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본문 / 신명기 32:10~12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앙과 고난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굉장히 밀접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고난이 다가왔을 때, “문제가 천천히 해결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과정을 통해 일하기 원하십니다. 과정은 믿음이 단련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과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이 왔을 때에 우리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금방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깊이 잠들어계신 주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님은 일어나셔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 처음부터 풍랑이 일지 않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풍랑이 일기 전에 풍랑이 일지 않게 하셨다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슬아슬하게 보내는 것을 은근히 즐기시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에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 말고, 아예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일으키시는 분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같은 분으로 여겨질 때, 우리에게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삶을 어렵고 힘든 상황 속으로 몰아넣으시는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죽도록 기도해야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늑장대응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늑장을 부리시는 것 같습니다.
요셉이 고난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습니다.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입니까. 앞에는 길이 없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마병들이 몰려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은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았습니다. 부도직전에 있는데, 은행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돈이 준비되지 않아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위기의 상황에 내몰릴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시시각각 닥칩니다.
우리는 쉬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편안한 삶,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문제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힘들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산을 오를 때, 4륜구동의 힘이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단숨에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걸어서 땀 흘리며 힘들게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면,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에 올라가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힘들지 않고 정상(頂上)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혹입니다.
쉽고 빠른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쉽고 빠른 길을 걷다 보면, 경험할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정상에 쉽게 오른다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산을 오를 때에 경험할 수 있는 비경(祕境)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면, 쉽게 정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올라갈 때, 순간순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동안 다리의 근육이 단련됩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정상에 이른 사람이 느끼는 기쁨과 걸어서 정상에 이른 사람이 느끼는 기쁨은 다릅니다.
요즘 세상이 척박합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집니다. 사는 것이 전쟁 같습니다. 살다 보면, 고난이 성난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청소년들 중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역경지수가 없습니다. 머리가 좋고, 실력이 있고, 능력은 있는데, 역경지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우울해집니다. 일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실패해도 인생이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을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사는 것보다 강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하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본문 11~12절에 보면,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해서 새끼들을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어릴 때에는 어미는 새끼의 보금자리를 아주 포근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조금만 지나면, 보금자리를 어지럽혀서 그곳에 있지 못하게 만들어서 새끼를 밀어내어버립니다.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금자리에서 떨어지는 독수리 새끼처럼 죽는다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 14:11).
노년이 되어 살아온 삶을 회고할 때, 무엇이 기억날 것 같습니까? 여행가고 편하게 살았던 것이 기억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이 기억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삶이 힘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힘든 삶을 통해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이 힘들수록 얻는 혜택이 있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강해집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하다가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좋았던 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굉장히 힘들었던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보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다.
힘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열심히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 않고 강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강해지려면 힘든 순간을 반드시 보내야 합니다. ‘그래도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편안하게 살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어려움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풍랑이 치게 되어있습니다. 위기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약한 상태로 있으면, 당할 수 있습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운동할 때에 힘이 들어야 제대로 운동이 됩니다.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운동은 숨쉬기운동밖에 없습니다. 숨을 몰아쉬고, 근육이 고통을 느낄 정도로 운동해야 제대로 운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강해져야 합니까? 강해져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치기 전에 어미 독수리는 자신의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습니다.
독수리 새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독수리 새끼가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며 날갯짓을 할 때에는 거의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날개를 퍼덕거립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어미가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수직으로 떨어집니다. 새끼가 살려고 날갯짓을 하지만, 아직 날개에 힘이 없어 계속 떨어집니다. 그때 새끼는 죽는다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어미는 이것을 한 번만 하지 않습니다. 한 번만 해서는 독수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미는 수없이 반복해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새끼는 최악의 상황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바람을 가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죽을힘을 다해 퍼덕거린 새끼만 독수리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닭은 주인이 잘게 부셔서 던져주는 것만 집어먹습니다. 닭은 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편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위험 앞에서 도피적인 삶을 살고, 수동적인 삶을 살고, 안일하고 편안한 삶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어려움이 생겨도 죽는다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독수리들은 벼랑 끝에 집을 지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새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실 때에 벼랑 끝을 사용하십니다. 사람은 벼랑 끝에서 강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에게서 괴력이 나옵니다.
