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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믿음을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2)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균형과 조화를 방해하는 큰 장애들 중의 하나는 도덕주의이다.
도덕주의는 자신의 방법과 노력으로 성숙함에 이르려는 시도이다.
도덕주의자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자신을 채찍질하여 행동을 개선하면 자신들이 실제로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진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각난
삶을 통합하여 영적인 온전함을 하나님 앞에서 이룰 수 없고, 하나님만 이것을 하실 수 있다.

기독교 교사는 “영적 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이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창조적 행위이다.
그것은 목수가 하는 일보다는 예술가가 하는 일에 가깝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 나는 신령한 생활을 망치로 두드려서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창조적인 일을 하시도록 기꺼이 내맡겨야 한다.
그러면 그분은 내 안에서 새 일을 이루실 것이다.

신령한 생활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은 ‘초연함’을 강조한다.
성숙한 신앙인은 초연한 태도를 배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신앙을 자기의 힘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초연함을 유지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두운 밤이 찾아와도, 당황스러운 일에 처해도,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어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부정적인 것들까지 이용하셔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영적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만일 내가 책임을 지고 있다면
나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표적을 구할 것이며, 또한 내게 필요한 만큼의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초조하게 나의 신앙의 양을 측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계시다면 나는 편히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이때의 안식은 무감각이나 게으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안식에는 에너지가 넘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양을 재지 말라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우리에게 신앙이 얼마나 더 필요한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를 논할 때 실상 우리는 ‘신앙’이 아니라 ‘감정’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신앙을 감정으로 착각하면, 우리는 신앙의 양을 측정한다고 하면서 실상 감정의 양을 측정하게 된다.
신앙은 감정이 아니다. 신앙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다.
사실 종종 신앙은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관계가 있지,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내가 신앙의 양을 재기 시작하면 나는 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항상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된다.
반면, 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쏟고 주의를 기울이면,
그분이 하시는 일이 더 많이 눈에 보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 3:34)고 말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는 데 인색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성령을 주시되 너무나 풍성하게 부어주신다.
그러나 자기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고 측정하는 사람은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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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을 방해하는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 같은 모순된 증거
● 믿음을 산산조각 내는 인생의 경험
● 신앙의 생명을 마르게 하는 어떤 행동 또는 게으름 

이 세 가지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묘사되어 있다(마 13:3-9).
여기서 ‘씨’는 믿음의 근원이 되는(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신앙을 방해하는 세 가지 씨앗
첫 번째 씨는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 종종 어른들이 그들의 관심을 비웃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사라져버린다.
복음을 처음 접한 어떤 어른들은 복음을 정당화해줄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들에게서도 믿음의 뿌리는 내리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한 사람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보고 실망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순된 현상을 보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고 참된 것이라면
그들은 왜 자기들의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 신앙을 부정한다. 

두 번째 씨는 흙이 얇은 땅에 떨어져서 즉시 싹이 나오지만, 해가 뜬 후에 타버려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린다.

1959년 여름, 고등학생으로서 청소년 수련회에 참석한 나는 나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에 9살짜리 남동생 단(Don)이 자전거를 타다가 시멘트 트럭에 치여 숨졌다. 
나의 연약한 신앙은 시험을 받았다. 나는 많은 질문들에 시달렸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단처럼 착한 아이에게 일어났는가?
그 시멘트 트럭이 단을 향해 돌진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나의 신앙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나의 영혼의 눈은 내 신앙의 뿌리를 찾아 땅속 깊은 곳을 보았다.
그것은 연약한 모습으로 떨고 있었으나, 그것보다 더 큰 뿌리인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물과 영양분이 없으면 식물은 죽는다. 새로운 식물은 정원에서든 온실에서든 자상한 관리를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필요한 요소는 동일한 마음을 가진 신자들과의 교제, 성경공부,
그리고 정기적인 기도 시간이다. 이런 요소가 없으면 성장이 불가능하다.

세 번째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기 때문에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아버린다.
말씀의 씨를 파괴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가시떨기들은 많다.
말씀의 씨는 명예, 지위, 돈, 성공 또는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파괴되거나 죽을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거나 소멸할 때 무력해질 수 있다(엡 4:29-32 ; 살전 5:19).


열매 맺는 씨앗
신앙을 방해하는 것들은 많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도록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결코 방해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부정적인 것들을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도 있다.  

