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십자가와 부활로 변화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변화된다는 것은,
해방되고 치유되고 용서받는 것, 더 나아가 그 이상 받는 것을 의미한다.

피트(Pete)를 만난 것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늦은 11월 저녁이었다.
샌디에고에 있는 주립대학교에서 강연을 막 마쳤을때, 그가 내게 다가왔다.

힘든 하루였던지라 나는 무척 지쳐있었다.
나는 그에게 관심을 그다지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망가진 상태였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의 말을 다 옮겨 적을 수는 없지만 대충 다음과 같다.

그는 마약중독자였다. 빠져나올 가망 없이 완전히 덫에 걸린 상태였고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인생을 주무르고 그의 의지를 마음대로 뒤흔드는 것과 같았다.

희망은 사라지고 살고자 하는 욕구도 시들해버렸다.
마약을 사기 위해 이미 도둑질도 여러 번 저지른 상태였다.
때로는 그가 사는 목적이 되다시피한 마약만 구할 수 있다면,
사람도 죽이겠다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모든 희망과 두려움은 온통 마약뿐이었다.

그는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중독상태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완전히 중독되었다.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의지는 꺾였다. 마약을 알기 전의 순수했던 시절을 가슴 아프게 그리워하곤 했다.
너무나 먼 옛날 같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미래가 눈앞에 있었다.
매일 동이 텄지만 그에게는 버림받고 희망도 없는 어두움 뿐이었다.

나는 이 사람과의 대화를 두가지 이유에서 기억한다.
우선 그가 마약중독자의 암울한 생활이 어떤지 자세하고 길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너무나 구체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마치 내가 그가 되어서
절망과 암흑을 체험한 것 같았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힘에 눌리고 지배당하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졌다.
잠시나마 나는 희망을 잃고 버림받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경험했다. 너무나 무서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이유는 마지막 결론 때문이다. 자신의 상황을 너무나 생생히 묘사하고 나서
피트는 "끔찍하게 들리지요?" 라고 말했다. 나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자유롭습니다. 마약을 끊었어요. 어떻게 끊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으시죠?"

그런 다음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말했다.
그는 회심(回心)하면서 해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를 마약중독으로 몰고 가던 힘이 약화되고 치유되었다.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구름이 걷혔다.

"대신에 예수님의 고리에 걸린 것 같아요. 이것이 얼마나 근사한지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헤어지면서 내게 던진 마지막 말이었다.

모든 사람이 마약중독자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도
피트의 이야기와 같은 무언가를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 이상의 덫에 갇혀 있다. 피트는 백색 가루에 중독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는 덜 심각한 중독을 갖고 있는 것이다.
피트의 경우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일 뿐이다.

피트의 이야기는 회복의 두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즉 해방과 치유이다. 그는 중독에서 해방되어 치유되었다.
두 이미지가 겹친다. 서로 연결되고 통한다.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교만과 긍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 (1)

 

‘프라이드’(pride)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겸손과 반대되는 교만이고, 다른 하나는 수치와 반대되는 긍지이다.

교만은 우리의 성공에서 하나님과 다른 환경들을 배제시켜 버린다.
교만은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던 간에 자신의 힘으로 성취했다고 주장한다.
교만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이기심이며, 성경은 이것을 정죄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자아를 적대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아는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것이다. 교만은 항상 무대 중앙에 서고 싶어하며,
모든 공로를 혼자 차지하며, 하나님을 빼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으며,
독불장군식의 이기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과 반대된다. 

