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 아낄 것을 아끼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반전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아낄 것을 아끼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반전
본문 / 요한복음 6: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은 아주 유명합니다.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다양하고 깊은 메시지가 많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누군가가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祝謝)하신 후에 그것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오병이어가 참 중요합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있어서 마중물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성자 예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가 되신다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로 만드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드레가 소년의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테스트하시기 위해 누군가가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무엇인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소년이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신 사건은 유명합니다. 소년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지만, 소년의 오병이어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소년의 오병이어는 기적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自存)하시는 분이십니다. 홀로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하나님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시는 일들을 마음껏 얼마든지 무한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에는 조금도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충해드려야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돕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아쉬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누군가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년이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 탐나셔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이의 도시락에 눈독을 들이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벳새다 들판에 5천 명의 남자가 앉아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하면, 2만 명가량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앉아있는 가운데, 기쁨이 가득한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놓은 소년입니다.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소년이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며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불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를 끼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상(床)을 차려놓으시고, 우리에게 그 위에 젓가락만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어마어마한 잔치에 젓가락만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든지 돕지 않든지 하나님께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마음껏 무한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도 신났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 가장 신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바친 어린 아이가 가장 기뻤을 것입니다. 자신이 드린 작은 도시락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며 기뻐했을 어린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주님께서는 그냥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지만, 소년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도시락의 위대한 변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끌어들이시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들판, 어두운 곳, 빈들, 아무것도 없는 곳, 사람들이 허기진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셔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여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병이어,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아이가 먹어버렸다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이 그것을 가져왔을 때,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한 끼 분량의 도시락으로 많은 어른들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으로 많은 어른들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일종의 반전(反轉)입니다. 작은 도시락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끼어들 때, 우리는 초라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과 하나님의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주님이 만났을 때, 땅과 하늘이 만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작은 도시락이지만, 주님의 손에 드려지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시는 타이밍(timing)과 우리의 작은 행동이 맞아떨어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군중 속에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어린 아이의 행동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감추어질 수 있는 작은 행동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운집해있는 가운데,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가져오는 행위는 묻힐 수도 있습니다. 눈에 띌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대한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들판에 있는 사람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누가 오병이어를 바쳤습니까?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를 내어놓았습니다. 많은 어른들은 뭐했을까요? 먹을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린 아이 뿐이었을까요?
성경은 어린 아이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본문에 보면, 안드레와 빌립, 다른 제자들은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어른들도 빌립과 안드레처럼 생각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외에도 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벳새다 들판은 외딴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식을 챙겨왔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먹을 것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나만 먹어도 모자라는데, 각자 알아서 하겠지. 이런 때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생각이 단순합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좋지만,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에는,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때에는 생각이 단순해야 합니다.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행동합니다. 결정하고 행동하기 전에는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뉩니다. 그러나 결정하는 순간에는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많고 복잡하여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고수(高手)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하수(下手)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빨리 옮기는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얼굴만 보아서는 속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속이 환하게 보입니다.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수를 감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오병이어 이야기에 아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어른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사용하셨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남자 어른만 5천 명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보리떡은 아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원어 성경에 보면, ‘아주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아주 작은 물고기 두 마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멸치 정도 되는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이나 크기, 수와 상관없습니다. 똑똑한 사람, 재력이 있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과 상관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린 아이를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기도하고 난 후에도 머리가 계속 아프다면, 기도하지 않고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절에서는 기도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딴 짓을 하면 죽창으로 맞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복잡하고 아프다가도 기도한 후에는 머리가 맑아져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복잡했는데, 기도하고 나면 개운해져야 합니다.
먹구름이 걷히고, 머릿속이 맑아집니다. 문제가 단순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안고 씨름하다가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안고 있으면 복잡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간단합니다.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계산했다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생각이 많습니다.
아이는 계산 없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자신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는데,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께서 계시니까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간 것이 중요합니다. 아주 단순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삶의 핵심을 가르쳐줍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얼마가 되든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주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주님께 넘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후에 그 문제를 다시 가져가십니까?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문제는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행동으로 옮겨본 사람에게는 단순한 일이지만, 행동으로 옮겨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가진 문제를 주님께 옮기는 데 10~20년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잡한 생각들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정리해주시는 답을 붙잡으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아이는 계산할 줄 몰랐습니다. 아이는 안드레처럼 ‘이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라고 생각하거나, 빌립처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다.’라고 산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능력이 없습니다.
계산을 넘어선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계산하면 계산으로 끝납니다. 계산하지 않은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생각, 수많은 계산 등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풀 수 있는 문제라면, 여러분 스스로 해결하세요. 여러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끙끙댈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은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고민하고 염려하고 생각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둘째, 오병이어입니다.
단순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아주 작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예수님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원재료는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작다고 해서 작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량을 봅니다. 그러나 수량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 아이가 주님께 바친 오병이어는 어린 아이의 전부였습니다.
아이가 먹을 것을 내어놓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아이는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배고파도 참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굶더라도 아이들은 먹입니다.
아이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공동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은 너무 배고프면 옆에 있는 아이의 것을 빼앗아먹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있던 시대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보리떡과 아주 작은 물고기는 그 시대가 빈곤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끼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배고픔을 느낍니다. 넉넉한 상황이라면,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 로비를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무엇인가 먹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다가가 “목사님 하나 줄래?”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반응을 보면, 아이의 가정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선뜻 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손을 뒤로 숨기는 아이도 있습니다.
