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도적질하지 말지니라 Friday Night Sermon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20:15절)

 
제8계명에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재산을 불의한 방법으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9:11절에 "너희도 도둑질하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도둑질이란 무엇입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입니다. 남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는 것입니다.

1.부당한 방법으로 부(富)를 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정당한 방법에 의한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로서 재산을 축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도 없이 타인의 재산을 훔친다거나 그들이 노력한 대가를 가로채는 것은 분명 죄악입니다.

이 죄악을 가리켜 우리는 도적질이라 부릅니다. 사실 도적질은 지구상의 어느 사회에서도 금지되어 있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기본적인 규범으로 제시하신 십계명 중에 도적질을 금하는 규정을 두심으로써 도적질이 얼마나 악하고 무서운 범죄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도적질은 자신의 만족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범죄입니다. 도적질은 인간의 성실과 근면한 노력과 진실된 땀의 의리를 앗아가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당한 방법으로 얻어진 이익에 즐거워하지 말고 성실히 흘린 땀의 대가로 주어지는 결실을 기뻐할 것입니다.

2)이웃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1)이웃의 소유를 내 수고 없이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끊어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노력 없는 대가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고한대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2)저울추를 속이며 장사하는 것도 도적입니다. 품꾼의 삯을 속인다거나,

되를 속이고 저울추를 속이고 장사함은 도적 행위입니다. 장사는 신용으로 해야 합니다. (3)관리들이 도적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뇌물 받는 것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관리들이 뇌물 안 먹는 청렴한 관리의 풍토가 조성되지 않고는 이 사회가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신 없이 한국에 새 소망 찾기 어렵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수고하지 아니한 뇌물을 먹지 아니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자기 자신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1)인색함은 도적입니다. 전6:2절에 "어떤 사람은 그 심령에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富饒)와 존귀(尊貴)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음으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재물을 주었습니다.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인색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질이나 건강이나 영향력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살 동안 내게 맡겨 주신 청지기적 직분입니다. 내 것이라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색함으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를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와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허비함으로 도적질하는 경우입니다. 탕자가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올 분깃을 다 받아 객지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다 소비했습니다. 온전히 잘못 사용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허비했다면 도적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2)게으름이 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가 계속 이 땅에서 번성해야 하고 충만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게으르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다하지 못하면 도적질 행위가 됩니다.

2.도적질이란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옛말에 "돈이면 호랑이 눈썹도 베어 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금전 만능주의를 비꼬아 표현한 속담입니다. 오늘날 이 속담처럼 배금주의에 깊이 물든 인간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타인의 삶을 무참히도 짓밟고 있습니다. 자신의 풍요한 삶을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행은 비단 경제적인 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타인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악질적인 범죄 행위가 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절대 금하신 도적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적질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레 9:13)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절대 법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웃의 생명을 해치는 도적질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신24:7절).

제 8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는 조심해야 할 일과 힘쓸 일이 있습니다. 1)조심해야 할 것은
첫째는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연히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하고 절약 정신으로 알뜰한 살림살이를 해야겠습니다. 둘째, 남의 부채에 조심해야 합니다.

남에게 빚은 될 수 있는 대로 지지말고 외상 거래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피치 못해 빌린 돈을 속히 갚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과도한 욕심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나 욕망과 야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욕망은 삼가야 합니다.

2)힘쓸 것은, 첫째, 자립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부모를 의지하며 살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자립토록 힘써야 합니다. 둘째, 선한 일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법에 어긋나는 사업,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사업은 피해야 합니다. 셋째, 근면·정직·인내 이 세 가지만 있으면 한 푼 없어도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의식주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넷째, 나만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까지 도와 주는 정신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것이 많지만 이 시간 우리는 제 8계명에 관한 죄를 회개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리고 성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뵙고 회개하면서 한 첫 말이 "내가 남의 것 탐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나이다 그리고 내 재산의 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3.도적질은 중복된 죄가 됨으로 금해야 합니다. 레7:8-19절에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양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이방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행위로는 하나님을 진노케 하면서 성전을 자랑하고 구원을 얻었다고 자부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마음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상과 더불어 섬김을 받지 않으시며 불의와 죄와 어두움과 같이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이같이 타락된 근본적 이유는 바알에게 분향하며 알지 못한 다른 신들을 좇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삶의 불행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거짓되고 악한 심성 때문입니다. 인류의 행복은 참된 사회 규범이 시행되는 곳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물질과 인간의 능력과 자연을 우상으로 섬기고, 타락과 거짓된 생활 악행을 다 범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 예배를 드리며 고백하니 그들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 중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며 행위로는 배반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남을 미워하고 욕하는 것은 살인죄입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죄입니다.

세례 받을 때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거짓 맹세를 한 죄입니다. 세상 권력, 직장, 자녀, 남편,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지배보다 그것들의 지배를 더 받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입니다. 어찌하든지 도적질이란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에 따르는 여러 가지의 죄가 부과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조심하되 먼저 물질(物質)관에서 조심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4.소유의 개념을 바로 알 것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모 든 국가들은 개인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소유권은 자신이 땀 흘린 노력의 결과로 얻은 것이나 혹은 상속이나 타인이 증여한 것이거나 그 모든 물질을

모두 각 개인에게 그 재산의 소유권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재산의 소유권은 사회적 계약에 의해 법률로 명시되어 있지만 그 근원적인 개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근본적인 구조를 통하여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재산은 노동의 산물인데 노동은

인간의 생존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창3:19절). 그러므로 노동과 함께 그 소산물의 소유를 주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로 미루어 볼 때 재산의 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잠16:26; 엡4:28; 딤후3:10절). 세상의 끝은 일시적입니다. 참된 부요는 하늘나라에만 있습니다.

이 세상은 쉽게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고 감사의 은사를 키워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인의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남을 구제할지언정 구제 받지 말게 하시고 우리 자손이 꾸어 주지만,

꾸임을 받지 말게 하소서 나와 우리 자손들이 남을 대접할지언정 대접받지 말게 하시고 남을 주면서도 우리의 창고가 넘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남을 주면서 사는 축복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는 인생이 그들은 귀한 인생임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의 부요
를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날마다 살아나가는 아름다운 생애가 우리 앞에 열릴 적에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이 더욱 속에 깊어질 줄로 확신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의 심령 위에 축복으로 임하는 시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5.도적질의 원인입니다. 사람들이 도적질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인간의 마음 속의 충동에 따른 내적 원인과 외부에서 가해지는 외적 원인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내적 원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의 것을 훔치게 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요인을 살펴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불 신앙으로 말미암은 도적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 6:25-34)에서 우리에게 먹고 마실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까지도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더욱 귀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공급하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지 못하므로 자신들의 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도적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주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주관자이시라는 것을 이론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염려에 의한 도적질은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2)탐욕으로 말미암은 도적질이 있습니다. 좀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

허영에 사로잡힌 마음은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차 도적질을 하게 됩니다. 2)외적 원인입니다. (1)타인에 의한 도적질이 있습니다. 세계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약육 장식의 지배 원칙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강한 힘의 소유자가,

약한 자의 힘을 돕지 못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약한 자를 도둑으로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2)사단에게 지배된 도적질이 있습니다. 사단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을 파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단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여 지배하려는 도둑의 가장 큰 우두머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원인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양심에 조금도 부끄럽지 아니하도록 매사에 조심하며 살 것입니다. 그 조심 가운데서 물질에 청렴결백하여야 합니다.