●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을 오히려 연구의 계기로 삼아 신앙에 대해 더욱 정확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다.
● 인생의 극심한 고난과 시험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다.
● 우리의 자세와 행동을 살펴서 신앙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

신앙은 의심, 문제,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신실하심이 증명된 분께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따르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고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신다(시 34:8 ; 말 3:10).
의자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그분이 준비하신 선물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모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그분은 그것을 다 처리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따른다면, 우리는 신앙의 방해 요소들을 극복하고
네 번째 씨앗, 즉 “좋은 땅에 떨어져서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맺는 씨앗”(마 13:8)
처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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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상담] 조상 제사를 금하는 이유가 뭔가요?


조상 제사를 금하는 이유가 뭔가요?   
 

한국 교회의 복음전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조상제사문제이다. 지금도 특히 시골 지역에서는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제사 때문에 곤란하다.」 「나는 장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며 교회에 대해서 관심은 있으나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이 문제는 한국교회의 고민거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사는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우상이나 귀신 숭배적 요소를 명백히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조상제사에 대하여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1.조상제사의 유래

조상제사 문제를 말할 때 우리는 유교와 제사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대하여 우리 고유의 종교와 문화가 있는데 왜 남의 나라 종교를 믿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 술 더 떠서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서양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어불성설이다. 사실은 기독교가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교가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에 당나라의 학제인 국학을 받아들인 것이 그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유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교가 본격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제25대왕인  충렬왕 때 안향이 중국에서 주자전서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을 건립함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통하여 유교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러니까 유교는 우리 고유의 종교가 아니라 증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에서 토착화되어 발전한 종교인 것이다.

또 제사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에 조상을 극진히 섬기는 고유의 제사가 있는데 왜 서양식으로 하느냐고 말을 하지만 사실 제사도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중국의 문헌에 보면 중국의 공자 이전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는데 이때는 부모에게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고 황제에게만 제사를 지냈다. 그러니까 어떤 유명한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추모 제사를 지낸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일반인들도 자기 조상들이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자기 조상을 위대한 영웅으로 만듦으로써 결국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사제도는 점점 성행하게 되어 평민까지도 제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처음에는 특별한 왕에게만 제사를 지내다가 고려말부터 유명한 사람들의 사당을 짓기 시작하여 위패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태조가 조상 제사를 장려하게 되어 일반화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가 조상제사를 장려한 것도 사실은 조상을 숭배하고 복을 빌려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 정치적으로 백성을 교육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평민들은 별 관심이 없었으나 점차 조상제사가 자신의 신분과 관련지어 짐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교나 제사는 본래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며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특별히 제사는 처음에는 한편으로는 조상을 추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가문을 과시하기 위하여 드리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조상을 마치 신처럼 모시며 제사를 잘 드려야 조상이 복을 준다는 사상까지 곁들여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2.기독교에서 조상제사를 금하는 이유

1)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제사는 명백히 조상숭배적인 요소가 있다. 조상의 영혼을 신격화하여 죽은 조상을 잘 받들어 모셔야 조상이 기분이 좋아서 후손들을 축복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상제사를 모시지 않으면 죽은 조상의 혼이 노하여 화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죽은 조상의 혼을 섬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나위없이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드리고 섬기라(출20:3-5)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제사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2)사후의 영혼은 세상 사람들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으면 흙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창3:19) 또 전12:7에서는 육신은 흙으로 되었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더구나 그렇게 한번 각각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면 그 이후로는 절대로 이 세상과는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즉 세상을 떠돌 수도 없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다.

한 부자가 있었고 나사로라하는 거지가 있었다. 이 사람은 부자집에서 나오는 음식찌꺼기를 먹고 살았다. 어느날 모두 죽어서 부자는 음부로 가고 거지 나사로는 낙원으로 갔다. 부자가 음부에서 뜨거워 고통을 받다가 낙원을 보니까 거기는 얼마나 시원하고 아름다운지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애원을 한다. 나를 거기로 보내주지 못한다면 제발 물한방울이라도 손에 찍어서 내 혀를 좀 서늘하게 해달라고....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한다. 너희와 우리 사이는 큰 구렁이 있어 오고갈 수 없노라고... 그러자 부자가 말한다. 그럼 제발 살아있는데 내 형제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해주어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듣게하라고....

