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저녁예배설교]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라
본문 / 사무엘상 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본문의 말씀은 어려울 수도 있고, 아주 쉬울 수도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이십니다. 제한이 전혀 없으신(unlimited)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한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접속(接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하나님과 떨어져 상관없이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접속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굉장한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것이 단절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다시 이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동선(動線)이 됩니다. 믿음이 강하면, 하나님과 강하게 접속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께 있는 능력과 지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무한한 자원들이 우리에게 흘러오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다양한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수원지의 물이 가정으로 오기까지 연결해주는 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관이 끊어졌거나 녹이 슬거나 막혀있으면, 물이 흘러올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와이파이(Wi-Fi)가 터지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곳에서는 인터넷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휴대폰이 발달되어있어서 어디서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연결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순간, 지구촌 어디와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고 싶은 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세계와 이어집니다.
연결된다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 최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보다 나은 접속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접속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지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삶은 한 순간에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연결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누구와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접속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흘려보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통로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접속된 곳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 됩니다. 하나님과 접속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아예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차이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연결하려고 해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신 상태가 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도 있고, 들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신 상태가 매우 양호한 사람입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 3장 1절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는 말씀이 거의 끊긴 상태였습니다.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 끊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자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송신(送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신(受信)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침묵하시면,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바로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기근 중의 기근은 말씀의 기근입니다. 가장 무서운 기근입니다.

아모스 8장 11~13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의 기근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있으면, 시대 전체가 어두움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일종의 재앙입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희귀하면, 영적으로 갈하여 쓰러집니다.

본문에 보면,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와 어린 사무엘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 지도자였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막에서는 밤에 등불을 켜서 아침까지 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밤임을 의미합니다.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3절 뒷부분에 보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2절의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는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야 할 것 같은데,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사무엘이 누워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직분이나 나이, 경륜과 상관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상태를 잘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과 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엘리 시대와 영적 상황이 비슷한 시대가 또 한 번 있었습니다. 엘리 시대에 영적 어두움이 있었던 것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직전에 영적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를 ‘하나님의 침묵기’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심각한 영적 접촉 불량이 일어난 시기에 하나님과의 최상의 접촉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를 가리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마 3:3).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出現)과 하나님의 새 시대를 여는 계시를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시대에 그 말씀을 송출(送出)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통로를 열어놓으셨습니다. 엘리 시대에는 어린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던 야인(野人)이었습니다. 멋진 성전 안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빈 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풀어놓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통로입니다. 누구를 통해 일하시는가, 누구에게 말씀을 흘려보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풀어놓을 자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접촉 상태가 양호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나 직분자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먼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도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나은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고 말씀의 능력으로 병이 나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 항상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들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시대 전체가 어두움에 휩싸여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제 엘리 시대는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와는 할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절연(絶緣)된 엘리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제 너와 일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너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끊어지면,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직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재앙에 가까운 일입니다. 기근 중의 기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결된 자와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결된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일어나는 곳이 역사의 주 무대가 됩니다.
우리가 평신도로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에 다니거나 무엇을 하든지 삶의 영역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엘리와 신약의 세례 요한을 대조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성전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서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엘리는 성전에서 살았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성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 세팅(setting)된 곳입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것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피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거룩하게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거창한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도권의 제사장이나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웃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소(聖所)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터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입니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으로 가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 제도나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이 성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는데,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긴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목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해박한 지식으로 성경을 꿰는 성경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목말랐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끊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궤변에 불과했습니다. 소음(騷音)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가슴이 탔습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없는 말씀으로 허기를 일시적으로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은 좋아지지만, 돌아서면 공허해졌습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이와 직분에 상관없습니다.

사무엘은 굉장히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직 성전에 대해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해 성전에서 일평생을 보낸 엘리는 성전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직분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엘리의 육신의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보면, 엘리는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넘어져서 죽었습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영은 자동적으로 어두워집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영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기능이 멈춘 것입니다.