6.도적질 않기 위해서의 자세입니다. 우선 자기 재산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에 충실해야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비교하지 맙시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특권은 우리의 소유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여건이 내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데 축복이 있습니다. 격언에 "마귀가 번 것은 무엇이든지 마귀의 뱃속으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모든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살전4:6절)고 권고했습니다. 게으른 자는 일종의 도적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정직하게 일해야 합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나의 소유, 가족, 재산, 시간, 재능,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일만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도적질은 인간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도 도적질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것을 훔친다"고 함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영광과 시간 등을 인간이 자의(自意)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규례를 제시하면서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리지 않는 것이 곧 도적질이라 규정하셨습니다. 말3:8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적질보다 더욱 심각하고 근본적인 죄악입니다. 이처럼 만홀히 여기는 자는 "아간"처럼(수7장), "가룟 유다"처럼(요12:6절), "아니니아" 부부처럼(행5장)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십일조를 철저히 할 것이고, 인간 관계에서는 물질에 대한 정확한 계산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7.물질에 정직하지 못하면 주의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고전6:10절에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신앙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는 아무렇게나 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무율법주의적 이론을 작성하여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허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지니 즉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하는 자나,

술 취한 자나 토색하는 자마다 도저히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제를 속이고 또 서로 송사하며 또 분쟁하니 이러고서야 어찌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가 있으리요. 물론 고린도 교회의 신자 전체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으로 인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의 세례를 받아 과거의 모든 불의한 죄를 깨끗이 사하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성결의 생애에 나아가는 자도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결한 생애를 가져야 할 성도들이여! 불신자와 동일한,

표준의 도적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나 거룩한 도덕적 생활을 힘쓰는 중에 세상의 물질관이 청렴결백할 때에 영원한 기업까지 받아 영원한 물질을 소유하며 누리며 살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라면 적어도 남의 재산이나 타인의 삶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오직 자신의 안일과 욕망만을 충족시키려는 극단적인 욕심을 버립시다. 깨끗하고 성실히, 그리고 땀 흘리며 이 세상을 삽시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성도가 추구해야 할 바입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도적질이란 사회·윤리적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도 분명히 죄악된 행위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심판이 있습니다. 죄악된 행위인 도적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1)우리들을 더럽게 합니다.(마15:19-20절). (2)도적질의 행위만큼의 처벌을 당해야 합니다.

그 처벌은 돌로 맞아 죽은 아간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수7:21-26절). (3)반드시 배상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배상할 것이 없으면 자신의 몸까지라도 팔아서 배상하였습니다. 출22:1-4절에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깊을지니라.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 할 것이요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 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심판에서는 도적질 당한 자의 손해 이상으로 자기에게도 고통이 따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을 믿음의 사람으로 솔선 수범하여 앞서 지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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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어린양의 피를 좌우 설주에 뿌리라 Friday Night Sermon

어린양의 피를 좌우 설주에 뿌리라

(출12:1-22절)


 
성경학적으로 사람에게는 표가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의 표입니다. 그것은 가인의 표요(창 4:15절), 둘째의 표는 영생 곧 구원의 표징입니다. 셋째는 아벨의 표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의 표입니다. 그것이 구원 얻는 자들의 이마에 새겨져 있습니다.(계7:13; 14:1절).

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구원의 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피입니다. 출12:13절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피는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의 표적입니다. 어떤 피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바로 이러한 효력을 지니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희생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 효력의 피에 대해 살펴보면서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대속의 상징으로서의 피입니다. 피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표적이나 어린양의 입장에서는 표징입니다. 즉 이는 이스라엘을 대신한 대속적 죽음을 나타냅니다. 히9: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 뜻을 찾아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구약 시대에는 피는 정결케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9:13절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피는 죄 사함을 얻게 한다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짐승의 피가 죄를 속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레7: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피만이 죄를 속하고 사해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죄가 사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는 생명을 죽이는 병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만이 죄를 씻어 낼 수 있고, 죄의 병균을 죽일 수 있고, 죄의 권세를 정복할 수 있기 때문에 피 흘림이 없이는 무죄하고 고귀한 생명의 희생의 피가 아니면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사해 줌으로 죄에서 구원해내기 위하여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의 양심을 정결케 하며 인간의 주홍 같은 붉은 죄, 먹 같은 검은 죄를 씻어내며 정결케 하며 깨끗이 사함을 주어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엡1:7; 요일 1:7; 벧전1:19절).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의 언약만을 믿을 것입니다.

본문7절에 그 양의 피로 그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왜 피를 바르라고 했습니까? 13절에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나오는데 사람과 생축의 첫 태생을 다 죽이게 되는데 이때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재앙이 그냥 넘어가고 발라지지 않은 집은 재앙이 임하여 첫 태생이 다 죽게 됩니다.

이 때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았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에는 재앙이 임하여 첫 태생이 다 죽는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는 다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예표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양의 피를 발라 놓으면 구원받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마음의, 문설주에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마음에 바른 자는 다 구원을 받습니다. 피를 안벽 부분 즉 보이지 않는 곳에 바르면 안 되고 반드시 밖에서,

제일 잘 보이는 데 문설주에 바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즉 자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생활을 숨기면 안 됩니다.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롬10:9-12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2.하나님의 약속에 의거한 피입니다.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약 속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13절). 실상 어린양이 흘린 피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볼 때에……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 피는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고 생명을 보존케 하는 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합니다. 사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오셨고 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믿는 사람은 죽지 않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요6:53-56절).

따라서 우리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어린양이 구원의 대속 물임과 또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임을 믿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피가 됨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유월절 어린양은 우리의 영원한,

대속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사53:7; 요1:29절). 이사야는 모든 선지자 가운데 가장 많이 고난의 진의를 발표하였는데 그가 찔리고 상한 죄의 대가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롬6:23절에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값이 있는 이상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갚지 않으면 그 값이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으로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의 죄로 인함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고개 숙여 감사함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3.흠 없고 순전한 피입니다. 유월절 희생으로 제정된 짐승은 어린 양 중에서도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5절)이어야만 했습니다 문학적으로 양은 순결과 온유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따라서 양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내는 데 매우 적절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 흠이 없고 순결한 어린양의 흘린 피는 인간을 대속하고 구원하는 재료로 사용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양의 피가 의미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역시 완전하고 순전한 피입니다.(벧전1:19절). 아무리 큰배라도 작은 구멍 하나로 가라앉는 것처럼 구원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께 만일 흠이 있다면 전 인류를 구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피입니다. 히7:26절에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재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거룩하지 못합니다. 거룩하지도 못하면서 거룩한 것 같이 모양을 내는 외식하는 자도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꽤 많이 거룩한 척 했습니다. 오늘날도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 자기만이 잘 믿는다 하는 자들이 거룩한 척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거룩합니다. 시16:10절에 "주의 거룩한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속한 그리스도인들도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이름과 같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예수님은 악이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성품으로나, 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온전히 선하신 분입니다. "선하다"는 말 가운데는 "나쁜 것이란 추호도 없고 구부러진 것이 없고 참 좋으신 분,

진실하시고 정직하신 분, 사랑으로 충만하신 사랑의 화신"이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된 사람들도 예수님을 닮아 악이 없어야 합니다. 온전히 선해야 합니다. 진실과 정직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3)예수님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세상에 오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출 생시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되었으리만큼 원죄가 없고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 4:15절). 죄가 없기 때문에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양이건 염소이건 송아지이건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과 허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죄와 허물이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담당하는 속죄 제물의 자격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 죄인이지만 무죄하신 예수님 앞에 나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 씻음 받은 횐 옷을 입고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사망의 위험을 모면하는 피였습니다. 출12:29절에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 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치시매"라고 했습니다. 애굽에게 행해진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은 장자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에 속한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그 첫 소생이 죽음을 당하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재앙을 모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어린 수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그 재앙을 피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유월절이라 부릅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 구원의 모형이며 가장 선명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유월절의 희생인 어린양과 그 피에 나타난 교훈이 그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만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상징이며 구속의 예표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절)라고 하였는데 그는 이사야의 성격에 대한 분명히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상징적인 모형이 구약에 많이 나타나 있지만 유월절 사건만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잘 예표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히9:11-1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피는 생명이므로 피에는 구속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9:22절에서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벧전1:18-19절에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히9:14절).