그러자 부자가 다시 요청한다. 죽은 자가 그곳에 가서 전하면 저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서 가서 이러한 상황들을 전해준다고 해도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또 시49:17-19에서는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잠21:16에서는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사람은 죽으면 흙에서 온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혼은 하나님께로 간다. 그리고 한번 이 세상을 떠나가면 이 세상과는 완전한 결별이다. 어떤 형태로든 교통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꿈에 죽은 조상이 와서 무슨 말을 하였고, 어떻게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들을 하는데 다 허무한 이야기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고, 설령 조상이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그대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상이 와서 말한 것이 아니라 마귀가 말했거나 아니면 다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꿈에 의하여 혹은 일이 그렇게 되려고 하니까 그렇게 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대하게 제사를 드려도 조상이 그것을 결코 받을 수 없으니 우리는 헛된 제사를 드릴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조상을 섬기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3)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은 묘자리를 잘써야 복을 받는다고 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다. 묘자리는 그냥 보기 좋은 곳에 쓰면 된다. 너무 험하고 너무 질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외관상 보기에 너무 민망하지 않는 곳에 쓰면 되는 것이다. 땅은 암만 파봐야 땅이다. 거기에 무슨 정기가 있다거나 거기에 무슨 화나 복의 기운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무기물에 불과한 것이다. 흙은 흙이요, 물인 물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택일을 잘해야 한다고 한다. 이름도 무슨 획수를 따져가며 이름을 잘지어야 복된 사람이 된다고 한다. 모두가 어리석은 미신에 불과하다. 날짜는 그냥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연의 질서대로 지나가는 것이다. 시간은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생기는 것이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부여하신 자연의 질서대로 유지되고 발전되어가는 것이 땅이요, 시간이다. 그 자체가 무슨 능력이 있다거나 서기(瑞氣)가 있다거나 액운이 있다거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름은 부르기 좋고 기왕이면 아름답게 좋은 의미를 갖게 지으면 되는 것이다. 이름을 잘지어야 복을 받는다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글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의사소통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지가 만들어 놓고 거기에 얽매어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을 섬기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었으면 자기보다 못한 존재인가, 나은 존재인가? 물론 못한 존재지. 그런데 서로 통하기 위하여 글자를 만들어 놓은 것데 그걸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하니 이런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가?

또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조상제사를 잘 모셔야 후손이 잘된다고 한다. 정성껏 제사를 잘 모시면 죽은 조상의 혼백이 돌아와서 마음이 흐뭇해서 후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상을 홀대하면 죽은 조상이 왔다가 노가 발동하여 후손들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죽은 조상은 이 땅위에 올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정해준 그 장소를 결코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 자리에 머물면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려야하는 것이다.
설령 만에 하나 올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능력도 없고 권한도 없다. 더구나 지금은 갇혀 있는 상태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제사는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올 수도 없는 조상의 혼에게 무엇인가를 차려 준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할수 없는 조상에게 복을 빈다는 것도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므로 우리는 제사에 찬성할수 없는 것이다.

3.그리스도인의 대응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조상제사 문제는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요소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 목적도 지극히 미신적이고 성경의 말씀과 합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두가지 방법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살아생전에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현실적인 종교, 생명의 종교다. 물론 옛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옛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옛것은 벗어버리고 새것을 찾는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그러나 유교는 다분히 무덤의 종교이며, 과거 지향적인 종교이다. 과거에 집착한다. 옛것을 고집한다. 그래서 무덤에 신경을 쓴다. 제사에 관심을 갖는다. 옛것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식하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실이고 미래이다. 물론 과거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에 적용시켜야 할 것은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중시해야 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온갖 격식과 예를 다 갖추어 경배한다해도 사실은 아무 소용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것이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그럴듯하게 해야 양반인 것 같아서, 혹은 부모님의 묘를 크게하고 제사를 거창하게 드려야 무슨 대단한 집안처럼 여겨지므로...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실상은 겉치레요,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 여기서 그리고 현생에서의 미래와 영원한 미래에 얼마나 생명의 은총을 누리느냐하는 것이다. 얼마나 사랑과 은혜를 나눌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부모님에게도 그렇다. 정말 부모님께 효도하려면 살아생전에 잘해 드려야 한다. 살아생전에 효도해야 한다. 돌아가신 뒤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중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계명중에서 첫 번째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리 제사를 거창하게 드리고 묘를 어마어마하게 단장해 놓아도 살아생전에 효도하지 않으면 다 헛일이다.