요한일서 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이다.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활동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는 인간은 그 누구도 고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긍지는 일을 잘 처리하며,
탁월하며, 최고를 위해 노력하며, 평범함을 초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러한 긍지는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주인께 드리려 한다. 
교만과 긍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해서도 잘못된 인상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기독교는 탁월함을 반대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탁월하며 성취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탁월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대할 뿐이다. 
이기적인 교만은 감사와 반대된다.
교만은 건강한 몸, 건강한 마음, 좋은 부모, 좋은 나라, 좋은 식사, 그 외 사람들의 통제 밖에 있는 수많은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전혀 감사하지 않는다.
이기적인 교만으로 가득한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만은 근시안적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가면 인간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잠 16:18).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교만을 벗겨내신 후에야 자신이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분의 힘을 구하게 된다.
긍지는 감사할 대상에게 감사하다고 표현하며 공로를 합당한 데 돌릴 수 있다.
긍지는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잘한 일을 인정할 수 있다.
칭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오만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능란한 손가락이 어디서 왔으며
누가 자신의 마음과 리듬감을 주었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독립적이며 자기중심적이지 말라고 독려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탁월함과 성취를 추구하라고 독려해야 한다.
큰일을 이룰 수 있는 재능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성공이 얼마나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지를
항상 인식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놀랍고도 과분한 은혜로 인해 항상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일을 통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해야 한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성당에서 걸어나오면서 자신이 정말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고
긍지를 느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당의 천장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하나님께로 이끌린다.
사람들은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예술은 위대하다.
그러나 예술의 목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람객은 예배하고 싶은 감동을 느낀다.
우리의 일에 긍지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에 한껏 부풀어 오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훌륭한 일을 하게 하셨으나 그 목적은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마 5:16).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교만과 긍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 (2)

 

죄책감과 은혜

 

나는 확고한 율법주의자였다. 나는 죄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강단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8∼10가지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국을 슈퍼마켓처럼 보았다.
나는 내가 천국에 가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로 가득한 카트와 함께 줄을 서서 계산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나는 “많아야 일곱 개”만 찍고 계산대를 쉽게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숙하면서, 나는 내가 죄와 인간의 상태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해왔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단지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려고 기도회에서 고백하는 의식적인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심각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죄인이었으며 심판받아 마땅했다. 
나는 내 죄의 깊이를 내가 거의 맛볼 수 있는 수준까지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의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죄는 하나님이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시는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아버린다.
죄는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죄는 사람들, 특히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친다.
일단 우리 죄의 심각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로 옮길 수 있다. 
나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찬송가 405장)과 같은 찬송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어떤 죄인인지 알았으며,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놀라운지 알았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찬송가 28장)라는 가사도 마찬가지였다.
죄책감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의 성장이 시작된다.

다시 말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롬 5:20).
죄를 깨닫고 그 죄에 대해 정직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 죄에서 돌이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오직 은혜, 과분한 은혜를 통해서만, 그가 행한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죄는 단지 하나님의 규범을 위반하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떻든 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서서 더 많은 죄를 지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구원하신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교만과 긍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 (3)

 

자책과 회개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8-11절에서 죄책감에 대해 생생하게 말한다.
그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 근심”(worldly sorrow)과 회개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Godly sorrow, 경건한 근심)을 대비시킨다.

세상 근심은 자의적인 죄책감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자신에게 가하는 지속적인 형벌이며,
자신의 죄에 대해 인간적인 수준에서 대가를 지불하려는 시도이다.
자의적인 죄책감은 마침내 부정(否定)과 심지어 자멸로 이어진다.
가룟 유다는 이러한 죄책감을 느꼈을 때 자살을 선택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로 이어진다.
이것은 유다가 깨달았듯이 죄의 무서움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하는 죄인은 자신을 자멸로 몰고 가는 대신에 하나님은 은혜로운 용서의 제안으로 눈을 돌린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마 11:28).
그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사 1:18). 
시몬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나 유다처럼 동산으로 가서 스스로 목을 매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갔고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자책과 회개의 본질적인 차이는 인간 중심적인 죄책감이냐 하나님 중심적인 죄책감이냐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가운데 하나가 낙타를 쓰러뜨리는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도를 넘으면 지푸라기 하나 더 얹어도 낙타의 등골이 부러진다”는 속담을 이용한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극단적인 죄를 용서한다는게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가장 악한 죄,
곧 우리를 너무나 당혹스럽게 하며 너무나 큰 죄책감을 안겨주는 특별한 죄까지도 충분히 용서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우리가 그 죄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그분의 용서를 구하며 그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와 성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구원 받는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믿음까지도 행위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 구절을 우리에게 주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구절은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공로로 우리의 죄책감을 제거하신다.
우리의 근심과 믿음 모두 우리의 구원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구원 받는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가? 
수년 전이었다. 나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 친구를 찾아가 내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완전한 헌신으로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때 친구는 나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죄 없이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이 자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을 걸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자네가 죄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지. 자네의 죄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흠집을 내는 게 아니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바로
자네의 죄 때문이니까.”
그때 나는 비로소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깨닫기 시작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영적 메마름에 대한 처방전은? (1)

