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  진정한 종교

 

 


제목 : 참된 종교

말씀 : 요3:10-17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왜일까? 그것은 두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심각한 죄와 무지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누구에게나 절대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든 모르든 어떤 절대자에 대한 갈급함으로 절대자를 찾게되고 그것이 종교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영적인 부분이 없다면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인간에게 도덕적인 관념이 전혀 없다면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영적 관념이 있기에 신을 생각하고, 도덕적 관념이 있기에 도덕적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지고 신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와 같이 영적인 존재이므로 무언가 절대자를 찾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참으로 올바른 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나름대로 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 섬기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둠과 무지 가운데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이다. 영적인 요소가 있어서 무언가 신을 찾기는 찾는데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엉뚱한 것을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와 어둠 속에서 나름대로 이것을 저것을 찾다보니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난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을 올바르게 만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우리에게 참 생명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1.참된 종교의 조건

1)인간을 찾아와 자신을 계시해주고 구원해주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바와같이 인간은 죄와 무지로 인하여 스스로는 참신을 찾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신이 인간을 찾아와 신과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줄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신을 만난다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는 신은 무궁무진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히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이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어두워지고 캄캄해져서 도저히 인간 자신으로서는 참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무지하고 연약하고 한계가 있고 죄가 있는 인간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를 닦는다고 알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이다. 백날 연구해도 모른다. 인간이 아무리 궁리해봐야 도로 그 자리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크기나 능력이나 지혜나 의나 선이 우리보다 더 작은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능력보다 훨씬 큰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갓난아기가 어떻게 인간이 달나라에 간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본래부터 인간은 지혜나 능력이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작은 존재였는데 거기다가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까지 어두워졌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스스로 알겠는가? 그러므로 신을 알려면 신이 우리를 찾아와서 신 자신에 대하여 알려 주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구원도 동일하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하여 백날 연구하고 도를 닦아도 헛수고다.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의 길을 알 수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나 혼자 그 길로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란 신이 직접 인간을 찾아와서 자신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인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종교이다.

2)우주만물의 기원을 분명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참 종교라면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작을 알지 못하면 돌아갈 곳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처음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원위치로 돌아가겠는가?

종교란 결국 근원에 관한 문제이고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현재의 문제도 포함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세상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우주만물의 근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이끌어갈 수가 있겠는가?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참된 종교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시작과 끝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인격적 만남과 올바른 윤리관이 있어야 한다.

신은 선을 전제로 한다. 물론 악신도 신은 신이겠지만 진짜 신은 절대 선과 절대 의와 절대 거룩과 절대 진실과 전능과 전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신은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이라면 선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류에게 진정한 선과 의와 거룩과 진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해주어야 한다.

또한 신은 인격적이어야 한다. 인격적이라 함은 영성과 지성과 감성 등을 말한다. 인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교제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인격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통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이라는 인격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이 교제하기 위해서는 신도 인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성과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인간과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고 하면서 교제할 때에 비로소 인간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격적인 신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4)인간의 실상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시작과 더불어 현재의 상태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그 진단을 바탕으로 한 처방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병에 걸렸을때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일단은 그 시작점 즉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고 또 예방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는 현재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야한다. 그래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단순히 약물로 할 것인지, 수술을 받아야 할 것인지, 입원을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원인과 상태를 알아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도 동일하다. 인간 자체나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의 기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현재의 상태는 어떤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이것을 알아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인간의 실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5)인간 생명에 관한 분명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상에 있어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중에서도 인간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다.

따라서 진짜 종교는 무엇이냐하면 결국 인간에게 진짜 생명을 줄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죄의 문제, 육체의 한계의 문제 등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진짜 생명을 얻게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진짜 종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윤리적인 종교라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면 참종교라할수 없다. 아무리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해도 마찬가지다. 천하보다도 귀한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완전한 종교가 아닌 것이다.

6)내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영은 죽지 않는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선하다고 해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을 해주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는 가짜이거나 불완전한 종교이다.

2.참된 종교의 모든 조건을 갖춘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이다.

그렇다. 이 모든 조건을 100%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 뿐이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참종교의 조건중의 한 부분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핵심인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오늘 13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또한 16절에서는 예수님이 내려오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생명을 구원할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말씀하신다.

