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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본문 / 히브리서 5:8~10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신앙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믿어야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행위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뗄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뗀다면, 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은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순종은 붙어있습니다.

믿는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순종이라는 행위가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독립되어있지 않습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만 믿을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말로 합니다.
어디까지 믿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는 데까지가 믿음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아직 믿음이 증명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애매모호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민할 뿐입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갈등합니다.
믿음이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성 안에는 불순종의 뿌리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 뿌리가 깊습니다. 그 뿌리는 아담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에게 일어나는 불순종의 뿌리는 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마귀를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엡 2:2). 사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할 뿐, 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는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의 삶을 살면, 마귀의 부하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성 자체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태어난 영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순종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오늘도 온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영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든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이전에도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불순종의 영과 거역의 영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불순종합니다. 불순종의 영이 더덕더덕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밥을 먹을 정도만 되어도 그 아이에게 불순종의 영이 역사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불순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류에게 찾아온 저주, 인류에게 찾아온 모든 고통의 원흉(元兇)은 불순종에 있습니다. 불순종의 뿌리, 불순종의 잔재(殘滓)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순종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순종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생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말씀에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옮겨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깨어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순종은 그가 믿음으로 출발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불순종의 고리를 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의 삶을 배웁니다. 믿음의 최상(最上)의 질은 순종으로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위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키워드(keyword)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순종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병을 고치시고, 숱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초점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 행하시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8).
예수님의 사역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 속에 능력을 행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병이 낫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본문 8~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학교’에 다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순종의 삶을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있는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순종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클라이맥스(climax)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의 클라이맥스인 독자(獨子)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리는 사건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와 오버랩(overlap)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묶여 모리아 산의 제단 위에 있는 이삭처럼 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이 이 땅에 있는 불순종의 고리를 모두 끊어버리고, 모든 저주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깊고 깊은 불순종의 뿌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순종을 배웁니다. 순종을 배우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과 모든 아픔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까? 순종을 통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려는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함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그냥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실 때에도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종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순종은 자아(自我)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순종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갈보리 언덕과 비슷합니다.

순종의 첫 발을 내딛고, 구원의 길로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삶은 창세기 22장에서 순종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순종은 자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날로 내리치려는 제단 위에 누워있던 이삭의 모습에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의 핵심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순종이 쉽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진노의 잔을 마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은 순종을 결단하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요 19:30).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일에 순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외침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저주를 끊어버리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에 완전히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99%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100%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목적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보면 불순종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방향과 목적을 잃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찬사(讚辭)를 보냅니다. 그가 남긴 말, 그가 행한 행적(行蹟)에 대해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삶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에 맞춰져있었습니다.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은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시지만, 자신의 말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좋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철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할 말을 알려주시면, 그것을 전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단독으로 무언가를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권세 역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능력이 없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는가’입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역을 하더라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키워드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순종을 배운 것은 우리에게도 순종을 배우게 하셔서 순종을 통해 모든 저주를 끊어버리고,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통(貫通)하는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종이 새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이 순종하도록 하나님을 닦달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순종을 놓치면, 인생이 꼬여버립니다.

불순종은 딴 것이 아닙니다. 내 일에 몰두하고 사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외면하고, 내 일에만 빠져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기도하더라도 기도 안에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그 기도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고, 결국 모든 것이 자기에게로 돌아가거나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마지막 가장 숨 가쁜 고비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숨고르기를 하셨습니다. 매우 힘들고 벅찼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의 오물을 혼자 뒤집어쓰셨습니다. 죄악의 진노의 무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순종에 초점을 맞추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함으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일어난 원죄(原罪)적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50). 친가족이라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불순종의 고리를 끊고, 순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믿음에서 순종이 나오지만,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순종이 깊어집니다. 사랑은 깊은 순종을 낳습니다. 사랑은 의무적인 순종이 아니라,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순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한다면 말하기도 전에 이미 순종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순종할 때, 사랑으로 결속됩니다. 사랑으로 순종할 때, 아버지와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단계로 나아간다면,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더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은 순종을 낳고, 믿음이 순종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사랑하면 순종적인 관계가 됩니다. 믿음과 순종, 사랑과 순종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첫째, 순종은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는 삶 자체가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실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순종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순종이 능력을 낳습니다. 그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순종의 숨은 비밀은 놀랍습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숨어있습니다. 능력을 행하려고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순종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풀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 따라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제화됩니다.
말씀이 참된 말씀인 것을 확인하려면, 순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사실로 드러나고,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난 현장,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난 현장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돌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해서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는 행위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보십시오. 순종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고통과 불행이 찾아왔다면, 에덴에서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축복을 회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이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롬 5:19).
인류가 불행하게 살아가는 원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을 가로막는 주범(主犯)은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불순종의 삶을 사는 만큼 방황이 길어졌습니다.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돌고 돌며 고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겪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자초(自招)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소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이 불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모리아 산에서도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삭도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처음부터 불순종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세 사람 중 누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야곱은 나중에 자신의 입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창 47:9).

우리의 삶의 축복은 순종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순종의 삶을 살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인생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인생을 복잡하게 해석하려고 하십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풀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생애도 보면, 복에서 출발하여 복으로 끝납니다. 야곱은 복 때문에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복 때문에 인생이 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복이 출발하게 됩니다. 인류가 잃어버린 복이 출발합니다. 잃어버린 축복이 회복됩니다. 저주를 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3).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복을 되찾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1세대는 원망불평하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2세대에게 신명기를 주셨습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는 ‘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되찾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복을 약속하시고, 인류의 복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의 순종을 통해 복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복은 순종을 통해 흘러가게 됩니다.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찾아온 인류의 저주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을 통해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순종은 축복을 가져옵니다. 기억하십시오. 축복의 원리는 순종입니다. 우리의 삶을 순종의 원리 위에 올려놓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묶인 것이 자동으로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꼬인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꼬여있습니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왜 꼬였는지 살펴보세요.
순종해야 하는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순종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복과 연결된 경우에는 항상 명령형을 사용하셨습니다.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꼬여있던 것을 순종을 통해 푸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불순종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있다면, 생수의 강이 막힙니다. 여러분의 삶에 순종하지 않는 영역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죄가 타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막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뚫리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원리입니다.

순종은 성경 속에서 거대한 핵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형통이고,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셔도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순종이 축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최고의 순종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받으셨습니다. 아들이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은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통해 얻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자녀가 순종할 때, 부모는 기쁩니다. 순종을 통해 관계가 깊어집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의(祭儀)적 제사보다 순종이 중요하고,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순서와 의식(儀式)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삶이 참된 예배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순종하고 사는 것 자체가 예배입니다. 걸어가는 것이 예배이고, 모든 행위가 예배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계속 붙들어야 할 주제는 순종입니다.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복잡하게 하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키워드를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난 후에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을 익혀야 합니다. 순종이 점점 깊어져갈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나고,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순종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도 순종이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학습한다는 의미입니다. 한순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순종을 배워가므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한순간에 순종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오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원망 불평하면 안 됩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사건과 실패와 고통을 통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그 일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실 때에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고집이 죽지 않으면,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순종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했던 마리아를 보세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기를 겪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1:38).

순종은 조건과 상황을 따지지 않고, 말씀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순종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순종학교의 주 과목은 십자가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이지만, 우리를 가장 완전한 길로 이끕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합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기 위해서입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묵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를 들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합니까? 목적은 단 하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의 길을 열어주시고, 그의 영혼을 열어주셔서 말씀이 그 사람의 심비(心碑)에 새겨지게 하십니다.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령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귀가 닫혀버립니다.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닫혀버립니다. 불순종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불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稀貴)해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어도 소용없었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더 이상 들려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 같이 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려는 회중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까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죽어가는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해도 말씀이 벽을 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벽을 치고 다시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는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생명을 걸겠다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설교자의 머리와 영에 주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임하여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 말씀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이미 그런 역사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순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성령이 주님을 도우셔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훈련받고 기도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오직 하나,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을 들으면, 성령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오직 순종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종으로 귀착(歸着)됩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순종으로 결론 나야 합니다. 성령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런데 목적을 분명히 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깊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순종이 깊어집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말은 적게 하시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 가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들고, 얼마나 많은 역사를 일으키는지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변혁은 순종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을 틀어막고 있는, 모든 어둠, 저주 등이 순종을 통해 해결됩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 아들의 순종은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 받던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으셨습니다.
지난 날 우리 안에 있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순종의 뿌리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며 살았던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순종의 영이 여러분을 지배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말씀 앞에 거꾸러지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에 귀 기울이고, 힘들고 어려워도 순종해보세요.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No”라고 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오늘 이후로는 “Yes”라고 반응하셔서 묶인 것이 모두 풀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신앙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것까지만 믿음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해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순종으로 증명해야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편에서 99% 순종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인생이 도약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순종이 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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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축복하고 축복하라
본문 / 민수기 6:23~27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성경을 보면, 선명하게 구분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성경 속에서 대조되는 주제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로 나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축복하셨는데, 아담의 죄로 인해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에게 저주가 찾아왔습니다.

그 후, 우리는 세상 속에서 축복과 저주라는 실체(實體)와 계속해서 마주칩니다. 어떤 곳에는 축복이 있고, 어떤 곳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아주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축복과 저주의 개념은 아주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불행스러운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정에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방황하고 불만족에 빠져있고, 중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한 삶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서 비껴나 있으면,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저주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노력 유무(有無)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가 불완전하지만, 야곱은 축복의 냄새를 맡으며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에서가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무관(無關)한 자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극명(克明)하게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축복과 저주가 아주 뚜렷하게 구별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한쪽에서는 장자(長子)가 죽는 저주와 통곡의 밤을 보내며 절규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반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에서는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선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축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한쪽에는 어두움이 가득하고, 한쪽에는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피를 바르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피가 어둠과 빛, 저주와 축복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피가 축복과 저주를 갈라놓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인류의 역사(歷史)를 선명하게 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의 관심은 복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하나님은 복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복을 되찾게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아브라함을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복을 되찾게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6).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면, 축복이 임하고, 저주가 떠날 것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첫 설교로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저주는 사라지고,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주는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우리에게 축복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게 떵떵거리며 살아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것도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만 가진 사람은 매우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주를 끊어버리고, 축복을 가져오는 출발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라틴어 ‘bĕnĕ dícere’(베네 디체레)에서 파생된 단어로, 칭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특별한 형태의 칭찬, 인정(認定)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야. 내가 기뻐하는 자야. 사람들이 너를 욕하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너를 핍박해도 너는 내 아들이야. 세상의 모든 저주가 너에게 쏠려있어도 너는 내 아들이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하시고, 아들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로 인해 기뻐해. 너를 인정해. 너는 존귀한 자야. 너는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야. 나는 너를 보면 기뻐. 너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야.”라고 존재를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기뻐해주는 것이 축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명했습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모세는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축복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은 그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하나님은 아들을 향해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다가 둘째를 낳으면, 둘째에게 관심을 갖느라 첫째에게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아이가 병이 납니다. 그래서 괜히 물을 쏟기도 하고, 동생을 때리기도 합니다. ‘나를 바라봐 달라’는 것입니다.
주목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욕구 불만이 생깁니다. 주목받는다는 것 자체가 사랑을 받는 것이고, 축복입니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데도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욕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먹을 것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주목받지 못하면 불안해합니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평안을 느낍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이 회복입니다.
어린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서 주목받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만족을 느낍니다.
부모의 주목을 받으며 자란다는 것은 아이에게 축복입니다. 빗나가는 아이들은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칭찬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주목받기 원합니다. 혼자서 놀 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엄마를 부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면, 승진한 것에 대한 기쁨도 있지만, 인정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더 큽니다. 주목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귀한 사람인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지구에 나 한 사람만 있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만큼 우리가 귀중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우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사람을 단체로 취급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려도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이십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잃어버린 것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등을 돌린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나는 너의 삶과 함께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관심을 받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라보는 것은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향하는 것이 곧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슬쩍 쳐다보시고 지나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라봐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셔서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시는 것은 재앙입니다. 저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나 자신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를 내가 끌어안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온몸으로 경험해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깨달은 만큼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커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기 전에 자신을 축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9:18).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보고 축복해야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에게 저주를 쏟고, 남을 못살게 하는 이유는 자신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축복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정말로 축복할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을 축복하며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계 속에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보면,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나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축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끌어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학(自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를 경멸합니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손사래를 칩니다. 자신을 스스로 낮게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목해보세요. 대충 넘어가지 말고, 주목해보세요. 대충 평가하고 끝내버리지 말고,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성경 곳곳에 표현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주목해보세요. 자신의 모습을 피하지 마세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평가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한 자기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열등감이 무엇입니까?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답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소용없습니다.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등감은 일종의 병입니다. 병 중의 병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데, 누가 건져주겠습니까. 건져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말하든,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기준은 늘 바뀝니다. 미인의 기준도 늘 바뀝니다. 시대에 따라 미남, 미녀에 대한 기준이 달라집니다.
방송에 나오는 미남, 미녀의 모습에 속지 마세요. 방송에 나오는 분들은 최고급 미용실에서 일류 미용사와 스타일리스트(stylist)가 비싼 화장품으로 가꾸어줍니다. 그런데 못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옷은 협찬을 받아 최고의 옷을 입습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카메라맨이 최고로 좋은 카메라를 이용하여 얼굴이 작게 보이도록 합니다. 그런데도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사랑의 눈으로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외형(外形)과 이목구비(耳目口鼻),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지금 나의 삶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열등감에 빠지는 이유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은 인구가 약 1억 명입니다. 그 중 4천 5백만 명이 절대 빈곤층입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주변에 약 5천만 명이 삽니다. 그런데 그곳의 도시 빈민은 아프리카의 빈민과 또 다릅니다. 아주 참혹합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만난 아이들은 다 행복해보였습니다. 그 아이들은 자기가 가난한 줄 모릅니다.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주 행복해보였습니다. 필리핀의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습니다.

