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축복하고 축복하라
본문 / 민수기 6:23~27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성경을 보면, 선명하게 구분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성경 속에서 대조되는 주제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로 나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축복하셨는데, 아담의 죄로 인해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에게 저주가 찾아왔습니다.

그 후, 우리는 세상 속에서 축복과 저주라는 실체(實體)와 계속해서 마주칩니다. 어떤 곳에는 축복이 있고, 어떤 곳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아주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축복과 저주의 개념은 아주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불행스러운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정에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방황하고 불만족에 빠져있고, 중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한 삶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서 비껴나 있으면,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저주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노력 유무(有無)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가 불완전하지만, 야곱은 축복의 냄새를 맡으며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에서가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무관(無關)한 자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극명(克明)하게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축복과 저주가 아주 뚜렷하게 구별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한쪽에서는 장자(長子)가 죽는 저주와 통곡의 밤을 보내며 절규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반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에서는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선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축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한쪽에는 어두움이 가득하고, 한쪽에는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피를 바르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피가 어둠과 빛, 저주와 축복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피가 축복과 저주를 갈라놓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인류의 역사(歷史)를 선명하게 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의 관심은 복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하나님은 복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복을 되찾게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아브라함을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복을 되찾게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6).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면, 축복이 임하고, 저주가 떠날 것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첫 설교로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저주는 사라지고,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주는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우리에게 축복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게 떵떵거리며 살아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것도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만 가진 사람은 매우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주를 끊어버리고, 축복을 가져오는 출발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라틴어 ‘bĕnĕ dícere’(베네 디체레)에서 파생된 단어로, 칭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특별한 형태의 칭찬, 인정(認定)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야. 내가 기뻐하는 자야. 사람들이 너를 욕하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너를 핍박해도 너는 내 아들이야. 세상의 모든 저주가 너에게 쏠려있어도 너는 내 아들이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하시고, 아들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로 인해 기뻐해. 너를 인정해. 너는 존귀한 자야. 너는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야. 나는 너를 보면 기뻐. 너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야.”라고 존재를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기뻐해주는 것이 축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명했습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모세는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축복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은 그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하나님은 아들을 향해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다가 둘째를 낳으면, 둘째에게 관심을 갖느라 첫째에게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아이가 병이 납니다. 그래서 괜히 물을 쏟기도 하고, 동생을 때리기도 합니다. ‘나를 바라봐 달라’는 것입니다.
주목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욕구 불만이 생깁니다. 주목받는다는 것 자체가 사랑을 받는 것이고, 축복입니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데도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욕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먹을 것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주목받지 못하면 불안해합니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평안을 느낍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이 회복입니다.
어린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서 주목받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만족을 느낍니다.
부모의 주목을 받으며 자란다는 것은 아이에게 축복입니다. 빗나가는 아이들은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칭찬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주목받기 원합니다. 혼자서 놀 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엄마를 부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면, 승진한 것에 대한 기쁨도 있지만, 인정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더 큽니다. 주목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귀한 사람인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지구에 나 한 사람만 있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만큼 우리가 귀중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우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사람을 단체로 취급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려도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이십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잃어버린 것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등을 돌린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나는 너의 삶과 함께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관심을 받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라보는 것은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향하는 것이 곧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슬쩍 쳐다보시고 지나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라봐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셔서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시는 것은 재앙입니다. 저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나 자신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를 내가 끌어안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온몸으로 경험해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깨달은 만큼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커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기 전에 자신을 축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9:18).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보고 축복해야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에게 저주를 쏟고, 남을 못살게 하는 이유는 자신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축복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정말로 축복할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을 축복하며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계 속에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보면,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나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축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끌어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학(自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를 경멸합니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손사래를 칩니다. 자신을 스스로 낮게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목해보세요. 대충 넘어가지 말고, 주목해보세요. 대충 평가하고 끝내버리지 말고,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성경 곳곳에 표현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주목해보세요. 자신의 모습을 피하지 마세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평가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한 자기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열등감이 무엇입니까?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답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소용없습니다.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등감은 일종의 병입니다. 병 중의 병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데, 누가 건져주겠습니까. 건져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말하든,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기준은 늘 바뀝니다. 미인의 기준도 늘 바뀝니다. 시대에 따라 미남, 미녀에 대한 기준이 달라집니다.
방송에 나오는 미남, 미녀의 모습에 속지 마세요. 방송에 나오는 분들은 최고급 미용실에서 일류 미용사와 스타일리스트(stylist)가 비싼 화장품으로 가꾸어줍니다. 그런데 못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옷은 협찬을 받아 최고의 옷을 입습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카메라맨이 최고로 좋은 카메라를 이용하여 얼굴이 작게 보이도록 합니다. 그런데도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사랑의 눈으로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외형(外形)과 이목구비(耳目口鼻),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지금 나의 삶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열등감에 빠지는 이유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은 인구가 약 1억 명입니다. 그 중 4천 5백만 명이 절대 빈곤층입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주변에 약 5천만 명이 삽니다. 그런데 그곳의 도시 빈민은 아프리카의 빈민과 또 다릅니다. 아주 참혹합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만난 아이들은 다 행복해보였습니다. 그 아이들은 자기가 가난한 줄 모릅니다.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주 행복해보였습니다. 필리핀의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습니다.