선뜻 주는 아이의 손에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선뜻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과자 한 봉지를 가지고 있으니, 하나 정도는 선뜻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이 별로 없을 때에는 주면서도 고민합니다. 하나만 있을 때에는 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좋아하고, 맛있는 것은 더욱 줄 수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풍족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먹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식구가 열다섯 명이었습니다. 저희 형제 6남매에 고모와 삼촌까지 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어머니께서 상을 차리시면, 전쟁이 벌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빨리 먹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생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생선이 반찬으로 없는 날에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생선이 있어야 밥을 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에 철없이 생선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제가 본문의 어린 아이였다면, 보리떡 다섯 개는 내어놓았겠지만, 물고기 두 마리는 끝까지 내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생선을 어떻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사물을 보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산에 올라가 꽃을 따서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를 먹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누어먹는 것은 아이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배고프고, 가진 것이 하나밖에 없을 때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를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울 유일한 음식이었고, 아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이것을 작은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에게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수량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아이가 그것을 가져오기까지 얼마나 망설였겠습니까.
아이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가져온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아이는 허기진 상태에서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아이에게 있어서 전부였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그 도시락을 얼마나 정성껏 싸주셨겠습니까.
아이들에게는 절제력이 없습니다. 먹는 것에 있어서 인내력이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자신이 가진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있어서 오병이어는 전부였습니다. 절제력이 없고, 이기심이 많은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배고픈 상태에서 오병이어를 내어놓았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제력이 약하고, 먹는 것을 밝히는 아이가 자신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도시락을 주님께 가져왔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아이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모두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가 가진 전부를 가져왔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가진 전부를 가져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라면 조금은 남기고 가져올 것 같은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이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아끼지 않고 내어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소년의 행위를 봅니다.
움켜쥐고 싶어 하는 욕망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몸부림칩니다. 많이 가졌음에도 더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의 것들을 빼앗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소년이 자기가 가진 도시락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았다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소년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행위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만한 특종거리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단지 군중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의 뒷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떡을 먹고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9~5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떡 다섯 개를 놓고 축사하시고, 군중들을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년이 바친 보리떡은 곧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자들이 떡을 나누어주는 행위는 주님의 살이 찢어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이가 떡과 생선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것과 오버랩(overlap)됩니다.
아이가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떡으로 군중들이 먹고 배부름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인류가 구원 받았습니다.
아이가 자기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내어놓은 행위를 4복음서에서 대서특필(大書特筆)한 이유는 그 속에 구원사적인 의미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행하실 때, 떡을 떼시며 제자들에게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주님을 먹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배부름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사건을 통하여,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때, 하나님의 아낌없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소년은 아낌없이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아낌없음과 하나님의 아낌없음이 만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흘러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한 끼 분량의 도시락을 통해 5천 명, 아니 2만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시는 것을 30배, 60배, 100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오병이어 사건은 100배가 아닙니다. 아이의 한 끼 도시락을 통해 2만 명이 먹고도 남았으니 2만 배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입니다. 흘러넘치고도 남도록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는 수치(數値)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이것은 복음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흥분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당당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중한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것이 흘러넘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바닥을 긁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산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머리를 굴리며 살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마구 부어주시는데, 따지고 계산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아이의 행위가 클로즈업(closeup)되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끼거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아끼려고 하십니까? 무엇을 움켜쥐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은 본문의 안드레처럼 “그것을 가지고 무엇 하려고?”라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신앙적인 말을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우리가 떡을 쥐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려야 수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오병이어가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고, 재주도 없어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자신의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직업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젊음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삶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끼는 것,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님 앞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으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아낌없음과 하나님의 아낌없음이 만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5천 명 중의 한 사람, 어린 아이,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허기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본문은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이 하나님의 손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고픈 현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어린 아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궁무진한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30배, 60배, 100배가 아닙니다. 천 배, 만 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도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驚異)로운 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끼는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반전이 일어나는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쥐고 있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때, 주님의 위대한 손길 속에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님의 손에 올려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움켜쥐고 있거나 아끼는 것이 있다면,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아끼지 않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기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흘러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제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흘러넘치시는 분이십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까다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넉넉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십니다(엡 3:2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아리는 것 이상으로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십니다. 하나님의 부요함이 여러분의 삶에 흘러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통해 수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광야와 같고, 빈 들과 같고, 벳새다 들판과 같은 이 세상에서 허기진 군중들을 먹이고도 남는 구원의 만찬에 여러분의 삶이 기막히게 쓰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서 귀중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이 내어놓은 도시락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보며 소년은 최고의 기쁨, 환희, 즐거움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쓰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쫀쫀하지 않습니다. 바닥을 긁는 삶이 아닙니다. 부요한 삶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막혀있는 것이 터져야 합니다. 삶을 가로막고 있어 삶을 답답하게 만들고, 응고되게 하는 것이 터져야 합니다. 그것이 터지면, 하나님의 무한대와 연결되어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귀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일을 우리 교회에 맡기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어떤 것이든 어렵지 않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추천설교 > 금요철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요예배설교]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0) | 2017.08.17 |
---|---|
[금요예배설교] 행동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Friday Night Sermon (0) | 2017.08.17 |
[금요철야예배] 잘 먹는 것이 신앙이다 Friday Night Sermon (0) | 2017.08.17 |
[금요철야예배설교] 기도의 위력을 믿는가 Friday Night Sermon (0) | 2017.08.17 |
[금요철야예배]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Friday Night Sermon (0) | 2017.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