그밖에 오늘 기독교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하나님이 찾아오신 종교이다. 인간의 연구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을 계시해주셔서 알게 하셨으며,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신 종교다.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만남과 윤리관이 있다. 인간의 실상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법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감히 타종교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방법으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분명한 해결점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

다른 종교들은 비록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건전하다고 해도 이러한 조건들 중 일부는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시키지 못한다. 또 미신이나 조상이나 자연을 숭배하거나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행위는 이러한 참 종교의 조건들을 거의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종교들은 결코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할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며 오직 참된 생명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그 은총가운데 살게 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라. 누가 어떤 말로 미혹한다해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말라.

인간 나름대로 생각한 것들은 다 부족하고 완전치 못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말씀위에 서라. 아무리 건전하고 윤리적인 고상한 종교라해도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종교,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는 종교, 이런 종교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거기에 순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때에 진정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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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제목 : 예수님의 사역

말씀 : 마4:23~25

 

오늘 말씀. 예수님의 사역. 물론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예수님의 가장 근본적 사역.

그러나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죄사함과 부활과 천국을 알리고 깨닫게 하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천국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끊임없이 전하시고 가르치심.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핵심 사역 세가지. 복음을 전하심. 가르치심. 병을 고치심. 즉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리심. 선포하심.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믿은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심. 그 다음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심.

이것이 교회의 사역. 이것이 인간의 삶의 우선순위. 인간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일.

오늘날 이런 의미가 많이 퇴색, 예수님의 오심, 성탄절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 인간적인 사랑,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하나됨, 서로 인정함. 물론 이런 의미도 있고 또 상당히 중요한 일이기도.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님.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생명.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에서 잘 나타남.

1.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천국 복음은 전하심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분명.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물론 섬기시고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도 사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적인 섬김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결국 십자가까지. 사랑도 단순한 인간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동기는 생명. 인간에게 참된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

그래서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 천국 모두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그리고 사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소용없어. 그래서 또 말씀.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알자. 바르게 믿자. 바르게 영접하자.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생명의 소식을 전하자.

2.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가르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천국복음을 전하신 다음에는 가르치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정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무엇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인가? 등 하나님의 형상, 천국시민으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심.

우선은 믿어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생복락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고 심판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어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 눈앞에 전개될 현실적인 세상. 단순히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나 마음속의 소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 공간.

그리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중요한 일인가? 무엇이 정말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인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가를 가르치심.

그러므로 열심히 듣고 배워야. 그리고 그 말씀따라 살아야.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육체적인 건강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주님이 우선되는 삶으로 방향전환해야. 돈이나 명예보다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거룩과 의가 우선시 되는 삶을 살아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생명과 기쁨을 은혜를 주는 삶.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는 삶. 이런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그럴 때 진정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풍성함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됨.

3.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 이웃 돌보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께서 하셨던 세 번째 일은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시는 사역.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돌보심이다. 비단 몸 뿐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주셨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다. 죽은 야이로의 딸, 어떤 과부의 청년 아들과 죽은지 나흘리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마14장),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셨다.(마15장)

즉 예수님은 인간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그 영혼과 육신과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심. 물론 분명히 우선순위가 있었다. 먼저는 영혼을 살리는 것.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의 백성의 삶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육신과 물질적으로 돌보셨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균형적인 믿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런 균형잡힌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먼저는 영혼이 온전히 거듭나야 한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현실적인 것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바르게 알고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몸과 마음과 영혼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성탄절주민초청잔치는 바로 이런 자리다. 복음을 전하는 자리이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리는 자리다.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자리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리는 자리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이다. 어찌하든지 그들의 교회 마당을 밟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리게 하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하려면 한명이라도 더 오게 해야 한다.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벤트나 홍보도 필요하다. 이벤트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이벤트다. 한명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하고 일단 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뭐가 되어도 된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전해도 튕겨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사랑을 베풀고 하다보면 결국은 조금이라도 교회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이미지가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어쩌구저쩌구 잘하지만 행동은 전혀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무엇인지 그 역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되새겨 보며 먼저 나 자신이 그런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자.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주님을 만났으면 진정 거듭난 자로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자.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그 일에 힘쓰자. 그 일환으로 실시하는 성탄절주민초청잔치에도 적극적인 자세로 홍보하고 참여 함으로써 많은 분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하자.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믿게 하자. 혹시 당장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해도 마음이 점점 부드러워져서 결국은 주님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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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찬양예배설교


