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 기도의 위력을 믿는가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기도의 위력을 믿는가
본문 / 마태복음 7:7~11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비영적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것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세속화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손에 잡히는 것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자칫하면 신자도 세상 속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비영적인 것, 손에 잡히는 것만 전부라고 믿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속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속에 휘말리면, 동일하게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속화된 세상 속에 빠지면,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압도당합니다.

기도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쟁력입니다. 기도를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가 풀리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요,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기도가 깊어집니까? 기도생활에 탄력이 생깁니까? 기도생활에 파워가 생깁니까? 기도하는 것이 신납니까? 기도하는 것이 몸에 익어집니까?
기도하는 것이 뒤로 밀려납니까? 기도하는 것이 신통하지 않게 여겨지고, 지루하게 여겨집니까? 기도가 약해지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공허한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말을 주절주절하다가 기도를 끝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의 중심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사생결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천하가 무너진다 해도 기도를 붙잡고 있으면 살 줄 믿습니다. 기도가 살면, 하늘을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춤을 추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가 살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오히려 축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왜 끙끙거리며 살아갑니까? 기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기도의 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이 아주 선명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짧지만 강력하고 명확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기도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 어디서든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교회든 새벽기도 시간에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적극적이고 열심 있게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열심히 하는 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옛날 물 떠다놓고 기도하신 어른들의 열심을 그대로 교회로 옮겨와서 새벽부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알려드려야 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언제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에 혼동을 일으키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떡과 돌, 생선과 뱀을 구별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에는 배달사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정확하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이상하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두루뭉술하게 기도하고,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정작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다 응답하셨다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암이 낫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악한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므낫세도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고통 당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은 기도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 됩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주십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딱 걸립니다. 정욕이 문제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은 쉽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일평생 정욕이 처리되지 않아서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잘못된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아이들이 떼쓰는 대로 다 주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 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기도해야 하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신가가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탕자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깨달았을 때입니다. 탕자는 고생하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하다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탕자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왜 탕자입니까?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그는 탕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가 집을 떠나는 순간, 복잡한 문제가 그에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한두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거지의 집이라면, 그 속에 들어가면 거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누구인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아버지를 소개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늘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싶어 하십니다.

본문 11절 끝 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해하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셔서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고,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예로 들어 기도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없습니다. 이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옷을 사다 주는 데, 질이 좋지 않고 허름한 옷을 사다 주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먹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아들에게 사주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를 우리가 제대로 알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까?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누구신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마음에 와 닿도록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모르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낯선 분에게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기도하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기도가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별별 수식어를 다 쓰며 기도하게 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동네 아저씨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어떤 아버지와도 비교할 수 없이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으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을 주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와 맞먹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100평의 아파트에 사는데, 아버지의 옆에서 눈치 보며 사는 아들이 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삽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누립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구했을 때, 조금 주시고 우리를 약 올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소유가 나의 소유입니다. 아버지께서 누리시는 것을 나도 누립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면, 아들도 대통령과 맞먹는 권세를 누립니다. 그래서 청와대를 마음껏 들락날락할 수 있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할 때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정도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가 누리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늘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며, 시간에 쫓기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했습니다(눅 15:31).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유와 아들의 소유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제게는 아들이 두 명 있습니다. 저는 재산이 없기 때문에, 아들에게 남겨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책은 많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둘 다 영어권 나라에서 자라서 한글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글로 기록된 책은 별로 소용없습니다.
다행히 영어로 기록된 책이 제게 조금 있습니다. 큰 아들이 목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큰 아들이 제게 영어로 된 책을 달라고 한다면, 제가 아들에게 책을 줄까요? 당연히 줄 것입니다. 아들에게 책을 줄 뿐 아니라, 아들이 더 원하는 책이 있다면, 아들에게 책을 사줄 것입니다. 기쁨으로 줄 것입니다. 제 것이 제 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분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풍성하고 거대하고 놀랍습니다.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최고의 축복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 속에는 구하면 주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지만,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시간을 가지고,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과 함께 거할 때에 고난은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아들인데도,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 속에 빠져 살아가던 사람을 고난을 통해 아버지께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탕자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집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곳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탕자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문명은 탕자의 문명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탕자의 문명의 특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비웃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깁니다. 무능하고 유약한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우리도 헷갈립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언제나 얼굴이 밝습니다. 행복해보입니다. 모순인 것 같습니다. 반대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탕자가 많습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탕자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사람,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궁리하는 사람, 자신만만해하고 자기 인생은 자기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탕자입니다.