왜 불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답게 만드셨고,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적합하게 선물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재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맡기신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는 왕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의 노랫소리가 사울 왕의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사울은 속이 뒤틀렸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인데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윗을 비교하는 노랫소리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왕인데도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가질 것이 없는 자가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무언가를 가져야, 무엇인가 갖추어야 열등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귀중하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축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입니까.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거울 앞에서 “멋져, 훌륭해.”라고 선포하세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너는 정말 귀해. 내가 너를 위해 내 아들을 줄 만큼 너는 귀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그런 나를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왜 힘들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가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축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내가 축복을 흘려보내는 데 인색했기 때문에 그가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여 그의 안에 있는 불만과 안타까움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내가 그를 축복하여 그에게 축복이 흘러갈 때, 저주가 바뀌어 축복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사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기계에 집착하고, 엉뚱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중독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나를 통해 축복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저주 받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축복하면, 우리 주변이 달라집니다. 주변에 축복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곳은 축복된 곳이 됩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곳이 밝아집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회복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태양이 비치면 먼지도 빛나기 시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축복해야 합니까? 상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주변을 바라보세요. 사랑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힘들어합니까?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바라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 김춘수 씨의 시 〈꽃〉은 아주 유명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꽃은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에게 주목합니다. 시선이 고정됩니다.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주는 것입니다.
주의가 산만하던 청년도 사랑에 빠지면, 대단한 집중력을 갖게 됩니다. 한곳에 꽂혀버립니다. 계속 바라보면, 그의 존재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면, 둘이만 보고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시선이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않는데, 나 혼자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목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임무입니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실천해보세요.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위력(威力)이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길은 다릅니다. 위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세요.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바라보며 열등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집중하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목받지 못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외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역사는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왜 주변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리핀에 며칠 머무는 동안, 빈민들이 사는 마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사는 집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습니다. 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지붕이 없는 집도 있었습니다. 집 옆으로 악취가 나는 하수(下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남자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어린 나이에 임신하면, 같이 살아가려니 막막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도망가 버립니다.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힘들어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삽니다. 그래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또 도망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빠가 다른 아이들을 엄마 혼자서 키웁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작은 집에 아이가 10~12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밥을 한 끼밖에 먹지 못합니다. 절대 빈곤의 나라입니다.
참혹한 광경을 많이 봐서 문화적 충격이 컸습니다. 며칠 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필리핀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기막힌 사역현장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스킨십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이 제게 다가와 제 손을 주무르며 만졌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볼을 만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꽃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계속해서 눈을 맞추었습니다. 아이들의 눈이 아주 예뻤습니다.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단지 불쌍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 아이들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눈을 맞추며 바라봐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을 때, 제 눈을 피하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빠에게마저 버림받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이 따뜻하게 웃으며 안아주고, 스킨십을 해주니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진 찍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자매가 “이 아이들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이 순간을 일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축복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저주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축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주만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더 저주스러운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지금 이슬람 국가들은 분노에 차있습니다.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기고, 나라가 없는 것으로 인한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을 향해 저주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누가 축복할 수 있습니까? 축복을 아는 사람들이 축복할 수 있습니다. 축복을 아는 사람들만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우리가 축복해주어야 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꽃이 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치유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회복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한 것을 칭찬하고, 그들을 향해 박수쳐주었더니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칭찬하고 박수쳐주는 것은 그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내놓을 만한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대한민국의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광경입니다.

집에서도 서로 축복해보세요. 남편이 아내를 축복하고, 아내가 남편을 축복해보세요. 부모는 자녀를 마음껏 축복해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누르고, 오히려 자녀를 축복해보세요.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약 3:10). 어떻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서는 축복만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축복이 나가지 않으면, 세상은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3장 11절에 보면,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축복만 말할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은 얼굴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다시 살아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의 입으로는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비관적(悲觀的)으로 말해서도 안 됩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절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과 교회를 향해, 주변의 어두운 곳을 향해 축복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축복할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우리의 최고 사명입니다.
세상의 불행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감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집 안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서로 바빠서 서로를 깊이 바라볼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병듭니까? 관심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도 관심을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쏟으면, 식물에서 빛이 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랑을 받고 주목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축복입니다.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봐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관심입니다. 그것이 이해입니다. 그것이 인정(認定)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빠져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통해 축복이 사람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존귀한 존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너는 충분히 멋져.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존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멋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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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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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입을 크게 열라
본문 / 시편 81:10~13

 

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11.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1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지난 주에는 ‘영적 전쟁에서 선제 공격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수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공격하라, 수비형에서 공격형으로 전환하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수비해서 이기는 전쟁은 없습니다. 공격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떠밀려 다니고, 수세에 몰려있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삶에 있어서 우리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적극적으로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성격도 적극적으로 변합니다. 예전에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었는데, 은혜를 받고 난 후에는 적극적으로 변합니다.

본문 시편 81편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건져주신 구원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편 기자는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건져주신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문 10~11절을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생활로부터 건져주신 구원의 하나님이시고, 오늘날에는 죄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것으로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입을 크게 열면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주시는 것으로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는 삶을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종살이에서 건져주셨는데, 여전히 빈궁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종살이에서 건져주실 뿐 아니라, 완전한 만족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81편 16절에 보면,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기름진 밀과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만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삶에 있어서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겨우 버텨내는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요즘 우리는 신자 된 우리 자신에 대한 기준을 계속 떨어뜨립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초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뿐 아니라, 기름진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풍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네 입을 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약속이 붙어있습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말씀하시고, 더 이상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면, 우리가 난감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말씀하시고, 약속을 덧붙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채우리라(I will fill it)”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채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구원 이후에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입을 크게 열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편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입을 크게 열어. 그러면 내가 채워주겠어.”라고 말씀하시며 적극적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적극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태도가 선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입을 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주시려고 해도 우리 편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기 때문에 불신앙적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 앞에서 눈치를 보며 굉장히 옹색하게 살았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는 준비되어있어. 너는 입을 크게 열어. 그러면 내가 채워주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흥분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에게 조금도 숨기지 않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의 말씀 속에는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입증할 만한 내용이 성경 전체에 가득합니다.
시편에서만 찾아봅시다. 시편 1편에 보면, 신자의 삶이 어떻게 묘사되어있습니까? 시편 1편 3절에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2편 8절에 보면,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보세요.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4:16).
제자들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정을 전혀 모르시면서 사람들을 책임지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을 다 아십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왜 시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주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주님이심을 발견하도록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주님 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도록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불가능한 상황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를 남게 하신 하나님을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불가능한 현실을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은 5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딱 맞게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셨습니다. 모자라지 않고, 항상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나에게 구하면, 내가 채우리라’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나에게 구하면, 내가 채워줄게. 2만 명이든, 5만 명이든 채워줄게. 너희는 나를 찾고 나를 구해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사람들을 책임져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너는 내게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입을 크게 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입을 크게 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입을 크게 열 수 있는 힘은 믿음입니다. 믿는 만큼 입을 크게 열 수 있습니다.

본문 11~12절에 보면,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악하여 하나님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완악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크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네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는 엄청난 일을 행하신, 크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많습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크신 분이시고, 광대하신 분이라고 표현한 구절이 많습니다.
시편 92편 5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95편 3절에 보면,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을 크신 분이시고, 광대하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입을 크게 열면, 하나님이 곤란해 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이 곤란해 하실까봐 걱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걱정은 내려놓으세요.
아무리 큰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꿈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꿈을 꾼다 해도 하나님은 그 꿈보다 더 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스케일(scale)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생각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세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세요. 우리가 가진 성경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현실에서 만나는 하나님보다 훨씬 크십니다.
여러분들 중 거의 대부분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간증거리가 많아도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기록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로를 무릎 꿇게 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시는 기적,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날마다 먹게 하신 것 등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까.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 만난다면, 아마 우리는 기절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 깊이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계속해서 강화시키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인공이 됩니다. 바디매오에게 일어난 일을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처럼 경험하게 됩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현장에 내가 있게 됩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되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경험을 하면, 현실에서 모든 일을 경험할 수 없지만, 성경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은혜 충만한 상태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엄청난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수준으로 보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이성 세계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이나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 이구아수 폭포(Iguazu Falls) 등의 자연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감탄합니다. 그런데 그때 감탄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는 지구 전체에서 보면, 한 모퉁이에 있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지구 안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로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먹고삽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십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성경의 기사(奇事)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건져내시고 출애굽시키신 일,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일 등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자신의 이성(理性)이나 경험의 한계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점점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의 입이 점점 작아집니다. 우리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신 하나님을 날마다 대면(對面)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경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됩니다. 놀라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에게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크고도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크신 하나님을 향해 입을 크게 여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그것이 완악함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애굽에서 너를 인도해낸 여호와가 말씀한다. 네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크게 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현상유지에 익숙해졌습니다. 그것이 몸에 굳었습니다.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이 종살이에서 굳어진 삶의 패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종살이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나 여호와가 말하는데, 이전의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의 생각과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향해 입을 크게 열라는 것입니다.
종살이 할 때에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바로 아래에 있을 때에는 바로가 먹을 것도 없고, 일을 시키며 압제했지만, 나는 너희를 건져낸 여호와다. 이제 종살이가 끝난 정도의 삶이 아니라, 너희의 삶을 만족하게 하겠다. 풍성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우상 앞에 무릎 꿇고, 두려워했던 삶을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모두 기도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기도하고도 책망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초점을 우리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기도의 초점을 우리의 수준에 맞춘다면, 기도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기도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축소해버리면,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작게 여기면, 기도가 작아집니다. 입을 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믿으면, 기도의 내용도 커집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불신앙이 커질수록 기도는 작아집니다. 신앙이 커지면, 기도가 커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크고 비밀한 것, 상상을 초월하는 것을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따라 기도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작은 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기도의 태도가 불손(不遜)합니다. 기도해도 되고,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한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갖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졸음이 옵니다. 기도에 대한 열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가 커지면, 기도를 간단하게 끝낼 수 없습니다. 100원을 구하는 기도와 억대의 사업자금을 구하는 기도는 같을 수 없습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더 주시려고 해도 우리가 입을 열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네 입을 크게 열라”는 말씀은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내용이 태도를 결정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생각이 커집니다.
기도를 통해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데 믿음의 분량이 점점 작아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옛날에는 능력 있는 분이셨는데, 요즘은 능력이 떨어지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 작아져간다면,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만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축소시킵니다. 우리의 기도도 점점 작아집니다.
“하나님, 저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라고 아주 건방지고 교만한 태도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런 것은 구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만 구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가난한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구할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것을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도가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하고, 본문에서는 ‘완악함’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다 보면, 우리의 생각이 커져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하고, 사고(思考)가 열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적극적으로 변하고, 불가능한 것을 보기보다 가능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믿음의 안경을 끼고,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기도가 점점 작아집니다. 내 기도가 이전보다 작아지고 있는지, 커져가고 있는지, 기도 내용이 빈약해져 가는지, 기대감이 넘치는 기도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내용이 점점 빈약해지고, 기도 내용이 점점 줄어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내용이 클 때에는 기도하러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했는데, 기도 내용이 점점 줄어드니 기도하러 교회에 나올 생각이 없어집니다.
기도 내용이 빈약해지니 간절히 구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사라져버립니다.

기도하면 가슴이 뜁니다. 기도할 때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흥분되어야 합니다. 기대감이 생겨야 합니다.
자신의 작은 생각 속에 하나님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기보다는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든다면, 그 기도는 불신앙적인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 자체가 빈약하면,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완악함입니다. 입을 크게 열지 않는 것은 완악함이요,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일 네가 나를 원한다면, 입을 크게 열어. 내가 크신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할 때마다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기도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할 만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흡족해하실 만한 기도,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기도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를 교정해야 합니다. 기도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바른 기도의 자세를 갖기 위해서는 기도의 내용을 점검해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기도의 태도를 걸러내야 합니다. 기도가 소극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도하는 것이나 기도하지 않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갈증을 잠시 해결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물을 발견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입을 크게 열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접근부터 다른 기도입니다.
단순히 한 가지 문제를 푸는 기도가 아닙니다. 근원을 해결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많이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말씀하신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채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이 채우시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채우시는 것은 자원낭비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지만, 대책 없이, 아무에게나, 아무렇게 부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없이 부어주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한 방울도 주시지 않으십니다.

왜 우리가 입을 크게 열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네 입을 크게 열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목적이 중요합니다.
첫째, 우리가 입을 크게 열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크신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시기 원하고,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고, 증거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입을 크게 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이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상과 어떻게 다른 분이신가를 알게 하기 원하십니다.
크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게 하는 것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과연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알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크게 구해야 하는 이유는 크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만족하실 만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네가 나의 영광에 합당한 기도를 하는구나.”라고 만족해하실 만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면, 영광의 찬란함에 눈을 뜰 수 없게 됩니다. 경이로움 앞에 모든 사람들이 무릎 꿇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입을 크게 열라는 말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둘째, 우리가 입을 크게 열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배만 채우기 위해 입을 크게 연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욕망입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입을 크게 열라는 것은 무조건 큰 것을 요구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 크게 구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 혼자 밥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살면 됩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되어야 하고, 형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형통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형통하게 된 것은 요셉이 노력한 결과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형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7년의 풍년을 통해 이웃까지 풍성함을 누리고, 나중에는 아버지와 형제들까지 풍성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70인을 고센 땅으로 오게 하시고, 히브리 민족을 크게 키우셔서 출애굽하게 하시는 거대한 구속(救贖) 드라마를 실현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야곱 가족들에게 기근을 겪게 하시고, 요셉을 찾아오게 하셨습니다.

왜 입을 크게 열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형통함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형통함이 이웃에게 흘러가고, 주변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입을 크게 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축복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나누려는 목적을 정확하게 가지고 있으면, 마음껏 구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욕심으로 보시지 않으십니다. 흘려보내기 위해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을 아무리 크게 열어도 부족합니다. 흘려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먹이려면, 입을 크게 열어야 합니다. 더 많이 먹으려면, 더 크게 벌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끼리만 쓴다면, 쓰고도 넘칩니다.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숫자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의미없습니다.
흘려보내야 하기 때문에 부흥해야 합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통일 이후에는 북한도 살려야 합니다.

지금 한반도 안에는 오묘한 변수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3년 이후에 경제적 위기가 온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에 의존해있습니다. 통일은 임박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통일되면,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북한을 품지 않으면, 길이 없습니다. 통일이 되면, 국가적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서독이 엄청나게 잘 살았지만, 지금까지도 동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안고 갑니다.
우리나라는 독일보다 조건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입을 크게 열어야 합니다. 채우고 채워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북한으로, 온 세계로, 선교사들에게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주변에서 우리 교회에 대해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청하는 것이 많습니다. 예산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요청합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단체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우리 교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돈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입을 더 크게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를 살리고, 디아스포라 해외 교회까지 살리고, 다음세대를 살리고,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입을 더 크게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 크게 입을 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입을 열고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장악하게 됩니다.

물질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물질을 가져가버립니다. 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악한 일에 사용됩니다. 돈을 버는 데 악인이 얼마나 적극적입니까.
돈을 버는 데 있어서도 정당한 방법이라면, 적극적으로 입을 크게 열어 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하나님께 돌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누가 가져가서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돈의 파워입니다. 누가 가져가서 무슨 목적으로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한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아이디어로 큰 아이템(item)을 성사시켰습니다. 그것을 통해 번 돈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시겠다고 간증하셨습니다.
그 간증을 들으니 제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일어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데, 우리가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독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흘려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입을 크게 여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곳간을 채우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흘려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우시는 이유는 우리 주변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입을 아무리 크게 열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입을 크게 벌릴 이유가 없습니다. 한 숟가락만 먹으면 되는데, 입을 크게 벌려서 무엇 하겠습니까.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린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하나님을 내 배를 채우는 욕망을 위한 도구로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섬기려는 마음이 넘친다면, 우리의 입은 크게 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저 혼자만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옆에 있는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이 땅을 살려야 합니다. 저로 인해 이 영역에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사용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우리의 입이 크게 열립니다.
우리가 크게 구해야 하는 동기는 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생활 속에서 고통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본문 시편 81편에 보면, 신음이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시편 81편 1절에 보면,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6절에 보면,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입을 얼마나 크게 열어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계가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입을 아무리 크게 열어도 하나님은 곤란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편에서는 제한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자원이 모자랄까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이 말씀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5).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벌릴 수 있을 만큼 크게 열어야 합니다.

