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본문 / 히브리서 5:8~10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신앙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믿어야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행위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뗄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뗀다면, 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은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순종은 붙어있습니다.
믿는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순종이라는 행위가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독립되어있지 않습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만 믿을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말로 합니다.
어디까지 믿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는 데까지가 믿음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아직 믿음이 증명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애매모호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민할 뿐입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갈등합니다.
믿음이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성 안에는 불순종의 뿌리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 뿌리가 깊습니다. 그 뿌리는 아담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에게 일어나는 불순종의 뿌리는 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마귀를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엡 2:2). 사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할 뿐, 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는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의 삶을 살면, 마귀의 부하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성 자체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태어난 영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순종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오늘도 온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영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든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이전에도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불순종의 영과 거역의 영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불순종합니다. 불순종의 영이 더덕더덕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밥을 먹을 정도만 되어도 그 아이에게 불순종의 영이 역사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불순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류에게 찾아온 저주, 인류에게 찾아온 모든 고통의 원흉(元兇)은 불순종에 있습니다. 불순종의 뿌리, 불순종의 잔재(殘滓)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순종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순종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생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말씀에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옮겨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깨어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순종은 그가 믿음으로 출발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불순종의 고리를 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의 삶을 배웁니다. 믿음의 최상(最上)의 질은 순종으로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위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키워드(keyword)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순종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병을 고치시고, 숱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초점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 행하시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8).
예수님의 사역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 속에 능력을 행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병이 낫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본문 8~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학교’에 다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순종의 삶을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있는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순종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클라이맥스(climax)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의 클라이맥스인 독자(獨子)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리는 사건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와 오버랩(overlap)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묶여 모리아 산의 제단 위에 있는 이삭처럼 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이 이 땅에 있는 불순종의 고리를 모두 끊어버리고, 모든 저주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깊고 깊은 불순종의 뿌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순종을 배웁니다. 순종을 배우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과 모든 아픔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까? 순종을 통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려는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함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그냥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실 때에도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종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순종은 자아(自我)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순종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갈보리 언덕과 비슷합니다.
순종의 첫 발을 내딛고, 구원의 길로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삶은 창세기 22장에서 순종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순종은 자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날로 내리치려는 제단 위에 누워있던 이삭의 모습에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의 핵심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순종이 쉽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진노의 잔을 마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은 순종을 결단하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요 19:30).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일에 순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외침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저주를 끊어버리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에 완전히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99%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100%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목적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보면 불순종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방향과 목적을 잃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찬사(讚辭)를 보냅니다. 그가 남긴 말, 그가 행한 행적(行蹟)에 대해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삶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에 맞춰져있었습니다.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은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시지만, 자신의 말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좋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철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할 말을 알려주시면, 그것을 전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단독으로 무언가를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권세 역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능력이 없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는가’입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역을 하더라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키워드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순종을 배운 것은 우리에게도 순종을 배우게 하셔서 순종을 통해 모든 저주를 끊어버리고,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통(貫通)하는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종이 새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이 순종하도록 하나님을 닦달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순종을 놓치면, 인생이 꼬여버립니다.
불순종은 딴 것이 아닙니다. 내 일에 몰두하고 사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외면하고, 내 일에만 빠져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기도하더라도 기도 안에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그 기도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고, 결국 모든 것이 자기에게로 돌아가거나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마지막 가장 숨 가쁜 고비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숨고르기를 하셨습니다. 매우 힘들고 벅찼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의 오물을 혼자 뒤집어쓰셨습니다. 죄악의 진노의 무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순종에 초점을 맞추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함으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일어난 원죄(原罪)적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50). 친가족이라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불순종의 고리를 끊고, 순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믿음에서 순종이 나오지만,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순종이 깊어집니다. 사랑은 깊은 순종을 낳습니다. 사랑은 의무적인 순종이 아니라,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순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한다면 말하기도 전에 이미 순종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순종할 때, 사랑으로 결속됩니다. 사랑으로 순종할 때, 아버지와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단계로 나아간다면,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더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은 순종을 낳고, 믿음이 순종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사랑하면 순종적인 관계가 됩니다. 믿음과 순종, 사랑과 순종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첫째, 순종은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는 삶 자체가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실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순종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순종이 능력을 낳습니다. 그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순종의 숨은 비밀은 놀랍습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숨어있습니다. 능력을 행하려고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순종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풀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 따라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제화됩니다.