또한 아무리 거창하게 제사를 잘드리고 제사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도 살아생전에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그리스도인을 보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추도예배를 드리며 부모님의 뜻을 기린다.

물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우리는 추도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사실 추도예배는 한국교회만 있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는 죽은 사람을 추도하라거나 죽은 자에게 예를 갖추라고 한 곳이 없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도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아무리 위대한 성웅이었다고 해도 결코 추도예배를 한 일이 없다.

즉 성경에서 추도예배를 언급한 사실도 없고, 죽은 사람에게 예를 갖추라고 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은 자와 관련되어서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더구나 산사람과 죽은 사람과는 더 이상 만날 수도 없고 다른 방법으로 교통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추도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제사를 기독교식으로 토착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한국교회가 제사문제로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게 되자 추도예배라는 이름으로 제사를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추도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상의 뜻을 기리며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함과 동시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조상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사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나마 교회에 나올 수 있는 돌파구를 만들어주고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고 제사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상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덜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추도예배는 사실 성경적인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덕을 위하여,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사회와 문화상황속에서 만들어진 기독교문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교나 조상제사가 우리 고유의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젓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은 그것이 아님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하겠고, 조상제사의 부당함에 대해서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것, 사후 인간의 영혼은 세상이나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만날 수도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교통할 수도 없다는 것,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제사를 배격해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야 하겠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불신자보다 살아생전에 더 부모님께 효도함으로써 그들에게 비난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비록 성경적인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덕을 위하여,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추도예배를 정성껏 드림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름답고 덕스러운 모습도 함께 보여줌으로 조상제사문제로 유발되는 모든 문제들을 신앙과 지혜로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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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 교회 일에 육아까지… 사모 역할 너무 힘들어요


사모와 엄마의 역할 절묘한 균형 필요… 교회 일은 위임 통한 수위조절 바람직

 

[Q] : 저는 지방교회의 목회자 아내입니다. 교회 형편상 교인들의 경조사며 심방에 동행을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과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남매를 둔 엄마이기도 합니다. 이일저일 겹쳐 벅차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저의 내조를 바라보는 교인들의 시선도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A] : 목회자 아내의 설자리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뒤로 물러서 있으면 무능하다고 수군대고 이일저일 손대고 참여하다보면 설치며 나선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거기에다 가사 자녀교육 남편내조에 쫓기다보면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어 탈진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목회는 목회자 몫입니다만, 사모의 내조 없이 목회가 성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보람과 아픔,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게 목회여서 이런 상황을 내조자도 함께 겪게 됩니다.


몇 가지 조언을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가정목회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큰 틀에서 보면 교회도 가정이지만,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두 자녀 모두 한 가정의 구성원들입니다.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일궈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두 자녀 양육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사랑과 배려, 관심과 돌봄에 금이 가지 않게 하십시오. 건물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둘째 균형을 잃지 마십시오. 사모 아내 엄마의 자리를 지키는 데 절묘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어느 역할도 소홀히 할 수 없기에 균형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한 가지만 강조하다 보면 문제가 터집니다. 교인들이 볼 때 모든 일에 다 관여하거나 반대로 무관심하거나 하는 양극의 평가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모의 목회참여는 본인의 체질 탓일 수도 있고 교회 상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체질이나 성격 탓이라면 조정
하는 것이 좋고, 상황 때문이라면 완급과 수위를 조절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셋째 양육과 위임을 시도하십시오. ‘내가 안하면 안 된다’ ‘내가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더 버거운 상황만 만들게 됩니다. 내조나 자녀교육은 사모의 당연한 몫이지만 목사님을 돕고 사람을 양육하는 일은 위임하는 게 좋습니다. 사람을 훈련하고 양육하는 일이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란 사람을 찾고 키우는 사역입니다. 내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키운다는 기본은 꼭 지켜야 합니다.


교인들의 엇갈린 시선은 어디나 있습니다. 사모가 어떤 철학과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게 될 것입니다.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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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작은 교회 목사님인 부친이 지치고 힘들어 하십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탈진했을 때 숲으로 도망쳐… 하나님 앞 올바른 성공 찾도록 위로·격려를

 

[Q] : 저희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요즘 많이 지치고 힘들어 하십니다. ‘그만두고 싶다. 어디로 떠나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저도 마음이 괴롭고 아픕니다.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요.