불행을 면하게 해달라는 정도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이 넘쳐흘러 주변까지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몸이 아파서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겨우 버텨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승리의 전리품을 사탄에게서 빼앗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입을 크게 여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입을 사용하셔서 주변 사람들까지 먹이시는 역사를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심령 가운데 강력한 믿음을 주셔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크심을 찬양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안에 있는 염려와 근심 등이 사로잡아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제한하고, 기도가 쪼그라들어, 기도하지만 아무런 기대가 없고, 무미건조하게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기도하는 것까지 포기해버리는 불신앙적이고 완악한 모습을 끝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깨뜨려버리시기 바랍니다. 수세에 몰려 끌려 다니고 버티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건져내신 백성들을 기름진 밀로 풍족하게 하십니다. 반석에서 난 꿀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향해 입을 크게 여시기 바랍니다. 입을 크게 여세요.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일으키실는지는 하나님께 맡기세요.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입을 크게 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책임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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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멈추어 서있지 말라
본문 / 여호수아 18:1~7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2.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
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4.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5. 그들이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되 유다는 남쪽 자기 지역에 있고 요셉의 족속은 북쪽에 있는 그들의 지역에 있으니
6.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7. 레위 사람은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며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저편 동쪽에서 이미 기업을 받았나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이니라 하더라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2005년 스탠포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하면서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끊임없이 갈망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도전을 주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4강 신화를 이루었을 때,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은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그는 강한 투지와 열정을 드러내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요즘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여유가 있다 보니 이전에 가졌던 헝그리(hungry) 정신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먹고살만해지니 사람들이 유약해졌습니다. 사람들은 편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환경 속에 묻혀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서 열정으로 가득 찬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충대충 살아갑니다. 쉽게 살려 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토록 동경하고 바라던 가나안 땅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꿈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라고 바라던 가나안 땅에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과정은 하나뿐입니다.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은 그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 땅을 자기의 것으로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땅을 이미 정복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들에게 주어져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일곱 지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땅을 주셨으니,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갈 것 같은데, 말뚝이라도 박을 것 같은데,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나안 땅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일을 끝내지 않고, 갑자기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마라톤으로 설명하자면, 마지막까지 완주(完走)해야 하는데, 그들은 주저앉아버렸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남아있는데, 그들은 멈추어서버렸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고 책망했습니다.
일곱 지파는 가나안 전쟁에서 매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왜 취하려고 하지 않고, 지체하고 있느냐고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왜 취하려고 하지 않고, 지체하고 있느냐, 왜 여기 머물러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여기에 주저앉아있느냐는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새로운 땅이 눈앞에 있는데, 머물러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수아는 책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너무 쉽게 만족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광야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건조한 광야를 벗어난 것 것만으로도 참 좋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넌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노예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그친다면 미완성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安住)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유혹이 의외로 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머물러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기 스스로 합리화하고, 자신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 머물러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예생활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각자 삶에서 안주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도전해도 ‘나는 여기가 좋아. 이 정도면 괜찮잖아. 더 이상 뭐가 필요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계속 도약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있습니다. 현실에 적응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먹고살기에 바쁘다 보니 ‘이 정도 신앙생활 하는 것도 괜찮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일 출석 잘하고, 그런대로 직분도 감당하고 있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어떤 위치에 도달한 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하려 합니다.

바울은 그의 신앙 여정 가운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12).
그는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영적 도약을 위한 그의 목표는 결코 얄팍하지 않았습니다. 성숙을 위한 그의 목표는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는 결코 쉽게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달리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며 적당하게 살려하는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적으로 부요한 세계를 향해 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마치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해버릴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입니까? 영적 무감각입니다. 영적 기대감과 사모함이 없어져버립니다. 영적 일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영적 헝그리 정신이 사라져버립니다. 사모함, 갈급함, 기대감, 갈망이 없어집니다.

욕심이 없는 것은 좋지만, 의욕조차 없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과욕(過慾)은 금물(禁物)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갈망은 있어야 합니다.
기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쉽게 포기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욕망은 갖지 않아야 하지만, 영적 축복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은 문제입니다.

목표를 놓쳐버릴 때, 스스로 세운 기준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도피(逃避)입니다.
더 나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적당한 지점에서 만족해버립니다.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습니다(마 17:4). 갈 길이 먼데, 여기가 좋다며 만족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마 16:22). 베드로는 주님의 구속 사건을 가로막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 깊은 은혜의 세계가 있는데, 적당한 곳에 자리를 깔고 싶은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선의 편안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잠깐의 행복을 위해 영원한 즐거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일곱 지파에 대한 여호수아의 처방은 무엇이었습니까? 각 지파마다 세 사람씩 뽑아 그들이 차지할 기업의 땅들을 돌아보고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남은 부분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지도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은 그 땅에 가서 지도를 그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장체험을 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지도가 필요해서 지도를 그려오라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일함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함입니다. 현장체험을 통해, 무관심으로 일관되었던 그들의 마음에 열망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땅을 밟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소원이 일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업들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가를 그들로 하여금 보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답답해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축복의 땅을 목전(目前)에 두고도 가만히 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들이 눈앞에 있는 땅을 취해야 하는데, 그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왜 그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들은 본 것이 없었습니다. 본 것이 없으니까 그들 속에 아무 그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습니다. 그 땅이 얼마나 크고 광대하고 풍성한가를 몰랐습니다.

본 것이 없으면, 무엇이 좋은 것인지 설명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눈앞에 있는 것만 보는 근시안(近視眼)이 됩니다.
현실에 만족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미래에 대한 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앞에 주어진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설명해도 이대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해결방법은 무엇일까요? 백 마디의 설명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직접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그림을 그려오게 한 것입니다. 그 땅의 지도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본 것이 있으면, 쉽게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 때문에 본 사람은 주저앉아있을 수 없습니다. 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왜 중요합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보아야 아는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보지 않고도 이미 본 것처럼 믿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안(肉眼)으로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은 미리 보는 눈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리더(leader)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어야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되면 안 됩니다.
왜 믿음의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합니까? 믿음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미리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어가는 리더로 여호수아를 세우신 이유는 그는 이미 가나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중 한 사람으로 가나안에 갔을 때,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살피고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이 무엇인지 샅샅이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그 땅을 밟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여러분이 본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림을 먼저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림을 이루어가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림이 정확하게 그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냥 돌아보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려오게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대충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대충 봐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꼼꼼하게 챙겨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크고 놀라운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그려오라고 한 것은
첫째, 구체적인 비전이 생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고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비전이 생깁니다. 비전을 일으키는 데 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비전이 생기지 않습니다.
보는 것이 비전이 됩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비전입니다. 믿음으로 보고 있다면, 그것이 비전이고,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보는 것이 없으면, 비전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보는 것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봅니까?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보는 것이 축복입니다. 보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보는 것은 자극을 일으킵니다. 보는 가운데 자극이 일어납니다. 자극이 일어나면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흥분이 일어나고, 열정이 일어납니다.
비전은 열정을 일으킵니다.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만족하지 않게 하고, 주저앉지 않게 하는 힘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비전은 위험을 선택하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OM국제선교회는 둘로스와 로고스라는 선교 선(船)을 움직이며, 세계 86개국에서 3천 6백 명의 사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인 선교단체입니다.
OM국제선교회의 설립자는 조지 버워(George Verwer)입니다. 조지 버워는 어렸을 때에 온 세상이 물로 덮여있다는 것을 알고, 바다를 왕래하며 선교하는 것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조지 버워는 바다를 보며 요트 탈 것을 생각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데 바다를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둘로스와 로고스 배를 통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OM국제선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바다를 보며 그 꿈을 가졌습니다. 그 꿈이 커지고, 비전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세계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지도가 그려진 옷을 항상 입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는 날마다 세계지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조지 버워는 커다란 지구본 풍선을 들고 설교합니다.
그는 세계지도를 보고, 바다를 보며 꿈을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입니다. 바다를 통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꿈에 사로잡힌 한 사람에 의해 설립된 선교단체를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자녀들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선교지도 많이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름에 단기선교를 많이 갑니다만,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것을 보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합니다. 많은 것을 보는 기회를 많이 가지면,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여름에 단기선교에 많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나라든지 작정하시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먼저 목표를 정하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목표를 정하시고 기도하며 도전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자꾸 보면, 우리 안에 그림이 생깁니다.

여호수아는 사람들에게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땅을 보고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얼마나 광대한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호주에 살 때, 아무리 달려도 한 주(州)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주가 그렇게 큽니다. 끝도 없이 달렸습니다. 미국은 또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서 우리에게 여러 영역을 보게 하시면서 비전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갖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양한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공간적 개념을 계속 넓히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높은 곳에 가보세요. 등산하다가 길을 잃으면, 아래에서 헤매다 보면, 점점 더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면, 길이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올라가 보세요. 그렇게 하면,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하는 땅이 얼마나 넓은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비전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끌고 갑니다. 내가 보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본 것을 내가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다르게 살아갑니까? 본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것인가. 세상이 보여주는 것을 볼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도 세상의 문화를 가지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보여주려 합니다.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여셔서 장래의 기업의 풍성한 것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정복해야 할 땅이 아직 많은 것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에 앉아있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여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시고, 구체적으로 보게 하시고, 우리가 본 것을 비전으로 일으키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둘째, 사명을 확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땅을 다니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도만 그리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를 그리므로 그 땅에 대한 애착, 관심, 비전이 생기게 하고, 그 비전을 통해 우리를 사명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복해야 할 영역이 있고, 버려진 땅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발견하게 하시고, 그것을 어떻게 가꾸고 세워야 할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도를 그려오게 한 것은 사명과 연관되어있습니다. 본 것이 비전입니다.
그런데 비전이 비전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비전은 사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비전을 구체적으로 성취해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땅을 계속 살펴보는 가운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점검하게 했습니다.
계속해서 바라보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게 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의 할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사명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다 보면, 우리 안에 사명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계속해서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꿈꾸게 하시는 것들 속에 우리를 향한 부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밥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현실에 안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도시와 나라에 대한 영적 도해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전을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에 집중하며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 안에 사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황폐한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셔서, 방황하고 상처 입은 영혼들, 깨어진 가정들, 고통하는 청소년들을 보게 하시면,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취하게 하시는 땅, 다가가게 하시는 사명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업(遺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업이 얼마나 풍성한지 모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엡 1:18~19).
바울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기 원했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릴 때,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들을 보게 됩니다.

은혜 중의 은혜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하신 기업의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들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역이 얼마나 풍성하고 많은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을 때, 바울은 이전에 붙들었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붙들고 미련을 가졌던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신앙생활이 교회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먹고 놀고 어울려 다니는 친목모임과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축복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하는 부요함과 복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주저앉아있게 됩니다. 우리도 모르게 무관심이 찾아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무관심해지고 영적으로 나태해집니다.
왜 영적으로 나태해집니까? 영적으로 계속해서 상승해야 하는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깊고 풍성한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것을 향해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어서 만족합니다.

은혜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 깊고 풍성한 세계로 나아가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은혜 충만한 가운데 산다는 것, 영적으로 계속해서 도약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은혜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은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기본 상태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서 은혜를 빼앗아가고, 기본적인 것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나태해지면, 본전도 찾지 못합니다. 기본적인 것도 잃어버립니다. 나중에는 기도도 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계속해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본문에서 찾아야 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본문에서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약속이 성취되는 그 날까지 멈추지 않고 달음질쳐야 합니다.

영적으로 계속해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내 삶 속에 이루어질 것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세요.

요즘 ‘트라우마(trauma)’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과거에 아픈 기억과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에 갇혀서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삶이 자신을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삶이 어떠하든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든지, 과거에 좋지 않은 경험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 능력이 부족하다 해도 우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선택하면, 믿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내디디면, 우리에게 능력이 부족하다 해도, 과거에 상처와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불안하여 갇혀있기만 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과거가 어떠하든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면, 삶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이전의 좋지 않았던 환경이나 경험에 묶여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과거일 뿐입니다. 미래를 위해 도전하면, 과거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도전하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제자리걸음하지 마세요. 현상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마세요.
결단하고 내디뎌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내디뎌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과거가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한 걸음 내딛는 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서부터 모든 역사(役事)가 시작됩니다. 과거에 문제가 있어도, 나를 붙잡는 요소가 수없이 많아도,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디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 되어주십니다. 거기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걸음 내딛는 믿음의 행위가 바로 용기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현실을 합리화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무기로 삼는 삶은 믿음이 후퇴하는 삶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 발 내디뎌야 합니다. 선택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한 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까? 영적 기업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믿으십니까?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림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부요하신 아버지께서는 자녀가 그냥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두실 리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기업의 영광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시는 영역이 있습니다.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도를 그리게 했습니다. 멈추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도를 그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 보여주실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 파묻혀 먹고사는 것으로 인해 발버둥 치다가 인생을 끝내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 가운데 주저앉아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현실의 편안함에 젖어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과 축복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곳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혹시 머물러있지는 않습니까? 작년, 재작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선을 그어놓고, 선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 살지 않습니까? 과거의 승리에 젖어 멈추어 있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광맥(鑛脈)이 있는데, 멈추어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광맥이 있습니다. 금광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멈추어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하게 만족하며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깊은 은혜와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일평생 달려도 끝에 도달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약속은 광대(廣大)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은 매우 광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분도 예외가 없습니다. 나이와 조건은 상관없습니다. 지금까지 은혜를 많이 받고, 지금까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배고픈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산과 같아서 우리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산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일평생 다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지점에 멈추어 서서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다 경험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의 삶과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된 후의 삶이 크게 다를 바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풀려나 가나안에 들어가 사는 삶은 이전의 삶과 전혀 다릅니다. 확연히 구별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와 예수님을 믿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생각해보세요.

신자의 삶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과 차이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궁색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예생활에서 겨우 벗어난 정도의 삶이 아니라,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새로운 삶이 열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으로 적극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정복해가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누려야 할 영역들을 사탄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의 영토를 사탄에게 빼앗겨버립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땅을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사탄이 그것을 빼앗아갑니다.
혹시 사탄에게 빼앗긴 것이 없습니까? 탈환(奪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탈환하셔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머물러있지 말고 계속해서 도전해야 합니다. 계속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멋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에 대해 적극성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치고 나아가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다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영적으로 배고픈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풍성한 세계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적당한 수준에 머물러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언제나 배고파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안전지대에 머물러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위험한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이라면, 우리가 거침없이 나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 내디디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우물쭈물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의 풍성함의 베일을 계속해서 벗겨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세계는 광대하고 놀라워서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베일을 벗기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 베일을 벗기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그러나 베일을 벗겨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로 가서 취하기만 하면 되는데, 가서 취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수아는 가서 지도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한 것입니다. 자극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도전하게 했습니다. 사명을 확인하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다시 세워가는 것을 다시 꿈꾸게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한계를 그어놓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으려고 머물러있고, 자신의 삶을 제한하고, 믿음과 반대되는 행위로 안주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한계선을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머물러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서있지 않고, 쟁취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림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세계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저앉아서 맴돌고 있고, 제자리걸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궁색한 노예적 삶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의 풍성함을 누리며, 영적 세계에서도 더욱 깊이 더 풍성하게 다가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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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십자가를 체험하라
본문 / 로마서 5:7~8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십자가는 개인마다 다르게 체험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스펙트럼(spectrum)은 굉장히 넓고, 자신의 앵글(angle), 즉 형편과 처지, 시간과 공간 등에 따라 빛으로, 은혜로, 진리로, 사랑 등으로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체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론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교리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관념이 아닙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실입니다.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온 인류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어린 양 예수의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은혜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사건보다 더 크고 혁명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신 사건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머리로, 이론으로, 개념으로, 관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십자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치 2천 년 전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십자가로부터 흘러넘치는 엄청난 열기와 에너지, 사랑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신앙생활을 힘없이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거나 십자가를 대적하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애매모호한 중립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거나 십자가를 내쳐버리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절기를 지나는 동안 십자가 사건이 시공간을 넘어 우리 각자에게 어떤 의미와 느낌과 감동과 확신으로 다가올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갈라집니다. 신앙의 진위(眞僞)가 십자가 앞에서 갈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은 리트머스 종이와 같습니다.