말씀이 참된 말씀인 것을 확인하려면, 순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사실로 드러나고,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난 현장,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난 현장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돌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해서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는 행위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보십시오. 순종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고통과 불행이 찾아왔다면, 에덴에서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축복을 회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이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롬 5:19).
인류가 불행하게 살아가는 원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을 가로막는 주범(主犯)은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불순종의 삶을 사는 만큼 방황이 길어졌습니다.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돌고 돌며 고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겪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자초(自招)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소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이 불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모리아 산에서도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삭도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처음부터 불순종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세 사람 중 누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야곱은 나중에 자신의 입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창 47:9).
우리의 삶의 축복은 순종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순종의 삶을 살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인생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인생을 복잡하게 해석하려고 하십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풀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생애도 보면, 복에서 출발하여 복으로 끝납니다. 야곱은 복 때문에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복 때문에 인생이 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복이 출발하게 됩니다. 인류가 잃어버린 복이 출발합니다. 잃어버린 축복이 회복됩니다. 저주를 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3).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복을 되찾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1세대는 원망불평하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2세대에게 신명기를 주셨습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는 ‘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되찾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복을 약속하시고, 인류의 복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의 순종을 통해 복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복은 순종을 통해 흘러가게 됩니다.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찾아온 인류의 저주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을 통해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순종은 축복을 가져옵니다. 기억하십시오. 축복의 원리는 순종입니다. 우리의 삶을 순종의 원리 위에 올려놓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묶인 것이 자동으로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꼬인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꼬여있습니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왜 꼬였는지 살펴보세요.
순종해야 하는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순종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복과 연결된 경우에는 항상 명령형을 사용하셨습니다.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꼬여있던 것을 순종을 통해 푸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불순종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있다면, 생수의 강이 막힙니다. 여러분의 삶에 순종하지 않는 영역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죄가 타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막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뚫리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원리입니다.
순종은 성경 속에서 거대한 핵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형통이고,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셔도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순종이 축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최고의 순종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받으셨습니다. 아들이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은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통해 얻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자녀가 순종할 때, 부모는 기쁩니다. 순종을 통해 관계가 깊어집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의(祭儀)적 제사보다 순종이 중요하고,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순서와 의식(儀式)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삶이 참된 예배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순종하고 사는 것 자체가 예배입니다. 걸어가는 것이 예배이고, 모든 행위가 예배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계속 붙들어야 할 주제는 순종입니다.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복잡하게 하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키워드를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난 후에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을 익혀야 합니다. 순종이 점점 깊어져갈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나고,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순종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도 순종이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학습한다는 의미입니다. 한순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순종을 배워가므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한순간에 순종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오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원망 불평하면 안 됩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사건과 실패와 고통을 통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그 일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실 때에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고집이 죽지 않으면,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순종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했던 마리아를 보세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기를 겪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1:38).
순종은 조건과 상황을 따지지 않고, 말씀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순종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순종학교의 주 과목은 십자가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이지만, 우리를 가장 완전한 길로 이끕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합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기 위해서입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묵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를 들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합니까? 목적은 단 하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의 길을 열어주시고, 그의 영혼을 열어주셔서 말씀이 그 사람의 심비(心碑)에 새겨지게 하십니다.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령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귀가 닫혀버립니다.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닫혀버립니다. 불순종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불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稀貴)해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어도 소용없었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더 이상 들려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 같이 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려는 회중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까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죽어가는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해도 말씀이 벽을 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벽을 치고 다시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는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생명을 걸겠다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설교자의 머리와 영에 주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임하여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 말씀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이미 그런 역사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순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성령이 주님을 도우셔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훈련받고 기도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오직 하나,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을 들으면, 성령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오직 순종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종으로 귀착(歸着)됩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순종으로 결론 나야 합니다. 성령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런데 목적을 분명히 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깊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순종이 깊어집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말은 적게 하시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 가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들고, 얼마나 많은 역사를 일으키는지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변혁은 순종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을 틀어막고 있는, 모든 어둠, 저주 등이 순종을 통해 해결됩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 아들의 순종은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 받던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으셨습니다.
지난 날 우리 안에 있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순종의 뿌리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며 살았던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순종의 영이 여러분을 지배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말씀 앞에 거꾸러지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에 귀 기울이고, 힘들고 어려워도 순종해보세요.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No”라고 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오늘 이후로는 “Yes”라고 반응하셔서 묶인 것이 모두 풀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신앙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것까지만 믿음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해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순종으로 증명해야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편에서 99% 순종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인생이 도약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순종이 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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