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십자가를 체험하라
본문 / 로마서 5:7~8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십자가는 개인마다 다르게 체험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스펙트럼(spectrum)은 굉장히 넓고, 자신의 앵글(angle), 즉 형편과 처지, 시간과 공간 등에 따라 빛으로, 은혜로, 진리로, 사랑 등으로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체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론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교리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관념이 아닙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실입니다.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온 인류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어린 양 예수의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은혜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사건보다 더 크고 혁명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신 사건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머리로, 이론으로, 개념으로, 관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십자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치 2천 년 전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십자가로부터 흘러넘치는 엄청난 열기와 에너지, 사랑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신앙생활을 힘없이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거나 십자가를 대적하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애매모호한 중립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거나 십자가를 내쳐버리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절기를 지나는 동안 십자가 사건이 시공간을 넘어 우리 각자에게 어떤 의미와 느낌과 감동과 확신으로 다가올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갈라집니다. 신앙의 진위(眞僞)가 십자가 앞에서 갈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은 리트머스 종이와 같습니다.

고난의 절기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벚꽃이 만발한 때에 꽃구경을 하다 보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감흥(感興)이 있습니다. 계절에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서도 꽃을 구경할 수 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는 시즌(season)이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제철입니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를 맛보기에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고난주간 중에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금요일을 보내며 우리는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십자가 속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시려는 최고의 메시지, 최고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내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흐르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끝없는(endless)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사랑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고농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 18~19절에 보면,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찬송가 304장 3절의 가사를 보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쓴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렴에 보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 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가사를 기록한 작사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무치게 경험한 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찬송은 무덤덤하게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쓴 글입니다.
찬송가 304장의 작사가처럼,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라고 암송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사랑은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겠습니까. 연애소설을 백 권 읽는 것보다 한 번 연애하는 것이 낫습니다. 연애소설을 많이 읽 것과 자기가 사랑에 빠져봐야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했습니다(요일 4:16). 하나님의 속성이 여러 가지 있지만, 하나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공의도 있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로 묶으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추상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사랑을 굉장히 실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고, 손실은 없고, 그것만큼 상실은 없습니다. 그것만큼 손해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신앙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알고, 관념적으로 받아들이면, 신앙은 재미없습니다.
머리로 십자가를 믿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은 머리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론화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은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신앙은 모호한 개념을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완전히 체험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진리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길이 없습니다. 경험해야 합니다.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경험해보라고 말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감탄합니다. 벚꽃이 만발할 때, 우리는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느낍니다.
얼어붙었던 겨울이 지나고, 새카맣게 죽었던 나무에서 새싹이 피어나고, 꽃들이 만발하여 온 세상을 물들인 것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 정말 멋집니다. 정말 매력적입니다. 하나님은 예술가(artist)이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색깔 감각이 탁월하십니까.”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이 세상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지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논리가 아닌 사건으로 우리의 심장 한가운데에 핵폭탄 같은 것이 터지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이 절정에 이르러 불타오른 때가 언제였는지 회상해보세요. 십자가를 경험했을 때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것이 제 신앙을 터지게 했고, 십자가가 저를 헌신하게 만들었고, 십자가가 오늘도 저를 마르지 않고 사역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고, 제 삶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견디게 하는 힘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진리가 십자가 안에서 터지지 않으면, 진리는 단지 좋은 말씀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나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심장이 터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언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로마서 5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랑을 받을 만한 모습이 하나도 없었던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 덩어리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선인(善人)을 위해 죽어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착한 사람을 위해 죽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착한 사람을 위해 죽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악인을 위해 죽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오라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습니다. 죄인이든 원수든 연약하든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충분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흘러넘칩니다. 우리의 갈증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병주고 약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도 주고 상처도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충분한 사랑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전한 해갈을 허락하는 사랑입니다. 순도(純度) 100%, 고농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덮치면, 우리는 기절해버립니다. 너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결핍입니다. 욕구 불만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사랑에 대한 불만에서 온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방황하고 돌아다닙니까? 결혼한 사람이 왜 다른 이성에게 기웃거립니까? 술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왜 울분에 싸여있습니까? 온갖 것을 해보지만, 가슴이 왜 텅 비어있습니까? 별 짓을 다 하고 돌아다녀보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증을 느끼고 분노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을 기대했는데,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상처를 받는 이유는 사랑다운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든 사랑, 오염된 사랑, 욕망이 불탄 사랑,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사랑, 이기적인 사랑, 목마른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갈증을 한 순간에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우리의 병든 마음을 치유하고도 남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설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아야 움직이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 고장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기근을 만났습니다. 절망하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사랑결핍증을 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크고 놀라운 만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양념에 불과합니다.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허상(虛像)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인간은 최상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문제로 인해 이상 기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이 깨어지고, 채워지지 않는 만족으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보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일하는 것은 다 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넘쳐야 합니다. 사랑이 오고가야 합니다. 사랑이 막힘없이 오고가야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의 문제가 막혀있으면, 모든 것이 막힙니다. 모든 것이 시들시들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사랑이 열리고,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마음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꽃피울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떠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만 경험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보다 행복하고 황홀한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사랑을 주는 쪽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받는 쪽 역시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리 사랑을 쏟아 붓는다 해도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끊임없이 말씀하는데,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그 사랑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난주간을 수십 년 보냈어도 무덤덤하게 보낸다면,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량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깊어져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량이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저수지처럼 넘쳐흐르는데,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량이 작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용량은 무제한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아주 뜨겁고 풍성합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용량이 문제입니다. 바다보다 넓은 사랑을 좁은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이미 많은 상처를 입고 사랑을 의심합니다. 병든 가슴은 사랑한다고 해도 놀랍니다.