고난의 절기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벚꽃이 만발한 때에 꽃구경을 하다 보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감흥(感興)이 있습니다. 계절에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서도 꽃을 구경할 수 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는 시즌(season)이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제철입니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를 맛보기에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고난주간 중에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금요일을 보내며 우리는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십자가 속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시려는 최고의 메시지, 최고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내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흐르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끝없는(endless)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사랑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고농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 18~19절에 보면,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찬송가 304장 3절의 가사를 보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쓴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렴에 보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 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가사를 기록한 작사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무치게 경험한 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찬송은 무덤덤하게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쓴 글입니다.
찬송가 304장의 작사가처럼,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라고 암송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사랑은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겠습니까. 연애소설을 백 권 읽는 것보다 한 번 연애하는 것이 낫습니다. 연애소설을 많이 읽 것과 자기가 사랑에 빠져봐야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했습니다(요일 4:16). 하나님의 속성이 여러 가지 있지만, 하나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공의도 있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로 묶으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추상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사랑을 굉장히 실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고, 손실은 없고, 그것만큼 상실은 없습니다. 그것만큼 손해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신앙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알고, 관념적으로 받아들이면, 신앙은 재미없습니다.
머리로 십자가를 믿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은 머리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론화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은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신앙은 모호한 개념을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완전히 체험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진리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길이 없습니다. 경험해야 합니다.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경험해보라고 말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감탄합니다. 벚꽃이 만발할 때, 우리는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느낍니다.
얼어붙었던 겨울이 지나고, 새카맣게 죽었던 나무에서 새싹이 피어나고, 꽃들이 만발하여 온 세상을 물들인 것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 정말 멋집니다. 정말 매력적입니다. 하나님은 예술가(artist)이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색깔 감각이 탁월하십니까.”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이 세상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지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논리가 아닌 사건으로 우리의 심장 한가운데에 핵폭탄 같은 것이 터지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이 절정에 이르러 불타오른 때가 언제였는지 회상해보세요. 십자가를 경험했을 때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것이 제 신앙을 터지게 했고, 십자가가 저를 헌신하게 만들었고, 십자가가 오늘도 저를 마르지 않고 사역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고, 제 삶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견디게 하는 힘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진리가 십자가 안에서 터지지 않으면, 진리는 단지 좋은 말씀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나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심장이 터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언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로마서 5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랑을 받을 만한 모습이 하나도 없었던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 덩어리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선인(善人)을 위해 죽어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착한 사람을 위해 죽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착한 사람을 위해 죽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악인을 위해 죽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오라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습니다. 죄인이든 원수든 연약하든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충분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흘러넘칩니다. 우리의 갈증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병주고 약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도 주고 상처도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충분한 사랑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전한 해갈을 허락하는 사랑입니다. 순도(純度) 100%, 고농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덮치면, 우리는 기절해버립니다. 너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결핍입니다. 욕구 불만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사랑에 대한 불만에서 온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방황하고 돌아다닙니까? 결혼한 사람이 왜 다른 이성에게 기웃거립니까? 술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왜 울분에 싸여있습니까? 온갖 것을 해보지만, 가슴이 왜 텅 비어있습니까? 별 짓을 다 하고 돌아다녀보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증을 느끼고 분노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을 기대했는데,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상처를 받는 이유는 사랑다운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든 사랑, 오염된 사랑, 욕망이 불탄 사랑,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사랑, 이기적인 사랑, 목마른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갈증을 한 순간에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우리의 병든 마음을 치유하고도 남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설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아야 움직이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 고장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기근을 만났습니다. 절망하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사랑결핍증을 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크고 놀라운 만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양념에 불과합니다.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허상(虛像)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인간은 최상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문제로 인해 이상 기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이 깨어지고, 채워지지 않는 만족으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보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일하는 것은 다 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넘쳐야 합니다. 사랑이 오고가야 합니다. 사랑이 막힘없이 오고가야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의 문제가 막혀있으면, 모든 것이 막힙니다. 모든 것이 시들시들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사랑이 열리고,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마음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꽃피울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떠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만 경험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보다 행복하고 황홀한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사랑을 주는 쪽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받는 쪽 역시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리 사랑을 쏟아 붓는다 해도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끊임없이 말씀하는데,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그 사랑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난주간을 수십 년 보냈어도 무덤덤하게 보낸다면,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량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깊어져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량이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저수지처럼 넘쳐흐르는데,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량이 작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용량은 무제한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아주 뜨겁고 풍성합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용량이 문제입니다. 바다보다 넓은 사랑을 좁은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이미 많은 상처를 입고 사랑을 의심합니다. 병든 가슴은 사랑한다고 해도 놀랍니다.
아가에 보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한다고 했을 때, 술람미 여인은 도망갔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는 비천한 여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사랑으로 인해 병들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우리에게 일시키는 고용주처럼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완악하고 굳어진 마음은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왔습니다. 변질되고 오염된 다른 사랑을 익혀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성령이 역사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막힌 표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역사(役事)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주의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사모하시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사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의 영혼에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똑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어집니다. 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없을까요? 부어지면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으신다는 표현이 제게 와닿습니다. 살짝 담그는 정도가 아니라, 똑똑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어져서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는 데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히 부어질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만 한다면, 여러분에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의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신앙이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상처와 아픔이 한순간에 치유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갈증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입술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럽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함량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부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모든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깊어질 수 없습니다. 강력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우리의 헌신도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인간관계도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왜 힘들고 피곤하고 짜증납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작은 일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신경질적이었던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굉장히 부드러워지고 관대해집니다. 상처를 잘 받던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쉽게 상처를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힘든 일도 힘들지 않게 해내는 능력이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떨어지니 매사가 피곤하고 짜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사랑이 부어질 때, 그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게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일어나면, 그 후에는 큰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가리켜 ‘소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사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힘겹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힘이 사명의 길을 걸어가게 만듭니다. 그 사랑이 삶이 되고, 사역이 되고, 사명이 됩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찾아오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확인하듯이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지만, 이 말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니? 나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너를 사랑했어. 너도 나를 사랑하니?”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며 주님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요 21:16).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 앞에서 베드로는 눈이 열리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으로 반응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로부터 사랑을 받고, 나도 그를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사랑의 경험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입니다. 사랑을 받은 경험과 받은 사랑으로 상대방을 사랑할 때, 행복은 배(倍)가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헌신이고, 그것이 사명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사랑을 표현할 줄 모릅니다. 사랑에 서투릅니다.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다운 사랑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랑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사랑했다고 하지만,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의 인생에서 길을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사랑의 힘 때문입니다. 헌신도 수고도 모두 사랑의 힘으로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은 만큼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지
 않고 하는 것은 모두 억지일 뿐입니다. 우리에게서 아무리 짜내봐야 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에너지는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떨어지면, 그때는 죽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 피할 수 없는 강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헌신을 고민하지 마세요. 그 대신 사랑하세요. 사랑을 경험하세요.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헌신하게 되어있습니다. 헌신하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8).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9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순교에 대한 예언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나를 사랑하므로 네가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인데, 그것이 순교요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살고 싶고, 주님을 위해 죽고 싶어 합니다.
사랑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굉장히 다릅니다. 사랑은 완전히 빠지는 것입니다. 맛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느낄 수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거대한 해일처럼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만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순교까지 이어집니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힘이 나로 하여금 죽게 하십니다. 기쁨으로 죽게 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뜨겁게 일어나면, 그때부터는 다른 것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신앙의 마지막은 순교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기꺼이 드리는 것이 순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위해 죽고 싶어집니다. 너무도 사랑하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께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목숨까지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영성은 복된 것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들의 특권입니다.

전승(傳乘)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랑의 포로가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었습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조심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허무한 죽음이 많습니다. 비참하게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억울한 죽음도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삶은 다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분명한 삶은 강력합니다. 생명을 내어놓고 사는 삶에는 파워가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겁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영성은 우리를 순교자의 영성으로 이끕니다. 사랑하는 분을 위해 죽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주님과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죽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순교의 영성은 어두운 주제가 아닙니다. 무거운 주제가 아닙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주제입니다. 사랑의 힘이 죽음의 힘을 이기게 합니다. 그것이 순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아들을 매다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빠져들고, 사랑의 깊이와 너비, 높이와 길이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의 특징은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모든 것이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말세의 특징은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니까 삶이 시들시들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부부사이에도 사랑이 중요합니다. 돈이 있고, 좋은 집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봉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이 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교회를 향해 주님은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5). 다른 것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합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의 가슴에 사랑이 회복되고, 사랑이 타오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사랑만 있으면 살아날 것입니다. 불같은 사랑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뜨겁게 달아오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깊고 풍성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해답입니다. 그 사랑이 깊어져야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십자가가 해답이 되는 이유는 십자가 안에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 풍덩 빠지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놀라운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만끽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갈보리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다가올 것입니다. 자신의 심장을 터뜨리시며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시고 울먹이시는 성부 아버지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는 아들의 침묵을 통해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들리는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해. 너를 위해 내 아들을 죽게 할 만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유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사랑 받을 만한 것이 아무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한량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품어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원색적인 사랑, 충만한 사랑, 넘치는 사랑을 경험하시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갈증이 모두 해결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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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넘쳐 흘러야 이긴다
본문 / 요한복음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왜 중요합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엎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재주와 경험, 우리의 머리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방법도 묘수(妙手)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바닥이 드러나고, 바닥을 긁습니까?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임하시는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이 임하고, 우리가 채워지면, 그때부터 도약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제자리에 머물던 신앙생활에서 도약하게 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독특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을 받은 후 현격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확연한 변화가 일어나 성령이 임하시기 전과 후가 정확하게 구분됩니다.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래서 나도 알고, 주변 사람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도 놀랍니다. 주변 사람들도 놀랍니다. 확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느낍니다. 나도 그것을 느낍니다.

본문은 초막절의 끝 날에 주님께서 서서 외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물이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것을 기념하는 독특한 절기입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으로 길어 나르는, 예식을 행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마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길어내려고 애씁니다.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인간의 힘으로 초월에 이르려고, 초월을 경험하려고 애씁니다.
인간의 힘으로 노력하다 보면, 인간이 강화되고, 인간이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이러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고, 도를 닦으며 인간이 중심이 되고, 자신을 실현하고, 자기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허무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로 가면 해결됩니다. 간단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됩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 답이 있습니다. 강력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소개하십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를 믿을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약속하고 있는데, 곧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절기를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약의 실체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그것이 무엇인지 실제적으로 정확하게 드러내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으로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났던 현상인데, 이제는 생수의 강이 넘쳐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는 현장은 사도행전 2장입니다.
사도행전 1장까지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봇물이 터지는 것처럼 생수의 강이 넘쳐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흘러나오리라’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흘러나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흘러나온다는 것은 더 이상 제한적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한시적이거나 제한적이지 않고, 더 이상 긁을 이유 없이 흘러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특정인과만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입니다. 흘러넘치니까 특정인에게만 특수하게 주어진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흘러넘친다는 것은 제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도 제한이 없고, 환경에도 제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막을 수 없이 터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행 2:18).

흘러넘친다는 것은 미미한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현격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천장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천장에서 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흘러넘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흘러넘친다는 것은 미미한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눈에 띄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1년 열두 달 52주 기도하러 다녔지만,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흘러넘친다는 것은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덮으신 것입니다.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름 부으심(anointing)’이라고 표현합니다.
기름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기름이 부어지는데, 그것을 못 느낄까요? 변화가 일어난 것을 모르겠습니까? 모른다면 기름이 부어진 것이 아닙니다. 흘러넘침, 부어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복음서까지는 제자들이 중심이었습니다. 제자와 사도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에는 배운다, 공부한다, 학습한다, 훈련받는다, 따라다닌다는 의미가 많습니다. 제자는 그 수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물론 제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자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가 중심이었습니다. 주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다른 사람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끌려서 교회에 오셨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을 데려오시기 바랍니다.
사도는 배우는 단계가 아닙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습니다. 사도는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使徒)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디로 보냄을 받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십니다. 거기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죽더라도 거기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사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시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부어주심이 없으면, 아직 제자입니다. 더 배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배우는 것에만 열심을 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시면, 배우는 것에 핵분열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배우기만 하여 지식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배운 것이 전혀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 하는데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는 졸장부가 되었습니다.
아는 것은 엄청난데, 공부는 많이 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똑똑한 소리는 혼자서 다 하는데,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성령이 부어지니 베드로의 입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지탄 없이 말했습니다.
메가톤급으로 쏘아대니, 대제사장과 제도권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배운 것, 아는 것만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실력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백 마디의 말로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실력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이제는 말한다고 해서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20). 위로부터 능력이 부어져야 합니다. 내 안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산에 다니며 도를 닦는다 해도 그것으로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능력을 부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흘러넘쳐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면, 어떻게 될지 뻔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면, 제자들이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름 부으심을 연상하게 합니다.
기름 부으심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짐승의 뿔에 기름을 담아서 머리에 붓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 기름은 온몸으로 흘러내립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기름이 흘러내리면, 기름과 몸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됩니다. 기름이 온몸에 흘러내렸기 때문에 온몸이 기름으로 덮이게 됩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 ‘충만’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소극적인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려고 한다 해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려는 것은 자신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한다 해서 유지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위에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신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덧입혀주시는, 기름 부으심의 은혜가 없고, 그것을 사모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밑바닥을 긁게 됩니다.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충만히 임하셔야 합니다. 덧입혀져야 합니다. 흘러넘쳐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불이든 바람이든 우리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임하셨던 불을 지필 수 없고, 바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자(他者),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성령이 신앙의 주체이십니다. 성령이 신앙의 주체가 되셔야 합니다. 성령이 주장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이끄셔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실패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주관하시고 장악하시고 지배하시고 덮으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골골거리게 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을 흉내 낼 뿐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할 때,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우리의 삶이 쓸모 있게 됩니다. 우리가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가치 있게 됩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쓸모 있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영적 세계뿐만 아니라, 은사와 달란트, 재능 등 모든 것이 쓸모 있게 됩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사람들의 영혼을 파고듭니다.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재능이 극대화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가르침에 권세가 생깁니다. 가르치는 내용만 중요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침에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많아도 이전에는 그 지식이 쓸데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면, 지식이 쓸모 있게 됩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그 지식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똑똑한 척하고, 잘난 체하고, 남을 비판하기만 하고, 부정적으로 접근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지식이 지혜가 되고, 통찰력이 되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낳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막힌 영감(靈感)을 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길이 보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면, 어려움이 와도 난관을 뚫고 나아가는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지혜롭게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받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영감을 받고, 그가 가진 달란트가 살아납니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변화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꿰뚫으며 설교했습니다. 지력(智力)이 넘쳤습니다. 영감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학문 없는 사람으로 알았다가 그의 설교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령이 지성(知性)을 비롯하여 그의 모든 것을 사로잡고, 그의 입술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도권의 사람들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이런 힘이 베드로에게서 나왔습니까? 성령이 그를 덮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에서 능력이 나왔습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능력이 나오니 3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役事)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고꾸라진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강한 유대교와 율법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오늘날과 다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고꾸라져 회개했습니다. 그의 말에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권세가 흘러나왔습니다.