제목 : 가장 큰 능력

말씀 : 요20:24-31

 

1.가장 큰 능력은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가장 큰 능력이고 무기이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다. 그렇다고 기도하면 산도 옮겨질 것이라는 믿음, 믿기만하면 죽은 자도 살아나고, 바닷물로 갈라질 것이라는 믿음 등의 뭔가 대단한 능력을 일으킬만한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믿음도 포함되지만 믿음이 능력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은혜와 진리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먼저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지옥의 권세를 이긴다. 일단은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다. 세상의 다른 무엇이 이런 능력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궁극적인 구원만을 가지고 믿음이 가장 큰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 생명력과 기쁨과 은혜와 사랑을 준다. 근심 걱정 염려 불평 불만 낙심 절망 한탄욕심과 미움과 시기를 이기게 한다. 그래서 그야말로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가장 큰 능력인 것이다.

안 그런가? 이보다 큰 능력이 어딨나? 지옥의 권세 깨트리고 천국가는 능력이 세상의 다른 어디에 있겠나? 또 세상에서도 우리가 무엇으로 이런 생명의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겠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평안을 주겠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주님을 믿는 자는 이런 은혜를 분명히 누리게 된다. 분명히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된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희망과 소망을 찾을 수 있다. 많이 갖지 못했어도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4:13절에서 말씀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 고후6:10절에서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모든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가운데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세상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주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무지와 불신가운데 있는 제자들(24,25)

그렇다. 믿음이 관건이다. 믿는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상황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다만 자신만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힘있게 사명을 감당함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영광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믿음을 늘 강조하셨고, 부활 후에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주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며 믿음을 강화시켜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힘있게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여러 번 목격하기 전에는 아주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눅24:11절에 보면 사도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였다. 또 마28:17절에 보면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19절에 보면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고 숨어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오늘 25절 말씀이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러니까 앞서 도마가 없는 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셨었는데 이 사실을 도마에게 말하자 그는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예수님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라고 그 만큼 말씀하셨는데... 또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는지 보았는데... 그만큼 천국에 대하여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게다가 방금은 열명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그 제자들이 모두 방금 예수님이 다녀가셨다고 말을 하는데 어떻게 손의 못자국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창으로 찔린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하는가?

여기서 무엇을 생각하가? 철저하게 굳어져 버린 인생의 모습.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인생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걸 경계해야 한다. 정말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한다. 정말로 철저하게 깨져야 한다. 그 알량한 이성 경험 논리를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우리의 그 작은 모든 이성과 생각과 논리를 내려놓고 오직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름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진정한 믿음(26~29)

그러나 다행히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면서 점차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들은 주님 안에 있는 그 부활의 생명을 믿어 의심치 않고 사명을 감당하여 결국 복음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도 마찬가지다. 도마가 없을 때에 오셨던 부활의 주님께서 그 후 여드레가 지나서 이번에는 도마가 있는 자리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한다.(28절) 그때 주님이 다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절) 그렇다고 보고 믿는 자는 복이 없다는 말씀은 아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며 그러기에 그들이 더 복되다는 말씀이다.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보지 못하고 믿는 마음이야말로 순수한 마음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이다. 물론 보고 믿는 것만해도 다행은 다행이지만 그건 어쩌면 온전치 못한 믿음이다. 안 그런가? 부모가 자녀에게 약속을 했는데 손에 쥐어 주지 않으면 안 믿겠다고 하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러나 부모님이 약속을 했을 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는다면 얼마나 갓난아이와 같이 순전한 믿음인가?