피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구원에는 이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문설주에 피를 발랐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 심령에 그리스도의 피를 발라야 합니다. 우리가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한 것도 많은 성도들과 우국지사들의 피가 이 땅 위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과 성직자들이 희생을 당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피가 이 땅에 뿌려 줌으로 신앙의 자유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5.유월절 양의 피입니다. 1)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입니다. (1)어린양의 피입니다.(3절).
(2)일년 된 수양이었습니다.(5절). (3)흠 없는 어린양이었습니다.(5절). (4)4일 동안이나 구별시킨 양이었습니다(6절). (5)해질 무렵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습니다.(6절).

(6)이스라엘 회중에게 잡혀 죽은 양입니다.(6절). (7)뼈 하나라도 꺾임을 당하지 아니한 양이었습니다.(46절). 2)뿌림을 당한 어린양의 피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그 피를 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1)그릇에 담아서 우슬초 묶음으로 뿌려지는 피입니다(22절).

(2)문설주 좌우와 인방에 뿌려지는 피입니다.(7절). (3)반드시 뿌려져야 할 피입니다.(7:
22-23). 이유는 그것이 구원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설주와 인방의 피를 보고 하나님의 사자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피를 뿌린다" 함은 정결과 보호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먹임을 당할 어린양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죽어서 피 뿌림을 당할 뿐 아니라 먹히움이 되었습니다. "먹는다" 함은 "삶"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 운동"을 뜻합니다. (1)가족 수대로 먹어야 했습니다.(3절). 그것은 개인 개인의 출애굽입니다. 구원은 개인 개인의 고유한 구원입니다.

누구든지의 구원입니다.(요3:16절). 그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냅니다. (2)불에 구워 먹어야만 했습니다.(8, 10절). 이는 예수의 구원은 극에 달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통에서 주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마27:46-47절). 예수는 불을 붙이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는 이 불이 붙기를 원합니다.

이는 십자가 수난의 고통을 불에 비유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속론적(십자가)인 신앙을 가져야 함을 뜻합니다. 결코 날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9절). 삶아서도 안 됩니다.(출2:9절). 십자가의 피(불)와 성령의 불을 통과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3)완전히 먹어야만 했습니다.(10절).

남는 것이 없이 완전히 다 먹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완전히 신앙함을 뜻합니다. (4)즉시 먹어야만 했습니다.(10절). 아침까지 미루거나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그 방에 출애굽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29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오늘의 구원이요, 지금의 구원입니다.

(5)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만 했습니다.(8절). 고난의 의의를 되새기면서 먹으라는 뜻입니다. 애굽에서의 고난, 그 고난에서의 해방을 위한 어린양의 죽으신 고난을 씹으면서 먹어야 합니다. (6)출애굽 자세로 먹어야만 했습니다(11절).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만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십자가의 멍에를 메고 예수 따라 행군할 준비를 뜻합니다.

6.유월절 양의 피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 왕을 굴복시키시기 위하여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은 죽음의 사자를 보내사 애굽의 가정에서 장자와 처음 낳은 새끼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재앙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서,

유대인의 집에서는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유대인의 집 앞에 이르러서는 문설주에 피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집을 건너갔다고 해서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만일에 문설주에 피가 없었다면 유대인의 집에도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곧 유월절 어린양의 피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된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을 믿습니다. 롬5:21절에 보면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사망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광복절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잊어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유와 주권을 찾기 위하여

흘린 순국 선열들의 피가 있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흘린 6·25동란에서 희생된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피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유대인이라면 유월절 양의 피를 잊어서는 안 되고,

참된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피를 잊어서 안 되듯, 이 참된 한국인이라면 순국 선열들이 흘린 피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7.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죽음의 재앙을 고지(告知)하 시면서 곁들여 "어린양의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13절)라는 구원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근거는 히브리인이냐 아니면 애굽인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판가름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어린 양의 피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 역시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의 피입니다. 곧 예수께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히 9:28) 그 피는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의 피가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에게는 어떤 환경이나 신분이나 인종이 문제가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이에 대하여 살게 하는(벧전2:24절) 그 능력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표적을 믿고 받아들인 집만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구원의 표적인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의 피를 믿음으로써 그 피를 마음의 중심에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피를 믿을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어 주셔서 심판과 멸망의 칼날이 넘어가게 됩니다. 광야의 놋 뱀은 물뱀의 독을 치료하는 구원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이것을 믿고 바라본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보혈은

온 세상이 죄를 이기고도 남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야 합니다.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는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피가 집에 있고 그 피가 표적이 되고 그 피가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를 넘어가게 하고 그 피가 재앙에 멸하지 않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그 피가 이렇게 구원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 피가 해방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 피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히12:1절). 그 피는 대속에 의한 구원의 요건이 된 것입니다. 그 피는 뿌리는 방법을 통하여 속죄의 효과를 나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피는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되어지도록 한 것입니다. 그 피는 이스라엘 역사의 신기원이 되었습니다.

그 피는 해방 운동의 출력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양은 선민을 위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선민을 위하여 피 뿌림을 당했습니다. 그 고기는 선민을 위하여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 피는 사망에서 구원되는 생명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피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셨습니다.(고전5:7절). 여기에 구원 종교의 특색이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 종교의 자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 종교의 본질이 있습니다. 예수의 그 피가 곧 내 생명, 내 구원, 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찬송이나 기도는 기독교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예배나 설교는 기독교의 예배나 설교는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전도나 사랑의 구제는 예수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유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1:18-19절).

8.말씀을 정리합니다. 장자 사망 사건은 과거 애굽에서 있었던 일회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은 이를 한 해에 한 번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 희생의 피를 체험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피 값으로 영생을 얻었으므로 그 영생의 삶을 오늘과 연결시켜 성숙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의 기적을 체험한 구원받은 성도의 바람직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삶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붉은 피를 흘려주신 그 피를 바라보면서 험악한 이 세상에서 넉넉한 승리를 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의 자랑스러운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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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성령을 속이는 사건 Friday Night Sermon

성령을 속이는 사건

(행5:1-11절)

 
우리들이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할 때 어떤 믿음과 정신으로 하느냐가 참으로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의 열정과 감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깊은 감동과 은혜 속에서 일하게 합니다.

본문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자리에서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기적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 같은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1.본문의 내용 줄거리와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내 놓을 때 판 금액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 내놓았습니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금액의 일부를 감추는 행위는 "사탄이 아나니아 속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는 결국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듣고 있는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죽게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메고 가서 장사지낸 이후 3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그후에 그의 아내 삽비라가 자기 남편이 이미 죽은 줄 모르고 들어옵니다. 남편인 아나니아가 금액의 일부를 감출 때 아내도 알았다고 합니다. 그 때 아내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이 이게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베드로는 책망합니다. 왜 주의 영을 시험하러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도 남편처럼 너에 시체를 메어 나가리라"고 하자 베드로 앞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온 교회는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초대 교회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빨리 죽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교회 나올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헌금하고 봉사한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지 장난 삼아 하나님을 놀린다면 자칫하면 내 생명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긴장감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들을 두렵게 하는 말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을 협박하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함부로 해석해서 협박하는 그런 말씀으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교회 당회장 목사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당회장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렇게 된다던가 또 헌금을 반드시 목사 발 앞에 내 놓아야 한다고 해서도 안됩니다.

또한 교회 건축헌금을 작정하는데 이용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아픔을 상담해 왔습니다. 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한 이후 마침 집을 팔아 이사하게 되어서 목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정헌금의 일부를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통해 치는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 교회에 붙어 있을 수가 없어서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 아나니아 삽비라부부에 해당된 그런 못된 신앙인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는 잘못된 적용을 낳고 그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돈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대로 헌금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물론 교회 헌금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하나님의 교회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초대교회를 설립케 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성령께서 주관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십니다. 이 일에 사도들이 쓰임 받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킴으로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그 증거와 그 증거에 따른 반응과 삶의 변화들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셨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곧 믿는 모든 무리들로 하여금 한 마음 한 뜻으로, 물건과 재물들을 서로 나누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뿐만 아닙니다. 행4:33-35정을 보시겠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어진 일들입니다.