 

[A] : 저도 35년 섬기던 교회 목회를 내려놓았습니다만 ‘힘들다’ ‘어렵다’ ‘그만두고 싶다’ ‘다른 길은 없을까’라며 절망의 늪을 헤맬 때가 있었습니다.
 

사육사들은 사자 호랑이 돌고래 물개 원숭이를 훈련하는 것은 일정한 공식과 절차를 따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의 최종 목표는 그 사람이 예수 닮은 사람이 되게 하고 교회공동체가 예수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젊음을 바치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때 오는 허탈과 좌절은 심각합니다. 흔히 성공목회를 예산, 모이는 수, 건물 크기로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눈 여겨 봐야 합니다. 예수 닮은 교회가 되고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 자신도 예수 닮은 목사가 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사람은 저마다 비교하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크고 많은 것이 성공이라는 가치관에 익숙하다보면 작은 교회, 개척교회, 성장 못하는 교회 목회자는 주눅이 들고 죄인 된 심정이 됩니다. 패배자라는 자괴감으로 통증이 오기 시작합니다. 저의 경우는 ‘대형교회 목회가 아니어도 좋다. 최선을 다하자’ ‘최선의 결과는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기자’ ‘목회 평가는 그날 주님 앞에서 받자’ ‘대형 신드롬에서 벗어나자’라며 저 자신을 타이르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자. 한발짝도 좋다 앞을 향해 걷자. 걷기 힘들면 기어서라도 가자’라며 자신을 담금질 했습니다.


포기도 선택입니다. 내가 포기를 선택하고 나면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포기하면 도울 이가 없습니다. 목회자의 주변을 둘러보면 교인만 있고 친구는 없습니다. 도움을 줘야 할 사람만 있고 도움을 청할 사람은 없습니다. 위로해 줘야 할 사람만 있고 위로를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소중합니다. 함께 고민하고 아파해줄 사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줄 사람은 가족이어야 합니다.


목사의 탈진은 그 어떤 질병보다 무섭습니다. 불의 사자였던 엘리야 선지자도 탈진에 빠졌을 때 깊은 숲속으로 도망쳤고 하나님을 향해 죽기를 한탄하는 약자로 전락했습니다. 최정상에 오른 성공자에겐 추락의 가능성이 있고 절망적 실패자에겐 재기와 상향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습니다. 성공도 잘못다루면 실패가 되고 실패도 잘 다루면 성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아버지에게 꼭 전하십시오. 위로하고 격려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성공이 어떤 것인가를 진지하게 나누십시오. 다시 시작한다면 주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박종순 원로목사 (충신교회)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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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부활이 과학적으로 믿기지 않습니다


신앙은 과학과 달리 먼저 믿어야 하는 것… 성경적 증거들이 있고 믿으면 보이는 것

 

[Q] : 교회 다닌지 6년 된 서리집사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탄생이나 십자가 죽음은 믿지만 부활은 과학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인지요.
 


[A] : 부활을 믿기 어려운 것은 상식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병 걸려 죽을 뻔 했던 사람이 살아났다든지, 가사 상태에 있던 사람이 회생했다면 믿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도 믿을 수 없다고 했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사설, 유기설, 환상설 등이 회자된 것도 불신에서 연유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신앙과 과학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은 연구, 실험, 검증, 논증을 통해 얻은 결과를 믿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적 접근이나 물증 이전에 먼저 믿어야 하는 세계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했습니다. 믿으면 보이는 세계, 믿으면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덮어놓고 믿어야 하는 막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성경적 증거들이 있습니다. 시편을 보면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주경가들은 예수님의 부활 예언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부활을 예고했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17:22∼23) 수차례 반복해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생명 바쳐 부활을 증거했고 박해자였던 사울도 회심 후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초대교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를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순교의 잔을 마시며 부활을 증거했고 오늘도 전 세계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74억명 세계 인구 중 기독교인 인구가 24억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국도 5분의 1이 기독교인으로 집계됐습니다. 기독교가 허상을 전하고 가상진리를 선포한다면 믿고 따를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영생을 믿습니다. 죽어도 살아도 이 진리를 믿습니다.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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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 교회 팀장이 팀원 헌금을 개인적으로 선교에 씁니다

