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Sunday evening Service
말씀 : 막8:22~26

제목 :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는 물질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산이나 바다나 땅이나 사람이나 기타의 모든 물질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은 지적, 정신적 눈을 가지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눈을 가지고 있기에 도덕적 가치를 분별하며, 철학적 사고를 하고,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술 활동을 하는가 하면 과학이나 수학 등의 지적인 활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정의는 물론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반드시 보아야 할 이러한 세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세가지 영역의 세계를 보되 바르게 그리고 밝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올바르고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벳새다 지방의 맹인을 고쳐주시는 과정에서 이 맹인에게 육적인 눈과 아울러 영적인 눈도 밝게 해 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벳새다의 맹인의 고쳐주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1.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그 방법이나 과정은 매우 다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도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들을 고쳐주신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먼저 오늘 23절에서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말씀에서는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셔서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마9:27~31절에서도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마가복음10:46~52에는 바디매오라는 맹인을 고쳐주셨는데 거기서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자 눈이 떠졌습니다. 즉 여기서는 오직 말씀으로만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9:1~7을 보면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자 그가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고 나서 어떤 행동을 요구하셨고 그 요구에 순종할 때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같은 맹인을 고쳐주시는데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사람이나 환경이나 물질이나 그 어떠한 것의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주권에 의하여 자유롭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고 때로는 무조건 고쳐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와 교만의 소치입니다. 주님은 결코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얽매어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주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다만 주님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간구하며 기대하며 주님께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방법을 취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23절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이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치유과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칫하면 회의 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신 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굳이 사람들이 없는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실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니 도리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서 고쳐 주시면 얼마나 주님의 인기가 높아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굳이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26절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지 병이나 고쳐주는 분인 줄 알고 병이나 고침받기 위하여 따라다니는 것을 우려해서 였을 것입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해도 주님께서 뭔가를 요구하시거나 뭔가를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무조건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장면은 주님께서 그를 데리고 나가서 그의 눈에 침을 뱉고 나서 안수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만약 누군가 우리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극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눈에 침을 뱉는 것은 전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아니 기왕 고쳐 줄 것이면 좀 고상한 방법으로 하시지 왜 하필이면 침을 뱉아 고쳐주시느냐고 불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 그랬지 않았습니까?(왕하5장)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갔을 때 무슨 대대적인 종교의식을 통하여 고쳐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선지자가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모멸감을 느끼며 제깐 놈이 뭔데 나와 보지도 않고 그 잘난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느냐, 그까짓 요단강에서 씻으려면 차라리 그보다 몇배 더 크고 아름다운 우리 아람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에서 씻겠다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맹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이 이성적으로 수용이 되든 안되든, 침을 바르든, 물을 바르든, 진흙을 바르든, 심지어 똥을 바르든 주님의 방법에 순응하고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순순히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내 의사와 내 이성의 생각과는 별개로 주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때 결국 주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3.주님을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침을 바르고 안수하신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을 던지자 맹인이 대답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8:24)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들이었기 때문에 나무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무가 많이 서있는 것을 보고 사람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해서 마치 나무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시 안수를 하시자 그가 말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8:25)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안수를 두 번 하신 것입니다. 23절에서 안수하고 25절에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안수로 병을 못고치시나요? 아니 안수하지 않으면 못고치나요? 아니죠. 말씀만으로도 고치시죠. 그런데 왜 굳이 침을 뱉고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하셨을까요? 일단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어떻게 하시든지 순종하라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이 맹인이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시 안수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수는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또는 영력이 주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안수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믿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수를 두 번하셨다는 것은 물론 안수를 받는 자의 태도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안수를 하셨는데 그러자 이 사람이 주목하여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처음에는 주목하여 보지 않아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눈이 안떠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하니까 주목하여 보게 되었고 그러자 온전히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여 보았다는 문자적인 뜻은 ‘~을 통하여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역을 해서 주목하여 즉 열중하여 보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원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확신하는 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하려 세상을 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보였고 세상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보기 위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심으로 주님과 천국과 세상을 밝게 바르게 볼 수 있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바르게 보입니다. 목적과 방향과 목표가 확실히 보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물질계를 보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면 그 모든 것이 바르게 정확하게 확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정말 올바르고 정확한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은 오직 주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면서 모든 어둠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벳새다 맹인은 고쳐주시는 과정을 다시한번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실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엎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역사하시든 그대로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경제를 보고, 정치를 보고, 소망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밝고 바르고 정확한 눈으로 모든 물질계를 보고, 지적이고도 정신적인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르게 확실하게 보면서 살아가실 때에 더욱 온전한 생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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