초대교회에 활동했던 사도들이나 교회는 그 활동에 필요한 재정적인 보충이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36절에서 말하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36절에 보시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을 재정적으로, 얼마나 도왔으면 그의 별명을 권위자라고 했겠습니까? 이 권위자라고 했을 때 권은 권할 권(勸)자에 위로할 위(慰)자입니다.

요셉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은혜를 받고 땅을 팔아 낸 헌금이 초대교회에 상당히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아 권위자, 혹은 위로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영광과 칭송을 받는 것이 탐났던 모양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밭을 팔아 그 돈을 내면 교회에서 칭찬을 받고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돈으로 교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자신들도 그렇게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부부가 하는 행동과 생각이 죽을 만한 죄목에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작정한 금액의 반만 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죽음을 당할 일입니까? 여기서 성령께서 돈의 액수를 가지고 트집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의 결과 은혜를 받아 그분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광과 칭송이 탐남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봉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3.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유지되게 하 는 것을 추방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흉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봉사와 헌금생활도 흉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런 흉내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통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자신이 칭송을 받고 싶은 생각, 즉 그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특징은 항상 현실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할 때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돈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기록한 누가는 누가복음 22: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행동입니다.

우리들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마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지 말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멋대로 살도록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과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그래서 마태복음 26: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시험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자신이 과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면 지금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거부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마귀의 유혹으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7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 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승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우리들의 일차적인 관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 속에서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하는 어떤 규칙들을 찾아내어 그 규칙들을 신앙의 원리로 삼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그런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신앙의 생활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설명되고 있는가에 대한 분명한 진리가 설명되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들에게 늘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기룟유다와 같이 이들 부부들도 그들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탐욕과 허영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까지 이용하고 사도들까지 이용하겠다는 그들의 사탄적 발상에 철퇴를 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짐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에 구경꾼으로 다닌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어렵게 되었는데도 불보듯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정한 사람입니까? 과연 그런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크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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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 Friday Night Sermon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

(행3:1-10절)

 
사도행전 1장과 2장은 어떻게 해서 사도행전이 가능하게 되었고 사도행전이 무엇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인가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 세가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성령 세례를 약속해 주셨고, 둘째는 복음이 유대인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이방인에게 증거될 것을 약속해 주셨고,

세번째는 예수님께서 재림,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2장에서는 1장에서의 약속대로 성령 강림을 통한, 성령세례의 역사가 오순절에 나타났고 방언을 통해서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게 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사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증거와 그 반응을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게 하신 놀라운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본문의 전후 문맥입니다. 본문 3:1-10절 말씀은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사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1장과 2장의 말씀에 대한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라는데 일단 관심의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본문 사건만을 가지고 묵상한다면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의 의도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이미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에 이르기 까지 예수의 복음이 증거될 것을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런 약속을 해 주시면서 그 복음의 성격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라는 형식을 통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3장에 와서 그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께서 권능으로 예수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고 선포되게 합니다. 이같이 성령께서 하시는 이 일은 천상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 지상의 교회와 온 땅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파송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같은 성령께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으로"(행1:22)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 1:8절에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3장은 어떤 형태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사용하시되 제자들의 도움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베드로는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3)고 외칩니다.

2.기적의 사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사건은 그야말로 놀라운 기적의 사건입니다. 감히 우리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놀랄만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기적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이 믿음만 있으면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들도 그런 믿음만 있으면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도 복음이 증거되는 곳이라면 당연히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 기적의 의미와 목적을 살펴보 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 보시면 많은 병자와 귀신을 고쳐 주시고 많은 권능과 이적들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기적들이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병에 걸리지 않고 귀신이 꼭 쫓겨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이런 사건들을 그런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에서 그런 기적들을 도입하고 그런 기적들을 통하여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계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깨닫는 것도 중요 하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적용" 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기적은 권능을 베푸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시겠습니다.

마 11:20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권능은 이적을 통한 권능입니다. 그같은 권능을 베푸신 목적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지 않는자들에 대한 심판이 목적입니다.

본문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권능과 이 기적은 11절 이후에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해석해 주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회개를 촉구해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여전히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주후 70년경에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대로(요2:19) 성전 역시 무너졌습니다. 3:1에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라고 합니다.

아직도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 성전에서 하루 두번씩 예배와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오전 9시와 오후 3시입니다. 그때 예배란 제사를 의미합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제단 가까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제사장은 그 제단위에 놓은 양을 잡아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게 됩니다.

제물을 잡는 예식을 마친 후 예식을 집전하는 제사장은 제단을 떠나 성소로 들어갑니다. 제사장이 제단을 떠나 성소로 들어가 있는 동안 사람들은 개인기도에 들어갑니다. 누가복음 18:9절 이하에 기록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당시에 모든 역사와 구원은 성전안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상적인 이야기가 뒤집혀 지는 순간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은 성전 안이 아니라 성전 마당 밖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로부터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그 앉은뱅이가 성전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베풀 수 있는 "금과 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절)고 할 때 그 앉은뱅이가 곧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전과 제사는 유대인들에게 독점물이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만이 구원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이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증거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성전이 신앙의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성전은 허물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일어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제 그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임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임한다는 그들의 상식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2:21).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었습니다.

4.여전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도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병마와 귀신을 지배하시고 다스렸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도 계속 성령님을 통하여 병마와 귀신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또한 당신의 택한 자녀들과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키심으로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이방인들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어진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갖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고 꾸짖으면 사탄은 한길로 들어왔다가 일곱길로 도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현실에 봉착하였을 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므로 축복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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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기도란 무엇인가? Friday Night Sermon

기도란 무엇인가?

"마 7:7-8절

 
우리들이 이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달라고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필요에 따라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확신의 농도만큼 기도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기도를 하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6: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는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구약성경은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고 대신 그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죄용서를 받곤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상12:19절에 보면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자신들을 위해서 제사장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인 제사장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우리는 응답을 받습니다.

요14: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요15:16절에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행사를 위해서 경비를 청구합니다. 청구서의 내역을 다 쓰고 나서 맨 나증에 청구자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청구서를 낼 때 그 내역을 아뢰고 마지막에 청구자를 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청구자는 누구여야 하느냐는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은 청구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할 때 그 기도를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2.기도를 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고 나면 그 기도에 대한 결과는 어떤 형태로든 지 응답을 받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때와 시기를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가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 응답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를 많이 할 수록 많은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내 실적과 내 공로가 많기 때문에 그 나의 공로를 보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많이 의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어린아이들과 같은 신앙과 믿음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많이 기도를 해야 많이 응답해 주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린 자녀들 중에도 가만히 보면 부모님께 자꾸 달라고 하는 이들이 더 많이 받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꾸 달라고 할 때 화를 내다가도 "내 새끼니까 나에게 이렇게 달라"고 보채는 구나 하고 그 아들부터주는 법입니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사랑스러운 관계라면 자꾸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나는 못받더라도 너나 많이 받아라는 양보심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신다는 그 사실을 제대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 있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확신 있는 믿음이 없다거나 그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을 위해서 우리는 더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자만이 기도합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고 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따라서 기도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바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가만히 보면 언제나 기도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3.기도의 3단계의 방법과 3단계의 응답의 축복이 있습니다. 마7:7-8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신앙이라면 누구나가 다 암기할 정도로 친근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3단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구하라. ②찾으라. ③두드리라. 이 3단계 기도의 방법에 따라오는 3단계 응답의 축복은, ①구할 때 얻는다.

②찾을 때 찾는다. ③두드릴 때 열린다. 종합해 보면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립니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를 말씀합니다. 또한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찾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자신을 향하여 찾는 자를 버리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찾으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하게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시27:8절에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암5:4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암5:8절에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은 이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전도에 대해서 기도를 한다면 "한 달에 몇 명을 전도하고 싶습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이런 기도를 간절히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누구에게, 어떤 자에게 전도할 것인가를 묻습니다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해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대상까지 확신을 주십니다. 그 때 내가 전도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기도하면 내 마음 속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찾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찾습니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면 분명코 문이 열리는 법입니다. 찾기만 찾고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드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들어줍니다.

