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터널을 통해 순금으로
본문 / 욥기 23:8~13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고난, 고통을 말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욥입니다. 욥은 시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욥만큼 고난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고 떠났습니다. 욥의 몸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긁어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위로의 말을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의 속을 긁었습니다. 지옥과 같은 상황이 욥의 앞에 펼쳐졌습니다.
막 살다가 이렇게 되었다면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욥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은 혹시라도 자기가 모르는 가운데 자녀들이 죄를 지었을까봐 자녀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정도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당하는 고통은 의문의 고통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입니다.
고통이 깊어질 때에 가장 두려운 일은 믿음이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신가’라고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통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고, 그 고통이 길어질 때에 가장 큰 위기는 믿음의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신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위기를 맞는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생기고 힘들어도, 믿음을 붙잡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위기를 맞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고통이 하나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겹쳐서 일어나고, 그 고통이 하루 이틀, 끝도 없이 이어질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기입니다.
욥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무죄를 계속 주장합니다. 자신은 이런 끔찍한 벌을 받을 만큼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욥에게는 또 다른 영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본문 욥기 23장 8~9절에 보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앞으로 가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고, 뒤로 가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어디를 가나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숨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입니다. 고통 자체도 문제이지만,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큰 고통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보인다면, 고통은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차라리 이것이 내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맞으면, 질문이 자꾸 생깁니다. 보통 때에는 질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생기면, 질문이 생깁니다. 욥은 얼마나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오늘도 힘들게 살고 계신 분, 어려움을 가운데 계신 분들은 질문을 많이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없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은 하나님께 질문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질문이 없기 때문에 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런 질문은 귀에 익은 질문입니다.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에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where are you?”
고대사회에서는 고통을 하나님의 징벌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일반적 해석이었습니다. 누가 큰 병에 걸리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누가 큰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잘못해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네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그런 일을 당했을 거야.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얘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결론을 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에 빠져있을 때에 사람들이 이런 말, 저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 휘말려 고통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 말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이 내 고통을 해석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결론을 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의 말 때문에 희비(喜悲)곡선을 그립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 나의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이 타는 듯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말씀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욥의 모습은 굉장히 중요한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에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본문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삶은 미궁에 빠져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확신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욥은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알고 계신다고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세상에 다양한 미래전문가들이 예견(豫見)도 하고, 연구도 하지만, 세상은 연구하고 데이터를 분석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점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변화무상합니다. 수많은 변수가 생깁니다. 별별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측불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해보세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는 욥의 고백에서 우리는 욥의 신앙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의 인생길이 하나님의 길에 연결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역사(役事) 속에 자신의 인생이 올려져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본문 욥기 23장 13절에 보면, 욥은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시다고 고백했습니다. ‘일정하다’ 이 말은 신실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매우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을 갑자기 바꾸거나 변덕스러우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고집하시고, 반드시 이루어내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어난 일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일어난 일만 바라보면, 일희일비(一喜一悲)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는 길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빨리 사라지기를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로 인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여기서 ‘단련’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입니다.
단련이라는 단어에는 제련(製鍊), 정제(精製)라는 뜻이 있습니다. 검증의 의미도 있습니다. 일종의 테스트를 의미합니다. 불을 통과하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제련을 통과하지 않으면, 정품(正品)이 될 수 없습니다.
단련을 받는 것은 힘든 것이지만, 좋은 것입니다. 저절로 순금이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테스트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단련은 매우 힘듭니다. 때로는 혹독한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금은 불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불 안에 던져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불은 무서운 것입니다. 불이 탈 때에 근처에만 가도 공포스럽습니다.
우리의 삶에 불이 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온 삶을 불태울 것 같습니다. ‘아, 이것이 끝이구나. 내 인생이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이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죽고 싶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욥이 그런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욥은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이런 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연단을 거치기 전과 후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연단을 받기 전에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련하시기 이전에는 순금이 아닙니다.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에는 불순물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종종 고통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신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용광로를 거친 신자와 거치지 않은 신자가 있습니다. 시련을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불을 통과하고 시련을 통과하고 연단 받은 사람은 다릅니다. 재질이 다릅니다. 성분이 다릅니다. 수준이 다릅니다. 쓰임세가 다릅니다. 품격의 차이가 있습니다.