 

 

기쁨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시편 84편 2절에서, 시인은 기쁨으로 노래한다.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기자처럼 노래할 수 없는 날과 주와 달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우리의 육체는 고사하고 마음마저 기뻐 노래하지 못한다.

사실, 모든 즐거운 느낌이 멀어 보이며,
즐거운 느낌을 가지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보인다.

성경을 읽지만, 성경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앙생활은 공허한 습관이 되어버린다.
기도에 대한 열정이 없다. 성례에도 무관심해진다.
그리스도인의 덕목들이 따분하고 마음에 끌리지도 않는다.

양심은 무감각해지고 무디어진다. 
이처럼 영적으로 메마른 순간이 찾아올 때,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그는 이런 시기에 침묵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 세계는 그의 사랑이 필요하며 그의 사랑을 기대한다.
병든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은 위로받기를 원한다.
상처 입은 자들과 외로운 자들은 이해받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도움을 간절히 바라지만
정작 내 안에는 철저한 공허와
메마름만 느껴질 때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전에 영적 메마름을 느끼는 원인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이런 메마음의 상태를 오래 지속시켜서는 안 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영적 메마름에 대한 처방전은? (2)


영적 메마름의 원인

 

첫째,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분명히 어기고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태도가 영적 메마름을 초래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나의 상담 경험에 비춰볼 때,
영적 메마름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가까이하기를 갈망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는 매우 양심적이고
진지한 그리스도인일 때가 많다.

이들의 문제는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멀리 계시며 자신들을 도우실 수 없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둘째, 영적 영양 결핍과 활동 부족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목적만을 위해, 예를 들면 설교를 준비하거나 성경공부를 준비하거나
특별한 행사의 메시지를 준비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은 육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식사를 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영적 건강에 중요하다.
받는 게 없이 계속 주기만 한다면 결국은 메마르고 말 것이다.
영적 메마름은 다른 사람들을 먹이지 않는 데서도 올 수 있다.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으로 메마른 게 아니라
영적으로 메마르기 때문에 활동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셋째, 과식과 과로 때문이다.
우리는 최고의 종교적 체험을 한 후에 영적 메마름으로 고통당할 때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말씀으로 축복을 받는 수련회나 성경캠프가 끝난 후,
성탄절이나 부활절이나 오순절이 지난 후 갑자기 극한 가난에 빠질 수 있다.
또 영적 과로 때문에 고통당할 수 있다.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기독교에 관한 여러 과정을 가르치고,
몇 번의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몇 번의 설교를 하면서
힘겹게 한 주를 보냈다면 주말이면 마음이 무감각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영적 과로는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예배 자체에 감동이 없어지는 것처럼,
어린 시절에 강요된 종교교육을 받을 경우, 어른이 된 후 영적인 문제들에 무관심해질 수 있다. 

 

넷째,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영은 단일체이다.
따라서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의 원인일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몸을 돌보지 않으면 심리적 건강이 영향을 받고 영적 ‘가뭄’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반면에
인체화학, 기압, 날씨, 물과 대기오염 같은 생물학적 사실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낡은 피아노로도 연주할 수 있다.
그러나 피아노의 음이 맞지 않는다면,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도 자신이 연주하고 싶은 음악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다섯째, 균형 상실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해서 우리가 한 부분을
이루는 창조의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과 휴식 사이의 균형 위에 세워져 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3). 