4.기도 응답의 조건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요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 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15:1-6절까지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누구를 상징하고 있는가?

예수님이십니다. 가지는 누구입니까?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내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나는 거기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나무와 가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붙어 있는 관계입니다. 어떻게 붙어 있는 관계입니까? 장난감이나 어떤 기계가 연합된 것이나,

조립으로 조립되어져서 붙어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믿음으로 간구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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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수가성 여인의 구원 Friday Night Sermon

수가성 여인의 구원

(요4:1-54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 언급하셨고, 그 여자는 그분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하게 정리돼야 할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의 죄의 문제, 예배, 메시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문제 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와 더불어 이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말씀하셨습니다. 본 장은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부분(4:1-42절)과, 귀족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베푸신 부분(1:43-54절)으로 구분됩니다.

어떤 면에서, 두 부분 모두 기적을 내포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위한 "먼 거리에서의" 치료만큼이나 놀라운 것입니다.

1.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1-42)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혼혈인이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서 배척되고 증오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경쟁하느라 그들 자신의 종교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4:20-24절)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4:25절).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는데"(4절), 이는 하나님께서 죄 많은 한 여인을 위하여 그녀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서 생수를 발견하게 되는 일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에 대한 기록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각기 다른 단계들을 보게 됩니다.

1)"당신은 유대인으로서"라고 했습니다.(1-9절) 유대의 랍비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호의를 요청했다는 것은 그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서 유대인이라는 사실 이상의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죄인은 그리스도에 대해 장님이며, 영원한 것보다는 단지 물을 얻으려는 것과 같은 생활에 관한 일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2)"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10-15절) 예수께서는 10절에서 그녀의 무지함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과, 그녀의 면전에 있는 구세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생수(생명수)를 말씀하셨으나, 그 여인은 문자 그대로의 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죄인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얼마나 잘 혼동합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인 탄생으로 생각했었으며(3:4절), 제자들조차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인 떡으로 생각하였습니다.(31-34절).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세상 것들은 만족을 주지 못함과, 그리스도가 없이는 사람들이 항상 "다시 목마를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눅16:19-31절은 이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규명합니다. 이 생에서 쾌락의 갈증을 느꼈던 부자는 지옥에서조차도 다시 목말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생수가 신자의 속에서 솟아나서, 그를 계속적으로 소생시키며 만족시킬 것을 약속하셨는데, 여전히 이 여인은 혼동하면서 그 물을 요청하였습니다.

3)"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16-24절) 비록 혼동하고는 있었으나 생수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었던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죄에 직면하였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녀의 양심을 자극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죄를 직시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숨기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잠28:13절). 이 여인의 화젯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눈여겨 보시기바랍니다. 오늘날의 회심한 죄인처럼, 그들은 종교에 있어서의 차이점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예배하리이까?" "어느 종교가 옳은지요?"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과, 이 일은 다만 구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구원은 유대인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자신의 죄와,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과, 그녀의 종교적 신앙의 공허함(헛됨)을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4)"내가 그(그리스도)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42절) 이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말씀의 권위에 눈이 뜨인 그녀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녀는 그 동네의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간증을 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신자들의 마지막 간증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본 장에서 제자들에 대해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음식보다도 육적인 음식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피곤하셨고(6절) 목말랐으며, 분명히 배고프셨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것 이상의 영적인 것들을 두셨습니다. 제자들은 식품(유익한 것)을 사 온 반면, 그리스도는 영혼(보다 나은 것)을 구하셨습니다. 사마리아로 올 때에 제자들은 아마도 "여기서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을 겁니다. 이 곳 사람들은 마음이 굳은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의 적이니까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추수하도록 무르익은 들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뿌린 이들과 거둔 이들 모두가 추수할 밭에서 함께 일해야 함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고전3:5-9).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적절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혼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모범을 주목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리우는 개인적인 편견이나 육적인 필요들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그 여인과 우호적인 방법으로 만나셨고, 결정하도록 그녀를 강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명하게도, 그리스도는 대화를 이끌어 그녀의 마음에 효과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그녀에게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개인적이고 애정 있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물과 같은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아, 이것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실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피하지 않았고, 그녀의 필요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2.왕의 신하를 위해 베푸신 그리스도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기적 가운데 두번째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들은 사람이 구원받는 방도와 그에 따르는 결과를 묘사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의 두 가지 기적은 갈보리의 가나에서 일어났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예증하며, 이 장에서 아들을 고치심은 구원이 믿음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 아들은 가나에서 27km떨어진 가버나움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가시기를 원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서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년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가지 않으셨으나 그 대신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 서너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을 터인데 52절의 "어제"라는 말은 그가 가나에서 하루 내내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 소년은 1시에 치료를 받았는데, 그 다음날에야 아버지는 집에 당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제로 믿었음을 나타내는데,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집으로 내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이룰 것을 나는 믿는다." 그 귀족은 분명히 가나에 머무르면서 어떤 업무를 처리한 후,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소유하였습니다.(롬15:13절). 그의 신뢰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들에게서 "당신의 아들이 살았나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언제 치료되었는가를 그들에게 물었고, 그 시각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때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의 온 집안이 그리스도를 신뢰하였습니다.

롬10: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42절에서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무엇인가를 보며 표적과 기사들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단도 속이기 위해 표적과 기사를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셔야합니다.(살후2:9-10절).

만약 당신의 구원이 느낌, 꿈, 환상, 음성 또는 어떤 다른 육적인 증거들에 근거하고 있다면 매우 위험한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믿음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확신을 줄뿐입니다.

요일5:9-13절에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 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 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3.증거 하는 신앙입니다.(53-54절) 1)그 사람은 "자신의 온 집안 사람들"에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과 교훈들을 전해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모두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고 그분께 자신들을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2)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이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부패한 정부 속에서 부도덕한 관리들과 어울리는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조롱과 핍박을 겪을 뿐 아니라 아마도 지위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신앙은 증거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하신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을 알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마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눅8:38,39절에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행16:30-31절에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면 그 속에 예수 새 생명이 있기에 전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다면 자신을 뒤돌아보며 점점하여야 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는가? 나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므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간증하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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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Friday Night Sermon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요5:1-18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 하신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신 일을 기록하신 목적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상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소개할 때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고 상대를 소개받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 병을 고쳐 주신 일을 통하여 어떤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하나님의 아들로 증거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하셨던 일을 세 가지로 요약한 다면 첫째, "가르치시는 일"이요, 둘째,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이요, 셋째,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든 병을 고쳐 주신 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의도하셨는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이유을 설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사53:4)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셔야 합니까?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본인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가지고 온 “모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을 고쳐 주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고 증거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에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이런 계시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사건을 읽고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바르게 알도록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요17:3).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을 고친 사건을 읽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인데 그 의도에 충실하기 보다 병을 고치는 내가 주체적으로 등장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2.예수님께서 38 년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 약 세 번 정도 예루살 렘을 방문한 것으로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절 때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은 구약에서 제시한 명절에 동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베데스다라는 연못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베데스다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바닥날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을지라도 낫는다는 말을 듣고 많은 병자들은 연못에 물이 마를 때 첫 번째로 들어가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한 소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38년된 병자는 그 첫 번째로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런 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셨습니다. 모두가 관심을 보이지 않을 법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다가가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 약한 병자를 어루만져 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나는 나 혼자"라고 생각되신 분은 안 계십니까?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한 평생, 나의 청춘을 바쳐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당신은 우리 회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억장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모두가 나를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에게 주님이 계십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그러시면서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이런 위로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3."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17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 를 안식일에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16절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이때 예수님께서 반박합니다. 그 내용이 17절에 기록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더욱 들고 일어났습니다. 18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했다는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쉬었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안식일에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일을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도 일을 하시기에 예수님도 안식일에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시기 위해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의 말이 맞습니까? 물론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물어 보면 누구의 말이 맞다고 합니까?

