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나
본문 / 마태복음 17:14~20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우리로 하여금 삶을 살게 만드는 힘은 믿음입니다. 평소에는 돈에 위력(偉力)이 있는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돈은 힘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세상적인 힘이 우리를 붙들어줄 것 같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어제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오늘은 그것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不信)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문화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과 반대되는 환경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음을 잃으면, 웬만큼 무장하지 않으면, 세상에 나아가는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적이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검증된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그런 문화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죄성(罪性)이 있습니다. 죄성은 끊임없이 의심을 만들어냅니다. 처음에는 믿는다고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의심이 찾아옵니다. 특별집회를 할 때에는 의심이 적어집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의심이 적어집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죄성이 그대로 있습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의심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의심에 시달리고, 영적 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불사조(不死鳥)처럼 보였습니다. 거대한 로마 가톨릭과 싸운 마틴 루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그가 겪는 내적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았습니다. 루터가 친구 멜랑히톤(Melanchthon)에게 쓴 편지에 보면, 영적 시야가 희미해지고,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에는 매우 힘들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가 있습니다. 그때 믿음은 가물가물해집니다. 한순간에 의심으로 돌아서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교회사(敎會史)를 보면, 믿음의 사람들도 흔들릴 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깊은 밤을 통과했습니다.
그때는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본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의심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불신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의심과 불신앙은 불쑥불쑥 솟아오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한때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의심과 불신앙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强化)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을 강화하는 작업을 계속하지 않으면, 어느 날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 믿음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활성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의 앞에는 변화 산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은 변화 산 사건과 연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서 기막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바뀌고, 천국의 예고편처럼 하늘의 영광이 스쳐 지나가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주 놀라운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17:4).

산 위에서는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산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 아들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아들을 고쳐주지 못하고 쩔쩔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자 이 사람은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17:15~16).

그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17).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한탄하시며 아이에게 있던 귀신을 쫓아내시고, 아이를 낫게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마 17:19).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20).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도 없었습니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은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그만큼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믿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능력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는데, 자신들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29). 능력의 출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 외에는 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믿음을 키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믿음이 커집니다.
믿음은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고 작은 것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과 연관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닦달해도 우리에게서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의존하고 나면, 한참 동안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항상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납니다. 어제는 의존했지만, 오늘은 의존하지 않는다면, 어제의 능력이 오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는 태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게중심을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마음만 무거운 것이 아니라, 몸도 무겁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기도하다 보면,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무게중심을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어도 능력이 무조건 나타나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지만, 제자들은 대행자(代行者)들일 뿐입니다.
대행자는 능력의 출처인 하나님을 항상 의지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에게 능력이 있어서 실력을 행사하듯이 능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능력이 오히려 사라져버립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라고 외친다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철저히 전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능력을 자기 마음대로 대행한다면, 능력을 얼마나 남용하게 되겠습니까?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해서 능력을 마구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은 마술(magic)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술(魔術)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능력을 사용할 때에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어제 능력이 있었다고 해서 오늘 그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 자체가 아니라, 능력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한때 불을 받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한때는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의지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납니다.

기도생활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에 소홀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능력이 떠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관건은 전적으로 지속적으로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패하면 안 됩니다.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 제자들에게 일어난 문제는 교만함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길에서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은지 키 재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후, 남아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은 자신들만 남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신 후,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남아있던 제자들은 ‘기회가 왔다. 지금이야말로 실력을 보여야 할 때이다. 멋지게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께서 오시면 칭찬을 받을 기회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도전했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멋지게 귀신을 쫓아내고, 아이를 고쳐보려 했지만,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이 사건 후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쟁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5).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김을 받기 위해 첫째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능력이 나타난 이후가 중요합니다.
만약 제자 중 누군가가 귀신 들린 아이를 낫게 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힘주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신 이후, 심기가 편하지 않았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찾아온 내적 유혹입니다.

교만하면 능력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최고가 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그렇습니다.
사역하는 가운데, 허영심이 늘 따라다닙니다. 돋보이고 싶습니다. 그런 것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능력을 나타나고자 한다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타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능력을 행함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가지 못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 산 아래에서 기적을 한 번 행함으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자격을 입증해보이고 싶었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드러나거나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능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의 목적은 섬김이어야 합니다. 섬기는 자는 드러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자랑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동원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실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잘하지만, 나중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주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끊임없이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높아지려고 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자아실현, 자아성취를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성(城)을 쌓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5). 능력을 베푸는 자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위대해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작습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상태를 말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바윗돌만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기대할 만한 것이 별로 없음을 의미합니다. 최소한의 것만 있으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지 않으십니다.

능력을 행할 때, 우리의 편에서는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능력은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우리는 그 옆에 살짝 붙어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홍해(紅海)를 갈랐습니까? 모세는 지팡이만 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바다 위로 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모세가 할 만한 위대한 일도 없었고, 모세는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 그때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고도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무엇인가 극대화시키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만 점점 커져가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단해야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산을 옮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일반적으로 산은 크고 장대(長大)한 것입니다. 거대한 산을 보면, 위용(偉容)이 대단합니다. 거대한 산맥을 이루는 산을 보면, 그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역사(役事)를 실감나게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람들은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누가 감히 산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이 하는 일은 놀랍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냅니다.

