤信號)는 영적 입맛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영적 식욕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찬양을 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리가 그리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면, 영적 입맛이 사라진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젊은 사자와 여호와를 찾는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식욕이 왕성한 젊은 사자가 주린 상태로 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넓은 사막에 있다 하더라도 먹잇감을 찾을 때까지 돌아다니며 주린 상태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젊은 사자와 여호와를 찾는 자를 대조함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젊은 사자가 주린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갈망해야 함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구하고 또 구해야 합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난 후에 지은 시입니다. 매우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미친 체하며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비참한 세월을 보내며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아주 절박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만 절실하게 갈망하며 시편 34편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젊은 사자가 주린 것보다 더 주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너무 좋아서 교회에 나오는 것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것을 맛보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식욕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런 증세가 오늘날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신앙의 갈등이 일어납니까? 갈등이 일어나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산만(散漫)하게 합니다.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밥 먹기 전에 아이가 엄마 몰래 사탕을 먹고 나면 밥맛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밥을 열심히 먹지 않습니다.
오늘날 영적 유해 식품이 세상에 널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맛을 잃게 만듭니다. 예배의 참맛, 말씀의 참맛, 기도의 참맛을 잃고, 세상의 맛에 점점 빠져듭니다. 우리는 아차 하면 영적 삶을 놓치고, 세상의 너저분한 것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육욕(肉慾)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영적 식욕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보기에 좋고, 만족을 주는 것 같아도,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망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우선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입을 즐겁게 하는 것을 찾으면, 성인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에 좋은 것은 맛이 없습니다. 텁텁한 밥이 건강에 좋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갈망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영적 집중력을 흩뜨려 놓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여러분의 영적 입맛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결판납니다.
영적 입맛이 24시간 살아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기꺼이 반응하십니까? 늘 하나님을 사모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식지 않습니까?
세상의 것들로 배부른 자가 아니라, 평생 하나님으로 인해 배부른 자로, 하나님께 굶주린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기 원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즐거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적 식욕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언제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영적 입맛이 약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 구미(口味)가 당기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며 거기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영적 입맛이 살아있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영혼을 만족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잘 먹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면, 이 땅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거기서 힘이 납니다. 영적 입맛이 살아있으면 됩니다. 말씀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을 행복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 식욕이 떨어지면 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입맛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영적 입맛이 살아있으면,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합니다. 갈망합니다. 사모합니다. 배부를 때까지 물러서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늘 주린 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기 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또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채워지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소원은 사라질 것입니다. 기쁨의 극치(極致)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홀합니다. 거룩한 즐거움이 넘쳐흐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때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살맛이 날 것입니다.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좋은 것이 흘러나올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승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영적 입맛이 사라지지 않기를 원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예배에 대한 갈증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 전 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식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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