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넘쳐 흘러야 이긴다
본문 / 요한복음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왜 중요합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엎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재주와 경험, 우리의 머리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방법도 묘수(妙手)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바닥이 드러나고, 바닥을 긁습니까?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임하시는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이 임하고, 우리가 채워지면, 그때부터 도약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제자리에 머물던 신앙생활에서 도약하게 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독특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을 받은 후 현격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확연한 변화가 일어나 성령이 임하시기 전과 후가 정확하게 구분됩니다.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래서 나도 알고, 주변 사람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도 놀랍니다. 주변 사람들도 놀랍니다. 확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느낍니다. 나도 그것을 느낍니다.
본문은 초막절의 끝 날에 주님께서 서서 외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물이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것을 기념하는 독특한 절기입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으로 길어 나르는, 예식을 행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마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길어내려고 애씁니다.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인간의 힘으로 초월에 이르려고, 초월을 경험하려고 애씁니다.
인간의 힘으로 노력하다 보면, 인간이 강화되고, 인간이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이러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고, 도를 닦으며 인간이 중심이 되고, 자신을 실현하고, 자기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허무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로 가면 해결됩니다. 간단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됩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 답이 있습니다. 강력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소개하십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를 믿을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약속하고 있는데, 곧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절기를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약의 실체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그것이 무엇인지 실제적으로 정확하게 드러내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으로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났던 현상인데, 이제는 생수의 강이 넘쳐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는 현장은 사도행전 2장입니다.
사도행전 1장까지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봇물이 터지는 것처럼 생수의 강이 넘쳐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흘러나오리라’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흘러나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흘러나온다는 것은 더 이상 제한적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한시적이거나 제한적이지 않고, 더 이상 긁을 이유 없이 흘러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특정인과만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입니다. 흘러넘치니까 특정인에게만 특수하게 주어진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흘러넘친다는 것은 제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도 제한이 없고, 환경에도 제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막을 수 없이 터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행 2:18).
흘러넘친다는 것은 미미한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현격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천장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천장에서 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흘러넘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흘러넘친다는 것은 미미한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눈에 띄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1년 열두 달 52주 기도하러 다녔지만,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흘러넘친다는 것은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덮으신 것입니다.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름 부으심(anointing)’이라고 표현합니다.
기름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기름이 부어지는데, 그것을 못 느낄까요? 변화가 일어난 것을 모르겠습니까? 모른다면 기름이 부어진 것이 아닙니다. 흘러넘침, 부어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복음서까지는 제자들이 중심이었습니다. 제자와 사도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에는 배운다, 공부한다, 학습한다, 훈련받는다, 따라다닌다는 의미가 많습니다. 제자는 그 수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물론 제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자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가 중심이었습니다. 주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다른 사람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끌려서 교회에 오셨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을 데려오시기 바랍니다.
사도는 배우는 단계가 아닙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습니다. 사도는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使徒)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디로 보냄을 받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십니다. 거기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죽더라도 거기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사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시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부어주심이 없으면, 아직 제자입니다. 더 배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배우는 것에만 열심을 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시면, 배우는 것에 핵분열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배우기만 하여 지식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배운 것이 전혀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 하는데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는 졸장부가 되었습니다.
아는 것은 엄청난데, 공부는 많이 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똑똑한 소리는 혼자서 다 하는데,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성령이 부어지니 베드로의 입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지탄 없이 말했습니다.
메가톤급으로 쏘아대니, 대제사장과 제도권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배운 것, 아는 것만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실력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백 마디의 말로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실력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이제는 말한다고 해서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20). 위로부터 능력이 부어져야 합니다. 내 안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산에 다니며 도를 닦는다 해도 그것으로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능력을 부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흘러넘쳐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면, 어떻게 될지 뻔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면, 제자들이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름 부으심을 연상하게 합니다.
