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본문 / 출애굽기 14:10~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병거들을 거느리고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의 군대는 최첨단 병거들을 거느리고 사막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습니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출신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 부딪쳤습니다.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출구(出口)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상황에 부딪쳐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상황을 겪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는데, 얼마 가지 못해서 숨 막힐 듯한 상황에 놓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 막막하고 캄캄하고 답답하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가장 힘듭니다. 이때는 죽고 싶습니다.
이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생각을 합니다. 죽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백성들보다 모세에게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문제가 리더십(leadership)인 모세에게 고스란히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세는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을 상황에 놓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생마와 같습니다. 그들은 노예 출신입니다. 모세가 이들을 데리고 광야를 지나야 하는데, 며칠 가지 않아 이런 아찔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가장 먼저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장 먼저 테스트(test)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보셨습니다.
모세는 백성들보다 더 심한 압박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테스트하셨습니다.

백성들이 흔들려도 지도자가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십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놀랍게도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모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출 14:13).
답이 전혀 없습니다. 캄캄합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릅니다. 최악(最惡)의 상황입니다. 이런 먹구름 속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본문 13~14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만히 서서’와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어려운 입장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돌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도 부족할 텐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공식을 말씀을 통해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입을 다물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이유를 꼽으라고 하면, ‘원망과 불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말로 실패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상황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말 때문에 실패합니다.

언제 원망 불평합니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이 벌어질 때, 원망 불평하게 됩니다. 내가 원한 것은 A였는데, B라는 상황이 닥치면, 원망 불평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내가 기대하고 생각한 대로 인생이 움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움직여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고생하게 됩니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생을 많이 사신 분들은 이것을 삶으로 체득(體得)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원망 불평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기대한 대로 인생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대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돌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을 다물고 성을 돌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들의 말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전쟁에서 인간의 머리와 인간의 지략(智略)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의 지략, 인간의 머리, 인간의 똑똑함이 필요하다면, 전쟁에서 아군끼리 의사소통해야 합니다. 인간의 싸움이라면, 회의를 해야 하고, 말을 해야 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딱 하나, 절대순종만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셔야 합니다.
사람들끼리 의사소통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입을 열고 떠들다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 전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기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이 주는 폐해(弊害)를 잘 알고 계십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굉장히 파괴적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입니다.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가정과 교회, 민족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이 역기능(逆機能)을 행사할 때가 많습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의 군사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가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입을 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혜로움은 위기의 순간에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움이 오면 말이 많아집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순간에 나오는 말은 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부정적인 말은 상황을 전혀 바꾸어놓을 수 없습니다. 악화(惡化)시킬 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너희들의 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말라, 하나님의 역사를 잠잠히 바라보기만 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입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로드맵(roadmap)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아가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순간 길을 잃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출애굽시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로드맵,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정확한 가이드라인(guideline)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구약중간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침묵기(沈黙期)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암흑기(暗黑期)입니다.
왜 암흑기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이스라엘의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깜깜한 밤과 같습니다. 마치 벼랑 끝을 걷는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대낮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캄캄한 흑암 가운데 길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19:105).

신구약중간기의 침묵을 깨고, 말씀이 터졌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광야로 갔습니다.
도시에 있던 사람이 왜 광야로 갔습니까? 그곳에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내 삶이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임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그 시대나 개인의 삶이나 가정은 끝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으러 광야로 갔습니다.

어두운 시대에서 빠져나오려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때에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이 가득한 곳에서 말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아니면, 사탄의 시험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지금 출애굽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셔서 홍해 앞에 서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곳까지 오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의 힘든 삶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힘든 삶으로 내모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길이 열립니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길은 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잠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하던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내 소리를 죽여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여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잠잠히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나중에 더 크게 폭발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냥 잠잠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위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냥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청(傾聽)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청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침묵의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침묵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밖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온갖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굴에 다 드러납니다. 그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밖으로 말하지 않을 뿐, 속에는 원망, 불평, 분노 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침묵과 경청은 연결되어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비로소 귀가 열립니다. 침묵과 경청은 같이 다닙니다. 침묵하지 않으면, 경청할 수 없습니다. 경청하는 사람들은 침묵할 줄 압니다.