불을 통과하지 않으면, 불순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받아야 순금이 되나”라고 항변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고통을 받아야 순금이 됩니다.
그래서 순전하고 온전하게 살았던 욥에게도 단련이 필요했습니다. 단련을 받지 않으면, 순금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깨어져야 할 부분이 아직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교만함이 나옵니다. 고개를 듭니다. 우쭐거립니다. 건들건들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찌꺼기가 많을수록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렵습니다. 진짜 금이 되려면, 불의 고난을 거쳐야 합니다.
고난을 반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순금이 되려고 하면, 고난은 불가피합니다. 이것이 딜레마(dilemma)입니다.
시련을 통과하면서 변화됩니다. 시련은 많은 일을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제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불의 시련은 정규과목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 체험을 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광야는 시련의 장소입니다. 인간의 자만심과 자랑을 다 걷어내는 곳입니다. 시련을 통과한 사람은 우선 성품이 다릅니다. 순수합니다. 사려가 깊습니다. 부드럽습니다. 깨끗합니다. 고집스러움이 없습니다.
연단하다 보면, 찌꺼기가 계속 나옵니다.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의 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평생 연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연단할수록 우리 안에서 찌꺼기가 나옵니다.
철야에 열심히 참석하고,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서 깊이 기도하고, 주일에는 예배를 한 번만 드리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드려도 내 안에 찌꺼기가 있습니다.
내가 은혜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자신이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카로운 발톱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말로 죄를 짓습니다. 자기 의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하는 가운데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배워서 깨닫는 것과 시련을 통과하며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 말씀을 깨달은 것과 고통을 통해 말씀을 깨달은 것은 다릅니다. 질이 다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은 다릅니다.
책상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은 말씀을 다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배워 아는 것은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 깨우친 진리는 심장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몸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깨닫고 붙잡은 말씀은 심비(心碑)에 새겨집니다. 지우려야 지울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 깨달은 말씀은 진짜입니다.
심장을 관통(貫通)한 말씀입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습니다. 슬며시 붙잡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처럼 붙잡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분들은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다릅니다. 그래서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어떤 사람은요 고난 속에서 말씀을 듣는데, 말씀이 막 파고들어오니까 말씀을 듣는 내내 웁니다.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편안할 때, 배부를 때에는 말씀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말씀이 없어도 오늘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련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오늘 이 말씀이 없으면, 내가 나가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말씀이 양약(良藥)이 되고, 생명줄이 됩니다.
육신의 배가 부르면, 영적으로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방자(放恣)히 행합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묵시(黙示)’는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말씀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귀중하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불순종하다가 한 번 크게 혼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말씀의 위력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이 진짜구나. 잘못하면 큰 일 나는구나.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되겠구나.’라고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고난을 통하여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고 깨달았다면, 고난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재산을 잃고서라도 말씀을 제대로 배웠다면, 결코 손해 본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하고서라도,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큰 화를 면했다면,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면,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학교는 고난학교입니다. 최고의 수업은 광야수업입니다. 고난을 통해 온몸으로 배운 말씀은 잊으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왔냐고 원망불평하며 세월을 보내면, 고통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찾아오면, 원망 불평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고난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부하고 부정하고 완강하게 반항합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난 고통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금을 용광로 속에 넣으면, 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금이 됩니다. 가짜 금덩이는 용광로 속에 넣으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가를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과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시련을 통해 믿음이 검증됩니다. 시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아직 믿음이 검증된 것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짜 믿음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더 견고해집니다.
시련이 왔을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시련을 통해 더 순수해지고 더 견고해지고 더 단단해집니다. 그러나 가짜 믿음은 시련을 통과하면 그냥 무너져버립니다.