기름 부으심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짐승의 뿔에 기름을 담아서 머리에 붓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 기름은 온몸으로 흘러내립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기름이 흘러내리면, 기름과 몸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됩니다. 기름이 온몸에 흘러내렸기 때문에 온몸이 기름으로 덮이게 됩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 ‘충만’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소극적인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려고 한다 해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려는 것은 자신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한다 해서 유지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위에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신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덧입혀주시는, 기름 부으심의 은혜가 없고, 그것을 사모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밑바닥을 긁게 됩니다.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충만히 임하셔야 합니다. 덧입혀져야 합니다. 흘러넘쳐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불이든 바람이든 우리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임하셨던 불을 지필 수 없고, 바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자(他者),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성령이 신앙의 주체이십니다. 성령이 신앙의 주체가 되셔야 합니다. 성령이 주장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이끄셔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실패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주관하시고 장악하시고 지배하시고 덮으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골골거리게 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을 흉내 낼 뿐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할 때,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우리의 삶이 쓸모 있게 됩니다. 우리가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가치 있게 됩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쓸모 있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영적 세계뿐만 아니라, 은사와 달란트, 재능 등 모든 것이 쓸모 있게 됩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사람들의 영혼을 파고듭니다.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재능이 극대화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가르침에 권세가 생깁니다. 가르치는 내용만 중요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침에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많아도 이전에는 그 지식이 쓸데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면, 지식이 쓸모 있게 됩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그 지식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똑똑한 척하고, 잘난 체하고, 남을 비판하기만 하고, 부정적으로 접근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지식이 지혜가 되고, 통찰력이 되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낳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막힌 영감(靈感)을 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길이 보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면, 어려움이 와도 난관을 뚫고 나아가는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지혜롭게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받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영감을 받고, 그가 가진 달란트가 살아납니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변화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꿰뚫으며 설교했습니다. 지력(智力)이 넘쳤습니다. 영감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학문 없는 사람으로 알았다가 그의 설교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령이 지성(知性)을 비롯하여 그의 모든 것을 사로잡고, 그의 입술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도권의 사람들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이런 힘이 베드로에게서 나왔습니까? 성령이 그를 덮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에서 능력이 나왔습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능력이 나오니 3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役事)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고꾸라진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강한 유대교와 율법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오늘날과 다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고꾸라져 회개했습니다. 그의 말에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권세가 흘러나왔습니다.
오순절 이후, 사도들의 영적 권위가 높아졌습니다. 집사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집사들에게서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냥 평범한 집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감투만 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나 집사들에게서는 영적 힘이 느껴졌습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에게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영적 권위가 주어진 직분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름 부으심(anointing)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열두 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름만 제자였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니까 직분은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시간도 달라집니다. 시간에 쓰임새가 있게 됩니다.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시간의 질이 달라집니다. 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질이 달라졌기 때문에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꽉 찬 시간이 되어 시간마다 사건이 일어나고, 영적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속에 하루를 보내시는 분은 하루 종일 만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영적 감화를 주고, 수많은 사람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으면, 집중력이 매우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왜 집중력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집중력이 일어나면, 파워가 생깁니다. 성령이 기름 부으시니, 왜 사는지 알게 됩니다. 왜 사는지 알게 되니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시간 속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저 평범하게 살면, 시간이 산만해집니다. 하루 종일 뭘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루가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별것 아닌 것으로 시간을 허비합니다. 요즘 세월이 얼마나 악합니까. 시간이 얼마나 오염되어있습니까. 인생은 시간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시간의 역사(歷史)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가운데 살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잡념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집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승산(勝算)이 있고, 생산성이 있고, 효율성이 일어납니다.
학생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면, 학업의 진도가 달라집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으면, 기질에서도 장점이 나타납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성령께서 기름을 부어주시니까 현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질이 변합니다.
원래 기질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면, 기질이 그대로 있지 않고, 기질에서 긍정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우울질인 사람들은 대체로 소극적입니다. 완벽주의적인 면이 있습니다. 매사에 철저하기 때문에 힘들게 살아갑니다. 매사에 까다롭고 꼼꼼하여 때로는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우울질의 사람이 좋게 쓰임 받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일을 감당해낼 수 있습니다. 좋은 면이 쓰임 받게 됩니다.
다혈질의 사람은 열을 잘 받습니다. 쉽게 흥분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쉽게 낙심합니다. 다혈질의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시면, 남들에게 없는 용기를 갖습니다. 다혈질의 사람은 열을 잘 받는 만큼, 감동을 잘 받습니다.