그렇다. 우리는 이런 순수한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정말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가? 주님께 믿지 못할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 아니신가? 주님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지 않았는가? 당신께서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이런 주님을 믿어야 하고 믿었으면 믿고 따라가야 하지 않는가? 그럴 때 얼마나 생명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자신의 그 무지, 경험, 이성, 고집 이런 정말 별거 아닌 것들 다 내려놓고 진정으로 갓난 아기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4.성경의 기록목적(30,31절)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31절을 보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목적이 뭐냐? 예수님 믿게 하는 것, 그러면 왜 예수님 믿게 하려고 하느냐,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의 목적은 이것이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 믿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이며,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며,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는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한 구원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을 믿었으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그게 교회생활이다. 이거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고상한 무슨 소리를 해도 헛일이다. 교회는 철학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고, 무슨 봉사단체도 아니고, 개화기관도 아니다. 그런 것은 주변적인 것이다. 핵심은 언제나 믿음이다. 히11:6의 말씀을 보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므로 이 시간 더욱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셔 들이자. 정말 나 자신은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성이나 지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여 그 안에서 새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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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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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찬양예배설교
제목 : 산 소망

말씀 : 벧전1:3~5

 

1.예수님만이 우리의 완전한 산 소망이십니다.

어느 분이 ‘인생은 B로 시작하여 D로 끝난다. 그런데 중간에 C가 있어서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B는 birth 곧 출생입니다. D는 death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C가 있어서 소망이 있는데 여기서 C는 Choice ‘선택’, Change ‘변화’, Chance ‘기회’, Challenge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태어나서 결국 죽는다. 그러나 그렇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변화를 꾀하고 기회를 활용하고 도전하는 삶을 통하여 뭔가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가지 빠진 게 있지요. 그게 뭡니까? 진짜 C가 빠진 것입니다. 바로 Christ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선택을 하고, 바람직한 변화를 꾀하고, 기회를 잘 활용하고, 상황과 환경에 절망하지 않고 도전을 해서 좋은 결과를 창출해도 Christ가 없으면 말짱 꽝인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물론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삶도 분명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그런 것들을 통하여 뭔가 기쁨과 만족과 가치를 누리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물거품이 되잖아요. 그냥 물거품만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고통만이 남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8:24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물론 세상의 소망입니다.

물론 그것도 소망은 소망입니다. 사실 그런 소망도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하면 잘 될 것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가을에 풍성한 결실이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면 월급도 잘 나오고 인정도 받고 승진도 하게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장사를 하면 결국은 성공할 것이다. 등등 이런 소망도 소망이고 이런 소망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소망이 없으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이런 소망이 없으면 무슨 일할 의욕이 있겠습니까? 이런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야 일이 잘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진짜 영원한 완전한 소망은 못 된다는 뜻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세상의 소망은 영원할 수도 없고 전인격적인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 세상적으로 성공해도 그것이 영혼의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줄 수 없고 더구나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소망만 가지고 살면 영원한 고통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생복락을 주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진정한 소망과 기쁨과 위로와 행복을 영원토록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참된 생명과 기쁨과 평안을 온전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떻게 산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까?

2.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맨 마지막 부분에 보면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산소망이 뭡니까? 말 그대로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소망입니다. 진짜 생명을 주고, 영원한 생명을 주고, 참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소망입니다. 전인격을 살리고 전 인격에 기쁨과 은혜를 주는 소망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소망도 소망은 소망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유익하고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생명의 은총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산소망은 아닙니다. 우리 전인격을 살리지 못합니다. 전인격에 생명의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영원하지는 더더구나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죽은 소망입니다. 결국은 없어질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산 소망을 가져야 하는데 그 산 소망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그 산 소망을 알지도 못하고 얻을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끝내 세상의 죽은 소망 가운데 살다가 허무 속에 죽고 결국 둘째 사망 곧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하게 되는 말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어떤 상태입니까?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마귀사탄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영혼이 완전히 어두워져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영의 세계에 대해서 고작 안다는 것이 귀신이 어떻고, 죽은 영혼이 어떻고 떠들어 대거나 혹은 온갖 우상을 섬기고 나무에 빌고 온갖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나무를 깎거나 돌을 다듬어 섬기고 합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저는 새해가 되면 그 추운 날씨에 그 밀려 터지는 동해바다로 가서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해에게 비는 사람들,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태양은 가스덩어리입니다. 불타는 가스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어서 거기에다 빕니까? 그러면 나름대로는 다 잘났다고 하는데 이런 짓을 합니까?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그렇지요.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그렇지요.