자신들이 맞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고 쉽니다. 우리 나라에 안식일 교회가 토요일이 안식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안식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구약의 전통을 지키겠다고 하는 자들 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구약의 안식일이 어떻게 신약의 예수님에게로 성취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한 번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6일동안 세상을 너무나 완벽하게 지으셨습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지으셨기에 더 이상 하실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7일째 되는 날에 쉬셨습니다. 즉 안식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안식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안식이라는 말은 '쉰다'는 개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쉬셨습니까? 6일동안 너무나 완벽하게 지으셨기에 다른할 일이 없음으로 쉬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창조의 완벽성"을 지칭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범죄한 그 인간을 고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쉬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지금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씀으로 의미를 확대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일을 하셔야 합니다. 죄를 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죄와 병으로 인하여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대로 예수님은 일을 하십니다.

즉 그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병을 고쳐 주시므로 진정한 안식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지금 안식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안식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을 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날짜 지키는 것이 안식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주님의 안식을 범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억압하게 합니다. 쉴 수 없도록 많은 법 조항을 만들어서 법에 가두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과 안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안식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됨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희년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편히 쉬게 하셨습니다. 사망의 무서운 멍에 속에서 우리들을 구출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같은 자유와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사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게도 위로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은 찾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위로와 평강을 주신줄 믿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신 줄 믿습니다.

4."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14절)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14절에 기록됩니다. 다같이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병을 고침 받았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지만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더 심한 것"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서라고 교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병고침 좀 받았다고 마치 자신은 이제 완벽한 사람이 된 줄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을 받아 잘 풀렸다면 그것이 다인줄 알고 교만하면 안됩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죄가 심한 병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더 심한 병에 걸리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합니다. 여기 "다시는" 이라는 말은 이미 죄 때문에 병이 왔는데 그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또 다시 죄를 범하므로 더 심한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어떤 병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신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한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안식과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38년 동안 병마의 고통과 싸웠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가정이 온전했겠습니까? 평화와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병자에게 우리 예수님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와 쉼을 주셨습니다. 그러시고 난 다음에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죄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죄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께서는 갈5: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참 자유와 행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와 행복을 죄 짓는데 사용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교회를 봉사해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삶을 통하여 예수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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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제목 : 새 사람을 입었으니...
말씀 : 골3:9,10


1.삶의 전 영역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는 한 여집사님 때는 이때라 생각하고 남편을 붙들고 통사정을 하여 부흥회에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가니까 사람들이 벌써 제법 많이 모여 있고, 강단 앞에 큰북을 갖다놓고 크게 두드리면서 뜨겁게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찬양하고 나서 드디어 강사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시더니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폭풍처럼 몰아치며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외쳤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열변을 토하더니 설교가 마칠 때쯤 되어 강사목사님이 지금부터 예수님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안수 기도를 해 줄 터인데 안수기도를 받으면 성령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데리고 온 여집사님이 남편을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빨리 앞으로 나가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나가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부흥회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집사님은 너무나 아쉽고 야속한 마음이 들어서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애원을 하는데 좀 나가지, 그렇게 끝까지 안 나갈게 뭐예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내가 왜 안 나갔는지 알아?’ ‘왜 그랬는데요?’ “아까 목사님이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앞으로 나와 안수기도를 받으면 새로운 삶이 있을 거라고 그랬지?” “네, 그럼요. 예수님이 믿으면 분명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요.” “그런데 말야, 당신을 보면 새로운 삶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 품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자기가 나오기 싫으니까 남 핑계 대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의 모습을 살지 못하면 그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욕하고 그래서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는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왕같은 제사장다운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주님의 향기가 되고, 빛과 소금이 되어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고, 나 또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 선생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행동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디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적 삶을 충만하게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숙제는 거룩입니다.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것이냐, 어떻게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이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에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에서는 앞부분에서는 믿음의 도에 말씀하신 다음에 뒷부분에서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거룩한 삶은 결코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에 관련된 것으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거룩하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세주로 온전히 섬기며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육체적 거룩한 삶이란 우리 몸과 시간과 물질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살리고, 기쁨과 유익과 은혜와 사랑과 평강과 소망을 주는 일에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윤리적, 도덕적으로 거룩하다는 것은 주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랑과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진실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이나 원망이나 근심이나 염려나 불평이나 좌절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감사와 기쁨으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영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에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향기가 되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도 생명의 기쁨 가운데 주님과 동행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모든 삶속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을 향하여 나아감으로 주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거짓을 버리고 정직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정직해야 합니다. 요즘 보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거짓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거짓말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은 하나님이 심히 미워하시는 것으로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 제9계명에서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고 하셨고, 시5:6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거짓말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겠습니까? 거짓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수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요8:4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 하였습니다. 사탄이 거짓말을 만들어낸 자로서 거짓의 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교묘한 거짓말로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고 갈라놓고 그래서 범죄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모든 거짓은 여기서 나온 것으로 그래서 결국 거짓말은 사탄에게 속한 것으로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임으로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인간관계에 불신과 갈등을 유발시킵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불의의 이득을 취하는 악을 행하게 만듭니다. 결국 거짓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는 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말을 그토록 미워하시고 그래서 오늘 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거짓말은 마귀에 속한 것으로 옛사람 즉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고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갈등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예수 안에서 거듭난 너희들은 그런 것들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하게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짓을 미워하고, 합리화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손해를 볼망정 진리 편을 택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적당히 임기응변하며 처세술에 능하게 이권을 챙긴다해도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우직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일터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정직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정직하게 행하지 않고 거짓을 행한대 해도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뭐 융통성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소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곧이곧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직하게 진실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또 다른 표징인 것입니다. 그냥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기만 하면 신앙생활 올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그 받은 바 은혜를 따라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가지고 진리를 택하고 선을 택하고 성실을 택함으로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빛을 비추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새로운 지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새 지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새 지식이란 물론 우리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에서 학문적인 지식이나 아니면 문화나 각종 기술등의 실제적인 지식이나 이런 세상적인 지식과 대비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입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새로운 지식이란 그런 세상의 지식 외에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하나님께 대한 지식, 말씀에 대한 지식, 구원에 관한 지식, 인간의 생명에 관한 지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지식 등 인간의 근본과 생명과 궁극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지식보다도 이 지식을 알아야 하고, 이 지식을 따라 살아갈 때 만이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보십시오. 우리는 새사람을 입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로워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에는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져야 할 지식을 다 까먹고 캄캄한데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여기가 세상의 전부인양 여기며 그래서 그저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고 내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양 여기며 살았습니다. 뭐 조금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 안 입히고 어렵고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그게 한계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죽자사자 돈 따라 명예 따라 세상 영광과 세상 즐거움을 따라 살아가고 조금 고상해봤자 다른 사람을 조금 수고하고 애쓰며 기여하는 삶을 살아갈 뿐 진정으로 섬겨야 할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누려야 할 그 영원한 영광스러운 생명의 기쁨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종착역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면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근본과 목적을 알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을 알게 되고 인생의 영원한 미래에 대하여 알게 되고, 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왜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고 돈을 벌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나님, 모든 것의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선이요, 그 선이야말로 지고지선이고 거기만이 진정하고도 영원한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고 너와 내가 함께 기뻐하며 그야말로 영원히 영광스러운 은총을 누리며 사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생명도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그 어떤 것이라도 내 것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할 존재, 심판이 있을 것, 재림이 있을 것, 부활이 있을 것임을 알고 그 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신지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만이 인간에게 참된 생명과 기쁨과 영광과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두는 참지식이고 완전한 지식이고 영원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벧후3:18절 전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왜요? 그래야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런 말씀들을 기억하며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으로 물론 좋은 지식을 가지고 자신도 남도 풍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 인생의 근본과 목적과 영광에 관한 지식을 바르게 앎으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거룩하게 진실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면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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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합시다
말씀 : 행11:11~18