베드로가 다혈질입니다. 다혈질은 말을 잘합니다.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시니, 베드로의 입이 풀렸습니다.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점액질의 사람은 매사에 느립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긴장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점액질의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면, 안정감 있는 사역자가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변덕이 심한 사람에서 정감 넘치는 사람으로, 우울한 감정이 축제의 감정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 성실한 사람으로,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모든 기질이 극대화되고, 멋지게 쓰임 받게 됩니다.
기질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좋은 면이 극대화됩니다. 그때 쓰임 받는 인생이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배는 가라앉고, 비행기는 뜨지 않고, 자동차는 달리지 않습니다. 악기는 연주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은혜가 흘러넘칠 때, 모든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좋은 면이 극대화됩니다. 이것이 기름 부으심의 은혜입니다.
기름 부으심의 은혜가 있으면, 잠재되었던 것들이 활성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가치가 극대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장 아름답게 드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름 부으심의 은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상황에 따라 조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충분조건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흘러넘치는 은혜, 압도하는 은혜가 있으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극대화되고, 활성화되고, 효율화되고, 놀랍게 쓰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가치가 일어납니다.
부으시는 은혜, 임하시는 은혜, 덮으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시간과 은사, 재능과 지식 등 모든 영역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모든 일에 변화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둘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모든 것이 풍성해집니다. 모자람이 없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배에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思考)에 의하면, 배는 중심을 의미합니다.
중심부에서 흘러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중심에서부터 모든 곳으로 전이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고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습관입니다. 구습(舊習), 뿌리 깊은 옛 습관은 내 힘과 의지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뿌리 깊은 습관, 묵은 습관, 늘 제자리걸음하게 만드는 습관은 의지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습니다. 이것이 10년, 20년 쌓이면,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악습(惡習)은 삶의 죄성(罪性)과 상처와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얽히고 뒤범벅되어 견고한 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지만, 우리는 반복해서 죄를 짓고 무너지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회개합니다.
습관은 오래된 집입니다. 두꺼운 벽입니다.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성령의 부으시는 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나보다, 내 습관보다 더 강력한 힘이 내 안에 임하여 나를 끌고 가셔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0년, 20년, 30년 묵은 악습이 끊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굵은 쇠사슬이 칭칭 감고 있었는데, 성령의 능력이 한 부분을 쳐서 끊어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굵은 쇠사슬을 내 힘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위로부터 능력을 부으시면, 그 배에서 흘러넘치는 강력한 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지금도 그것을 경험하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노력하는 것 이상의 힘이어야 합니다. 내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위로부터 덮으시는 은혜가 임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면, 억지로가 아니라, 쉽게 허물어지듯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습관의 두꺼운 벽이 마치 여리고성 무너지듯 무너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분명히 경험하여 여러분에게 있는 악습과 구습, 여러분의 삶을 무너지게 하는 벽들이 무너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우리에게 권세를 허락합니다. 권세가 무엇입니까? 권세를 가지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권세가 없으면, 더 큰 권세에 끌려가게 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의 권세가 대단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하늘의 권세를 얻으면, 하늘의 권세는 돈의 권세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고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권세가 없으면, 늘 돈의 권세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피곤합니다.
왜 권세를 가져야 합니까? 자유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힘을 가지려고 합니까?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돈을 많이 벌려 합니까?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돈이 있으면,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돈이 있으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따라 움직입니다. 돈의 권세를 맛보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우리가 돈의 힘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사실 빼앗기는 것이 더 많습니다. 돈을 통해 얻는 자유는 있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자유를 빼앗깁니다.
돈의 욕심에 사로잡혀 살면, 자유가 없습니다. 돈 때문에 쩔쩔매게 됩니다. 욕심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면, 자유가 옵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우리를 맡길 때, 우리에게 자유가 옵니다.
물이 발목에 차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헤엄칠 수 있을 만큼 물이 차면, 물이 나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물이 허리까지 와도 안 됩니다. 내가 움직이려고 합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 무엇인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깊은 강물에 들어가 버리면, 물이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흘러넘치는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기면, 어떤 자유가 옵니까? 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사탄의 유혹과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유혹으로부터 자유를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에 유혹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유혹을 일대일로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탄은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를 흔들려고 합니다. 우리를 결박하여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결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사탄보다 강한 분이신, 성령의 임하심과 덮으심,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 안에 있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사탄은 우리의 감정의 영역을 사로잡으려고 애를 쓰고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을 사탄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우리의 감정을 공격합니다.