 

선한 목적도 방법이 정당하지 못하면 문제, 교회 안 모임은 교회의 지도·보호 받아야

 

[Q] : 제가 다니는 교회에 중보기도팀이 있습니다. 그 팀을 이끄는 팀장이 기도팀원들로부터 헌금을 받아 교회재정을 거치지 않고 선교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일로 교회 안에 말썽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A] : 교회 밖의 운동이 있고 교회 안의 운동이 있습니다. 성경공부 기도모임 선교모임 등 교회 밖의 건전한 운동이나 모임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행하는 모든 모임들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옳은가, 성경적인가, 윤리적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유익한가, 누구를 위한 일인가 등이 검증돼야 합니다. 개인의 목적달성을 위한 모임이 되면 본질이 희석되고 모양이 달라집니다.


교회 안의 모든 운동이나 모임은 교회의 지도와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 밖 모임이더라도 큰 틀에서 한국교회 울타리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교회를 흔들고 공격하고 파괴하려는 운동이나 기구라면 교회운동이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기도중보팀이라면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하고 교회의 방향과 목적을 달리하면 안 됩니다. 일정한 목적을 위해 모은 헌금이라면 교회의 지도를 따라 사용돼야 합니다. 팀장 개인의 의사결정에 의해 헌금이 사용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해도 절차와 방법이 정당하지 못하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바로 벌고 바로 모으고 바로 쓰는 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바로’가 지켜져야 합니다.


교인은 교회가 주력하는 일에 동참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중보기도팀이 자생적 모임이라해도 팀원들의 중지를 모아 가장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을 위해 선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독단은 문제의 불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조직이 있습니다. 모든 조직이나 기구는 교회를 지키고 세우기 위해 만든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기구들 중에 하나라도 교회가 정한 목표와 다른 길을 간다든지 엇박자가 일어난다면 본래 의도를 이탈한 기구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정당한 절차를 거친 의결을 수용하지 않고 “나는 반대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반대”라며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 든다면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성경의 권위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는 것, 민주적 결정을 최후의 일각까지 반대하려는 것,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모임은 교회를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가 돼야 합니다. 내가 드러나고 높아지면 주님은 낮아지고 교회는 균열이 일어납니다. 주인이 되고 어른이 되려는 생각을 버립시다. 교회를 지키고 세웁시다. 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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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목사님 말에 무조건 순종… 맞는 말인가요?

 

순종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덕목이나 주님의 뜻 아닐 땐 거부하고 항거해야

 

[Q] : 개척교회를 섬기는 평신도입니다. 목사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다. 무조건 순종해라. 불순종하면 사단에게 사로잡혀 불행해지고 결국 지옥에 가게 된다는 설교는 맞는 것인지요? 등록했던 교인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교회를 떠납니다.
 

[A] : 순종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순종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따르다”입니다.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행위가 순종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순종 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이유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든 사람의 말에 신적 가치를 두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잘못입니다. 선과 악, 의와 불의, 정당성과 부당성 등을 따져서 행동해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폭력을 교사하고 도둑질을 강요한다면 절대로 순종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로 시작된 순종명령은 동시에 불순종의 결말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보여줍니다(신 28:20∼68).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의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은 하나님의 명령인가 아닌가로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6장 1절에서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주안에서”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결정은 “주안에서”가 되어야 합니다. 주안에서란 ‘주님의 뜻인가’ ‘주님의 말씀에 맞는가’를 생각하고 검토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닐 땐 거부하고 항거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말을 들으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지옥불에 들어간다.”

이 말씀은 협 박성 표현입니다. 건강한 교회, 건전한 목회자라면 그런 표현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신명기 교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각을 세우면 온갖 실패와 저주가 임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따르는 것은 선별이 필요합니다. 이단사이비 집단의 경우 목적달성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겁을 주고 속박합니다.