그럼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사람이 만든 그 어떤 지식이나 문명이나 과학으로도 안됩니다. 과학 문명이 지금보다 천배 만배 더 발달하여 달과 화성에 관광지를 만들어 이웃 나라에 다녀오듯 왕래할 수 있는 시대가 와도 죄와 무지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귀사탄의 권세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면 전능자이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만이 죄와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3절 말씀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거듭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죄가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일단 죄를 죽였으면 이제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고 부활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안 그래요? 죄가 죽고 죄에서 용서되었어도 다시 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단 죽어야 하고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생명을 얻어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새생명을 얻은 자로서 영원한 산 소망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죽고 부활의 생명을 덧입어 산소망을 가진 자라는 것을 기억하며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정말 우리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우리 옛 자아를 십자가에 온전히 못박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인간의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고집도 벗어던지고 오직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산소망을 주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소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영원한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산 소망이신 또 다른 이유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즉 천국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세상의 아무리 좋고 대단한 것이라도 다 썩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들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업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기업은 단순히 영원하기만 한 기업이 아닙니다. 너무나 완벽하고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기업입니다. 그 어떤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괴로움도 근심도 걱정도 상처도 심지어는 죽음조차 없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오로지 100% 완전한 영광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사랑이 넘칠 뿐입니다. 내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 성은 황금성입니다. 온갖 보석들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에서는 다달이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거는 뭐 우리가 어떻게 말로는 다 표현할 없는 너무나 영광스럽고 아름다고 평화롭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입니다. 그곳이 우리의 기업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드려도 별로 실감을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한 천억짜리 복권이 당첨되어 내일모레 천억원을 탄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얼마나 흥분되고 마음이 설레겠습니까? 여러분, 이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돈도 사실 좋은 것입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으면 구제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아름답게 건축할 수 있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나라도 지킬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많은 것도 해 줄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잘못 사용해서 돈 때문에 하나님도 사람도 제대로 못 섬기고 돈 때문에 싸우고 헐뜯고 거짓을 행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휘둘러서 문제지 돈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좋다해도 천국만 하겠습니까? 전 우주의 모든 재산을 가진다해도 천국과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1/100. 1/10,000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영적으로 완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내일이 설날입니다. 설날이 되면 왜 좋습니까? 그건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도 하고 선물도 주고받으며 맛있는 음식도 나눠먹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나중에 어디서 누구를 만나 교제하며 사랑과 은혜를 나누게 됩니까? 주님입니다. 그리고 성화된 성도들입니다. 그것도 이 추하고 악하고 아픔과 고통과 미움과 걱정과 근심이 있는 세상이 아니라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기쁨과 은혜를 누린다고해도 거기에는 완전한 기쁨도 사랑도 평안도 위로도 없습니다. 만나기 전에는 설레고 또 만나면 좋긴 하지만 또 걱정 근심이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있고 그리고 곧 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만남과 교제와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벽합니다. 영원합니다.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완벽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평안과 위로만이 넘쳐날 뿐입니다. 그러니 이 부족하고 허물 많고 죄 많고 고통 많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것도 기쁘고 감사할 진대 하물며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만이 가득한 나라, 그 어떤 근심 걱정 아픔 슬픔 미움 시기 갈등 없는 나라,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날 때에야 그 기쁨과 행복과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설명절을 보내면서 오랜만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마음껏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나누면서 지금 여기서 주신 은혜와 사랑에도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되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나 인간적인 교제나 이런 것들이 온전한 기쁨와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은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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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말씀 : 벧전1:6-9

 

1.금보다 귀한 믿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 육신의 생명, 세상 부귀영화, 입신양명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만이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서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기 때문이다.

오늘 7절 말씀을 보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또 잠3:14절을 보라.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물론 금도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지위도 귀하다. 그러나 믿음이 더 귀하다. 당연하지 않나?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봐야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풀의 꽃과 같다. 그리고 그것만 따라가다가는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한다. 그러나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 기쁨, 평안, 은혜, 사랑, 자유를 준다.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하다. 영원히 온전히 완전한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얻은 우리는 정말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자. 무슨 일이 있어도 금보다 귀한 믿음을 지켜 나가자. 우리의 후대들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믿음의 유산을 남겨두자. 이 금보다 귀한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그래서 나도 귀하고 복되고 다른 사람도 귀하고 복되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믿음에는 시련이 있음.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무조건 만사형통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영광의 나라는 주어져 있지만 완전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갈 때 이루어진다. 지금도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긴 하지만 여기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모르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그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마귀사탄의 역사와 싸워야 한다. 마귀 사탄은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고 도전하고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한다. 이걸 분별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곡된 풍조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그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이런 많은 도전과 유혹과 시험이 있기에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려면 그런 것들에게 속거나 타협하거나 져서는 안 된다. 깨어 있어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물론 힘들고 어렵고 억울하고 손해보고 자신을 부인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모든 귀한 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냥 얻어진 귀한 귀하지 않다. 믿음과 믿음을 통한 구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고귀한 것이기에 너무나 고귀한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이다.