독수리 새끼가 둥지에 있는 동안에는 독수리에게서 괴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벼랑 끝에서 떨어질 때, 독수리에게서 괴력이 나옵니다.
둥지 안에서 “날 때는 이렇게 나는 것이다. 1초에 날갯짓을 몇 번 해야 한다.”라고 훈련받는다고 해서 괴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 새끼가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을힘을 다해 날갯짓을 합니다. 새끼가 떨어져서 바닥을 칠 때까지, 어미는 새끼를 돕지 않습니다. 어미가 새끼를 도우면 안 됩니다. 도울 것 같으면, 떨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미는 새끼가 날갯짓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새끼를 내버려둡니다. 날갯짓을 통해 새끼는 독수리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힘들다면, 그것이 정상(正常)입니다. 힘들지 않고 편안한 삶은 비정상입니다. 힘든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갑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날개가 강하게 작동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힘든 순간이 우리에게는 반갑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 나를 나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습관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쉬운 것에 무릎 꿇는 것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아주 쉬운 일에 쉽게 포기하고 무너지는 것도 여러 번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힘든 일을 이겨내는 것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쉽게 무릎 꿇어버리면, 거기서 인생이 멈추어버립니다. 어려움이 왔다고 해서 무릎 꿇어버리면, 거기서 인생이 끝납니다.
어려운 일을 이겨내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죽을 것 같아도 계속해서 날갯짓하다보면, 날개에 힘이 생깁니다.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삶이 강력해집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신이 점점 강해져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맨바닥에서 생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을 통해 믿음이 점점 강화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맷집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잘 감당하게 되어 자신이 강해졌음을 느끼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전에는 반쯤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제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 같은 때에는 하나님께서 받쳐주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우리의 기도는 늘 맴돌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고,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기도하게 됩니다. 늘 골골거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비상(飛上)하게 하십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편안함이 오늘날 우리에게 최고의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미 그 속에 감염되어있습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편안한 삶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적입니다. 편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까?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성공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영적 독립선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독립’이라는 은밀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문제를 해결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기도를 멈춥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원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기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에 나오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으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쉬운 길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백성들을 먹이실 때에도 매일 하루분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틀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 위해서는 이틀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만나와 메추라기를 모으지 못하게 하시고, 매일 하루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늘로부터 매일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세월이 흐를수록 삶이 점점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어도, 나중에는 편안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문제가 끝나고, 아쉬움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믿음 생활을 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많이 주셔서 넘치게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힘듦과 어려움을 겪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그것이 결정됩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만이 형통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형통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때로는 형통입니다.
내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이 형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형통입니다.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형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셉을 보세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에 보면,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창 39:2).
모든 것이 자신의 꿈과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데, 창세기에는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도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는데,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욥기에서 욥이 발견한 것이 그것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42:5).
욥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회복시켜주셔서 감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 한 분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 삶이 어렵고 힘든가, 편안하고 풍족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찾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붙들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복된 삶입니다. 시련이 닥치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함으로 믿음이 자란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그 후에 어떤 문제가 닥쳐도, 하나님만 의뢰하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합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구하지 마시고, 믿음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올수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전혀 없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 삶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면, 어려움이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는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어렵게 하십니까?”라고 기도합니다. 문제에 걸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반면,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를 배우기 원하고, 기도가 깊어지기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기도를 배우고 원하고,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지, 어려움을 달라고 했습니까?”라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나 어려움을 달라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기도가 깊어지고, 기도가 성숙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어려움을 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언제 기도합니까? 벼랑 끝에서 기도합니다. 생존의 문제가 걸렸을 때에 기도합니다. 언제 죽기 살기로 기도합니까? 죽을 만큼 어려움이 닥쳤을 때, 죽기 살기로 기도합니다.
생사(生死)를 건 기도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편안할 때에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죽을 만큼 강력한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사(敎會史)를 살펴보면, 기도의 깊은 경지에 이른 분들은 고난의 깊은 골짜기에서 기도를 배운 분들입니다.