물론 사람의 말이라고 무조건 다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교인이 교회의 정당한 결정이나 설교를 사람의 말이라며 부정하고 반대의 깃발을 든다면 건강한 신앙의 성립이 어렵게 됩니다. 결코 반대를 위한 반대가 체질화 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성경대로 따르십시오.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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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교회 일 하다 편입 실패… 신학교로 바꿀까 고민

 

더 큰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주의 일… 편입 성공해 많은 것 담는 큰 그릇 되길


[Q] : 제가 출석하는 교회 청년부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4개월 정도 공연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대학 편입시험을 앞두고 있었지만 주의 일이 우선이다 싶어 준비에 매달려 공부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 결과 성적은 떨어지고 편입에 실패했습니다. 기도 중 신학교에 가라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고민이 크고 갈등이 심합니다.
 

[A] : 주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리고 선교 공연에 참여하고 헌신한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연 준비 때문에 편입시험에 실패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신학교 진학의 경우도 대학 진학에 실패했기 때문에 고려한다면 그것도 잘못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아버지 덕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선생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했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부르시고 선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에 비해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정통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 절반에 가까운 책을 썼고 네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기독교의 유일성을 변증했습니다. 준비된 사도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학문이나 신분이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준비가 미비한 사람과 준비가 철저한 사람은 사역의 중량이 다릅니다.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십시오. 그렇다고 대학도 포기하고 직장도 포기하고 가정도 포기하고 사회생활도 포기한 채 주의 일을 하겠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신학교 재학 중인 사람이 어느 날 신학교를 그만두고 모 선교단체에서 주의 일을 하겠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에게 “신학교 수업도 주의 일이다. 신학 수업을 계속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탈북 후 신학교를 다니던 사람이 저를 찾아와 북한으로 들어가 순교하겠다고 했을 때 “순교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착실하게 공부하고 목사가 되라. 그리고 때가 되면 북한교회를 재건하고 섬기라”고 타일렀습니다.


세상만사에 때가 있습니다. 더 큰일을 위해 준비하고 자아를 개발하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상 일반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진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입학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대학에 편입하십시오. 철저하게 준비하십시오. 마음의 준비, 신학 준비, 기도 준비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작은 그릇은 작은 양을 담고 큰 그릇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신학을 탈출구로 삼지 말고 사역의 출발점이 되게 하십시오.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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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성찬식 후 남은 떡과 포도주 가져가도 되나요?


성찬물은 간식이나 식사 아닌 성물… 목회자가 경건한 절차 거쳐 처리해야

 

[Q] : 지역교회 장로입니다. 성찬식 후 남은 떡과 포도주를 일부 교인들이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래도 되는지요.

 
[A] : 기독교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 예식을 성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은 증거로 받는 예식이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리는 예식입니다.
 

성찬예식은 제자들이 제정한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가진 만찬기사는 마태복음 26장 17∼30절, 마가복음 14장 12∼26절, 누가복음 22장 7∼23절, 요한복음 13장 21∼30절 등 사복음서와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성찬을 이해하는데 천주교는 화체설을 취하고 기독교는 기념설을 취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이기 때문에 준비부터 경건해야 합니다. 교회마다 성찬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준비를 위해 모이면 먼저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릇을 닦고 떡과 포도즙을 준비하는 것도 조용히 해야 합니다. 동네잔치 준비처럼 떠들고 잡담을 주고받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만찬준비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예식 진행도 뜻 깊고 경건해야 합니다. 연례행사여도 안 되고 타성에 빠지거나 무의미한 진행이 되면 안 됩니다. 집례자나 참여자 모두가 거룩함을 회복하고 성찬예식에 임해야 합니다.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은 교회의 상황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한사람씩 앞으로 나와 떡과 잔을 받을 수도 있고 회중석에서 일어나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정해진 예배 시간 안에 예배와 성찬을 겸하게 될 경우라면 프로그램 진행이 진부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떡은 설탕이나 누룩을 넣지 않고 직접 제작할 수도 있고 떡이나 빵으로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포도주는 알코올 성분이 없는 것이나 포도즙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민감한 사람들은 얼굴이 붉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성찬 참여인원을 파악하고 모자라거나 남지 않도록 떡과 포도즙의 양을 조절해야 합니다. 일상적 식사가 아니기 때문에 떡이나 잔은 크지 않아도 됩니다.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으라(고전 11:34)고 했습니다.


남은 떡과 포도즙은 아이들 준다며 집으로 가져가는 것은 삼가는 게 좋습니다. 성찬을 위해 준비한 떡과 포도즙은 간식이나 식사대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은 성찬물은 목사와 교역자가 처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 성찬물은 처리도 경건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물이기 때문입니다.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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