아가에 보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한다고 했을 때, 술람미 여인은 도망갔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는 비천한 여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사랑으로 인해 병들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우리에게 일시키는 고용주처럼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완악하고 굳어진 마음은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왔습니다. 변질되고 오염된 다른 사랑을 익혀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성령이 역사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막힌 표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역사(役事)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주의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사모하시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사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의 영혼에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똑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어집니다. 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없을까요? 부어지면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으신다는 표현이 제게 와닿습니다. 살짝 담그는 정도가 아니라, 똑똑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어져서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는 데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히 부어질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만 한다면, 여러분에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의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신앙이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상처와 아픔이 한순간에 치유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갈증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입술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럽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함량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부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모든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깊어질 수 없습니다. 강력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우리의 헌신도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인간관계도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왜 힘들고 피곤하고 짜증납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작은 일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신경질적이었던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굉장히 부드러워지고 관대해집니다. 상처를 잘 받던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쉽게 상처를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힘든 일도 힘들지 않게 해내는 능력이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떨어지니 매사가 피곤하고 짜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사랑이 부어질 때, 그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게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일어나면, 그 후에는 큰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가리켜 ‘소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사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힘겹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힘이 사명의 길을 걸어가게 만듭니다. 그 사랑이 삶이 되고, 사역이 되고, 사명이 됩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찾아오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확인하듯이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지만, 이 말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니? 나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너를 사랑했어. 너도 나를 사랑하니?”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며 주님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요 21:16).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 앞에서 베드로는 눈이 열리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으로 반응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로부터 사랑을 받고, 나도 그를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사랑의 경험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입니다. 사랑을 받은 경험과 받은 사랑으로 상대방을 사랑할 때, 행복은 배(倍)가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헌신이고, 그것이 사명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사랑을 표현할 줄 모릅니다. 사랑에 서투릅니다.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다운 사랑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랑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사랑했다고 하지만,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의 인생에서 길을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사랑의 힘 때문입니다. 헌신도 수고도 모두 사랑의 힘으로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은 만큼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지
 않고 하는 것은 모두 억지일 뿐입니다. 우리에게서 아무리 짜내봐야 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에너지는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떨어지면, 그때는 죽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 피할 수 없는 강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헌신을 고민하지 마세요. 그 대신 사랑하세요. 사랑을 경험하세요.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헌신하게 되어있습니다. 헌신하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8).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9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순교에 대한 예언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나를 사랑하므로 네가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인데, 그것이 순교요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살고 싶고, 주님을 위해 죽고 싶어 합니다.
사랑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굉장히 다릅니다. 사랑은 완전히 빠지는 것입니다. 맛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느낄 수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거대한 해일처럼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만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순교까지 이어집니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힘이 나로 하여금 죽게 하십니다. 기쁨으로 죽게 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뜨겁게 일어나면, 그때부터는 다른 것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신앙의 마지막은 순교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기꺼이 드리는 것이 순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위해 죽고 싶어집니다. 너무도 사랑하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께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목숨까지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영성은 복된 것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들의 특권입니다.

전승(傳乘)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랑의 포로가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었습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조심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허무한 죽음이 많습니다. 비참하게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억울한 죽음도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삶은 다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분명한 삶은 강력합니다. 생명을 내어놓고 사는 삶에는 파워가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겁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영성은 우리를 순교자의 영성으로 이끕니다. 사랑하는 분을 위해 죽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주님과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죽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순교의 영성은 어두운 주제가 아닙니다. 무거운 주제가 아닙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주제입니다. 사랑의 힘이 죽음의 힘을 이기게 합니다. 그것이 순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아들을 매다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빠져들고, 사랑의 깊이와 너비, 높이와 길이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의 특징은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모든 것이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말세의 특징은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니까 삶이 시들시들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부부사이에도 사랑이 중요합니다. 돈이 있고, 좋은 집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봉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이 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교회를 향해 주님은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5). 다른 것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합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의 가슴에 사랑이 회복되고, 사랑이 타오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사랑만 있으면 살아날 것입니다. 불같은 사랑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뜨겁게 달아오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깊고 풍성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해답입니다. 그 사랑이 깊어져야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십자가가 해답이 되는 이유는 십자가 안에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 풍덩 빠지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놀라운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만끽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갈보리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다가올 것입니다. 자신의 심장을 터뜨리시며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시고 울먹이시는 성부 아버지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는 아들의 침묵을 통해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들리는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해. 너를 위해 내 아들을 죽게 할 만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유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사랑 받을 만한 것이 아무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한량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품어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원색적인 사랑, 충만한 사랑, 넘치는 사랑을 경험하시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갈증이 모두 해결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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