아무나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기도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려고 애쓰는데도 기도의 줄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묘함과 간교함으로 인해 우리는 조금만 배불러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를 통해 나타납니다. 기도의 강도(强度)를 보면, 얼마나 절박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찾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필요를 구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구하는 것과 가진 것을 하나 더 구하는 사람은 기도의 태도가 다릅니다. 한 끼를 굶은 사람과 1주일을 굶은 사람의 기도가 같겠습니까. 먹을 양식을 구하는 사람과 명품 가방을 구하는 사람의 기도가 같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필요를 놓고 기도하든, 절망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든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기가 찾아오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바꾸기 원합니다. 상황이 바뀌면, 행복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변하는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끝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리와 관련된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쉽게 잊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종종 막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앞에 서게 하셨습니까? 왜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게 하십니까? 왜 광야와 같은 불편한 곳으로 몰아가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으로 이끄셔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고, 관록이 붙고, 경험이 쌓이고, 계급장과 훈장이 늘어나면, 우리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보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말했습니다(출 14:13).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닌데, 모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습니까? 무엇을 해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때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개의 줄을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만을 붙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여러 가지 줄을 잘라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다 헛된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고난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줄들을 모두 잘라버리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줄만을 붙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자랑을 모두 버리게 하시고, 헛된 야망을 모두 포기하게 하시고,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믿게 하십니다.
누가 지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기도생활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기도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 힘들어질 때, 기도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당한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이깁니다. 그때 문제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점점 커집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렵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어려워져갑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갑니다. 삶이 힘듭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안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구한다면, 그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은 위기를 넘나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위기 속에서 기도를 배우고, 위기 속에서 믿음이 자라고, 날아오르는 법을 배웁니다.
어려우면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하세요. 기도를 포기하지 마세요. 어려움을 통해 기도를 배워야 할 사람이 기도를 멈춘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와도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끝에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의 환경이 바뀌어도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함께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위기는 축복입니다. 위기는 우리를 우리 되게 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드십니까? 신앙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당연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벼랑 끝에 계십니까? 앞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본래 삶은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이 없다면, 기적도 없습니다.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고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길이 없어 방황하고 헤매다가 길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공허한 이야기를 들으며 방황하다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는데, 인생의 끝에서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전부가 되십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지금 힘든 것이 정상입니다. 힘들어야 합니다.
힘들지 않은 일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믿음을 강화하여 믿음의 날갯짓을 통해 비상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련이 왔을 때에 점점 더 강력하게 피어오릅니다. 믿음을 통해 환난을 통과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고 솟아오릅니다. 아름다워집니다.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왜 삶의 시련 속에서 절망합니까? 무엇을 바라봅니까?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만을 신뢰하세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절망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절망을 무릎 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정확하게 개입하십니다. 때를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도 때도 없이 팔을 내미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린 후, 새끼를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순간에 날아가서 새끼를 받아 올립니다.
새끼 독수리가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도 어미 독수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바닥을 치기 직전에 어미 독수리는 총알같이 날아가 새끼 독수리를 받아서 올립니다.
중요한 것은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등에 업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렸다가 받아 올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새끼 독수리를 독수리가 되게 만듭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새끼가 죽지 않도록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벼랑으로 떨어지는 새끼 독수리를 등으로 받아 올리는 것은 새끼 독수리를 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가오는 수많은 환난과 시련 앞에서 굴하지 않고, 날아오르는 독수리가 되게 하십니다.
어려움이 와서 기도했는데도 응답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자기 마음대로 날아다닙니다. 언제든지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습니다. 악천후(惡天候) 속에서도 가고 싶은 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참새, 비둘기와 다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새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릅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돌진하는 것입니다. 독수리와 같습니다.
독수리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날개로 자기가 방향을 정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방해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멈칫하지 않습니다. 날개를 펴고 날아갑니다.
자유롭게 날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되게 하셔서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독수리가 되면, 그 순간부터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생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그것 때문에 멈칫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날아오릅니다.
끙끙 앓으며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날갯짓을 통해 강해져서 오직 여호와만을 앙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실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 만이 우리가 바라볼,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삶에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 역경 앞에 무릎 꿇지 마시고, 오히려 역경을 무릎 꿇게 만드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날아오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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