이런 면에서, 절망적이게도 우리의 삶은 균형을 잃을 때가 많다.
우리는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며 이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에 두신 이러한 리듬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창의적인 영적 능력을 잃을 것이다. 그 결과로 영적 메마름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메마름의 상태를 오래 지속해서는 안 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영적 메마름에 대한 처방전은? (3)

 

영적 메마름의 극복

 

첫째, 용서가 필요하다.


분명한 죄를 범했으며 죄가 그 원인으로 밝혀졌다면
고백과 용서에 대한 새로운 확신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상담자는, 욥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은 죄에 있는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던 친구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훈련과 책임이 필요하다.

영양 부족이 원인이라면,
개인의 경건 생활에 대한 새로운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간접적인 설교와 경건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도 좋으며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경험을 통해 사는 법,
다시 말해, 개인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영적 양식을 스스로
파내는 법을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

하루 중 경건의 시간에 가장 적합한 때를 결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읽기를 위한 지침과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나라에서 특정한 임무를 맡을 필요가 있다.
작은 것이라도 하나의 과제를 성취하는 것은 무기력증에서
비롯된 영적 메마름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금식이 필요하다.
영적 메마름이 과식 때문이라면, 기도를 더 많이 하고,
성경을 더 오래 연구하며, 교회 모임에 더 많이 참석하라고 말하는 것은
당뇨병 환자에게 설탕을 더 많이 먹으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일정 기간의 영적 금식을 처방하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한동안 자신의 경건 생활을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짧게 기도하고, 경건서적을 읽는 것을 삼가고,
교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
영적 양식에 대한 식욕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넷째, 식사 조절과 운동이 필요하다.
신체적인 면을 소홀히 한 경우, 수면과 휴식이 첫 번째 해답이다.
식사도 중요하다. 식사는 비타민을 충분히 포함하고 있는가?
과일과 채소를 더 많이 먹고 하이킹과 수영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소화를 잘 시키며,
햇볕을 쬐는 게 우리의 영적 건강에 설교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섯째, 즐거운 여유가 필요하다.
생활의 새로운 균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일뿐 아니라 스케줄까지 완전히 다시 짜야 할 것이며
생활방식도 바꿔야 할 것이다.

나는 피로를 풀고, 여가를 즐기며, 게임을 할 시간을 내고 있는가?
나는 때로 목적 없이 무엇인가를 하면서 취미에 흠뻑 빠지기도 하는가?
이러한 즐거운 여유가 우리 주님에게는 경건한 심각함보다 더 큰 증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창의력이 되살아나게 하며,
새로운 영적 깊이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줄 것이다. 

루터나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처럼 철저한 종교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영적 메마름의 시기를 헤쳐나가야 했으며,
때로는 절망에 이르기도 했다. 산이 높아야 골짜기가 깊듯이,
이러한 고통의 강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강도와 직접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마름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실제로는 즐겁지 않은데 즐거운 척하면서 영적 메마름을 숨기려 할 필요가 없다. 
나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다른 때에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늘 큰 위로를 받는다.

우리가 이것을 이렇게 본다면,
영적 메마름 때문에 겪는 고통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표시일 것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영적 건강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막에는 새로운 모험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소산을 취케 하시며”(시 107:35-37).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신앙Q&A

부부간의 순결한 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①

 

시추에이션 코미디에서 심각한 드라마와 문학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남자와 여자들은 성적 경험을 좇는다.
우리의 스크린과 마음은 부부관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상상 가능한 모든 결합으로 넘쳐난다. 

성과 결혼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이것과는 날카롭게 대조되고 모순된다.
한 명의 배우자, 혼전순결, 충실과 같은 것들과 그 밖의 성경의 계명들이
자유와 쾌락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에 물든 현대인들에게는
이상하고 고리타분하며 적절치 못해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불분명한 가치관과 얼룩진 원칙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억눌림과 혼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규범과 지침을 따르려는 사람들조차
성의 의미와 행위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부관계(결혼) 안에서 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성이 선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완벽하게 창조하셨으며 이들이 타락하기 전에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하나님이 성을 만드셨고 의도적으로 인간을 성적 존재로 지으셨다. 