1.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미국 경영학의 대가라는 드러커(Peter Drucker)라는 분은 “회사 경영이 실패하는 원인의 60%는 회사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부부 상담자인 퀘베인씨는 이혼하는 원인의 50%는 부부 사이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범죄 심리학자들은 범죄자의 90%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교제 등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즉 교제가 인간관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뭔가 의사소통이 잘 안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안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자기 생각과 의지와 지식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 늘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까 하나님 뜻과는 다른 엉뚱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즉 늘 가까이서 모시고 섬기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밀접한 관계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해 줄 것이고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풍성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더욱 은혜의 풍성한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고넬료 가정을 구원시키고 돌아온 베드로에게 하나님과의 교통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도리어 베드로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가 어떻게 성령과 교통했는지를 차근차근 해명하여 그들을 설득시켰고, 결국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베드로의 행위를 인정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2.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들(1-3절)
오늘 본문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오늘 말씀 전에 보면 베드로가 어떻게 이방인 고넬료를 구원시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10장에 있었던 일인데 여기서 중복해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랬느냐하면 그렇게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 즉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며 베드로를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행11:2,3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세상에 이런 무지하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일이 비난 받을 일입니까? 아니면 예루살렘교회가 잔치를 벌이며 베드로에게 상을 줄 일입니까? 구원의 역사가 그것도 이방인 그것도 로마의 백부장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누가 구원받았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온 가족과 하인과 친구까지 불러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더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던 할례자들은 고넬료 가정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왜 그 집에 들어가서 이방인과 함께 먹었느냐고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도 아닙니다. 이들도 엄연히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의 할례자라는 말은 할례당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교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로 개종하긴 하였지만 여전히 모세 율법에 충실하여 할례의식을 비롯하여 기타 정결례 등을 잘 준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고 유대인이니까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는 할례대로 받고, 정결법은 정결법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왜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셨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의 오류는 무엇입니까?
1)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과거의 잔재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과거에 그들이 지켜왔던 관습이나 문화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과거의 잔재들 때문에 도리어 복음의 역사를 막고, 자기 자신도 복음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베드로를 비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못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고넬료 집안이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이방인의 집에서 함께 먹었다는 이유로 도리어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보다는 아직도 과거의 잔재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관습, 문화, 가치관, 경험들이 판단의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과거의 율법주의에 어긋나는 행동에 대하여 비난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오류에 빠지면 안됩니다. 내 생각이나 관습이나 경험들이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내 모든 편견과 고집과 이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의 두 번째는 문제는 그들이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외시하고 아주 사소한 문제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기뻐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베드로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칭찬하고 격려를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복음의 역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이 그저 자신들의 생각과 좀 다른 행동을 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며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할 것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갈등하고 비난하면서 정열을 낭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편견을 잣대로 해서 비난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삼가야 하지만 혹시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이 좀 약간의 실수나 방법상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문제를 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대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교회에 있어서 대의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복음입니다. 생명의 역사입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문제를 위해서는 양보해야 합니다. 때로는 덮어 두어야 합니다. 혹시 내 생각, 내 가치가 옳다고 하더라도 나 한 사람 죽음으로 교회에 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복음의 역사에 도움이 된다면 나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베드로의 변론(4-17절)
할례자들이 비난거리가 아닌 것을 비난했지만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아주 냉정하고 지혜롭게 풀어나갑니다. 자신이 어떻게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게 되었고, 어떻게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되었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차근차근 설명하여 자칫하면 내부적인 갈등이 일어날뻔 한 사건에 대하여 지혜롭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욥바에서 기도하는 중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큰 보자가에 네발 달린 짐승과 들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보이더니 나에게 잡아먹으라고 해서 난는 속된 것이나 부정한 것을 한번도 먹은 일이 없다며 그럴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왜 속되다고 하느냐면서 먹으라고 하셨고,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그럴 수 없다고 하였지만 세 번씩이나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 후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와서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받고 자신들을 보내어 왔다고 말했고, 이 때 성령께서 의심하지 말고 따라 가라고 해서 결국 그들을 따라갔고 결국 고넬료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여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인데 내가 어떻게 이것을 거역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변론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1)먼저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할례자들이 비난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실컷 귀한 일을 하고 나서 비난을 받았으니 사실 기분이 상할만한 일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기껏 복음을 전하여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기뻐하고 영광돌리며 잘했다고 칭찬하고 상은 못 줄 망정 도리어 사소하고 엉뚱한 것을 빌미로 비난하고 하고 있으니 속이 상할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칫하면 서로 감정의 대립이 생길 수도 있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잘못된 비난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같이 비난하거나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음으로 문제가 잘 풀려나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베드로가 부정한 짐승들이 담겨 있는 바구니가 내려와 먹으라고 할 때에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자기도 환상을 보고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기전까지는 그들과 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이방인과 식사하면 안 되는 줄로 알았고,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이끌려 그곳에 가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맛보고 나도 내가 얼마나 어둠속에 있었는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이야기하며 나도 그 전까지는 당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비난하고 있는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직 성령의 능력을 충분히 덧입지 못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잘못된 생각이다. 하면서 문제를 차분하게 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시키면서 원만하게 해결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언가 서로 간에 약간의 오해가 있거나 좀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더라고 좀더 의연하게 그리고 좀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같이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무시하거나 분노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수용해 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의논하면서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결국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안에서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감으로써 교회를 잘 세워 가야 할 것입니다.
2)어떤 일이 있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처음에는 당신들처럼 생각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나도 사실 이방인을 더럽고 추한 사람들이라고 여겨 상종하기를 꺼려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저들도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른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정말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지 먼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하는 일들에 대하여 방법이나 과정이 나의 생각과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복음의 역사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성령께서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지 이것을 먼저 생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이 행동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행동의 기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부족해서 때로는 뭔가 의견이 다르고 오해가 생길 때에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면서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결국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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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나
본문 / 마태복음 17:14~20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우리로 하여금 삶을 살게 만드는 힘은 믿음입니다. 평소에는 돈에 위력(偉力)이 있는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돈은 힘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세상적인 힘이 우리를 붙들어줄 것 같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어제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오늘은 그것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不信)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문화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과 반대되는 환경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음을 잃으면, 웬만큼 무장하지 않으면, 세상에 나아가는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적이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검증된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그런 문화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죄성(罪性)이 있습니다. 죄성은 끊임없이 의심을 만들어냅니다. 처음에는 믿는다고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의심이 찾아옵니다. 특별집회를 할 때에는 의심이 적어집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의심이 적어집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죄성이 그대로 있습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의심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의심에 시달리고, 영적 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불사조(不死鳥)처럼 보였습니다. 거대한 로마 가톨릭과 싸운 마틴 루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그가 겪는 내적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았습니다. 루터가 친구 멜랑히톤(Melanchthon)에게 쓴 편지에 보면, 영적 시야가 희미해지고,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에는 매우 힘들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가 있습니다. 그때 믿음은 가물가물해집니다. 한순간에 의심으로 돌아서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교회사(敎會史)를 보면, 믿음의 사람들도 흔들릴 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깊은 밤을 통과했습니다.
그때는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본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의심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불신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의심과 불신앙은 불쑥불쑥 솟아오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한때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의심과 불신앙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强化)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을 강화하는 작업을 계속하지 않으면, 어느 날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 믿음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활성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의 앞에는 변화 산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은 변화 산 사건과 연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서 기막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바뀌고, 천국의 예고편처럼 하늘의 영광이 스쳐 지나가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주 놀라운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17:4).

산 위에서는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산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 아들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아들을 고쳐주지 못하고 쩔쩔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자 이 사람은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17:15~16).