혼란하고 어려운 순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답입니다. 어려운 순간이 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혼란 중에 있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위력(威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합니다.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의 말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혼돈과 공허 가운데 모든 것에 질서가 찾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청은 단순히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듣는 것은 내가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고, 경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경청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경청은 위로부터 임하시는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위로부터 임합니다. 우리가 촉각(觸覺)을 곤두세운다고 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위로부터 임하셔야 우리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임하시는 말씀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경청하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같이 듣는 것이 아닙니다. 경청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細微)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인지, 세상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음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경청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없어집니다. 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이 적어집니다. 말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경청하는 사람은 말 수가 줄어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거기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태도가 몸에 익어있습니다. 그래서 대화 속에서도 하나님이 상대방을 통해 어떤 말씀을 주시려는지 귀를 기울입니다.

경청하는 태도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다양한 영역 속에서 여러분에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청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길이 되고, 빛이 됩니다. 그리고 답이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혼돈과 무질서가 질서를 찾게 됩니다.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귀가 복된 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귀는 복된 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않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 걱정하지 않으면 됩니다.
때로는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나는 너와 함께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들려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엉뚱한 것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소음이 굉장히 많이 생깁니다.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소음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잡다한 이론을 들려주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집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많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치고 올라오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굉장한 소음에 시달리게 됩니다.
소음에 시달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영혼은 혼란에 빠져 죽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어디에 귀 기울여야 합니까?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같이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려운 것은 일어난 상황이 아닙니다. 진짜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길을 잃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경청하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가라고 할 때에 가면 됩니다.
서 있으라고 할 때에는 서 있어야 합니다. 서 있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친구를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영적 지도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백부장이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이 답인 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면, 광야에 있다 해도 길이 나며, 말씀이 로드맵이 될 줄 믿습니다.

셋째,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려움이 닥쳤다는 것은 우리가 풀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어려운 현실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현실을 거부하려 합니다. 그리고 빨리 벗어나려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유혹이 찾아왔을 때에는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실 때에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빨리 피하는 것은 답이 되지 않습니다. 도피(逃避)하는 것은 답이 되지 않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오듯이 마귀는 우리를 추격해옵니다. 마귀는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면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허락하신 곳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견디고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서(Stand firm)”라고 말했습니다. 움직이지도 말고,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가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쉽게 생각하고, 어려운 현실을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려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다니엘은 바벨론의 궁에 포로로 붙잡혀가 왕실에서 성장하며 왕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에게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모함과 어마어마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갈수록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버텼습니다. 이것이 정공법(正攻法)입니다.
다니엘은 힘든 위기의 한가운데서 도망치지 않고, 그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다니엘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텼기 때문에, 다니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부르심 앞에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는 좋은 일만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도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시편 23편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시편 23편 1~2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4절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나옵니다. 5절에 보면, ‘원수의 목전’이 나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곳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기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경험해야 하는 레슨(lesson)이 무엇입니까?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나아갔지만, 위기가 왔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그때 어떤 레슨을 받아야 합니까? 중요한 레슨입니다.
힘든 상황은 힘든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견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훈련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부활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없이 바로 부활로 가고 싶어 합니다.
애굽에서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해서 무조건 빨리 벗어나려 하면, 삶은 늘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힘들 때는 힘들어야 합니다. 힘들 때에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가 일어나기 직전에 어려움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통의 극점(極點)에 이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한계점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고, 인간적으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순간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워옵니다. 새벽이 되기 직전이 가장 어둡습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면, 새벽이 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어두운 순간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때가 중요합니다.

상황이 악화되면, 인간적으로는 절망적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독일의 패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항복하기 전 날에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만 더 참았다면, 하루만 더 견뎠으면 될 텐데, 그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절망한 것입니다.