물론 구원은 대가없이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결코 거저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가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단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을 찾아야 한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그냥 제멋대로 살아가는데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또 믿음을 얻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그 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풍조에 맞서야 한다. 오직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가야 한다. 그러자니 어려움도 있다. 고난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죄와 무지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6절에서는 말씀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또 벧전4:12절에서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금보다 귀하다는 것, 거기에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 죄와 무지 속에서 사탄이 역사하는 세상에서 그래서 사람들이 왜곡되고 죄 되고 엉뚱한 길로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늘 깨어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모든 세력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3.믿음의 결과

그러면 왜 믿음이 금보다 귀한가? 왜 시험 중에도 기뻐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는 자에게만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8절을 보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즐거움 일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다. 어떤 이들은 천국에 가면 심심할거 같다고 말한다. 맨날 찬송이나 하고 예배나 드리고 일도 안하고 놀고 먹으니.... 거기는 농사를 지을 일도 없고, 취직하기 위하여 애쓸 일도 없다. 무슨 취미생활 할 일도 없다. 취미생활은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착각마라. 아무것도 안해도 그냥 마냥 즐겁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지 말라. 지금 아무것도 안하면 심심한 것은 우리의 심령의 상태가 온전치 못한 까닭이다. 우리가 영화의 몸을 입고 심령이 온전히 회복되면 심심이라는 단어는 없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런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즐겁다. 그냥 영광스럽다. 그냥 기쁘다. 그냥 사랑이 철철 넘쳐 흐른다. 영광스런 즐거움이 넘친다. 그러니 믿음이 금보다 천배만배 귀하다. 이게 바로 믿음의 결국이다. 오늘 9절을 보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즉 믿음의 결과는 영혼구원이고 영혼 구원을 받을 때에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영혼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주님을 모셔들일 때만이 영혼의 구원을 받고 영혼의 구원의 받을 때만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함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이로 인하여 정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소망과 기쁨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놀라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인들도 영혼 구원에 대한 감각이 둔하다. 어떤 이는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영혼 구원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자기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도 무덤덤하기도 하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하면 헛일이다.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영원히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하게 된다.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일이다. 그래서 믿음이 금보다 귀한 것이다. 이것이 교회에 다녀야할 목적이고, 이유이고,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에 전도가 참 어렵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잘 먹고 잘 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식과 문화와 물질문명과 과학의 발달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까 마치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정말 가소로운 일이다. 인간이 물질문명과 과학과 지식을 지금보다 천배 만배 더 발전시킨다해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고 한계 속에 있다. 죄와 무지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하고 올바른 길로 가지도 못하고 때론 알면서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우리가 알고 해결하고 누릴 수 있는 일보다 알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천배만배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이 왜곡된 흐름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도 세상의 그런 왜곡된 가치관에 휘말리고 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물질문명 속에 젖어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그래서 영혼의 풍성함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 깨어 기도하고 말씀묵상하며 무엇보다도 영성을 풍요롭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냥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귀히 여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지탄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러지 않아도 물질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 꼴난 지식과 과학을 믿고 하나님을 점점 더 멀리하고 있는데 교회마져 거기에 휩쓸려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 복음의 역사를 이루기가 정말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자. 그래서 먼저 내 영혼이 풍성해 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자.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자. 그리고 정말 죽어가는 저 영혼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자. 지금 우리가 사순절 전도를 하고 있는데 정말 이 일을 위해서 더욱 기도하자. 잘 안돼서 맥이 빠질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룩한 모습으로 본을 보이고 말씀을 증거 할 때에 분명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이 가장 중요한 명제를 잊지 말고 엎드려 기도하며 복음의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며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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