오순절 이후, 사도들의 영적 권위가 높아졌습니다. 집사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집사들에게서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냥 평범한 집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감투만 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나 집사들에게서는 영적 힘이 느껴졌습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에게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영적 권위가 주어진 직분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름 부으심(anointing)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열두 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름만 제자였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니까 직분은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시간도 달라집니다. 시간에 쓰임새가 있게 됩니다.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시간의 질이 달라집니다. 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질이 달라졌기 때문에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꽉 찬 시간이 되어 시간마다 사건이 일어나고, 영적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속에 하루를 보내시는 분은 하루 종일 만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영적 감화를 주고, 수많은 사람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으면, 집중력이 매우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왜 집중력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집중력이 일어나면, 파워가 생깁니다. 성령이 기름 부으시니, 왜 사는지 알게 됩니다. 왜 사는지 알게 되니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시간 속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저 평범하게 살면, 시간이 산만해집니다. 하루 종일 뭘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루가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별것 아닌 것으로 시간을 허비합니다. 요즘 세월이 얼마나 악합니까. 시간이 얼마나 오염되어있습니까. 인생은 시간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시간의 역사(歷史)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가운데 살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잡념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집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승산(勝算)이 있고, 생산성이 있고, 효율성이 일어납니다.
학생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면, 학업의 진도가 달라집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으면, 기질에서도 장점이 나타납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성령께서 기름을 부어주시니까 현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질이 변합니다.
원래 기질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면, 기질이 그대로 있지 않고, 기질에서 긍정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우울질인 사람들은 대체로 소극적입니다. 완벽주의적인 면이 있습니다. 매사에 철저하기 때문에 힘들게 살아갑니다. 매사에 까다롭고 꼼꼼하여 때로는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우울질의 사람이 좋게 쓰임 받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일을 감당해낼 수 있습니다. 좋은 면이 쓰임 받게 됩니다.
다혈질의 사람은 열을 잘 받습니다. 쉽게 흥분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쉽게 낙심합니다. 다혈질의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시면, 남들에게 없는 용기를 갖습니다. 다혈질의 사람은 열을 잘 받는 만큼, 감동을 잘 받습니다.
베드로가 다혈질입니다. 다혈질은 말을 잘합니다.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시니, 베드로의 입이 풀렸습니다.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점액질의 사람은 매사에 느립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긴장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점액질의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면, 안정감 있는 사역자가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변덕이 심한 사람에서 정감 넘치는 사람으로, 우울한 감정이 축제의 감정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 성실한 사람으로,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모든 기질이 극대화되고, 멋지게 쓰임 받게 됩니다.

기질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좋은 면이 극대화됩니다. 그때 쓰임 받는 인생이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배는 가라앉고, 비행기는 뜨지 않고, 자동차는 달리지 않습니다. 악기는 연주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은혜가 흘러넘칠 때, 모든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좋은 면이 극대화됩니다. 이것이 기름 부으심의 은혜입니다.

기름 부으심의 은혜가 있으면, 잠재되었던 것들이 활성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가치가 극대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장 아름답게 드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름 부으심의 은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상황에 따라 조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충분조건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흘러넘치는 은혜, 압도하는 은혜가 있으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극대화되고, 활성화되고, 효율화되고, 놀랍게 쓰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가치가 일어납니다.
부으시는 은혜, 임하시는 은혜, 덮으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시간과 은사, 재능과 지식 등 모든 영역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모든 일에 변화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둘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모든 것이 풍성해집니다. 모자람이 없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배에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思考)에 의하면, 배는 중심을 의미합니다.
중심부에서 흘러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중심에서부터 모든 곳으로 전이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고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습관입니다. 구습(舊習), 뿌리 깊은 옛 습관은 내 힘과 의지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뿌리 깊은 습관, 묵은 습관, 늘 제자리걸음하게 만드는 습관은 의지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습니다. 이것이 10년, 20년 쌓이면,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악습(惡習)은 삶의 죄성(罪性)과 상처와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얽히고 뒤범벅되어 견고한 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지만, 우리는 반복해서 죄를 짓고 무너지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회개합니다.

습관은 오래된 집입니다. 두꺼운 벽입니다.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성령의 부으시는 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나보다, 내 습관보다 더 강력한 힘이 내 안에 임하여 나를 끌고 가셔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0년, 20년, 30년 묵은 악습이 끊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굵은 쇠사슬이 칭칭 감고 있었는데, 성령의 능력이 한 부분을 쳐서 끊어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굵은 쇠사슬을 내 힘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위로부터 능력을 부으시면, 그 배에서 흘러넘치는 강력한 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지금도 그것을 경험하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노력하는 것 이상의 힘이어야 합니다. 내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위로부터 덮으시는 은혜가 임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면, 억지로가 아니라, 쉽게 허물어지듯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습관의 두꺼운 벽이 마치 여리고성 무너지듯 무너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분명히 경험하여 여러분에게 있는 악습과 구습, 여러분의 삶을 무너지게 하는 벽들이 무너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우리에게 권세를 허락합니다. 권세가 무엇입니까? 권세를 가지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권세가 없으면, 더 큰 권세에 끌려가게 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의 권세가 대단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하늘의 권세를 얻으면, 하늘의 권세는 돈의 권세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고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권세가 없으면, 늘 돈의 권세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피곤합니다.

왜 권세를 가져야 합니까? 자유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힘을 가지려고 합니까?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돈을 많이 벌려 합니까?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돈이 있으면,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돈이 있으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따라 움직입니다. 돈의 권세를 맛보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우리가 돈의 힘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사실 빼앗기는 것이 더 많습니다. 돈을 통해 얻는 자유는 있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자유를 빼앗깁니다.
돈의 욕심에 사로잡혀 살면, 자유가 없습니다. 돈 때문에 쩔쩔매게 됩니다. 욕심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면, 자유가 옵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우리를 맡길 때, 우리에게 자유가 옵니다.
물이 발목에 차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헤엄칠 수 있을 만큼 물이 차면, 물이 나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물이 허리까지 와도 안 됩니다. 내가 움직이려고 합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 무엇인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깊은 강물에 들어가 버리면, 물이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흘러넘치는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기면, 어떤 자유가 옵니까? 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사탄의 유혹과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유혹으로부터 자유를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에 유혹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유혹을 일대일로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탄은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를 흔들려고 합니다. 우리를 결박하여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결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사탄보다 강한 분이신, 성령의 임하심과 덮으심,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 안에 있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사탄은 우리의 감정의 영역을 사로잡으려고 애를 쓰고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을 사탄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우리의 감정을 공격합니다.

우울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방치해놓고 있으면, 사탄이 감정을 공격해버립니다. 사탄은 우리의 우울한 감정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감정을 초토화시키고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감정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주변 상황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감정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우울증도 초기에 잘 대응해야 합니다. 정신과적 요소, 유전적 요소 등 많이 있지만, 우리는 영적인 영역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으면, 감정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연약해지면, 감정의 영역도 연약해질 수 있습니다. 요즘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리는 분이 많습니다. 이전의 아픈 경험들이 삶을 시달리게 만듭니다.
무엇을 하든 늘 두렵고 불안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쉽게 불안해합니다. 심리적으로 매우 약합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감정 상태가 아주 연약합니다.

열등감도 얼마나 무섭습니까. 열등감에 빠지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어두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끙끙 앓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의 밑바닥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열등감도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기 힘듭니다. 열등감은 굉장히 무섭습니다. 열등감은 매우 강한 감정입니다. 열등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겨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밑바닥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믿습니다. 존재감이 생깁니다.

제자들은 우물쭈물하고 숨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이후의 사도들을 보세요. 얼마나 당당합니까. 기죽지 않고,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부으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강한 역사가 일어나니까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따지고 비교할 기준이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은혜가 강하게 임하면, 자신의 약점까지도 드러내어놓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드러냈습니다.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키도 크고 잘 생겼고, 모든 것을 가진 왕인데,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 부르는 것을 듣고, 사울 왕은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결국 비정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당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면, 우리의 감정 상태가 최고의 상태가 됩니다. 어두움의 감정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빛이 임한 것입니다. 빛이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진리가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감정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아주 밝아집니다. 희락의 강수(江水)가 흘러넘칩니다. 즐거움이 넘칩니다.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락의 영이 우리를 덮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춤추게 하십니다. 삶에 대한 태도가 무한긍정으로 바뀝니다. 겁날 것이 없습니다.
다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셨기 때문에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눈빛이 달라집니다. 의욕이 넘치게 됩니다. 살맛이 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멋지게 죽습니다. 죽음의 힘도 누를 수 없는 생명의 힘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도 암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죽음 앞에서 담담해야 합니다. 천국이 열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영이 우리를 누를 수 없습니다. 죽음의 영에 사로잡혀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부으시는 은혜, 흘러넘치는 은혜가 마지막 순간까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자유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유가 찾아올 줄 믿습니다.

왜 피곤하게 살아갑니까? 걸리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도 걸리고 저기도 걸리고 별 것 아닌 것에 넘어지니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충만하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자기감정에 걸리고, 다른 사람의 말에 걸리고, 환경에 걸리고, 자빠지고 넘어지던 삶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삶은 무엇입니까? 종의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습관의 사슬들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흘러넘치면 충만해집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면, 성령의 권능보다 강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이 끊어지는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더욱 깊어지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풍성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깊은 곳으로 헤엄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자유가 옵니다. 이제 끌려 다니지 마세요. 주의 영의 이끌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피곤한 삶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의 사역자로 변신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보세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감당하므로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쁨을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 안에 있을 때에도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기쁨을 빼앗아갈 자가 없었습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움을 누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제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예배를 통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입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린 아이처럼 간절히 사모하세요. 전혀 다른 인생이 다가올 줄 믿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제는 힘들게 살지 마세요. 끙끙대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슥 4:6). 그것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기름 부으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기름 부으심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라지는 은혜, 확연히 달라지는 은혜, 모든 족쇄가 풀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자체가 쓰임새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극대화되기를 바랍니다. 풍성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충만히 덮으시는 은혜, 부으시는 은혜, 임하시는 은혜, 이끄시는 은혜, 지배하시는 은혜, 주관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내 의지와 노력을 벗어나 성령으로부터 사로잡힘을 당하는, 성령께서 압도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디로 보내든지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능력의 말씀이 터져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은혜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 시대,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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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본문 / 출애굽기 14:10~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병거들을 거느리고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의 군대는 최첨단 병거들을 거느리고 사막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습니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출신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 부딪쳤습니다.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출구(出口)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상황에 부딪쳐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상황을 겪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는데, 얼마 가지 못해서 숨 막힐 듯한 상황에 놓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 막막하고 캄캄하고 답답하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가장 힘듭니다. 이때는 죽고 싶습니다.
이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생각을 합니다. 죽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백성들보다 모세에게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문제가 리더십(leadership)인 모세에게 고스란히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세는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을 상황에 놓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생마와 같습니다. 그들은 노예 출신입니다. 모세가 이들을 데리고 광야를 지나야 하는데, 며칠 가지 않아 이런 아찔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가장 먼저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장 먼저 테스트(test)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보셨습니다.
모세는 백성들보다 더 심한 압박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테스트하셨습니다.

백성들이 흔들려도 지도자가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십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놀랍게도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모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출 14:13).
답이 전혀 없습니다. 캄캄합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릅니다. 최악(最惡)의 상황입니다. 이런 먹구름 속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본문 13~14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만히 서서’와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어려운 입장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돌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도 부족할 텐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공식을 말씀을 통해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입을 다물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이유를 꼽으라고 하면, ‘원망과 불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말로 실패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상황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말 때문에 실패합니다.

언제 원망 불평합니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이 벌어질 때, 원망 불평하게 됩니다. 내가 원한 것은 A였는데, B라는 상황이 닥치면, 원망 불평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내가 기대하고 생각한 대로 인생이 움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움직여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고생하게 됩니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생을 많이 사신 분들은 이것을 삶으로 체득(體得)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원망 불평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기대한 대로 인생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대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돌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을 다물고 성을 돌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들의 말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전쟁에서 인간의 머리와 인간의 지략(智略)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의 지략, 인간의 머리, 인간의 똑똑함이 필요하다면, 전쟁에서 아군끼리 의사소통해야 합니다. 인간의 싸움이라면, 회의를 해야 하고, 말을 해야 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딱 하나, 절대순종만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셔야 합니다.
사람들끼리 의사소통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입을 열고 떠들다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 전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기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이 주는 폐해(弊害)를 잘 알고 계십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굉장히 파괴적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입니다.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가정과 교회, 민족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이 역기능(逆機能)을 행사할 때가 많습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의 군사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가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입을 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혜로움은 위기의 순간에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움이 오면 말이 많아집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순간에 나오는 말은 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부정적인 말은 상황을 전혀 바꾸어놓을 수 없습니다. 악화(惡化)시킬 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너희들의 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말라, 하나님의 역사를 잠잠히 바라보기만 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입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로드맵(roadmap)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아가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순간 길을 잃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출애굽시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로드맵,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정확한 가이드라인(guideline)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구약중간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침묵기(沈黙期)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암흑기(暗黑期)입니다.
왜 암흑기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이스라엘의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깜깜한 밤과 같습니다. 마치 벼랑 끝을 걷는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대낮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캄캄한 흑암 가운데 길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19:105).

신구약중간기의 침묵을 깨고, 말씀이 터졌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광야로 갔습니다.
도시에 있던 사람이 왜 광야로 갔습니까? 그곳에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내 삶이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임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그 시대나 개인의 삶이나 가정은 끝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으러 광야로 갔습니다.

어두운 시대에서 빠져나오려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때에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이 가득한 곳에서 말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아니면, 사탄의 시험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지금 출애굽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셔서 홍해 앞에 서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곳까지 오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의 힘든 삶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힘든 삶으로 내모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길이 열립니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길은 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잠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하던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내 소리를 죽여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여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잠잠히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나중에 더 크게 폭발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냥 잠잠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위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냥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청(傾聽)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청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침묵의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침묵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밖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온갖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굴에 다 드러납니다. 그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밖으로 말하지 않을 뿐, 속에는 원망, 불평, 분노 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침묵과 경청은 연결되어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비로소 귀가 열립니다. 침묵과 경청은 같이 다닙니다. 침묵하지 않으면, 경청할 수 없습니다. 경청하는 사람들은 침묵할 줄 압니다.