탕자는 우선은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세상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주머니의 돈이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큰소리치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래가지 못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 기도를 무시하는 사람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원은 바닥나게 되어있습니다. 바닥을 긁게 되어있습니다. 주변을 보세요. 틀림없습니다. 한때는 큰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큰소리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는 잘 나갑니다. 그런데 기도하기는 싫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의 자원이 바닥나게 되어있습니다. 돈만 바닥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다 할지라도 삶의 모든 것이 쪼그라듭니다.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주는 엄청난 공간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세상을 들여다보세요. 늘 배고픕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데도 늘 배고픕니다. 만족되지 않습니다. 성공을 했는데도 여전히 허전합니다. 인기를 얻었어도 여전히 배고픕니다. 약을 먹어야 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고아의 영, 거지의 영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병은 여간 큰 병이 아닙니다. 만족되지 않는 병은 큰 병입니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습니다. 약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으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이 부족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부족한 것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전혀 부럽지 않다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왜 부러워합니까?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껄떡거립니다. 구걸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더 찾습니다. 무엇인가 더 채우려고 합니다.

본문은 아버지와 함께할 때에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경험하고, 아버지와 함께할 때에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경기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좋은 것을 함께 누리는 특권이 있습니다.

누가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와 함께하면,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한 기쁨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울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시편 23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니까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기쁩니다. 불안함이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기도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는 삶 자체가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달해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열심히 해야 우리에게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열심을 다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려고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극적이라 해도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극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적극적이지 않으시면, 우리의 열심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십니다.

우리가 신통하지 않게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사람은 아버지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께서 먼저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하시기 위해 유치원 수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설명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공부 많이 해서 아는 것은 많은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경험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하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연구하지 마시고, 아버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학, 아버지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를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에 관련된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 기도의 맛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맛은 기막힙니다. 기도의 맛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전시용으로 만든 음식은 아무리 그럴 듯 하게 세팅되어있어도,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에 전시되어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우리의 삶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호흡하십니다. 우리와 대화하십니다. 우리와 눈길을 마주치십니다.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리얼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을 떼어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잘 소개하셨습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온몸으로 전율해야 합니다.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찬양을 부를 때에 심장이 쿵쿵 뛰어야 합니다.

기도를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우리의 기도는 이름 모를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속삭이심을 들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가질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여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 그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하면 주신다고 여러 번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중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합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임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자녀의 권세를 누리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셔 들이는 일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아버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활짝 열립니다.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이요 특권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최고의 권세인 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삶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중심 중에서도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자녀 됨을 누리려면, 자녀 됨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소개하셨습니다. 그 배경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힘을 실어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설명하시며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은 예수님 때문임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본문의 배경이 됩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당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멋진 배경이 되셔서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더욱 멋지게 느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한, 우리의 기도는 무시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이 기적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것만 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기도해서 취직되면, 물론 좋습니다. 기도해서 암이 나은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비록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것입니다. 삶도 죽음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죽음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권세가 하나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선교사가 이역만리에서 말이 되지 않게 억울한 죽음을 당해 남들은 비극이라 말할지라도, 남이 보기에는 처참한 죽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생의 복으로, 하늘의 면류관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기적 중의 기적을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병이 낫든 낫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현상이 일어나는 것만이 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인생의 결론이 이미 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의문과 두려움을 잠재우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을 확신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충만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충만함이 없습니다. 다 가지고 있다 해도 무엇인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면, 가진 것이 없어도 충만 중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떤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굉장히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극적으로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 자체가 적극적인 것입니다. 기도는 굉장히 능동적인 태도입니다. 기도 자체가 기대요 가능성이요 소망입니다.
우물쭈물 기도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보면 답답합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우물쭈물 기도한다면, 아버지께서 답답하실 것입니다.

눈치 보지 마세요. 담대하세요. 담대하게 기도하세요. 소극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답답해 하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셋째, 사랑 안에서 기도하세요.
아들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께 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했을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으로 그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경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응답에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면, 기도를 멈추어버립니다. 응답에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한 대로 응답해주셔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면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고,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하나님과 눈을 맞추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갈 때, 우리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인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붙잡고,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신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너무 거룩하셔서 우리가 근접하기 어려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주고 받는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면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을 끝내시고, 지루한 신앙생활을 끝내시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끝내시고,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기도가 더욱 풍성해지고,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마음껏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고아의 영이 떠나고, 거지의 영이 떠나고, 양자의 영을 얻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부요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맥이 빠졌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교만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돈도 잘 벌고, 교회도 커지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외적인 조건은 풍성해졌지만, 바닥을 긁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기도가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양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세요.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위대한 역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아빠를 마음껏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천하 열국을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껏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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