엘리와 세례 요한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만 열심을 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만 열심을 내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포장되어있지만, 들여다 보면 자신의 일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엘리와 두 아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그것이 일이 되고, 일을 계속하다 보니 자신의 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경종(警鐘)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 답을 얻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잊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거창한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형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외치는 광야의 소리(voice)였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아실현과 성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의 삶을 요한복음에서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언제 짜증이 많이 납니까? 하나님께 대해 불평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왜 하나님께 불평합니까?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으실 때, 우리는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이 강화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계속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파수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인지 자신의 일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영광이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자아 중심적 삶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신하는 데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께 주장하고 싶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이기심이 굉장히 고질적입니다.

짜증이 많이 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화가 많이 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가장 민감하게 행동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자신과 연관된 것에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입니다. 자신과 연관되지 않은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거슬리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화를 내거나, 그리스도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엘라 골짜기의 다윗의 영성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족속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불쾌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소년 다윗 외에는 분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자아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임할 수 없습니다.
접속 불량이 일어납니다. 자아로 충만해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탐욕이 가득하여 자아 중심적이고, 세상의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삶에 하나님의 음성이 끊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매일 자신의 일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엘리도 제사장 업무로 바빴을 것입니다.
사실 제사장의 일은 굉장히 많습니다. 엘리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주님보다 일을 더 신경 썼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셔놓고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인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 자신이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망과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눅 10:40).

자아중심적인 사람과 일 중심적인 사람은 동일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아 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가해자로 생각합니다. 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마저도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 일, 자기 생각, 자기 계획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마르다는 온통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고 일했지만, 주님과 상관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모습은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사람이 매일 매일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가끔 주님을 생각할 뿐,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내기에는 매우 바쁩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습니다. 한나의 통절한 기도로 하나님께서는 영적 불임을 치유하시고, 사무엘을 말씀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무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흘려보낼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 있습니까?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영혼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오는, 영혼을 흔드는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흔들어 깨우십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듣는데, 영혼이 깨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에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속삭이듯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인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감합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에 어두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죄와 타락한 본성,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덮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임해야 합니다. 영혼을 관통해야 합니다. 심장의 폐부(肺腑)를 갈라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한다면, 그냥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양가 없는 농담을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으십니다.

저는 말씀사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신 것을 전합니다. 제게 임했던 말씀이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여 성도가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에게로 흘려보내는 말씀의 통로가 됩니다. 말씀이 흘러가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고, 부흥이 임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부터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엘리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엘리에게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반응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방 안에서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는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말씀이 임하면,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아이냐 어른이냐, 목사냐 평신도냐, 10년 믿은 사람인가 초신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들린다면, 놀라운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과 일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로로 사용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수신 상태가 좋다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수신 상태가 좋다는 것은 자아 중심적 삶을 버리고,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말씀이 홍해를 가릅니다. 그 말씀이 흘러나갈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에스겔서에서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어 일어난 것처럼. 절망 속에 있던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시고, 수많은 일꾼을 일으키는 역사가 말씀이 임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삶이 위험한 모험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모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것보다 확실한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한다면, 그것보다 위대하고, 그것보다 멋있는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 역사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가 삶의 전성기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반응했던 사무엘처럼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하나님,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게 말씀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왜 답답해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슬퍼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무능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혼란에 빠져있습니까? 왜 갈등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지금 암에 걸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열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은 재앙입니다. 기근입니다. 가장 위험한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가장 중요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이와 형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써나가셨습니다.
학력, 사회적 지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사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이 역사의 중심부입니다. 그곳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사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어머니의 서원에 의해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다시 반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여러분의 심령에서 흘러나온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것이 능력이 됩니다. 이것이 축복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엘리,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말씀이 끊어졌습니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 규율을 지키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열심을 낸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아 중심적 삶을 내려놓고, 철저히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십시오. 무슨 말씀에든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길이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가슴이 미여집니다. 통곡하게 됩니다.
말씀의 홍수시대이지만, 먹을 물이 없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말씀이 끊어진 시대입니다. 영적 어두움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찾지 마세요. 말씀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잡다한 소음과 같은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같은 말씀, 영혼에 빛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 능력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끼시며, 주의 말씀을 들을 귀를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엘리는 눈만 어두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도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말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가며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고도 남는, 존재를 흔들어놓는, 폭풍처럼 임하시는, 영혼을 뒤덮는, 생명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밀고 들어와 말씀 앞에 압도당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시작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십니다.
여러분 모두 그 일에 쓰임 받는 통로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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