혼란하고 어려운 순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답입니다. 어려운 순간이 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혼란 중에 있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위력(威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합니다.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의 말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혼돈과 공허 가운데 모든 것에 질서가 찾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청은 단순히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듣는 것은 내가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고, 경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경청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경청은 위로부터 임하시는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위로부터 임합니다. 우리가 촉각(觸覺)을 곤두세운다고 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위로부터 임하셔야 우리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임하시는 말씀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경청하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같이 듣는 것이 아닙니다. 경청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細微)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인지, 세상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음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경청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없어집니다. 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이 적어집니다. 말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경청하는 사람은 말 수가 줄어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거기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태도가 몸에 익어있습니다. 그래서 대화 속에서도 하나님이 상대방을 통해 어떤 말씀을 주시려는지 귀를 기울입니다.

경청하는 태도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다양한 영역 속에서 여러분에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청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길이 되고, 빛이 됩니다. 그리고 답이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혼돈과 무질서가 질서를 찾게 됩니다.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귀가 복된 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귀는 복된 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않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 걱정하지 않으면 됩니다.
때로는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나는 너와 함께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들려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엉뚱한 것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소음이 굉장히 많이 생깁니다.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소음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잡다한 이론을 들려주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집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많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치고 올라오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굉장한 소음에 시달리게 됩니다.
소음에 시달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영혼은 혼란에 빠져 죽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어디에 귀 기울여야 합니까?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같이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려운 것은 일어난 상황이 아닙니다. 진짜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길을 잃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경청하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가라고 할 때에 가면 됩니다.
서 있으라고 할 때에는 서 있어야 합니다. 서 있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친구를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영적 지도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백부장이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이 답인 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면, 광야에 있다 해도 길이 나며, 말씀이 로드맵이 될 줄 믿습니다.

셋째,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려움이 닥쳤다는 것은 우리가 풀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어려운 현실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현실을 거부하려 합니다. 그리고 빨리 벗어나려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유혹이 찾아왔을 때에는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실 때에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빨리 피하는 것은 답이 되지 않습니다. 도피(逃避)하는 것은 답이 되지 않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오듯이 마귀는 우리를 추격해옵니다. 마귀는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면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허락하신 곳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견디고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서(Stand firm)”라고 말했습니다. 움직이지도 말고,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가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쉽게 생각하고, 어려운 현실을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려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다니엘은 바벨론의 궁에 포로로 붙잡혀가 왕실에서 성장하며 왕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에게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모함과 어마어마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갈수록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버텼습니다. 이것이 정공법(正攻法)입니다.
다니엘은 힘든 위기의 한가운데서 도망치지 않고, 그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다니엘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텼기 때문에, 다니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부르심 앞에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는 좋은 일만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도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시편 23편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시편 23편 1~2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4절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나옵니다. 5절에 보면, ‘원수의 목전’이 나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곳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기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경험해야 하는 레슨(lesson)이 무엇입니까?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나아갔지만, 위기가 왔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그때 어떤 레슨을 받아야 합니까? 중요한 레슨입니다.
힘든 상황은 힘든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견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훈련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부활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없이 바로 부활로 가고 싶어 합니다.
애굽에서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해서 무조건 빨리 벗어나려 하면, 삶은 늘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힘들 때는 힘들어야 합니다. 힘들 때에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가 일어나기 직전에 어려움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통의 극점(極點)에 이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한계점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고, 인간적으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순간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워옵니다. 새벽이 되기 직전이 가장 어둡습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면, 새벽이 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어두운 순간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때가 중요합니다.

상황이 악화되면, 인간적으로는 절망적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독일의 패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항복하기 전 날에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만 더 참았다면, 하루만 더 견뎠으면 될 텐데, 그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절망한 것입니다.

힘들 때에는 버텨야 합니다. 뒤에서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옵니다. 앞에서는 홍해가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어렵고 막막하고 절망적이고 답이 보이지 않고 끝장난 것 같지만, 그냥 있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기 직전까지는 죽고 싶을 정도로 목이 탑니다. 그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이 시대에도 버텨내기 영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버텨내기에서 실패하면, 곧 다가올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곧 다가올 새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그냥 갈라지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앞과 뒤에서 압박할 대로 압박하고, 인간적으로는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 가운데로 몰아가십니다. 그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답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만 홍해를 가르실 수 있습니다. 그 기적 이후에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두렵다고 힘들다고 도망치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힘들어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다 끝내고 싶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갈 데까지 갔습니다.
그래도 버티세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때가 곧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넷째, 우리 대신 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버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 보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출애굽 역사는 인간의 계획에 의해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풀어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해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치르는 싸움은 하나님과 애굽이 싸우는 것이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선수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과정에서의 싸움은 대리전(代理戰)입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누구와 누구의 싸움인가입니다. 우리가 직접 싸워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싸우셔야 하는 것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아니라면, 마음 푹 놓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서서’는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신뢰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위기 상황 속에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를 잠잠히 바라보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꾸어놓으실 것을 믿습니다.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십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원리는 ‘대신하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큰 덩어리가 되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해주셨다는 것은 성경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구속(救贖) 사건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죽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싸우신다면, 그 싸움은 이미 결론난 것입니다. 승리는 확정되어있습니다. 이의(異意)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겨우 이기시거나 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상대에 따라 오락가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과 상대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강하십니다.

로마서 8장 31~32절에 보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37절에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실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영원까지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수준과 상관없이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대신 싸워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종살이하게 하시고, 고센 땅으로 야곱의 가족 70명을 불러오시고, 히브리 민족들을 다산(多産)하게 하셔서 백성들의 수를 늘리시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시기로 결정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이스라엘을 편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의 편이 되시고, 우리의 손을 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갈보리 언덕에서의 승리는 결정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의 코앞에 이르러도 애굽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손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과 문제가 코앞에까지 다가와서 금방이라도 죽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싸우십니다.

뒤에서 달려오는 애굽의 군대는 현실입니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때 눈이 흐려지면 안 됩니다. 초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초점을 잃은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고 상황을 바라보면, 백발백중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볼품없는 자신의 형편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신을 보면 한심하고, 주변의 상황을 보면 기가 막힌다면, 두려움이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놓치고,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바라본다면,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울증에 걸립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곳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두려움의 상황을 바라보면, 그곳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디를 바라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두려움의 상황을 바라보면, 그곳으로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가 있는 곳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절망의 늪을 바라보면,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올수록 시선을 한곳에 고정해야 합니다.
사탄은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게 하고, 시선은 분산시킵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킵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초점을 잃어버립니다.
영적 초점이 맞추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신앙이 약화(弱化)됩니다. 시선이 분산되면, 영적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러면 영적 싸움에서 지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못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기체(機體)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착륙하려다가 상황이 좋지 않으면,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못하는데, 비행기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 떨어지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영적 배짱입니다.

우리를 위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애굽의 바로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넘실거리는 홍해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 와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영적 배짱, 영적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10년 이상 하셨다면, 영적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강력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백전백승(百戰百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은 실수하여 질 수도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은 백전백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완승(完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의 군대는 막강합니다. 출애굽기 14장 6절 이후에 보면, 애굽의 군대들이 병거를 갖추고 오는 장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최고의 화력을 갖춘 부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무기는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14장 3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가 이야기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군대를 수장(水葬)시켜버리시고,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문제가 클수록 하나님이 크신 분이심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문제가 닥치면,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큰 문제이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경이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고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극한 어려운 순간에 절망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말하기를 멈추세요. 그리고 귀를 기울이세요. 현실을 그대로 버텨내세요. 어려움이 올수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날이 가까웠습니다. 도피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놓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 죽었을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깊은 고난의 한가운데서 사방이 막혀있고 답이 없을 때, 끝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죽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맹렬히 싸우십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편이 되실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을 높여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날마다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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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본문 / 에베소서 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본문은 우리가 많이 본 구절입니다. 에베소서 3장 14~19절에는 바울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울의 기도 후에 본문
20~21절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송영(頌榮)’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면서 결론적으로 끝내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본문 20절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등식(等式)입니다.

신자(信者)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기도로 먹고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할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가는 여정(旅程)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배우지 못하면, 일평생 힘들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하면 주신다는 기본적인 등식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면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는 구절이 눈에 띕니다. 우리가 구한 것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도 응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매우 적극적인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십니까? 그렇다면 큰 일 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다 응답된다면 큰 일 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다 응답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정욕적인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우리의 기도에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하는 바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에 꺼림칙하다면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할 때에 담대함이 생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확신이 생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것이 없을 때, 우리는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바른 관계에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은 귀한 것입니다. 그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안에 들어오는 생각들은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에 우리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거룩한 생각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에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 살까, 어떻게 하면 영혼을 구원할까’하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까지 들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 이상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것을 생각한다 해도 하나님의 생각에 미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능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 사라가 많이 늙어서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상태와 같은 자신에게 자식을 주신다는 것은 경험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생각을 넘어선 것입니다.
하늘에 별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거룩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상상력이 심각하게 결여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게으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을 일으키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장막에서 나와서 밤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5).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의 상상력을 자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엄청나게 많은 별들을 바라보게 하시며, 아브라함의 상상력을 자극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거룩한 상상력이 일어나게 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상상력이 풍성해집니다.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에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꿈꿔보지도 못한 일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그렇게 됩니다.
현실은 암담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어둠 속에 갇히지 않고, 어둠을 뚫고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현실에 갇힙니다. 답답한 현실에 갇혀버립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상상의 날개, 생각의 날개를 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문제를 뚫고 새 역사를 펼치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상상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단조로운 언어 속에 갇혀 계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언어 속에 갇혀 계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신다는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구해야 할 것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읊조리는 기도의 틀 안에 갇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훨씬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문구(文句)를 바꾸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돌보십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말로 표현된 기도보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중(心中)을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생각까지 넓혀야 합니다. 믿음으로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저 너머의 세계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넘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끝은 아닙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단어에 유념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넘치도록’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십니다.
이것은 넘치고 있는데, 그 위에 더 넘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매우 많은데, 그 위에 더 부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시대의 특징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到來)한 것입니다. 율법 아래와 은혜 아래의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율법 시대는 정확합니다. 자칫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모든 것은 불완전합니다. 정확해야 합니다. 넘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다릅니다. 은혜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들이부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넘치도록’ 이 표현은 최상급을 의미합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무제한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복음이 주는 은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흘러넘치는 것이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끼지 아니하시고’라는 표현은 참 멋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이 없으십니다. 아끼면 넘치지 못합니다. 넘친다는 것은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냥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음을 입증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셨으면, 죽이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실 때에 항상 아들 예수님이 기준이 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의 아들과 견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것을 느끼면서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롬 8:37).

상한가(上限價)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상한선(上限線)이 갑자기 뛰어올랐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치는 대가를 지불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 18~19절에 보면,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한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최고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덧붙일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세상 어디에나 결핍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다 해도 무엇인가 모자랍니다. 아주 멋진 집에 이사를 가도, 뭔가 결함이 있습니다. 아주 멋진 곳에 여행을 가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와 같이 사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충만이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충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커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무엇입니까? 계산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을 의미합니다. 넘치도록 흘러 부어지니까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닫혀있으면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부어지니 어떻게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불만족입니다. 풍요의 세상을 살고 있지만, 결핍 증세를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핍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 채워지지 않습니까? 잘못된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부족한데, 돈이 더 생기면 채워집니까? 채워지지 않습니다. 돈이 부족해서 돈으로 채워진다면 좋은데, 돈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이 더 마릅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면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체득(體得)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충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무제한적 공급, 은혜를 알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넘치도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 더하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관점이 있다면, 수정되기를 바랍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결정적인 문제는 주인에 대해 오해한 것입니다. 주인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주인을 매우 인색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신앙에 매우 치명적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뒤틀려있으면 힘듭니다. 아버지는 부자인데, 자녀가 아버지께 용돈을 받을 때마다 눈치를 본다면, 얼마나 한심합니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매우 답답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는 돼지 죽통을 훑다가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제자들은 어린 아이의 손에 있는 오병이어 그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5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열두 바구니에 차게 남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에도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적극적으로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예외 규정을 만들고, 축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 속에서 이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간증이 담긴 고백입니다. 모든 필요(all needs)를 채우시리라는 의미입니다.
구하지 않는 것도 불신앙이지만, 축소하여 구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하는 것에 더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풍성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영역 속에서 무제한적으로 부어짐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의미입니다.
염려하는 삶은 바닥을 긁는 삶입니다. 은혜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흘러넘칩니다. 율법은 우리가 행한 만큼 돌아오는 것이고, 은혜는 우리가 행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늘 주눅들어있습니다. 눈치보고 끙끙거리며 살아갑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도 기도 내용이 다릅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라지도 않습니다. 생각이 늘 부정적입니다. 하나님을 인색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실 리 있나’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율법적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복음 안에서 은혜에 흠뻑 젖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아들이라는 대가(代價)를 지불하시고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노력과 공로를 내세운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지만, 예수님의 공로가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며 우리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당당해야 합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바닥을 긁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주님 앞에 강력하게 부르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넘치도록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 전혀 계산하지 않으시고 부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사랑에 빠져 실성한 아버지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돌아오는데도 불구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했습니다.
모든 것을 더하여주시는 은혜, 모든 것에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노력해도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산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가 쪼그라들지는 않습니까? 생각이 초라해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제한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인색한 분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구하는 것의 지평이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더하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까지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갇혀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훨씬 넘치도록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점은 두 가지여야 합니다. 하나는 본문 21절 말씀입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제한적으로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생각의 초점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정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보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둘째,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생각의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넘치도록 부어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과 방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맞추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신경 쓰십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직장에 들어갈 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교사로 여기에 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흘려보내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갈 방향을 바로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십니다.

무슨 생각이 좋은 생각입니까? 나누고 베풀려는 생각이 좋은 생각입니다. 착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착한 일에 넘치도록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이웃과 나눌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것을 나누기로 생각하는 것이 부요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생각을 기뻐하십니다.
이 생각 위에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부어지고 흘러넘치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은 하나님은 능하신 분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주십니다.
여기서 ‘능히’라는 말은 100%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사안(事案)에 따라 되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power that is at work within us)’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능력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거룩한 상상력의 날개를 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세요.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겨우 걱정 염려하지 않는 수준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견뎌내는 삶이 아닙니다. 지루한 기도생활로 근근이 신앙의 맥을 이어가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을 격파하고, 내가 만든 울타리를 걷어내고, 경계선 없이 무제한적으로(unlimitedly) 역사하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믿음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소원을 축소시키지 마세요.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는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제한적으로 부어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축복이 넘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풍성한 분이신지, 우리가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시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끼지 않으십니다. 아끼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대가를 지불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아끼실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목표와 방향이 정확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기도하는 것,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충만한데 더 부어주시고, 계산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생활하면서 자신을 축소시키고, 하나님을 제한하고, 겨우 버티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거룩한 상상력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한 상상력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한 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제한 없는 기도를 거침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우리를 통해 흘러넘쳐서 우리 주변으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를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흘러넘치게 하시고, 더하여주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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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본문 /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설교 제목이 “‘더’ 얻을 것인가, ‘다’ 빼앗길 것인가”입니다. 설교 제목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는 줄을 잘 서야 합니다. 더 얻는 쪽에 설 것인지, 아니면 다 빼앗기는 쪽에 설 것인지 잘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겼습니다. 종의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여기서 한 달란트의 가치가 매우 큽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런데 6천 데나리온이라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수억 원이 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굉장한 배려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마음먹고 종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물론 주인이 그냥 떠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소유를 반드시 종에게 맡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자신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긴 것으로 보아 주인이 상당히 부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겼습니다.