둘째, 성을 완전히 즐기고 이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규범과 지침 안에서 성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을 누리며 서로를 누리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성 매뉴얼’을 따를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성뿐 아니라 모든 삶에 적용된다. 

셋째,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성이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sex)은 이 단어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의미로도 ‘궁극적인’ 게 아니다.
혼전순결을 지키지만 성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이들에게 결혼은 실망스러운 게 되어버리며, 이들은 자신과 배우자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된다.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성은 결혼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육체적 결합을 통해, 남편과 아내는 온전한 의미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탐구하며 알 수 있다.
성은 자발적으로 배우자에게 순복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려 노력하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종족을 번식하며, 인간의 생명 곧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잊거나 무시하고 쾌락에만 관심을 가질 때,
아기는 자기중심적인 생활방식의 방해로 여겨지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성적 행위를 꾸짖고 교훈했다(고전 6,7장).
그의 논의의 핵심은 6장 13절이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그리고 18,19절은 이렇게 말한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부부관계 안에서
성을 즐거운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누려야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신앙Q&A  

부부간의 순결한 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②

 

부부관계 안에서의 성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히 13:4). 
이것은 부부관계 안에서의 성은 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뭐든지 괜찮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의 성적 욕구가 세상의 자극을 받으며 우리가 온갖 새로운 자세나 경험을 모방하려 할 때가
너무나 많다. 기억하라. 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성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성적 기교에 대한 떠도는 소문을 따르지 말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 13:4,5). 

사랑은 우리가 누군가로 하여금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 아니다.
사랑은 누군가의 가장 큰 유익을 마음에 두고 그에게 행하는 것이다. 

성을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원할 때 상대방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를 벌하기 위해 그것을 움켜쥐고
주지 않을 수 있다. 성이 이러한 징벌이나 보복의 태도에 이용될 때가 많다.
사랑과 성을 결코 이런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13장과 예수님이 주는 것과 섬기는 것에 관해서 하신 모든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것은 우리가 서로간의 미움과 관계없이 상대에게 굴복하고
자신의 몸을 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먼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에 따르면, 성은 오직 기도와 금식의 목적을 위해서만 억제될 수 있으며
그때도 상호간의 동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전 7:5). 
성은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당신은 배우자가 어떻게 행동하거나 반응하느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을 뿐이며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스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배우자에게 당신의 육체적, 정서적 욕구에 따르라고(또는 성경구절들을 인용해가면서)
강요하지 말라. 다시 말하지만, 사랑이 열쇠이다.
성적 전희는 침실에 들어가기 오래전에 시작된다. 두 사람이 낮 동안에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밤에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배우자가 이 부분에서 정말 문제가 있다면 서로 합심하여 기도하라.
당신은 이 분야에서 훈련받은 크리스천 치료사와 상담할 수 있다.

성이란 우리가 부부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방향으로,
그분의 인도 아래 즐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을 기억하라.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신앙Q&A  

믿음을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1)

 

신자들은 믿음의 양을 측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의 교훈이다.
신앙을 우리의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양으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다.
신앙은 ‘반응’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향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양을 측정하기 위해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하나님에게서
우리 자신에게로 옮겨진다. 신앙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믿음을 늘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우리의 방법으로 신앙을 증가시키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7:20).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활동하실 때 우리가 지극히 작은 반응이라도 보인다면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한 우리의 의지에 지극히 작은 균열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우리가 반응하는 신앙의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겨자씨처럼 작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을 사용하셔서 산을 능히 옮기신다. 
신앙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즉, 그분이 우리를 온전하고 성숙한 상태로 끌어올리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죄는 우리를 산산이 부수고, 우리 삶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창조에서 의도하셨던 균형과 조화를 회복시켜주기를 원하신다.
신앙 성장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가에 비례한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북돋우고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신앙의 양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는
흐트러지고 조각난 삶을 통합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성령님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성령님께 드려야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