힘들 때에는 버텨야 합니다. 뒤에서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옵니다. 앞에서는 홍해가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어렵고 막막하고 절망적이고 답이 보이지 않고 끝장난 것 같지만, 그냥 있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기 직전까지는 죽고 싶을 정도로 목이 탑니다. 그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이 시대에도 버텨내기 영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버텨내기에서 실패하면, 곧 다가올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곧 다가올 새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그냥 갈라지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앞과 뒤에서 압박할 대로 압박하고, 인간적으로는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 가운데로 몰아가십니다. 그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답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만 홍해를 가르실 수 있습니다. 그 기적 이후에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두렵다고 힘들다고 도망치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힘들어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다 끝내고 싶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갈 데까지 갔습니다.
그래도 버티세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때가 곧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넷째, 우리 대신 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버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 보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출애굽 역사는 인간의 계획에 의해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풀어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해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치르는 싸움은 하나님과 애굽이 싸우는 것이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선수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과정에서의 싸움은 대리전(代理戰)입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누구와 누구의 싸움인가입니다. 우리가 직접 싸워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싸우셔야 하는 것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아니라면, 마음 푹 놓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서서’는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신뢰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위기 상황 속에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를 잠잠히 바라보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꾸어놓으실 것을 믿습니다.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십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원리는 ‘대신하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큰 덩어리가 되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해주셨다는 것은 성경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구속(救贖) 사건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죽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싸우신다면, 그 싸움은 이미 결론난 것입니다. 승리는 확정되어있습니다. 이의(異意)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겨우 이기시거나 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상대에 따라 오락가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과 상대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강하십니다.

로마서 8장 31~32절에 보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37절에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실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영원까지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수준과 상관없이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대신 싸워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종살이하게 하시고, 고센 땅으로 야곱의 가족 70명을 불러오시고, 히브리 민족들을 다산(多産)하게 하셔서 백성들의 수를 늘리시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시기로 결정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이스라엘을 편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의 편이 되시고, 우리의 손을 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갈보리 언덕에서의 승리는 결정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의 코앞에 이르러도 애굽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손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과 문제가 코앞에까지 다가와서 금방이라도 죽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싸우십니다.

뒤에서 달려오는 애굽의 군대는 현실입니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때 눈이 흐려지면 안 됩니다. 초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초점을 잃은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고 상황을 바라보면, 백발백중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볼품없는 자신의 형편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신을 보면 한심하고, 주변의 상황을 보면 기가 막힌다면, 두려움이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놓치고,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바라본다면,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울증에 걸립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곳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두려움의 상황을 바라보면, 그곳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디를 바라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두려움의 상황을 바라보면, 그곳으로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가 있는 곳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절망의 늪을 바라보면,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올수록 시선을 한곳에 고정해야 합니다.
사탄은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게 하고, 시선은 분산시킵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킵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초점을 잃어버립니다.
영적 초점이 맞추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신앙이 약화(弱化)됩니다. 시선이 분산되면, 영적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러면 영적 싸움에서 지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못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기체(機體)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착륙하려다가 상황이 좋지 않으면,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못하는데, 비행기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 떨어지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영적 배짱입니다.

우리를 위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애굽의 바로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넘실거리는 홍해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 와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영적 배짱, 영적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10년 이상 하셨다면, 영적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강력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백전백승(百戰百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은 실수하여 질 수도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은 백전백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완승(完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의 군대는 막강합니다. 출애굽기 14장 6절 이후에 보면, 애굽의 군대들이 병거를 갖추고 오는 장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최고의 화력을 갖춘 부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무기는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14장 3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가 이야기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군대를 수장(水葬)시켜버리시고,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문제가 클수록 하나님이 크신 분이심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문제가 닥치면,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큰 문제이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경이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고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극한 어려운 순간에 절망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말하기를 멈추세요. 그리고 귀를 기울이세요. 현실을 그대로 버텨내세요. 어려움이 올수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날이 가까웠습니다. 도피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놓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 죽었을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깊은 고난의 한가운데서 사방이 막혀있고 답이 없을 때, 끝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죽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맹렬히 싸우십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편이 되실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을 높여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날마다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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