우울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방치해놓고 있으면, 사탄이 감정을 공격해버립니다. 사탄은 우리의 우울한 감정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감정을 초토화시키고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감정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주변 상황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감정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우울증도 초기에 잘 대응해야 합니다. 정신과적 요소, 유전적 요소 등 많이 있지만, 우리는 영적인 영역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으면, 감정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연약해지면, 감정의 영역도 연약해질 수 있습니다. 요즘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리는 분이 많습니다. 이전의 아픈 경험들이 삶을 시달리게 만듭니다.
무엇을 하든 늘 두렵고 불안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쉽게 불안해합니다. 심리적으로 매우 약합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감정 상태가 아주 연약합니다.
열등감도 얼마나 무섭습니까. 열등감에 빠지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어두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끙끙 앓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의 밑바닥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열등감도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기 힘듭니다. 열등감은 굉장히 무섭습니다. 열등감은 매우 강한 감정입니다. 열등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겨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밑바닥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믿습니다. 존재감이 생깁니다.
제자들은 우물쭈물하고 숨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이후의 사도들을 보세요. 얼마나 당당합니까. 기죽지 않고,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부으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강한 역사가 일어나니까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따지고 비교할 기준이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은혜가 강하게 임하면, 자신의 약점까지도 드러내어놓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드러냈습니다.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키도 크고 잘 생겼고, 모든 것을 가진 왕인데,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 부르는 것을 듣고, 사울 왕은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결국 비정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당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면, 우리의 감정 상태가 최고의 상태가 됩니다. 어두움의 감정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빛이 임한 것입니다. 빛이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진리가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감정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아주 밝아집니다. 희락의 강수(江水)가 흘러넘칩니다. 즐거움이 넘칩니다.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락의 영이 우리를 덮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춤추게 하십니다. 삶에 대한 태도가 무한긍정으로 바뀝니다. 겁날 것이 없습니다.
다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셨기 때문에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눈빛이 달라집니다. 의욕이 넘치게 됩니다. 살맛이 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멋지게 죽습니다. 죽음의 힘도 누를 수 없는 생명의 힘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도 암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죽음 앞에서 담담해야 합니다. 천국이 열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영이 우리를 누를 수 없습니다. 죽음의 영에 사로잡혀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부으시는 은혜, 흘러넘치는 은혜가 마지막 순간까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자유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유가 찾아올 줄 믿습니다.
왜 피곤하게 살아갑니까? 걸리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도 걸리고 저기도 걸리고 별 것 아닌 것에 넘어지니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충만하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자기감정에 걸리고, 다른 사람의 말에 걸리고, 환경에 걸리고, 자빠지고 넘어지던 삶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삶은 무엇입니까? 종의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습관의 사슬들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흘러넘치면 충만해집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면, 성령의 권능보다 강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이 끊어지는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더욱 깊어지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풍성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깊은 곳으로 헤엄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자유가 옵니다. 이제 끌려 다니지 마세요. 주의 영의 이끌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피곤한 삶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의 사역자로 변신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보세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감당하므로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쁨을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 안에 있을 때에도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기쁨을 빼앗아갈 자가 없었습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움을 누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제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예배를 통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입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린 아이처럼 간절히 사모하세요. 전혀 다른 인생이 다가올 줄 믿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제는 힘들게 살지 마세요. 끙끙대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슥 4:6). 그것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기름 부으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기름 부으심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라지는 은혜, 확연히 달라지는 은혜, 모든 족쇄가 풀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자체가 쓰임새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극대화되기를 바랍니다. 풍성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충만히 덮으시는 은혜, 부으시는 은혜, 임하시는 은혜, 이끄시는 은혜, 지배하시는 은혜, 주관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내 의지와 노력을 벗어나 성령으로부터 사로잡힘을 당하는, 성령께서 압도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디로 보내든지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능력의 말씀이 터져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은혜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 시대,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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