그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17).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한탄하시며 아이에게 있던 귀신을 쫓아내시고, 아이를 낫게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마 17:19).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20).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도 없었습니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은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그만큼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믿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능력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는데, 자신들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29). 능력의 출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 외에는 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믿음을 키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믿음이 커집니다.
믿음은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고 작은 것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과 연관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닦달해도 우리에게서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의존하고 나면, 한참 동안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항상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납니다. 어제는 의존했지만, 오늘은 의존하지 않는다면, 어제의 능력이 오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는 태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게중심을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마음만 무거운 것이 아니라, 몸도 무겁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기도하다 보면,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무게중심을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어도 능력이 무조건 나타나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지만, 제자들은 대행자(代行者)들일 뿐입니다.
대행자는 능력의 출처인 하나님을 항상 의지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에게 능력이 있어서 실력을 행사하듯이 능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능력이 오히려 사라져버립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라고 외친다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철저히 전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능력을 자기 마음대로 대행한다면, 능력을 얼마나 남용하게 되겠습니까?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해서 능력을 마구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은 마술(magic)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술(魔術)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능력을 사용할 때에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어제 능력이 있었다고 해서 오늘 그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 자체가 아니라, 능력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한때 불을 받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한때는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의지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납니다.

기도생활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에 소홀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능력이 떠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관건은 전적으로 지속적으로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패하면 안 됩니다.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 제자들에게 일어난 문제는 교만함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길에서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은지 키 재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후, 남아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은 자신들만 남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신 후,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남아있던 제자들은 ‘기회가 왔다. 지금이야말로 실력을 보여야 할 때이다. 멋지게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께서 오시면 칭찬을 받을 기회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도전했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멋지게 귀신을 쫓아내고, 아이를 고쳐보려 했지만,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이 사건 후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쟁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5).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김을 받기 위해 첫째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능력이 나타난 이후가 중요합니다.
만약 제자 중 누군가가 귀신 들린 아이를 낫게 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힘주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신 이후, 심기가 편하지 않았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찾아온 내적 유혹입니다.

교만하면 능력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최고가 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그렇습니다.
사역하는 가운데, 허영심이 늘 따라다닙니다. 돋보이고 싶습니다. 그런 것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능력을 나타나고자 한다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타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능력을 행함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가지 못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 산 아래에서 기적을 한 번 행함으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자격을 입증해보이고 싶었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드러나거나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능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의 목적은 섬김이어야 합니다. 섬기는 자는 드러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자랑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동원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실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잘하지만, 나중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주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끊임없이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높아지려고 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자아실현, 자아성취를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성(城)을 쌓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5). 능력을 베푸는 자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위대해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작습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상태를 말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바윗돌만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기대할 만한 것이 별로 없음을 의미합니다. 최소한의 것만 있으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지 않으십니다.

능력을 행할 때, 우리의 편에서는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능력은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우리는 그 옆에 살짝 붙어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홍해(紅海)를 갈랐습니까? 모세는 지팡이만 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바다 위로 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모세가 할 만한 위대한 일도 없었고, 모세는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 그때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고도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무엇인가 극대화시키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만 점점 커져가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단해야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산을 옮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일반적으로 산은 크고 장대(長大)한 것입니다. 거대한 산을 보면, 위용(偉容)이 대단합니다. 거대한 산맥을 이루는 산을 보면, 그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역사(役事)를 실감나게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람들은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누가 감히 산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이 하는 일은 놀랍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냅니다.

사람들은 산은 옮길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바보 같은 이야기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이 옮겨졌던 일이 가끔이라도 있었거나 옮겨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문제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산을 옮긴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운명론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은 왜 토정비결을 보고, 점을 보러갑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점을 보러 많이 갑니다. 정치인들도 점을 보러 갑니다. 점을 보는 것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서입니다. 사람들은 운명이 이미 정해져있다고 믿습니다.

운명론에 빠지면, 삶의 태도가 수동적입니다. 승패(勝敗)가 정해진 게임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주(四柱), 관상(觀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운명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이 무겁습니다. 우리 민족은 전체적으로 운명론에 잡혀있습니다. 사주를 보는 것이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삶의 경험이 부정적이거나 잦은 실패를 한 사람일수록 운명론을 믿습니다. 동양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운명론자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재지변(天災地變)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산에 촛불을 피워놓고 굿을 하는 것은 운명을 달래려는 것입니다.
운명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나는 안 돼. 우리 아버지도 불가능했어. 나도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피적이고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리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살아갑니다.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미리 결론부터 내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운명론적으로 살아가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은 운명론적인 삶을 다 걷어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운명론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 내버리는, 강력한 태도입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고 나면, 그 꿈에 매이는 분이 계십니다. 운명론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쁜 꿈을 꾸었을 때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꿈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거부합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고 해도 꿈에 매이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어 기분이 나쁠 때에는 기도로 이겨냅니다. 좋게 해석하여 이겨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일어난 문제를 잘 해석했습니다.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누가 해석을 잘합니까? 꿈에 하나님을 모시고 오면, 잘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했습니다(창 50:20).
요셉은 문제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불행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내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찾아오시면, 그 꿈은 길몽(吉夢)입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꿈이라도 꿈속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오면 됩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고난으로 인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선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유대문학에서 불가능한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유대문학에서 ‘산’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제자들 역시 불가능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가능을 믿음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에게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면, 산은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산을 옮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명령하면 됩니다. 산은 우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때,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내리쳤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명령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내쫓으실 때에도 명령하셨습니다.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일까요? 명령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왜 무너집니까? 불가능한 문제 앞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들여다보며 한숨짓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대화할수록 절망적인 답을 얻게 됩니다. 아무리 우리의 안을 들여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문제 앞에서 다른 사람과 의논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도 불가능합니다. 친구들을 만나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 의논하면, 오히려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좌절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가능한 문제를 놓고 사람들과 모여 회의(會議)해보세요. 회의(懷疑)만 생길 뿐입니다.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를 잘 점검해보세요. 믿음을 활성화시켜주는 그룹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그룹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회의적인 그룹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격려해주는 그룹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우리의 믿음을 격려해주기보다는 오히려 낙담하게 하고, 더 절망하게 하고, 더 큰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신통하지 않으면서 믿음 없는 친구들과 몰려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길이 없습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의해 최면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변을 돌아보세요. 사람들은 죽는 소리를 합니다. 물론 저마다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왜 산을 향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산을 향해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능력도 없는데, 우리에게 명령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라고 말씀하신 분은 산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산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능력 많은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대해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거꾸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해. 네가 움직여. 네가 포기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내가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망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해지면, 산이 움직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은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지금도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산을 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손으로 머리로 산을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은 하나님께서 옮기십니다.
믿음이란, 산을 옮기실 수 있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 하나님을 한계 속에 가둬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산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수많은 산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 산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산들을 걷어내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돈을 모으고, 세상의 실력을 모아 인생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믿음을 쌓아가야 합니다.
믿음을 쌓아간다는 것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산이 없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수많은 산들이 우리를 질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그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여도 산이 옮겨질 것입니다.
불가능했던 것이지만, 우리가 믿음 안에서 명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 믿음으로 산이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은 옮겨질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을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드러내려고 하십시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24시간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는 눈곱만큼의 능력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산의 높이가 100m이든 1,000m이든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똑같습니다. 우리가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아닙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분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여러분의 자랑과 허영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랑은 계속해서 솎아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허영심을 계속해서 쏟아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을 감추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겸손함을 유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에 산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을 불가능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향해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그 명령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행 3:6). 그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선포했습니다. 명령했습니다.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명령했을 때, 그 명령이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권세 앞에 굴복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환경이 우리의 삶을 결론짓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산들은 우리가 명령하고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불가능의 환경에 의해 굴복당하지 마시고, 오히려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산을 옮겨버리시기 바랍니다. 산을 무너뜨려버리시기 바랍니다. 산을 녹여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평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운명론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그 속에 갇혀있지 마세요. 산 앞에서 기죽지 마세요. 산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마세요. “나는 안 된다. 나는 불가능하다. 나는 실패한다.”라고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오히려 우리가 명령해야 합니다. 산을 향해 믿음으로 명령하세요.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큰 믿음에서 능력이 나타난다면, 예수님께서는 바위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손만 내밀면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능력을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좌절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물러나지 마세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마세요.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산들을 옮겨버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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