이 비유를 전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이 돈을 더 벌기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맡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더 남긴 종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분위기를 보면, 주인은 더 많은 것을 끌어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오히려 종들을 배려하고, 종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만약 돈을 끌어 모으는 것이 주인의 목표였다면, 주인은 돌아와서 종들에게 맡긴 것을 다 거두어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은 주인 자신의 유익보다 종들을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있는 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기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것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잠재력, 가능성(possibility)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재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주도 많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지혜와 창의력이 무궁무진합니다. 우리 안에 매장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얼마나 활용하고 개발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어마어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물질도 주시고, 직업도 주시고, 열정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특별히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마당을 깔아놓으시고, “내가 준 것으로 무엇이든 해봐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껏 뛸 수 있도록 마당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 받은 이후에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 안에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지원 속에서 풍성한 구원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옛날의 저주의 삶이 끝나고, 죄악으로 묶였던 노예 된 삶에서 자유를 얻어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의 권세를 끊고, 악습을 끊고,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들이 마음껏 꽃피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의 세계 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구원은 잔치입니다.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넘치도록 더하여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무엇이든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무엇이든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후에 우리를 간섭하시기보다 우리가 마음껏 해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마음껏 활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4~15절에 보면,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긴 후,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긴 후에 그것을 어떻게 하라고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겨놓고 주인은 떠났습니다. 멋진 주인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이제 공은 종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맡겼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뢰를 의미합니다.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사실 주인은 모험을 한 것입니다. 종들에게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인이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면, 자신의 재산을 금리가 좋은 곳에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이자를 많이 주는 곳에 원금을 맡기고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종들에게 맡겼다는 것은 종들을 신뢰했음을 의미합니다. 주인은 실패할 수도 있음에도 종들을 신뢰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길 때, 종들이 잘못하여 돈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100% 성공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종들을 신뢰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대로 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종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책임지겠다는 주인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맡길 때에는 자신이 맡긴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종들에게 맡긴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고 싶었습니다.
주인은 대단한 모험을 한 것입니다. 위험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신뢰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음껏 해보라고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남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불려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신앙의 삶은 우리가 받은 것을 불려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는 열 달란트가 되고, 열 달란트는 스무 달란트가 되어야 합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네 달란트로 불려야 하고, 네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여덟 달란트가 되게 해야 합니다. 받은 것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이 줄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비유를 통해 풍성한 이야기가 여러분의 인생에서 흘러나오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와 다른 이야기를 써가야 합니다. 주인이 본래 원하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네가 멋지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선용(善用)해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재산을 늘린 사람들에게 칭찬합니다. 그리고 주인은 재산을 늘린 사람에게 재산을 더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산을 늘리는 것이 주인이 의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늘린 종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보너스도 주었습니다.

왜 주인은 재산을 늘리는 것을 원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우리가 사장(死藏)시켜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선용하고, 투자하고, 배가시켜서 우리를 통해 나눌 것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목적은 그것을 늘려서 세상을 부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을 더 풍성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쪼그라들어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줄 것도 없고, 다른 사람과 나눌 것도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늘려서 복과 은혜와 풍성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면, 누가 나누겠습니까. 나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업이 잘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갈수록 풍성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늘리지 않으면, 나누어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을 하나님의 종들에게 충분히 주셔서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구원하고, 아름답고 풍성하게 바꾸어나가는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배가시켜서 주변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불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을 불려야 합니다. 은혜를 불려야 합니다. 받은 은혜와 깨달은 것을 불려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불려서 이 민족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가지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갈수록 늘어나야 합니다. 갈수록 더욱 쓰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살다 보면, 여기저기서 나를 불러야 합니다. 내가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내가 늘렸더니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쓰임 받는 것입니다. 나의 간증을 듣고 싶어 하고, 내가 깨달은 것은 나누기 원하고, 내가 받은 은혜를 얻기 원하여 나를 불러주는 곳이 많아야 합니다. 이렇게 쓰임 받으면, 내 인생은 배가 됩니다. 최대화(maximize)됩니다.
명성과 칭송, 사람들의 인정(認定)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쓰임 받고, 내가 가는 곳마다 불이 일어나고, 내가 가는 곳마다 역사가 일어나면, 그 인생은 배가(倍加)의 인생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기는 인생입니다.

받은 것을 꿀꺽 삼켜버리고, 본전치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늘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기뻐서 더 주었습니다. 더하여 더 남겨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불리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습니다. 여기서 바로 가서 장사했다는 것을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투자했다는 의미입니다.
투자는 언제나 위험합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위험이 느껴집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는 것은 모험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종입니다. 그러니 장사해봤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맡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가서 그것을 장사했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투자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두었다가 나중에 주인이 왔을 때에 그것을 내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서 장사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위험합니다. 그런데 해석에 차이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하는 것이 위험하지만, 그것을 기회라고 여겼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하는 것이 위험하니까 그런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어느 쪽이든 위험합니다.
가서 장사하다가 잃어버리는 위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만히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선택할 것인가, 가서 장사하다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위험이 있음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본문은 어느 쪽을 지지합니까? 둘 다 위험하지만, 성경은 투자하는 쪽, 시도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성경에서는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모험을 시도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본문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험한 일임을 말합니다.
인생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은 안 됩니다. 죽을 때에 죽더라도 시도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 속에 깔린 중요한 주제(theme)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업이든 목회든 모든 일이 힘듭니다. 어느 직종이든 힘들지 않다고 일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영역의 일이든 힘들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일이 쉬웠던 때가 언제입니까? 쉬운 일이 있습니까?
남의 일은 쉬워 보입니다. 그런데 쉬운 일은 없습니다. 다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안 될 이유를 찾으면, 안 될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신랄하게 책망 받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혹독하게 책망 받는 것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있는 것을 빼앗아버리고,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했습니다. 조금의 자비도 없습니다. 아주 심각하게 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혹독한 심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습니다. 이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아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현상유지를 한 것입니다. 현상유지를 한 것을 어떻게 보면 잘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관점을 달랐습니다. 주인이 보기에 이 사람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유지는 어떤 면에서 보면 악한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인이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주인에게 받았던 한 달란트를 다 써버린 것도 아닙니다.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충격적인 선포를 했습니다. 주인에게서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을 뿐인데, 주인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왜 악합니까? 주인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입니다.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큰 잘못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주인은 따지고 있습니다. 주인은 종을 신뢰하여 그에게 기회를 주고 그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그는 몸을 사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생각하기에는 종이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최소한 그렇게 하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는 것이야말로 주인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생각이었다면, 주인이 직접 땅에 묻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줄 몰라서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생각이었다면, 주인은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 맡겼다면, 이자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이 최소한의 시도도 하지 않은 것을 책망했습니다. 이처럼 주인이 맡긴 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사역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무난한 것이 최상(最上)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남길 것인가, 아니면 빼앗길 것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가만히 있을 것인가 뭔가 할 것인가, 안전이냐 모험이냐, 주인으로부터 더 얻을 것인가 아니면 다 빼앗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했습니다. 이것은 투자했다는 의미입니다. 투자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모험할 수 있습니다. 모험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험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시도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의 믿음을 체크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믿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주인은 종을 믿고 달란트를 맡겼고, 위험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시도해야 합니다. 모험해야 합니다. 도전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시기 원하십니다. 믿음의 삶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삶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려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데,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쓸데없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필요합니까? 위험한 일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바로 가서 장사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모험입니다. 잘못하면 다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도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안전한 삶을 떠났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맡기셔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빼앗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빼앗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쪼그라드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잠재력, 가능성 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엄청난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기대는 엄청납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리발을 내미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삶의 조건과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안전을 찾게 됩니다.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별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난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요령껏 적당히 살아가려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본문의 비유에 의하면, 우리 인생은 기회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자체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마당을 깔아주시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시며,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불려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은혜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혼자 가지고 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은 것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일평생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금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불리고 남겨야 합니다. 줄이면 안 됩니다. 쪼그라들면 안 됩니다. 세월을 보내며 그것을 땅에 묻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머리도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머리도 자꾸 써야 합니다. 두뇌는 쓰면 쓸수록 좋아집니다. 자꾸 쓰면 두뇌가 발달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써야 은사가 계발됩니다. 쓰지 않으면 은사는 없어집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계속 가르쳐보세요.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쓸수록 능력이 더 나타납니다. 쓰지 않으면 녹슬어 없어집니다.

하다 보면, 무엇이든지 어렵습니다. 시도하다 보면,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시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옵니다.
가만히 있을 때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인데, 하다 보니 그곳에서 또 다른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되든 되지 않든, 어렵든 쉽든 해보아야 그곳에서 의외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인의 의도는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험을 두려워합니다.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괜히 무엇인가 하다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에 대해 곡해(曲解)하고, 자기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의식의 차이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이든 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이든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식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지능지수도 비슷비슷합니다. 능력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의식의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의 의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을 잘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서 한 달란트를 묻어버렸습니다.

능력의 차이는 배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식의 차이는 백 배의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장애물을 보지 말고, 기회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하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기회보다 장애물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면 모든 것이 문제입니다.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장애물을 장애물로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기회로 보려고 훈련해보세요. 장애물은 기회이고, 문제에는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장애물 때문에 모든 것을 멈춰버립니다. 사람들이 얼어붙습니다. 그런데 장애물이 없는 곳이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곳이 있습니까. 어디든지 문제는 있습니다. 어디든지 장애물은 있습니다.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기회가 됩니다. 일사천리로 쉬운 것은 기회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쉬운데, 그것이 어떻게 기회가 되겠습니까. 어려우니까 해볼 만합니다.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고, 장애물이 있으니까 해볼 만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태도와 각도와 의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안 된다 하고, 모든 사람이 문제와 장애물이 있어서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곳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쉬운 길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운 길을 골라 가면, 그곳에 기회가 많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장사하다가 어려움이 생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장사하다가 손해를 보거나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주인이 그 소식을 들었다면, 주인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주인은 그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맡기고, 종들이 가서 무엇이든 해보려고 애쓰다가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주인이 들으면, 주인은 그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제가 주인이라면, 종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끌어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돈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종들이 잘되라고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면 종들이 힘들어할 때에 주인은 종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종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주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우리가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땅에 묻어두었는데, 어떻게 도와주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려고 애쓸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아무나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염려하는 사람은 계속 염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려고 열심히 애쓰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공급해주십니다. 먹여주십니다. 책임져주십니다. 모자라면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은 1차적으로 종들이 시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은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것을 종들이 품고 있거나 땅에 묻거나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실패하거나 성공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주인은 종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일단 시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삶이 게으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다가 무엇인가 선택한다면, 그 선택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면 선택한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게으른 삶, 악한 삶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과감한 결단과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일이 벌어집니다. 위험하지만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땅에 묻어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일이 없는데, 무엇을 도와주시겠습니까.
누가 기도합니까? 일하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날마다 먹고 노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강력하게 기도할까요? 일을 크게 벌여놓은 사람이 강력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순간, 기도는 뜨거워집니다.
그런 사람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기도할 때에도 몸이 앞으로 기울어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것이 없는 사람은 등을 의자에 기댄 채 기도하다가 졸기도 합니다. 기도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 시간에 조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조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뭔가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불이 붙는 기도제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시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기도해도 기도가 맹숭맹숭합니다. 긴장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에 좁니다.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냥 있지 마세요. 무엇인가 시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사용하세요. 활용하세요. 머리를 쓰세요. “하나님, 아이디어를 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창의력이 살아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사업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해주십시오. 창의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세요. 일을 벌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다보면 해본 사람만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꾸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제가 부임한 후, 특별새벽기도를 여러 번 했습니다. 몇 주간에 걸쳐 특별새벽기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주간에 걸쳐 특별새벽기도를 인도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교 제목과 본문을 미리 정해놓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의 핵심 주제가 정해져야 설교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평소의 스케줄을 다 소화하면서 매일 매일 설교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에는 부흥회를 인도하듯이 설교해야 합니다. 너저분하게 설교한다면, 누가 오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제가 호주에서 목회하면서 훈련되어있어서 어렵지는 않습니다. 저는 호주에서 목회하는 동안 외부 강사를 교회에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제가 다 했습니다. ‘내 양은 내가 먹인다’라는 생각으로 제가 다 했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 최고로 맛있습니다. 가끔 외식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때로는 입만 버렸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 강사를 초청하지 않고, 제가 다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제 설교만 들었습니다.
물론 외부 강사를 초청하면, 저는 편해져서 좋습니다. 저도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 했기 때문에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다 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 나중에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시간을 주고, 주제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무엇이든지 하세요. 일단 많이 하세요. 저는 쉬는 시간에 글을 씁니다. 글이 되든 말든 쉬는 시간마다 계속 쓰다 보니 매주 수영로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매주 설교 준비하고, 스케줄이 많은데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글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육전도사 시절부터 틈만 나면 글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뭐합니까? 노는 손으로 글 쓰고, 쉬는 시간에 생각하고, 쉬더라도 책을 가지고 놀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해보면, 자신에게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재능이 살아납니다.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으면, 선택해보고, 그 일에 도전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다 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경험이 생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20여 년 전, 수영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에 1주일 동안 일곱 개의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소그룹 사역, 제자훈련에 있어서 잔뼈가 굵어졌습니다. 지금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꾸 해보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일단 일해야 합니다. 모험해야 합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일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일도 합니다.
힘에 부치도록 일하다 보니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능력 주세요. 역사해주세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서울기도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에는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가면, 마치 개척 교회의 목사가 된 기분입니다. 기도모임 장소가 크지 않은 곳인데도 ‘오늘 이곳이 가득 찰까?’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채워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서울기도모임이 저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서울기도모임에 가면, 제가 굉장히 친절해집니다.
부산에서는 성도들과 대화할 수도 없고, 성도들도 제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면, 저는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데 서울기도모임에서는 그렇게 하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합니다. 서울기도모임은 저를 겸손하게 만들고, 저로 하여금 한 영혼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서울기도모임을 통해 제 성품을 다듬어 가십니다.
화요일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면, 저는 저녁도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여, 이곳을 채워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일을 벌이세요. 입을 크게 벌리세요. “하나님, 이번 일이 잘되어야 합니다. 잘되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지경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기도에 저절로 불이 붙도록 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그냥 기도했겠습니까. 엘리야는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머리는 양쪽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했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세상을 보면 소망이 없으니까, 환경을 보면 불안하니까 머리를 양쪽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한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며 기도하다가 끝내지 마세요. 피 끓는 시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때에도 맹숭맹숭합니다. 맹숭맹숭하게 살다가 인생이 끝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재다가 인생을 끝내지 마세요.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은 없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고, 오늘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내 삶의 모든 것을 걸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금방 옵니다.