사람들은 산은 옮길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바보 같은 이야기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이 옮겨졌던 일이 가끔이라도 있었거나 옮겨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문제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산을 옮긴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운명론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은 왜 토정비결을 보고, 점을 보러갑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점을 보러 많이 갑니다. 정치인들도 점을 보러 갑니다. 점을 보는 것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서입니다. 사람들은 운명이 이미 정해져있다고 믿습니다.

운명론에 빠지면, 삶의 태도가 수동적입니다. 승패(勝敗)가 정해진 게임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주(四柱), 관상(觀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운명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이 무겁습니다. 우리 민족은 전체적으로 운명론에 잡혀있습니다. 사주를 보는 것이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삶의 경험이 부정적이거나 잦은 실패를 한 사람일수록 운명론을 믿습니다. 동양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운명론자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재지변(天災地變)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산에 촛불을 피워놓고 굿을 하는 것은 운명을 달래려는 것입니다.
운명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나는 안 돼. 우리 아버지도 불가능했어. 나도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피적이고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리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살아갑니다.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미리 결론부터 내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운명론적으로 살아가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은 운명론적인 삶을 다 걷어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운명론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 내버리는, 강력한 태도입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고 나면, 그 꿈에 매이는 분이 계십니다. 운명론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쁜 꿈을 꾸었을 때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꿈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거부합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고 해도 꿈에 매이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어 기분이 나쁠 때에는 기도로 이겨냅니다. 좋게 해석하여 이겨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일어난 문제를 잘 해석했습니다.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누가 해석을 잘합니까? 꿈에 하나님을 모시고 오면, 잘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했습니다(창 50:20).
요셉은 문제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불행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내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찾아오시면, 그 꿈은 길몽(吉夢)입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꿈이라도 꿈속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오면 됩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고난으로 인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선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유대문학에서 불가능한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유대문학에서 ‘산’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제자들 역시 불가능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가능을 믿음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에게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면, 산은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산을 옮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명령하면 됩니다. 산은 우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때,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내리쳤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명령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내쫓으실 때에도 명령하셨습니다.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일까요? 명령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왜 무너집니까? 불가능한 문제 앞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들여다보며 한숨짓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대화할수록 절망적인 답을 얻게 됩니다. 아무리 우리의 안을 들여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문제 앞에서 다른 사람과 의논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도 불가능합니다. 친구들을 만나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 의논하면, 오히려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좌절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가능한 문제를 놓고 사람들과 모여 회의(會議)해보세요. 회의(懷疑)만 생길 뿐입니다.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를 잘 점검해보세요. 믿음을 활성화시켜주는 그룹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그룹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회의적인 그룹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격려해주는 그룹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우리의 믿음을 격려해주기보다는 오히려 낙담하게 하고, 더 절망하게 하고, 더 큰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신통하지 않으면서 믿음 없는 친구들과 몰려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길이 없습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의해 최면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변을 돌아보세요. 사람들은 죽는 소리를 합니다. 물론 저마다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왜 산을 향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산을 향해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능력도 없는데, 우리에게 명령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라고 말씀하신 분은 산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산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능력 많은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대해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거꾸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해. 네가 움직여. 네가 포기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내가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망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해지면, 산이 움직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은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지금도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산을 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손으로 머리로 산을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은 하나님께서 옮기십니다.
믿음이란, 산을 옮기실 수 있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 하나님을 한계 속에 가둬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산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수많은 산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 산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산들을 걷어내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돈을 모으고, 세상의 실력을 모아 인생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믿음을 쌓아가야 합니다.
믿음을 쌓아간다는 것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산이 없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수많은 산들이 우리를 질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그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여도 산이 옮겨질 것입니다.
불가능했던 것이지만, 우리가 믿음 안에서 명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 믿음으로 산이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은 옮겨질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을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드러내려고 하십시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24시간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는 눈곱만큼의 능력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산의 높이가 100m이든 1,000m이든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똑같습니다. 우리가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아닙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분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여러분의 자랑과 허영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랑은 계속해서 솎아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허영심을 계속해서 쏟아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을 감추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겸손함을 유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에 산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을 불가능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향해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그 명령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행 3:6). 그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선포했습니다. 명령했습니다.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명령했을 때, 그 명령이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권세 앞에 굴복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환경이 우리의 삶을 결론짓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산들은 우리가 명령하고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불가능의 환경에 의해 굴복당하지 마시고, 오히려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산을 옮겨버리시기 바랍니다. 산을 무너뜨려버리시기 바랍니다. 산을 녹여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평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운명론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그 속에 갇혀있지 마세요. 산 앞에서 기죽지 마세요. 산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마세요. “나는 안 된다. 나는 불가능하다. 나는 실패한다.”라고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오히려 우리가 명령해야 합니다. 산을 향해 믿음으로 명령하세요.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큰 믿음에서 능력이 나타난다면, 예수님께서는 바위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손만 내밀면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능력을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좌절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물러나지 마세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마세요.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산들을 옮겨버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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