왜 불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답게 만드셨고,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적합하게 선물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재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맡기신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는 왕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의 노랫소리가 사울 왕의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사울은 속이 뒤틀렸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인데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윗을 비교하는 노랫소리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왕인데도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가질 것이 없는 자가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무언가를 가져야, 무엇인가 갖추어야 열등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귀중하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축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입니까.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거울 앞에서 “멋져, 훌륭해.”라고 선포하세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너는 정말 귀해. 내가 너를 위해 내 아들을 줄 만큼 너는 귀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그런 나를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왜 힘들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가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축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내가 축복을 흘려보내는 데 인색했기 때문에 그가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여 그의 안에 있는 불만과 안타까움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내가 그를 축복하여 그에게 축복이 흘러갈 때, 저주가 바뀌어 축복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사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기계에 집착하고, 엉뚱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중독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나를 통해 축복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저주 받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축복하면, 우리 주변이 달라집니다. 주변에 축복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곳은 축복된 곳이 됩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곳이 밝아집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회복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태양이 비치면 먼지도 빛나기 시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축복해야 합니까? 상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주변을 바라보세요. 사랑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힘들어합니까?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바라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 김춘수 씨의 시 〈꽃〉은 아주 유명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꽃은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에게 주목합니다. 시선이 고정됩니다.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주는 것입니다.
주의가 산만하던 청년도 사랑에 빠지면, 대단한 집중력을 갖게 됩니다. 한곳에 꽂혀버립니다. 계속 바라보면, 그의 존재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면, 둘이만 보고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시선이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않는데, 나 혼자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목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임무입니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실천해보세요.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위력(威力)이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길은 다릅니다. 위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세요.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바라보며 열등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집중하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목받지 못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외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역사는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왜 주변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리핀에 며칠 머무는 동안, 빈민들이 사는 마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사는 집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습니다. 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지붕이 없는 집도 있었습니다. 집 옆으로 악취가 나는 하수(下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남자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어린 나이에 임신하면, 같이 살아가려니 막막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도망가 버립니다.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힘들어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삽니다. 그래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또 도망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빠가 다른 아이들을 엄마 혼자서 키웁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작은 집에 아이가 10~12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밥을 한 끼밖에 먹지 못합니다. 절대 빈곤의 나라입니다.
참혹한 광경을 많이 봐서 문화적 충격이 컸습니다. 며칠 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필리핀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기막힌 사역현장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스킨십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이 제게 다가와 제 손을 주무르며 만졌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볼을 만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꽃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계속해서 눈을 맞추었습니다. 아이들의 눈이 아주 예뻤습니다.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단지 불쌍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 아이들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눈을 맞추며 바라봐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을 때, 제 눈을 피하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빠에게마저 버림받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이 따뜻하게 웃으며 안아주고, 스킨십을 해주니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진 찍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자매가 “이 아이들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이 순간을 일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축복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저주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축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주만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더 저주스러운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지금 이슬람 국가들은 분노에 차있습니다.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기고, 나라가 없는 것으로 인한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을 향해 저주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누가 축복할 수 있습니까? 축복을 아는 사람들이 축복할 수 있습니다. 축복을 아는 사람들만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우리가 축복해주어야 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꽃이 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치유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회복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한 것을 칭찬하고, 그들을 향해 박수쳐주었더니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칭찬하고 박수쳐주는 것은 그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내놓을 만한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대한민국의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광경입니다.

집에서도 서로 축복해보세요. 남편이 아내를 축복하고, 아내가 남편을 축복해보세요. 부모는 자녀를 마음껏 축복해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누르고, 오히려 자녀를 축복해보세요.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약 3:10). 어떻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서는 축복만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축복이 나가지 않으면, 세상은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3장 11절에 보면,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축복만 말할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은 얼굴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다시 살아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의 입으로는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비관적(悲觀的)으로 말해서도 안 됩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절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과 교회를 향해, 주변의 어두운 곳을 향해 축복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축복할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우리의 최고 사명입니다.
세상의 불행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감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집 안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서로 바빠서 서로를 깊이 바라볼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병듭니까? 관심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도 관심을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쏟으면, 식물에서 빛이 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랑을 받고 주목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축복입니다.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봐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관심입니다. 그것이 이해입니다. 그것이 인정(認定)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빠져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통해 축복이 사람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존귀한 존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너는 충분히 멋져.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존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멋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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