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합시다
말씀 : 행11:11~18
1.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미국 경영학의 대가라는 드러커(Peter Drucker)라는 분은 “회사 경영이 실패하는 원인의 60%는 회사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부부 상담자인 퀘베인씨는 이혼하는 원인의 50%는 부부 사이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범죄 심리학자들은 범죄자의 90%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교제 등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즉 교제가 인간관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뭔가 의사소통이 잘 안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안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자기 생각과 의지와 지식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 늘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까 하나님 뜻과는 다른 엉뚱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즉 늘 가까이서 모시고 섬기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밀접한 관계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해 줄 것이고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풍성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더욱 은혜의 풍성한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고넬료 가정을 구원시키고 돌아온 베드로에게 하나님과의 교통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도리어 베드로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가 어떻게 성령과 교통했는지를 차근차근 해명하여 그들을 설득시켰고, 결국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베드로의 행위를 인정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2.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들(1-3절)
오늘 본문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오늘 말씀 전에 보면 베드로가 어떻게 이방인 고넬료를 구원시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10장에 있었던 일인데 여기서 중복해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랬느냐하면 그렇게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 즉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며 베드로를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행11:2,3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세상에 이런 무지하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일이 비난 받을 일입니까? 아니면 예루살렘교회가 잔치를 벌이며 베드로에게 상을 줄 일입니까? 구원의 역사가 그것도 이방인 그것도 로마의 백부장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누가 구원받았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온 가족과 하인과 친구까지 불러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더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던 할례자들은 고넬료 가정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왜 그 집에 들어가서 이방인과 함께 먹었느냐고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도 아닙니다. 이들도 엄연히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의 할례자라는 말은 할례당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교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로 개종하긴 하였지만 여전히 모세 율법에 충실하여 할례의식을 비롯하여 기타 정결례 등을 잘 준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고 유대인이니까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는 할례대로 받고, 정결법은 정결법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왜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셨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의 오류는 무엇입니까?
1)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과거의 잔재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과거에 그들이 지켜왔던 관습이나 문화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과거의 잔재들 때문에 도리어 복음의 역사를 막고, 자기 자신도 복음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베드로를 비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못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고넬료 집안이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이방인의 집에서 함께 먹었다는 이유로 도리어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보다는 아직도 과거의 잔재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관습, 문화, 가치관, 경험들이 판단의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과거의 율법주의에 어긋나는 행동에 대하여 비난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오류에 빠지면 안됩니다. 내 생각이나 관습이나 경험들이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내 모든 편견과 고집과 이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의 두 번째는 문제는 그들이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외시하고 아주 사소한 문제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기뻐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베드로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칭찬하고 격려를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복음의 역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이 그저 자신들의 생각과 좀 다른 행동을 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며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할 것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갈등하고 비난하면서 정열을 낭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편견을 잣대로 해서 비난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삼가야 하지만 혹시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이 좀 약간의 실수나 방법상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문제를 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대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교회에 있어서 대의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복음입니다. 생명의 역사입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문제를 위해서는 양보해야 합니다. 때로는 덮어 두어야 합니다. 혹시 내 생각, 내 가치가 옳다고 하더라도 나 한 사람 죽음으로 교회에 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복음의 역사에 도움이 된다면 나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베드로의 변론(4-17절)
할례자들이 비난거리가 아닌 것을 비난했지만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아주 냉정하고 지혜롭게 풀어나갑니다. 자신이 어떻게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게 되었고, 어떻게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되었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차근차근 설명하여 자칫하면 내부적인 갈등이 일어날뻔 한 사건에 대하여 지혜롭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욥바에서 기도하는 중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큰 보자가에 네발 달린 짐승과 들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보이더니 나에게 잡아먹으라고 해서 난는 속된 것이나 부정한 것을 한번도 먹은 일이 없다며 그럴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왜 속되다고 하느냐면서 먹으라고 하셨고,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그럴 수 없다고 하였지만 세 번씩이나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 후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와서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받고 자신들을 보내어 왔다고 말했고, 이 때 성령께서 의심하지 말고 따라 가라고 해서 결국 그들을 따라갔고 결국 고넬료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여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인데 내가 어떻게 이것을 거역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변론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1)먼저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할례자들이 비난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실컷 귀한 일을 하고 나서 비난을 받았으니 사실 기분이 상할만한 일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기껏 복음을 전하여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기뻐하고 영광돌리며 잘했다고 칭찬하고 상은 못 줄 망정 도리어 사소하고 엉뚱한 것을 빌미로 비난하고 하고 있으니 속이 상할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칫하면 서로 감정의 대립이 생길 수도 있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잘못된 비난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같이 비난하거나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음으로 문제가 잘 풀려나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베드로가 부정한 짐승들이 담겨 있는 바구니가 내려와 먹으라고 할 때에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자기도 환상을 보고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기전까지는 그들과 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이방인과 식사하면 안 되는 줄로 알았고,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이끌려 그곳에 가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맛보고 나도 내가 얼마나 어둠속에 있었는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이야기하며 나도 그 전까지는 당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비난하고 있는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직 성령의 능력을 충분히 덧입지 못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잘못된 생각이다. 하면서 문제를 차분하게 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시키면서 원만하게 해결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언가 서로 간에 약간의 오해가 있거나 좀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더라고 좀더 의연하게 그리고 좀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같이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무시하거나 분노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수용해 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의논하면서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결국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안에서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감으로써 교회를 잘 세워 가야 할 것입니다.
2)어떤 일이 있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처음에는 당신들처럼 생각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나도 사실 이방인을 더럽고 추한 사람들이라고 여겨 상종하기를 꺼려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저들도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른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정말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지 먼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하는 일들에 대하여 방법이나 과정이 나의 생각과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복음의 역사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성령께서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지 이것을 먼저 생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이 행동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행동의 기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부족해서 때로는 뭔가 의견이 다르고 오해가 생길 때에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면서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결국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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