본문에 보면, 주인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서 결산했습니다. 그 날은 금방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활용하세요. 활용하시고 불리세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더 늘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인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복음 안에서 문화명령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의 한가운데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야말로 팔을 걷어붙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과 자원과 재능과 가능성을 온 세상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꾸어놓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극적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험하셔야 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부지런해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게으르면 안 됩니다. 잠을 줄이세요. 걸을 때에도 빨리빨리 걸으세요. 가만히 있지 마세요.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던지세요.
죽을 각오로 해보세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멋지게 쓰십니다. 그러므로 몸을 아끼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엄청난 것을 사장(死藏)시키지 마세요.

저는 원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계속 설교하다 보니 이렇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서면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지금도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제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이만큼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제 삶을 드리고,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이만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영로교회에 부임하여 3년여의 시간 동안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몸을 아끼지 않고, 계속 드리려고 합니다. 언제라도 후회함이 없는 순간순간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가진 것 이상으로 저를 쓰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저를 어떻게 쓰실지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지금보다 더 쓰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몸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던질 용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여한이 없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주인은 종들을 신뢰하고, 종들에게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종들에 대한 주인의 배려가 눈물겹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엄청난 것을 맡겼습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교회에 중등부, 고등부,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깨어있는 한 사람, 자신의 삶에 모험을 거는 한 사람, 믿음으로 승부를 거는 한 사람, 몸을 아끼지 않고 불사르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이 역사(歷史)를 바꿉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둔다면, 그런 사람이 백 명, 만 명 있다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작은 것을 받았다 할지라도 거기에 모든 것을 걸면,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덧붙여지면, 감당할 수 없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받으시겠습니까? 다 빼앗기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더욱 풍족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인은 최종적으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긴 종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겼을 뿐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주님을 위해 삶을 드리며, 주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남겼을 때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면, 시너지(synergy) 효과가 일어납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니 얼마나 신바람 나겠습니까. 더 놀랍고 강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삶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얼마나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주인이 이 종을 그냥 두겠습니까. 주인이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자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주님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늘 부정적인 말만 하고, 남을 욕하고, 남을 탓하고, 억지 논리로 무장되어있는 사람과는 말씀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최선을 다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여 남기는 인생이 되면, 갈수록 즐거움이 넘칠 것입니다. 신바람 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밀어주실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잘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역하다 보면, 잘되면 잘되다 보니 더 잘되는 시너지 효과가 일어납니다. 안 되면 더 안 되어 곤두박질칩니다. 잘되면 더욱 잘되어 신바람 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쪼그라드는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대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계속 진행형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기막힌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험한 일을 시도하셨습니다. 우리를 믿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분히 실력발휘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실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89세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80세에 불후의 고전 〈파우스트(Faust)〉를 탈고했습니다.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90세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살았습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92세까지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했습니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92세의 나이에 발명에 몰두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여러분의 인생이 축소되지 않고, 확장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모험을 즐기세요. 나이를 탓하지 마세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모험하세요. 죽을 때까지 피가 끓게 하세요.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뇌가 회전하는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꿈꾸세요. 시도하세요. 도전하세요. 인생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세요. 갈수록 부요해지기를 원합니다. 갈수록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갈수록 최대화(maximize)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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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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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터널을 통해 순금으로

본문 / 욥기 23:8~13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고난, 고통을 말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욥입니다. 욥은 시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욥만큼 고난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고 떠났습니다. 욥의 몸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긁어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위로의 말을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의 속을 긁었습니다. 지옥과 같은 상황이 욥의 앞에 펼쳐졌습니다.

막 살다가 이렇게 되었다면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욥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은 혹시라도 자기가 모르는 가운데 자녀들이 죄를 지었을까봐 자녀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정도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당하는 고통은 의문의 고통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입니다.

고통이 깊어질 때에 가장 두려운 일은 믿음이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신가’라고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통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고, 그 고통이 길어질 때에 가장 큰 위기는 믿음의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신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위기를 맞는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생기고 힘들어도, 믿음을 붙잡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위기를 맞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고통이 하나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겹쳐서 일어나고, 그 고통이 하루 이틀, 끝도 없이 이어질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기입니다.

욥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무죄를 계속 주장합니다. 자신은 이런 끔찍한 벌을 받을 만큼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욥에게는 또 다른 영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본문 욥기 23장 8~9절에 보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앞으로 가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고, 뒤로 가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어디를 가나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숨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입니다. 고통 자체도 문제이지만,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큰 고통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보인다면, 고통은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차라리 이것이 내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맞으면, 질문이 자꾸 생깁니다. 보통 때에는 질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생기면, 질문이 생깁니다. 욥은 얼마나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오늘도 힘들게 살고 계신 분, 어려움을 가운데 계신 분들은 질문을 많이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없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은 하나님께 질문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질문이 없기 때문에 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런 질문은 귀에 익은 질문입니다.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에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where are you?”

고대사회에서는 고통을 하나님의 징벌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일반적 해석이었습니다. 누가 큰 병에 걸리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누가 큰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잘못해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네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그런 일을 당했을 거야.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얘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결론을 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에 빠져있을 때에 사람들이 이런 말, 저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 휘말려 고통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 말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이 내 고통을 해석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결론을 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의 말 때문에 희비(喜悲)곡선을 그립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 나의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이 타는 듯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말씀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욥의 모습은 굉장히 중요한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에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본문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삶은 미궁에 빠져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확신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욥은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알고 계신다고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세상에 다양한 미래전문가들이 예견(豫見)도 하고, 연구도 하지만, 세상은 연구하고 데이터를 분석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점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변화무상합니다. 수많은 변수가 생깁니다. 별별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측불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해보세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는 욥의 고백에서 우리는 욥의 신앙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의 인생길이 하나님의 길에 연결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역사(役事) 속에 자신의 인생이 올려져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본문 욥기 23장 13절에 보면, 욥은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시다고 고백했습니다. ‘일정하다’ 이 말은 신실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매우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을 갑자기 바꾸거나 변덕스러우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고집하시고, 반드시 이루어내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어난 일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일어난 일만 바라보면, 일희일비(一喜一悲)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는 길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빨리 사라지기를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로 인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여기서 ‘단련’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입니다.
단련이라는 단어에는 제련(製鍊), 정제(精製)라는 뜻이 있습니다. 검증의 의미도 있습니다. 일종의 테스트를 의미합니다. 불을 통과하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제련을 통과하지 않으면, 정품(正品)이 될 수 없습니다.
단련을 받는 것은 힘든 것이지만, 좋은 것입니다. 저절로 순금이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테스트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단련은 매우 힘듭니다. 때로는 혹독한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금은 불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불 안에 던져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불은 무서운 것입니다. 불이 탈 때에 근처에만 가도 공포스럽습니다.

우리의 삶에 불이 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온 삶을 불태울 것 같습니다. ‘아, 이것이 끝이구나. 내 인생이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이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죽고 싶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욥이 그런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욥은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이런 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연단을 거치기 전과 후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연단을 받기 전에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련하시기 이전에는 순금이 아닙니다.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에는 불순물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종종 고통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신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용광로를 거친 신자와 거치지 않은 신자가 있습니다. 시련을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불을 통과하고 시련을 통과하고 연단 받은 사람은 다릅니다. 재질이 다릅니다. 성분이 다릅니다. 수준이 다릅니다. 쓰임세가 다릅니다. 품격의 차이가 있습니다.

불을 통과하지 않으면, 불순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받아야 순금이 되나”라고 항변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고통을 받아야 순금이 됩니다.
그래서 순전하고 온전하게 살았던 욥에게도 단련이 필요했습니다. 단련을 받지 않으면, 순금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깨어져야 할 부분이 아직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교만함이 나옵니다. 고개를 듭니다. 우쭐거립니다. 건들건들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찌꺼기가 많을수록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렵습니다. 진짜 금이 되려면, 불의 고난을 거쳐야 합니다.
고난을 반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순금이 되려고 하면, 고난은 불가피합니다. 이것이 딜레마(dilemma)입니다.

시련을 통과하면서 변화됩니다. 시련은 많은 일을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제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불의 시련은 정규과목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 체험을 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광야는 시련의 장소입니다. 인간의 자만심과 자랑을 다 걷어내는 곳입니다. 시련을 통과한 사람은 우선 성품이 다릅니다. 순수합니다. 사려가 깊습니다. 부드럽습니다. 깨끗합니다. 고집스러움이 없습니다.

연단하다 보면, 찌꺼기가 계속 나옵니다.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의 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평생 연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연단할수록 우리 안에서 찌꺼기가 나옵니다.

철야에 열심히 참석하고,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서 깊이 기도하고, 주일에는 예배를 한 번만 드리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드려도 내 안에 찌꺼기가 있습니다.
내가 은혜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자신이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카로운 발톱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말로 죄를 짓습니다. 자기 의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하는 가운데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배워서 깨닫는 것과 시련을 통과하며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 말씀을 깨달은 것과 고통을 통해 말씀을 깨달은 것은 다릅니다. 질이 다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은 다릅니다.

책상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은 말씀을 다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배워 아는 것은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 깨우친 진리는 심장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몸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깨닫고 붙잡은 말씀은 심비(心碑)에 새겨집니다. 지우려야 지울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 깨달은 말씀은 진짜입니다.
심장을 관통(貫通)한 말씀입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습니다. 슬며시 붙잡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처럼 붙잡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분들은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다릅니다. 그래서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어떤 사람은요 고난 속에서 말씀을 듣는데, 말씀이 막 파고들어오니까 말씀을 듣는 내내 웁니다.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편안할 때, 배부를 때에는 말씀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말씀이 없어도 오늘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련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오늘 이 말씀이 없으면, 내가 나가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말씀이 양약(良藥)이 되고, 생명줄이 됩니다.

육신의 배가 부르면, 영적으로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방자(放恣)히 행합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묵시(黙示)’는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말씀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귀중하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불순종하다가 한 번 크게 혼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말씀의 위력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이 진짜구나. 잘못하면 큰 일 나는구나.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되겠구나.’라고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고난을 통하여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고 깨달았다면, 고난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재산을 잃고서라도 말씀을 제대로 배웠다면, 결코 손해 본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하고서라도,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큰 화를 면했다면,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면,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학교는 고난학교입니다. 최고의 수업은 광야수업입니다. 고난을 통해 온몸으로 배운 말씀은 잊으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왔냐고 원망불평하며 세월을 보내면, 고통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찾아오면, 원망 불평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고난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부하고 부정하고 완강하게 반항합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난 고통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금을 용광로 속에 넣으면, 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금이 됩니다. 가짜 금덩이는 용광로 속에 넣으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가를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과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시련을 통해 믿음이 검증됩니다. 시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아직 믿음이 검증된 것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짜 믿음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더 견고해집니다.

시련이 왔을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시련을 통해 더 순수해지고 더 견고해지고 더 단단해집니다. 그러나 가짜 믿음은 시련을 통과하면 그냥 무너져버립니다.

누구나 희망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도 희망을 말합니다. 어려운 세상일수록 “희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려고 한다고 희망을 갖게 됩니까?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분명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엉터리 희망입니다. 그런 희망은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한 방에 사라져버립니다. 시련을 통해 검증된 믿음 속에서 얻은 희망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고난이 찾아옵니다. 남들이 겪지 않는 독특한 고난 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 일반적인 반응은 고난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했습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요? 욥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언젠가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시각을 배워야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시련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욥은 시련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련은 끝이 아니고 과정입니다. 과정이라는 것은 지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좋은 작품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순금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의 순간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련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하나님 안에서 다루어지면, 고통 또한 좋은 재료가 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삶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으셨습니다.

고통의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시련이 좀 더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인 무력감을 느낄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이해합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먼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한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기도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기도를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간단한 레슨이 아닙니다.

전적 무력감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배우는 것, 말씀을 깨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고 나니 말씀을 깨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어려움을 겪기 전에 기도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라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세미나에 참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와 관련된 성구를 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품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성품이 되는 것, 겸손해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말 겸손한 분을 만나면, ‘대가를 많이 지불하셨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성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른 후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분을 보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간단한 연장은 적당한 불로로 만들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려면, 온도가 더 올라가야 합니다. 간단한 도구를 만들 때에는 대충 구워도 됩니다. 어마어마한 도구를 만들려면, 온도를 높이 올려야 합니다.

생존의 문제로 인해 처절한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고통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매달려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은 웬만한 문제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시련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더 심한 고난이 오면 모르겠지만, 더 심한 고난이 오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고난을 다 이겨냅니다.

어느 사역자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주 폭력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구타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많았습니다.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 이렇게 고생하며 자라는가’라고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니 아버지로부터 욕 먹고 맞았던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사역하는 동안,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만나도 자신이 겪은 고난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아주 심하게 구타당했기 때문에 웬만한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찾아오는 연단, 시련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견뎌야 합니다. 연단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거부하고 싶습니다.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단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대로 통과해야 합니다. 비켜날 수 없습니다. 불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미지근하거나 뜨겁지 않은 불은 없습니다, 불을 견뎌내는 과정 속에서 찌꺼기를 떨어내는 과정에 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연단의 과정에서는 “나 죽어요. 나 죽어요.”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의 연단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 40일 금식 시간을 통해 혹독한 과정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며 고난 받으신 것은 40년 이스라엘 광야의 모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굶주림의 끝에 가셨습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난 후 예수님께서는 떡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벼랑 끝에서, 시련의 혹독한 끝에서 떡보다 진리가 더 귀중하다는 것을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연단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연단을 기뻐해야 합니다. 연단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견뎌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6~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연단은 끝까지 잘 받아야 합니다. 연단을 받다가 그만두면,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연단을 마스터해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순금 같은 믿음이 됩니다.

여러분 중에는 ‘내 나이가 많은데, 이 나이까지 고생하고 시련이 계속된다’라고 원망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시련은 이제 끝나면 좋겠다. 이제 편안하게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기막히게 쓰였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순금으로 빚어 가시는 손길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시련 속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손길을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시련을 시련으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아무 일도 없는 삶을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요셉이 부모로부터 떨어져 이국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9장 23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들어간 상황 속에서도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형통’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창 39:2, 3, 23). 그런데 상황은 암울한 시련의 때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통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통은 제대로 된 제련의 과정, 연단의 과정을 통해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깎이고 빚어져서 명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일평생 아무 어려움 없이, 어떤 시련도 없이, 어떤 고통도 없이 그냥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는 것은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선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떤 시험이 와도 우리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만들어놓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통의 세상을 삽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고통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어떻게 다루시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우시고 쓰시기 위해 단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원이 다른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통하여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인생길에 다양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일을 맞을 때, 우리는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이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는 일은 내 삶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고난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단련하시고, 그 후에 우리를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십니다.
고난의 삶을 지금 겪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승리하는 날이 곧 올 것입니다. 순금 같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표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기가 막힌 걸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의 인생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불행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절망으로 저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시고 승리하게 하셔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으로 결론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훈련, 단련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되신 분들을 주변에서 만나고 계실 것입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고통의 터널을 통해 하나님께서 빚으신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작품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경탄(驚歎)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기 23장 10절의 말씀을 꼭 붙드시고 어떤 시련이 와도 욥처럼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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