누구나 희망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도 희망을 말합니다. 어려운 세상일수록 “희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려고 한다고 희망을 갖게 됩니까?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분명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엉터리 희망입니다. 그런 희망은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한 방에 사라져버립니다. 시련을 통해 검증된 믿음 속에서 얻은 희망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고난이 찾아옵니다. 남들이 겪지 않는 독특한 고난 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 일반적인 반응은 고난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했습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요? 욥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언젠가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시각을 배워야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시련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욥은 시련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련은 끝이 아니고 과정입니다. 과정이라는 것은 지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좋은 작품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순금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의 순간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련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하나님 안에서 다루어지면, 고통 또한 좋은 재료가 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삶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으셨습니다.
고통의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시련이 좀 더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인 무력감을 느낄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이해합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먼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한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기도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기도를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간단한 레슨이 아닙니다.
전적 무력감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배우는 것, 말씀을 깨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고 나니 말씀을 깨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어려움을 겪기 전에 기도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라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세미나에 참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와 관련된 성구를 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품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성품이 되는 것, 겸손해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말 겸손한 분을 만나면, ‘대가를 많이 지불하셨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성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른 후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분을 보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간단한 연장은 적당한 불로로 만들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려면, 온도가 더 올라가야 합니다. 간단한 도구를 만들 때에는 대충 구워도 됩니다. 어마어마한 도구를 만들려면, 온도를 높이 올려야 합니다.
생존의 문제로 인해 처절한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고통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매달려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은 웬만한 문제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시련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더 심한 고난이 오면 모르겠지만, 더 심한 고난이 오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고난을 다 이겨냅니다.
어느 사역자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주 폭력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구타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많았습니다.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 이렇게 고생하며 자라는가’라고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니 아버지로부터 욕 먹고 맞았던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사역하는 동안,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만나도 자신이 겪은 고난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아주 심하게 구타당했기 때문에 웬만한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찾아오는 연단, 시련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견뎌야 합니다. 연단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거부하고 싶습니다.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단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대로 통과해야 합니다. 비켜날 수 없습니다. 불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미지근하거나 뜨겁지 않은 불은 없습니다, 불을 견뎌내는 과정 속에서 찌꺼기를 떨어내는 과정에 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연단의 과정에서는 “나 죽어요. 나 죽어요.”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의 연단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 40일 금식 시간을 통해 혹독한 과정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며 고난 받으신 것은 40년 이스라엘 광야의 모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굶주림의 끝에 가셨습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난 후 예수님께서는 떡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벼랑 끝에서, 시련의 혹독한 끝에서 떡보다 진리가 더 귀중하다는 것을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연단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연단을 기뻐해야 합니다. 연단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견뎌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6~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연단은 끝까지 잘 받아야 합니다. 연단을 받다가 그만두면,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연단을 마스터해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순금 같은 믿음이 됩니다.
여러분 중에는 ‘내 나이가 많은데, 이 나이까지 고생하고 시련이 계속된다’라고 원망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시련은 이제 끝나면 좋겠다. 이제 편안하게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기막히게 쓰였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순금으로 빚어 가시는 손길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시련 속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손길을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시련을 시련으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아무 일도 없는 삶을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요셉이 부모로부터 떨어져 이국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9장 23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들어간 상황 속에서도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형통’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창 39:2, 3, 23). 그런데 상황은 암울한 시련의 때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통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통은 제대로 된 제련의 과정, 연단의 과정을 통해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깎이고 빚어져서 명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일평생 아무 어려움 없이, 어떤 시련도 없이, 어떤 고통도 없이 그냥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는 것은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선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떤 시험이 와도 우리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만들어놓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통의 세상을 삽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고통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어떻게 다루시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우시고 쓰시기 위해 단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원이 다른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통하여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인생길에 다양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일을 맞을 때, 우리는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이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는 일은 내 삶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고난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단련하시고, 그 후에 우리를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십니다.
고난의 삶을 지금 겪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승리하는 날이 곧 올 것입니다. 순금 같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표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기가 막힌 걸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의 인생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불행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절망으로 저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시고 승리하게 하셔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으로 결론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훈련, 단련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되신 분들을 주변에서 만나고 계실 것입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고통의 터널을 통해 하나님께서 빚으신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작품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경탄(驚歎)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기 23장 10절의 말씀을 꼭 붙드시고 어떤 시련이 와도 욥처럼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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